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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편 진리 실제란 무엇인가

진리를 추구하는 기준은 어떤 것이냐? 너희는 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저는 제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진리 쪽으로 노력하려고 할 뿐입니다.) 비슷하게 판단한 것이냐? 정확하게 판단한 것이냐?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는구나! 이런 것을 진실하게 대한 적이 있느냐? 자신에게 맞춰 봤느냐? 잘 맞춰 보고 성찰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기준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느냐? 그러니까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떤 것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알고 있느냐?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실행하려고 하는지, 범사에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는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것은 큰 방향이다. 세부적으로는? (매일 정상적인 영 생활과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가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는지를 봐야 합니다.) 그것은 실행 방면이다. 또 있느냐? (일이 닥쳤을 때 진리를 찾고 구하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더 세부적인 내용이다. 또 있느냐? (일이 닥쳤을 때에도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성찰하기를 중시해야 하고, 자신이 한 말과 일이 어떤 성질에 속하고 어떤 본성의 지배를 받았는지 인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기본적인 진리는 너희가 다 알고 있다. 도리 방면은 다 알고 있고 이해하고 있다. 사람이 항상 듣게 되는 것과 항상 말하게 되는 그런 것을 늘 중시하고 그런 일에서 항상 노력한다면 효과를 보지 않겠느냐? 수확이 있지 않겠느냐? 그런 것이 사람에게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겠느냐?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럼 사람이 늘 그렇게 하고 늘 그렇게 실행하면 나중에 사람에게서 성과를 볼 수 있지 않겠느냐?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한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알겠느냐? 어떻게 판단하느냐? 사람이 늘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알게 되면 나중에 사람에게서 보게 되는 효과는 어떤 것이냐? 그러면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관계는 모르고 있구나, 그렇지? 너희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말씀을 들어도 항상 도리에서만 겉돌고 있다. 이런 말씀을 통해 도대체 어떤 효과를 보려고 하는지, 사람에게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런 것을 모른다. 사람이 늘 진리를 추구하고 항상 이런 정형에서 살면서 영 생활의 각 방면이 정상이 되면, 끊임없이 변화가 생기지 않겠느냐? (생깁니다.) 끊임없이 진보하게 된다. 갓 태어난 아기를 봐라, 사흘 동안 젖을 먹이지 않으면 아마 죽을 것이다. 하지만 매일 먹인다면, 행여 여건이 좋지 않아 모유를 먹이지 못해도 미음이나 분유를 먹인다면 날마다 자라지 않겠느냐? 매일 자란다. 3~5년 뒤에는 이리저리 잘 뛰어다닌다. 그럼 아기가 자라는 것이 보이느냐? (보이지 않습니다.) 자라는 것은 보이지 않지만 3~5년 후에는 잘 뛰어다닌다. 3~5년 전 갓 태어났을 때를 돌이켜 보면 어떠했느냐? 말할 줄도 모르고 뛰어다닐 줄도 몰랐다.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먹는 것도 어른이 먹여 주어야 하고, 늘 안아 주어야 하며, 똥오줌도 어머니가 치워 주어야 했다. 그렇지? 그러므로 말씀을 늘 먹고 받아들이면 나중에는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3~5년을 믿어도 별로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자. 하는 말을 보면 다 영적 어휘나 영적 용어이고, 교통도 잘하고 보기에는 아주 열심이 있고 추구하는 힘도 아주 큰 것 같지만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고 성정 변화 방면에 아무런 진보도 없다면 그 사람은 3~5년 동안 무엇을 한 것이냐?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을까? (아닙니다.)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럼 이제는 판단할 수 있겠느냐? (사람에게 어떤 효과가 있게 되는지를 봐야 합니다.) 말할 줄은 아는구나, 그럼 판단할 수 있느냐? (그래도 잘 모르겠습니다.)

교회에서 교회 생활을 하든, 집을 떠나 본분을 하든, 어찌 되었든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자라게 될 것이고, 생명 정형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변화가 있게 될 것이다. 영 안의 정형이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며, 자신의 패괴 성정에 대한 인식이며, 자신의 본성에 대한 인식이며, 하나님이 말씀한 진리 방면에 대한 인식이며 이런 것은 다 점차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처음에는 열심만 가지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단지 좋은 사람이 되고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인 줄로 생각하던 것에서, 사람에게는 패괴 성정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점차적으로 깊이 인식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은 하나하나 쌓여서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진리 실제 방면의 인식이나 체험이나 느낌은 점차적으로 깊어지는 것이지, 늘 글자 표면의 뜻에 머물러 있거나 글귀 도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해 동안 믿어도 언제나 실속 없는 말들만 하고 글귀 도리만 떠벌리면서 자신의 믿음에는 참된 변화가 별로 없고 자신에 대한 인식이나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도 별로 진보가 없고, 더욱이 사람을 분별하는 능력도 없다면, 그동안 무엇을 한 것이냐?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느냐? 이러면 추구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주 뚜렷한 표징이 된다.

누가 “오랜만이네요, 우리 함께 교통 좀 합시다.”라고 한다. 처음에 교통할 때는 아주 새롭게 들린다. 교통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새로운 빛 비춤을 좀 말할 수 있지만, 2~3일 지내다 보면 또 지나간 얘기를 꺼낸다. 과거의 사소한 체험이라든가, 사소한 간증이라든가,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해 주셨다든가,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든가, 어떻게 축복해 주셨다든가 이런 사소한 잡담을 또 늘어놓는다. 일주일도 안 돼 그 사람은 전에 얘기했었던 체험과 인식을 또다시 반복한다. 이러면 성장했느냐? (못했습니다.) 알고 보니 성장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을 분별할 줄 아느냐? 여전히 그렇다, 그다지 분별할 줄 모른다. 도리적인 것은 좀 더 늘었고 적지 않게 갖추었지만 일이 닥치면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며 사람을 분별할 줄 모른다. 일이 닥치면 해결할 줄도 모르고 원칙도 없고, 진리의 원칙을 찾지도 못한다. 이러면 어떠냐? 성장했느냐? (못했습니다.) 본분을 오래 했지만 충성되게 했느냐고 물어보면 자신도 잘 모른다. 아무튼 매일 시간에 맞춰 했다. 정형은 바뀌었느냐? 처음에 이방인들과 일하는 관점이 같던 데에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자신의 본분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께 충성하고 진리에 따라 본분을 잘하는 것으로 바뀌어졌느냐? 이런 것을 판단할 줄 아느냐? 여전히 잘 모른다. 이렇게 본분하는 것은 어떠냐? 정형이 바뀌어졌겠느냐? (아닙니다.) 바뀌지 않았으면 그것은 진보한 것이냐? 진보했느냐? (아닙니다.) 그것은 진보하지 못한 것이다. 진보하지 못했으면 문제가 아니냐? 본분하는 중에서 책망과 훈계가 임할 때에 어떻게 대해야 하냐고 물어보면 순복하고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반항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몇 년 전에도 그런 원칙이더니, 지금은 어떤 원칙으로 하고 있냐고 물어보면 여전히 그 원칙이고, 바뀌지 않았다. 아무튼 귀가 있으니 들으면 되고, 들은 다음에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는 식이다. 책망과 훈계에서 인식한 게 있는지, 사람의 패역 정형을 발견한 것이 있는지, 사람의 패괴 본성을 발견했는지, 자신을 더 깊이 인식했는지 물어보면, 이런 것을 모르고 있고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한 가지만 지키면 된다는 것이다. 즉, 책망과 훈계가 임하면 순복해야 하고, 마음 상태를 잘 조절하면서 반항하지도 말고, 변명하지도 말며, 참아야 되고, 견뎌 내야 되고, 이렇게 하는 시간이 오래될수록 그런 능력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전에도 이런 관점이었고 지금도 이런 관점이다. 이런 것은 진리를 얻은 표현이냐?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각 방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고 각 방면의 진리 원칙도 잘 장악하지 못한 것이다. 네가 큰 원칙과 방향은 있어서 “일이 닥치면 진리를 실행하고 진리 원칙을 잘 장악해서 이 범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지만, 일이 닥치면 찾고 구할 줄 모르고 진실하게 대하지도 않으며 흐리멍덩하게 흘려보낸다. 큰 방향은 지킨 것인가? 큰 방향은 지킨 듯하다. 순복하고 말을 잘 들으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본직 사역을 잘하고 대충대충 해서 속이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한 것 같다. 하지만 세부적인 각 방면의 진리를 깨달았는지, 실행했는지를 보려면, 각 방면의 진리를 참으로 인식하고 체험했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이다. 각 방면의 진리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고, 일이 닥쳤을 때 구체적으로 어느 방면의 진리에 관련되는지도 모르고, 어느 방면의 정형에 관련되는지도 모른다. 또 그런 정형이 어느 방면의 성정인지도 모르고, 두 사람이 같은 내용을 말할 때 그 두 사람의 본성에 어떤 다른 점이 있고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도 모르며,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러면 진리를 깨달은 것이냐? (아닙니다.) 이런 것은 진리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3~5년을 믿었을 때 이런 진리 실제의 면을 몰랐고, 8~10년을 믿었어도 여전히 모른다면 진리를 얻었겠느냐? (얻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얻지 못했다.

지금 너희에게 부족한 것은 어떤 것이냐?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엇과 같을까? 다른 사람이 너에게 진을 지키라고 하면 그것을 굳게 지키기는 하는데, 선제공격을 하느냐? 하지 않는다. 공격하면 영역을 더 차지하고 전리품을 조금 얻을 수 있지만, 지키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바로 이런 차이점이다. 사람이 이런 정형에 빠져 있다면, 그러니까 매일 일에서 겉돌며 규례를 지키고, 그 범위에서 행정을 범하지 않고 맡겨진 일을 잘하여 사람들이 보기에도 이상적이고, 진리로 판단해 보아도 큰 잘못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면, 이런 식으로 믿는 것은 어떠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믿으면 진리를 얻지 못한다! 하나님이 기뻐한다 안 한다는 말은 규례적인 말이다. 너 자신을 놓고 볼 때 진리를 얻지 못하면 전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정한 기간, 하나님을 알아가는 방면에 대해 교통하면 하나님 알기를 중시하고, 성정 변화에 대해 교통하면 성정 변화를 중시하며, 성육신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 교통하면 성육신에 대한 인식을 중시하고, 역사 이상(異象)에 대해 교통하면 또 그것을 중시하며, 복음을 전함에 있어 지혜롭게 전하는 방법, 복음 전하는 방면의 진리에 대해 교통하면 또 그것을 중시한다. 어떤 것에 대해 교통하면 거기에 따라서 듣고, 깨닫는다. 그럼 아무도 교통해 주지 않으면 자신에게 길이 있겠느냐?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겠느냐? 어떻게 가겠느냐? 순복에 대해 교통하면 사람마다 말할 줄은 안다. “최근에 인식한 게 좀 있어요? 체험한 게 있나요? 교통해 보시죠.”라고 하면, “별로 깊이 체험한 건 없지만 지금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순복해야 되나요?”, “일이 임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생각해 보고 내가 나서지 말아야죠.”, “세부적인 것은요? 그걸 좀 더 교통해 보세요. 당신에게 어떤 일이 임했는데, 순복이 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자기의 이익에 관련될 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이런 건 생각 안 해 보셨어요?”, “그런 건 아직 체험해 보지 못해서 모르겠네요.”라고 한다. 세부적인 내용이 없다. 그렇지? 또 한동안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에 대해 교통하면 이렇게 말한다. “최근엔 믿음 생활이 어때요? 진보가 좀 있어요?”라고 물으면 “네, 있어요.”, “그럼 교통해 보세요.”, “제 생각엔 하나님을 아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럼 왜 하나님을 아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하나요?”, “그건 말이죠. 하나님을 모르면 늘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게 되니까요. 늘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면 어두움에 빠지게 되고, 그러면 어떤 진리도 깨닫지 못하게 되어 이방인처럼 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쉽게 저지를 수 있어요”, “그럼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얘기해 보세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인도를 체험하는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인도인지 알고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주재를 명확히 느끼셨나요?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세요? 실생활에서 느낀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를 통해 하나님의 어떤 방면의 성품을 보게 되었어요? 세부적인 것을 얘기해 보시죠.” 이렇게 세부적인 것을 말하라고 하면 그때는 우물쭈물한다. “어느 날, 어떤 일이 임했는데, 하나님의 인도인 것 같았어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근데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인도해 주시는지 그렇게 명확하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기도했어요. 한참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뜻을 조금 알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셨어요. 말씀을 먹고 마시니 하나님의 뜻을 조금 더듬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며칠 기다려 봤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더라구요.” 그저 이런 과정만 겪게 된 것이다. “그럼 그 일에서 하나님의 어떤 방면의 성품을 인식했어요? 하나님의 어떤 방면의 성품에 결부시켰어요? 그러니까 잘 대조해 보셨어요? 당신이 알고 있거나 듣고 알게 된 하나님의 그 방면의 성품과 하나님께서 이번에 당신을 인도해 주신 일에서 어떤 방면을 대조해 봤어요? 거기에 결부시켜서 교통해 보세요.”, “그건 아직 결부시키지 못했어요.”라고 한다. 이것은 진리를 얻지 못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서 항상 영적 어휘나 영적인 말 또는 어떤 흐름에 따라서 믿고 추구하는데, 그런 추구법은 어떠냐?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너희를 비롯한 이런 사람들은 실제적인 것을 어느 정도 얻지 않았느냐? 너희가 자신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생각하든, 추구하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하든 실제적인 것을 어느 정도 얻지 않았느냐? (조금 얻었습니다.) 어떤 것들을 얻었느냐? 판단할 줄 아느냐? (사람이 어떻게 사탄에게 패괴되었는지와 이 사악한 세상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이 조금 있습니다.) 그것은 인식한 것들이다. 그럼 그런 인식을 너의 삶 속에 가져가면 네 삶의 방향과 인생 목표와 사람됨의 원칙을 바꿀 수 있겠느냐? 다시 말해, 네가 나쁜 일을 저지르거나 이방인처럼 살아갈 때, 혹은 이방인처럼 살려고 할 때, 네가 얻은 인식이나 체험이 너의 삶에 영향을 주고 인생 목표에 영향을 줄 수 있겠느냐? 그렇게 될 수 있느냐? (네.) 아마 근원적으로는 영향을 줄 수 없겠지만, 최소한 표면상에서는 규제를 좀 받을 것이다. 그렇지? 지금 너희 대부분 사람들의 분량이 이 정도에 머물러 있지 않느냐? (맞습니다.) 그럼 늘 이 정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 (나쁜 일입니다.) 왜 나쁜 일이냐? 조금 규제를 받는 것도 괜찮은데, 왜 나쁜 일이냐? (진리를 얻지 못해서, 진리가 생명이 되지 않아 계속 사탄의 패괴 성정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겉면의 것이다. 겉면의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적인 면은 어떤 것이냐? 실질을 좀 말할 수 있느냐? 네가 깨달은 진리, 네가 들은 말씀, 네 마음속에 이미 받아들인 진리의 실제와 영적인 말들이 너의 삶에 영향을 주고, 너의 사람됨의 방향과 목표를 바꿀 수 있고, 또한 네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처세 원칙도 바꿀 수 있다면, 이것은 단지 규제를 받는 것보다 더 적극적이고 더 실제적이지 않으냐? 그럼 너희는 지금 이 정도가 되었느냐? 규제받는 데에만 머물러 있느냐, 아니면 이미 영향을 받아 변화되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냐? 너희들이 다 말해 보아라. 실제 일을 말해 보아라. 어떤 것들이 너의 진정한 변화인지 말해 보아라. 너는 하나님의 도를 듣고 진리를 깨닫고 나면 그런 사람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끝장이고 그렇게 추구한다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고, 혹은 자신이 그렇게 살아간다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느끼게 된다. 어떤 사람은 늘 “제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실제적이냐? (실제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빈말이다. 너에게 어디 그렇게 좋은 면이 있느냐? 사람에게 어디 하나님이 기뻐할 만한 그런 높은 차원의 것이 있느냐? 사람은 먼저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기뻐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너에게 그런 높은 차원의 것도 없고, 그런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는지 네가 느낄 수 있느냐? 너는 느끼지 못한다.

네가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것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냐? 네가 직접 체험한 것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네가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 그들이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카드 게임 하고 도박하고 심지어 마약하는 것을 볼 때, 너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너는 그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갈 때 피곤하게 느껴지고, 그들이 정말 고통스럽게 산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그런 것들로 생명을 유지하고 그런 것들로 즐거움, 위로, 평안을 얻으며, 그런 것들로 자신을 마비시킨다. 네가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볼 때, 어떤 것을 실감할 수 있느냐? “나는 저렇게 살 수 없어. 나도 저들처럼 살아간다면 저렇게 고통스러울 거야. 나는 저런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야겠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네가 실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실감할 때 너는 만약 그렇게 살고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 산다면 자신의 육체를 짓밟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서로 암투를 벌이고, 서로 다투며, 서로 속고 속이며, 서로 싸우고, 뒤에서 서로 헐뜯으며, 조그마한 이익 때문에 피 터지게 싸우고, 누구도 자기의 실제 능력으로 일을 하려고 하지 않고, 수단을 부리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될 것이다. 네가 실감하게 되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런 상황에서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느냐? 이 세상에는 정의, 공평, 공의가 없기에 사람이 만약 귀신처럼 살지 않고 사람답게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쉽지 않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꼭 너를 귀신으로 만들고야 만다. 네가 그들에게 적응하고 그 사람들 가운데서 살려고 한다면 너는 반드시 자신을 귀신으로 만든 다음 귀신들 속에서 살아야 한다. 그럼 너는 그때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느냐? 어찌할 도리가 없고 고통스럽다. 그렇지? 밥 한 술을 먹기 위해, 자신의 밥줄과 생존을 위해 그들과 다투며 본의 아닌 말과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매일 사는 게 아주 힘들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살지 않으면 배척당하기에 사는 게 더욱 힘들다. 그런 생존 환경에서 너는 어떤 것을 느낄 수 있느냐? 고통스럽고 시달림을 받는다. 또 무엇이 있느냐? (어찌할 도리가 없고, 도망가고 싶을 것입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인간 세상의 사악함과 잔혹함을 느끼게 된다. 또 있느냐? (흑암합니다.) 흑암하다. 또 있느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는 어떤 것을 느끼게 되느냐? (마음에 위로를 느낍니다.) 하나님 집에서 살면 좋은 점은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자신도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못하고, 본의 아니게 악을 행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 (네.) 하나님 집에는 진리가 권세를 잡고 하나님이 권세를 잡고 있기에, 타인을 괴롭히고 악을 행하고 형제자매들을 억압한 사람은 다 출교되고 해임되었다. 만약 너에게 다른 사람을 괴롭힐 기회가 주어진다면 너는 괴롭히겠느냐? (괴롭히지 않습니다.) 왜 괴롭히지 않는 것이냐? 왜 사람을 괴롭히거나 억압하지 않는 것이냐? 사람을 괴롭히고 억압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을 느낀 적이 있느냐?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한 것이냐? 아니면 어떤 사람은 “여기서는 누가 누구를 억압할 필요가 없어요. 모두가 그렇게 하기 싫어해요. 다들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 협상하면 되잖아요!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요? 가능한 한 억압하지 말아야죠. 남을 억압하는 건 힘들고 마음도 지쳐요. 게다가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고요.”라고 말하는데, 이런 것이 출발점이 된 것이냐? 지금은 사람들이 남을 괴롭히고 억누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는데, 그런 인식은 어떻게 있게 된 것이냐? 늘 진리를 듣다 보니 행위상에서도 변화가 생긴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 행위상의 변화는 규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냐? 진리의 규제를 받은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는 지금 이 정형, 이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느냐? (맞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지금 이런 환경이 아주 좋다고 한다. 다들 사이도 아주 좋으며, 악인도 없고 짓궂게 말썽을 부리는 자도 없으며 자기 눈에 거슬리는 자도 없고 더구나 자신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남을 괴롭힐 필요도 없으며 방어할 필요도 없고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워 자신을 보호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이런 환경이 사람에게 아주 유익하고, 이렇게 살아가면 자유롭고 해방받아 아주 좋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혹시 사람의 성정이 변화된 것일까?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확실한 것이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이런 표현은 적극적으로 향상하거나 비교적 긍정적인 것을 지향하는 심리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사람을 규제하게 되고 게다가 하나님 집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있는 이 생활 환경이 사람에게 유익을 가져다준다. 이런 환경이 너에게 영향을 준 것이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어 네가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이나 네가 보기에 괴롭혀도 될 만한 사람을 만나고 혹은 너에게 지위가 있게 된다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억압하지 않겠느냐?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확실하냐? (네, 평소에 그런 마음과 생각이 들지만, 규제를 받아 일을 저지르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얻으면 규제를 받지 않게 된다. 그것은 단지 행위가 규제받는 것만이 아니다. 만약 진리를 얻게 되면 뚜렷한 상징이 나타나는데, 규제받을 필요가 없다. 진리가 네 안에서 영향을 주고 너의 일거일동과 행위를 지배하고 삶의 방식과 인생의 방향도 지배하게 되면 네 안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네 안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면 네가 하는 일은 전에 규제를 받아 행위적인 변화로 해낸 일과 성질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완전히 다를 때, 그런 상황에서 다시 너에게 지위를 주어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억압할 수 있는 기회와 조건이 주어진다면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억압하지 않느냐? 그렇게 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냐, 아니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부족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냐? (내면의 성정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일을 함에 기준과 원칙이 있게 될 때에야 사람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에 하나님께 죄짓는 일을 해서는 안 돼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아주 자연스레 여기까지 오게 되고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너희는 어떠냐? 이렇게 자연스레 이 정도에 도달할 수 있느냐? (아직 못합니다.) 아직 하지 못한다면 내면에서 아직 진리가 작용을 하지 못했고, 단지 너희 행위를 규제할 뿐 아직 마음은 규제하지 못했고 아직 너희 인생의 방향과 사람됨의 원칙과 목표를 바꾸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너의 사람됨은 지금 무엇에 근거하는 것이냐? 양심에 근거하고 사람됨의 최저선과 도덕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진리와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느냐? 대부분이 진리와 관련이 있느냐? 아직 진리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알겠지? (네.) 언젠가 ‘내가 이 일을 할 때 나를 규제하는 사람이 없고, 옆에서 나를 지켜보거나 감독하는 사람도 없고, 잘못해도 책망하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진리대로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며 공적인 일은 공적으로 처리해야 돼. 일할 때 기준이 있고 선이 있어야지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일을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죄짓는 일을 해서도 안 돼. 옆에서 감독하는 사람은 없지만, 일단 이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는 거야. 이렇게 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께 죄짓는 일이야. 난 절대 안 할 거야.’라고 할 정도로 향상되어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일을 저지르지 않게 되면, 이 사람의 정형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을 보아라. “좋은 물건을 좋아합니까? 돈을 좋아합니까?”라고 하면 “돈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만약 돈을 얻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잡으시겠어요?”, “그거야 어떤 기회인지 봐야죠.”라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곳에 돈을 보관해 두었는데 아무도 찾아가지 않고 있으며 더구나 지금은 주인도 없고 누구도 거기에 돈을 보관해 둔 것을 모른다고 하자. 사람은 다 돈을 좋아한다. 거기에 돈을 숨겨 둔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른다. 아마 그 돈을 숨겨 둔 사람은 죽었을지도 모르고 실종되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그 돈은 주인이 없고 누구의 것인지 모르고 너만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너는 가질 수 있느냐? 너는 훔칠 수 있느냐? (있습니다.) 훔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문제이냐? (본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본성이 나온 것이다. 여전히 훔칠 수 있다. 평소에 항상 지키는 사람이 있거나 혹은 그 사람이 돈을 훔칠 수 있는 뛰어난 재주가 없어 훔치지 않는다고, 그 사람을 도둑이 아니라고 한다면 맞는 말이냐? (맞지 않습니다.) 맞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기회가 생겨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 돈을 가질 것이다. 그런 후에는 또 대담하게 마음 편히 지내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는 사람이 없잖아. 물어봐도 갖겠다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자기 거라고도 하지 않을 거야! 아무도 모르잖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잊은 게 하나 있다. 사람은 아무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알지 않겠느냐? (아십니다.) 하나님이 알고 있는데도 네가 훔쳐서 자기 소유로 만들 수 있다면 네가 한 짓은 무엇이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훔쳤으면 도둑이 아니냐? 사람들이 “희한하네, 그 사람은 예전에 훔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 사람을 도둑이라고 하나요?”라고 하면서 모두에게 말을 한다. 그러면 다들 억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은 도둑이 아니에요. 도둑일 수가 없어요.”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이 아무도 모르는 일을 저질렀다고 한다. 하나님이 보기에 그 사람이 그런 일을 한 것은 바로 그 사람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는 도둑의 본성이 있고 도둑의 실질이 있는 것이다. 도둑놈이 하는 짓을 했는데도 도둑이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이겠느냐? 네가 계속 훔칠 수 있다면 성정이 아직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알겠지?

예를 들어,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귀중한 물건을 맡겼는데, 아는 사람이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하자. 너는 그 몇몇 사람들과 알고 지내는 사이이고, 그 사람들은 너를 신임한다. 네가 아주 좋은 사람이고 탐심이 없어 그것을 자기 소유로 차지하지 않을 사람이기에 어떤 상황에서 맡겨 둬도 마음이 놓인다고 말한다.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너는 종이로 싸고 싸서 잘 보관하고 항상 마음에 두면서 “이 물건을 잘 보관해야 돼! 잃어버리면 안 되고 망가지게 해서도 안 돼. 그리고 다른 사람이 훔쳐 가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이 더욱이 파손하지도 못하게 해야 돼.”라고 한다. 이것은 책임을 다하는 것이겠지? 동시에 또 스스로도 그 물건에 대한 탐심이나 소유욕이 있어서는 안 되고, 그런 생각을 해서도 안 되고, 그 물건을 철저히 거룩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올바른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러면 너는 자신에게 탐심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남의 물건을 탐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너에게 맡겨도 그것을 사취하지 않고 욕심을 부려 차지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냐? (맞습니다.) 아직까지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볼 때 그 사람에게 아직 욕심을 부려 차지하려는 마음과 생각이 없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은 또 마음을 다해 직책을 이행함으로써 그 물건을 잘 보관하여 망가지지 않게 하고, 잃어버리지 않게 하며, 다른 사람이 탐내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이 발견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고 직책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상황이 바뀌는 계기가 생기고 변동이 생겼다. 사정을 알고 있던 몇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투옥되었고, 어떤 사람은 타지로 가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그 사람 혼자만 알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다른 사람은 그 물건이 있는 줄도 모른다. 이것은 상황이 바뀐 것이 아니냐? 보아라, 상황이 바뀌면 사람을 검증하게 된다. 검증할 때가 온 것이다. 상황이 바뀐 다음 한두 달 정도는 아직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참답게 책임지고 그 물건을 보관하며 다른 생각을 갖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기저기 수소문해 보니 사정을 알고 있던 그 몇 사람의 행방은 파악이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투옥되었고 어떤 사람은 타지로 가게 되면서 사정을 아는 사람까지 곁에 있지 않게 되었다. 그럼 그 물건은 어떡해야 할까? 기도를 하게 된다. 기도를 해도 별다른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 아무 결과가 없어도 그때까지는 그 물건에 대해 다른 마음을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그래도 잘 보관해야 해!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께서 아시니까!’라고 한다. 이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냐, 아니냐? (지금 상황에서는 여전히 좋은 사람입니다.) 여전히 좋은 사람이다. 왜 그럴까? 그 사람을 좋은 사람의 기준으로 판단할 경우, 이 정도까지 했으면 이미 아주 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집에 큰일이 나서 돈이 부족하다. 밖에서 돈을 빌려야 한다. 요즘 돈을 빌리기가 쉬우냐? (쉽지 않습니다.) 돈을 빌리기도 쉽지 않고, 대출받으려고 해도 담보할 만한 것이 없다. 어떻게 할까? 사정이 달라지고 상황이 또 바뀌었다. 상황이 바뀌면서 다시 한번 사람을 검증할 때가 왔다. 집에 돈은 필요하고, 손에는 돈이 부족하다. 어떻게 할까? 처음에는 그래도 돈을 빌려 볼 생각을 한다. 여기저기 다녀 봐도 빌리지 못하니 마음이 흔들리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떻게 움직이느냐? ‘어, 내가 보물을 하나 보관하고 있잖아. 하, 돈을 지키면서 돈을 빌리려고 하다니 바보 아니야? 이 물건은 아무도 모르는데, 이걸 쓰면 되잖아. 써도 아는 사람이 없잖아! 쓸 수 있으면 써야지. 그리고 그냥 놔둬도 쓸데없잖아. 내가 쓰는 게 알맞게 쓰는 거 아니야?’라고 움직인다. 그리고 이보다 더 좋은 생각, 사리에 맞는 생각으로 넘어간다. ‘이건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거잖아?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주신 건데 안 쓰면 손해지!’ 생각할수록 맞고 합당한 것 같아서 마음이 흔들린다. ‘맞아, 이렇게 써야 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예비해 주신 거야. 하나님께 감사해야지.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야. 어떤 일이 임해도 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다니까. 이건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거잖아!’ 됐다! 2, 3일 생각해 보더니 마음이 아주 편안하고 양심의 가책도 없다. ‘쓰자! 이 돈을 써야겠어!’ 어떠냐?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되어 생각이 바뀐 것이냐? (상황이 바뀌어 초래된 것입니다.) 상황으로 초래된 것이라면 상황에 문제가 있단 말이냐? 상황 때문에 그 사람이 유혹을 받은 것이냐? 상황 때문에 그 사람이 변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너희가 정확하게 말해 보아라. (적합한 상황으로 사람의 본성이 끌려 나온 것입니다.) 맞다,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앞에서 두 번이나 상황이 바뀌었을 때는 그 사람의 마음이 왜 움직이지 않았을까? (그 사람의 이익에 관련되지 않았고, 그때는 아직 빈털털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으니 그 사람의 진짜 생각과 진짜 성정이 폭로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당시에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냐?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냐?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한 가지 물건을 마음과 힘을 다해 지켰으며 별다른 생각이 없었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으며 그 물건에 마음이 동한 적이 없고 그 물건에 대해 다른 마음을 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느냐!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그 정도가 되었을 때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변한다. 그 정도가 되었을 때 생각이 변했는데, 전에는 왜 그런 생각이 없었을까? (전에는 환경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환경으로 인해 그 사람이 드러난 것이다. 사실, 이런 것들, 이런 생각이 그 사람에게 없었던 게 아니라 때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환경이 닥치니 그 사람의 생각은 아주 자연스럽게 거품이 일어나듯 ‘부글부글’ 밖으로 나오고, 샘구멍에서 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계속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나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냥 그렇게 흘러나오다가 나중에 ‘진리 근거’까지 찾게 된다. ‘진리 근거’를 찾으면 그 사람의 사악한 본성이 폭로되는 것이 아니냐? 충성심, 선량함, 정의로움은 어디로 갔느냐? (없어졌습니다.) 없어졌다면 예전에 그렇게 했던 것은 위장한 것이냐? (위장한 것도 아닙니다.) 위장한 것도 아니다. 그 당시에 했던 것도 그 사람의 자연적인 유로(역주: 흘러나옴)지만 깊은 곳에 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장 겉면의 것, 가장 얕은 것으로 인성의 표면의 것이다. 그렇지? 인성의 표면에는 가식적인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사이가 좋은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상대방이 자기 아이를 하루 돌봐 달라고 부탁한다면 돌봐 주지 않을 수 있느냐? 하루 돌보는 것은 괜찮고, 이틀 돌보는 것도 괜찮고 일주일 돌봐 주는 것도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의 부모가 죽어 평생 돌봐 주어야 한다면 할 수 있을까? (못합니다.) 그럴 때는 정감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렇지?

그럼 하나님은 사람의 어떤 것을 변화시키느냐? 진리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문제를 해결하느냐? (본성의 깊은 곳에 있는 것을 해결합니다.) 바로 사람 안에 있는 그런 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일이 임하지 않았을 때는 사람마다 가장 기본적인 도덕의 최저선을 지키는데, 부당한 이득을 챙기면 안 된다고 한다. 특히 나이 많은 사람들은 “남의 것을 좋아하지도 말고, 자신의 것을 아낄 줄 알아야 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 다시 말해, 자기 것을 남에게 함부로 주지 말고 남의 것에 탐심을 품지 말고 탐욕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냐? (아닙니다.) 너는 이것을 해낼 수 있느냐? (해낼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것조차 해내지 못한다. 탐욕을 품지 않기는 고사하고 탐욕을 품기도 전에 벌써 그것을 차지한다. 그게 얼마나 직접적이냐? 생각을 거칠 필요가 없이 단도직입적이다. 빼앗을 기회만 있으면 빼앗아 오는데, 탐욕을 품을 필요가 있겠느냐? 탐욕도 품을 필요가 없이 바로 빼앗는다. 이것은 얼마나 잔인하냐! 보아라, 이런 환경이 임하기만 하면 사람의 사악한 본성, 탐심, 흉악한 성정이 나온다. 흉악하고, 탐욕스럽다. 또 무엇이 있느냐? 궤사하다. 여기에서 어떤 것이 궤사하냐? 어떤 생각이 궤사하냐? 어떤 표현이 궤사하냐?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나아갈 길을 열어 주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맞다, 그것이 궤사한 것이다!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이며, 자신도 기만하고 하나님까지 기만하는 것이다. 그런 듣기 좋은 말로 자신의 마음을 얼버무리고, 자신의 양심에 참소를 받지 않도록 위로하는 것이다. 그 밖에, 또 “제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 물건에 손을 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저를 탓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마 그때 어리석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속이고, 그렇게 하나님께 허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아름답게 꾸미는 동시에 또 그 아름다운 거짓말로 하나님을 속이고 기만하려고 한다. 이것이 궤사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언제 이런 환경이 임했을 때, 그러니까 너의 가장 깊은 곳의 것들이 나오려고 할 때, 일을 저지르려고 할 때 진리가 너에게서 작용을 하여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하고, 그것은 비열하고 사악하다고 하며, 네가 생각하는 것과 그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한다. 네가 비록 일시적으로 드러나 그 일을 하려고 했을지라도 기도하고 나서 ‘안 돼, 이렇게 하면 안 돼. 이러면 하나님께 죄짓는 거야. 이건 사악해! 이 일은 하면 안 돼. 이렇게 하면 진리에 부합되지 않아. 그러면 하나님을 기만하는 거잖아. 언제든지 그렇게 해선 안 돼. 그 물건에 손을 대선 안 돼. 그 물건은 교회 것이고 하나님 것이니까. 내가 손을 대선 안 돼. 죽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 걸고 지킬 거야. 이 물건에 손을 대선 안 돼. 거룩히 구별된 물건과 하나님께 속한 물건에 절대 손을 대선 안 돼. 모든 사람이 다 몰라도 하나님만은 알고 계셔. 그렇기 때문에 절대 그 물건에 손을 대면 안 돼.’라고 한다면, 이것은 너의 실제 분량이 아니냐?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을, 사람의 좋은 점으로, 또는 사람이 알고 있는 전통문화와 도덕의 최저선으로 제어할 수 있느냐? 이런 효과를 볼 수 있느냐? (볼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있어야만 사람이 이것을 해낼 수 있느냐?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직 네가 깨달은 진리와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너의 마음만으로 너를 제어할 수 있고, 너의 행위를 좌우할 수 있으며, 네가 어떻게 하고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를 좌우할 수 있다. 그러면 진리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도 아닌 다른 것이나 다른 이론으로 이런 효과에 도달할 수 있느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유일한 길이다. 이것은 너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게 할 수 있다. 어떤 환경이 임하든, 시련이든, 시험이든, 너의 초심을 바꾸지 못한다. 네가 처음에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다가 큰 환경이 임하여 그 일이 너에게 매우 큰 시험이 될지라도 너의 그 생각이 바뀌지 않고 너의 행위가 바뀌지 않으면 좋은 것이다. 그러면 너는 얻은 것이다. 그 일에서 하나님은 다시 너를 시련하지 않는다. 너는 이겼고 굳게 선 것이다. 그럼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도달할 수 있느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아직 도달할 수 없다! 도달할 수 없으면 진리가 아직 사람의 생명이 되지 못한 것이다!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지 못했으면 지금 사람에게 생명으로 되어 있는 것은 무엇이냐? 사탄의 처세 철학과 사탄의 독소, 그리고 영적 도리들이다. 또 있느냐? 사람에게 있는 본능들인데, 바로 도덕의 최저선, 사람됨의 최저선, 도덕 수준, 이런 것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은 후에 알게 된 어느 정도의 영적 도리, 영적인 말을 지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사람은 이런 것을 알게 된 다음 늘 ‘나는 진리를 얻었어. 하나님을 믿고 깨달은 것이 정말 많아. 하나님을 믿으면서 아주 크게 변화되고 수확도 아주 많아.’라고 여기는데, 이런 수확은 어떤 수확이냐? 사실 그것은 겉면의 것으로, 단지 행위상에서 조금 규제를 받고 행위상에서 비교적 규범적인 것이 조금 있을 뿐이다. 그 밖에, 사상과 마음에서 비교적 적극적인 방면으로 깊이 사색하고 생각하는데, 긍정적인 것을 생각할 때가 좀 많다. 그렇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늘 교통을 듣고 또 본분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서, 사상에서 긍정적인 것을 접할 때가 많은데,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 사람은 이렇게 환경으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게 되고 변화를 받는다. 하지만 진리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변화는 얼마나 크겠느냐? 또 얼마나 많겠느냐? 이것을 헤아려 보면 많지 않으냐? 이것은 사람의 추구에 달려 있다. 네가 정말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진리의 실제 방면에서 언제나 수확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수확이 있는 것이다. 한동안 수확이 좀 있을 것이고, 인식이 좀 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무엇을 얻었는지는 사람이 속으로 알고 있고, 마음에 느낌이 있는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늘 사람의 좋은 마음으로 힘껏 노력하며 어떤 일들을 하는데, 사람이 보기에 비교적 괜찮다고 하는 일, 좋은 일, 사람에게 욕먹지 않고 질책받지 않는 좋은 일들을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을 진리 실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일을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 ‘이 일은 양심껏 해야겠어. 진리를 모르니까. 진리는 너무 심오하고 너무 추상적이고, 사람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아. 진리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기도 어려우니 양심에 따라 하자!’ 대부분의 경우는 양심에 따라 하긴 하지만, 하루살이처럼 소극적으로 한다. 어떤 형편없는 사람들은 양심의 감각마저도 없어 양심의 기준에 따라 하지 않는다. “하루 세끼 먹는데, 그만한 일을 했어요?”라고 물으면, “그만큼 하지 못했어요.”라고 말한다. “그럼 마음에 가책이 안 드나요?” “가책이 좀 들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안 들어요. 시간이 흐르다 보니까 별 느낌이 없더라구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형편없느냐! “일한 건 좀 어때요?” “뭐, 괜찮아요.”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했나요?” “요구가 너무 높아서 안 돼요! 어쨌든 제 나름대로는 괜찮게 했다고 생각해요.”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손도, 머리도 쉬지 않았지만, 그러니까 두 손은 계속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아주 분주하게 보내며 쉬지도 않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았고 대가도 아주 많이 치른 듯하지만 계속 진리는 추구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는 것은 기껏해야 양심의 기준이지 않으냐? (맞습니다.) 양심의 기준으로 일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너희는 방법을 찾고 곰곰이 생각하고 묵상해야 한다. 한가할 때면 묵상하고 하나의 주제를 꺼내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모두 함께 교통해야 한다. 계속 양심의 기준과 겉면에서 좋은 사람이 되는 기준, 이 정도에만 머물지 말고 진리의 요구(원문: 高度)에 닿을 수 있도록 추구하고 진입해야 한다. 이래야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네가 계속 양심만 만족시키는 것을 추구하면서 도덕의 최저선만 넘어서지 않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러면 네가 일을 하여 얻는 것도 계속 그 범위 안에만 있게 된다.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면 진리는 항상 너와 무관하게 된다. 네가 하는 일과 네가 하는 말이 항상 진리와 무관하다면, 그래도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 진리를 얻기 아주 어렵다.

고대에 ≪도덕경≫, ≪논어≫, ≪삼자경≫을 읽는 그 서생과 훈장, 선비며, 과거 급제를 본 사람들을 보아라. 날마다 머리를 저어 가며 “가로 왈, 이를 지” 외치는 것뿐이다. 크게 나쁜 일은 저지르지 않아도 사소한 나쁜 짓은 끊이지 않으며, 지나치게 소심하여 평생 가도 그 어떤 정의로운 일도 해내지 못하였다. 그러고도 스스로 흐뭇해하고, 우쭐거리며 뽐내고, 늘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자랑하면서 잘난 척하고, 툭하면 ‘공자 왈’ 하면서 이것저것 말하다가 유교, 도교에서는 어떻게 말했다는 것밖에 없다. 항상 이런 식으로 머리를 흔들어 댄다. 평생 동안 이뤄 낸 성과가 없고 평생 동안 인생을 깨닫지 못하였다. 평생 삼자경이나 자기가 보고 알게 된 성현들의 서적에 있는 내용을 사람됨의 기준으로 삼는다.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며, 살아가는 것도 일하는 것도 흐리멍덩하게 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스스로 자신은 속에 든 것이 있고 얻은 것이 있는 것처럼 ‘다들 나보다 못해.’라고 생각한다. 이방인들에게는 어떤 말이 있지? “스스로 인품이…” 어떻다고 했지? (“스스로 인품이 고결하다고 여기다”라고 합니다.) “스스로 인품이 고결하다고 여기다”, 사람은 이런 정형에서 살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양심이 있는 사람이고, 착하고 인정이 많으며, 사람을 잘 이해해 주고 사람들을 항상 착한 마음으로 대하고, 특별히 잘 돌봐 주고 보살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은 진리이냐? (아닙니다.) 언제나 도덕의 정상에 서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것을 “스스로 인품이 고결하다고 여기다.”라고 한다. 항상 스스로 괜찮다고 여긴다. ‘나는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고 마음이 착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야. 나는 아주 양심이 있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으면 평생 그 사람의 은혜를 잊지 않아. 옛말에 “남에게 은혜를 입으면 갑절로 갚아야 한다.”고 했잖아.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어. 난 이것으로 자신을 판단할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냐? 또 어떤 사람은 “친구 사이의 의리를 위해서라면 위험도 감수해야 돼요, 삼국지의 관우를 보세요! 얼마나 의리가 있어요! ‘도원결의’가 얼마나 고전적이고 의리 있는 이야기였어요. 우린 그런 사람이 돼야 해요.”라고 하면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가르친다. ‘난 그런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계속 그렇게 살고 있잖아. 난 하나님을 믿으니까 이런 걸 더 잘 지켜야 돼.’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멍청이가 아니냐? 이런 것에만 만족하고 있으면 영원히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런 것들은 다 진리가 아니다! 성현들의 서적이나 도덕경 같은 것들이 어찌 진리일 수 있겠느냐? 그런 것은 다 그릇된 말이고 사탄의 논리이고 중용의 길인데, 다 사탄의 독소이다. 네가 그런 것을 진리로 높이 받든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까? 너는 하나님을 믿고 있고, 날마다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런 도덕, 도덕경에 있는 것을 실행의 원칙으로 삼고, 자신이 일 처리하고 사람이 되는 목표와 방향으로 삼는다면 진리는 언제 얻겠느냐? 이것은 강퍅한 게 아니냐? (맞습니다.) 나는 이런 물건짝 같은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았는데, 보게 되면 정말 속이 탄다. 무엇 때문에 속이 탈까? ‘왜 듣기만 하고 깨닫지 못하는 거지? 이건 동물이잖아!’ 그러니 그들은 듣기만 하고 깨닫지는 못한다. 그런 사람은 진리를 아무리 많이 듣고 교통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전히 남에게 은혜를 입으면 갑절로 갚아야죠. 어떤 경우에도 의리가 없으면 안 돼요. 사람은 언제든 양심이 있어야 돼요. 양심을 지켜야지 잃어서는 안 돼요!”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당신은 하나님을 믿고 얻은 게 그게 다예요? 다른 건 더 없어요? 깨달은 건 좀 더 없어요?”라고 물으면, “없어요.”라고 한다. 이런 사람에게 교통하라고 하면 그런 것만 교통하는데, 속이 타지 않겠느냐? 늘 교통을 해 주던 사람이 볼 때, 자신의 교통을 들은 사람이 늘 이런 도리만 교통하고, 진리의 도를 이런 도덕경으로 해석하고 전한다면 그래 속이 타지 않겠느냐? 역겹지 않겠느냐? (역겹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본분에 충성을 다해야 하고, 많은 진리를 깨달아야 하고,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마지막에 한 마디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해석할까? “당연하죠! ‘주인이 원하는 대로 일을 안 하면, 힘들어 죽어도 소용없다’고 자주 말하잖아요.”라는 이런 말로 해석을 한다. 그리고 “당신이 말하는 진리가 이런 뜻이잖아요, 알겠어요.”라고 한다. 이것은 진리를 깨달은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이냐? 말해 보아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영이 통하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이런 해석을 보면 진리를 깨달은 것이냐, 깨닫지 못한 것이냐?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 깨닫지 못했다고 하느냐? (사탄의 논리로 진리를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인간 세상에는 속담이나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런 것은 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총결해 낸 삶의 방식이나 방법, 혹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탄의 논리와 처세 철학이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약은 수법이다. 사람은 늘 그런 처세 철학과 약은 수법, 사탄의 독소를 진리와 결부시키는데, 그것은 어떤 식으로 보아도 역겨운 느낌이 난다. 그렇지? 이런 사람은 진리를 알지 못한다. 또 어떤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평소에 너희에게도 이런 것이 많지 않으냐? 사람이 40~50년을 살면 이런 것이 적지 않다. 20~30년을 살았어도 다 어느 정도 있다. 철이 들면서부터 그런 것들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무엇이냐? (약은 수법입니다.) 약은 수법이다. 그렇지? 어떤 일도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또 어떤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어딜 가나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런 것에 전문 용어가 하나 있는데, ‘어딜 가든 수신기가 되고 메가폰이 되면 안 된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왜 수신기가 되어야 한다는 걸까?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그것은 약은 수법이 아니냐? (맞습니다.) 어떤 것이 약은 수법이냐? (자신을 폭로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미움도 사지 않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약은 수법이고, 그게 바로 사탄의 철학이다. ‘아무 말이나 해서 쉽게 자신의 약점과 장점을 폭로시키지 말고, 내 실체를 다른 사람이 파악하게 해서는 안 돼.’라는 것이다. ‘항상 듣기만 하고, 관찰하고, 보면서 주위의 누가 누구와 같은 라인인지, 누가 힘이 있는지, 누구에게는 어떤 특기가 있는지, 누가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지를 알고, 그런 사람을 가까이해야지!’ 이것이 바로 수신기이다. 그럼 메가폰이 되지 말라는 것은 어떤 뜻이냐? ‘네가 항상 아무 말이나 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너를 간파하게 되어 괴롭힐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냐? 예를 들면 아버지가 항상 자식에게 “밖에 나가서는 수신기가 되어야 해!”라고 가르친다고 하자. 어릴 때부터 그렇게 가르치고, 계속 반복적으로 말해 주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 사람은 늘 말을 하지 않게 된다. 다른 사람이 “당신은 왜 말이 없어요?”라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요. 어릴 때부터 습관이 돼서요.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말하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한다.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솔직한 말을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 것 같아요?”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좀 볼게요. 일단 생각해 보고요.”라고 한다. 사실 그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 절대로 메가폰이 되지 않고 그 말을 철저히 지키고 있다. 그 원칙은 아주 잘 지키고 있는데, 어떤 상황에서도 수신기만 되고 메가폰은 되지 않는다. 한 가지 상황에서만 입이 열린다. 어떤 상황일까? 감옥에 들어가서 매를 맞고 고문을 당하면 전부 말한다. 뭐든지 다 말한다. 그때는 더 이상 수신기가 되지 않고 메가폰 역할만 한다. 고문은 견디지 못한다, 그렇지? 그런 사람은 항상 궤사하며 어떤 진리도 실행하지 않는다. 진솔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아 진리를 얻지 못한다. 진리도 얻지 못했고 궤사한 사람이기에 성령도 역사하지 않는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넘겨지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본래 진심으로 믿지 않는데다가 진리도 얻지 못했고, 진실한 믿음도 없는데 사탄에게 넘겨져 두들겨 맞으면 그 혹독한 고문을 이길 수 있겠느냐? 조금만 때리고 위협하면 바지에 오줌을 싼다. 그러면 끝이 아니냐? 그 사람의 본모습이 드러났고 귀착지도 사라졌다. 하나님을 믿는 생애도 거기까지이다. 끝난 것이다. 그러게 왜 수신기만 되고 메가폰이 되지 않은 것이냐?

사실 무엇을 하든 다 상관없다. 진리는 어떻게 말하고 있고,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떻게 요구했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메가폰이나 수신기가 되라고 했느냐? (아닙니다.) (진솔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진리이냐?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수신기나 메가폰이 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진리이냐? (둘 다 아닙니다.) 다 아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수신기가 되라는 것은 그릇된 말이고 메가폰이 되라는 것도 그릇된 말이고 다 허튼 소리이지 진리가 아니다. 어떤 것이 진리이냐?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진리이다. 네가 수신기처럼 살면서 늘 말을 하지 않으면 진리가 있는 것일까? 속에 약은 수법으로 가득 차 있다면 진리가 있는 걸까?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거짓말했다고 할 수 없으니 난 진솔한 사람이야.’라는 것은 맞는 말이냐? (아닙니다.) 그럼 말하기 좋아하고 어떤 말이든 다 하지만 그 말속에 많은 속셈이 들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진솔한 사람일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성격이 매우 외향적이어서 말을 아주 많이 한다. 갓 접촉했을 때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마음을 아주 잘 열어놓는구나. 어떤 말이든 다 하는구나. 하지 않는 말이 없고, 무엇이든 다 드러내는구나. 자신이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식구가 몇인지, 돈은 얼마나 버는지, 전에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무엇이든지 다 말하는구나.’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딱 하나, 뭘 해도 은밀해서 종잡을 수가 없다. 그 사람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실한 정형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식의 메가폰은 어떠냐? (궤사합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궤사한 놈이다. 그러니 메가폰이 된다고 해서 소용 있을까? 소용없다. 메가폰이 되어도 소용없다. 메가폰이 된다고 해도 진솔한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사람의 생각은 어떤 것이냐 하면 “수신기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니까 그럼 메가폰으로 살게요. 내가 메가폰 같이 되면 진솔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면 진리에 부합되는 거잖아요?”라는 것이다. 이러면 그릇되지 않으냐? 너무 그릇되다! 이런 사람에게는 마귀의 본성이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마귀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성정이냐? (사탄의 성정입니다.) 모두 통틀어 사탄의 성정이라고 한다. 사탄 성정의 어느 방면이냐? (궤사한 방면입니다.) 사악한 것이다! 너희가 궤사하다고 하는 것은 가볍게 말한 것이다. 사악한 것이다! 올바른 길, 참 도, 진리를 아무리 많이 교통해 줘도 그런 사람은 다 사악한 길, 사악한 논법으로 해석하며, 그것으로 대신하고 대체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악한 것이다! ‘사악’은 명사이다. 보통 말로 하면 어떻게 표현할까? ‘바르지 않다’ ‘비정상이다’라고 한다. 그렇지? 이것을 비정상이라고 한다.

진리란 무엇이냐? 이제 좀 알겠느냐? 우선 처세 철학이 진리가 아닌 것은 틀림없다. 명인이나 위인들의 좌우명은 진리일까? (아닙니다.) ≪도덕경≫에 있는 말은 진리일까? 그리고 인성에 있는 긍정적인 면들, 사람들이 인정하는 좋은 행위나 행실, 그리고 사람의 사상을 지도하는 그런 것들과 그런 이론들은 진리일까? (아닙니다.) 그럼 예를 들어 보아라. 너희에게는 들 만한 예가 없느냐? (사람의 호의, 열심,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것, 그것은 진리이냐? (아닙니다.) 남을 도와주기 좋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열성적인 사람은 적어도 마음이 착하고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 그런데 이것은 왜 진리가 아니냐? (원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칙이 없다. 무골호인이다. 그렇지? 그럼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진리일까? (아닙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옳은 것이고 긍정적인 것인데, 왜 진리가 아니라고 하느냐? (그것도 원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진리와 좀 관련된다.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너에게 잘해 주면 너는 효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 (효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효도해야 하지? 부모를 공경하며 부모의 말이라면 따라야 하는데, 형제자매들과는 다르게 대해야 한다. 부모는 연로한데 곁에 돌봐 줄 자식이 없다고 하자. 네가 본분하러 떠나면 몇 년 걸릴 텐데, 만일의 경우 부모가 집에서 죽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임종도 지켜 줄 사람이 없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기 때문에 너는 떠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을 지켜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그렇지? (아닙니다.) 그럼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상황에 따라 해야 한다. 네가 집 근처에서 본분하면서 부모를 돌볼 수 있는 상황에서, 부모가 믿거나 혹은 믿지는 않아도 반대하지 않는다면 너는 자녀의 책임을 다하면 된다. 부모에게 물 한 잔이라도 떠주거나, 부모가 앓아 누워 있을 때 곁에서 돌본다든가, 부모에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좀 위로해 주거나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어른들의 생각을 알아줄 수 있는 성인이니 부모를 위로해 줄 수 있고, 경제 여건이 되면 보약이나 영양제 같은 것을 알맞게 사다 주면 된다. 그러나 본분은 바쁘고, 부모를 돌볼 사람은 없고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그럴 때, 너는 어떻게 실행할 것이냐? 너는 어떻게 선택할 것이냐? 이때 네가 실행해야 할 진리는 어떤 것이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지만 그것은 사람의 책임이고 의무인 것이다. 이때 너의 의무와 너의 본분이 서로 충돌되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본분을 위주로 할 것입니다.) (본분을 첫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맞다, 의무는 본분이 아니다. 본분을 하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알았느냐? 의무를 다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다. 왜 진리가 아니라고 할까? 다시 말해, 네가 여건도 된다면, 그렇게 할 책임도 있고 의무도 있으며, 그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도 안 좋고 조건도 안 되니 ‘그럴 만한 상황이 안 되면 난 어떻게 해야 되지? 본분하러 가야 해. 그게 내가 진리를 실행하는 거야.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지금 실행해야 할 게 아니야.’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 본분이 없다고 하자, 그러면 ‘지금은 본분도 없고 타지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님 곁에 있으니 최선을 다해 돌봐 드려야지. 좀 편하게 살면서 고생을 덜 하시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야지.’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도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를 봐야 하는 것이다. 만약 부모가 인성이 나쁘고 항상 네가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 짐이 되고, 네가 본분을 하는 일에서 짐이 되며, 네가 하나님 믿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네가 실행해야 할 진리는 어떤 것이겠느냐? (내버려 둬야 합니다.) 그럴 때에는 내버려 둬야 한다. 너는 의무를 다한 것이다. 부모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너는 그들을 돌볼 의무가 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한 가족이고 부모이다. 믿지 않는다면 길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고 서로 다른 부류의 사람인 것이다. 부모가 사탄을 믿고 사탄을 섬긴다면 그들은 사탄의 길을 가는 것이고 사탄을 경배하는 길을 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너와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두 부류의 사람이다. 그러면 틀림없이 한 가족이 아니고 원수이다. 한 가족이 아니면 너는 그들을 돌볼 의무도 없다. 여건이 되면 상황에 맞게 하고, 서로 다른 길로 간다면 완전히 단절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진리이냐? 본분하는 게 진리이다. 본분을 한다는 건 어떤 본분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히 의무를 다하거나 자신이 해야 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피조물의 본분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너의 의무이고 너의 책임이다. 이 책임이 진정한 책임이고, 창조주 앞에서 너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그럼 본분을 하는 것과 부모에게 효도하는 ‘효’를 비교한다면 어떤 것이 진리이냐? (피조물의 본분을 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피조물의 본분을 하는 것은 천직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효도’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사람에게 효도하고, 육체에서 살고 있는 사탄에게 효도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게 아니다. 이제는 알았다, 그렇지? (네.)

이렇게 같이 나누기도 하고, 말하다 보면, 너희는 이런 일들을 구분할 줄 알게 된다. 스스로 구분할 줄 알면 어떤 것이 진리인지, 어떤 것이 진리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더 생각해 보아라. (이방인들이 말하는 긍정 에너지도 있습니다.) 긍정 에너지가 왜? (그것도 부정적인 것입니다.) 그것도 부정적인 것이라고? 어떻게 알았느냐? (지금 사회를 보면 늘 긍정 에너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은 다 겉면의 좋은 일일 뿐입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나쁜 것은 말하지도 않고 드러내지도 않습니다. 다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지키려고 합니다.) 이방인이 하는 말들은 대부분이 그릇된 것이다. 그렇지? 긍정 에너지, 정기(正氣), 이런 단어들은 어떤 배경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냐? 그런 단어가 생겨난 것에는 배경이 있다. 사회적으로 나타나는 논법, 이상하고 황당한 이야기나 근거 없는 말들에는 다 배경이 있다. 너희는 어떤 배경에서 그런 근거 없는 말들이 생겼는지 아느냐? (사회의 나쁜 풍조 혹은 부정적인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 예를 들면, 노인이 길바닥에 쓰러지면 부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풍조가 좋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긍정 에너지를 발휘하겠다고 합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그런 의무를 다하고 도덕을 지키는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회나 나라에서는 그런 사악한 풍조를 교육 방식이나 전통적인 이론으로 멈추게 하거나 제지시키지 못한다. 그들은 그런 것을 제지시키거나 막을 수 없고, 교육자나 유교 혹은 도교와 같은 각계 인사들이 같이 나서서 제지시키거나 방법을 생각하는 것으로는 이미 그런 사악한 풍조와 조류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고 여긴다. 그들은 이 사회의 풍조가 날로 악해져 가다 보니, 그런 것을 막을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고, 혹은 소위 말하는 모범적인 인사나 교육자들 같은 사람들을 청해 호소하게 하는 것이다. 또 나라에서도 방법을 모색한다. 모범적인 근로자나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는 사람, 심지어 농촌에서 함께 생활하는 대가족의 모범적인 효부 며느리, 또는 모범적인 군인,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앞에 세워 두는 것인데, 그런 사람들이 좋은 일을 좀 한 것을 긍정 에너지라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 사람들이 말하는 긍정 에너지는 어떤 뜻이냐? 이방인들이 말하는 정기(正氣) 혹은 한 가지 좋은 행위를 긍정 에너지라고 한다. 사실 그런 긍정 에너지가 사회적으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사악한 조류와 그 사악한 조류가 범람하는 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그 추세를 해결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해결할 수 없다. 사회에서 좋은 일을 좀 한 사람, 마음이 착한 사람 혹은 겉으로 그럴듯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세워 모범으로 삼는다. 즉, 긍정 에너지의 모범, 긍정 에너지의 본보기로 삼아 다른 사람에게 영향 주고 사람들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키려고 한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어떤 것을 바꿀 수 있겠느냐?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왜 바꾸지 못한다고 할까? 그들이 말하는 ‘긍정 에너지’라는 단어, 이 단어를 들으면 아주 힘있게 느껴지는데, 왜 아무런 문제도 바꿔 놓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것일까? 심지어 어린 아이들이 날마다 인터넷에 빠져 있는 문제마저도 바꿔 놓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한다. 그리고 또 지금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팽팽하다. 이웃 간에도 서로 왕래하지 않고 앞집과 20년을 함께 지냈어도 상대방의 성씨가 무엇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서 근무하는지조차 전혀 모른다. 앞집 사람이 죽어 며칠이 지나서 썩은 냄새를 맡고 나서야 그 집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웃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팽팽하다. 사람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없고 가족 간의 관계도 팽팽하고,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도 팽팽하다. 고부 간의 관계는 이전부터 팽팽했는데, 이것은 사람의 정상 인성의 가장 진실한 면이다. 지금 사회에서 관계가 이렇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지금의 사람들이 나쁘게 변하여 긍정 에너지가 없어서 사람이 그렇게 되고, 사람 사이가 그렇게 팽팽하게 된 것이냐? 설마 그런 긍정 에너지를 발산하도록 내세우기 전에는, 옛날 사회 그 당시 사람들의 관계는 팽팽하지 않고 다 좋았단 말이냐? 어느 때의 사람이 좋았고, 어느 때의 사람이 나빴느냐? 분명히 알 수 있느냐? 그때 당시의 사람을 보면, 한 마을이나 부족에 족장이 있었고, 족장이 나서서 그 부족의 일을 주관하고 어느 집에 어떤 일이 있거나 아이를 낳거나 다툼을 하거나 혹은 어느 집에서 결혼을 하는 등등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 결혼식과 장례식 같은 일들은 다 한 사람이 주관하였는데, 이런 대가족이 마치 한 가족처럼 화기애애하고 따뜻하였다. 지금은 이런 일이 적다. 있긴 하지만 아주 적어졌다. 도시를 놓고 말하면, 그때는 도시라고 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친구가 있었고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었고 의리를 지키는 사람도 있어 서로 관계를 논했다. 지금은 어떠냐? (지금은 모두 낯선 사람인 듯합니다.) 그때의 이웃 사이는 앞집 뒷집 서로 왕래했다. 상대방이 야채 한 소쿠리를 가져다주면 내가 무우 한 바구니를 가져다주면서 관계가 아주 좋았다. 그러나 몇 년 뒤에 한바탕 크게 다투고 난 후부터는 누구도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지금은 어떠하냐? 서로 물건을 주고 받지도 않고 서로 왕래하지도 않고 교제하지도 않는다. 이런 것이 없다. 하지만 다투지도 않는다. 앞집과 이웃하면서 오랫동안 살아도 서로 알지 못한다. 크게 소리지르며 부부 싸움을 해도 앞집에서 듣고도 상관하지 않고 얼굴도 비치지 않는다. 문구멍으로 구경할 그런 마음마저도 없다. ‘구경하기도 싫어, 남이야 죽든 살든 나와 상관없어.’ 어찌 된 일이냐? 지금 사람들이 삶을 아는 것이냐? 아니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삶을 아는 것이냐? 지금의 사람이 나쁜 것이냐 아니면 그때 당시의 사람이 나쁜 것이냐? (지금의 사람이 나쁩니다.) 무엇에 근거하여 그렇게 판단한 것이냐? 만약 너희가 지금의 사람이 나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 근거했을 것이다. 지금의 사람은 냉혹하고 혈육간의 정이 없고 진정한 친구가 없다. 또 누구도 의리나 양심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양심이 몇 푼어치나 되나요!”라고 한다. 지금 사람은 양심이 다 없어졌다. “무슨 양심을 따져요? 돈을 버는 것이 제일이죠!”라고 말한다. 물건을 팔 때, 근수가 부족해도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고 정상이다. 양심을 어기고 돈을 벌어도 정상이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지금의 사람은 너무 나쁘다고 한다. 그럼 이전의 사람은 어떠하냐? 고대의 사람은 물건을 팔아도 원칙이 있었다. “한 가지 물건에 값을 다르게 부르지 않고 어린이와 노인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그때의 상인들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어요? 사람을 속이지도 않았죠. 그런데 지금의 상인은 왜 이리도 나쁠까요. 어린이와 노인마저도 속이네요. 속이지 않는 사람이 없어요. 누구나 다 속이죠.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도 속입니다. 이전의 사람은 일을 할 때 기준이 있어서 지금 사람보다 많이 좋았습니다.”라고 말한다. ‘좋다’는 것은 무엇에 비추어 말한 것이냐? 바로 양심과 삶의 행위에 근거해 말한 것이다. 그렇지? 만약 이것으로 가늠한다면 이전의 사람은 지금의 사람보다 좋았다. 이전의 사람은 진솔하고 신용을 지키고, 양심을 지킬 줄 알았으며, 기준도 있고 사람됨의 최저선도 있어 적어도 양심을 파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일이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지금의 사람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돈만 벌면 되고 낯 두껍게 외면하며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신경 쓸 거 없어, 돈만 벌면 돼, 이름만 떨치면 돼.”라고 말하는데, 이런 관점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사람이 너무 나쁘다고 한다. 그럼 너무 나쁘게 변해 버린 것은 어떻게 변천되어 온 것이냐? 오늘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냐? 지금의 사람은 어디서부터 변해 온 것이냐? 직접 땅속에서 솟아 나온 것이냐? 이전 시대에서 변천해 온 것이 아니냐? 한 세대 또 한 세대를 거치면서 고대로부터 번식하여 지금까지 온 것이 아니냐? 사람의 DNA도 변하지 않았고 모양새도 변하지 않았고 키는 옛날 사람보다 좀 더 크다. 또 지금은 생활 여건이 좋다 보니 잘 먹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뚱뚱하고, 많은 사람이 비만이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배우는 것도 다양하게 복잡해졌다. 무용, 음악, 그림, 컴퓨터 등 각종 기술이 있는데, 다양한 방면으로 이전 사람들보다 많은 기술을 배우고 있다. 수학, 물리, 화학, 천문지리도 배우고, 사람마다 컴퓨터를 다룰 줄 알고 심지어 적지 않은 사람들은 차를 운전할 줄 알고, 비행기, 기차, 배도 조종한다. 재주가 고대인보다 뛰어나다. 그러나 재주는 사람의 본성이 아니다. 사람의 본성을 뜻하지도 않는다! 그럼 이 방면으로 본다면 지금의 사람은 이전의 사람보다 나쁘다. 왜냐하면 사람은 예전보다 기량도 뛰어나게 되었으니 교만할 만한 밑천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그럼 이 일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확할까? 어떻게 가늠해야 정확한 논법이고 진리에 부합되겠느냐?

어떤 일들은 교통하면서 나누다 보면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이 일을 다음과 같이 논증할 수 있다. 고대의 사극을 보면 조정이든 강호든, 아니면 보통 백성이든, 그 주요 줄거리가 정의와 사악의 대결이든 아니면 권력 다툼이든 강호의 싸움이든 결론적으로 전체 줄거리가 어떤 것으로 가득 찼느냐? 어떤 일을 폭로하였느냐?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것을 폭로했습니다.) 다시 말해, 일반 백성, 작은 가문의 내용을 다루든 강호의 내용을 다루든, 더 나아가 조정의 이야기를 다루든 전체 극의 줄거리는 싸움으로 가득 찼다. 이것이 바로 인성이다. 싸움으로 가득 찬 인성의 진실한 면이다. 조정 싸움에 관련된 드라마는 한 부만 보아도 머리가 힘들어진다. 싸우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약 30~40분 정도 되는 분량을 한 회만 보아도 너는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한다. 그 싸움이 얼마나 심했겠느냐? 그 회에서 피 튀기는 싸움이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그 사람의 머리, 생각을 계속 굴리는 모습을 보면 힘들어 보인다. 보는 사람도 힘들고 아마 연극하는 사람도 많이 힘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성이다. 사람이 권력을 위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하는 것에서 인간의 본성은 여실히 드러난다. 매우 생생하게 조금도 남김없이 드러난다. 아마 우리가 영화 한 편이나 드라마 한 부에서 보게 되는 내용은 단지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네가 보게 된 조정이나 강호나 일반 백성의 일들은 어느 시기에만 일어난 것일까? 아니면 지구의 어느 곳이 풍수가 좋지 않아 거기에 더러운 귀신들이 살고 있어서 사람들이 심하게 난리를 피운 것일까? 어떻게 된 것일까? 아니면 일부분 사람들이 유전자가 좋지 않아서, 그러니까 아마 투견이나 투우의 부류가 환생했기 때문에 그렇게 싸우기를 좋아하고, 인성이 그 정도로 된 것일까? (아닙니다.) 그럼 그런 싸움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왕의 자리, 재상의 자리, 세력의 범위, 통치의 권력을 얻기 위해 크게 싸운다. 또 강호의 무림 패주, 맹주가 되기 위해 싸운다. 일반 백성들은? 말 한 마디나 아주 사소한 일 때문에, 혹은 분가하는 작은 일에서도, 아주 보잘것없는 이익을 위해서도 피 터지게 싸우면서 서로 등을 돌린다. 형제 간에 서로 싸우는데, 서로 쥐어뜯고 머리채도 잡고 목도 조르고 엉덩이도 차고, 심지어는 부모가 화병으로 죽는 일도 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이런 일들과 현상에서 어떤 것을 보게 되었느냐? 모든 사람이 다 정치 권력의 다툼이나 강호의 싸움, 혹은 가정 이익의 다툼을 겪은 것이 아니다. 아마 사람마다 다 싸우지 않았을 수도 있고, 다 그런 일을 보거나 겪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전 인류의 역사가 발전해 온 이런 축소판으로부터, 역사 사실로부터 보면 된다. 사람마다 이런 영화들을 본 적이 있지? 대부분 이런 영화들은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다. 왜 대동소이할까? 인류의 본성이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류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고, 인류가 사탄의 권세 아래에서 살고 있고, 이 지구상에서 살고 있는 이상, 사람이 각 시기에 살아낸 삶의 각 장면의 내용은 다 같은 것이고 실질도 다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투는 목표, 원인, 근원이 다 같기 때문이다. 수단도 다 한 근원, 원천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다투는 목적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이익과 명리를 위한 것입니다.) 권력을 위한 것이고, 이득을 위한 것이다. 어찌 됐든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 수단의 출처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이냐? 그런 수단은 어디서 오는 것이냐? 다툼의 방식은 어떤 것이냐? 사람의 본성이 아니냐? (맞습니다.) 사람의 본성이다. 머리를 짜내고,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다투고 해친다. 서로 함정에 빠뜨리고 서로 속이고 서로 갈취하는데, 온갖 방법을 다 쓴다. 정치판의 큰 싸움이든 일반 가정의 작은 다툼이든 다 이익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성의 진면목이고 인류의 본모습이다. 환경이 좋을 당시, 인구가 많지 않은 당시에도 사람들은 그렇게 다투었는데, 지금은 사람이 얼마나 많으냐. 그때보다 몇 배가 되는데, 다투지 않을 수 있겠느냐? 몇 명 안 되는 작은 회사라 해도 사장, 부장, 과장, 일반 사원뿐인데, 그들끼리도 다툰다. 그들은 무엇을 다툴까? 부장이 사장이 되려고 하고, 과장은 부장이 되려고 하고, 보통 사원은 과장이 되려고 한다. 이런 것이다. 다투고 싸운다. 사장은 부장이 자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막고 부장은 과장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을 막고 과장은 계속 일반 사원을 관리하려고 한다. 더 많은 것을 관리하다 보니 서로 다투고 싸운다. 이렇게 싸움이 시작되면서 서로 다투고 다투다 보면 줄거리가 더 많아지지 않겠느냐? 아마도 이번 영화는 장씨와 이씨의 내용이겠지만 다음 영화는 왕씨와 조씨의 내용일지도 모른다. 이름이 달라졌고, 시기가 달라졌고 수단이 달라졌다. 옛날 싸움에는 관청에서, 강호에서 했었다. 지금은 어디지? (정부 기관입니다.) 지금은 정부 기관이다. 또 있느냐? (회사입니다.) (사업장입니다.) 사업장, 크고 작은 회사들이다. 만 단위, 십만 단위의 직원이 있는 대기업에서도 다투고 있고, 두 사람밖에 안 되는 작은 회사의 사장과 부사장, 그것도 부부인데도 싸우고 다툰다.

허상이 하나 있는데, 지금 사람들은 예전 사람들보다 훨씬 나쁘고 부도덕하다고 한다. 이런 허상이 있다 보니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금 사람들은 나빠. 예전 사람보다 더 나빠. 속까지 다 썩었어.’ 왜 이렇게 생각할까?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한 정이 없고 인정도 의리도 없고 문을 마주하고 있는 이웃 사이에도 왕래하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더 냉혹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로 얘기도 나누지 않는다. 이러는 것도 원인이 있다.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된 배경이 있다. 어떤 배경일까? 사회 통신 정보 시스템이 발전되고, 정보 유통이 이루어지면서 사람은 많은 방면의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외국 소식이든, 지구의 소식이든, 달 소식이든, 각 대도시의 소식이든, 각 부류 사람의 소식이든, 받을 수 있는 정보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컴퓨터, TV, 신문, 라디오, 매거진 등의 다양한 방면으로 다 이런 정보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해외에도 갈 수 있게 되었다. 해외로 가면 어디로 가느냐? 유럽이나 동남아 쪽으로 여행을 가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남극, 북극에 가서 구경하고 한 번씩 추위에 떨고 돌아온다. 또 어떤 사람은 어디로 가느냐? 지구를 벗어난 사람도 있다. 이런 것들은 뭘 의미하느냐? 사람의 보는 눈이 뜨였다는 것이다. 사람의 눈이 뜨이면 따라서 사유도 어떻게 되겠느냐? 넓어진다. 사람이 다양한 정보를 접하게 되고, 다양한 환경을 보게 되고,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접촉하게 되면 식견이 넓어지고 견문도 넓어진다. 그러다 보니 사람은 경험이 많아지고 풍부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경험이 풍부해지고 식견이 넓어지면 삶의 방식이 달라진다. 어떤 삶의 방식인지 아느냐? 기차를 본 적이 없는 촌뜨기가 처음 기차를 보게 되면, “와, 어떻게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지? 길기도 하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탈 수 있는 거야? 어찌 보면 뱀 같네?”라고 하면서 반나절 동안 그 자리에 서서 구경한다. 첫날에는 반나절을 보다가 둘째 날에는 2~3시간을 보게 되고, 셋째 날에는 얼핏 보고는 만다. 넷째 날에는 기차 소리를 들어도 익숙해졌다. 시간이 길어지면 다른 사람이 “기차 보러 가요.”라고 하면 “볼게 뭐 있다고, 그냥 기차잖아요.”라고 한다. “기차가 되게 좋아요.”라고 하면, “뭐가 좋은데요? 맨날 봐도 그저 그렇던데요.”라고 한다. 더 이상 기차를 신기하게 생각할까? (신기해하지 않습니다.) 왜 신기해하지 않느냐?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맞다, 익숙해졌다. 시골 사람이 처음 베이징에 가면 오가는 행인들을 바보처럼 한참씩 쳐다보면서 “와, 이 사람은 이렇게 생겼어! 저 사람은 저렇게 생겼어! 저 사람은 머리가 노랑색이네. 어, 저 사람은 코가 빨갛네! 저기 저 사람 안경에는 알도 없어!”라고 한다. 무엇을 봐도 다 신기해하고 눈을 떼지 못한다. 그렇게 베이징에서 1~2년을 지내다 보면 그 사람들을 그래도 신기하게 쳐다볼까? 보지도 않는다. 자기 할 거 하면서 날마다 바쁘게 보낸다. 다른 사람도 분주하게 다니고 그 사람도 분주하게 다닌다. 누구도 누구를 쳐다보지 않고, 개의치도 않고, 상관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사람은 차가워 보인다. 그렇지? 이런 것들은 어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냐? 이것을 식견이라고 한다. 식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그렇게 식견이 넓어지면 무엇을 봐도 다 신기하지 않고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다. 호기심이 해결되었다. 이것을 식견이 넓어졌다고 한다. 지금의 사람들은 식견이 넓어져 이야기를 해도 식견이 있고 사상이 있다. 독립적인 사상이 있고 독립적인 사고가 있어서 일반적으로 사람들과 말을 해도 떠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익에 관련되면? 여전히 눈을 부릅뜨고 본성이 또 드러난다. 그렇지? 사람의 식견이 넓어지면 겉으로 좀 달라 보인다. 냉담하거나 남의 일에 크게 간섭하지 않으며, 선뜻 나서지 않고, 남을 도와주는 좋은 마음이 별로 없는데, 그렇다고 예전 사람보다 나빠진 것은 아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 사람들 속에 살면서 참견하기 좋아하고 선심 베풀기 좋아하다가 사고도 좀 나고 손해도 보다 보니 식견이 늘었기 때문이다. 또는 어떤 사례를 보게 되거나 네가 좋은 일을 했다고 하자, 예를 들면, 할머니를 부축해 줬더니 덤터기를 씌운다. 그렇게 덤터기를 쓰고 재산까지 다 날리게 되면 다음에 또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엄두를 내지 못한다. 왜 하지 못할까? 네가 좋은 마음으로 했지만 보답은 얻지 못하고 봉변을 당했다. 그럼 너는 두 번 다시 그런 좋은 마음을 베풀지 않고 접을 것이다. 그럼 너의 그 좋은 마음은 여전히 존재할까? 존재는 한다. 어디에 있지? 숨겨 두었다. 너는 좋은 마음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유는? 늘 너를 사취하려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너는 좋은 마음을 쓸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렇지? (맞습니다.) 그럼 지금 사람을 예전 사람보다 나쁘다고 할 수 있느냐?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 (같습니다.) 왜 같다고 하느냐? (본성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패괴 성정은 다 같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지금까지 발전해 왔지만 여전히 같은 인류이고 여전히 같은 사탄이다. 환경이 점차적으로 변하고 발전하여 지금 사람들은 컴퓨터를 다룰 수 있게 되었고 비행기도 탈 수 있게 되었으며 안경도 다 착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겉면의 환경 변화로 사람의 본성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본성이 개선되었거나 더 나빠졌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런 것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이런 것을 뜻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은 말한다. “예전 사람들은 이익을 위해서 늘 다투고 싸웠어요. 그때의 사람들은 무력으로 싸우고 말만 하면 싸우고 손을 댔잖아요. 얼마나 야만적이었어요! 지금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싸우지 않아요. 지금은 문명 사회라서 그렇게 싸우지 않아요. 이제는 말다툼을 하거나 뒤에서 신고를 해요. 문명한 방식으로 싸우죠, 싸워도 상대방은 몰라요, 그러니까 누가 원수인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 사람은 이익까지 얻게 되잖아요. 봐봐요. 지금의 이런 사회는 얼마나 평화로워요! 문명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평화롭게 지내니 얼마나 좋아요!”라고 한다. 지금의 사람들은 싸우는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방식과 수단은 좀 바뀌었겠지만 싸우는 본성, 출발점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 본성과 근원은 여전히 하나이고 다투는 목적도 하나인데, 변하지 않았다.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예전 사람들이 좋았다고 하는데 어디가 좋았느냐? 그들은 전통문화의 속박을 받은 것이다. 예를 들어, 자녀나 며느리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그 마을 혹은 부족의 사람들이 다 욕하고 손가락질했으며, 아무도 그런 사람과 왕래하지 않았다. 그런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감히 돌파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어떠하냐? 그런 결과를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우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아도 되고 모시지 않아도 된다. 나라에서 돌봐 주기 때문에 자식들이 부모를 모시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 왜일까? 지금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체면을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도 걱정하지 않으니까 너도 걱정 않고 당연하게 부모를 모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설마 사람이 나쁘게 변한 것이냐? 아니다, 그렇지? 예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욕을 먹었다. 그래서 그걸 감당하기 어렵거나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참고 부모를 모실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마음이 내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효성이 정말 지극해서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 지금 사람들은 어떠하냐? 다들 부모를 모시지 않고,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런 풍조를 따르게 되고, 그렇게 하는 게 아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너는 어떻게 보아야 하겠느냐? 오늘날까지 인류가 발전해 오면서, 지금 생활의 질이 얼마나 높아졌든, 지금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많든, 식견이 얼마나 넓어졌든 사람의 본성은 지금까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반대로 사회가 발전하면서 사람의 본성, 천성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더 이상 자제하지도 않고 규제받지도 않는다. 그래서 “지금 사람은 예전 사람보다 더 나쁘게 변했어.”라는 말을 다시 듣게 된다면 너희는 어떻게 대할 것이냐? (단지 나타내는 방식이 다를 뿐 똑같다고 볼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보는 게 많다 보니 약아졌다. 예전 사람들은 계속 한 곳에만 갇혀 있으면서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고 많은 곳을 다녀 보지 못해 식견이 그렇게 넓지 못했다. 식견이 좁으면 좀 어리숙해 보인다. 어리숙해 보이면 사람들은 온순하다고 생각한다. 어리숙해 보이는 것은 사실 그 사람이 아직 배우지 못했고, 꿰뚫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 게 없다 보니 어디를 가나 눈앞이 캄캄하고 낯설어 대담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대담하게 하지 못한다고 그 사람이 할 수 없다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에게 그런 본성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 (맞습니다.) 바로 이렇게 된 것이다.

그럼 지금 이 사회에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 (있지만 적습니다.) 맞다, 그런 사람도 있다. 그럼 있다고 하여 너는 그런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것도 ‘국보’급이며, 아직 나쁘게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 사람은 진공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냐? 그 사람이 그런 좋은 일을 한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그저 좋은 행위이고 좋은 마음일 뿐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말하고, 하나님을 믿어 좋은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나님을 믿는 것을 언급하면, 그는 “하나님 믿으면 중국 정부에서 박해합니다. 정부에서 못 믿게 하고 허락하지 않아요.”라고 한다. 그 사람의 태도를 보아라,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정부에서 못 믿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너를 원수로 대하고 비웃는다. 이런 사람이 바로 좋은 사람으로 불리우고, 길 건너는 노인을 부축해 줄 수 있는 사람인데, 하나님 믿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대한다. 이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당신의 집에서 며칠만 몸을 좀 숨길게요.”라고 하면, 그 사람은 너를 신고하여 파출소에 넘긴다. 바로 정부에 넘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좋은 사람’이다. 그 사람은 교통사고가 난 사람을 살리겠다고 병원으로 데려갈 수는 있지만, 또 멀쩡한 좋은 사람을 악마의 손에 넘겨주어 괴롭힘을 당하고 박해받아 죽게 만들기도 한다. 어떤 것이 진짜 모습이냐? (후자입니다.) 후자가 그의 본성이다! 사람을 구해 준 것도 그 사람이고, 사지로 몰아넣는 것도 그 사람이다. 사람의 본성, 사탄의 그 본성을 하루라도 벗어 버리지 못하면, 사람은 악을 행할 수 있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다면, 너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이 맞느냐? (맞습니다.) 그럼 이 말이 왜 맞는지 말해 보거라. (그런 사람이 행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좋은 행실이고 좋은 행위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본성을 놓고 말하면 다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적대된다는 그 말이 맞다. 그럼 그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왜 하나님과 적대되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하느냐? (그건 하나님은 모든 긍정적인 것의 상징이지만, 사람의 그런 것은 다 부정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 말이 맞다. 사람이 아무리 좋고 경건하고, 겉으로 아무리 사람을 잘 도와주고 사람들과 사이가 좋다고 해도, 긍정적인 것을 들으면 반감을 가지고 싫어하며, 진리를 들으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싫어한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 아니다. 긍정적인 것과 진리와 적이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나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 좋은 사람이 아니다. 대체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일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도 세부적인 것이 많다. 너에게 예를 들어 주면 이 말이 왜 진리인지 알게 될 것이다. 본분을 하는 것을 예로 들어 보자. 하나님을 믿으면 피조물의 본분을 해야 되니 네가 집을 떠났다. 집을 떠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이방인들이 보면 “저 자식, 너무 이기적이야. 하나님을 믿는 것만 생각하면서 부모님은 상관도 하지 않네. 부모가 다 키워 놨더니 저 놈은 양심도 없고 근본도 없어. 부모에게 효도도 하지 않아. 부모가 키워 줬는데도 저 놈은 하루도 부모에게 효도한 적이 없어.”라고 말한다. 이방인들은 그렇게 평가한다, 그렇지? 이방인들 중의 좋은 사람이나 정직한 사람은 이렇게 본다. 바로 이런 관점이다. “저 자식은 양심도 없어, 부모를 모시지도 않고 효도도 하지 않네. 부모가 죽든 살든, 병이 나든 말든 신경도 안 써. 자기 하나님만 믿고 있어, 하나님 믿는 놈이 부모에게 폐나 끼치고, 정부에서 수색하러 오고, 안 좋은 영향만 끼치네, 정부에서 맨날 저놈 집에 찾아가서 부모들을 힘들게 하잖아. 봐봐, 효도는커녕 부모에게 사고뭉치나 되고, 정말 불효자식이야!”라고 말한다. 이런 말들에 진리가 한 마디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이방인들에게는 다 맞아 보이지 않느냐? (네.) 그것은 네가 바른길로 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너를 키워 줬는데, 너는 부모를 모시지도 않고 효도도 하지 않고, 거기다 사고까지 쳐서 부모들이 너 때문에 안타까워하고 걱정하고 신경 쓰게 만들고, 게다가 도망까지 가고 그 뒷감당을 부모들이 하게 만든 불효자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방인 중에서 성인이든 미성년자든 아마 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성숙되었든 안 되었든 다 이렇게 생각한다. 이방인들에게는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정당하고, 가장 합리적이고, 또 윤리 상식에도 맞다고 보인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사람됨의 기준에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얼마나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든, 다시 말해, 어떻게 효도해야 하고 어떻게 임종을 지켜야 하고 어떻게 부모를 모셔야 하고 부모에게 얼마큼 보답해야 하는 등 얼마나 많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든, 이런 기준이 사람 편에서는 긍정적인 것이고 긍정 에너지이고 올바른 것이다. 누가 봐도, 이것은 다 질책할 것이 없고, 올바른 것이다.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사람됨의 기준은 바로 방금 말한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네가 그런 것을 해야 사람의 마음속에서 좋은 사람으로 합격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너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느냐?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너도 이렇게 처신해야 확실히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느냐? 또 이런 것으로 자신을 가늠하고 단속하고, 자신에게 이런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지 않았느냐? 그렇지? 만약 네가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너의 사람됨의 기준에는 틀림없이 어떻게 부모에게 효도할지, 어떻게 하면 부모의 속을 썩이지 않을지, 어떻게 부모의 체면을 세워 주고 가문을 빛낼 수 있을지 등의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너의 마음속에서 사람됨의 기준이 되고, 또 사람됨의 방향이 된다. 그렇지?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교통을 들은 후, 너의 관점은 바뀌기 시작한다. 어떻게 바뀌느냐? 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맞는 거 같아.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어. 하나님은 이런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셨어.’라고 궁리한다. 여러 번 듣다 보니 너는 마땅히 모든 것을 버리고 피조물의 본분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피조물의 본분을 해야 하는 것이 진리라고 완전히 확신되기 전에 너는 자신이 마땅히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편 자신이 마땅히 피조물의 본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리저리 치우치는 동시에, 너는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의 양육과 목양을 받아 “피조물의 본분을 해야 한다.”라는 이 말을 점차적으로 너의 마음속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한다. 오늘날에 이르러 어떤 사람은 마음속에서 사람됨의 원래 가지고 있었던 기준을 철저히 내려놓게 되었다. 그렇지? (맞습니다.) 네가 사람됨의 원래 기준을 완전히 내려놓게 될 때,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너는 아직도 사람됨의 그 원래 기준이 진리라고 여기겠느냐?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맞다, 너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그럼 지금 너의 친구나 가족이나 친척들이 너를 질책하면서 “저놈은 불효자식이야, 효도하지 않는구나. 부모를 걱정시키고 화를 입히네. 저놈을 저렇게 키워 줬는데도 부모의 근심을 덜어 주지 않고 또 저렇게 큰 사고를 쳤어. 부모에게 효도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모의 속을 썩이고 신경 쓰이게 하다니, 저놈은 정말 몹쓸 놈이야. 좋은 놈이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럼 이렇게 되었는데도 네가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일까? 네가 몹쓸 놈으로 보였으니 너는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만약 그 당시 네가 그런 말을 너의 사람됨의 원칙과 기준으로 삼았다면, 그런 말들을 듣게 되었을 때 마음이 괴롭지 않겠느냐? (괴로울 것입니다. 매우 괴로울 것입니다.) 왜 괴로운 것이냐? (잘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가책을 받아 마음속에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진리가 없을 때 양심이 작용한다면, 그때 양심이 너에게 한 작용은 맞는 것이냐 틀린 것이냐? (틀린 것입니다.) 그때 네가 양심으로 판단하는 것은 사실 틀린 것이다. 하지만 네가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그것이 틀린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너는 그것이 맞다고 여긴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너는 정말 도리에 어긋난다고 여기고 양심의 가책을 많이 받는다. ‘앞으로는 잘해야지, 부모님께 보상해 드려야지. 말도 잘 듣고 가문을 빛내 부모님의 체면을 살려 드려야지. 어머니 속도 태우지 말고 아버지께 내가 대단하다는 걸 보여 드려야지.’라고 여긴다. 그렇지? (네.) 그럼 지금은 왜 그런 생각이 안 드느냐? 설마 네가 나쁘게 변한 것이냐? 너의 마음이 강퍅해진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이냐? 네가 나쁘게 변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말한 후에도 너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느냐? 마음이 괴롭지 않은데 지금은 양심이 없어서이냐?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것이냐? (일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이 진정으로 맞는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에게 이런 말이 있다. 상해 사람들은 “양심이 썩었어! 저 사람은 양심이 아주 썩을 대로 썩었어.”라고 말하기 좋아한다. 그들은 양심이 썩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너의 양심은 변하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그대로인데, 성격이나 취미, 양심의 기준과 도덕 기준도 사실 변하지 않았다. 너의 양심은 여전히 원래 그대로인데, 왜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해도 너는 무감각할 수 있느냐? 너는 괴롭지도 않고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는다. 그렇지? (네.) 이것은 아주 큰 변화이다. 왜 너는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느냐? (진리를 좀 알게 되어 그들이 말하는 것이 다 그릇된 것임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우리에게 유언비어를 날조하는데 그들은 어떻게 말하느냐? “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다음부터 정말 냉혹하게 변해 버렸어요. 혈육간의 정이 없고 집도 돌보지 않고 정말 냉혹해요. 마치 냉혈동물처럼 변해 버렸어요.”라고 말한다. 겉으로 볼 때는 그 말이 맞는 것 같지만, 사실상, 실질적인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설마 하나님을 믿은 후에 진리가 정말 이 사람들을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만든 것일까?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어떤 것이 맞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도달한 효과이다. 그럼 어떻게 되어 너에게서 이런 효과를 얻게 되었을까? 일을 판단하는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무엇이 네가 일을 판단하는 관점을 바뀌게 했을까? 언제부터 그렇게 된 것일까?

사회의 일부 불법자들을 보면, 늘 범죄하면서 항상 바른길을 가지 않는다. 투기로 폭리를 취하는 일만 해서 툭하면 경찰에게 잡혀간다. 그의 엄마가 울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또 들어갔어요. 내 아들이 고생하게 생겼어요.”라고 한다. 나온 뒤 엄마가 “아들아, 이제부터 잘 살아야 돼. 엄마 말 좀 잘 들어봐. 엄마가 밑천을 좀 대 줄 테니 자그마한 장사라도 진솔하게 열심히 좀 잘해 봐. 나중에 장가가서 잘 살면서 손자도 낳아 주고. 엄마가 아직 젊으니 네 아이 봐 줄께. 행복하게 살면서 엄마 말 잘 듣고 엄마 근심 조금이라도 덜어 줘, 엄마도 좀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말이다.”라고 하니 아들이 듣고는 ‘맞아, 그렇지. 난 사람 구실을 잘 하지 못해 항상 엄마 마음을 썩였지. 아버지도 화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이걸 어떻게 할까? 잘해 봐야지’라고 생각한다. 엄마가 밑천을 좀 대 주어 장사를 하게 되었다. 장사를 한 지 2년도 안 됐는데, 다른 사람의 꾐에 넘어가 또 나쁜 짓을 저질렀다. 드러나지 않는 나쁜 일은 없다. 또 잡혀갔다. 잡혀간 뒤 엄마는 화가 나서 “아휴, 저 화상이 또 나쁜 짓을 저질렀구나.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 아이구, 나는 정말 팔자도 사납네! 저놈이 내 속을 다 썩이네! 어쩌다 저런 놈을 낳아 가지고! 어쩔 수 없지. 기다려 보자!”라고 넋두리한다. 몇년 뒤에 나왔다. 나온 뒤에 아들은 또 바른길을 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바른길을 가지 않아도 도망쳤기 때문에 잡히지 않았다. 도망치는 것을 두고 다른 사람이 “달아나려면 밀항해서 외국으로 가야 해. 국내에선 너를 잡으려고 지명수배 내렸잖아. 국내에는 있을 수 없으니, 달아나야 해. 멀리 튀면 살길이 있을 거야.”라고 한다. 모국을 떠나려니 마음이 괴롭다! 왜 괴로울까? 엄마를 보지 못하니까, 그렇지? 떠나기 직전에도 운다. 왜 울까? 괴로워서이다! 왜 괴로울까? ‘울 엄마는 날 너무 사랑해. 이렇게 키워 주셨는데 난 엄마를 하루도 편안하게 해 주지 못했어. 엄마한테 걱정만 끼치고 속만 썩였어. 감옥에서 나오면 또 들어가고, 이번에도 사고 쳤잖아. 이건 엄마가 모르고 있어. 알기만 하면 또 화내고 마음 고생할 거야. 이렇게 떠나면 언제 또 돌아올지도 모를 텐데. 보아하니 평생에 노모에게 효도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라고 하고는 통곡하며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엉엉’ 한바탕 운다. ‘어쩔 수 없어. 어차피 이 길을 갔으니 계속 가야지!’ 봐라, 건달이나 악당에게도 양심은 있어서 자신이 바른길을 가지 않아 엄마를 상심케 한 것도 알고 있다. 그도 마음속으로는 알고 있지 않느냐? (알고 있습니다.) 봐라, 이런 사람은 ‘망나니’이고, ‘능구렁이’여서 자기도 모르게 늘 나쁜 일을 저지른다. 한번 또 한번 얼마나 손해를 보든지 계속 저지른다. 엄마가 타일러도 듣지 않는다. 여기까지 오게 되니 그는 부모를 상심케 하고 부모의 마음을 썩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옳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에게도 양심 기준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도 양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도 양심의 감각과 지각이 있다. 그럼 너희가 말해 보아라. 정상 사람이라면 다 이런 느낌이 있지 않겠느냐? 이런 것은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 (네. 알고 있습니다.) 다 알고 있다. 이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사람에게 마음이 있으면 양심의 지각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 본능이고 다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패괴된 사람이 다 이렇게 생각하고, 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있다 해서 이것이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긍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지금은 네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깨달았기에 알게 된 것이다. 왜 지금은 다른 사람의 나무람을 들어도 그 어떤 양심적 반응도 없고, 그 일이 너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고 아무런 고민도 가져다주지 못할까? ‘다른 사람이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지.’라고 하면서 네 마음이 괴롭지 않은 걸까? 이것은 무슨 관점이냐? 사람이 이 정도까지 변화되고, 지금과 같은 심경이 있게 된 것은 어떻게 온 것이냐? 어떻게 도달한 것이냐? (일부 정감이 드러나는 상황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가족에게 편지를 쓰게 된 상황을 예로 들고 싶습니다. 처음 쓸 때에는 집에 계시는 부모님께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매우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형제자매님들이 저에게 교통해 주고, 저 또한 정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셨더니 좀 좋아졌습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감에 따라 정감에 대해 조금 인식할 수 있게 되었고 분별하게 된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점차 체험하면서 하나님 말씀 속에 진입하게 되니 자신에 대해 요구가 생기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일을 판단하는 관점을 돌려세울 수 있게 되었으며, 정감 방면에서 자신의 관점이 어느 정도 바뀌게 되었습니다.) 아주 좋다. 어쨌든, 어떻게 말하든지 그것이 진리라면 사람의 관점을 바뀌게 하여 사람의 마음에서 인ㆍ사ㆍ물에 대한 견해와 행위에 대한 관점이 예전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이전에 사람들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양심적으로 판단해야 할지를 늘 생각해야 했다. 항상 양심이라는 이 관문을 넘어야 했다. 항상 소문이 무섭고, 남들이 비웃을까 봐, 명성이 나빠질까 봐, 남들에게서 “저 녀석은 쓸 만한 놈이 못 돼.” “저놈은 양심도 없어.”라는 소리를 듣게 될까 봐, 항상 손가락질 하는 말들이 무서워 마지못해 이런저런 일들을 해야 했다. 지금은 어떠냐? 지금은 어떻게 판단하느냐? (지금은 진리 원칙으로 판단합니다.) 이전에는 그렇게 판단함으로 인해,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살게 되느냐? 예를 들어,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계속 너에게 “얘야, 크거들랑 엄마를 위해서라도 떳떳하게 살아야 해. 엄마의 체면을 살려 줘야 해. 장씨(이씨)의 가문을 빛내야 해!”라고 주입시킨다면, 이 말이 너에게는 무엇이 되겠느냐? 독려일까 아니면 속박일까? (속박입니다.) (부담입니다.) 더 나아가 그 말이 너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까, 아니면 부정적으로 통제하는 역할을 할까? (부정적인 통제가 됩니다.) 사실은 통제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옳은 이론, 옳은 논법, 사람이 보기에 좋은 삶의 방법으로 너에게 목표를 주어 그 목표를 향해 살아가도록 한다. 그 후에 너는 자유를 잃게 된다. 왜 자유를 잃게 되고 그것에게 통제될까? 사람들은 모두 조상과 가문을 빛내는 것은 좋은 일이고 그것이 바른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 방향으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너는 바보이고 무능한 놈이고 밥통이어서 너에게는 장래성이 없다는 것이다. 네가 장래성이 없고 가문을 빛내지 못하고 무덤에 꽃이 피게 하지 못한다면 너는 바로 망할 놈이고 못난이여서 사람들이 너를 업신여긴다는 것이다. 너는 이런 것들을 위해 스스로 힘써야 하는데, ‘책을 많이 읽고 말을 잘 듣고 재능을 많이 키워 앞으로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조상들에게 영광을 나타내야 해.’라는 것이다. 네가 그런 것을 위해 하는 모든 것들은 무형중에 쇠사슬이 되어 너를 묶어 두지 않겠느냐? 부모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부모가 널 잘되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네가 잘 살고 가문을 빛낼 수 있도록 부모가 해주는 말이기 때문에, 너는 당연히 이러한 삶의 방식으로 떠밀려 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것들은 어느새 너에게는 작은 고민으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슬로도 된 것이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이런 것들을 긍정적인 것으로, 진리로, 바른길로 여기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하게 지키고 따르며, 부모가 한 그런 말들과 너에 대한 요구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네가 만약 그 말에 따라 살았고 노력도 하였고 가문을 빛내느라 너의 청춘과 일생마저 다 바쳤고, 좋은 나날들을 지내며 조상들의 이름을 빛내면서 부모가 너에게 설계해 준 길에 따라 살았고, 네가 뛰어난 사람이 되어 사람들 앞에서 아주 영예롭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네 마음은 살아갈수록 공허하여 사람이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장래의 귀숙은 어떻게 될지도 모르며, 마땅히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네 마음에 지향하고 있고 알고 싶어 하고 깨닫고 싶어 하는 이런 인생의 비밀들을 아주 조금이라도 깨닫지 못하고 얻지 못하였다면, 이는 자기도 모르게 부모의 좋은 마음 때문에 잃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너의 청춘, 너의 일생은 소위 “널 위해서야.”라고 하는 그 한 마디에 망치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네 부모가 한 “널 위해서야.”라는 이 말은 도대체 맞는 것이냐? 틀린 것이냐? (틀린 것입니다.) 아마 부모의 출발점은 정말로 너를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부모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냐? 부모가 진리이냐? (아닙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한평생 부모의 그 한 마디를 위해 살고 있다. 그 한 마디가 계몽 교육이 되었고, 부모의 그 한 마디에 일생이 영향을 받았으며, “널 위해서야.”라는 부모의 한 마디가 인생의 시작점이 되었고, 인생에서 노력해야 할 방향과 목표가 된 것이다. 그 결과, 일생 동안에 그가 얼마나 영예롭고 밝게 살았든지, 그가 얼마나 품위가 있고 성공적으로 살았든지, 사실 그의 일생은 망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게 된 일이다. 그러면 부모의 그 한 마디 말을 위해 살지 않은 사람은 망치지 않았단 말이냐? 그것도 아니다. 그 자신에게도 목표가 있는 것이다. 어떤 목표이냐? 역시 그 말이다. “잘 살게 되면 조상도 덩달아 영광을 얻는다.” 그래도 그 말이고 달라진 게 없다. 부모가 너에게 알려 주지 않았어도 너 자신이 어디에서 얻어 온 것이거나 어디에서 전수받은 것이고 받아들인 것이다. 너 스스로도 그것을 위해 살려 하고 조상들에게도 영광을 얻게 하려 하고 자신이 사람답게 살아서 뛰어난 사람이나 고상한 사람, 품위가 있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여전히 이것을 목표로 한다. 너의 목표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너는 여전히 그런 것들을 위해 일생을 바친다. 평생을 살아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진리를 모르면 사회에서 인간 세상에서 소위 맞다고 여기는 도리나 논리, 논조들을 받아들이게 된다. 받아들인 후, 사람은 맞다고 하는 이런 것들을 자신의 인생의 노력 방향, 노력의 근거와 동력으로 삼고, 나중에는 곧이곧대로, 아주 추호의 남김도 없이 사람의 이런 목표를 위해 살면서 일생동안 눈을 감을 때까지 분투한다. 어떤 사람은 눈을 감을 때가 되었어도 여전히 달가워하지 않는다. 사람은 이렇게 가련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후에는, 소위 맞다고 여기는 이런 것들, 교육이나 논법 그리고 너에 대한 부모의 기대, 이런 것들을 점차적으로 내려놓게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는 소위 옳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을 점차 내려놓게 된다. 네가 사물을 판단하고 일을 판단하는 기준은 더 이상 간단하게 그런 말로 판단하거나 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너는 더 이상 이런 것들에 매이지 않을 것이 아니냐? 네가 이런 것에 매이지 않게 되면 사는 것이 자유롭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꼭 자유롭다고 할 수도 없다. 적어도 쇠사슬은 없어졌다. 쇠사슬이 가벼워졌다. 그렇지?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만 또 아주 많은 관념이나 사람의 속셈, 상상들이 있다. 또 아주 많은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 나아가 사람 자신의 처세철학이라든가, 궤사한 사상이라든가, 패괴 본성에 이르기까지, 이런 것들이 어느 때에 해결받아 사람이 완전히 진리에 의해 살 수 있게 된다면, 그때에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된다.

지금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얻는 데서 첫 번째로 중요한 일은 무엇이냐? 금방 말한 그런 것들이 아니냐? 맞다고 여기는 그런 것들, 자신이 맞다고 여기는 논법이나 이론들을 먼저 잘 해부하여 그것들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 쇠사슬을 벗어 버리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 마음속에 아직도 이런 것들을 얼마나 품고 있느냐? 완전히 다 벗어 버렸느냐? (벗어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정감을 벗어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냐? (아닙니다.) 네가 만약 무턱대고 “저는 정감과 싸우겠습니다. 정감을 벗어 버릴게요. 부모님 생각하지 않고, 형제자매 생각하지 않고,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하지 않을래요. 전 아무도 생각지 않고 하나님만 생각할래요. 맘껏 맘껏 생각할래요.”라고 하지만,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여전히 울고 싶다. 왜 울겠느냐? 괴로운 것이다. “오랫동안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어요. 너무 너무 보고 싶어요.” 이러면 근원에서부터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너는 자신에게서 맞다고 여기는 것들, 부모에게서 전수받은 논법이나 지식과 같은 것을 해부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해부해야 한다. 또 하나는, 부모와 가족을 대함에 있어 너에게 그들을 돌봐드릴 의무가 있든 없든, 이 모든 것은 무엇에 근거해야 하느냐? 네 자신의 능력, 조건에 근거하고 하나님의 지배에 근거해야 한다. 이러면 제대로 말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러면 제대로 말한 것이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부모 곁에 있을 때는 부모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도 부모 곁을 떠나기만 하면 자신이 부모님을 위해 아무것도 못했으니 부모님께 매우 빚졌다고 느낀다. 결국 부모와 같이 살게 되자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 조금도 효도하지 않고 아무런 의무도 이행하지 않는데, 이것이 정말로 효도하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말뿐이다. 그렇지? 그러니 네가 어떻게 하든, 혹은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마음속으로 어떻게 타산한 것이든,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중요한 것은 네가 어떠한 피조물이든 모두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고 진실로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부모에게는 타고난 복이 있거나 그런 운명이 있다. 자손이 번창하고 천륜지락을 누리는 그런 복,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재이고 하나님이 준 복이다. 어떤 부모에게는 그런 운명이 없고, 운명에 그런 복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안배하지 않은 것이다. 자녀들이 곁에서 지켜 주고 온 가족이 함께 즐기며 누릴 수 있는 그런 복이 없는 것이다. 그런 복이 없고 그런 팔자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배이기 때문에 네가 억지로 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결국에는 이 일에서 사람이 최소한 순복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거나 상황이 될 때는 효도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만약 상황이 안 되거나 조건이 안 돼도 우리가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뭐라 하느냐? (순복이라 합니다.) 이것을 순복이라고 한다. 이 순복은 어떻게 온 것이냐? 이 순복의 근거는 무엇이냐? 이 순복의 근거는, 이 모든 것에는 다 하나님의 안배가 있고 다 하나님의 주재가 있기에 사람이 선택하려고 한다면 그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선택할 권리가 없다. 선택할 권리가 없기에 사람은 마땅히 순복해야 한다. 사람은 마땅히 순복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배라는 것을 느끼게 될 때, 네 마음이 많이 편해지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의 그 양심이 그래도 제 역할을 하겠느냐? (제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양심에 문제가 생길 리 있겠느냐? (그럴 리 없습니다.) 양심이 늘 책망받지는 않을 것이다. “아,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했어요.”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주도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끔은 아마 생각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성 안에 있는 일부 정상적인 사상이나 정상적인 본능은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보통 사람은 모친이 병이 난 것을 보았을 때, 마음이 아무리 강퍅한 사람일지라도 마음이 괴롭지 않겠느냐? (괴롭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다 괴롭다. 어머니에게 병이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이 대신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또 어떤 사람은 “저의 어머니 병이 나을 수만 있다면 제 수명이 몇 년 줄어든다고 해도 괜찮아요!”라고 한다. 다 고통스러울 것이고 괴로워할 것이다. 그렇지? 이것은 인성에서의 긍정적인 면이고 사람의 본능이다. 동물에게는 이런 것들이 없다. 그러므로 네가 벗어 버리려고 하는데 벗어 버릴 필요는 없다. 말하자면, “저에게는 또 정감이 있어요. 저의 어머니가 병이 나신 것을 보게 되니 마음이 정말 괴로웠어요.”라고 하는데, 이것을 벗어 버릴 필요가 있겠느냐? (벗어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너는 이런 일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다. 무시하면 된다. 괴로운 것은 좋은 일이다. 이는 너에게 인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네가 말해 봐라, 너를 낳아 준 어머니가 병이 났는데, 그는 너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너에게 안배해 준 가장 가까운 사람은 어머니이다. 어머니가 병이 났고 괴로워하는데도 너에게 아무런 반응도 없다면 네가 사람이냐? 네가 “저는 어머니에게 정감이 없어요. 어머니가 괴로워해도 저에게는 정감이 생기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괴로워하셔야 저도 괴로워요.”라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어머니가 너를 낳았고 이렇게 크게 키웠고 너와 가장 친하고 너를 가장 사랑하는데, 어머니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병이 났을 때, 네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너의 그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가 봐라, 그건 비정상이다! 그런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지 말거라. 괴로운 것은 정상이다. 하지만 괴롭다고 본분을 하지 않는다면 정상이냐? (정상이 아닙니다.) 괴롭기만 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저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그렇게도 잘 믿고 잘 추구하면서 대가도 많이 치르셨는데, 왜 이런 병에 걸리게 하셨나요?”라고 한다면, 이것은 정상이냐? (정상이 아닙니다.) 이러면 비정상이다. 왜 비정상일까? 생각하는 것이 진리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정상이라고 말한다. 금방까지도 정상이고 인성이 있다고 하다가 이번에는 왜 비정상이라고 하느냐? (진리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 패괴 성정이 있기에 어떤 때엔 갑자기 ‘정신병’을 일으킨다.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사람은 패괴 성정이 있기에 수시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거역하는 본성이 있기에, 수시로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거나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생각, 하나님을 거역하는 생각들이 생겨날 수 있다. 바로 이런 원인이다.

그럼, 정감을 벗어 버리는 이 일에서 어떤 것을 정감이 있다고 할 수 있고, 어떤 것을 정감이 없다고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느냐? 어떤 것이 정상이고 어떤 것이 비정상이냐? 예컨대, 너에게 7~8살 되는 아이가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당했다. 그러자 너는 자기 아이를 감싸면서 아이를 때린 그 집에 이치를 따지러 찾아갔다. 이것은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정상입니다.) 이것은 정상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지켜 주지 않으면 누가 지켜 주겠느냐? 남이라면 누가 너의 아이를 지켜 주겠느냐? 너의 아이인데 네가 보호해야지 누가 보호하겠느냐? 이것은 정당한 것이고, 정상이다. 반대로 너의 아이가 다른 집 아이와 함께 놀 때, 너의 아이가 사나워서 다른 집 아이를 때리고, 어느 집 아이가 온순한 걸 보면 업신여기고, 남에게 좋은 물건이나 맛있는 것이 있기만 하면 빼앗아 오는데, 너는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네 아이가 나쁜 짓 하는 것을 보고도,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도 잠자코 있는다. 이런 것을 뭐라고 하느냐? (지나친 사랑이라고 합니다.) 지나친 사랑? 이것을 정감이라고 한다. 알겠느냐? 이것이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비정상입니다.) 이런 것을 비정상이라고 하고 나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패괴 본성이다. 깨달았겠지? (네.) “네.” 이제야 깨달았다, 그렇지? 전에는 몰랐었지? (네.) 봐라, 네 아이가 맞았고 괴롭힘을 당했으니 엄마로서 아이를 편들어 주고 이치를 따지러 찾아가는 것은 어머니로서의 책임이라고 한다. 이것은 긍정적인 것이고, 네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너의 아이가 아주 사납고, 아주 나쁘고, 아주 독하여 다른 아이를 아주 모질게 때리고, 온순한 아이를 보기만 하면 “앙앙” 소리칠 때까지 때려 놓으며, 또 늘 남의 물건을 빼앗는 것을 보면서도 상관하지 않고는 “흥, 내 아이를 좀 봐, 능력이 있잖아. 크면 꼭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한다. 그런 다음 뒤에서 또 가르쳐 주기까지 한다. “누가 말을 듣지 않으면 때려도 돼!” 너는 아이가 늘 남을 괴롭힌다는 소리를 듣고도 상관하지 않고, 보고도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아이가 남을 때려 그 부모가 찾아오면 너는 또 말다툼까지 한다. 이것을 뭐라 하느냐? 이것은 정감이다. 정감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왜 정감이라고 하느냐? 왜 이것을 비정상이라고 하느냐? (원칙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칙이 없다? 이것이 원칙에 관련되느냐?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뭐라고 하느냐? 보통 말로 ‘자기 새끼 편든다’고 한다. 여기에는 ‘비뚤어졌다’는 뜻이 있지 않느냐? 다른 아이가 네 아이를 괴롭히는 것은 안 된다고 하면서 네 아이가 제멋대로 다른 집 아이를 괴롭히는 것은 왜 보지 못하느냐? 네 아이가 좀 손해 보면 바로 가서 따지면서 해결하고는 네 아이가 그렇게 나쁜 행동을 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왜 보지 못하느냐? 네가 부추겨 주기까지 한다. “잘 때렸어. 장하다. 내 아들, 용감해!” 이게 어디 엄마냐? 이것은 악독하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성정으로 놓고 보면 악독한 것이고, 정감으로 놓고 보면 어떻게 해석하겠느냐? 정감의 특징은 무엇이냐? 정감이라고 하면 부모가 정상적으로 다 해야 할 책임과는 확실히 다른 일이다. 이것은 확실히 긍정적인 것이 아니기에 이것을 ‘비뚤어졌다.’라고 한다. 그렇지? 비뚤고, 편들고, 자기 자식을 두둔한다. 이것을 정감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아이의 태도에서 엄마의 두 가지 처리법 중 어느 것이 정당한 것이냐? (첫 번째입니다.) 첫 번째가 정당한 것이다. 두 번째의 것은 무엇이냐? 두 번째는 패괴 성정의 유로이다, 그렇지? 비록 그녀가 보고 상관하지는 않았으나 속으로 어떻게 생각했겠느냐? 그녀의 마음속에서 한 가지 생각이 그를 지배했기에 잠자코 있었고, 그 일을 간섭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어쨌든 내 아들이 손해 보지 않았으니 누굴 때리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맞은 아이가 아파도 상관없어. 내 아들이 아프지 않으면 돼. 내 아들이 손해 보지 않고 괴롭힘당하지 않으면 돼. 누굴 괴롭히든 다 괜찮아, 내 아들만 괴롭힘받지 않으면 돼!’ 이것이 바로 정감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만약 그녀에게 이런 정감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공적인 일은 공정하게 처리하고 마음이 공정하였을 것이다. 그는 자기 아이가 괴롭힘당하는 것을 보고는 가서 공정한 해명을 요구하고, 또 자기 아이가 남을 괴롭히면 ‘이러면 안 돼. 꾸짖고 교육을 시켜야 돼’ “네가 이렇게 컸으니 형(오빠)으로서 어린 동생들을 괴롭히면 안 돼. 네가 이렇게 하는 건 나쁜 짓이야. 남을 괴롭히면 좋은 사람도 착한 애도 아니야. 아빠 엄마는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네가 또 이렇게 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앞으로 밥도 안 줄 거야. 벌을 줄 거야.”라고 한다면 이런 행위는 어떤 것이냐? (좋습니다.) 아이가 계속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리고 혼낼 것이다. 이런 행동은 어떠하냐? 공정하지 않으냐? (공정합니다.) 너의 행위가 공정하면 사람들이 찬성한다, 그렇지? 정감은 주로 무엇이냐? (패괴 성정입니다.) 정감이 패괴 성정인 것은 틀림없다. 그럼 정감의 실제에 대한 그 방면을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해 보거라.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지 못하고, 무조건 역성들거나 두둔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들이다. 역성들고 두둔하고 혈연 관계를 수호하므로 공정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정감이다. 그러므로 말하니, 네가 정감을 벗어 버리려면, 정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정도면 된다고 하는데, 이런 것이냐? 네가 평소에 조금도 생각지 않다가도 누가 너의 가족이나 고향을 말하고, 누가 너와 관계있는 사람을 말하기만 하면 ‘욱’ 하고 화가 치밀어 올라 꼭 그를 위해 변명을 하고 그 말을 돌려세워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지 않게 하고, 있는 힘을 다해 그의 명성을 수호하여 잘못된 것도 바로잡으려고 하고, 맞는 것도 틀린 것으로 되게 하여 다른 사람들이 조금도 말하지 못하게 하려고 하는데, 이것을 바로 불공평이라고 하고 정감이라고 한다. 깨달았겠지? 정감은 단지 가족만 견주어 말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면이 넓다. 그것은 일종의 성정인 것이지, 누구와 누구 사이의 육적인 관계를 수호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이 범위만이 아니다. 아마 너의 상사일 수도 있고, 너에게 은혜를 준 사람일 수도 있고, 너를 도와준 사람일 수도 있으며, 아마 너와 관계가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고, 너와 성미가 가장 맞는 사람일 수도 있다. 또 너와 한 고향 사람일 수도 있고, 너의 친구일 수도 있으며, 네가 우러러보는 대상일 수도 있다. 이것은 모두 확정적이지 않다. 그럼 정감을 벗어 버리는 것은 단지 부모님 생각을 하지 않고 집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겠느냐? 이것만 벗어 버리는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나도 쉽게 벗어 버릴 것이다. 네가 30여 세 되면 독립할 수 있는데, 철저히 독립할 수 있다. 40여 세 되면 더욱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10, 20대일 때, 엄마 생각이 많이 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이 생각나게 된다. 잠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생각난다. 어린 나이에 금방 독립적인 생활을 하다 보니 자신의 그 독립적인 생존 능력이 아직 완전히 갖춰지지 않았으므로 자꾸 생각나게 된다. 생각난다고 해서 그것이 정감인 것은 아니다. 일 처리하는 태도와 관점이야말로 정감에 관련되는 것이다. 네가 그와 육적인 사이에서 그런 관계가 있고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살았기에 생각나는 것은 정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조금도 생각나지 않습니다.”라고 하는데, 그럼 아마 집에서 금방 나왔을 수도 있다. 금방 나오면 모든 것이 다 새로운데다가 네가 겨우 그들의 잔소리에서 벗어났기에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잔소리하는 사람이 없고 아무도 상관하지 않으니 오히려 기뻐한다, 그렇지? 그럼 기뻐한다고 해서 네게 정감이 없다는 것을 대표하느냐? 대표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저분을 보세요. 집을 떠나니 아주 기뻐하네요. 본분을 하면서 조금도 정감의 속박을 받지 않으니, 저분이야말로 정감이 없네요.”라고 한다. 이것은 문외한이 한 말이 아니냐? 보기만 해도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네가 늘 많은 것들을 교통하니 “난 진리를 알고 있어. 난 진리를 얻었어.”라고 여기는데, 이런 일들은 사실 항상 접촉할 수 있는 일이다. 그다음 그런 사람은 진리로 마구 끼워 맞추고는 제멋대로 말한다. 시간이 오래되면 사람은 영적 용어들을 한숨에 거침없이 교통할 수 있고, 정확하게 영적 용어들을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겠느냐? ‘진리를 깨달았어. 그래도 분량이 자란 거지 뭐, 그래도 진리를 적잖게 깨달았잖아. 만약 자신이 잡히게 된다고 해도 유다가 되지는 않을 거야. 최소한 이런 믿음과 결심은 있어. 이것이 분량이 아닌가? 그래도 진보는 있어.’ 자신이 맨 처음 하나님을 믿었을 때의 열심을 회상해 보더니 ‘일생을 다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 열심과 결심이 변하지 않았고, 전혀 퇴색되지 않았어. 이러면 그래도 발전이 있는 거잖아?’라고 하게 된다. 이것이 표면 현상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은 모두 표면 현상이다. 사람이 진정으로 진보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느냐? 이런 도리와 영적 단어들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늘 너희들과 함께 무엇이 진리인지, 어떤 것이 맞는 말인지에 관하여 교통하며 분별했다. 그럼 너희 마음에 어떤 일들을 깨닫게 되었느냐? (한 마디 말이 옳은지 틀리는지 어떻게 분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표면에서 일을 판단하지 말고 진리 원칙에 근거해 일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소의 그런 표면의 좋은 행위, 일부 영적인 도리를 진리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좋은 행위나 옳은 논법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맞다고 해도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진리와 무관하다. 네가 만약 늘 고집스럽게 그것을 진리로 대한다면 너는 영원히 진리를 깨달을 수도 없고 영원히 진리를 얻을 수도 없다. 이것이 한 방면이다. 또 한 방면은, 영적 도리로 사람에게 진리를 알게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냐? 영적 도리도 모두 맞는 말이니 모두 맞는 말에는 넣을 수 있지만 사람의 패괴 성정을 변화시키려면 그것으로 효과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럼 사람의 패괴 성정을 변화시키려면 도대체 무엇에 의해야 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진리에 의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이것은 맞는 말이고, 맞는 도리이다. 그렇지? 또 어떤 사람은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맞느냐, 틀리느냐? 또 어떤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맞느냐, 틀리느냐? (역시 맞는 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진리를 실행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봐라, 말할수록 더 적절해진다. 이 말이 맞느냐? (맞는 말입니다.) 이 말들은 다 맞다. 글자 표면상으로 보면 모두 옳은 면이 있지만 그것은 모두 가장 얕은 도리이다. 그런 도리들은 너를 구할 수 없다. 너에게 일이 닥쳤을 때 다른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세요.”라고 말하면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저에게는 어려움이 있어요. 전 내려놓을 수 없어요!”라고 하는데, 그 말이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길이 될 수 있겠느냐? 안 되겠지? (안 됩니다.) 쓸모없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세요.”라고 한다. 일이 임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세요.”라는 이 말은 적지 않게 들었지만, 너의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였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어느 방면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하느냐? 어떻게 맞춰야 하느냐? 맞춰 봤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실행의 길은 무엇이냐? 어느 방면의 진리로 너의 그 어려움을 해결해야 하느냐? 이것은 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옳은 도리일지라도 사람의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고, 사람의 패괴 성정을 해결할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의 패괴 성정을 해결할 수 있느냐? 이것이 문제이다. 그렇지? 이것은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잘 생각해 보아라.

사람이 만약 무엇이 진리인지 모른다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받아들인 것이 진리인지 아닌지를 너 자신마저도 모르면서 그것을 진리로 삼아 받아들인다면 패괴 성정을 해결할 수 있겠느냐?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느냐? 사람이 만약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느 한 가지 일에 부딪혔을 때 그 일이 어떤 진리에 연관되는지 정확하게 맞춰 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100% 안 된다. 아마 너는 또 제멋대로 끼워 맞출 것이다. “어, 이 일이 교만한 것인가?” “어, 이 일이 독선적인 것인가?” 너는 맞출 수 없다. 그럼 사람이 만약 진리를 진리로 여기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다수의 사람들은 도리를 다 진리로 여기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 봐라, 우리가 방금 정감을 예로 들었는데, 첫 번째 행위는 무엇이었느냐? 너희들은 ‘아, 그건 정감이야. 하면 안 돼. 그런 행위는 비판하고 정죄해야 돼. 그건 정감이니까.’라고 생각한다. 너는 진리에 연관되지 않는 것, 사람이 본능적으로 해야 할 것,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들을 진리로 정한 다음 그것을 억제하면서 그 원칙을 지키면 진리를 실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다음 두 번째 행위, 정말로 패괴 성정을 유로했을 때, 진리의 실행에 연관될 때, 너는 어떻게 여기느냐? “상관 안 해도 돼. 그건 별일 아니니까!” 너는 왜 그런 생각과 그런 인식이 있게 되었느냐? 무엇 때문이냐?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맞다,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한 가지 옳은 행위를 선택하고는 자신이 진리를 실행했다고 여길 때가 많다는 것이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일에 부딪히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라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혼자 글귀 도리를 좀 말하고는 고비를 넘기게 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이 패괴 성정을 유로하고도 자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고 충성심을 바치고 있다고 여길 때가 많다는 것이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착한 마음이 좀 있어 호의를 베풀었으나 사실상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고 가로막은 것이 되었는데, 스스로는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이익을 수호했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수호했다고 여기게 될 때가 많다는 것이다. 보아라, 이것은 다 어찌 된 일이냐?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네가 진리에 대해 실제적인 인식이 없기 때문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였느냐? 네가 하는 일이 언제나 진리와 위배되는 것이다. 동시에 너는 또 자신이 스스로 진리를 수호했고, 진리를 실행했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런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가장 큰 어려움이다. 어려움이긴 하지만 언제나 해결할 방법은 있는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어떤 일이 임할 때마다 그것이 전문 용어이든 고정된 단어 결합이든, 그것을 다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것이기만 하면 사람에게 아주 많은 정형이 있게 된다. 서로 다른 상황에서, 서로 다른 정형에서 사람은 일부 사상이라든가, 일부 관점들이라든가, 그리고 일부 속셈들을 유로하게 된다. 이때 너는 사람의 정형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는데, 정형이 무엇인지에 의해 그 속의 성정이 무엇인지를 결정하게 된다. 성정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네가 정확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느냐?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여 맞출 수 있게 되면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도 알게 되지 않겠느냐? 좀 복잡하다. 그렇지? 이 일을 좀 얘기해 보거라. 지금은 진리를 깨닫는 것을 중요시해야 한다. 잘 생각해 보거라. (한 가지 일에서 자매와 관점이 서로 달랐을 때, 제 의견을 고집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에서 저는 자신이 왜 혈기를 유로하게 되었는지, 왜 자신의 것을 고집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본성 쪽으로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 일을 놓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논하지 않고, 제 자신의 것만 고집하는 자신의 교만자대한 본성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본성에서부터 인식하였습니다. 저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패괴 성정을 해결하였습니다.) 이 길은 옳은 것이다. 사람의 본성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근원에서부터 파고들어야 하고 사람의 성정에서부터 파고들어야지, 행위를 파고들어서는 안 된다. 또 객관적인 이유나 객관적인 조건을 강조하여 진리와 대조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보면, 진리가 말하고 겨냥하는 것은 다 사람의 패괴 성정의 각종 정형을 겨냥한 것이다. 가장 가까운 것부터 말해 보자. 우리가 금방 말한 그 정감인데, 사람들은 때로 부모를 그리워하거나 집을 그리워하는 것을 정감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는 정감과 같은 것이냐? (아닙니다.) 그러니 너희들이 이해한 그 정감은 진리이냐? (아닙니다.) 확실히 아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진리를 잘못 터득하는 문제가 존재한다. 너는 네가 집을 좀 그리워하거나 부모를 잘 대하는 것을 정감으로 간주하였고, 정감을 이렇게 터득하였다. 이것은 진리를 편차적으로 잘못 터득한 것이 아니냐? 하지만 사실상 네가 인식한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것은 겉면이다. 하나님이 말씀한 정감은 무엇이냐? 우리가 두 번째로 든 예인데, 그 정형이다. 하나님이 폭로한 정감의 그 실질 본성의 유로인데, 그 방면이 바로 성정이다. 이 두 가지는 뚜렷이 다른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첫 번째의 것은 정상적인 현상이니 책망할 필요도 없고 깊이 파고들 필요도 없고 더욱이 해부할 필요도 없거니와 또한 자기 자신에게 맞춰 볼 필요도 없고, 어느 방면의 진리를 실행하거나 이것저것을 내려놓을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정당하단 말이냐?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냐?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냐?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이것은 정해 놓은 것이 아니고, 옳고 그름도 없다. 두 번째의 것은 성정과 연관된다. 성정과 연관되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과 맞추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정감’이란 이 두 글자와 연관된 말씀이 곧 이 방면의 성정에 연관되는 것이다. 무슨 성정이냐? 방금 우리가 말한 정감은 어느 방면의 성정이 유로된 것이냐? (역성들고, 두둔하고, 육적인 관계를 지키고, 공평함이 없는 것입니다.) 맞다. 바로 그 몇 가지 방면의 성정이 유로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한 ‘정감’이란 이 두 글자에 포함된 내용이다. 네가 만약 이것을 인식하는 데에 도달하였고, 이 정도까지 인식하는 데에 도달하였다면 “아, 이것이 바로 정감이구나.”라고 하며 맞추게 될 것이다. 네가 이런 성정 방면에 공을 들여 이런 성정, 이런 문제, 이런 정형들을 해결할 때 네가 행한 그것이 바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고, 네가 인식한 그런 정감에 포함된 정형들이 하나님이 말씀한 ‘정감’이란 이 두 글자와 완전히 서로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가 인식하게 된 진리이다. 사람들이 “무엇이 정감인지 좀 교통해 주실래요?”라고 말하니, 네가 첫 번째 정형, 즉 첫 번째 예를 교통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당신은 진리를 모르네요.”라고 말하였다면, 이 말은 맞느냐? (맞습니다.) 그 말은 맞다. 네가 그렇게 교통한 것은 진리를 모르는 표현이다. 네가 두 번째 예를 들어서 그의 성정을 해부하였다면, 그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냐 아니면 도리를 아는 것이냐?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맞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아는 것이다. 네가 말한 것, 네가 교통하고 체험하고 인식한 그것과 내용이, 하나님이 말씀한 본뜻, 즉 진리의 실질과 같은 것이라면, 하나님이 말씀한 것은 바로 그것을 가리켜 말씀한 것이다. 그럼 그것을 네가 꿰뚫어 보고 체험하고 인식하였다면 너는 진리를 얻은 것이다. 네가 얻었다는 것은 네가 이미 이 방면의 진리를 알았다는 뜻이다. 깨달았겠지? (깨달았습니다.) 네가 이 방면의 진리를 알고 나서 다시 이런 사람이 한 이 일을 보고는 “어, 정감이구나.”라고 말하게 되고, 그 일을 보고는 “아, 정상이야. 책망할 필요도 없고, 상관할 필요도 없어.”라고 말하게 된다. 너는 이런 일을 교통해야 한다. 무엇 때문이냐? 이것은 성정에 연관되기 때문이다. 봐라, 네가 일을 처리하는 것이 정확해지지 않았느냐? (그렇습니다.) 너는 일을 정확하게 처리하게 된다. 그럼 네가 진리를 아는 상황에서 말한 것들과 교통한 인식과 체험은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의 어려움도 해결해 줄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것이 바로 진리의 실제적인 면이다. 예를 들면 깨닫게 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소질이 낮아서 도달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람은 늘 “저는 양심이 없네요.”라고 말한다. 어떤 것이 정확하게 말한 것이냐? (소질이 낮은 것입니다.) 예컨대, 어느 한 가지 본분을 할 때, 그가 갖춘 지식 수준으로는 더 이상 높이 도달하지 못한다. 그가 배우지 않았기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도달하지 못하게 되니 사람들은 “잘 인식해야 해요. 본분을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아직도 많이 부족하네요.”라고 말한다. 인솔자는 “당신이란 사람은 너무 대충대충 하네요. 정말 농땡이를 잘 부리네요!”라고 죄를 뒤집어씌운다. 사실 그 사람은 그 방면의 지식 수준이 낮고,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었는데, 사람들은 그에게 대충대충 한다, 농땡이를 부린다고 하며 죄를 뒤집어씌운다. 사실 그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말해 보거라, 죄를 뒤집어씌운 것이 어떠냐? (적합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고, 남용한다고 하며, 죄를 마구 뒤집어씌우는 것이라고 한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남용하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 아니냐?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어떻게 마구 덮어씌우느냐? “이 일은 왜 그런 거예요?” “진리가 없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죄를 마구 뒤집어씌우는 것이 아니냐? “이 일을 해부해 보세요. 어떻게 된 거예요?” “인성이 없어요.” “이 일은 어찌 된 일인가요? 그 사람은 어떤가요?” “진리를 좋아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요.” 본래 인성에 문제가 있는데, 그는 뭐라 말하느냐? “소질이 낮아요!” 실제 정형과 맞지 않는 이런 논법은 다 진리를 몰라서 초래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잘못된 라벨을 한 가지 정형에 갖다 붙이고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잘못된 표현을 어떤 일에 갖다 붙인 그 행위 자체가 이미 틀린 것인데, 알맞은 진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진리를 모른다는 것은 알기 쉽게 말해서, 사람이 배가 아픈데 한사코 머리를 치료해 주는 격으로, 증상에 따라 약을 쓰지 못하고, 문제의 근원을 찾지 못하고,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야기하고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이것이 바로 진리를 모르는 것이다.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느냐?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럼 너희는 지금 아는 것이 많으냐, 적으냐? 예를 들면, 큰 방면에서 늘 “이 일에서 왜 순복하지 못하는 걸까요? 왜 그렇죠?”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겠죠!”라고 한다. 이 말은 맞느냐, 틀리느냐? 어떤 때는 맞고 어떤 때는 틀리지만, 대다수의 경우에는 다 틀린다. 이것이 바로 죄를 마구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영적 용어를 조금 숙달하고는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겠죠!”라고 마구 뒤집어씌운다. 이 문제에 관련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마구 사용한다. 바로 이런 일이다.

그럼 지금 너희가 깨달은 이런 것들과 진리라고 여겼던 것에서 도리가 얼마이고, 정말 진리인 것이 얼마나 되는지 스스로 세어 보아라. 정말 깨달았느냐? 우리, 멀리 있는 것을 얘기하지 말고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을 얘기해 보자. 진솔한 사람이란 무엇일까? 이 방면의 진리를 알고 있느냐? 어느 정도가 되어야 이 방면의 진리를 정말 알았다고 할 수 있느냐? 이것을 알고 있느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금방 어디 갔었어?” “화장실.” “뭘 하러?” “방귀 뀌러.” “이 녀석 진솔하네, 방귀 뀐 것까지도 말하네.” “소리가 컸어?” “좀 컸어.” “냄새 났어?” “조금” “아, 정말 진솔하구나! 묻는 대로 다 대답하네, 이런 걸 진솔한 사람의 기준이라고 하는 거야.” “하찮은 일마저도 감추거나 속이지 않고 회피하지 않으니, 이런 걸 진솔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야.” 이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것을 진리를 안다고 하느냐? 어떤 것을 진솔한 사람이 되는 진리를 안다고 하느냐? 도리를 말할라치면 이곳저곳에서 긁어모아 한 무더기씩 말할 수 있고, 장광설을 늘어놓으면서 큰 도리도 말할 수 있지만, 실제적인 내용이나 그 세부 사항을 언급하면 모두들 할 말이 없다. 이런 것을 진리를 모른다고 한다. 사람들은 진리를 모르면서도 언제나 ‘너무 너무 잘 알고 있어.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시지 않을 뿐이야.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내가 교회 인솔자로 된다면 교회의 사람마다 모두 진리를 아는 사람이 될 거라고 장담해. 난 그들이 다 진리를 알게 할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가련하지 않느냐? (가련합니다.) 봐라, 너희가 지금 말씀을 많이 듣고 있지만, 만약 계속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언젠가는 너희들도 바리새인과 같은 길을 갈 것이다. 바로 현시대의 바리새인이 되는 것이다. 이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 (있습니다.) 너무나도 가능하다. 인간이란 놈은 패괴 본성이 내면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에 지식을 배워 학문이 좀 있는데다가 옳은 이론이나 높은 도를 말할 줄 알게 되면, 바리새인이 되기가 아주 쉽다. 유일한 방법은, 알고 있는 그런 도리들을 진리의 실제로 되게 한다면, 너는 바리새인이 되지 않을 것이고, 바리새인의 길을 가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스스로 묵상해 보거라, 도대체 진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이 말씀하는 진솔한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몇 가지 요구 기준이 있는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그런 요구 기준이나 그런 요구들을 실행할 때, 어떤 것들을 행할 수 있는지, 하나님이 가리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진솔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도대체 사람의 어느 방면의 패괴 본성에 비춘 것인지 이 기간에 시간 날 때마다 교통을 해 보거라! 이런 것들은 깊이 파 볼 가치가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실행하라고 요구한 말씀과 진리는 모두 사람의 패괴 본성에 비춘 것이다. 그것은 절대 어떤 형식도 아니고, 어떤 암시도 아니고, 어떤 행위도 아니다. 모두 패괴 본성을 겨냥한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을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너는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거라. 만약 사람의 행위만 변화시키고, 사람의 사상을 교육시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학설이다. 그렇다면 십계명으로도 사람의 행위를 규범화할 수 있고, 어떤 교육가라도 사람의 행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은 많고도 많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진리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다. 하나님 말씀 진리의 진정한 의의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은 사람이 묵상할 가치도 있고 사고할 가치도 있으며, 늘 함께 교통해 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너희는 어떤 상황에서든 행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하나님 말씀의 원뜻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라. 참으로 너의 성정을 변화시킬 수 있고 너의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리이다. 너의 행위를 어느 정도 규범화시키고, 겉으로 점잖게 보이게 만드는 것은 전부 도리이지 진리가 아니다. 너의 겉면의 행위가 점점 고상해지고, 단정해지고 품위가 있으며 우아해지게 되는 반면, 내면 세계는 오히려 점점 어두워지고, 음험해지고 사악해지게 만든다면, 그것은 사탄의 독소이고 사탄의 논조인 것이다. 바로 사탄에게서 온 것이다. 그것은 진리도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도 아니다. 오직 사람을 진솔하게, 홀가분하게, 자유롭게 만들고, 창조주를 알 수 있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지배에 순복할 수 있게 하는 것만이 진리이다. 네가 어떤 관점을 받아들이든 어떤 길을 가든, 갈수록 하나님과 멀어진다면, 그러니까 너의 행위는 비록 좋게 변하고 인간 관계도 갈수록 좋아질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자라지 않는다면, 네가 지키고 있는 것들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진리가 아니다. 네가 어떤 길,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어떤 것들을 받아들였다고 하자. 네가 그런 것들로 인해 진실해지고 진솔해지고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게 되며, 사악한 것을 증오하고 부정적인 것을 증오하게 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고, 창조주의 안배와 주재를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그런 것은 바로 진리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너희는 이런 것에 근거해 판단해 보거라! 어떤 말을 오랜 시간 동안 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전해지지만, 아무리 말해도 사람 속에 있는 성정이 변하지 않고 정형이 조금도 바뀌지 않으며, 사람의 관점, 사고 방식, 일을 하는 출발점과 속셈에 아무런 변화도 생기지 않는다면, 그런 것들을 빨리 내던지고 더 이상 하지도 말고 지키지도 말라, 그것은 확실히 진리가 아니다. 어느 방면의 것을 실행하려고 하니 조금 힘이 들고, 처음 실행할 때에는 조금 어렵고 잘 파악되지 않았지만, 실행한 뒤에는 내면의 정형이 좋아지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 것 같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긴 것 같고, 순복할 수 있으며, 일이 임하면 그렇게 강퍅하거나 거역하지 않게 되고, 자신의 속셈과 욕망이 그렇게 강렬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그런 것들은 좋은 것이고 긍정적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길이다. 너희는 이런 원칙에 근거하여 분별하면 된다.

만약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리라고 하면, 할 수 있느냐? 하기 어렵다. 만약 정의를 내린다면 너희가 들은 다음에는 또 규례가 되고 도리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너희에게 원칙들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그런 원칙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겪고 체험한 다음 비춰 보면서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와 동시에 자신도 체험을 하면서 그렇게 비춰 보고 겪다 보면 너는 진리란 도대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이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 말씀 속의 진리를 모른다면, 사람은 영원히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한 요구가 다 높지 않고 아주 간단한 것 같아 보여도, 네가 하나님이 말씀한 진리의 그 부분을 알지 못한다면,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것과 말씀에 내포된 뜻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 말씀의 진리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알겠지? 진리에 관련되는 많은 일들은 며칠을 말해도 다 하지 못한다. 왜 며칠을 말해도 다 하지 못한다고 할까? 설마 할 말이 그렇게 많을까? 거기에는 원인이 있다. 그것은 너희가 알고 있는 게 너무도 적기 때문에 말을 적게 하거나 화제를 언급해도 너희가 갈피를 잡지 못하기에 차라리 언급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말을 간단하게 하면 너희는 건성으로 듣고 도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차라리 말하지 않는 것이 낫다. 그리하여 이리저리 말하다 보니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말이 길어지게 되고, 되풀이하여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에 관련되는 것이면 한두 마디로 끝내지 않을 때가 아주 많다. 바로 이런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저 사람들은 맨날 모여서 같은 일만 말해, 들어 보면 다 똑같아, 별다른 게 없어. 맨날 같은 걸 말하면서 밑도 끝도 없어. 그래도 계속 모여 있더라고, 저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참 재미없어.”라고 한다. 너희는 재미있느냐? (재미있습니다.) 어떤 게 재미있느냐? (갈피를 잡지 못하던 일에서 지금은 길이 좀 생겼고, 빛 비춤도 조금 있습니다.) 나아갈 곳을 찾았다. 그렇지? 빛을 찾았으면 안개 속에서 더듬는 것보다 낫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빛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늘 빛을 찾으려고 한다면 자신이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늘 빛을 찾지 않는다면, 자신이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아마 자신은 진공 속에서 살기에 패괴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을 가련하고 빈궁하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너희에게 도움이 좀 되느냐? (도움이 됩니다.) 도움이 된다면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교통하자! (네, 하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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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②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③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④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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