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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목차

제89편 정상 인성이 있으려면 최소한 무엇을 갖춰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한 사람을 아이로 여기는 것은 겉모습을 보는 것 말고, 오랜 시간 함께 지냈는데도 계속 그렇게 본다면 다 어떤 원인 때문일까? 매우 잘 아는 사이임에도 너를 아이로 취급하는 원인은 네가 일을 하거나 말을 하는 것이 무게가 없고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를 항상 아이처럼 보는 것이다. 항상 너를 아이로 여기는 것은 그 사람 마음이다. 그 사람이 너를 어떻게 대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은 틀림없이 너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고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외부에서 누가 그 사람에게 억지로 강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주원인은 무엇이겠느냐? 한 방면은 인성이 성숙되지 못한 것이다. 또 다른 한 방면이 있는데, 너는 마음을 쓸 줄 아느냐? (모릅니다.) 마음 쓰는 것을 좋아하느냐? (마음을 들이지 않을 때가 대부분입니다.) 마음을 들이지 않고 마음을 쓸 줄 모른다. 그것이 실정이다. 너는 마음을 쓸 줄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보아라, 20대이지만 믿음직스럽다. 말 한마디를 해도 사람들이 다 귀담아듣고 생각해 본다.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어떻게 사는지를 보아야 한다. 25, 26살이 되었는데도 말을 하면 중시하는 사람이 없고 여전히 아이 취급을 한다면, 그것은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정도 나이가 되었는데도 부모들이 늘 아이로 취급한다면, 자존심이 있는 사람은 보통 다 싫어한다. ‘항상 날 어린애 취급하네? 내 나이가 얼만데 아직도 저런 일로 잔소리하는 거야. 내가 어디 모자란 것도 아니고, 이젠 다 컸어. 딱히 말 안 해도 저런 건 다 알만큼 철이 들었는데.’라고 한다. 이것 보아라, 자녀도 속으로 싫어하는데, 다른 사람은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

사람이 성숙되었다는 표현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일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처신하는 것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너는 이것을 잘 파악하고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몇 가지 방향대로 한다면 사람들이 너를 신뢰할 것이다. 겉면의 것을 배워서 어른인 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꾸민다고 해서 꾸며지는 것이 아니다. 너는 마음 쓰는 법을 배워서 어른처럼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마음에 본연의 일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 마음에 본연의 일이 있고 본연의 일을 하려고 생각한다면 어떤 일들을 부담을 가지고 하게 된다. 부담을 가진 다음 일을 하면 관점이나 하는 말들이 진지해진다. 어떤 말을 진지하다고 할까? 그 말을 들었을 때 ‘음, 일리가 있어. 속에 뭔가 있어, 계획이 있구나.’라고 하는 것이다. 어린애처럼 느닷없이 불쑥 한 마디 내뱉는 그런 말인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이미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다음 그 일이 발생하거나 그런 유형의 일이 임하거나 남들이 그 일을 언급했을 때, 그가 하는 말을 듣고는 ‘이 일이 쟤 마음에 자리 잡혀 있구나. 자리 잡혀 있어.’라고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가 마음으로 본연의 일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말을 해도 무게가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들어보고 ‘음, 일리가 있어.’라고 하면서 그를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어린애들, 진짜 아이가 어른들 앞에 왔다가 그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불쑥 한마디 내뱉으면 어른들은 “애들이 하는 소리지, 애들은 어른들 일을 몰라.”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어른들이 얘기할 때, 애들은 끼어들지 말라고 합니다.) 어른들이 얘기할 때, 애들은 끼어들지 말라고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또 “저쪽 가서 놀아. 애들은 어른들 일 몰라도 돼.”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네가 성인인데도 마음 쓸 줄 모르고 마음 쓰지도 않고, 그쪽으로 알려고도 하지 않고 노력하지도 않는다면, 어른들이 하는 얘기에 따라갈 수 있겠느냐? 어른들, 성인들이 얘기를 하고,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너는 대부분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너는 ‘나와 상관없으니까 또 쉬어야겠어. 어른들끼리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있으니까 난 또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그렇게 또 멍하니 있는다. 그렇지 않으면 좀 뭐하고 놀거나 쉰다. 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해서 네가 얻을 수 있는 게 있을까? 마음에 항상 본연의 일이 없고, 본연의 일 쪽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본연의 일을 잘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존엄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 믿음직스러운 사람, 성숙한 사람으로 대해 주길 바란다면, 너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만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런 걸 알아야 한다. 너희는 어른들이나 점잖은 사람이나 본연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다 어떤 일들에 대해 논의하는지, 속으로 어떤 일들을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고 배워야 한다. 마음은 항상 놀고 있고, 머리는 항상 비어 있고, 혹은 늘 할 만한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한다면, 문제가 된다. 너는 올해 26살이고, 몇 년 지나면 서른 살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여전히 너를 어린애로 취급한다면 사는 것이 얼마나 괴롭겠느냐! 눈 깜짝할 사이에 30살이 된다. 사람들이 늘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이 좋은 일이냐? (나쁜 일입니다.) 어떻게 나쁜 일이냐? (삶에 존엄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항상 애 취급을 받다 보니 시간이 오래되면 익숙해져 버리는 것이다.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정말 자신을 아이로 생각하고, 자신을 잘못 이끌어 가게 되는 것이다. 정말 자신을 어린애처럼 생각한다면 본연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성숙해질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런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마음으로 본연의 일을 생각하고 진리 쪽으로 노력하며, 어른들은 일을 어떻게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일들을 하는지 배워야 합니다.) 같은 나이인데 다른 사람이 너를 많이 보살펴 준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냐? 왜 그렇게 된 것일까? 5~6살짜리 어린애면 어른이 빨래도 해 주고 밥도 먹여 준다. 하지만 10살이 되었는데도 밥을 먹여 준다면, 그것은 어떻게 된 것이냐? 그것은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냐? 그것은 틀림없이 부모가 좀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마 그 아이에게 장애가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관심 받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성인이 되었는데도 늘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문제이다. 나이를 꽤 많이 먹었는데도 자기 자신을 챙기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은 이 아이가 자립하지 못해 만약 혼자 산다면 굶어죽거나 목말라 죽고, 아니면 배 터져 죽거나 얼어 죽거나 병들어 죽을 아이로 본다. 그렇게 계속 다른 사람의 속을 태우고 부모가 늘 걱정을 해야 한다면 그 사람은 반푼이가 아니겠느냐? 반푼이가 어떻게 살아가겠느냐? 계속 자라지 못한다, 그렇지? 그것은 결함이고, 결점이다! 이것은 성정이 어떠하다고 하는 것과 관련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의 추구와 삶의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어떤 관점들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마음에 올바른 일을 담고 있고 본연의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꼭 큰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너희는 마음에 올바른 일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마음도 쓸 줄 알고, 다른 사람을 많이 생각해 줄 줄도 알고, 다른 사람을 많이 도와줄 줄도 알며, 혹은 어떤 일에서 고생할 줄도 알고 어려움이 있으면 극복할 줄도 알고 스스로 해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 성인들과 교제하고 대화하며 마음을 나누고 얘기할 줄 알아야 하고, 어른들과 일처리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점차 성숙해지겠지? 이런 것을 배워야 한다! 온종일 무위도식으로 하루 세끼 배불리 먹고 잠이나 자고, 수중에 있는 고만한 일을 다 완성해서 넘겨 주는 걸로 끝내고 할 거 다 했고 임무 완성했다고 한다면, 그런 정형은 바뀌어야 하지 않겠느냐? (바뀌어야 합니다.) 너희는 이런 상태로 있을 때가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이런 상태에 놓여 있으면 진보가 빠를 수 있겠느냐? 어떤 일에서든 그렇게 소극적이고 피동적이어서 항상 재촉해야 하고 끌어 줘야 한다면 문젯거리가 아니냐! 몇 년이 지나도 발전이 전혀 보이지 않고 변화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른이 와서 대화하려고 할 것 같으면 ‘아, 무서워.’라고 하며 놀라서 쥐처럼 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어 한다. 향상할 엄두조차 못낸다. 어린애를 보기만 하면 좋아한다. ‘아, 꼬마다. 재밌겠다. 쟤랑 같이 놀면서 얘기해야지.’ 하면서 아이들 수준의 말만 하고 아이들이 하는 일만 한다. 어른을 만나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얼굴 내밀 엄두도 내지 못한다. 얼굴 내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어른들과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어쩌다 어른들과 말을 하게 되면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고 손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른다. 이런 것은 다 유치하고 성숙되지 못한 표현이다.

사람이 성숙해지고 자라나는 것은 쉽지 않다. 거기에는 극복해야 할 것들이 있다. 어떤 때는 겁이 나고 나약해서 그렇겠지만 어떤 때에는 사람이 자기를 방종하기 때문이다. 배우기 싫어하고 게을리하면서 ‘지금처럼 이렇게 자유롭게 사니까 너무 좋은데, 그렇게 힘들게 살아서 뭐해? 항상 본연의 일을 해야 하고 성숙해야 하고 자라야 한다는데, 자라면 좋을 게 뭐가 있어? 자라면 짐을 져야 되니 고생이잖아! 아무것도 배울 필요 없어. 지금 앞에 놓여 있는 요만한 일들만 끝내도 아주 좋잖아.’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대충대충 얼렁뚱땅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3~5년이 지났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무엇을 좀 얻었나요?”라고 물으면, “본분을 잘할 수 있게 되었어요.”라고 대답한다. “진짜 본분을 잘할 수 있어요? 그럼 그동안 본분을 하면서 경력(역주: 체험)한 거 교통해 봐요.” “별거 없어요, 그냥 본분을 잘하는 거죠. 게으르지 않고 농땡이를 피우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고, 책망받아도 소극적이 되지 말아야 하는 거죠.” “괴롭고 소극적일 때는 어떻게 하세요?” “하나님께 기도하죠.”, “기도하면서 좀 특별하게 경력한 게 있나요?”, “그냥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거죠. 기도하고 나면 좋아져요. 기분만 좋아지면 되는 거죠.” 이것 보아라, 다 겉면으로 가장 건성건성 하는 말이 아니냐? 만약 항상 요만한 경력밖에 없다면 그것은 자라지 못한 게 아니냐? 성숙되지 못한 것이 아니냐? 너희들은 다 이러한 정형에 있지 않으냐? (맞습니다.) 늘 이런 정형에 놓여 있는데, 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느냐?

지금 너희는 어른스럽게 대화를 좀 나눌 수 있느냐? 어른들을 만나면 대화가 되느냐? 너희 엄마하고는 대화할 줄 아느냐? 너희는 대화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마음속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속 말을 하는 것 외에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현실 생활에서 어떤 고충이나 어려움이나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서로 교통을 합니다.) 그러면 서로 교통을 하다가 할 말이 그렇게 많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그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할 말이 없다. 너희는 대화를 할 줄 모른다. 대화를 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내가 말해 주겠는데, 어떤 때 어른들의 마음속 말과 할 얘기는 사실 아이들보다 훨씬 많다. 그럼 왜 어른들은 아이들과 말할 때 어른들의 얘기를 말하지 않느냐?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아이들이 진짜 알아듣지 못할까? 아이들의 어떤 표현 때문에 어른들은 그런 착각을 하게 되느냐? 내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대부분의 경우, 어른들은 아이들과 어른들의 말을 할 때,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지를 모른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표현을 본다. 일단 어른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아이는 가버리거나 놀러 나간다. 그러면 어른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면서 아이와 말하지 않는다. 또 하나, 어른들의 얘기를 좀 하고 올바른 일을 좀 얘기하면 아이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외면하고 무관심하거나 아니면 게임을 하러 가고, 아니면 자기 할 일을 하러 가거나 숨어 버린다. 그러면 어른들은 말을 안 하게 되지 않느냐? (맞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어른들은 아이들을 봐도 할 말이 없어진다. 그게 아니면 아이에게 “오늘 뭐 먹고 싶어? 엄마가 해 줄게, 어서 먹어, 어서 마셔.”라는 말만 하게 된다. 기껏해야 이런 말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 말 잘 들어야 돼. 좋은 거 배우고 나쁜 건 배우지 마. 게임 하지 말고, 컴퓨터도 좀 적게 하고. 그러다가 눈 나빠진다. 밤에 일찍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돼. 음식 투정 하면 안 되고, 편식하면 안 돼, 건강에 좋은 거 먹어야지 건강에 안 좋은 거 먹으면 안 돼. 짠 음식 적게 먹고, 기름진 음식도 적게 먹고 육류도 적게 먹어야 돼, 그런 거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아! 운동을 많이 해야 돼! 놀아도 좋은 애들이랑 어울려. 나쁜 사람 만나면 아무 말이나 하지 말고, 어른들을 만나면 예의가 있어야 돼!”라고 이것저것 잔소리를 한다. 이런 것뿐이다. 입에 달고 사는 이런 입버릇, 잔소리는 결코 대화가 아니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애들이 들으려고 할까? 어른들이 하는 이런 말에는 중요한 것이 없다. 그래서 애들도 듣기 싫어한다. 항상 아이를 누르고 단속하면서 손에 잡고 있는 인형처럼 지나치게 사랑하고 응석받이로 키운다면 아이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한 방면으로는 어른들이 대화할 줄 모르는 것이고, 다른 한 방면은 어른들이 한창 말하고 있을 때 아이가 너무 반응이 없고 적극적인 태도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둘 사이의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 아이는 ‘난 부모와 언제나 할 말이 없어.’라고 하고, 부모는 ‘쟤가 예전같지 않아. 이제는 다 커서 속으로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겠어. 나하고 마음속 말을 하지도 않아, 나하고 전혀 대화가 없고 할 말도 없어. 집에 돌아오면 컴퓨터 앞에만 콕 박혀 있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어, 도통 얘기를 안 하려고 해.’라고 한다. 아이도 고집불통이고 부모도 고집불통이고 서로 대화할 줄 모른다. 이런 것은 정상 인성일까? (아닙니다.) 뭐가 문제일까? 누구의 잘못이냐? (아이의 잘못입니다.) 그렇다고? (어른들 잘못입니다.) 어른의 잘못이라고? 어른에게 문제가 있어서 아이를 잘못 키우다 보니 아이는 듣기 싫어하게 되고, 아이가 말을 잘 듣지 않고 반항적이다 보니 어른은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아이와 말하기 싫어하게 된다. 한쪽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누구의 잘못이냐? (양쪽에 다 문제가 있습니다.) 맞다, 양쪽에 다 문제가 있다. 인성이 다 비정상이기 때문에 ‘대화’라는 것이 생길 수 없다.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고생스럽게 키웠다. 아기 때부터 키워 오면서 계속 잔소리를 하면서 보살펴 보살펴 주고 다 클 때까지 돌봐 주었다. 다 큰 다음에도 부모가 생각하는 그 시간적 관념은 어떤 것이냐? 20년이 되었든, 30년이 되었든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태도는 자녀가 금방 태어났을 때 대해 주던 태도와 여전히 같은 것이다. 태도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사실, 아이는 벌써 다 컸다. 사상, 심리 상태, 식견, 관점, 이런 것들이 벌써 확립됐고 이미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늘 그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늘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항상 방금 태어났을 때의 아이처럼 생각하면서 아이와 대화를 하고 교제를 한다. 그럼 아이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느냐? 부모가 잔소리를 하면 싫어하고 가까이 가지 않고 피한다. ‘잔소리 안 하면 좋겠어.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얼마나 자유로워.’라고 생각하면서 대화할 줄 모른다. 기회를 찾아 대화할 줄 모른다. 부모가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마음속 말을 할 줄 모른다. 자신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런 생각에는 문제가 없는지, 치우치거나 그릇되지는 않았는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런 일을 했을 때, 무슨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지, 이런 것을 얘기할 줄 모른다. 이렇게 아이는 속에 담아 두기만 하고 잠자코 있으면서 말하지 않는다.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줄 모른다. 결국 두 세대는 그렇게 계속 대치하게 된다. 그렇게 서로 대치하고 있는데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없습니다.) 소통이 생길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하다. 부모에게 그 어떤 보살핌과 심령의 양육이나 도움을 받지 못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것까지 포함해 부모들은 다 어떤 말을 하느냐? 어떤 교육을 하느냐? “잘 믿어야 돼,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가. 나중에 엄마는 들어갔는데, 너만 버려지면 얼마나 불쌍하겠니, 내 자식이니까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엄마도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성경에도 얘기했잖니.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고, 둘이 지붕에서 일하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너는 버려지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해, 우린 하나님 나라에 같이 들어가야지. 그러니 잘 믿어야 해, 그분들이 말하는 대로 따르면 돼.”라고 한다. 다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느냐? (맞습니다.) 늘 “넌 말을 안 듣는구나. 난 너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야. 근데, 너는 맨날 내 말을 안 듣는구나.”라고 하면서 대화할 줄 모른다, 그렇지?

그럼 어떻게 대화해야 대화할 줄 아는 것이냐? 너희들은 총결해 보았느냐? ‘난 도무지 부모와 대화가 안 돼. 부모도 나와 대화가 안 돼. 부모는 다른 사람과는 대화가 잘 되는 것 같은데, 그것도 아주 잘되는 것 같아. 그런데 나한테만 오면 달라. 나와 말하려고 해도 할 말이 없어. 나한테는 항상 막 대하고, 톡톡 쏘아붙이고, 소리 지르고 잔소리를 해, 난 아예 듣고 싶지 않아.’라고 하는데, 너희는 총결해 본 적이 있느냐?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얘기해 본 적이 없다, 그렇지? (네, 전 평소에 말을 아주 적게 해서요.) 말이 적은 것은 좋은 일은 아니다. 말이 적은 것은 생각이 적다는 것을 증명한다. 너는 잠재의식 속에 있는 것을 생각으로 바꾸고, 그걸 꺼내서 생각해 보고 네 부모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나누면서 얘기를 해야 한다. 너는 대화하는 법, 말하는 법,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말로 생각을 표현하고 말로 마음을 표현하고 마음의 소리를 표현해야 한다. 그다음 다른 사람에게 또 새로운 정보나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너는 점점 풍부해지지 않겠느냐? 너는 자신의 부모를 평범한 친구나 알고 지내는 형제자매처럼 대해 주고 같이 지내야 한다. 그러면 관계가 정상이 되고, 정상이 되면 너는 부모와 할 얘기가 생긴다. 너는 항상 ‘에휴, 나하고 엄마(아빠)는 너무 잘 알지. 그동안 말해 봤지만 다 거기서 거기야, 입만 열면 그냥 그 얘기들 뿐이야. 나보고 그대로 외우라고 해도 다 외울 수 있어.’ 이렇게 생각하지 말라. 너는 부모를 이런 관점으로 대하지 말고, 이런 방식으로 대하지 말라. 네가 몰라서 그렇지, 사실 부모의 마음속에는 그 몇 마디를 빼고도 할 말이 아주 많다. 네가 부모와 대화를 하지 않으면 그것을 영원히 얻지 못한다. 너는 부모에게 자신이 성인처럼 보이도록 노력해야 하고, 부모를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너의 태도로 부모의 호감을 얻어 부모가 너를 성인으로 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너희의 행동은 성숙해져야 하고 노련해져야 하고 어른스러워야 한다. 너는 항상 맞서기 때문에 부모를 보면 할 말이 없고, 부모가 말을 꺼내거나 잔소리를 하면 우거지상을 한다. 그러면 부모는 ‘저 아이는 변할 수 없구나, 그냥 저 모양이겠구나. 평생을 가도 소통할 방법이 없을 것 같아.’라고 하면서 할 말이 없어지고 대화할 수가 없다고 본다. 이렇게 너의 태도가 변하지 않고 부모의 태도도 변하지 않다 보니 그런 상황을 돌려세울 방법이 없다. 너는 주동적으로 변화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세를 낮추고 고집 부리지 말고 부모에게 대항하지 말라. 너는 계속 ‘난 엄마(아빠)의 자식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끝나는 것이다. 네가 그런 입장에 서서 무엇을 한다면 그 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너는 그런 태도를 내려놓아야 하고, 바꿔야 한다. 태도를 바꿔야 한다. 네가 부모를 보통 형제자매처럼, 평범한 형제자매처럼 대하면서 같이 지낸다면 부모의 태도가 어떨까? 태도가 틀림없이 달라질 것이다. 부모가 봤을 때 ‘저 아이가 다 컸구나, 두어 마디 해도 받아들이고, 말도 하게 하는구나. 게다가 자기가 이런 일에서 어떻게 경력했는지까지 교통하네.’라고 할 것이다. 봐라, 이게 얼마나 좋으냐. 이러면 다 자란 것이 아니냐? 부모는 네가 다 자란 것을 보고 마음을 놓는다. 부모가 너를 어리다고 생각했던 것, 네가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부모가 걱정했던 것 같은 그런 많은 일들에서 부모는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 너에게 잔소리하지 않으면 네가 승리한 게 아니냐? 너희는 부모의 잔소리를 이겨 낼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 그래도 너희에게 방법이 없었는데, 내가 알려 준 이 방법이 어떠냐? (좋습니다.) 너는 태도를 바꿔야 한다. 네가 태도를 바꾸는 목적은 부모에게 네가 컸고 성숙했고 생각이 있고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한 방면이다. 다른 한 방면은 너에 대한 부모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게 노력해야 한다. 네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너에게 부족한 것이 뭐가 있는지, 너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네가 왜 괴로워하고 왜 기뻐하는지, 이런 것들을 부모가 알 수 있게 해야 하며, 어떤 일을 하더라도 부모를 피하지 말아야 한다. 너는 자신에게 정상 인성에 있어야 할 이지(理智)와 태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있다는 것을 부모에게 보여 줘야 하고, 부모가 네게서 뭔가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아, 저 아이가 다 컸구나, 이젠 말도 제법 어른스럽게 하는구나. 부모를 대하는 태도도 대꾸하는 게 아니고, 불쾌한 표정을 짓거나 손을 뿌리친다거나 입을 삐죽거린다거나 우거지상을 하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하게 된다. 그런 표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두어 마디 말해도 다 듣고, 그다음 먼저 나서서 부모와 대화를 한다. 그러면 부모는 그 대화에서 유익을 얻게 되고 많은 도움을 얻게 된다. 이러면 얼마나 좋으냐!

만약 부모가 자녀들을 대할 때 항상 높은 자리에 서서 “난 네 아빠(난 네 엄마)야! 넌 반드시 내 말을 들어야 해.”라고 말한다면, 이 ‘반드시’에서 자녀들은 반감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전혀 정상 인성의 표현이 아니다. 반대로 부모에 대한 자녀의 태도는 어떠냐? ‘흥, 나한테 잔소리하는 것밖에 더 있어? 듣기 싫어!’라고 하는 이런 태도는 어떠냐? ‘맨날 맨날 단속해, 내가 다 컸는데도 계속 단속하려고 하네.’ 이런 태도는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또 하나, 어떤 자녀들은 항상 어떻게 생각하느냐? ‘난 엄마(아빠) 자녀야. 그래서 나한테 뭘 해 주든 다 당연한 거야. 날 위해 돈 쓰는 것도 당연하고, 나한테 먹을 거 해 주는 것도 당연하고, 내가 아플 때 보살펴 주는 것도 당연한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떤 태도이냐? 정상 인성이 맞느냐? 항상 뭐든지 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러면 부모가 괴로워한다! 그런 걸 보면서 ‘내가 뭘 해 줘도 너는 항상 당연하게 생각하는구나. 항상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 보니까 아직 철이 없구나!’라며 부모는 괴로워한다. 부모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든, 자녀를 위해 얼마나 마음을 쓰든, 자녀 쪽에서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항상 그것은 부모로서 당연한 것이고, 부모는 괴로움이나 아픔을 모르고 고통이나 슬픔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다 정상 인성이 아니다. 만약 양쪽이 정상 인성에 따라 살면서 거기에 진리가 있는 수준에까지 올라가 다 정상 인성의 각도에 서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상대방의 어려움을 고려해 주며 다 평등한 위치에 서서 함께 지내고 대화를 나누고 일을 한다면, 그 둘 사이에는 장벽이 생기지 않겠지? 이방인이 말하는 세대 차이는 어떻게 생기는 것이냐? 윗사람은 늘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그렇게 하는 걸 싫어하니까 장벽이 생기는 것이 아니냐? 그 장벽이 생기고 세대 차이가 생기는 것은 이렇게 생긴 것이 아니냐? 부모는 늘 지위를 내려놓고 자녀는 항상 부모와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부모를 지심인(知心人)으로 생각한다면 양자간에 그래도 장벽이 있을까? (없습니다.) 특히 부모는 항상 자녀를 노예로 취급하거나 고양이나 강아지처럼 보듬어 주고, 오냐오냐 하고 지나치게 사랑해 주면서, 동시에 늘 꼭 잡고 있고 묶어 두고 항상 단속하는데, 그것도 엄격하게 단속을 한다. 결국 그렇게 한 결과는 자녀가 자녀 같지 않고 부모는 부모대로 부모 노릇을 하기 힘들어 진다. 그렇게 돼도 싸지 않으냐? 너는 그런 부모에게 두 글자를 선물하면 된다. “왜 힘들어할까요? 왜 슬퍼할까요? 왜 자녀가 말을 안 들을까요? 왜 아빠(엄마)가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자식은 전혀 이해해 주지 않을까요?” 너는 부모에게 두 글자를 선물하면 된다. 어떤 두 글자냐? (‘싸다’입니다.) 앞으로 너희는 부모에게 “그래도 싸지요, 뭐.”라고 말해 주면 어떻겠느냐? 그렇게 말하면 되느냐?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이 일을 해부해 보자. 사실, 그건 사람의 자업자득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겉보기에는 아주 영적인 것 같지만,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일이나 자녀가 부모를 대하는 일의 관점과 태도 면에서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 어떤 원칙을 적용하여 그 일을 대하고 처리해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들은 모르고 있다. 왜 그럴까? 부모는 영원히 부모이고 부모가 보기에 자녀는 영원히 자녀라는 이런 관계 때문에,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해결하기 어렵게 되었고, 함께 지내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것은 부모가 항상 부모의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고, 항상 부모의 자리를 차지하고 거기에서 내려오지 않기 때문에 자녀들은 부모와 틀어지는 것이다. 많은 일에서 그것은 사실, 부모가 늘 부모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항상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항상 자신을 부모나 윗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때든 너는 엄마(아빠)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어. 너는 언제든 내 말을 들어야 해. 언제나 너는 내 자식이고 내 아이야. 이 사실은 어디까지나 변하지 않아.’라는 이 관점으로 부모들은 아주 고생을 하고 아주 비참하게 되며, 자녀까지도 아주 고생시키고 아주 힘들게 만든다. 그런 것이 아니냐? 그것은 사람이 진리를 모르는 표현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런 일에서는 진리를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자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무엇을 내려놓는다는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부모 노릇을 하지 말라고 하면, 난 앞으로 돈을 벌지 않을 거야. 이제부터 너 혼자 힘으로 살아라. 난 너에 대해 아무것도 관여하지 않을 거야! 난 책임이 없어.”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것이 내려놓는 것이냐? “앞으로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한테 물어봐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난 부모도 아니고 평범한 형제자매인데 널 상관해서 뭐하겠니?”라고 하는 것이 내려놓는 것이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너에게 잔소리하지 않을 거고, 뭘 봐도 말하지 않을 거고, 뭘 알아도 말하지 않겠다. 난 내 걱정만 하고 네 걱정은 하지 않을 거다.” 이러면 내려놓은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내려놓는다’는 이 말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느냐? 어떤 원칙으로 해야만 내려놓는 것이냐? 이 일을 어떤 관점과 태도로 대해야만 진정으로 내려놓는 것이냐? ‘내려놓는다’는 것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알고 있느냐? 이것에 대해 교통해 보자. 부모가 되어 보지 않으면 부모의 태도가 무엇인지 모르고 부모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지? 이런 일은 사실 간단하다. 너희는 다 자녀들이고 부모가 된 적이 없지만 사실 간단한 것이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녀를 대하고 자기 가족을 대하는 것도 일반 형제자매를 대하는 것과 같이 하면 된다. 비록 책임감이 있고 혈육 관계가 있지만, 서는 위치와 입장이 친구나 일반 형제자매와 같으면 된다. 그들과 같으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 속박을 주면 안 되고 단속하면 안 되며, 늘 자녀의 모든 것을 장악하려고 하고 통제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자녀가 실수하는 것, 말을 잘못하는 것, 유치하고 미숙한 일을 하거나 우매한 일을 하는 것은 용납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차분하게 앉아서 대화하고 이야기하고 교통하며 찾고 구해야 한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되지 않느냐? 이렇게 하면 바로잡히지 않느냐? 여기에서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지위와 신분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바로 부모의 그 지위를 내려놓고 부모의 자세를 내려놓는 것이다. 부모에게 있어서는 자식에 대한 그 모든 책임, 즉 스스로 당연하게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책임,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려놓고 일반 형제자매로서의 책임을 다하면 된다. 부모의 자세와 지위, 신분을 내려놓으면 된다. 이것은 쉽게 할 수 있느냐? (쉽지 않습니다.) 왜 쉽지 않으냐? (지불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는 내가 낳았고 또 내가 키웠으니 당연하게 단속하고 교육해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맞다, 다른 사람은 단속하려고 해도 자격이 없다. 다른 사람은 자신을 단속하지 못하게 하거니와 관계할 수도 없고 감히 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할 방법도 없다. 겨우 부모의 지위를 얻었는데, 한평생 차지하지 않고 될까? 겨우 단속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 얻었는데, 끝까지 단속하지 않고 되겠느냐? 또 하나,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모는 뭘 해도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해도 아이를 위한 것이면 잘못이 없다.’라는 이런 사상 관점도 있는 것이다. 부모라고 어떻게 잘못이 없겠느냐! 똑같은 패괴된 인류인데, 어떻게 잘못이 없겠느냐! 뭘 보고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느냐? 일단 자신을 진리가 없는 패괴된 인류로 인정한다면 네게도 잘못이 있고, 너도 실수를 할 수 있다. 너도 실수를 할 수 있는데, 왜 사사건건 어디서나 다른 사람을 단속하고 자녀를 단속하면서 모든 일에서 자녀에게 네 말을 듣게 하느냐? 그것은 교만한 성정이 아니냐? 그것은 교만한 성정이고 흉악한 성정이다.

부모가 어떤 방식으로 그 지위에 서든지, 어떤 일을 했든지, 어떤 일로 잔소리를 했든지, 어떻게 단속하려고 하든지, 어떤 방식으로 자식을 엄하게 단속하려고 하든지, 결론적으로 그의 출발점은 하나이다. 바로 자식에게 절대적으로 부모의 말을 따르고, 부모의 말대로 살고, 부모의 말대로 하라는 것인데, 그래야 한 치의 착오도 없을 것이고, 자녀가 안전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부모는 이런 목표를 갖고 있다. 이런 방식은 정당한 것이냐? 부모의 각도나 정감상으로 보면 그것이 정당하겠지만 진리의 각도에서 보면 정당할까?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 일을 하는 자체가 이성이 없는 것이고, 진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성이 없으면 틀림없이 진리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정감에 근거하여 사람의 상상이나 취향, 사람 자신의 욕망이나 사심과 같은 이런 것에 근거해 한 것이다. 그 동기와 근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그렇게 한 결과는 어떤 것이냐? 그 결과로 초래되는 것은 어떤 것이냐?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게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긍정적인 역할이 없겠어요? 엄마가 저를 돌봐 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클 수 있었겠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디 가서 넘어졌거나 부딪혔을지도 몰라요.”라고 말할 것이다. 너의 육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는 것은 부모의 책임이다. 그것은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이고, 최소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어떤 방면에서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냐? (사상 방면입니다.) 사상 교육, 긍정적인 것으로 인도하는 방면에서 아무런 적극적인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네가 이렇게 자라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너는 부모에게서 무엇을 깨닫게 되었느냐? 하나님을 믿는 일에 관해, 진리에 관해 네가 부모에게서 얻은 것은 어떤 것이 있느냐? 수확이 조금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없다고 할 수 있다. 제로다! 너의 부모가 너를 데리고 하나님을 믿은 그날부터, 너는 부모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나 하나님을 믿는 방면의 진리에 대한 인식을 조금도 얻지 못했다. 부모에게서 얻은 것은 제로다. 제로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마이너스일 수도 있다. 마이너스란 무엇을 말하느냐? 어쩌면 부모가 너에게 관념적인 것, 상상적인 것, 사람의 뜻에 의한 것들을 주입시켰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너에게 복받으라는 의미에서 본분을 잘하라고 하는데, 그러면 앞으로 큰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은 부모가 주입시킨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그런 각도에서 말하면, 부모가 너에게 준 것은 무엇이냐? (잘못된 것이고, 부정적인 것입니다.) 잘못된 것이고 부정적인 것이다. 어쨌든 긍정적인 것은 아니고, 진리에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사람 마음속에 심어 주는 처세 철학이나 얄팍한 수단이나 손해 보지 않는 철학 같은 것들 외에 뭐가 있느냐? 기껏해야 좀 나은 부모들은 식견이 있고, 지식 수준이 있기 때문에 너에게 지식과 문화에 관한 것들을 주입시킨다. 또 생활 상식의 문제도 있다. 기껏해야 그런 것들이고 다른 것은 없다. 이것이 바로 네가 20대로 자랄 때까지 부모가 해야 할 책임이다. 너희가 얻은 것은 이런 것뿐이다. 그렇지? 좀 나은 부모는 너를 지금까지 키워 주면서 너에게 건강한 몸을 주었다. 어떤 가정은 여건이 좋지 않은 데다가, 부모가 자식을 살뜰하게 보살피지 않아 아이가 체력도 좋지 않다. 감기도 자주 걸리고 체질도 약하다. 또 어떤 아이들은 어릴 때 어디에 박거나 부딪혀서 불구가 되었다. 부모는 겨우 이만한 책임밖에 지는 게 없다. 이만한 책임을 져 주고도 한평생 부모의 폼을 잡으면서 자식을 단속하려고 하고, 자식에게 자신을 위해 한평생 충성하라고 한다. 사람에게는 또 이런 욕망과 생각이 있다. 지금은 하나님을 믿었으니 망정이지,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면 어떻겠느냐? 일반적으로 부모들은 평생 자식을 끼고 살면서 묶어 두고 싶어 한다. 하나님을 믿은 후에는 “전 자식을 하나님께 바쳤어요. 제 아이를 하나님께 바쳤으니까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라고 해야죠.”라고 말한다. 그게 어디 부모가 바친 것이냐?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런 말을 들으면 웃기지 않느냐? (웃깁니다.) 어떻게 웃기느냐? 하나님이 너를 네 부모에게 20년 동안 맡겨 놓은 것인데, 20년 후에 네가 자라 본분을 할 때가 되니 너를 하나님께 바쳤다고 한다. 네가 부모에게 속하지도 않고 부모에게서 온 것도 아닌데, 부모는 너를 하나님께 바쳤다고 한다. 이 말은 듣기에 웃기는 것 말고 또 어떤 느낌이 드느냐? 부모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아주 무식한 것이 아니냐? 무식한 사람이 한 말은 들어도 합리적이지 않고, 사람을 낯 뜨겁게 만드는데, ‘어떻게 그게 날 하나님께 바친 거지? 그게 엄마(아빠)가 바친 거라고 할 수 있어? 내가 하나님께 바쳐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걸 엄마(아빠)가 바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설마 바치지 않았으면, 나는 본분을 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설마 바치지 않았으면, 나는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말아야 된다는 거야? 나는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야? 피조물의 본분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야?’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모들이 그런 말을 한 다음에 이런 것들을 의식할 수 있느냐? (못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뿌듯해하면서 ‘나를 봐! 믿음이 얼마나 크고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난 자식을 하나님께 바쳤어. 아브라함이 당시에 이삭을 바친 것과 같은 거야. 이건 의로운 거야!’라고 한다. 여기 양자간에 관련되는 부분이 있느냐? 같으냐?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 다르다는 것은 아는데, 어떻게 다른지는 모른다. 그렇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뭘 바친 것이냐? 무엇으로 바쳤느냐? (제물로 바쳤습니다.) 제물로 바쳤다. 그럼 오늘날 부모들이 너희를 하나님 집에 바친 것은 어떤 경우이냐? 무엇으로 바친 것이냐? 밖에서 나쁜 것을 배우지 말라고 하나님 집에 맡긴 것이다. 하나님 집을 인큐베이터, 안전지대, 피난처로 여겨 이곳으로 피난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같을 수 있을까? 다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은 그 사람을, 그 목숨을 하나님께 바친 것이고, 하나님께 돌려 드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이의 목숨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사람을 통째로 포기한 것이다.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려고 하니 가질 수가 없어 하나님께 바친 것이다. 제물로 바친 것이다. 지금 너희 부모들이 너희를 하나님께 바쳤다는 개념은 어떤 것이냐? (와서 복받으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복을 누리라고 여기로 보냈고, 복을 받으라고 여기로 보낸 것이다. 너희를 죽지 않게 하려고, 너희의 목숨을 보존시키려고 여기로 보낸 것이지, 너희의 목숨을 하나님께 바친 것이 아니고, 너희를 하나님께 바친 것이 아니다. 반대로 너희가 멸망으로 가지 말고 여기에서 목숨을 보존하라고 보낸 것이다. 이렇게 바치는 것은 방식이 다른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일에 대해 정확한 표현, 정확한 진리로 말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에게는 그런 의(義)를 행할 믿음이 없거니와 이기심도 매우 크다. 또 하나는, 자식들도 멀쩡한 사람이어서 스스로 독립적인 생각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으면 그 본인에게도 주관적 의식이 있어 주관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 바쳐야 할 필요가 있느냐? (없습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다 큰 사람이기에 부모가 바칠 필요가 없다. 자식에게도 선택이 있다. 자식도 하나님 앞에서는 마찬가지로 피조물이다. 자식에게도 하나님의 이끄심과 하나님의 인도가 있고, 하나님이 맡겨 준 부탁이 있으며, 자신의 본분도 있다. 자식은 본분하기를 선택하고, 하나님 집에서 화비하는 걸 선택할 수 있으므로, 부모의 동의를 거칠 필요가 없고, 부모라는 그 관문을 거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바칠 필요가 있다거나 없다는 이런 절차 없이 본분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하나님께 바쳤다’라고 하는 이런 말은 듣기에 어떠하냐? (무지해 보입니다.) 무지하고, 서글프고, 거짓되고, 허위적이다, 그렇지?

앞으로 부모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되면 너는 어떻게 얘기해야 할까? 너는 먼저 “무슨 말이에요? 이지도 없네요! 그게 엄마(아빠)가 할 소리예요? 그게 엄마(아빠)가 바친 거예요? 그건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거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거예요! 그건 다 하나님께서 주재하신 거라고요. 엄마(아빠)가 바치지 않으면 제가 본분을 못하기라도 한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식한 말밖에 할 줄 모르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네요. 제 얼굴이 다 뜨거워져요.”라는 식으로 얘기하면 어떨까? 이렇게 말하면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부모가 듣고 “어, 본분을 하더니 진리를 깨달았네. 그게 맞는 말이야.”라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없습니다.) 그럼 이런 일은 어떻게 말해야 하느냐? (정상적으로 교통해야 합니다. 평온한 마음과 온화한 태도로 이 방면의 진리에 대해 말해야 하고, 밝혀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교통해 주신 이 방면의 진리를 교통해야 합니다.) 봐라, 내가 방금 너희에게 어떻게 얘기했느냐? 내가 그런 식으로 너희를 교훈했었느냐? (아닙니다.) 나는 너희에게 어떤 식으로 얘기했지? (평온한 마음과 온화한 태도로 교통하시면서 이끌어 주셨습니다.) 나는 이 일에서 너희에게 이 속에 있는 진리를 깨달아 어떤 오해도 하지 말고, 이지 없는 일을 하지 말고, 이지 없는 말을 하지 말라고 분명하게 얘기해 주었다. 진리를 깨달으면 진리대로 실행하면 된다. 계속 실행하다 보면 정확해진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게 될 것이며, 사람의 관점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런 식으로 대화할 줄 아느냐? 이런 일이 임했을 때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면, 너는 생각해 봐야 한다. ‘아, 이 일에서 저 사람은 아직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구나. 거기다 이지 없는 말도 하는구나. 여기에 대해 교통을 해야겠어. 저 사람이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고 알아들을 수 있게, 더 이상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게, 더 이상 이지 없는 일을 하지 않게 얘기해 줘야 하니까 생각도 좀 해 보고 할 말도 준비해야겠어! 이 방면의 진리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교통을 해야겠어. 난 여기에 부담을 가져야 해.’라며 기회를 찾아 얘기를 나누어 봐야 한다. 시간도 되고 다들 기분도 괜찮아 보일 때, 같이 앉아서 하나님 말씀을 한 단락 먹고 마신 다음 얘기를 시작하면 된다. “이지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가 평소에 뭘 하지 않을 때에는 자신이 정말 이지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일단 일을 하게 되면 이지가 없어요. 이지가 없다는 건 뭘 말할까요? 바로 자기가 했던 일이나 했던 말이 진리에 맞지 않고, 피조물의 각도에 서지 않고, 항상 높은 위치에 서며, 늘 자기 자랑을 하고, 허위적인 일만 하는 거잖아요. 그리고 사실은 그렇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미화시켜서 우러러보게 만드는 거잖아요. 예를 들면, 자식이 본분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고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봐라, 이렇게 화제라는 것은 얘기를 하다 보면 여기까지 전환되어 온다. “그 일은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그 방면의 진리는 어떻게 깨달아야 이지 있게 행할 수 있을까요?”라며 얘기하면 이 부분까지 올 수 있지 않으냐? (네.) 그럼 그 뒷말은 너희가 이을 수 있겠지? 너희에게 가르쳐 준 것도 말할 줄 모른다면 정말 모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모자란다고 할 수 없다. 지금은 그저 깨닫지 못한 것이다.

보아라, 진리를 교통하고, 마음속 말을 해서 어떤 일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명확하게 설명해 줌으로 사람을 도와주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유익을 얻게 하고, 오해와 그릇된 해석에서 나오게 하는 일에 있어 높은 위치에 서서 말할 필요가 있느냐? 훈계하는 어투로 말할 필요가 있느냐? 훈계할 필요가 없고, 큰소리칠 필요도 없으며, 소리 지를 필요도 없다. 딱딱한 단어나 말투나 어조를 사용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정상적인 톤으로 정상 사람의 위치와 자리에 서서 얘기하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평온한 마음과 온화한 태도로 마음속 말을 하며, 네가 깨달은 것과 상대방이 깨달아야 할 것과 네가 마음속으로 알고 있는 것을 다 털어놓으며 분명하게 말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도록 해야 한다. 분명하게 설명하면 상대방이 깨닫게 되어 너의 부담도 해결되고, 상대방도 오해하지 않게 되고, 너도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그러면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이런 일을 비위가 상하게 비틀어 말할 필요가 있느냐?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강제로 주입시킬 필요가 없다. 만약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일들은 진리가 맞고, 사실도 그렇다. 그렇다고 네가 말하면 바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닙니다.) 그럼 상대방이 받아들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변화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과정이 필요합니다.) 과정이 필요하다. 너는 상대방에게 변화될 과정을 줘야 한다. ‘어제 얘기했는데, 어떻게 오늘 또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고 아무리 말해도 기억을 못하네. 늙긴 늙었나 보다. 못났어, 정말.’ 이런 말은 어떠냐? (좋지 않습니다.) 이런 자식은 어떠냐? (더 이지 없습니다.) 자신의 부모를 이지 없다고 말하는데, 네가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떠냐? 부모가 수긍할까? 너는 부모에게 한 번 말하고는 변화되라고 하는데, 그럼 너는 몇 번 듣고 변화되었느냐? 너도 한 번 듣고 변화받은 게 아니고, 또한 한 번에 알아듣고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도 부모에게 변화되는 과정을 허락해야 한다. 너는 부모에게 알려 줘야 한다. 너는 “사실 이건 간단한 거예요. 자꾸 자신을 제 부모로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제 자신을 엄마(아빠)의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 둘은 그냥 일반 형제자매 관계예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참지 말고 속에 두지도 말고 제게 얘기하세요. 비웃지 않을게요. 저에게도 보이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구요. 엄마(아빠)도 깨달은 게 있으면 저에게 알려 주세요. 저도 잘 실행하고 치우친 길로 가지 않게 말이에요.”라며 상의하는 식으로 가야 한다. 이런 것을 뭐라고 하느냐?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대화한다고 한다. 대화를 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대화를 잘 나눠야 하는 목적은 부모와 자식 간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위한 것이냐? 내가 알려 주는데, 대화를 하는 목적은 작은 방면으로 말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상 인성의 소통이 있고, 서로의 마음에 있는 말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작은 방면이다. 큰 방면으로 말하면, 서로의 정형을 알아보면서 장점은 배우고 단점은 보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그것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서로를 잡아 주고 도와주는 효과를 보기 위한 것이다. 그런 효과가 있으면, 사람과 사람이 정상적인 관계로 지내게 되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능력 있고 총명하고 재능이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스스로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고, 어디까지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사람을 보면 자신의 등에도 손이 닿지 않는 부분이 있지 않느냐? 등이 가려우면 보통 혼자 긁느냐, 엄마 아빠에게 긁어 달라고 하느냐? 저녁에 가려운 곳이 있으면 “엄마, 빨리 여기 좀 긁어 줘.”라고 말한다. 이런 게 가장 솔직한 말이고 속에 있는 말이다. 스스로 닿지 않는 부분은 늘 다른 사람이 잡아 주고 협조해 줘야 한다. 그러므로 부모는 너를 키워 준 사람이지만, 동시에 너의 도우미이기도 하다. 언젠가 부모를 너의 친구, 너의 지기, 너의 지심인(知心人)으로 만들면 된다. 부모가 너를 도와주고, 너도 부모를 도와주고, 서로 잡아 주며, 장점은 배우고 단점을 보완하면서 지내면 너희는 정상적인 관계가 있게 된다. 이런 관계가 형성된다면 너희 사이에 나눌 얘기나 할 말이 없을까? (아닙니다.) 여기에서 주요하게 어떤 원칙을 돌파하지 못했기에 사람이 다 그 속에서 살고,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일까? 사실 서로 상대방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봐라, 부모가 자식을 만나면 계속 시끄럽게 잔소리를 한다. 만나기만 하면 잔소리한다. 그러면서 속으로 갈등한다. ‘또 귀찮게 하네. 이것 봐, 안 보면 잔소리할 일도 없고, 마음도 편하게 지낼 수 있는데, 얘를 만나기만 하면 자꾸 잔소리하게 되잖아. 상관 안 할 수가 없어.’라고 한다. 자식도 마찬가지로 부모를 만나면 귀찮아 하면서 ‘맨날 말해, 이거 말하고 저거 말하고. 몇 십년을 계속 같은 소리만 하네. 그저 잔소리밖에 없어.’라고 한다. 그러다가도 떨어져 있으면 또 서로 걱정하고 생각한다. 부모는 자식 걱정을 하면서 ‘잘 먹기는 하는지, 몸은 어떤지, 어려움이 있으면 돌봐 주는 사람은 있는지, 굶지는 않는지, 날씨가 추운데 옷은 두껍게 입었는지, 애가 조금 아프기라도 하면 돌봐 줄 사람이 없어. 그러니 내가 걱정을 해야지.’ 한다. 부모가 자식과 떨어져 있으면, 자식도 생각한다. ‘엄마도 나이가 들었고, 아빠도 몸이 안 좋은데, 어떤지 모르겠네.’라며 이런 저런 걱정을 한다. 그러다가도 같이 있으면 또 잘 맞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그러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패괴 성정 때문이고,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데, 이 말이 맞느냐? 그것은 빈말이다. 그럼 그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그렇게 된 근본 원인은 분명히 이 두 가지 큰 도리 때문이 아니다. 가장 실제적인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평등한 위치에서 지내지 못하고, 서로 속박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속박한다. 그것이 바른말이다. 그것은 패괴 성정 중에 가장 두드러지는 한 방면이다. 서로 속박한다는 것은 실제적인 말이다. 부모는 애가 어려서 단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식 역시 부모가 늙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바깥 일을 아는 게 너무 적기 때문에 신경 쓰고 지켜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 정상 인성이 없는 것이고, 다 정상인의 각도에서 상대방을 이성적으로 대할 줄 모르는 것이다. 상대방을 많이 보살펴 줘야 하고, 잔소리를 많이 해 줘야 하는 아주 멍청하고, 유치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 자식이 부모를 떠나 혼자 밖에서 2~3년 지내는 것을 보면 더 잘 지내고, 각 방면의 일도 더 잘 처리한다. 부모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좋은데도 부모는 도무지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 (네.) 이 일은 해결되었지? (해결되었습니다.)

이제는 대화를 나눌 줄 알겠느냐?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 부모는 자식이 다른 사람과는 늘 대화를 잘하면서도 자기와는 안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떤 심리가 생길까? (질투합니다.) 맞다, 질투한다. 부모가 널 키웠는데, 네가 부모와 계속 말도 안 하고 멀리하면, 부모는 마음 아파하고 질투한다. ‘얘가 왜 나와는 할 얘기가 없는 걸까? 어릴 때는 나하고 정말 친했는데. 나한테만 달라붙고 어딜 가도 같이 다니고, 어딜 가나 계속 따라다녔었는데, 지금은 왜 나만 만나면 말이 없는 걸까? 다른 사람하고는 왜 저렇게 말이 많지? 내 앞에만 오면 뾰로통해 입을 꼭 다무네.’라고 한다. 부모가 질투하는 것은 사실 심령에 필요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너는 부모의 그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야 한다. 네가 다른 사람과 했었던 얘기를 부모에게도 해 봐라. 그래도 부모가 질투할까? 질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네가 부모를 대하는 방식이 틀렸기 때문이다. 부모가 너에게 잔소리할 때, 부모가 선 각도가 맞든 틀리든, 잔소리하는 방식이 맞든 틀리든, 그 방법이 옳든 아니든, 바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부모는 네가 부모에게 신경 써 주기를 바라고,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라며,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각도에서 너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네가 부모의 그런 정서에 관심을 가져 주고 그것을 알아주면, 부모도 더 이상 잔소리할 게 없을 것이다. 그럼 아마 잔소리가 줄어들지도 모른다. 네가 다른 사람과는 그렇게 친하게 지내고,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고, 그렇게 많은 말을 하면서도, 부모 앞에만 가면 말이 없어지니 부모는 마음이 괴로운 것이다. 어쨌든, 자식과 부모가 서로 이해할 수 있고, 서로 잡아 주고 도와주며, 서로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면, 그것은 가장 올바른 관계이다. 너희가 이것을 실행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다면, 그 사이에 있던 갈등은 꼭 해결될 것이고 어려움은 없어질 것이다. 소통하는 법,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금은 부모가 곁에 없는데, 어떻게 대화하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형제자매들과 하면 되지! 무조건 부모와 대화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관계, 정상 인성의 관계에서 하면 된다. 형제자매들과 하라면 또 할 줄 모르는 것이냐? 그 원칙은 똑같은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너는 점점 성숙해질 것이고, 너의 정상 인성의 각 방면의 표현, 각 방면에서 갖추어야 할 것들이 갈수록 정상적이 되고, 갈수록 수확이 있게 된다. 그러면 네가 살아내는 정상 인성 안에는 내실이 점점 채워지지 않겠느냐? 내용이 점점 채워지게 되면 사람들이 너를 어린애로 취급할까? (아닙니다.) 바로 그런 것이다.

너희는 배운 게 좀 있느냐? (조금 있습니다.) 뭘 배웠느냐? (사람과 대화할 줄 알아야 하고, 마음을 나눌 줄 알아야 하며,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에서 뭔가를 배워서 자신의 생각을 점점 성숙되게 하고, 많이 얻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너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것을 얻는 것과 어른들이 알고 있는 일에 대해 관심이 있느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 관심이 없었을까? 무엇 때문이냐? (대부분 자신과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너는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느냐? 관심을 가지고 싶은 일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저는 무심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어떤 일도 정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이 없습니다.) 뭘 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 뭘 배운다는 것에는 기술이나 기능을 배우는 것만 있을까? 아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나이도 많지 않은데, 말을 하고 얘기를 꺼내면 다른 사람들이 다 중시한다. 그것이 능력이고, 인성에 갖추어져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항상 멍하니 있고, 종일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고, 아무것에도 흥미를 갖지 않고, 아무런 취미도 없다면, 그것은 인성에 부족함이 있는 것이고 인성의 결함이다. 보통 쓰는 말로 ‘모자라다’고 하고, 문어체로는 ‘결함’이라고 한다. 너에게 이런 결함이 있으면 너는 이것을 극복해야 하고, 사람과 교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의 이성, 지혜, 식견은 나이에 따라 성장하는 것이다. 만약 나이에 따라 성장이 정비례하면 너의 지능과 인성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졌어도 지혜와 식견이 성장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 지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결점이고 문제이며, 소질이 낮은 것이다. 소질이 낮으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너희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으냐? (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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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