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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편 성정이 변화되려면 6가지 방면의 패괴 성정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목적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구원받기 위한 것입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영구한 화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면 된다. 또 뭐가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움직이면 된다. 그렇지?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실행에 속한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해서이냐? 그 목적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또 있느냐? 말해 보거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고 진리를 깨달아 진실로 하나님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진리를 찾고 구하여 진리를 사람의 생명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설교에서 늘 듣는 말, 고정된 영적 전문 용어이다. 그렇지? 또 있느냐?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며 하나님과의 정상 관계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얼마 전에 다루었던 화제이다. 또 있느냐?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살아내고, 진정한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과다. 그것은 추구하는 과정이 아니다. 또 있느냐?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 시련과 연단, 책망과 훈계, 더 나아가 징계와 채찍 속에서 살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자신을 인식하고 그와 동시에 참으로 하나님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리가 있고 인성이 있는 사람으로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하나님께서 배치해 주신 환경에서 찾고 구하고 기도하며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들은 것은 적지 않다. 최근 들어 얻은 것이 적지 않은데, 사람마다 다 빵빵하게 채워 넣었다. 주머니가 네 개든, 여섯 개든 어디에든 다 채워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밖으로 뱉을 때는 줄줄 나온다. 줄줄 연달아 나오는 그런 것들을 평소에 다 써먹을 수 있느냐? 가지고 있는 것은 적지 않다. 그리고 평소의 작은 어려움을 해결하기에는 어렵지 않다. 그렇지? 바르지 못한 마음과 생각이나, 가끔 좀 연약해지거나, 혹은 작은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것 같은 것은 제때에 바로잡을 수 있다.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나마 괜찮은데, 큰 잘못이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있겠느냐? 만약 너희에게 욥과 같은 시련이 임하면, 오늘날 숙달한 것들, 깨달은 이런 것들, 줄줄이 나오는 것들, 그것이 진리의 도리적인 방면의 것이든, 진리의 실제이든, 그것으로 굳게 설 수 있느냐?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느냐? (심지(心志)는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일이 임했을 때, 그때의 진짜 분량은 어느 정도일지 모르겠습니다.) 그 일이 아직 임하지 않았을 때는 네가 자신의 진실한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른다는 말이냐? 그 일이 임하지 않았어도 아마 자신의 진짜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것이다. 그렇지? 모른다면 아주 위험하다! 그럼 너희들이 늘 말하는 이런 영적 용어, 고정된 단어의 실제적인 면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느냐? 매 마디의 진실한 함의가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느냐? 그 속의 진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만약 알고 있고 체험했다면, 그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네가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만약 네가 단어나 용어들을 말로는 다 할 수 있지만, 체험할 때에는 항상 쓰지도 못하고 너의 어려움을 해결하지도 못하면서 네가 해마다 그런 식으로 지내 왔다면, 그것은 네가 그 방면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렇다고 할 수 있지 않으냐?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런 것이다. 그럼 이렇게 많이 말했는데,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오늘까지 하나님을 믿어 온 사람은 기독교인들과 이방인들보다는 확실히 진리를 좀 깨달았고, 규례도 좀 지키고, 하나님 역사의 이상(異象)도 깨달았으며, 하나님의 주재 또한 좀 체험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좀 알았거나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 사람은 성정이 변화 되었느냐? 너희가 항상 듣는 것들, 즉 역사 이상, 하나님 역사의 취지, 그리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 이런 것은 이상에 속하지? 항상 듣는 이런 것들을 누구나 기본적으로 하나씩은 다 말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보다는 높아졌지? 이방인으로 있을 때보다도 많이 높아졌다. 그렇지? (네.) 아주 많이 숙달하였다. 이런 것들만으로 변화될 수 있느냐? 혹은 이런 것들만으로 변화가 되었느냐? 그러니까, 이런 것들만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있거나 혹은 이미 성정에 일부분 변화가 생겼느냐? 알고 있느냐? 가늠할 수 있느냐? 가늠할 줄 아느냐? 조용한 걸 보니 틀림없이 모르겠구나. 가늠할 줄 모르는 것이냐, 알고 있는 것이냐? 이것은 이상 방면이다.

최근에 어떤 내용을 다루면서 교통했었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렇지? 또 어떤 것을 다루었느냐? (땅의 하나님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럼 실행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느냐? (다루었습니다.) 지금은 그 두 가지이다. 어떻게 땅의 하나님을 알고, 땅의 하나님과 지내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어느 방면에 관련되는 진리이냐?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면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면이라고? (실행 방면입니다.) 실행 방면이다. 내가 아까 말했던 것들은 이상 방면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런 것들은 실행 방면에 관한 것이다. 이상에 대한 것들을 말했지만, 목적은 사람들에게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지내는 것을 실행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지에 대한 실행을 할 수 있게 해 주려는 것이다. 실행 방면의 이런 진리, 너희가 깨달은 것, 들은 것, 너희가 행할 수 있는 것들로 너희는 성정에 변화가 생기게 할 수 있느냐? 너희들은 대답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고, 의심하고 있다. 그러면 사람이 참으로 이렇게 실행하여, 즉 진리대로 실행하여 이런 진리들을 너의 실제가 되게 한다면 너의 성정이 일부분은 변화될 수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지 않으냐? 이것을 왜 대답할 엄두를 내지 못하느냐? 내가 될 수 있냐고 물었는데, 너희는 왜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 내가 말을 빨리하느냐? (빠르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는 속도가 빠르지 않다. 너희들에게 생각할 틈을 주었는데, 너희는 왜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있으니 나는 너희가 알아들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변화될 수 있다, 그렇지? (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너희들이 다 들은 다음 실행할 수 있는 것이나 이미 실행해 낸 것들로 너희에게 성정 변화가 있게 되었느냐? 알고 있느냐? (조금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이 문제를 말하자. 너의 성정에 변화를 줄 수 있는지, 즉 너의 성정에 변화가 있는지를 말하자.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느냐? (성정 변화입니다.) 성정 변화를 다루어 너희에게 자신의 성정이 변화되었는지를 알게 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내가 얘기를 다 해 주고 나면 너희는 이렇게 쥐어짤 필요도 없고, 난감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알아들었으면 아마 가늠할 줄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지금 계속 짜내고 있지만 왜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냐?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없기 때문입니다.) 맞다,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 것이다. 변화되었는지 알고 있느냐? 변화받을 수 있느냐? 그것도 말하기 어렵지? 얼마나 변했을까? 손가락을 꼽아 가며 세어 보아도 어떻게 셀 수가 없다. 그렇지? 여전히 모르고 있다. 다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어려움이지? ‘성정 변화’는 몇 글자이냐? (네 글자입니다.) ‘변화’라는 두 글자는 사실 가늠하기 어렵지 않다. ‘성정’이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사람 생존의 법칙, 사탄의 독소, 일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일을 바라보는 관점, 사탄의 독소,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사람에게 있는 천연적인 것, 생명 실질의 것들입니다.) 몇 가지냐? 거의 50~60가지는 된다. 그렇지? 대략적이다. 무엇이나 다 대략적이다. 너희가 늘 말하는 용어도 대략적이지 않으냐? 그 속의 실질적인 문제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 성정 변화는 늘 다루고 있다. 하나님을 믿어서부터 지금까지 항상 다루고 있다. 예배 때에도, 설교 교통을 들을 때에도 다루고, 시간이 나서 혼자 사색을 할 때에도 이런 유형의 화제를 생각한다. 그러나 성정 변화가 도대체 무엇인지, 성정이 변화되긴 했는지, 변화받을 수 있는지는 모른다.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었고, 어디서부터 생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너희가 어디서부터 생각해야 할지도 모르는 데다 나까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른다면 될까? (안 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느냐? 너희들이 다 동의하지 않는데! 너희가 얼마나 꽉 깨물고 말하는지 보아라! 딱 잘라서 “안 된다.”고 하지 않느냐? 내가 말을 할 때는 아주 똑 부러지게 ‘안 된다’고 하면서도, 내가 물어볼 때에는 쳐다보지 않는다. “눈을 마주치지 않을래요. 난 피할래요. 난 보지 않을래요. 내가 모른다는 것을 당신이 알지 못하게 할 거예요. 난 당신을 보지 않을 거예요.”라는 식이다. 그렇지? 우리, 성정에 대해 말해 보자. 성정이란 무엇일까? 이것이 주요 화제이다. 이것을 분명히 알게 되면 너는 성정이 변화되었는지, 어느 정도로 변화되었는지,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일을 한 가지 겪은 뒤에는 성정 변화가 있는지, 이런 것들을 아마 거의 다 알게 될 것이고, 해결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이것을 말해 보자! (네.) 좋은 일이다, 그렇지? 이런 실질적인 것들을 다루면 너희가 좀 얻을 수 있으니 어디까지나 좋은 일이다.

성정 변화를 다루려면 먼저 성정부터 말을 해야 한다. ‘성정’이란 무엇일까? 다들 이 두 글자는 알고 있고 익숙하기도 한데, 성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다. 그렇지? 모두 성정이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라. 아까 조금 말했었다. (사람이 본성으로 살아내는 것, 본성의 유로(역주: 흘러나옴)입니다.) 살아내어 유로되는 것, 맞다. 그런 의미가 좀 있다. 성정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떤 것인지 분명하지 못하고, 한두 마디로 확실하게 해석할 수도 없고, 어떻게 명사로 해석할 수도 없다. 매우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우리, 예를 들어보자. 양과 늑대가 있다. 양은 무엇을 먹느냐? (풀을 먹습니다.) 늑대는? (양을 먹습니다.) 양만 먹느냐? 고기를 먹는다. 그렇지? 고기라면 다 먹는다. 토끼는 안 먹느냐? (먹습니다.) 닭은 안 먹느냐? (먹습니다.) 그럼 풀은 먹느냐? (먹지 않습니다.) 풀은 먹지 않는다. 개는 안 먹느냐? (먹습니다.) 사람을 잡아먹느냐? (먹습니다.) 늑대는 고기라면 다 먹는다. 양과 늑대를 겉으로 보면 다 동물이다. 다 털을 두르고 있고, 두 귀에 꼬리 하나, 다리 네 개가 달렸다. 어떤 양에게는 뿔이 있다. 겉으로 보면 흰색, 검은색, 점박이 양이 있다. 늑대는? (회색과 흰색이 있습니다.) 어쨌든 모두 털을 가진 동물이다. 양은 항상 풀을 먹는다. 양의 성정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느냐? (온순합니다.) 너는 양이 풀을 먹기 때문에 온순해 보이고, 늑대는 고기를 먹고 풀을 전혀 먹지 않기 때문에 흉악해 보인다는 것이다. 양은 풀을 먹고, 늑대는 고기를 먹기 때문에 거기에 따라 그것들의 본성이 결정된 것이란 말이지? (네.) 그럼 어느 날 양이 고기를 먹고, 늑대가 풀을 먹는다면 본성이 변한 것일까? 늑대가 어떤 때에는 고기가 없는 상황에서 너무 배가 고프면 풀로 때우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 (고기를 먹는 것은 늑대의 본성 실질입니다. 풀을 먹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먹든 늑대의 본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 보아라! 어떤 화제는 다루는 사람이 없을 때, 아무도 다루지 않을 때에는 화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그것이 어찌 된 것인지 생각하지도 않게 되다가 만약 그 화제를 꺼내 다 같이 생각해 보면 ‘그러게 말이야! 늑대가 풀을 먹는다면 양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될 수 있느냐? (없습니다.) 늑대가 풀을 10끼 먹고 고기를 한 끼만 먹는다고 해도 다가가 건드리면 늑대는 예외 없이 너를 잡아먹는다. 양이 요사이에 사막에 갔는데, 풀이 없어서 고기를 먹으라고 주었다고 하자. 양도 배가 고파 눈이 뒤집히면 고기를 먹는다. 하지만 네가 양을 건드려도 양은 여전히 온순하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이것을 성정이라고 한다. 그럼 성정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본성에서 유로되는 것입니다. 생명 실질 속에 원래 있던 것이고,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이며, 고유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정이다. 바로 양과 늑대의 본성 실질이다. 늑대의 본성 실질은 무엇이냐? (흉악하고 잔인합니다.) 맞다, 흉악하고 잔인하다. 네가 늑대에게 “늑대야, 너 봐봐! 나 얼마나 말랐어! 너 좀 적게 먹는 셈 치고 나를 잡아먹지 않으면 안 될까? 이것 봐! 내가 얼마나 불쌍해? 나 정말 많이 울고 있잖니! 나 좀 불쌍하게 생각해 줘! 나 간이 다 콩알만 해졌어! 날 먹지 말아 줘!’라며 협상한다면 늑대는 마음이 움직일까? (움직이지 않습니다.) 늑대는 어떻게 할까? (그래도 잡아먹습니다.) “꺼져, 난 그래도 널 잡아먹을 거야! 협상은 무슨 협상이야. 이게 협상할 일이야? 내가 너를 안 먹으면 누굴 먹겠어? 너로 정했어! 쓸데없는 말 필요 없어! 딱 너를 먹을 거야!”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성정이다. 지금은 성정을 말하고 있다. 성정이 변화됐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예를 가지고 성정이 무엇인지만 해석하고 있다. 그럼 양은? 양의 성정은 어떤 것이냐? (온순합니다.) 양이 온순한 것은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풀을 먹을 때 귀엽다. 그렇지? (네.) 맞느냐? (양은 공격하지 않습니다.) 맞다. 그것이 성정이다. 한참 들었는데, 알아듣지 못했구나. 성정이란 무엇이냐? 평소에 네가 상관하지 않을 때에는 그것도 너를 공격하지 않는다. 이것을 성정이라고 할까? 일이 없을 때에는 아무것도 유로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풀을 뜯고 있거나 가만히 있을 때에 유로하겠느냐? 일이 없을 때에는 그것이 유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정에 미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 성정에 미치게 되느냐? (그것의 이익을 건드렸을 때입니다.) 맞다. 네가 양을 만났을 때, 때리거나 발로 차면 양에게서 어떤 표현이 나타나느냐? (온순하고 얌전합니다.) 양은 그래도 피한다. 온순하다. 그렇지? 양의 두 눈을 보아라. 언제 봐도 온순하고 담이 작고 얌전하고 공격할 줄 모른다. 이것을 성정이라고 한다. 양에게서 나타나는 성정은 어떤 것이지? 온순하고 착한 것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말을 잘 듣고 순복합니다.) 말을 잘 듣고, 순복하고, 온순하고, 착하다. 흉악한 면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늑대는? 늑대가 너를 잡아먹을 때는 네가 늑대를 건드리거나 시비 걸어서 그런 것이냐? 늑대를 건드렸기 때문에 늑대가 너를 잡아먹는 것이고, 건드리지 않았다면 너를 잡아먹지 않는 것이냐?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어찌 된 것이냐? (성정이 흉악합니다.) 사람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너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데 늑대 한 마리가 다가온다. 너를 보고 ‘며칠 동안 굶었는데, 저것이 먹을 거잖아?’라며 너에게 다가가면서 너를 잡아먹을 생각을 한다. 늑대가 너를 잡아먹으려는 생각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본성 실질에서 생긴 것입니다.) 맞다, 본성 실질에서부터 생긴 것이다. 그럼 어떤 이는 “아니에요! 지난번에 제가 저 늑대를 때린 적이 있어요! 그래서 날 잡아먹으려고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거예요.”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 것일까? 그럴 가능성도 있다. 네가 늑대를 때렸으면 늑대는 너를 해칠 것이다. 하지만 네가 늑대를 때리지 않았다면? (그래도 해칩니다.) 그래도 너를 해치고 공격할 수 있다. 늑대의 성정은 어떤 것이냐? (흉악한 것입니다.) 온순한 면이 있느냐? 착한 면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냐? (흉악하고 악독하고 잔인한 것입니다.) 잔인하고 포악하다. 동정해 주거나 불쌍하게 생각해 주는 면이 없다. 이것이 바로 늑대의 성정이다. 그럼 양과 늑대, 그 둘의 성정은 그것들의 본성 실질을 대표하지 않느냐? 이렇다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할 수 있습니다.) 왜? (성정은 본성에서 유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그것들이 유로하는 것은 그것들에게서 자연적으로 발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공시킨 사람도 없고, 부추긴 사람도 없다. 그것이 혼자 자연적으로 유로한 것이다. 가공할 필요가 없다. 늑대가 흉악하고 잔인한 것은 사람이 몰아붙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지? (네.) 그럼 양이 착하고 온순한 것은 사람이 길들여서 그렇게 된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된 것이냐? (자연적으로 유로된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유로된 것이다. 양은 그런 녀석이라는 말이다. 네가 양에게 이빨을 드러내게 할지라도 양은 너를 물지 않을 것이다. 양이 이빨 드러내는 법을 배웠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너를 잡아먹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간혹 똥고집이 있어서 오늘 아무것도 안 먹겠다고 한다 하자, 오늘 너무 더워서 물도 마시고 싶지 않고 뭘 먹고 싶지도 않고 그냥 누워 자고 싶다고 하면서 퉁명스럽게 고집 피운다고 하자. 그러면 양이 사람을 해칠까? (해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양은 영원히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양에게는 이런 실질이 갖추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성정이다. 성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런 것을 예로 들면 대략 알 수 있지 않으냐?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념적인 것이 아니고 명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이겠느냐? 이 속에는 진리가 있다. 그럼 이 속의 진리는 어떤 것이냐? 알고 있느냐? (성정은 사람의 본성과 관계있다는 것입니다.) 성정은 사람의 본성과 관계가 있다. 사람의 본성, 사람이 살아내는 성정이 변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않는다면, 사람이 살아내는 것과 자연적으로 유로되는 것들은 어떤 것일까? (악입니다.) 맞다. 자연적으로 유로되는 것들은 모두 악이고 모두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 말은 일단 여기까지 하자.

예를 다 들고 나니 성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너희는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럼 동물을 예로 들었는데, 사람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어디까지나 양과 늑대의 성정이다. 그럼 사람의 성정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관계가 있느냐? (있습니다.) 틀림없이 관계가 있다. 관계가 없으면 우리도 여기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사람의 성정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 (변화되지 않으면 늑대와 같습니다. 변화받으면 양같이 됩니다.) 봐라! 얼마나 잘 연관시키느냐! 곧바로 연관시켰다. 하지만 제대로 연관시켰을까? 아직은 잘 모른다. 별로 분명하지 않으니 분석해 봐야 한다. 그렇지? 그럼, 우리 분석을 좀 해 보자. 방금은 단순히 성정에 대해서만 말했다. 양의 성정과 늑대의 성정을 말했는데, 두 종류의 동물이 현저하게 달랐다. 늑대와 양은 각기 다른 성정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른 것을 유로한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성정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예제를 통해 사람의 성정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사람에게 도대체 어떤 성정들이 있는지 볼 수 있을까? (사람에게서 유로되는 사탄의 패괴 성정들은 바로 늑대와 같은 본성입니다.) 먼저 사람이 유로하는 것의 성질을 정하지 말고 성정에 대해 말하자. (어떤 사람과 한동안 접촉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대략 어떤 성정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말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늘 돌려 말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성정에는 궤사한 성정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말하는 것, 일하는 것, 행위를 통해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접촉하고 사귀는 것을 통해 사람의 일부 성정을 볼 수 있다. 그렇지? 보아하니 이 예를 듣고 너희도 성정이 어떤 것인지 대략 알게 되었구나. 그럼 사람에게 있는 성정에서 사람이 모르고 있고 느끼지 못하는 것,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성정인 것은 어떤 게 있느냐? 예를 들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정말 정에 잘 얽매인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는 정에 얽매이는구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나, 자기 가족과 관련되는 일에 대해 누가 너에게서 상황을 알아보고, 너를 찾아 실정을 알아보면 너는 조금도 흘리지 않고, 거기에다 감싸기까지 하는구나.”라고 한다.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정에 얽매인다고 한다. 이 말을 알아들었느냐? 들렸느냐? (들었습니다.) 이것을 사실이라고 인정하느냐? (인정합니다.) 귀로 듣기도 했겠다, 또 알아듣기도 하고 사실이라고 인정도 하고 깨닫기도 했겠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맞다고 시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시인하기도 했겠다, 됐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깨달았습니다, 알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폭로하신 것에 감사드립니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성정을 보게 되었느냐? (보았습니다.) 어떤 성정을 보게 되었느냐? (궤사한 성정입니다.) 어떻게 본 것이냐? (말에 빈틈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빈틈없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이 몇 마디를 통해 너는 성정을 보았단 말이냐? (사람이 실행해 낼 수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실행해 낼 수 있는지라는 것은 모호한 말이다. 주로 무엇을 보아야 하느냐? (유로해내는 표현을 보아야 합니다.) 어떤 유로를 하였는지 보아야 하는 것이냐? 무엇을 보아야 하느냐? 그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지, 사실을 받아들이는지, 쟁변하지 않는지, 순복이 있는지를 보아야 하느냐? (일이 임했을 때 마음과 입이 일치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즉,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좀 일리가 있다. 너희는 조금 알아들었구나. 이 자매의 말이 일리가 있다. 이런 것이다. 듣기는 들었다. 또 알아듣기도 하였고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뒤에 가서 그 일이 임했을 때, 행함은 변하지 않는데, 이것은 성정을 대표한다. 어떤 성정일까? 우리가 이렇게 말해 보자, 당시에 그 사람은 듣고 생각을 해 본다. ‘흥, 정에 얽매인다고? 그건 나도 알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사람이 어디 있어? 이렇게 많은 진리를 들었는데, 내가 정에 잘 얽매인다는 걸 모를 수 있겠어? 나보고 정에 잘 얽매인다고 하는데, 누구는 그렇지 않은가? 내 가족이고 나와 가까운 사람인데, 내가 감싸 주지 않으면 누가 감싸 주겠어? 나보고 정에 얽매인다고 정을 벗어 버리라고 하는데, 다 벗어 버리면 난 독불장군이 되잖아? 그럼 바보가 아니야? 능력 있어도 도움받아야 사는 세상인데, 내가 그렇게 바보 같아서 되겠어?’라고 한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일을 할 때에는 마음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타산하고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그런 말씀들을 대할까? 이것으로 그 사람의 성정이 결정된다. 어떤 태도이냐? ‘하나님은 말씀하실 대로 말씀하시고, 폭로하실 대로 폭로하시고, 내가 그 앞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하든 내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난 정을 벗어 버릴 생각이 없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성정이 나온 것이지? 진면모가 드러난 것이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냐? (완고하게 대항하는 것입니다.) 맞다, 완고하게 대항하는 것이다. 그 말씀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는 “아멘, 맞아요! 그래요. 받아들일게요.”라고 하지만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도 않고,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말씀을 진리로 여기지도 않고 진리로 삼아 실행하는 일은 더더욱 없다. 이것이 일종의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이 성정이다. 그런 사람에게 성질을 정해 주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성정은 일종의 본성이 유로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어떤 성정이냐? 어떤 성질이냐? 성질을 정하자. (진리를 증오하고, 하나님과 대항하며, 진리를 적대시합니다.) 또 다른 것이 있느냐? (진리를 거부합니다.) 진리를 거부하고 진리를 증오한다. (사탄 성정입니다.) 사탄 성정은 범위가 너무 넓다. 그것으로 문제가 설명되지 않는다. 이 방면 성정의 실질은 어떤 것이냐? 성질을 정하자. (교만입니다.) 이것을 교만에 나열하는 것이 적절하냐? (그다지 적절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너희 모두 속으로 좀 ‘스읏, 스읏, 스읏’ 하면서 ‘어떤 뜻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 그렇게 적절하지 않네.’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입을 열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이것은 평소에 다 이런 정형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방면의 성정을 모두 적지 않게 유로하였다. 그렇지? (네.) 그럼 성질을 정하여라. 성질을 정하면 너는 자신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자신을 알 수 있다. 말해 보거라. (외식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늘 행위 쪽으로 말하는구나, 이 방면의 성정을 정하라는 말이다. 행위는 성질이 아니다. 이것은 강퍅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것 보아라. 나는 너희가 알고 있을 줄 알았다니까!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알게 되었습니다.) 강퍅, 사람의 성정에는 이것이 있다. 있어도 너무 확실하다. 그렇지? (네.)

왜 성정이라고 말할까? 본성 실질에서 나오는 것은 네가 생각하지 않아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대로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너에게 공을 들일 필요가 없다. 의식을 바꿔 주거나 설득시켜 주거나 교육을 해 주거나 뒤에서 너에게 어떤 생각을 불어넣을 필요가 없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너는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런 것을 유로한다. 누가 너에게 가르쳐 준 것일까?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다. 어떤 사람은 늘 ‘에잇, 사탄, 나쁜 사탄, 악마가 항상 내게 나쁜 생각을 넣어 준다’고 한다. 무슨 일이든 다 사탄에게 떠민다. 그럼 너는 무엇이냐? 너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냐? 너는 흠이 없다는 것이냐? 그런데 너는 왜 그런 성정을 유로할 수 있는 것이냐? 사탄이 생각을 주는 것은 일시적인 것인데, 너는 왜 그런 본성이 있는 것이냐? 이것은 너 자신의 것이다. 다른 것에 떠밀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것을 성정이라고 한다. 아까 어떤 성정이라고 말했었지? (강퍅한 성정입니다.) 강퍅한 것은 무슨 성정이냐? 사람에게 이런 성정이 있으면 그 내면은 어떤 정형이냐?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 가지이다. 대항하는 그런 태도가 있다. 또 있느냐? (겨루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도 조금 있지만 썩 적절하지는 않다. 더 말해 보거라. (시험하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시험하는 것은 이것과 맞지 않는다.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궤사합니다.) 아니다. (제멋대로 하고 불복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불복하는 정형은 주된 것이 아니다. ‘강퍅하다’를 쉬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타산해 놓은 생각이 있기 때문에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간단하게, 겉으로 좀 얘기한 것이다. 누가 말해도 듣지 않는데, 황소 열 마리로도 돌려세우지 못할 정도이다. 하나를 딱 고집하면서 그게 옳든 틀리든 집요하게 그렇게 한다. (고집이 세고 독선적입니다.) ‘독선적’이라는 것으로 본성을 형용하기에는 너무나 약하다.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뜻이다. (패역입니다.) 일종의 패역이다. 그럼 교만은 패역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같이 요약시키면 안 된다. 그렇지? 그럼 요약하기 꽤나 어렵구나! (돌아서려고 하지 않습니다.) 죽어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지? “죽은 돼지는 뜨거운 물을 겁내지 않는다”, 이런 말이 있지 않으냐? 바로 “그게 옳다는 걸 알아도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는 식이다. 네가 “사탕을 먹으면 좋지 않아요. 사탕을 많이 먹으면 충치가 생겨요.”라고 하면, “딱 그거 먹을 거야!”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 사람은 “이가 다 충치 생겼구나.”, “그래도 먹을래.”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것이냐? 바로 일종의 성정, 강퍅이다. 이렇게 형용하고 묘사하면 강퍅한 정형에 대하여 좀 파악하게 되지 않았느냐?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다들 어떤 상황에서 강퍅한지, 강퍅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강퍅할 때가 많으냐? (많습니다.) 너무 많다! 걍퍅이 너의 생명인 이상 너의 삶과 동반하고 있다. 하루하루, 시각마다 함께하고 있다. 사람은 강퍅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오지 못하며, 강퍅함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사람은 강퍅함 때문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해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네가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지 않으면 이 방면의 성정이 변화될 수 있느냐? (없습니다.) 아주 어렵다. 그렇지? 그럼 너희는 강퍅한 방면의 성정에서 변화가 있느냐? 어느 정도로 변화되었느냐? 예전에는 사람들이 “저 녀석은 얼마나 강퍅한지, 황소 열 마리로도 돌려세울 수 없을 정도야.”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몇 마리면 돌려세울 수 있을까? ‘원래는 황소 열 마리로도 돌려세울 수 없었는데, 내가 지금은 변화가 조금 있어! 지금은 황소 아홉 마리로는 돌려세울 수 없지만 열 마리로는 가능해! 한 마리 정도 줄었어!’ 이런 것을 변화라고 한다. 말하자면, 이런 일에 부딪혔을 때 사람의 마음에 양심적인 감각이 그나마 조금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에서 내가 그래도 어느 정도는 실행을 해야지! 그래야 말이 되지. 하나님께서 이미 폭로한 이상, 나는 깨닫게 되었고 듣기도 했으니 변화가 있어야지! 열 번에서 한 번은 실행해야 해.’라고 한다면, 이런 것을 변화가 조금 있다고 한다. 2~3년, 3~5년이 지난 뒤에는 ‘내게 더 많은 변화가 있게 되고, 더 많은 것을 벗어 버렸어. 강퍅한 성정도 예전보다 더욱 적게 유로하게 됐어.’라는 정도가 되면 이것을 변화라고 할 수 있지 않으냐? 이것이 바로 변화이다. 예전에 사람들이 사탕을 먹는 것은 좋지 않고, 충치가 생긴다고 했을 때에는 “난 그것만 먹을 거야! 딱 사탕을 먹을 거야! 말 안 하면 먹지 않을 텐데, 말했으니까 난 더 먹을 거야! 많이 먹을 거야.”라고 하던 이런 성정은 없어진 것이다. “사탕을 먹으면 좋지 않다고? 그럼 좋아, 두 알만 더 먹을게, 조금만 더 먹을게.”라고 한다면 이것을 변화라고 할 수 있지 않으냐? 그 야만적이고 제멋대로였던 모습이 없어졌다. 이것이 바로 변화이다. 어느 정도로 변화되어야 그런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천천히 가야 한다. 성정 변화는 어려운 일이 아니냐?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독 치료를 위해 뼈를 긁어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더 괴로운 것이다. 그렇지? (네.)

그렇다면 너희는 강퍅한 방면에서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느냐? (이전에는 어떤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말해도 꼭 그대로 하겠다고 고집했고, 심지어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돌아섰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는 좋아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때, 그 당시에는 유로하는 것이 있었겠지만, 지나서 생각해 보면 약간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태도상의 변화도 변화이다. 변화가 좀 있는 것이다. 처음에 받아들이겠다고 하고는 분명히 옳은 것인 줄 알면서도 속으로는 대항하고 자신의 뜻대로 하던 모습이 아닌 것이다. 무조건 완전히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어느 정도 돌아선 것이다. 그 정도의 변화라면 몇 % 정도 되는지 스스로 알 수 있느냐? 5%? 10%? (5%입니다.) 10%가 안 된다. 그렇지? 10%라도 되었다면 그래도 그 당시에 사람이 뭐라고 할 때, 반감 가지는 태도는 전혀 없었을 것이고, 역행하려는 심리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없고 아마 ‘뭐라고 했더라? 오, 그런 뜻이었구나.’라고 했을 것이다. 10%도 안 된다면 태도상에서는 받아들였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언짢다. ‘가능해? 당신 말이 맞긴 한 거야? 내가 말한 것보다 못하지 않아?’라고 하면서 그 시간이 지나면 다른 생각이 조금 들게 된다. 그리고 실행할 때에는 아마 덜 실행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어쩌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이것 보아라! 성정 변화는 바로 이런 것이다. 계속 반복된다! 성정 변화는 암세포를 죽이는 것처럼 무척 힘겨운 일이다! 어떤 때에는 기분이 좋지 않아도 변하기 쉽지 않다. 또 어떤 때에는 자신과 협력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될 때도 있다. 또 어떤 때는 너와 교통하는 사람이 네가 조금 숭상하고 있는 사람이어서 너에게 더 큰 효과를 보게 해 주는 역할이 될 수 있다가도 너와 협력하는 사람이 너보다 못하고 네 눈에 들지 않는다면 너의 그 성정은 또 폭발하게 된다. 그것도 본래보다 더욱 심해져 원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성정 변화는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왜 너희에게 쉽지 않다고 말할까? 설마 너희가 소극적이 될 거라는 걱정이 없어서일까? 바로 너희에게 성정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라는 것이고, 이것을 중시하라는 말이다. 온종일 속으로 막연하고 비현실적인 영적 도리나 행실이나 규례 같은 것들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방금 우리가 한 방면의 성정에 대해 말했는데, 아직 가장 심각한 것까지 가지 않았지? 강퍅한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표현되는 일종의 태도이다. 겉으로 뚜렷하게 유로되느냐? (뚜렷하지 않습니다.) 뚜렷하지 않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너 자신만 알고 있는 것 말고는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행여 네 주변의 사람은 아마 “저 녀석은 고집이 황소 같아.”라고 하면서 알 수도 있다. 그냥 일반 말로 “고집이 황소 같다”고 표현하고 하나님 믿는 사람은 “저 녀석은 강퍅해. 웬만한 사람은 설득하지 못해. 너무 강퍅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비교적 나타나지 않고 깊은 곳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성정은 단지 이 방면만 있을까? 단지 이 방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더 많이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내가 말하는 것이 어느 방면의 성정인지를 들어 보거라. 어떤 사람이 “난 하나님 집에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순복해요, 하나님 외에 난 어떤 이에게도 순복하지 않아요. 왜냐고요? 그거야 오직 하나님께만 진리가 있고 사람에겐 다 진리가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난 아무에게도 순복하지 않는 거예요.”라는 말을 했다. 이것이 성정이 맞느냐? (맞습니다.) 이것은 솔직한 말이다! 이 말은 맞느냐? (틀렸습니다.) 왜 틀렸느냐? ‘하나님께만 순복할 수 있어! 하나님 외에는 어떤 이에게도 순복할 생각이 없어! 사람에겐 다 패괴 성정이 있기 때문에 사람의 말은 믿음성이 없어! 그래서 다 순복할 생각이 없어! 나는 하나님께만 순복할 거야.’ 이것은 어떤 성정이냐? (교만 자대(自大)하는 성정입니다.) (사탄 성정입니다.) (천사장의 성정입니다.) 이것은 교만이다. 사탄 성정이란 말을 하지 말고 천사장이라는 말도 하지 말라! 천사장의 성정은 많고도 많다. 이것은 교만이다. 이렇게 말하면 구체적이다. 그렇지? 천사장을 말하거나 사탄을 말하거나 마귀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추상적이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참 좋다고 말하는데,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면이 좋다는 것이냐? 어떻게 좋다는 것이냐? 그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네.) 교만, 이것은 성정이다. 물론 그 사람은 이것 하나만 유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너무나 뚜렷할 뿐이다. 어떤 사람은 재능을 좀 가지고 있고 조금 약삭빠른데, 은사가 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 집에서 좋은 일들을 좀 했고, 일 처리도 적지 않게 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흥! 저거 봐라! 너희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맨날 베끼고, 적고, 메모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어? 실용적으로 일 처리할 수 있어? 맨날 영적인 사람인 척만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나하고 한번 겨루어 보던가! 밖에 가서 이런저런 일을 처리해 봐, 집안에서 베끼고 쓰고 하는 거 내가 할 테니까! 아무것도 처리하지 못하면서 영적인 걸 논하기는… 너희는 다 생명이 없어, 내 생명을 봐봐! 항상 실용적으로 일 처리 하잖아.’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엇이냐? 은사와 재능을 생명으로 여겼다. 이것은 무슨 성정이냐? 재능이 좀 있고 좋은 일을 좀 하면, 생명이 있다고 여기면서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다. 기세등등해지고 다 업신여기면서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이냐? 교만이다! 이것이 교만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게 바로 교만이 아니냐! 일반적으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 교만하게 되느냐? (자본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교만합니다. 또 은사나 재능이 좀 있고 효과적인 일을 좀 할 수 있으면 교만합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은사나 재능이 없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겠네? (그들도 교만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상황인데, 교만한 성정이 유로하는 것의 일종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로하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그 사람은 쩍하면 “난 하나님께만 순복해! 아무에게도 순복하지 않아.”라고 말했다.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게 만드느냐? ‘저 사람은 정말 진리에 잘 순복해! 저 사람은 진리 외에는 아무에게도 순복하지 않는다고 하네! 그거 맞는 말이야!’라고 하게 만든다. 사실 그 사람은 누구에게도 순복하지 않는다. 그렇지? 그럼 은사가 있고 재능이 좀 있는 사람은 어땠느냐? 그것 또한 교만한 성정이 표현되는 방식이다. 그럼 이 두 가지 교만에서 어느 것이 더 교만하냐? (첫 번째가 더 교만합니다.) 어느 것이 더 교만하다고 말할 것 없이 다 매우 이지가 없다. 교만하면 사람은 이지가 없어지고, 수치를 모른다. 멍청해 가지고 바보처럼 잘난 척하는 것밖에 모르는데 다 매우 교만하다. 다 교만한 성정의 유로이고 모습이다. 그렇지? 그 사람에게 이런 성정이 없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에게 이런 성정이 없으면 그런 생각과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틀림없이 그러지 않는다. 이런 성정이 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이것을 유로할 것이다. 이 말은 틀림이 없다. 교만한 성정이 있으면 틀림없이 교만한 표현이 나타나게 되고, 틀림없이 교만한 말을 하게 되고 교만한 짓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그게 맞다. 그럼 이 방면의 성정이 없는데, 이 방면의 유로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 말이 성립이 되느냐?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것 보세요, 제가 순간 실수로 입단속을 못해서 매우 교만한 말이 한마디 튀어나왔어요.”라고 한다면, 이 말은 성립되느냐?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 성립되지 않느냐? 얘기해 보거라, 그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해부해 보아라. (자신을 알지 못하고 교만하고 독선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다. 그 사람도 그것이 교만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당신은 왜 그렇게 교만해요? 뭐가 잘났어요? 당신은 뭐가 있다고 교만한 거예요?”라고 하면서 우스워한다. 그럼 머쓱하지 않겠느냐? (머쓱해집니다.) 좀 머쓱하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실수한다니까요! 생각을 잘 안 하다 보니까, 이런 말을 하게 됐네요.”라고 한다. 이것은 체면상 창피하여 가리는 것이고, 허위적으로 포장하며 자신을 위해 변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너의 교만한 성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네가 입을 다물고 있는다고 해도 교만은 여전히 있다. 그렇지? (네.) 네가 자본이 될 만한 것이 없어도 교만할까? (교만합니다.) 네가 온종일 잠을 잔다면 교만할까? (교만합니다.) 네가 허풍을 떨지 않는다면 교만할까? (교만합니다.) 어떻게 해도 교만하니 이러면 큰일이다.

새 인솔자가 어느 교회를 가게 되었다. 거기 가서 둘러본 다음 “왜 다 낯선 사람처럼 대하지? 다들 날 보는 눈길이나 표정이 그렇게 친절하지 않은데? 어떻게 된 거야? 반기지 않는다는 얘기야?”라고 한다. 사람들이 “다 그렇지 않아요? 일반적으로 새 인솔자가 오든 예전의 인솔자가 오든 다 똑같은 태도예요. 살갑게 대하면 어떻고, 살갑지 않으면 또 어때요? 다들 형제자매인데 같이 앉아서 교통하면 되죠! 지위를 따지지 맙시다.”라고 한다. ‘어떻게 이런 태도인 거야? 난 인솔자란 말이야! 당신들이 어떻게 날 이렇게 대할 수 있어? 다른 눈으로 볼 수 없어? 난 형제자매들이 뽑은 사람이야! 그럼 당신들보다 높아야 되는 거 아니야? 나를 뽑았으면 내가 당신들보다 생명이 크지 않겠어? 인정 못 할 거야?’라고 한다. 그럼 형제자매들의 반응은 어떨까?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무슨 물건짝이야! 뭐지, 여기 와서 망나니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으름장을 놓는 건가? 누가 불복할까 봐 걱정되고, 누가 자신을 난처하게 할까 봐 걱정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별다른 반응이 없으니 화가 난다. “흥, 니들이 인정 안 할 거라고 보지 않아, 날 계속 이렇게 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좋아! 다 같이 우리, 성경을 다뤄 보자! 성경 구절 몇 개나 외울 수 있어?” “외운 게 없어요.” “그럼 그렇지, 나보다 못하잖아. 난 20구절이나 외울 수 있어. 그럼 이제 하나님 말씀을 말해 보자, 이상 방면의 말씀에 대해 누가 잘 설명할 수 있지? 이상 방면의 것, 3단계 사역에 대해서 나만큼 술술 안 나오지? 한번 해 봐, 네가 해 봐.”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어때? 넌 안 될 거라고 했잖아! 이렇지 않으면 어떻게 날 인솔자로 뽑았겠어! 어때? 굽히지 않고 되겠어? 반드시 내게 순종해야 해! 불복하는 건 잘못된 거야! 하나님에 대한 순복이 어디서 오는 건데? 하나님께 순복하는 제일 현실적인 과제가 뭔데? 인솔자에게 순복하는 거야!”라고 한다. 이것 보아라, 무슨 수법이냐? 사람들에게서 불복하고 냉담한 태도가 보여지니 사람을 다스리려고 하고, 어떻게 하려고 한다. 인솔자가 되니 사람을 휘두르려고 하고 높은 위치에 서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성정이냐? (교만한 성정입니다.) 교만하지? 큰일이다, 문제가 생긴 것이다. 교만한 성정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느냐? (쉽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다 유로한다. 누가 새로운 깨우침과 인식을 말하면 기분이 언짢아진다. ‘저 사람이 어떻게 저런 걸 말할 수 있지? 나는 왜 저런 내용을 말할 수 없지? 안 되겠어! 나도 생각 좀 해 봐야겠어! 저 사람보다 더 높은 내용을 다뤄야지.’라고 한다. 그러고는 도리를 한 보따리 가져다 말한다. 형제자매들은 그걸 듣고 “괜찮네요! 아주 좋네요, 저 사람이 해 주는 것보다 더 잘하네요.”라고 말한다. 어떤 성정이냐? (역시 교만한 성정입니다.) 지위를 다투고 교만한 것이다. 그렇지? 성정에 관련되는 것은 네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아도 여전히 네 안에 존재한다. 그것이 후벼 내면 되는 일일까? 후벼 내면 떨어질 수 있는 것이냐? 어떤 사람은 방법을 생각하여 ‘난 그것에 대해 엄청 조치를 취할 거야! 참고 억제할 거야! 유로하지 못하게 조심하고 신중하게 대할 거야.’라고 한다. 소용이 있을까? (소용없습니다.) 해 봤느냐? 틀림없이 해 봤을 것이다. 말을 한번 교만하게 하고 나면 ‘망신당했어! 또 교만한 성정을 보여 줬으니, 이건 너무 창피해! 다시는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다.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는 말은 쓸모가 없다. 네가 말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어디에 달렸느냐? (성정에 달렸습니다.) 성정에 달렸다. 이것은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그렇지? 그러므로 교만한 성정을 유로하지 않으려면 교만한 성정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 한 마디를 시정하거나, 하는 방법을 하나 바로잡는 일이 아니고, 규례를 하나 잘못 지킨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 무엇일까?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맞다, 사람의 성정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성정을 말하면 사람은 자신을 좀 더 깊이 알게 되지 않느냐? (맞습니다.) 더욱 분명하게 알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아는 것은 겉면의 성격이나 성미, 교육이나 태어난 가정 배경 등을 아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 봐요, 난 성깔이 사나워요. 어떻게 해도 고칠 수가 없어요. 이 성정이 언제면 변할 수 있을까요?”라고 한다. 맞는 말일까? (틀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또 “보다시피, 난 말주변이 없어서 맨날 말을 잘못해요. 그래서 늘 사람을 기분 상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줘요! 이거 언제면 변할 수 있을까요?”라고 한다. 이게 맞는 말이냐? (틀렸습니다.) 어디가 틀렸느냐? 성격으로 본성이 결정되지 않는다. 성격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면 패괴 성정이 없을까? 성정에 문제가 없을까? (아닙니다.)

이제 몇 가지 방면을 얘기했지? (두 가지 방면입니다.) 첫 번째가 무엇이었느냐? (강퍅입니다.) 다들 메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정 변화에서 첫 번째는 강퍅이었다. 두 번째는 무엇이었느냐? (교만입니다.) 두 번째는 교만이다. 교만에 대해선 너무 많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유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 방면이 성정이라는 것을 알고, 한 방면의 성정이라는 것을 알면 됐다. 또 하나가 있다. 누구와도 솔직한 말을 하지 않고, 누구를 대하든지 솔직한 말이 없다. 어떤 때는 자신도 자기가 하는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른다. 자신마저도 헷갈리게 만든다. 다른 사람과 말을 하면 항상 머리를 굴리고, 머릿속에서 가공을 하는데, 그 말을 하고 나면 어떤 효과를 볼 수 있을지를 먼저 가늠하고 예측한다. ‘만약 이렇게 말하면 어떤 효과를 볼 것이고, 저렇게 말하면 어떤 효과를 볼 거야!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속이고, 그 사람이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음, 이렇게 말해야겠어!’ 이것이 일종의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이 무슨 성정인지 너희는 당연히 알 것이다. 그렇지? (궤사한 성정입니다.) 맞다, 궤사하다. 궤사한 것은 변화되기 어렵냐, 어렵지 않으냐? (어렵습니다.)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성정에 관련된 건 다 충분히 변화받을 수 있는데 궤사한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 ‘어제 그 사람과 말을 하다가 사실을 좀 들켰어. 그 사람이 내 진짜 생각을 알게 됐단 말이야, 안 좋아. 오늘 그 사람과 약속을 잡고 다시 만나야겠어. 어떻게 해서든 원만하게 돌려놔야겠어. 말을 돌려 가지고 사실을 모르게 만들어야지.’ 이것은 어떤 성정이냐? 이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계획하고, 이렇게 할 때 어떤 성정을 유로하였다. 어떤 성정이냐? (궤사한 성정입니다.) 이것이 궤사한 것이다. 허튼수작을 하려는 것이다. 아직 하기도 전부터 궤사를 부린다. 이것이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성정이다. 네가 말을 했든 안 했든, 네가 일을 저질렀든 저지르지 않았든 상관없이, 궤사한 성정이 속에서 항상 너를 지배하여 너에게 수단을 부리게 만들고, 기만하게 만들고, 사람을 우롱하고 사실을 은폐하게 하고, 자신을 포장하게 만든다. 이것이 궤사한 것이다. 궤사한 사람에게는 또 어떤 구체적인 행동이 있느냐? (추측하고 의심합니다.) 의심을 잘하는 것 역시 성정의 표현이다. 두 사람이 만나서 수다를 떨고 있다. 거기에 궤사가 숨겨져 있는데, 너희들이 분별할 줄 아는지 보자. “제가 최근 여러 가지 환경을 겪게 됐어요. 그러면서 제가 그동안 하나님을 헛믿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사람 됨됨이에서 실패했습니다! 가엾고 불쌍해요! 전에는 잘하지 못했으니 앞으로 노력하면서 만회할 거예요.”라고 한다. 결론적으로 이런 말들을 한 다음엔, 아주 좋은 효과를 보게 되었다. 어떤 효과일까? 상대방이 들으면 ‘아, 이 사람 회개하는구나. 그것도 아주 철저하고 진실하구나! 의심해선 안 돼! 이 사람은 회개했고 좋아졌구나! 사람답게 살려고 하고 있어! 사람 됨됨이에서 실패했다는 말도 하고, 이 기간에 임한 사실이 하나님의 안배라는 말도 다 할 줄 알게 됐구나! 순복할 줄도 알게 되었어.’ 이런 효과를 가져다주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들은 다음엔 이런 효과가 생기게 되었다. 그 사람은 목적을 달성하지 않았느냐? (달성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의 실제 정형은 정말 본인이 말한 것과 같을까? 모를 일이다. 그 사람이 이런 효과를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무엇을 위한 목적일까? 그 사람이 이 말을 하는 의도는 그가 말하는 방식이다. 즉, 말로 이루려고 하는 효과이다. 그럼 항상 말로 효과를 보려 하고, 항상 의도가 있으며, 늘 어떤 방식이나 어떤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목적과 속셈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무슨 성정이냐? (궤사한 성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궤사한 것이다. 너무나 음험하다! 사실, 그 사람은 자신이 나쁜 사람이고, 가엾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 사람은 그냥 영적인 용어로, 영적인 말로 사람들 앞에서 환심을 사고 호감을 사는 것이다.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해 좋은 견해를 가지게 만들고, 자신이 인식이 있고 회개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이런 효과를 만들었다. 이것이 궤사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은 한 가지 성정이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이 말을 하는 방식이 있다. 상대방에게 “음식 뭐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 상대방이 “전 만터우를 좋아해요.”라고 답하면서 “그럼 당신은 뭘 좋아하세요?” 물어보면 “당신이 만터우를 좋아하니 저도 만터우 좋아해요.”라고 한다. 상대방이 “그럼 쌀밥은 싫어합니까?”라고 물으면 ‘내가 쌀밥을 좋아하는지 나도 모르겠는데?’라고 하면서 거꾸로 묻는다. “그럼 당신은 쌀밥을 좋아해요?” 상대방이 “좋아합니다.”라고 하면 “그럼 저도 좋아해요.”라고 한다. 이것은 무엇이냐? 이것은 일종의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성정이다. 궤사한 것이다. 말을 하면 진실을 꺼내지 않고 늘 닫아 놓고 있으면서 항상 사람을 떠보고 시험한다. 상대방이 진실을 꺼내 놓아도 그 사람은 꺼내지 않는다. 그 사람은 상대방이 속을 드러내면 자신도 드러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드러내도 그 사람은 드러내지 않는데, 솔직한 말이 없고 진실이 없다.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드러내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낼까?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드러내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드러낸다는 것이냐, 아니면 아예 드러내지 않는 것이냐? 궤사한 사람은 언제 가서도 진실을 꺼내지 않는다! 그 사람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 보이지 않잖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고? 몇 번 체험해 보니 정말 그렇긴 했어. 근데 우연이 아닐까? 정말일까? 확실히 모르겠어. 입증되지도 않았고 누구도 인증된 게 없으니, 알 수 없는 일이야.’라는 마음이다. 앞날의 운명을 포기해야 한다고 하면 ‘포기해야 하나?’라고 한다. 다들 포기하면서 가정도 직업도 내려놓는 것을 보면 “저 사람들처럼 저렇게 멍청할 순 없어. 난 한 수 남겨 둬야지. 너희는 참 멍청하다. 난 너희들처럼 그렇게 멍청하게 다 버리진 않을 거야, 너희 같은 것보고 바보스럽게 진솔하다고 하는 거야. 날 봐봐, 얼마나 영리해. 너희는 다 바보야, 뭘 그렇게 다 말해.”라고 한다. “음란을 저지른 적이 있어요?”라고 물으니 진솔한 사람은 “저지른 적이 있어요.”라고 한다. “몇 명 정도 돼요?”라고 물으니 생각하다가 “사람들도 다 있으니 정말 창피한데, 뒤에 가서 말하면 안 될까요?”라고 한다. “그래도 되는데, 다들 있는 자리에서 말하라고 하면 할 수 있어요?” 하니 “말할 수 있어요.”라고 한다. 그러니 ‘흥, 바보 같은 놈! 저런 걸 어떻게 말해! 맞아 죽어도 말하면 안 되지!’라고 한다. 바로 이런 태도이다. 맞아 죽어도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어떠한 사람에게도 진실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저질렀어! 나쁜 짓도 좀 했고 죄도 지었어! 사람들 앞에서 직접 죄를 인정하고 말을 하자니 체면이 구겨지는 것 같아! 어디까지나 고개를 들 수 없는 사생활이잖아! 그렇다면 난 뒤에서 하나님께는 숨기지 않고 감추지 않을 거야! 하나님과는 다 얘기할 거야! 난 하나님께는 못할 말이 없어! 완전히 툭 털어놓을 거야! 내게 필요한 게 뭔지, 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를 하나님께는 감추지 않고 숨기지 않을 거야!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 숨겨도 난 하나님께 숨기지 않을 거야.”라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은 누구에게든 다 숨기고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성정이냐? (궤사한 성정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속에는 이런 성정이 있다. 심한 사람, 가장 궤사한 사람, 즉 이 방면의 성정이 가장 심하고 가장 악질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에게도 진실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다 이 방면의 성정이 있다. 다만 경중의 차이가 서로 다를 뿐이다. 네가 난 누구에게도 다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면, 너는 궤사한 사람이 아닌 걸까? 그런 것도 아니다. 이 말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는데, 너의 체면과 관련되지 않거나 네가 책망, 훈계를 받을 만한 일도 아니라고 하자, 거기에다 너는 평소에 입이 ‘싸’서 있는 대로 다 말하고 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스타일이라고 하자. “이 일은 누가 했어요?”라고 물으면 “제가 했어요! 이거 제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하나님 집에 손해를 끼쳤네요. 이거 제 탓이에요.”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그래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때로 혼자 떳떳하지 못한 짓을 좀 했거나 속셈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이익과 관련되는 일이고, 그것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사람들이 너에게 물으면 너는 최대한 피하려고 하며 말하지 않을 것이다. 즉, 그 일을 항상 감추려고 할 것이다. 사실 어떤 사람도 알 필요는 없다. 하나님께만 털어놓으면서 마음으로 ‘하나님께 고하고 하나님께는 속이지 않을 거야.’라고 하면 된다. 이러면 궤사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어떤 일에서든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하나님께도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너희에게는 이런 성정이 있느냐? (있습니다.) 무조건 있다. 사람마다 다 있다. 아마 너는 자신이 패괴 성정을 좀 유로했고 관념을 좀 가졌고,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어느 자매나 형제에게 선입견이 있고 자신의 협력자를 뒤에서 헐뜯은 적이 있으며, 어떤 일들을 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너는 아마 툭 털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너에게는 어디까지나 피하고 싶고 꼭꼭 숨기고 싶고 털어놓고 싶지 않은 것이 항상 있다. 심지어 말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갖은 방법을 다해 은폐하고, 거짓으로 덮어 감추고 포장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어떤 성정이냐? 이것이 성정이다. 그렇지? (맞습니다.) 네가 이렇게 생각할 때, 너에게 이런 의향이 있을 때, 이런 정형 속에서 살 때, 너는 “난 진솔한 사람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솔한 사람의 모습을 내게서는 볼 수 없어. 그래서 나는 아니야! 난 영락없는 궤사한 사람이구나. 내가 비록 멍청하고 소질도 낮고 말재주도 없으며, 생각도 느리지만 궤사한 사람이구나.”라고 하면서 알게 된다. 알겠지? 이것을 성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또 어떤 사람이 “전 멍청해요! 전 시골에서 자라 식견도 짧아요. 그래서 누가 날 팔아먹어도 난 그 사람을 도와서 돈도 세어 줄 사람이에요. 전 진솔한 사람이에요!”라고 한다면, 너희는 이런 말을 듣고 속으로 어떤 반응이 생기겠느냐? (궤사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더욱 궤사한 사람이다. 너희는 들은 다음 “사람을 미혹하지 마요! 당신이 멍청하다고 하는 건 진솔한 게 아니에요. 다들 진리를 모르는 것 같아요? 잠자코 있으세요. 당신이 멍청하다고요? 당신의 궤사한 면이 저 궤사한 사람보다 더 궤사하군요. 멍청하다니요? 전혀 멍청하지 않아요.”라고 알려 줘야 할 것이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소질이 낮고 우매하고 학력이 낮고, 대학을 다닌 적이 없는 것을, 또 어떤 사람들은 돈 계산할 줄 모르고, 경제적인 부분을 잘 모르고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을,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과 지내면서 늘 사기당하고 늘 다른 사람의 속임수에 빠지고 농락당하는 것들을 근거로 자신을 진솔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것이 맞느냐? (틀렸습니다.) 이런 것을 사람을 미혹시키는 표현이라고 하고, 부끄러운 줄 모르는 표현이라고 하며, 파렴치하고 염치없는 표현이라고 한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표현이다, 역겹다! 자신이 멍청하여 당한 그런 일들을 진솔한 것으로 보면서 자신이 허튼수작을 부리는 것은 왜 해부하지 않는 것일까? 항상 말로 떠보고, 항상 분위기에 맞춰가며 항상 시험하고 항상 다른 사람에게 가상을 보여 주면서 이런 것은 왜 해부하지 않는 것이냐? 이런 일은 왜 느낌이 없는 것이냐? 왜 위장하는 것이냐? 항상 성결한 척하고, 항상 진솔한 척하고, 항상 온순한 척한다. 온순한 건 진솔한 것이 아니다! 진솔하지 못한데, 온순함이 어디에서 오겠느냐? 진솔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온순한 것이 아니다. 네가 어리석은 것은 진짜 어리석은 것이고, 네가 멍청한 것은 진짜 멍청한 것이다. 그것이 네가 궤사하지 않다는 것을 대표하지 않는다.

그럼 다시 말해 보자. 궤사한 방면의 성정을 총결해 보자! 어떤 것을 궤사하다고 하는지, 어떠한 유로가 궤사한 것인지, 요약해 보거라.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지 못하게 합니다.) 늘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늘 ‘일단 말을 해서 사람들이 진상을 알 수 있게 된다면 그 말은 하지 말아야 해! 그 단어를 꺼내지 말고 그 일을 말하지도 말아야 해! 예민한 거니까 언급하지도 말자! 이 일을 말했다가 사람들이 또 다른 무엇을 끄집어낼까 봐 걱정돼!’라는 이런 마음,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한 가지 성정이지? 궤사한 성정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일부러 불쌍한 척합니다.) 불쌍한 척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의로 허위적인 일을 하고 가상을 보여 사람들에게 온순하거나 영적이고, 진리를 좋아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또는 고난을 이겨 낼 수 있으며 원망이 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냐? (위장이고 가상입니다.) 가상의 배후에 그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어떤 성정이냐? (궤사한 성정입니다.) 맞다, 궤사한 것이다. 그렇게 하도록 그 사람을 조종하는 성정이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에게 그렇게 많은 수법과 수단이 있을 수 없다. 그것에는 뿌리가 있다. 그 뿌리가 바로 궤사한 것, 궤사한 성정이다. 궤사한 성정은 볼수록 변하기 어렵다. 그렇지? 이 방면이 쉽게 변할 수 있느냐? (쉽지 않습니다.) 너희는 얼마나 변화되었느냐? 진솔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느냐? (네, 이 방면에서 노력하고 있고 실행하고 있습니다.) 몇 걸음 내디뎠느냐? (여전히 지향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전히 지향하고 있다고? (어떤 일에서는 자신에게 속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 사람을 속이는 성분이 있고, 또 사람에게 가상을 보여 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궤사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때는 자신에게 이 방면의 성정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느냐? 그것이 궤사하다는 것만 알고 성정이라는 것은 몰랐느냐? (네.) 이제는 알았다. 그렇지? 이런 것은 도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오는 것일까? (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맞다,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것들도 사람에게 매우 방해가 되지 않느냐? 아주 다루기 어렵고 아주 처리하기 힘들고 아주 골치 아프다. 골치 아픈 점은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고통을 느끼게 한 점은 어떤 것이냐? (변하고 싶지만 이기지 못할 때, 참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그것도 한 방면이다. 그래도 그것은 쉬운 것이다. 골치 아픈 것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튀어나온다. 네가 잠이 들어 꿈을 꾸면 모르지만 일단 눈을 뜨고 생각을 하면 ‘나 오늘 거기 가서 그 사람을 만나는데, 어떻게 말할까? 뭘 가지고 말해야 그 사람을 모르게 할 수 있을까? 뭘 말해야 그 사람을 미혹할 수 있을까? 뭘 말해야 그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라고 하게 된다. 이것 보아라! 눈만 뜨면 시작된다! 자제할 수가 없다. 그렇지? (네.) 어려운 부분이 여기에 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골치 아프지? 이것을 성정이라고 한다. 궤사한 것은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알고 있느냐? 궤사한 성정을 유로하는 데에는 몇 가지 방식이 있느냐? 시험하고 기만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의심하고 추측하는 것이 있습니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위장하는 것, 허위적인 것, 거짓된 것, 교활한 것이 있습니다.) 교활한 것은 궤사한 것과 같은 부류이다. 그것은 행위(원문: 作法)가 아니다. 거의 이런 것들이다. 이런 행위가 폭로되고 표현되는 성정이 바로 궤사한 것이다. 이 방면의 성정도 교통할 만큼 거의 다 교통하였다.

이런 화제를 교통하면 사람은 이 방면의 성정에 대해 전보다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으냐? 아직도 ‘내겐 궤사한 성정이 없어! 난 궤사한 사람이 아니야! 난 이제 거의 진솔해지고 있어! 벌써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과 멀지 않았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느냐? 아직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없습니다.) 그럼 이것을 교통하기 전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어떤 사람들이지? (궤사한 사람들입니다.) 궤사한 사람도 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이 있지? 잘못된 인식이 좀 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세상에서 고지식하여 어디를 가나 억압당하고 배척을 당하는 사람들, 혹은 무엇을 해도 항상 다른 사람보다 반박자 느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늘 자신을 온순하고, 진솔하다고 한다. 멍청이도 자신을 진솔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우매한 자도 자신을 진솔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억압당하는 사람도 자신을 진솔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학력이 낮고, 상대적으로 사회에서 하류층에 속하며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자신을 천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도 자신을 진솔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잘못된 부분이 어디에 있느냐? 어떤 사람이 진솔한 사람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리를 모르는 것이다. 그렇지?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하는 진솔한 사람은 다 멍청이, 바보, 팔려 가도 판 사람을 도와 돈을 챙겨 주는 사람, 억압당하는 사람,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 언변 능력이 없는 사람, 지식이 없는 사람, 또 쉽게 사기당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이 말하는 진솔한 사람을 이런 사람들로 생각한다. 그 말은 무슨 뜻일까? 우리처럼 늘 사기당하는 사람들, 사회 하류층에 있는 사람들, 우리처럼 억압을 당하는 사람들, 멍청하고 머리가 나쁜 사람들, 항상 손해 보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 대상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같이 이렇게 비천한 사람들, 미천한 사람들, 빈궁한 사람들, 궁핍한 사람들을 구원하지 않으면 누구를 구원하시겠냐고, 그렇지 않으냐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그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하나님의 뜻도 이런 것일까?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곡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의 뜻을 곡해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 천당에는 다 어리석은 자, 멍청한 자, 무능한 자, 온통 바보들만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자들이 다 진솔한 사람이고 다 기둥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서는 억압받고 괴롭힘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기둥이 되고 다 금은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경영 계획을 어떻게 여겼느냐? 쓰레기를 수집하는 폐품 수거소로 생각한 것이 아니냐? 이런 말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더 역겨워지는구나? 좀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이런 자들은 버려야 할 물건짝이다. 너는 멍청해도 너무나 멍청하다. 진리도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알아듣지 못하는 데도 진솔한 사람이라고? 그래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원한다고? 하나님을 증거해야 할 때에 가서 허튼소리를 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 거야? 정신병자네!”라고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일까? “하나님 믿으세요. 하나님께서 정말 많은 고난을 받으셨어요. 하나님은 우리 인류를 위해 많은 대가를 치르셨어요. 믿으세요!” 이것이 정신병자가 아니냐? 이런 걸 하나님을 증거한다고 하는 걸까? 이런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기저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곡해하고, 또 자신이 곡해한 것을 곳곳에 퍼뜨리고 다니면서 진리로 간주하고 전파한다. 또한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살면서 억압당하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대상이에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사람이 돼 가지고 손해 보는 건 좋은 일이에요! 좀 바보스러운 것도 좋은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대상이거든요! 성정이 변화된 거예요!” 이것 보아라! 역겹지 않느냐? 이런 교통을 하는 사람은 너무나 역겹다. 이것은 하나님을 심히 욕되게 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역겹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하나님 나라의 기둥, 하나님께 구원받은 이긴 자들이 다 파렴치하고 진리도 전혀 모르고 사리 분별을 못하는 지지리 궁상 맞은 자들이란 말이냐? 절대 아니다! 그럼 너희는 이렇게 곡해된 말을 다시 듣게 되면, 어떻게 사역을 할 것이냐? 이 방면의 사역을 잘해야 한다. 자신을 천하게 만들지 마라! 가뜩이나 우매한데, 계속 우매한 쪽으로 중시하고 추구하고 있구나! 너에게 진솔한 사람이 되라고 한 것은 정상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궤사한 것을 벗어 버리고 진솔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진솔한 사람이란 뭘 말하느냐? 멍청이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고 얼간이도 아니며 지지리 궁상 맞은 자도 아니다. 하나님은 너에게 하나님 나라의 정병,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라는 것이다. 정병이란 뭘 말하느냐? 어느 위치에 있든, 언제 어디에 있든, 진리로 사탄과 싸우고, 하나님을 위해 멋진 승전고를 울리는 사람을 말한다. 너는 하나님 편에 서야 하고 간증이 있어야 하며 진리를 살아내어 사탄을 부끄럽게 해야 하는 것이다. 궤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진솔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바보가 되라는 말이 아니라 궤사한 방면의 성정을 벗어 버리라는 것이다. 이 방면의 성정을 벗어 버리는 것은 어떤 행실이 아니다. 말을 한 마디 적게 하거나 많이 하는 문제가 아니고, 일을 어떻게 하는 문제가 아니라, 네가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말을 할 때의 속셈, 너의 마음과 생각, 이루고자 하는 너의 목적, 너의 욕망, 너의 행동들이 근원에서부터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일단 실행은 말하지 말고 주로 성정을 말하자. 그러면 윤곽이 좀 더 뚜렷해진다. 일반적으로 이런 성정을 알게 되고 이런 성정을 유로할 때의 정형을 알게 되었으면 변화가 좀 더 쉬워지지 않겠느냐? 네가 그것이 궤사한 것인 줄을 알게 되면 변화가 쉬워지겠지? (네.) 하지만 네가 그것이 궤사한 것인 줄을 모르고, 궤사한 정형이 있는 줄을 모르거나 그것이 궤사한 성정이 유로되는 한 방면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아마 너는 변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우선 네가 이것은 한 방면의 성정이고, 궤사한 정형의 한 방면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이 방면에서 돌파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변해야 할까? 자신의 속셈을 다루고 자신의 관점을 바로잡으며, 이 방면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여,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하나님을 기만하지 않고 사람도 기만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상대방이 바보여서 그 사람과 아무 말도 안 하겠다고 해도 그 사람을 기만하려는 정형이 없고 기만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방면의 성정이 없으면 성정 변화가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알아들을 정도로 교통했지? 이것은 궤사한 방면의 성정이다.

세 가지 방면에 대해 말했다. 다음, 너희는 이 방면도 들어 보아라! 어떤 사람은 예배할 때, 모두가 앉아서 일상 생활에 대해 나누거나 각 사람의 정형을 교통할 때면 그나마 괜찮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고 분위기도 잘 맞추고, 여러 사람들과 교통하는 화제도 적절하고 합당하다. 다 같이 서로 협력하며 교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질에 관련된 문제에서 “당신은 이 일에서 속셈이 있네요. 자신의 속셈이 있어요. 그런데 말을 하지 않네요.”라며 실제적인 결함을 짚어 내면 “네! 인정해요! 받아들여요. 네, 그 일은 어떻게 어떻게 된 일이고, 여차여차 된 거예요. 그건 진리에 부합되지 않네요.”라고 한다. 실제적인 문제를 말하게 되면 겉으로는 대답을 하고 무난히 지나간다. 하지만 더 깊은 쪽으로 말하면 물병을 들어 물을 마신다. 좀 더 깊게 얘기하면 물병을 들고 화장실에 간다. 뭐하러 갔을까?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럼 왜 가장 관건적일 때, 일어나 가는 것일까?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싶지 않아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한 방면의 성정이다. 어떤 사람은 인솔자를 하면서 어떤 교통을 가장 듣기 싫어하느냐? (적그리스도와 거짓 인솔자를 분별하는 교통을 싫어합니다.) 이것은 너희가 몸소 체험한 것이다. 그렇지? ‘계속 적그리스도 분별법을 얘기하고, 거짓 인솔자나 바리새인에 대해 말하는데, 끝이 없네! 하도 많이 말해서 머리가 복잡해질 것 같아.’라고 한다. 화두를 들어보니 좀 아닌 것 같다, 인솔자를 분별하려고 한다, 그러니 “아, 밖에 아직도 올 사람이 둘이나 있는데, 마중을 가야겠어요. 먼저들 교통하고 계세요.”라고 말하고는 나간다. 진짜로 갔을까? 이 ‘갔다’를 어떻게 표현할까? 도망간 것이다. 어디로 도망갔을까?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망갔다. 피한 것이다. 왜 피했을까? 남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들으면 되지 않느냐! 들으면 본인에게도 유익하지 않으냐! 듣기 거북하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먼저 두었다가, 적어두었다가 천천히 변화받고 소화시키면 되지 않겠느냐? 왜 숨을까? 화장실에 가지 않으면 거리로 나가는데, 왜 숨는 걸까? ‘마음이 찔려서 듣기 싫어.’라고 하거나 ‘내가 거짓 그리스도도 아니고 적그리스도도 아니고 거짓 인솔자도 아닌데, 항상 날 가지고 말해서 뭐해? 끝도 없이 계속 말하네. 왜 나를 말하냐고! 다른 사람은 왜 말 안 하는데? 날 말하지 말고 악인 분별법이나 좀 말할 것이지.’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성정이냐? 이렇게 피하고 도망가고 반감을 가지는 것은 어떤 성정이냐? 이 사람은 인솔자 일꾼이다. 그럼 일반 형제자매들은 이런 정형이 없을까? (있습니다.) 금방 만나서는 모두 사랑으로 대하고, 겉면의 일을 가지고 얘기하면 할 말도 많은 것 같고, 교통하기 좋아하는 것 같고 자발적인 것 같고, 진리 방면으로 노력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문제에 관련되면, 다른 사람이 “당신은 결혼을 내려놓지 못하네요. 어떤 사람은 결혼을 내려놓지 못해서 그게 제일 큰 걸림돌이 되고, 제일 큰 짐이 되었어요. 그래서 본분을 해도 항상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하나님께 충성하지도 못해요.”라고 하면 생각을 한다. ‘어, 날 얘기하는 거네?’ 알아차렸다. 알아차리면 어떤 태도일까? ‘진리 교통할 거면 진리만 교통하면 되지, 왜 내 얘기를 해? 왜 당신들 가지고는 말을 안 해? 당신들은 다 문제 없다는 거야? 당신들은 다 진공 속에 살고 있어서 아무 문제 없나 보지? 그래서 나만 가지고 얘기하나 봐? 됐어! 이런 얘기라면 안 할 거야. 할 얘기 없어.’라는 태도이다. 어떤 성정이냐? 너 좋고 나 좋고 다 좋아야 좋은 친구지만, 일단 진리를 교통하거나 실제 상황이나, 실제적 어려움, 실제 성정 방면의 것을 교통하면, 그것이 자신의 문제와 관련된다면, 진리를 진리로 여기느냐? 진리로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어떤 태도이냐? (진리를 싫어하고 저버리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정이다. 적어 놓아라, 네 번째는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싫어하느냐? “당신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네요.” “네, 아멘!” “가정도 버리고 직장도 내려놓고, 그동안 고난도 많이 받았네요.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축복해 주시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크게 축복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이 말씀대로 실행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죠.” “아멘!” 이 방면의 진리는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일단 “그렇지만”이라고 하면 마음이 식는다. “계속해서 더 노력해야겠어요. 사람은 뭘 하면 항상 속셈이 있고, 항상 자기 뜻에 따라 제멋대로 하잖아요! 그러면 언젠가는 하나님을 거스려 하나님께 혐오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지도 못할 거예요.”라고 하면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 거지? 나보고 하는 말인 거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못 견디겠고 더 듣고 싶지 않아진다. 너를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라고 하거나 이긴 자라고 하면 ‘좋아, 다 좋아.’라고 하지만 진리를 교통하면 어떤 성정이 나타난다. ‘왜 맨날 진리 얘기만 하고, 진솔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만 얘기해? 맨날 이런 걸 얘기하는데도 달라진 게 뭐가 있어? 그래도 다 여기 앉아 있잖아? 누가 천당에 올라가 봤어?’라고 한다. 이것은 어떤 성정이냐? 진리를 싫어한다. 일단 실행에 대해 얘기하고 진지하게 대하면 극히 반감을 가지면서 귀찮아하고 저항한다. 진리를 싫어하는 이 방면의 성정은 주로 어디에서 나타나느냐? 그 성정이 표현되는 주요 문제점은 어떤 것이냐? 성정을 말해 보아라,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책망과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 성정이 표현되는 한 가지 정형이다. 책망이 임하면 ‘듣기 싫어! 듣기 싫어! 싫다고!’라고 하거나 ‘왜 다른 사람은 책망하지 않고, 하필 나만 책망하는 거야?’라고 한다. 진리를 싫어한다. 바로 긍정적인 것, 진리와 하나님의 요구,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는 것이라면 그런 사람은 다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어떤 때에는 반감을 가지고 어떤 때에는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어떤 때에는 아주 경만하게 ‘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네! 그럼 됐어.’라고 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주 경만한 태도가 있다. 대수로워하지 않으며 얼버무리거나 얼렁뚱땅하거나 아예 책임지지 않는 태도로 상대한다. 진리를 싫어하는 주요 표현은 진리를 듣자마자 반감을 가지는 하나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에도 실행하지 않고 움츠리고 자신과 무관하다고 하는 것도 포함된다. 또한 도리에 관련되면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도리를 말하고 글귀를 말하고 사람들을 자기 앞으로 모으고, 자기를 자랑하고 자신을 포장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고 체면을 세울 수 있는 것이면 청산유수 같다. 말이 끊이질 않는다. 이것 보아라! 여기에는 어떤 정황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하나님 말씀을 보고 찬양을 들으며, 맨날 입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기도하고, 마음은 한순간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 없다고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어떤 때에 그 사람에게 이 방면의 성정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느냐? (실제로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 순간, 도망갈 때입니다.) (책망과 훈계가 임하면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럼 그 사람은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하겠거나 알아듣지 못했거나 이 방면의 진리를 모른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냐? (아닙니다.) 성정이란 바로 그런 것을 가리킨다. 분명히 옳은 것이고, 긍정적인 것이고,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만족시킬 수 있게 이끌어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진리를 싫어한다고 한다. 그럼 너희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을 보았느냐? (불신파에게서 보았습니다.) 불신파는 진리를 싫어한다.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다. 그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일들을 통해 그들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을 보았느냐? 아마 그 사람은 너와 교통하다가 물병을 들고 나가지도 않았고, 자신의 어려움이나 문제에 관련되는 것을 말해도 도망가지 않고 정확히 마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도 여전히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 있다. 이것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그때는 들었는데, 나중에 실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은 조금 실행한다. 조금 실행한다고 해도 너는 절대적으로 그 사람에게 이런 성정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한 가지 성정이지 행위가 아니다. 실행하는 것과 실행하지 않는 것은 이렇게 절대적이어서 이런 성정이 있거나 없다고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런 성정이 있다. 네가 진리를 실행한다고 하여 너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지금은 성정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네가 일시적으로 진리를 실행할 수 있게 되어 너는 변화받을 필요가 없거나 이미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네가 이 방면은 실행할 수 있지만 아직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많고도 많다. 이것이 바로 성정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성정이 변화되면 겉면의 이런 정형이 다 해결된다고 한다. 문젯거리, 결함, 단점이 다 해결된다고 한다. 너의 성정이 변화되지 않았다면 겉면의 행위에 잘못이 아무리 적을지라도 변화된 것은 아니다. 정말이다. 조금 알아들었느냐? (알아들었습니다.)

그럼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란 주로 어떤 것이냐? 요약을 해 보자. 먼저 한 방면부터 말해 보자.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원문: 道)을 들으면 흥미를 가지고, 긍정적인 것을 들으면 설레며 적극적으로 향상하는 태도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 없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이 부분은 일단 부정된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에 관련된 얘기를 하거나, 하나님을 믿는 일에 관해 말하면 아주 흥미를 가진다고 하자. 밤낮 3일 동안 먹지 않고 자지 않아도 그 열정이 한결 같다고 하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어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5~6살이나 7~8살 정도 되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 아이는 하나님을 믿는 데에 관한 말을 들으면 흥미를 느끼며, 묻고, 듣고, 생각하기 좋아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련된 것은 하라는 대로 한다고 하자.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저 아이에게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 없네요.”라고 한다. 이런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냐? 어린 아이니까, 아이에게 이쁜 말을 해 주고, 찬양도 가르쳐 주고,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하나님 믿는 일을 얘기해주면 확실하게 믿는다. 한 마음으로 믿는다. 그러면 어른들은 “우리 아이에게는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 없어요. 정말 총명해요.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믿을 재목이라니까요! 하나님께서 택하셨어요.”라고 한다. 하나님이 택했다고 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절반만 맞는다. 그것은 아이는 아직 어리기 때문인데, 인생의 생존 방향이나 목표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고, 인생관이나 사회관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을 때이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그 어린 심령에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렇다고 너는 그 아이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 이렇게 말할까? (진정으로 진리를 실행해야 할 때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가 무슨 진리를 알겠느냐! 너도 아직 모르는데, 아이가 무엇을 알겠느냐! 너도 아직 많이 들어야 되고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이가 무엇을 알겠느냐! 단지 겉면의 고만한 현상으로 아이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방면의 성정이 없다고 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의 성정이 아직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바보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바보같은 말을 하면 분별력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식을 안 좋다고 할 엄마가 어디 있겠어요? 그 아이의 엄마는 바보예요. 자기 자식만 좋다고 하잖아요! 자기 자식을 나쁘다고 할 사람이 있겠어요?”라고 할 것이다. 엄마들은 다 이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아이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여진다 하여 아이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는 진리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진리를 싫어한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알아들은 상황에서, 즉 어떤 것이 긍정적인 것이고 부정적인 것인지를 아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저항하고, 반감을 가지고, 얼버무리고, 얼렁뚱땅 해치우고,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태도와 정형을 말한다. 이런 것을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라고 한다.

이제 이렇게 말하고 보니, 진리를 싫어하는 방면의 성정은 각 사람에게 다 있지 않으냐? (다 있습니다.) ‘옳다는 것을 알아도 난 실행하지 않을 거야. 옳다는 것을 알아도 안 받아들일 거야. 딱 안 받아들일 거야. 적어도 지금은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한다. 왜 그러는 걸까? (진리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싫어한다. 속에 있는 그 성정 때문에 용납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제가 이만한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에요! 하나님께서 주재하시는 거예요. 정말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어요. 저에게 정말 잘 대해 주시면서 풍성하게 베풀어 주셨어요, 그래서 우리 집은 너무나 풍족해요.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어요. 가난해 본 적도 없고 항상 풍요롭게 지내 왔어요.”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보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서부터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 사람도 마음으로부터 알고 있기 때문에 ‘내게 이런 재능이 없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지 않으셨다면 나 같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이만한 돈을 벌 수 없어. 이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야.’라고 하게 된다. 이제는 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음속으로부터 나온 진실한 생각이고 인식이며, 진실로 하나님에게 감사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사업이 망해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가난에 빠지게 되었고 지난날 부유하던 삶은 사라졌고 더 이상 그렇게 지낼 수 없게 되었다. 가난해질 대로 가난해져서 고기를 먹는 끼니도 줄어들고 좋은 옷을 입을 때도 줄어들었다. 트렌드도 따라가지 못해 밖에 나가면 체면이 서지 않게 되었다. 가난한 삶을 살기란 쉽지 않다. 왜 그렇게 됐을까? 사람이 안일을 탐하다 보니 항상 나가서 본분도 못하게 되고 돈의 노예가 되었으며, 본분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두어 간 것이다. 하나님이 너무나 많이 축복해 주셨지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안일한 것만 탐하면서 한 가족이 단란하게 지내고, 살림살이나 잘하려고만 하고, 또 본분이 임할 때에는 환경을 겁내고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 본분하러 가지 않으며, 속으로 늘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안 되는데, 거두어 가시면 안 되는데.’라고 걱정했었다. 정확하게 그 말에 따라 일이 생기게 되었다. 어떻게 되었지? 하나님이 거두어 갔다. 그 사람은 속으로 거울 보듯 너무 잘 알고 있다. ‘이건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신 거야. 징계가 임한 거야. 기도해야지!’ ‘하나님, 당신이 저를 한 번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두 번도 축복해 줄 수 있으십니다. 당신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오며 당신의 축복도 인류와 함께 하고 있사옵니다.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어쨌든 당신의 축복과 약속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뜻으로 이 말을 하는지 알겠느냐? ‘당신께서 거두어 가신다고 해도 전 순복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이다. ‘순복하겠다’고 하는 말에 기운이 없다. 나지막한 소리로 ‘거두어 가신다고 해도 전 순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지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더니 ‘흥, 기분이 별로야! 지난날들이 얼마나 좋았는데! 뭘 자꾸 거두어 가기만 하시는 거야! 집에 있으면서 본분을 해도 똑같잖아! 지체한 게 뭐가 있다고.’라고 한다. 불만이 있다. 항상 지난날을 그리워하는데, 마음이 쓰라려 온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생기며 기분이 늘 우울해진다. 이래도 마음에 하나님이 있을까? 그 사람의 하나님은 누구냐? 금전, 평안, 좋은 삶이다. 맞지?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그 사람은 복을 베풀어 주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이것이 진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 ‘거두어 가시는 이도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이 진리이다.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축복해도 다 받아들일 수 있다. 그건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유독 하나님이 거두어 갈 때에는 거두어 간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주재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고 대항하고 감정적이며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 사람에게 본분을 하라고 하면 ‘저를 좀 더 축복해 주세요! 그럼 본분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축복을 안 해 주시니 전 돈도 없어요. 이렇게 가난한데 본분을 어떻게 해요? 그럴 기분이 안 나죠.’라고 한다. 이것이 한 가지 성정이 아니냐? 이런 성정은 어떤 성정이냐? 이미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주재, 하나님의 안배를 깊이 체험했다. 느끼기도 했고 알기도 했지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까? 돈을 내려놓지 못하고 편한 삶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 가지 성정이 아니냐? 비록 크게 난리치거나 야단 법석을 떨지는 않았고 하나님께 손을 내밀어 억지로 달라고 하지도 않았으며, 사람의 힘으로 원래의 재산을 빼앗아 오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이 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낙담을 했기 때문에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면 사람 마음을 너무도 몰라주시는 거야!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면 더 이상 믿을 수 없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다면 난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아!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으면 그분도 하나님이 아닌 거야.’ 이것이 한 가지 성정이 아니냐? 이 정도가 되면 사람이 유로하는 것은 무엇일까? 진리를 이 정도까지 싫어한다면 사람이 어떤 지경까지 가게 되겠느냐? 어디로 끌려갈까? 하나님과 맞서는 지경이다. 완고하게 끝까지 맞설 것이다. 그렇지? (네.)

그럼 이쯤에서,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은 도대체 어떤 성질이라고 생각되느냐? (하나님과 적이 되고 하나님과 맞서는 것입니다.) 진리를 싫어하는 것은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고 할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든, 시련을 주든 연단을 주든, 거두어 가든, 치시든, 징계를 하시든 사람에게는 너무나 유익하다고 말하면 ‘듣기 싫어. 받아들이지 않아! 그 말은 바보에게나 하는 말이고, 상식적인 말이야. 그러니 나한테 얘기하지 마. 하나님의 축복은 실용적인 거야. 이런 상식적인 얘기로 사람 겁주려고 하지 마. 난 그 정도로 바보가 아니야!’라고 한다. 이러면 그 사람의 생각을 제대로 드러낸 것이 아니냐? 이것이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이다. 이것이 성정이다. 그렇지? 어떤 사람은 이것이 진리라는 소리를 들으면 “진리는 무슨! 그건 사람 겁주기용이에요.”라고 한다. 이것은 성정이 아니냐? “진리라고 하면 사람들이 어쩌지 못하는 것 같은데, 겁낼 게 뭐 있어요? 진리는 무슨! 그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나 속이는 말 아니에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나 속이는 말 아니에요? 진리라고 말하면 엄청 고상하고 위대하고 성결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그건 사람을 겁주는 거예요. 뻔한 상식적인 얘기고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예요.”라고 한다. 이것이 성정이 아니냐? 이것은 한 가지 성정이다. 어떤 성정이냐?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입니다.) 진리를 싫어하는 방면의 성정이 너희에게는 있느냐?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냐? (많습니다.) 아주 많다. 그럼 어떤 정형이 가장 많으냐? 너희는 내가 방금 말한 정형에서 어떤 방면이 가장 많고, 늘 있으며, 흔히 볼 수 있고 가장 깊게 느껴 본 정형이냐? (본분할 때 어려움이 없었으면 좋겠고, 심판 형벌이 오지 말았으면 좋겠고, 본분도 아주 순조롭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한 방면이다. 하나님의 주재를 거절하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을 거절한다. 그렇게 하면 좋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속으로는 저항하고 있다. 이것이 한 방면의 표현이다. 또 다른 것이 있느냐?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때는 아주 좋다가도 안배해 주신 것이 관념에 맞지 않거나 고난을 좀 받아야 할 때면 저항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또 있느냐? (본분에서 효과가 보이면 기뻐하고, 효과가 없으면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지는데,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어느 방면이냐? 정형과 맞춰 보아라. (강퍅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대해야 한다. 헷갈리지 말라. 어떤 때에는 정형이 같이 나타날 때가 있는데, 그 속에 두 가지나 세 가지 정형이 있을 때가 있고, 단순히 한 가지만 있을 때도 있다. 그래서 한 가지 성정으로 대조하여 정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어떤 때에는 한 가지 성정에서 두 가지가 유로되고, 어떤 때에는 세 가지가 유로되는데, 서로 다른 정형이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는 한 가지 성정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것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다 통과되었다. 어떤 것들인지 다 깨닫고 알게 되었으니 마음에 아마 일정한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네가 진리를 싫어하면, 분명 옳은 것인 줄 알고 있지만, 그것이 꼭 하나님 말씀이거나 진리 원칙인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이나 옳은 일, 옳은 말, 옳은 건의일 수도 있는데, 네가 “그건 진리가 아니에요. 그건 그냥 맞는 말이에요! 난 듣고 싶지 않아요. 사람 말은 안 들을 거예요.”라고 한다. 이것은 어떤 물건짝이냐? 또 성정이 유로된 것이다. 그렇지? 이 속에는 교만한 것도 있고 강퍅한 것도 있으며 또 진리를 싫어하는 것도 있다. 그럼, 진리를 싫어하는 성정에 대해서도 거의 다 알만큼 교통했지? (네.) 이 몇 방면의 성정을 얘기했는데, 성정이라면, 어떤 성정에서나 다 많은 정형이 나타나게 된다. 너는 어떤 정형이 있을 때, 그것이 어느 방면의 성정에서 나온 것인지 맞춰 보아야 한다. 이런 관계가 있는 것이다.

네 가지 항목을 교통했다. 이 정도면 되겠다. 또 다른 문제가 없느냐? 이 네 가지에서 어느 한 가지만으로도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내 말이 지나친 것 같으냐? (지나치지 않습니다.) 너희가 지나치지 않다고 말했으니, 그럼 그렇게 말하는 까닭을 얘기해 보거라. 사람의 이런 성정은 다 어떤 것에 초점을 두어 말한 것이냐? 이런 것들은 다 긍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그럼 어디에 비추어 그런 것을 부정적인 것이라고 하느냐? (진리에 비추어 하는 말입니다.) 맞다. 진리에 비춰보면 그런 것은 부정적인 것이다. 진리에 비춘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비춰 본다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성정이 부정적인 것이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와 어김없이 반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한 가지라도 갖고 있다면 너는 하나님과 철천지원수가 된다. 그럼 너는 죽기를 기다려야지 뭘 하겠느냐! 지금은 네 가지를 다 갖추고 있으니 죽기를 기다려야 하지 않겠느냐? 심각하다, 그렇지? 어느 한 가지든 진리로 가늠하면 거기에서 나타나는 성정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다 하나님을 겨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성정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사람이 이 가운데서 한 가지만 가지고 있다 해도 하나님과 합하지 못하게 되고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것을 보자! 먼저 일어나는 일을 얘기하자. 그다음 너희는 거기에 어떤 성정이 있는지 생각해 보거라.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고 하자. 한 사람이 말을 직설적으로 하여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다. 이 속에 문제가 있지 않으냐? 아직 감을 못 잡았구나. 그렇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앞으로 둘 사이가 어떻게 될지, 어떻게 지내게 될지, 너는 모르지? 그러므로 어떤 성정에 관련되지 않는다. 상대방은 듣고 ‘말을 해도 정말 거슬리게 하네?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스타일은 맞는데, 그래도 날 상처 줘서는 안 되지. 내가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거든! 좋아, 네가 날 이렇게 대하면 나도 봐줄 수 없어! 내 기분은 생각지도 않는다는 거지? 그럼 나도 더 할 말이 없지! 두고 보자! 사나이의 복수는 10년도 늦은 게 아니랬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성정이 없느냐? (있습니다.) 성정이 있다. 두 사람이 얘기하다 그저 한 마디에, 뭐 별 것도 아닌 것으로 복수하려고 든다. 그저 말 한 마디에 복수하려고 한다. 이익에 손해를 준 것도 없고 그저 일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음이 좀 괴롭고 체면이 좀 서지 않았을 뿐이다. 그 사람에게 심정을 털어놓고 상대방이 사과하면 끝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안 된다. 내려놓지 못하고 원수가 되었다. 그것도 10년 복수를 생각한다. ‘사나이가 복수하는 데에는 10년도 늦은 것이 아니다’라는 양상으로 간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악독하다고 합니다.) 맞다. 이것을 악독하다고 한다. 악독하다, 여기에서 ‘악’한 것과 ‘독’한 것은 아마 비슷할 것이다. 악독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성정이 흉악하다고 말한다. 흉악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한 사람이 본분을 하는데, 본분을 제대로 하지 못해 책망받았다고 하자. 책망이라고 하면, 말이 부드러운 것이냐, 엄하게 꾸짖는 것이냐? (엄하게 꾸짖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질책성이 있다. “무슨 본분을 이렇게 했어요?”라며 언성도 좀 높아지고, 꾸짖음이 조금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렇겠지? 책망 자체가 사람에게 유익한지 무익한지 혹은 책망 자체가 어떤 성질인지는 말하지 말자! 이 화제를 논하지 않겠다. 그저 책망받은 사람이 유로하는 성정이 어떤 것인지를 얘기하자! 책망을 받으면 마음이 언짢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책망 속에 어떤 말은 그래도 맞긴 해! 근데 그래도 듣기 너무 거북해. 난 체면이 깎였고 상처 받았어!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어 오면서 공로는 없어도 수고한 건 있잖아? 날 어떻게 이렇게 대할 수 있어? 혼내기까지 하다니. 왜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러는 거야? 이건 책망을 잘못한 거야! 거기다 어떤 일은 사실과 맞지도 않는 거잖아! 알아보지도 않고 무턱대고 책망했어! 그건 못 참지! 이건 속에서 정말 내려가지 않아!’라고 한다. 이것도 한 가지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 성정의 유로가 최대치에 달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직 더 독하게 더 악하게 유로할 수 있다. 이것은 원망과 불복과 대항이 표현된 것이다. 그럼 이쯤에서 이 성정을 흉악한 것에 귀결시킬 수 있을까? (없습니다. 아직 극에 달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극에 달하지 않았다. 그렇지? 다시 말해, 이 성정의 실질 자체로 볼 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나 혹은 하려고 하는 정도까지 가지 않았고 극에 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벌써 기미가 조금 보여진 것이고, 이 성정이 벌써 유로하고 폭발한 것이다. 곧바로 어떤 태도가 따라올까? 순복하지 못한다. 속에서부터 삐뚤어지고 괴로워한다. ‘괴롭다고 집에 가서 참을 수는 없잖아? 흥! 이 분풀이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 봐야겠어.’라는 생각을 한다. 시작되는 것이지? 어떻게 풀지? ‘흥! 상면에서 책망했다고 해도 다 맞는 건 아니야. 너희들은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난 못하겠어. 아무개와 관련된 그 일은 책망을 잘못한 거야. 그렇게 책망해서는 안 되는 거야! 그 사람은 진리에 맞는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진리에 맞지 않아. 너희들은 다 우매하고 어리석어 아무 말이나 다 받아들일지 몰라도 난 받아들이지 않아. 아니면 우리 누가 맞고 틀렸는지 따져 보면 되겠네!’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요대로 말한다. 사람들은 듣고 “옳든 아니든 순복해야죠. 본분하면서 사람에게 뒤섞임이 전혀 없을 수 있겠어요? 당신에게는 뒤섞임이 전혀 없어요? 당신은 다 맞게 했어요? 당신이 한 것이 맞다고 해도 가끔 당신을 책망하면 촉진제가 될 수 있잖아요. 그리고, 어떤 때에는 사람을 책망해도 거기에는 배경이 있잖아요! 당신이 행한 것 때문에 너무 큰 손실을 보게 되거나 여러 번 가르쳐 주었는데도 할 줄 모른다면, 그 사람도 화가 좀 나지 않겠어요? 화가 나면 듣기 거북한 말을 할 수도 있잖아요! 그게 다 잘못된 거 아니잖아요? 그런데 뭘 자꾸 따지세요? 당신이 나쁜 짓을 하는 건 되고, 다른 사람이 책망하는 건 안 된다는 거예요? 늑대가 닭 우리에 들어가 닭을 물고 가는 것은 봐 줄 수 있고, 사람이 늑대를 때려잡는 건 안 된다는 격이에요?”라고 한다. 그 사람에게서 유로된 것은 어떤 성정이냐? 늑대의 본성, 흉악한 본성, 흉악한 것이다. 성정이 흉악하다. 무슨 뜻일까? ‘나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아니야! 아무도 내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생각하지 마! 아무도 날 건들지마. 그럼 내가 만만하지 않다는 걸 보여 줄 거니까! 그러면 앞으로 날 책망 못하겠지? 그럼 내가 이긴 거잖아?’라는 것이다. 어떠냐? 성정이 흉악하다! 이것이 어찌 진리를 싫어하는 것뿐이겠느냐? 이 사람은 피하거나 도망가거나 상대하지 않거나 무시한 것만이 아니다. ‘옳든 아니든 상관없어! 난 몰라. 그게 다 뭔데! 무슨 진리네 아니네 할 거 있어! 난 딱 이렇게 믿을 거고 이런 식으로 갈 거야.’ 이런 태도가 아니라 아예 트집 잡으며 반항하는 것이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무지막지한 여자처럼 되겠다는 것이다. 트집을 잡으며 ‘당신이 날 그렇게 대할 때, 그 앞에서 내가 대꾸하지는 못해도, 뒤에 가서는 매장시켜 버릴 거야! 누가 더 강한지, 누가 누구를 이기는지 보자고! 네가 해 봤자 나 한 사람을 가지고 해 보겠지, 나는 사람들에게 더 퍼뜨려 매장시키는 걸로 널 보내 버릴 거야!’ 무엇을 위한 목적일까? ‘다른 사람들까지 일어서서 너를 반대하게 만들고, 날 위해 나서게 만들 거야.’라는 뜻이다. 성정이 드러났지? 그 사람은 사람들을 자기 앞으로 끌어오기 위한 것일까? 아니다. 분풀이를 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까지 일어나 널 반대하고 너의 말을 따르지 않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어떤 목적을 이루게 된 것이냐? 분풀이를 하게 되었다. ‘봐봐! 다들 너를 책망하지? 네가 아까 날 책망했지? 날 분통 터지게 만들었지? 난 다른 사람들이 다 네 말을 듣지 않게 만들어서 너도 분통 터지게 하면 돼. 그래야 나도 평정심을 찾을 수 있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선동하여 그 사람을 따르지 않게 만들고 반대하게 만드는 것으로 후련함을 찾았고 평정심을 찾았다. 악하지 않으냐? (악합니다.) 이것을 흉악하다고 한다. 성정이 흉악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책망 훈계를 받지 않을 때에는 양 같지만 책망 훈계가 임하거나 사실이 폭로되면 더 이상 양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양 가죽을 벗어 버린다. 무엇으로 될까? (늑대가 됩니다.) 늑대의 본성이 나오게 된다. 이것이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평소에는 왜 그런 것이 없었을까? 평소에는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 사람의 본성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맞다. 그를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늑대가 어떤 상황에서 사람을 잡아먹느냐? 배고프지 않을 때에는 잡아먹지 않는다. 그럼 배고프지 않을 때 너를 잡아먹지 않는다고 너는 늑대를 늑대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느냐? 너를 잡아먹으려고 할 때에야 늑대라고 말한다면 그때는 너무 늦지 않겠느냐? 늑대가 너를 잡아먹지 않았을 때, 네가 늑대를 가까이 두고 키우면서 ‘이 녀석은 양이야. 양처럼 귀엽고 온순해! 그래서 늑대로 보면 안 돼.’라고 한다면 바보가 아니겠느냐? 늑대가 아무리 너를 잡아먹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늘 조심스럽게 경계해야 한다. 늑대가 너를 잡아먹지 않았다고 너를 잡아먹고 싶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너를 잡아먹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배고프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에는 늑대의 본성이 있는 것이다. 그럼 ‘왜 항상 날 책망해? 왜 눈을 항상 내게만 두면서 놔주지 않는 거야?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해 보여? 나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말이야! 근데 왜 계속 나만 책망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느냐? 이것은 어떤 성정이냐? 그게 어디 한 사람만 책망한 것이냐? 사실 또한 그렇지 않다. 너희 중에 책망받지 않은 사람이 있느냐? 인솔자 일꾼들은 대부분이 다 책망 훈계를 받는다. 사역을 제멋대로 하거나 사역 안배에 따르지 않는다면 다 책망 훈계를 받게 된다. 그 사람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분명히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도 흉악한 성정의 표현이다.

너희가 본 흉악한 정형은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진리를 싫어하는 데에는 더 심한 정형이 있다. 거기에 어떤 성정이 있게 되면 흉악해질 수 있지 않으냐?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예를 들어 보자. 사람이 하나님의 주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뒤에 하나님이 그 사람의 것을 좀 거두어 갔다. 그러면 말도 없이 앞으로 전진하지도 않고 협력도 하지 않는다. 결국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다.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은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태도이고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대항하고 하나님이 거두어 간 것에 대항한다. 어떻게 대항할까? 너희들이 그 행위에 대해 말해 보거라. (교회 사역을 방해하고 교란하거나 허무는 짓, 독립왕국을 세우는 짓을 할 수 있습니다). 맞다. 그것도 한 방면이다. 교회 인솔자에서 해임된 다음 교회 생활을 하면서 늘 방해하고 교란시키며 새 인솔자가 와서 말하는 것은 다 틀렸다고 하고, 뒤에서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이 없느냐? (있습니다.) 이런 것은 무엇이라고 할까? 이런 것을 흉악하다고 한다. 그 뜻은 ‘내가 인솔자 자리에 앉지 못하면, 아무도 여기에서 발붙일 생각을 하지 마! 여기에서 다 꺼져야 돼! 너를 밀어내면 난 예전처럼 인솔자가 될 수 있어.’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만 싫어하는 것이냐? 이러면 그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궤사한 것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흉악한 것이다. 지위를 다투고 지역 싸움을 하고 자신의 이익을 다투고 자신의 명예를 다투는 것이다. 또한 복수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이런 것을 표현하는 말이 어떤 것이 있었지? ‘각자의 능력을 다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기량을 다 쓰는 것이다. 온갖 수단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구겨진 자신의 명예나 체면, 지위를 회복하겠다는 것이나 복수하려는 마음, 복수하려는 야망, 복수하려는 뜻을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것에서 나타나는 것은 다 어떤 것이냐? (흉악한 것입니다.) 흉악한 성정에 속하는 것에 어떤 행위는 바삐 서두르거나 많은 말을 하거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많은 일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이 하는 짓에 진리에 맞다고 할 만한 것이 있느냐? 혹시 진리에 부합되는 행위나 표현이 있어 흉악한 것으로 정하지 못할 만한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는 것이냐? 왜 100% 그런 표현이나 그런 일이 없을 것이고 확실히 흉악한 성정의 유로라고 확고하게 절대적으로 말하는 것이냐? (그 사람은 완전히 진리에 대항하였고, 그 다음 실제로 일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핵심을 말하지 못했고 근원을 말하지 못했다. 너희는 그 사람에게서 흉악한 성정이 유로되기 전에 그 사람의 속셈이 어떤 것인지, 목적이 어떤 것인지,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지 발견하였느냐? (사람을 자기 앞으로 끌어오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아니다. 잘 생각해 보거라. 어떤 속셈일까? 속셈과 목적을 해부해 보거라. 어떤 속셈과 목적일까?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확실하게 알겠느냐?

혹시 이러한 일을 들어 본 적이 없느냐? 어떤 사람은 집에 악한 상황이 발생해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집을 잃게 되어 그 사람은 정말 괴롭다. 그래서 다른 사람 집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 집을 보고 ‘당신네 집은 별일 없네? 여기는 왜 악한 상황이 안 생기지? 왜 내게만 그런 상황이 임했을까? 안 되겠어! 무슨 방법을 생각해서라도 당신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어야겠다. 당신도 나와 같은 고통을 받게 해줘야겠어. 모든 방법을 다 해서 당신에게도 악한 상황을 만들어 줄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이런 짓을 했든 하지 않았든, 사실로 되었든 되지 않았든, 목적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이 사람에게 이런 속셈이 있고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은 한 가지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자신도 편하게 지내지 못하니 다른 사람도 편하게 지내지 말라는 이런 성정의 성질은 어떤 것이냐? (악독한 것입니다.) 그 성정은 악독하겠지? 나쁘다, 너무 나쁘다! 사람을 나쁘다고 표현할 때에 ‘최악이다’란 말이 있다. 이 말의 유래를 알고 있느냐? 어떤 것을 ‘최악’이라고 하느냐? (머리에 종기가 나고 발에 고름이 흐를 정도로 나쁜 상황을 말합니다.) 이 말은 동북 지방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그런 것이어야 최악이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 중심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나쁜 것이다. 너무 나쁘다. 나쁘지 않은 곳이 없다. 너무나 나쁘다는 것이다. 이 말로 사람의 흉악한 정도를 표현해야 한다. 좀 전에 말했듯이 이런 성정이 있는 사람의 성질은 어떤 것이냐? 이런 성정의 성질은 대부분이 어떤 것이냐? 해부해 보거라. 그 사람이 이런 성정을 유로할 때, 그 사람이 일을 저지를 때마다 가지고 있던 속셈과 목적의 성질은 어떤 것이냐? 다시 말해, 그 사람이 이런 성정을 유로하는 출발점과 이루고자 하는 효과나 목적이 어떤 것일까?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그런 것이라면 자기 집에 악한 상황이 생겨 다른 집에서 잘 지내고 있는데, 왜 방해하는 것이냐?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상황이 생기게 해서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면 그 사람은 깨고소해한다. 만약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곳에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지? 자신을 위해서라도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되지 않느냐?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은 자신을 해치는 것과 같은 것이지 않으냐! (내가 편하지 못하면 너도 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흉악한 것이다. 그 뜻은 ‘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잖아?’이다. (그럼 너도 집에 갈 생각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맞다. ‘내 집은 없어졌는데. 넌 왜 아직도 집이 있는 거야? 너네 집이 있어서는 안 돼. 네가 집으로 갈 수 있으면 난 못 참아. 심기가 불편해! 나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너를 어떻게 해볼 거야! 그래서 나와 같은 결과를 만들어 줄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러면 나쁘지 않으냐? 이것을 나쁘다고 한다. 나쁘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성질이냐? 그런 사람은 자신의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일반적으로 어떤 짓을 하게 될까? (뒤에서 헐뜯고 교란합니다.) 그런 기미가 좀 있다. 이것이 방식이다. 그 방식의 성질이 교란하고 파괴하는 것이다. 보복도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보복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악독한 것이다. 악독한 성정이 유로되는 행위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억누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은 너무나 작다. 그러니까 아주 작은 것이라도 대표성을 띠고 있어야 한다. (공격하는 것이 있습니다.) 공격도 한 가지에 속한다. 공격이 어떤 때에는 없는 일을 꾸며 내는 것도 있다. 오해는 아니냐? (아닙니다.) 맞다. 그것은 너무 벗어난 것이다. 오해는 아니다. 더 생각해 보거라. (루머를 만들고 훼방하는 것이 있습니다.) 루머를 만들고 훼방하는 것도 맞다. 성정이 흉악한 것이 몇 가지로 나타났느냐? 방해하고 교란하고 파괴하고 보복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퍼뜨리는 것도 있습니다.) 퍼뜨리는 것은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훼방에 속한다. 훼방하고 논단하는 것이다.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뒤집어씌우는 것과 훼방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다 같은 성질의 용어이다. (없는 일을 꾸며 내는 것이 있고, 유언비어를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없는 일을 꾸며 내는 것이다. 없는 일을 꾸며 내는 것이 유언비어를 만드는 것이고 유언비어를 만드는 게 없는 일을 꾸며 내는 것이다. 없는 일을 꾸미는 것은 행위가 아니다. (보복하고 억압하고 교란하고 헐뜯고 공격하고 루머를 만들고 훼방하는 것입니다.) (논단도 있습니다.) 논단도 한 가지이다. 논단은 어떤 때에 듣기 좋게 말하기 때문에 공격하는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뒤에 가서 보면 논단인 것이다. 비교적 중성적이다. 하지만 거기에 악의가 있기 때문에 논단이라고 한다. 몇 가지이냐? (8가지입니다.) 이런 행실 가운데서 너희는 어떤 것을 할 수 있느냐? (논단이 좀 더 많이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논단이 많다고? 억압하고 보복하는 일은 할 수 없느냐? (논단에는 그런 성질을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두드러지는 것은 할 엄두를 못냅니다.) 그럼 이런 성정도 있다. 그렇지? (어떤 때에 그런 생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하려면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엄두를 못내는 것도 있었느냐?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느냐? (누가 저를 책망 훈계했는데, 불복하게 될 때, 저도 다른 사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네가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쩌지 못하는데, 좀 낮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는 없느냐? 보복하는 것말이다. 상면에서 책망을 받고 나니 너는 화가 난다. 그래서 둘러보니까 너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이 눈에 들어 온다. ‘좋아, 저 사람이야. 저 사람에게 화풀이를 해야지.’라고 하면서 분풀이 상대를 점찍은 것이다. ‘널 훈계 안 하고, 널 책망 안 하면 누굴 하겠어? 너한테 분풀이를 좀 해야겠어.’ (다른 사람을 훈계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엄두가 나지? 그럼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아니네? 어떤 행위는 네가 누구를 겨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겨냥했든, 네가 그렇게 할 수만 있으면, 상대가 너의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는 너의 성정이 있는 것이다. 알아들었지? (알겠습니다.) 그럼 어떤 상황에서 그렇지 않다고 할까? 가끔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한테는 발길질을 했지만 돌아서서 사람은 포용해 주고 인내해 주며 진리에 따라 실행할 수 있으면 된다. 그것은 괜찮다. 하지만 어떤 때에는 개나 강아지로 분풀이가 되지 못한다. 사람 안에서 그런 성정이 부추겨 그런 것을 다 하게 되는 것이다. 성정은 너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때로는 그런 배경이 있을 때, 주변에 네가 괴롭히거나 휘두를 수 있는 너보다 약한 사람이 있다면, 너는 언제든지 그 사람을 끌어다가 화풀이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주변에 적당한 상대가 없고 분을 삭히지 못했다면 너는 언젠가 화풀이를 하게 되는데, 그 일에서 인식하지 못한 이상 안 된다. 네가 ‘난 이 일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돼. 난 이성적으로 대해야 해.’라고 하면 너의 화, 그 방면의 성정을 좀 신중하게 대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좀 합당하게 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들에게도 좀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또 한 가지 상황이 있다. 일반적으로 온순한 사람을 만나면, 그러니까, 괴롭힐 수 있고 주물러도 되는 사람, 너보다 나약하고 무능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다 놀릴 수 있지 않으냐? (싫어하고 업신여깁니다.) 업신여기는 것은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것은 일종 시선이고 생각이다. 하지만 네가 그런 사람에게 어떤 짓을 할 수 있는지, 이것이 성정이다. (그 사람을 부려먹기도 하고 괴롭히기도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본분을 잘하지 못하면 쓰고 싶지 않아 합니다.) 그런 것이 다 흉악한 성정이냐? 지금은 성정을 말하고 있다. 너희가 행동 쪽으로 대충대충 말을 하니까 성정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구나. 성정 쪽으로 말을 하거라. 누군가 너희를 완전히 기분 상하게 했을 때, 너희는 그 사람을 죽이고 싶은 생각에 그 사람을 지구에서 사라질 수 있게 기도로 저주하고 싶을 때가 없느냐? 네게는 그럴 만한 권병(역주: 권세)이 없으니까 하나님의 권병을 빌리고 싶은 생각이 있을 때가 없느냐? (복음을 전할 때, 저희를 때리고, 공안에 신고하는 너무 나쁜 전도 상대를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을 증오합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하나님께서 너를 꼭 징벌하시게 할 거야.’라는 것이 유로됩니다.) 그것은 비교적 객관적이다. 사람이 그런 것을 이기기 쉽지 않다. 왜냐하면, 너는 얻어맞아 육체가 고통을 당해 속이 편치 않기 때문이다. 인격도 품위(원문: 尊嚴)도 값없이 짓밟혔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그런 것을 이기기란 쉽지 않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이 인터넷에 우리 교회를 모함하는 이미지 같은 것을 올린 걸 보게 되면, 매우 화가 나고 몹시 미워집니다.) 그런 것을 흉악하다고 해야 하느냐, 혈기라고 해야 하느냐? 아니면 정상 인성이라고 해야 하느냐? (정상 인성입니다.) 그 정도는 정상 인성의 유로이고 표현이고 반응이다. 그렇지? 어느 정도에 이르면 그런 것이 흉악으로 변할지 아느냐? 방금 말한 상황에서 흉악한 성정으로 변할 수 없느냐? 어떤 일을 하게 되면 흉악한 성정으로 변하게 될까? (실제로 하게 될 때입니다. 어떤 극단적인 일을 저지르면 그렇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할 것이다. 그 성정으로 어떤 일을 벌일 것이다. 그렇지? 지금은 그냥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으냐. 그래서 그런 것은 사람의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한다. 사람이 부정적인 것을 혐오할 줄 모르고, 긍정적인 것을 사랑할 줄 모른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양심의 기준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증오, 혐오가 어떤 행위로 변하게 된다면, 이지를 잃고, 이지의 최저선을 넘어서는 일을 저질러 사람을 죽여 법을 어기거나 인성의 최저선을 넘어서는 일을 저지르게 된다면, 이것을 흉악이라고 한다. 차이가 있지 않으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있는데, 너무 나쁘고 너무 악하고 너무 부도덕하고 너무 흉악해서 너는 매우 반감을 가진다고 하자. 그래도 되느냐? (됩니다.) 반감을 가지다 못해 기도로 저주하면 되느냐? (됩니다.) 그런데 여러 번 기도하더니 ‘하나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니까, 내가 직접 나서자’라고 하면 되느냐? (안 됩니다.) 기도하면서 분풀이를 조금 했으면 그만이다. 하나님이 하려고 하는 일을 자기가 나서서 주관하려고 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대해야 한다. 어떻게 기도를 하든 마지막엔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와서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이런 것을 이성적이라고 한다. 이것은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혈기로 하지 말아야 한다. 혈기로 해낸 일은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고 하나님께 정죄받을 것이다. 혈기로 할 때 나오는 성정은 인성의 연약함이나 일시적으로 화가 나는 정서가 아니다. 그것은 흉악한 성정인 것이다. 일단 흉악한 성정으로 정해진다면, 성정이 흉악한 것인데, 그러면 위험하다. 그럼 일반적으로 흉악한 성정 방면에서 정상적으로 유로되는 성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느냐? 극단적인 일을 하지 않고, 법을 어기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행정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인솔자에게 책망을 받고 나면 인솔자에 대해 헛소문 같은 것을 낼 수 있지 않으냐? 가끔은 그런 마음이 생겨 한참 궁리하다가 ‘인솔자도 크게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뭐! 헛소문까지 퍼뜨릴 필요가 있나? 근데 이 일은 이렇게 지나가야 하나? 먼저 이대로 지나가자. 헛소문을 내도 다들 꼭 믿어줄 것도 아니니깐. 나중에 기회 있을 때 보자.’라고 하게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한 가지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네가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네 속에 그런 것이 은밀하게 감춰져 있다. 그것이 너에게 그렇게 생각하게 하고 그렇게 하려고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결과적으로 사실로 발생하지는 않았고 기회를 찾지도 못했지만 성정은 변하지 않고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생각이 있느냐? (인솔자가 저를 교체하였을 때, 인솔자에게도 패괴 유로가 있다고 생각되어 적발 편지를 써서 그 사람을 적발하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도 더 이상 인솔자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냐?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생각이 있었습니다.) 보아라, 그런 생각은 난데없이 드는 것이냐? 그런 생각은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저절로 생겨나고 저절로 사라진다. 어떤 때는 사라지지만 어떤 때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면 문제는 해결되지만 사라지지 않으면 속이 볶인다. 그럼 사람은 자업자득하게 되는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이런 것들을 제외하고도 훨씬 많지 않느냐! 보복하는 것과 방해하는 것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다른 사람 때문에 크게 망신당하게 되면, 속으로 ‘어디 두고 보자, 이따가 나도 너를 망신당하게 해 줄 거야.’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보복인데, 한 방면의 성정이다. 그런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냐? (네, 그렇습니다.) 두 여자가 서로 말다툼을 하다가 보복한다고 하자. 원래는 정말 잘 지냈다. 사이가 좋다 못해 바지도 같이 입을 정도였는데, 어떤 일 때문에 맞지 않아서 깨지고 마지막에는 서로 원수가 된 것이다. 서로 잘 지낼 때 보면 ‘저 두 사람, 사이가 참 좋아! 서로 생각해 주고, 서로 이해해 주고, 서로 잘 돌봐주는구나. 저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좋아!’라고 하게 된다. 하지만 일이 생기니 둘 다 좋은 인간이 아니다. 둘 다 아주 사납고 악하다. 더 있느냐? 본분하면서 나타나는 어떤 표현이나 유로가 흉악한 성정의 범위에 속하는지 발견한 것이 없느냐? 발견하지 못했느냐? (발견했습니다. 생각을 좀 해 봐야 합니다.)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지금 생각해 보고 파헤쳐 본다면, 평소에 이런 방면을 전혀 중시하지 않았고, 의식하지 않고 진입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한 2년 쯤 지나서 다시 보자! 지금은 없는데, 억지로 파헤쳐도 나오지 않는다. 너무 깊이 있는 것이라서 파내지 못한다. 천천히 맞춰 보면서 체험하다 보면 어떤 것들이 흉악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평소에 이 방면에서 유로해도 해부해 보지 않아 깊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에 대해 말을 하면 참된 인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이 평소에 유로하는 것의 성질을 해부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잘 대조되지 않습니다. 사실, 유로하는 것은 있을 텐데, 자신에게서는 유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리를 깨달은 것이 너무 얕은 것이다. 진리를 모르는 게 아니라 네가 깨달은 것이 너무 얕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진리에 대해 그저 어떤 표현이나 글자 표면의 뜻에 머물러 있을 뿐, 아예 실제 상황에 대조되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런 걸까? 어떤 상황에서든 진리는 하나뿐이고 한 가지 표현뿐인데, 사람의 정형은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정형이 어떤 때는 이 범위에 있는 것이고 어떤 때는 저 범위에 있는 것이다. 네가 대충대충 겪는다면 평소에는 늘 중시하지 않다가 어느 날 기분이 좋을 때는 좀 중시하거나 생각을 해 본다. ‘결함이 적지 않네? 문제가 참 많구나.’ 하지만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체험한 것이 너무 적으면 나중에는 대부분 진리에 대해 그저 글자의 표면적인 뜻만 알게 된다. 그저 도리에만 머물고 진리의 실제적인 면은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 실제에 진입한 깊이의 정도가 너무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흉악은 해부해 볼 만한 것이다. 어떤 사람도 다 만만치 않다. 사람을 보면 별일 없을 때는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고 눈 꼬리는 내려온다. 무슨 말이냐? 다 웃는 얼굴이라는 것이다. 다들 웃을 줄 안다. 그러나 일이 임하면 입꼬리는 다 아래로 내려가고 눈을 부릅뜨는데,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돌변한다. 이런 것을 성정이라고 한다. 너 자신도 그런 것들이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나오는지? 어떻게 그렇게 바로바로 생기는지? 어쩌면 그렇게도 많은지 모른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늘 기도해야 한다. 한 방면으로는 기도하고 한 방면으로는 평소에 시간이 나기만 하면 성찰해야 한다. 일을 할 때에도 성찰하고, 다하고 난 뒤에도 반성해 봐야 한다. 일을 할 때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속셈, 생각, 속마음을 성찰해 보고, 일을 다 끝낸 다음에는 자신이 한 것에 하나님 뜻에 맞지 않은 부분이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자신의 속셈을 어떻게 만족시켰는지, 자신은 어떻게 진리에 어긋나게 했는지에 대한 이런 것을 틈만 나면 성찰해야 한다. 네가 성찰하지 않고, 날마다 이런 것들을 다 지나쳐 버리면서도 3년이나 5년 뒤에 가서 성과를 거두려고 한다면 그게 가능할까? 그것은 얼마나 허황된 생각이냐! 다섯 번째 성정, 흉악에 대해서도 거의 다 얘기가 되었지?

여섯 번째 성정도 다들 아마 익숙할 것이다. 우선 복음 전도하는 일에서부터 얘기해 보자. 복음전도에 관한 사역 안배에서 많은 방식을 적용하라고 요구하였다. 방식은 다양하다. 사랑으로 감동시키는 것이 있고, 또 어떤 것이 있느냐? 너희가 잘 알고 있으니 얘기해 보거라. (지인이 안내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지인이 안내하는 것, 그리고? (친구를 사귀듯 다가가는 것입니다) 친구처럼 다가가는 것, 거기엔 어떤 것들이 포함되느냐? (오누이처럼 지내고, 언니 동생처럼 지내고, 그리고 이성을 사귀는 방식으로 다가가는 것도 있습니다.) 핵심을 얘기했다. 이성을 사귀는 방식으로 다가가는 것에 많은 사람들은 눈이 번쩍이고 마음이 흥분된다. ‘야, 복음 전도하니까 참 좋네. 이득이 더 많네.’라고 하게 된다. 왜 이렇게 말할까? ‘이성과 교제할 수 있으니까!’ 사랑으로 감동시키는 방식이 있는데도 적용하지 않고, 지인이 안내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도 적용하지 않고, 전적으로 이성을 찾아서 친구로 사귄다. 복음 대상도 이성만 찾아다니고, 찾으면 절대 놓지 않는다. 전도해도 되는지, 합격된 전도 대상인지 상관하지 않고 일단 자신이 다가갈 수 있는 이성이고 사귀고 싶고 관심이 가는 이성이면 절대 손을 놓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전하지 마세요, 딱 보니까,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아니네요.”라고 해도 ‘싫어! 꼭 전할 거야! 저 사람으로 정했어.’라고 한다. 여기에는 어떤 성정이 있다. 어떤 성정일까? (사악한 것입니다.) 맞다. 사악이다. 복음 전도 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 사역 안배의 이 조건을 바라고, 전력으로 협력하면서 사악한 성정을 대담하게 드러내고 유로한다. 그럼 사악한 것은 이 한 가지뿐일까? 이 한 가지만 사악한 것이라고 할까?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이런 사악은 무엇에 초점을 두는 것일까? 이것은 한 가지 성정이다.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하려고 할 때, 속에 있는 어떤 성정의 지배를 받는 것인데, 그런 일을 하도록 지배받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것의 지배를 받아 그런 방식과 핑계를 이용하고, 그런 간판을 내걸고 자신의 그 성정을 만족시키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은 영락없는 사악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면 좋지 않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득죄하고, 행정을 거스르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한 가지 성정이 아니냐? 이것은 한 가지 성정에서 나타나는 일종 표현이다. 그러므로 사악한 정욕이 있고 자신의 사악한 정욕을 만족시키는 정형만을 사악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사악의 범위는 너무 좁아진다. 육체의 정욕만을 상대로 하면 범위가 너무 좁아진다. 또 어떤 것이 사악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라. 단지 한 가지 행위뿐만 아니겠지? 한가지 성정에 속하는 이상 다양한 정형이 있고, 다양한 표현이 나타나고, 다양한 유로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성정이라고 정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연애 소설 장르를 보기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치지 못한다. (세상의 조류를 좇는 것입니다. 세상의 조류를 좋아하는 것인데, 인터넷에서 야한 동영상이나 영화를 보기 좋아하고, 세상의 조류를 포기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맞다. 포기하지 않는 것도 한 방면이다. 세상의 조류, 사악한 조류를 놓지 않고 뒤처질세라 좇아간다. 그것도 사악한 성정의 일종이다.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특별한 열정을 가지고 좇아가고 미련을 두면서 거기에 빠지는 것이다. 어떻게 진리를 교통하든,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든 그런 것을 버리지 않고 거기에 빠져 있는 정도가 되는 것을 사악하다고 한다. 그럼 사악한 조류를 좇는 것에서 어떤 표현들이 나타나야 그 사람의 성정은 사악하다고 할 수 있느냐? (예를 들면, 스타나 우상을 좋아하고, 게임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겉면의 것이다. 그런 것을 좋아하는데, 왜 좋아하느냐? 어떤 것이 그 사람을 지배하여 그런 것을 좋아하게 하는데, 그런 것들의 속에 있는 어떤 것이 그 사람의 심리, 그 사람의 요구와 취미를 만족시켜 좇아가게 만드느냐? 분석해 보아라! 사악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스타를 좋아하는 것을 해부해 보자. 스타의 어떤 부분에 푹 빠지게 되고 좇아가게 되는 것이냐? (명성, 모습, 품위입니다.) 위상, 품위, 또 뭐가 있느냐? (용모도 있습니다.) 용모도 한 방면이다. 용모, 품위, 명성이 있다. (사람의 숭상도 있습니다.) 사람이 스타를 숭배하는 정도, 즉 스타의 명성이다. (사치하게 사는 삶도 있습니다.) 사치하게 사는 삶도 맞다. 그런 사치하게 사는 삶을 지향한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그런 사람이 좇아가는 이런 것들의 성질(원문: 內容)은 다 사악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런데 왜 사악한 것이라고 하는 걸까? (진리와 긍정적인 것에 어긋나고, 하나님의 요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정상 인성으로 살라고 요구하시는데, 사람의 마음은 그런 것들을 숭상합니다…) 이것은 틀에 박힌 말이다. 하다하다 할 얘기가 없어지는구나. 너는 그들의 삶을 분석해 보아라! 그들의 행동, 심지어 사람이 숭배하는 것, 그들의 겉면에 보여지는 기품, 꾸민 스타일을 보아라! 그들은 왜 그런 삶이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그들을 좇는 것일까? 어떻게 되어 사람들이 그들을 좇아가게 되는 것일까?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꾸미는데, 개인 디자이너가 있고, 개인 코디가 있고, 개인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을 두고 있으면서, 아주 멋진 형상으로 꾸미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들은 왜 스타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젠 알았느냐? 바로 사람을 홀리는 것이다. 왜 사악하다고 하느냐? 왜 사악한 쪽으로 말하겠느냐? 바로 사람을 홀리기 때문이다. 영화 배우들을 보아라. 그들이 사진 찍는 포즈, 그 눈빛이 너를 홀리고 있다. 사악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옆으로 서서 찍든, 정면으로 서서 찍든, 남자나 여자나 그들을 바라보는 핵심이 어디에 있느냐? 바로 사람의 정욕을 발산하게 하는 장면들이다. 그것은 사악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숭상하는 스타들의 그런 것, 그들의 겉모습이든, 명성이든 그들의 삶이든, 혹은 그들의 사생활이나 사람들 앞에 보여지는 생활, 어찌 됐든 그들의 그런 것을 숭상하는 사람이면 어떠하냐? (사악합니다.) 사악하지? 사악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런 것을 좋아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지금 세상의 여자들은 여배우나 스타들을 숭배한다.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냐? (따라하기 위한 것입니다.) 맞다. 따라하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어느 날, 자신도 스타처럼 되고 싶은 것이다. 스타처럼 이뻐지고, 아름다워지고, 섹시해져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좇아오게 만들고, 자신을 따르는 ‘파리떼’로 만들려는 목적, 사람들을 홀리고 싶은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다. 그 속에는 다 사악한 것이 아니냐? 남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남자들은 곧바로 여자들을 집적거린다. 그 속에는 다 사악한 것이다. 어떻게 숭배하든, 어떤 면을 숭배하든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뿐인데, 바로 사람을 홀리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사악한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런 것은 확연하게 볼 수 있다. 그럼 너희는 홀려 갈 수 있느냐? (있습니다.)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면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냐? 장담 못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 어떤 사실적인 것이 있느냐? 가끔 미녀들의 사진을 보면 몇 번 더 보게 되지 않느냐? (맞습니다.) 어떤 때, 어느 사이트에 들어 갔다가 그 안에 미녀 사진이 있는 걸 보고, 보다가 보다가 할 일을 잊어버린다. 홀려 빠져 버렸다. 그렇지? 그러면 그 여자는 목적을 이룬 것이다. 너에게서 그 효과를 보게 된 것이다. 어떠냐? 이런 것이 그 여자의 목적이다. 너를 홀리고 있어도 너는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금방 내가 물어본 것은 무슨 뜻이냐? 너희는 대답하지 못하고 있다. 홀린 적이 얼마나 되느냐? 아직도 모른다, 그렇지? 홀려 갔는데도 모르고 있다. 이런 것은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악한 성정이다.

사악한 성정은 또 있다. 어떤 사람들에 대해 말해 보자. 하나님 집에서 늘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설교 교통도, 예배하는 내용도 다 진리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만족게 할 것인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할 것인지, 여러 방면의 진리를 어떻게 실행하고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지를 항상 교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들었는데도 하나님을 왜 믿는지 생각을 해 보면, 그걸 모른다. ‘하나님을 왜 믿지? 계속 진리만 들으니까 재미도 없어. 그렇다고 세상에 돌아가려니 그건 또 내키지 않아. 하나님을 왜 믿지?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 그럼 어떻게 하면 좀 재미있을까? 좀 재미있는 걸 해 봐야겠어. 알아봐야겠어. 하나님 집에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받아들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 백만? 알고 있는 사람이 없을까? 아, 이거 모르겠네. 알아봐야겠어. 진리처럼 대해야지.’ 이런 것은 어떤 성정이냐? (사악한 성정입니다.) 이런 것을 사악하다고 한다. 사악을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바르지 않다(원문: 邪)’, ‘비정상이다(원문: 邪門)’이다. 사악이라고 하면 어떻게 대조해야 할지 모르지만 ‘바르지 않다’고 하면 안다. ‘비정상이다’라고 하면 더 잘 안다. 그렇지? 뜬소문 같은 것이나 알아본다. 하나님 집의 인솔자는 몇 명이나 될까? 해임된 사람은 몇이나 될까? 통계를 해 보자. 노인ㆍ어린이ㆍ환자ㆍ장애인은 얼마나 될까? 젊은 대학생은 몇이나 될까? 대학원생은 몇이나 될까? 이런 것이나 연구해 봐야지. 이런 뜬소문 알아보는 것은 정말 비정상이다, 그렇지? 그렇게 많은 진리를 들었는데도, 어느 한 가지도 그 사람이 충분히 중시하고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는 없다. 일단 누군가 뜬소문이나 교회 내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으면 귀를 바짝 세운다. 정말 나귀의 귀처럼 세울 수 있는 만큼 다 세워서 듣는다. 그런 말을 잘 듣지 못할까 봐 보청기까지 해야 할 정도인데, 비정상이지 않으냐? (맞습니다.) 사악한 사람의 특징은 어떤 것이냐? 진리에 대해 전혀 흥미를 가지지 않지만 바깥일에 대해서는 흥미를 가진다. 그럼 그런 사람을 사악하다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 ‘우리 교회 무용팀에 자매들이 있는데, 나이가 얼마나 됐는지 모르겠네. 나이도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가족이 다 믿는지 모르겠네. 그 어린 친구는 참 귀엽던데, 댄스 전공인가?’라고 하면서 알아본다. 결국 이렇게 저렇게 해서 다 알아 냈다. ‘8살부터 댄스를 시작했고 올해는 20살, 12년 배워 가지고 하나님 집에 와서 본분을 하는구나! 됐어! 얻었다, 생명이야!’ 사악하지? 지칠 줄을 모르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런 뜬소문을 알아보고, 자신의 생명과 무관하고 진리와 무관한 여러 가지 방면의 일들을 알아본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늘 ‘하나님은 어디서 지내시지? 하나님이 지내는 곳은 어떨까? 집은 얼마나 클까? 듣기로는 … 공산당의 루머가 진짜인지 모르겠네, 정말 큰 집, 호화 저택에서 사시는 건가? 주소라도 얻었으면 …’이라고 한다. 어느 날 주소를 얻게 됐다. 그리고 생각을 한다. ‘주소를 얻었다. 요즘이야 금방 알아보지, 인터넷에 들어가서 위성으로 위치 찍으면 바로 볼 수 있는데, 위치 추적해서 한번 보자.’ 이러면서 찾아본다. 본 다음엔 ‘와, 꽤 큰 집에서 사시네. 음, 공산당 말이 진짜네! 큰 집에서 사신다고? 그럼 거기가 어디쯤이지? 어떤 곳이지? 도시하고 멀지는 않나? 더 찾아보자.’ ‘도시하고 차로 1시간 거리네, 시골하고는 30분 정도 걸리는구나. 찾아냈어.’ 화교지역하고는 얼마나 되는지 또 찾아보니 2~3시간 정도로 나온다. ‘꽤 머네! 시장 보러 다니시거나 살기는 불편하지 않으신가?’라고 한다. 봐라, 걱정도 얼마나 잘해 주는지, 그럼 제대로 걱정해 준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을 걱정도 아니고 사악한 것도 아니고 호기심이라고 해야 한다고 한다. 호기심 쪽으로 귀결됐다. ‘저렇게 먼 곳에서 지내면 불편하지 않으실까? 주변에 중국 사람들은 있을까? 중국 마트는 있을까? 중국 마트가 없으면 장보기가 불편하지 않으실까? 어떻게 가시지? 차를 끌고 가야 되시잖아?’ 이것 보아라! 생각할수록 더 많아진다. 걱정도 태산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라고 또 생각한다. ‘운전해야겠지? 자전거로는 힘든 거리야, 차가 있야야 돼! 마트까지 차로 얼마나 걸릴까? 또 찾아보자.’ 갈수록 더 자세하게 찾아본다. 호기심은 만족됐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역겨운 놈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은 ‘날 조사하는 것이냐? 무슨 뜻이냐? 날 믿지 못하는 것이냐? 날 믿지 못하면서 왜 날 믿는 것이냐?’라고 할 것이다. 진리를 그렇게 많이 듣고, 그렇게 많이 말할 줄 알면서도 왜 하나님을 계속 연구하는 것일까? 하나님을 계속 연구하는 것은 무엇을 대표하느냐? (사악함을 대표합니다.) 너무 사악하다. 심지어 더 심한 사람, 더 한심한 사람은 이런 뜬소문을 알게 되면 다 된 것처럼 자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나, 하나님 어디에 사시는지 알았어요. 혹시 거기도 알고 있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아요.’ ‘제가 알려 줄게요! 이거 모르면 안 되지. 제가 알려 줄게요, 꼭 알아야 해요.’라고 한다. 결국엔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께서 증오하십니다.) 하나님이 증오하고 역겨워한다.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산 귀신이 아니냐? 이런 자는 산 귀신이다. 그게 어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맨날 사악한 쪽으로만 알려고 한다. 왠지 그런 뜬소문을 많이 알고 있으면 하나님 집의 사람이고 진리를 깨달은 사람인 양 생각한다. 그런 자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 (아닙니다.)

사악, 또 어떤 것들을 너희는 사악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런 것이 있느냐?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본 적은 있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만 진리에 노력하지 않고 늘 언제 재난이 오는지, 어디에서 어떤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는지 알아봅니다. 일단 재난 소식을 들으면 긴장해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어디에 어떤 재난이 일어났는지 알아봅니다. 이런 정형도 사악한 것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떨지? 셋째 하늘은 어디에 있을까? 음부는 어떨까? 지옥은 어디에 있을까?’ 이런 것을 계속 생각하며 연구하는 사람이 없느냐? (있습니다.) 늘 심오한 비밀을 연구하는 것도 사악한 것에 속한다. 심오한 비밀만 연구하면서 생명진입을 중요시하지 않는 것도 비정상이고 사악한 것이다. 그럼 진리를 얼마나 알고 있든 진리로 무엇을 하는 것인지, 어떻게 진리를 실행해야 하는지를 몰라 쩍하면 금식하고 느낌을 찾아가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이 열납하는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는 사람은 없느냐? 아니면 며칠씩 잠도 자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나님께 얘기한 것들이 잘 맞아 떨어지는지, 이루어지는지 지켜보는 그런 사람은 없느냐?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 저것 가져다 맞춰 보다가 맞아 떨어지면 ‘됐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시는 거야!’ 하고, 맞지 않으면 ‘난 안 해.’라고 한다. 이런 것은 사악하지 않으냐? (사악합니다.) 진리를 아무리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그저 그런 일들을 가지고 방증하며 그런 것을 생명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일을 내일 내가 나가서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침 6시에 눈을 뜨게 해 주시고, 가지 말라는 뜻이면 7시에 깨어나게 해 주세요.’라고 한다. 늘 이런 식으로 하고 이런 방식을 행동 원칙으로 삼고 진리로 삼아 실행한다. 이런 사람이 없느냐? (있습니다.) 이런 것을 사악하다고 한다. 늘 느낌에 따라, 경험에 따라 한다. 그리고 미신적인 것, 느낌적인 것이나 터무니없는 것에 따라 사악한 쪽으로만 빠지는 사람이 있다. 이런 것도 다 사악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에게 아무리 진리를 교통해 주어도 그 사람은 진리로는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의 느낌이나 혹은 어떤 현상에 맞춰서 하는 것보다 정확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사악하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운명을 주관하고 안배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 단지 진리의 글자 표면의 뜻만 받아들이고는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무의식 중에 자신이 내년에 책임자로 승진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을 믿는다. 이런 것은 사악하지 않으냐? 이런 것이 바로 사악한 것이다. 그 사람은 전적으로 이런 것만 믿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눈꺼풀이 떨리거나 살점이 떨리는 것을 믿는다. 떨리는 것에 대해 어떤 말들이 있느냐? (왼쪽 눈꺼풀이 떨리면 재물이 들어오고, 오른쪽 눈꺼풀이 떨리면 재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것만 믿는다. 왼쪽 눈꺼풀이 떨리는 것은 재물이 들어올 징조라고 하는데 재물이 들어오느냐? (들어오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손바닥이 간지러우면 재물이 들어온다고 하는데,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지? 진리를 얼마나 알고 있든 그런 사람에게는 소용이 없다. 그저 한 마디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냥 초등학생이 교과서를 읽고, 흥얼대는 노래 같은 격이다. 그 사람에게서는 진리가 아예 통하지도 않고 아무런 성과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이런 사람은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사악한 것이냐? (사악한 것입니다.) 사악하다. 사악한 것의 핵심이 어디에 있느냐? 진리를 싫어하는 것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 걸까? 그것은 진리를 알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지도 않고 듣고 싶어 하지도 않으며 저항하고 반감을 가진다. 진리가 옳고 좋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 길로 가기 싫어하고 고난을 받기 싫어하고 대가를 치르기도 싫어하는 것이다. 자신이 손해보는 것은 더더욱 싫어한다. 사악한 것은 다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사악한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좇고 따라하며, 실행하는데, 그쪽으로 빠지고 노력한다. 그 사람에게 기도하는 원칙은, 언제 어디서든 기도해야 하고, 매일 참다운 영 생활을 하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알려 준다. 그 사람은 이 말을 알아들었겠지? 알아들었는데 어떻게 실행하느냐? 날마다 꼭두새벽에 닭이 처음으로 울 때, 꼭 남쪽을 향해 무릎을 동시에 꿇고,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머리는 손등에 대고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하고는, 그다음 크게 절하는 동작을 취하면서 기도를 한다. 그 사람은 그때야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준다고 생각한다. 그 시간이 아니면 하나님은 바쁘셔서 기도를 잘 들어주지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 시간이 가장 바쁘지 않으실 때이고, 평소에는 가장 바쁘실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사악하지 않으냐? 또 어떤 사람은 어떤 말을 하느냐? 새벽 1~2시에 밤이 가장 깊고 조용할 때 기도하면 가장 영험하다고 한다. 왜 그렇게 말할까? 그 사람도 이유가 있다. 그 시간대면 사람들이 다 자고 있어서 하나님은 바쁘지도 않고 짬이 나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처리하실 시간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시간에 기도하는데, 할 때마다 잘 이뤄지더라고 한다. 무엇이 해 주었는지 모른다. 그렇지? 이런 것은 사악하지 않으냐? 그런 사람과 아무리 진리를 교통한다 해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전에 이런 얘기도 들은 적이 있다. ‘하나님을 믿으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살생하면 안 된다. 한 번 살생하면 목숨을 하나 빚진 것이고, 목숨을 하나 빚지면 잘못이 하나씩 기록되기 때문에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고기를 먹으면 살생해야 되니깐, 네가 죽인 게 아닐지라도 먹게 되면 네가 죽인 것이 된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최소한 육류를 먹지 말아야 한다. 먹으면 살생한 것과 같은데, 일단 살생을 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도 그 사람을 버린 것이라고 한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했느냐? (말씀하신 적 없습니다.) 그럼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 가운데서 정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안 먹을 거야. 한 입도 안 먹을 거야.’ 꼭 이렇게 말한다. 사실, 입에 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안 먹지만 나가서는 한 끼에 통닭 한 마리씩 먹는다. 너희는 믿느냐? 바로 그런 놈이다. 가장을 아주 잘한다. 이런 것을 사악하다고 한다. 비정상적이라고도 한다. 그런 사람은 망령되고 그릇된 것을 진리로 여기고, 심지어 계명으로 삼거나 하나님의 요구처럼 생각하면서 지키고 실행한다. 게다가 번거로워하지도 않고, 뻔뻔스럽게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까지 한다.

그럼 왜 그런 행위들, 그런 말들, 사람이 추구하는 그런 방식들을 사악한 것이라고 할까? (진리와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무관한 것이면 사악한 것이냐? 거기에는 결과가 있다.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진리와 무관하다고 하면, 네가 사과를 먹는 것은 진리와 상관이 있느냐? 사악한 것이냐? (사악하지 않습니다.) 졸려서 한잠 자는 것은 사악한 것이냐? (아닙니다.) 몸에 정상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목 말라서 물 마시는 것은 사악하냐? (사악하지 않습니다.) 피곤해서 좀 쉬는 것은 사악하냐? (사악하지 않습니다.) 사악하지 않다. 이런 것은 다 정당한 것이다. 그럼 왜 우리가 방금 말한 것들은 사악한 것에 나열할까? (그런 것은 다 진리에 어긋나고 대립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니다. 틀림없이 진리와 맞지 않는 것이다. (사람을 진리 추구하는 길에서 끌어갔습니다.) 어디로 끌어갔느냐? (마귀들의 무리로 끌어갔습니다.) 맞다. 그런 결과다. 너희는 늘 겉면의 것만 얘기한다. 말을 하기만 하면 표면적인 것만 이야기하는데, 실질적인 것을 얘기해야 한다. 그렇게 실행하면 사람들을 사악한 길로 끌어가게 된다. 세상의 조류, 사악한 조류를 숭상하여 사악한 길을 가면 마지막에 사람은 어떤 결말을 얻게 되느냐? 타락된다. 이지를 잃게 되고, 수치심을 모르게 된다. 결국 세상의 조류에 철저히 사로잡혀 가게 되고, 세상으로 가게 되는데, 멸망은 필연적인 결과다. 또 하나는 망령되고 그릇된 것들을 규례로, 계명으로 지키고, 거기에다 진리로 여기면서까지 지키고 있는데, 계속 그렇게 지키면 어떻게 되느냐? (정상 인성을 잃게 됩니다.) 정상 인성을 잃게 된다. 그것은 소극적인 방면이고, 부정적인 면으로 손해 보는 것이다. 또 어떤 것이 있느냐? 그런 것을 지키면 진리를 실행하겠느냐? (실행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그런 사람에게서 역사하겠느냐? (역사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이 하느냐? (악령이 합니다.) 그럼 악령이 역사한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악령에게 넘긴 것이냐? (아닙니다. 스스로 그런 사악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는 길이 바로 사악한 길이다. 계속 악령의 길로만 달려가는 것이다. 계속 달려가다 보면 나중에는 사악한 길에 들어서게 된다. 어떤 사람을 보면 시간대를 맞춰서 기도하는데, 그렇게 하다가 어떻게 되느냐? 히잡을 쓴다. 시간이 길어지면 그런 사람을 보면 정말 오싹해진다. 이런 것이 사악한 길로 가면 반드시 악령에게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악령에게 내줄 필요도 없이,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얻지 못하였으니 상관하지 않는 것이고, 악령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이런 결과가 아니겠느냐? (맞습니다.) 그러므로 사악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결과가 없으면 사악하다고 하겠느냐? 그렇지 않다면 실질도 잘못된 것이고, 명칭도 잘못된 것이고 성질을 정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 된다. 악령과 관련이 있는 것, 사악한 조류와 관련이 있는 것,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 하나님이 칭찬하지 않는 것, 악령과 영합하고 진리에 어긋나는 것, 이런 그릇되고 망령된 말, 사람의 어떤 행위나 추구법, 부정하고 사악한 추구법들은 다 사악한 성정에서 유로되는 것이다. 무술을 훈련하는 사람들을 보아라! 어떤 식으로 수련하면 사도(邪道)에 빠지게(원문: 走火入魔) 되는지 알고 있느냐? 무술을 훈련하는 사람마다 다 사도에 빠지게 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 사람이 정상적인 품새에 따라 정상적인 방식으로 훈련하고, 그것을 섬기지 않고 극단으로 가지 않으면 사도에 빠져들지 않고, 몸의 원기를 살려서 갈수록 좋아지며 몸을 단련하고 몸이 건강해지는 목적, 몸을 지키는 목적을 이루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도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럼 어떤 사람들이 사도에 빠지게 되느냐? (지나치게 신경 쓰면서 훈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어떤 길이냐? (사악한 길입니다.) 그건 왜 사악한 길이냐? (그런 사람은 어떤 경지에 이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선처럼 되려고 하기 때문에 쉽게 사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악령과 부닥치게 되는데, 그런 식으로 계속 가다보면, 악령의 길에 들어서게 되고 가다가 가다가 악령과 부닥치게 된다. ‘둥’ 하면 끝나게 되는데, 악령이 들리게 되어 악령에게 잡힌다. 잡히면 사도에 빠진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영적인 척하는 자들은 사악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일부 사람은 사악하다. 그리고 일부는 그저 외식만 하고 사악한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글귀 도리만 중시하고 어떤 의식 같은 것은 중시하지 않고, 그저 겉으로 말하고 행하는 것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정당하지 못한 실행법, 동떨어지고, 극단적이고, 극좌적인 그런 실행법은 사악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가정을 버리고 정에 얽매이지 말고 내려놓으라는 말씀을 했다. 그래서 집 떠나 본분을 하려면 분명히 가정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게 실행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집을 떠나라고 하셨으니 그건 쉽지, 문을 닫고 나가면 떠나게 되는 거야. 그럼 아이는 어떻게 내려놓아야 할까? 하나님께서 내려놓으라고 하셨는데, 내려놓기 어려우니까 목을 조여 죽여 버리면 되지. 없으면 쉽게 내려놓을 수 있잖아.’라고 한다. 독하지 않으냐? (독합니다.) 절대적이지? 얼마나 절대적이냐! 하나님께서 내려놓으라고 한 것은 마음에서 내려놓으라고 한 것인데, 그 사람은 마음에서 내려놓고 버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목을 졸라 죽여 버리려고 하기까지 한다. 사악하지? 역겹다. 사악할 뿐만 아니라 들으면 역겹기도 하다. 또 어떤 극단적인 것이 있느냐? 사악한 것은 주로 몇 가지가 있느냐? 하나는 글 표면에서, 겉면의 뜻에서 이해한 사악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행위 방면인데, 치우치고 고집스러운 행위들, 악령과 관련되는 행위들이다. 이렇게 두 가지인데, 통틀어 ‘사악’하다고 한다. 또 어떤 것들이 있느냐? (늘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에도 사악한 요소가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을 오해하고 있는지 구분해야 한다. 만약 진리 방면에서 깨닫지 못해 오해하는 것인데, 다른 사람의 교통으로 깨닫게 되어 오해하는 것이 잘못되었고, 자신이 이지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려놓는다면 사악한 것이 아니다. (어떤 재앙이나 사고나 순조롭지 않은 일이 임하면 다 하나님에게 뒤집어씌웁니다.) 어떻게 뒤집어씌우느냐? (순조롭지 않을 때는, 하나님은 왜 나에게 이렇게 순조롭지 않은 환경을 주시고, 왜 날 지켜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강퍅한 것과 진리를 싫어하는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이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더 있느냐? 모두 6가지이다. 그렇지? 이 6가지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심각한 것이냐? (다 심각하고, 다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다 매우 심각하다.

이 6가지 성정을 해부하면서 너희는 성정 변화에 대해 기본적으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이해가 있게 되었느냐? 성정 변화란 도대체 무엇이냐? 성정 변화는 어떤 결함을 고치거나 어떤 행동을 바로잡거나 성격이 꺾이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럼 도대체 어떤 것이냐? 지금 모두 6가지가 있는데, 이 6가지 성정이 사람의 생명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이 6가지 성정은 긍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이냐? (부정적인 것입니다.) 완전히 영락없는 패괴 성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성정은 이런 것들이다. 하나씩 꺼내 놓았을 때, ‘괜찮아! 하나님과 적대되는 게 아니야.’ 혹은 ‘진리와 적대되는 게 아니야.’라고 하거나 좀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한 가지도 없다. 그러므로 패괴 성정이라고 부른다. 패괴 성정이라고 하면 그것은 사람의 실질이다. 실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실질은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의지하는 뿌리이다.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 즉 사람이 그것으로 사는 것이다. 네가 어떤 것을 살아내든, 너의 목표와 방향이 어떤 것이든, 너의 생존 법칙이 어떤 것이든, 이런 성정들이 다 네 삶의 도구이고, 네가 생존하는 도구인 것이다. 바로 너는 이런 성정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네가 자신을 보호하든 혹은 사악한 조류를 좇아가든, 이 사회에서, 이 세상에서 적응을 하든, 혹은 역행하는 삶을 살든, 너는 다 이런 것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진리가 없으면 네가 이런 것을 가지고 살아내는 것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다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다 하나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깨달았겠지? 사람은 성정이 변화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있느냐? (없습니다.) 절대적으로 그럴 수 없다. 그렇지? 사람은 성정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너무 어렵다. 이 6가지 패괴 성정에서 어떤 것을 꺼내 놓든, 너에게서 나타나는 표현과 유로되는 정형이 어느 정도이든, 네가 이런 성정 실질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너의 마음가짐과 목적이 무엇을 위한 것이든, 네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네가 행한 것의 성질은 반드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반드시 하나님께 정죄받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가장 심각한 결과다. 하나님께 정죄받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각 사람이 궁극적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결과일까? (아닙니다.) 사람이 보기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면 사람이 가장 당연하게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자신의 패괴 성정과 패괴 실질을 알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다음 진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배치한 환경에서 점차적으로, 조금씩 그런 패괴 성정을 벗어 버리며 하나님과 합하고 진리와 합해져야 하는 것이다. 보아라, 이런 것이 성정 변화의 길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이 길이다.

이전에 어떤 사람들은 성정 변화를 아주 쉽게, 아주 간단하게 보았다. 그런 사람들은 억지로 어떤 일을 하지 않고, 억지로 어떤 말들을 하지 않으며, 일단 자신의 관점을 바로잡고, 마음이 바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진리를 좀 더 깨닫고 노력을 많이 하고, 고난을 많이 받으며, 대가를 많이 치르면, 몇년 뒤에는 반드시 성정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이 성립되느냐? (성립되지 않습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자신의 패괴 성정에 대해 참된 인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될 수 없습니다.) 패괴 성정을 알아야 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변화받기 위한 것입니다. 패괴 성정을 알아야 그것을 벗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받기 위해서이다. 변화받은 결과는 어떤 것이냐? 변화받은 결과는 네가 진리를 얻은 것이다. 어떤 일에서 네가 변화되었는지 알려면 네가 실행한 것이 진리에 맞는지 아니면 진리에 어긋나는지를 보고, 사람의 뜻에서 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하기 위한 것에서 난 것인지를 보면 된다. 어디에서 난 것인지를 보면 네가 변화되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너의 그 성정이 어느 정도로 변화되었는지를 알려면 그 방면의 성정이 유로될 때, 네가 얼마나 이길 수 있는지, 너의 속셈, 야심, 욕망을 얼마나 이기고, 진리에 따라 실행할 수 있는지를 보면 된다. 네가 진리에 따라, 하나님 말씀에 따라 실행하는 정도와 비례가 얼마나 큰지를 보면, 네가 그 방면의 성정에서 얼마나 큰 변화가 생겼는지, 몇 % 정도 변화되었는지를 증명할 수 있다. 이것은 비례가 되는 것이다. 강퍅한 방면에 대해 예를 들어 보자. 맨 처음 너에게 성정 변화가 전혀 없을 때, 너는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자신에게 강퍅한 성정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진리를 듣고 ‘아, 진리가 이렇게 복잡해? 왜 사람의 상처만 계속 들추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중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다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1년이 되고 2년이 되어도 한 마디도 귀에 들어가지 않고 한 마디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완전히 강퍅한 것이 아니냐? 또 2년, 3년이 지났는데도 다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아 그런 정형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본분은 지체하지 않았고, 두 다리는 열심히 다녀서 살도 빠졌고, 신발도 몇 켤레나 닳아 해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강퍅한 정형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10%, 5%도 줄지 않았고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그럼 이 방면의 성정은 변화가 있는 것이냐? (없습니다.) 그럼 사람은 왜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었던 것일까? (복 받으려는 속셈 때문입니다.) 무엇을 위해 뛰어다녔든, 그것은 다 부질없이 뛰어다닌 것이다. 왜일까? 그렇게 많이 뛰어다녔지만 성정에서 5% 정도도, 절반도 변화되지 않았다면 부질없이 뛰어다닌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 것을 부질없이 뛰어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최근 2년, 난 변화가 전혀 없었어. 한 가지 일을 통해 하나님이 징계하셨는데, 내가 그 방면에서 문제가 너무 심하다는 걸 분명하게 느끼게 하셨어! 내가 이렇게 계속 뛰어다니긴 해도 진리를 모르고 있잖아! 하나님께서 나와 멀리 계신 거 같아!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도 못했고,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도 못했어, 계속 하나님을 내 뒤에서 따라오라는 식으로 믿었으니, 이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잖아. 하나님 보고 날 따라오라고 한 격이네? 그럼 난 뭐가 된 거지?’라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뜩 ‘아, 심정이 말이 아니야! 몇해 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뭘 한 거지? 사람 모양도 없잖아! 마음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았잖아! 날마다 부질없이 뛰어다니기만 하고 하나님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어! 하나님 말씀도 마음에 새기지 않고,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회개할 마음도 없었어! 이건 강퍅한 거잖아. 이러면 나는 패역한 자식이잖아.’라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괴롭다. 괴롭다는 것은 뭘 의미하느냐? 회개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고,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의식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자신이 강퍅한 것을 인지하게 되고, 자신이 패역한 것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 변하기 시작한다. 쉽게 변할 수 있을까? (쉽지 않습니다.) ‘아, 마음이 좀 괴롭다. 얻은 것도 없고 부질없이 뛰어다니기만 한 것 같아. 왠지 그냥 시간만 때운 느낌이야.’ 이렇게 자신도 모르게 의식 속에 이런 생각이 좀 들게 되고, 변하고 싶은 소원이 조금 있게 된다. 더 이상 하나님과 맞서지 않고, 더 이상 그렇게 강퍅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의 일부분으로 삼아 실행하려고 하고, 말씀을 진리로 삼아 실행하려고 한다. 인지하게 되었지? 변할 수 있느냐?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다. 인지했다는 것은 좋은 일이고, 좋은 징조다. 하지만 인지했으면 바로 변할 수 있느냐? 좋은 징조가 있다고 진짜 좋은 일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지? 좋은 일이란 무엇이냐? 그러면서 또, 한 2년은 부질없이 뛰어다닌다. 그리고 그런 느낌은 갈수록 뚜렷해지고 뚜렷해진다. ‘안 되겠어. 계속 이렇게 하면 더 이상 뛰어다니지도 못할 거 같아, 뛰어다녀도 영이 메마르고 충실감이 없어! 하나님을 믿는데도 왜 공허한 걸까? 뭘 얻었지? 잘 먹고 잘 입어도 공허하고, 지금은 하나님을 믿고 이렇게 뛰어다니는데도 왜 공허한 걸까? 어떻게 된 걸까? 이건 아닌 것 같아, 이렇게 가는 건 잘못됐어! 하나님 말씀이 틀린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가리켜 주신 길이 잘못된 게 아니라 사람 스스로 택한 길이 잘못되고, 추구법이 잘못된 것이구나.’라고 한다. 이렇게 또 한 단계 진보한다. 그렇지? 의식 속에서 자신이 그런 식으로 보내며 사는 것은 안 좋고, 그렇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에서부터 그렇게 하는 것은 공허하고 시간만 때우는 것이라고 느끼기까지 몇 년이 걸렸느냐? 1~2년은 지나갔다. 세월을 이기지 못해 어떤 사람은 수염이 하얗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허리가 굽었다.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니 3년, 4년이 지나갔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희고, 어떤 사람은 이가 빠졌다. 세월을 이길 수 있느냐? (없습니다.) 의식하기 시작해서부터 그렇게 뛰어다니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고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고치긴 뭘 고쳐? 그동안 계속 부질없이 뛰어다니기만 했는데, 진리 교통은 한 마디도 귀에 들어 온 게 없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 노트에 메모는 많이 했는데, 메모한 걸 어느 하나 실행한 게 있는가? 다 한쪽에 버려두고 있잖아!’ 그러면서 후회한다. 허송세월을 보냈다고 느낀다. 지나간 것들을 돌이켜 보면, 처음 받아들여 흐리멍덩하게 따르며 부질없이 뛰어다면서부터 지금까지 어느새 10년이 지나갔다. 벌써 지난 세대의 사람이 되게 생겼다. 심정은 정말 말이 아니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 것도 없는 것 같네! 2년 전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좀 더 알게 됐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 주관적으로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이라는 생각도 들어. 하나님께는 진리가 있고,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나 행사는 다 진리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다 긍정적인 것의 실제야. 하나님은 사랑스러우셔서 사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야. 난 이런 인식만 있을 뿐이지 변하지 않았어. 내가 스스로 변하지 않았잖아! 하나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혀 변함없고 달라진 것이 없어. 나는 얻은 것이라곤 이런 정보들밖에 없어! 난 아직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내면에 있는 정형이 아직 변하지 않았어. 하나님을 믿은 지 여러 해 되는데, 왜 또 공허한 느낌이 생기는 거지?’ 이것 보아라! 이런 걸 느끼면 좋지 않으냐? 이건 좋은 일이다. 마비되어 이런 것도 모르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마비된 정도가 자신이 가는 길이 옳은지도 모르고, 성찰할 줄도 모르고, 성찰을 해도 모르고,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민감하지 못하고, 인지하지도 못하고 무감각하다면 곤란하다. 왜 사람들은 삼십이립이라고 하느냐? 그것은 그때가 되면, 그러니까 일정한 연령이 되면 세상의 어떤 일들을 정확하게 알게 되고, 자립할 줄 알게 되어 제대로 된 일을 하게 된다. 사람에게 지각이 있을 때, 이런 의식을 가지기 시작하면 제대로 된 일을 하려는 징조가 아니냐? (맞습니다.) 그런 징조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사람의 강퍅한 성정이 아직 조금도 움직이지도 않았고, 변화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믿어서는 안 되겠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꺼내 실제적으로 잘 보고, 자신과 맞춰 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식이 강렬해진 것이다. 이런 요구가 생기게 되었지? 이런 요구가 있기까지 몇 년이 걸리느냐? 영리한 사람, 오성이 있는 사람, 하나님을 강하게 원하는 사람은 1~2년 정도면 관점이 돌아서고 진입하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어리바리한 사람, 질질 끄는 사람, 마비된 사람, 오성(悟性)이 없는 사람은 아마도 한 번 끌면 또 3~5년은 걸릴 것이다. 몇 년이 지나가게 되느냐? (7~8년입니다.) 앞뒤 다 계산해 보면, 본분을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몇 년이 지나갔느냐? 8~9년, 10년 가량 된다. 거기에 부질없이 뛰어다니고 열심으로 했던 단계까지 더하면 거의 20년, 15년 정도 된다. 너희 가운데 믿은 지 15년 정도 되는 사람이 많지 않으냐? 아마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만한 시간이 되어 한 번 책망을 받으면 반성을 해 본다. ‘그동안 내가 부질없이 뛰어다닌 게 다 성정 변화를 추구한 것이 아니었구나! 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구나!’라고 하면서 드디어 마음에 찔림을 받는다. 이것 보아라, 마음이 얼마나 강퍅하냐! 무엇으로 찔러야 감각이 있겠느냐? 징벌, 책망과 훈계로 해야 한다. 책망 훈계를 하면 심한 말을 해야 한다. 어느 정도로 심하게 해야 하느냐? 너덜너덜해지게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게 이렇게 끝난 건가? 설마? 하나님께서 날 버리시는 건가? 이렇게 한 번 혼나면 정죄받는 거 아닌가?’ 앞뒤로 생각해 본다. 이렇게 저렇게 보름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소극적이 되고, 손을 놓고 뭘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억울한 것 같고,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는 것 같다. 보름이 지난 뒤에는 생각을 하다가 ‘아니야! 이렇게 믿어선 안 돼! 내가 이런 식으로 믿으면 끝장이잖아? 자포자기하면 스스로를 망치는 거잖아? 내가 나를 포기하면 안 되지, 일어나야 해! 뭐라고 했더라? 나보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었지, 어떤 일 때문에 나보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 거지? 어디에서 진리를 사랑하지 않은 거지? 아, 그러게 말이야! 어디,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뿐이겠어! 난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래도 계속 강퍅할까? 강퍅한 정도가 좀 약해졌지? (네.) 이때에 바늘로 다시 마음을 찌르면 피가 흐르는 것이다. 즉, 감각이 있는 것이다. 감각이 있을 때면, 사람은 마음이 움직인다. 마음에서부터 진리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왜 흥미를 가지게 되는 걸까? 필요하기 때문이다. 필요로 생각지 않으면 책망과 훈계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시련이 와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인솔자가 되었을 때, 거짓 그리스도나 거짓 인솔자, 적그리스도가 되지 않으려면 진리 없이 할 수 있을까? 하지 못한다. 지위가 있게 된 다음 다른 사람이 높이 치켜 주면 그걸 이길 수 있을까? 어떤 환경이나 시험을 하나 배치해 주면 승리할 수 있을까? 자신을 너무 잘 아니까, 자신이 어떤지 알기 때문에 ‘진리가 없으면 이런 것을 다 이길 수 없어! 그러면 난 폐물이야.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생각이냐? 진리를 필요로 느끼는 것이다. 진리가 필요할 때, 가장 막막할 때, 그 사람은 진리를 의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의지해도 다 소용이 없고 오직 진리에 의지해야만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고, 책망과 훈계, 시련과 시험, 그 어떤 환경도 다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진리를 의지할수록 진리가 좋다고, 진리가 쓸모 있다고 느끼고, 진리가 자신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되고 자신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때부터 진리를 사모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이 이 정도에 이르게 되면, 사람의 이런 방면의 성정은 조금씩 줄어들고 변화되지 않느냐? (맞습니다.) 이렇게 변화되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하면 성정도 변하기 시작한다. 앞의 기간은 예비만 하는 것이다. 그저 자그마한 느낌, 의식을 갖게 된다. 단지 예비만 하는 것이고 변화는 없는 것이다. 5%도 변화되지 않았다. 진리를 사모하기 시작하여 진리를 갈급해하는 마음이 생기고, 진리를 찾고 구하는 마음이 생기는 데서부터, 일이 임할 때에는 진리를 깨달은 기초에서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만족게 하며,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속셈을 이기고, 자신의 패역, 강퍅, 배반의 마음을 이길 수 있게 되기까지 한다. 이러면 진리가 조금씩 사람의 생명이 되지 않겠느냐? 그 강퍅한 마음이 네 안에서 더 이상 너의 생명이 되지 않고, 더 이상 너를 제어하지 못한다. 이때가 되면 너의 됨됨이를 제어하고 인도하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진리,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때가 되면 변화되었지? (네.) 그럼, 그 뒤로는 갈수록 좋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성정이 변화되는 과정이다.

성정 변화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그것은 고정된 것이냐? 모든 사람이 다 반드시 15~16년씩 걸리고, 20~30년씩 걸려야 진리를 실행하고 추구할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려는 마음과 오성(悟性)이 얼마나 큰지 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정마다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정도로 있고, 다 사람의 본성이고 깊이 뿌리박혀 있지만, 그 모든 성정은 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며, 거기에 하나님의 책망, 훈계, 시련, 연단까지 받으면 각기 다른 정도로 변화된다. 이런 식으로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렇다면 성정 변화는 시간 문제잖아요? 그만한 시간이 걸리면 저도 성정 변화를 알게 되고, 진입할 줄도 알게 되겠네요?’라고 한다. 그런 것일까? 거기에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것도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 주관적인 협력이다. 네가 깨달았으면 기다리지 말라. 기다리는 것은 멍청이가 아니냐! 누구 다리를 잡아당기는 것이냐? 자신을 지체하는 것이다. 이런 걸 멍청이라고 한다. 변화가 빨리 될수록 사람은 마음이 놓이고, 평안하고, 편하게 지낼 수 있다. 끌면 끌수록 편할 날이 없다. 이제는 성정 변화에 대해 완전히 분명해졌느냐? (많이 분명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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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③죽은 돼지는 뜨거운 물을 겁내지 않는다: 완고하여 어떠한 자극이나 비평에도 아랑곳 않음을 비유.

④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⑤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⑥소유소시(所有所是): 하나님의 생명 성품이 포함된 각종 실제.

⑦오성(悟性): 깨달음이나 사고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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