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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편 항상 찾고 구하며 순복하는 태도를 가져야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막연하게 믿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어떤 일들에서 우매하고 제대로 알지 못하고 항상 막연하다 보면, 늘 일시적인 열심과 충동으로 그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몸에 어떤 증상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일단 그런 증상이 나타나면 기력이나 몸 상태가 저하된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것도, 본분을 하는 것도 쉽지 않게 된다. 때로 어떤 일에서는 하나님이 보호해 준다. 화를 입게 된다든지, 목숨을 잃게 된다든지, 어떤 위험이 임한다든지, 이런 일이 없도록 하나님이 보호해 준다. 그러나 사람이 몸의 건강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려면 상식이 있어야 한다. 이전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도 이런 부분에 대한, 자신의 몸의 어떤 약한 부분이나 작은 증상에 대한 상식을 배워 우매하고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한겨울에 머리를 감고 밖에 나가면 어떤 일이 생기겠느냐? 알고 있느냐? 엄동설한에 머리를 감고 말리지도 않은 채 외출하면서 “괜찮아, 하나님이 보살펴 주실 거야.”라고 말한다. 이런 행동은 어떠냐? 우매하고 어리석다! 하나님이 보살펴 준다고 말했지만 결국엔 감기에 걸리는데, 그것도 심하게 걸린다. 아주 추운 기온에 젖은 머리가 얼어 버리면 한기가 들어가 심한 감기에 걸린다. 감기에 심하게 걸리면 일주일 내에 완전히 회복될 수 있느냐? 개운하게 회복되지 않는다. 일주일이면 증상이 좀 줄어들 뿐이다. 최소한 보름은 걸려야 한다. 그래야 몸이 회복되어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본분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보름 동안 많은 일을 지체하게 되지 않았느냐? 만약 일도 많고 본분도 바쁘게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 보름 동안은 정말 많은 일을 지체하게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만한 시간을 지체하게 된 것은 누가 초래한 것이냐? (우매하여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맞다. 사람이 우매하여 초래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때에 사람의 믿음을 보면 참된 믿음도 아니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충동이고 열심이고 우매이지,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험이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난 무섭지 않아! 하나님을 의지할 거야!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거야!’라고 했지만, 결과는 젖은 머리가 얼면서 찬 공기 때문에 감기에 걸린다. 그러면 나중에는 속으로 ‘하나님은 날 보살펴 주지 않으시네!’라며 원망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아니냐?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고, 본분도 지체하게 되고, 거기에 하나님을 의심까지 하게 된다. 그러면 믿음법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된 것은 믿음법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너는 관점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보호에 대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 이런 것에 대해 사람은 정확하고, 순수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막연해서도 안 되고, 열심만 가지고 사람의 상상이나 관념에 따라서도 안 된다. 엄동설한에 머리가 젖은 상태로 밖에 나가 이것저것 하면서 ‘나는 본분을 지체하지 않겠어, 머리가 마르지 않아도 나갈 거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상상이 아니냐? 그것은 관념에 따른 믿음이 아니냐? (맞습니다.) 본인은 관념으로 어떻게 생각하였느냐? 스스로 머리가 얼어도 괜찮을 것이라고, 감기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연히 가끔은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도 있다. 한기에 강해 머리에 고드름이 달려도 감기에 걸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혼자 ‘하나님은 기적을 보이실 수 있어!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어! 머리에 고드름이 달려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상상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육체, 사람의 그 평범한 육체의 본능과 기능은 일정한 범위에서 건강하게 유지되는 것이다. 그 범위를 벗어나고 그런 법칙을 어기게 되면 문제가 생기고, 병이 생기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법칙을 깨뜨리지 말라. 그 법칙을 깨뜨리면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손인 것이다. 네가 그런 법칙을 깨뜨리고 제멋대로 하면, 하나님은 너를 보호하지 않고 너를 책임지지 않는다, 알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증오한다. 어떤 사람은 며칠 동안 밥도 먹지 않고 본분만 한다. 결국 배고파서 쓰러진다. 저혈당이 되고 몸이 허약해져 본분을 해도 기운이 없고 체력도 딸린다. 그러고도 본인은 영문을 모른다. 여기에는 문제가 있지 않으냐? 너는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들어 준 몸은 30세가 되면 드는 느낌이 있다. 그것은 자연법칙이다. 40세가 되면 몸에는 또 다른 느낌이 드는데, 예전 같지 않다. 50세가 되면 보통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멜 때는 힘이 딸리고 숨도 가빠진다. 예전에 20대였을 때에는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언덕길을 올라가도 별로 힘들지 않아 숨을 돌리고 잠깐 쉬면 되었지만, 40세가 되면 그때 같지 않다. 50세가 되면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무거운 물건은 들 엄두도 못 내고 언덕 같은 곳을 뛰어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한다. 설령 내리막길을 걷고 평지를 걷더라도 조심하게 되고 천천히 걷게 된다. 이것을 신체의 자연법칙이라고 한다. 나이가 얼마가 되면 이마에 주름이 생기게 되는지, 얼마가 되면 팔자 주름이 생기게 되는지, 얼마가 되면 이가 빠지게 되는지, 얼마가 되면 길을 가고 먹을 것을 먹어도 늙은이 모습이 있게 되는지, 이런 것을 하나님은 일찍이 정해 놓았다. 그러므로 아무도 이 법칙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네가 그런 법칙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것은 교만하여 자기의 분수를 모르는 것이다.

이제 이 법칙을 알았으면 사람은 그 법칙을 어떻게 따라야 할까? 한 방면으로는 그 법칙에 따라야 하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충성되게 본분해야 한다. 어떻게 양자간에 균형을 유지하고, 어떻게 원칙을 잡아야 할까? 이것은 사람이 찾고 구해야 할 진리가 아니냐? 그러면 이 양자를 어떻게 조절해야 할지 너희는 깊이 생각해 보아라. (평소 일에 쫓기지 않을 때, 저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에 따라 정상적으로 휴식을 취합니다. 간혹 일이 바쁠 때는 하나님을 의지해 시간을 좀 더 연장합니다. 그때는 이틀 밤을 꼬박 새워도 피곤한 느낌을 받지 않았습니다. 저희는 다 그런 경험을 해 보았습니다.) 가끔 그렇게 하는 것은 괜찮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면 사람의 몸이 견딜 수 있겠느냐? 시간이 길어지면 안 된다. 몸에는 그런 법칙이 있다. 가끔 일이 바쁘면 육체가 힘들어 고생을 좀 하지만 극복해야 한다. 어느 정도까지 극복해야 할까? 두 눈의 눈꺼풀이 무거워 눈을 뜨기 힘들 때는 몸이 정말 버티기 힘들다. 쉬지 않으면 일의 효율이 떨어질 그 정도가 되면 빨리 휴식을 취해야 한다. 쉬는 목적은 무엇이냐? 바로 몸 관리를 잘하여 일을 지체하지 않고 본분을 더 잘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에게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 눈꺼풀이 무겁지도 않은데 늘 쉴 기회를 엿보고, 일이 바빠도 나몰라라 하는 것은 충성이 없는 것이다. 충성도 있는 동시에 본분도 잘해야 한다. 하나님이 너에게 맡겨 준 임무와 본분을 잘해야 하고, 또한 몸이 망가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원칙을 잘 잡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일이 바쁘지 않고 그리 쫓기지 않을 때는 일찍 제시간에 쉬고, 일이 바빠지면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면 된다. 일이 바쁘지 않으면 그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다. 일어나서 영적 수양을 하면서 기도도 하고, 말씀도 보고, 함께 교통하거나 찬양도 좀 배우고 하면 된다. 그러다가도 바쁠 때가 되면 따로 시간을 낼 수가 없으니 한쪽으로 해야 할 것을 하면서 말씀을 들으면 된다. 이렇게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예배도 있지 않느냐! 너희는 소그룹 예배도 있고, 또 상면과 함께하는 대예배도 있다. 또 평소에 일이 바쁘지 않거나 그렇게 많지 않으면, 너희는 매일 시간을 정하거나 며칠에 한 번씩 운동을 하는 것도 생각해 둬야 한다. 춤을 추는 젊은 형제자매들을 보아라! 비록 젊지만 계속 춤만 춰도 안 된다. 계속 추다 보면 피곤하다. 춤추는 것도 움직이는 것이지만 너무 많이 추면 운동이 아니라 피로가 되고 힘들다. 그러나 앞서 한동안 태극권을 좀 했더니 그들 스스로 기운도 나고, 몸이 좋아져 튼튼하고 튼실한 느낌이 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근육까지 생겼다고 한다. 보다시피, 운동을 하면 확실히 다르다. 사람 몸에는 법칙이 있는데, 너무 많은 것을 소모하면 기혈 순환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당한 활동을 통해 기혈 순환이 정상이 되고, 좀 더 잘되게 해 줘야 한다. 그러면 몸의 잔병도 적어지고, 불편한 증상도 사라진다. 너희를 보면, 평소에 늘 그렇게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옷을 만든다. 시간이 길어지면 목이 뻐근하지 않으냐? 목도 뻐근하고 어깨도 뻐근해진다. 그것은 직업병이다, 그렇지? 그럼 너희는 그 직업병에 맞춰 운동 방법을 찾아 운동을 해야 한다. 몸을 단련하여 그런 직업병이 생기는 것을 사전에 예방해 주면, 몸이 좋아지지 않겠느냐? 몸이 좋아지면 본분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계속 바보 같은 짓을 하면서 우매하게 무턱대고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결국 몸의 얼마 없는 에너지를 다 소모하게 되어 다시 회복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병에 걸리기 전에 먼저 예방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방을 하면 병에 걸릴 확률이 적어지는 것이다. 자잘한 병에 걸릴 확률이 적어지면 몸이 튼튼해지지 않겠느냐? 노화 방지는 쉽지 않지만, 몸에 생기는 어떤 질병은 예방할 수 있다. 어떤 원칙을 잡고 있어야 하느냐? 너희는 본분에 농땡이를 피우지 말고, 충성해야 하며,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자신의 능력껏,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 본분에 쏟아붓고, 자신이 할 줄 아는 것, 자신이 배운 것 그리고 알고 있는 것을 다 본분에 쓰고, 남김없이 써야 하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마음 방면이다. 그러면 노동력 방면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일과 쉼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일이 특별히 많을 때는 조금 극복을 해야 한다. 간혹 식사 시간이 되었어도 하던 일을 먼저 해 놓고 한 시간 후에 밥을 먹는다. 그리고 다른 일이 없으면 좀 쉬는 것이다. 힘을 조금도 남김없이 본분에 다 쏟아붓는 것이다. 이것은 충성하는 것이 아니냐? 충성하는 동시에 어떤 사람은 “그렇게 충성하고, 애를 쓰고, 힘을 쓰고, 머리를 쓰면, 결국 몸도 피곤해지고 작은 문제들과 자잘한 병이 생겨요.”라고 하는데, 그러면 너희는 원망하겠느냐? (원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분을 하는 당시에는 성심성의껏 한다. 하지만 결국 우매하고 막연해서 막연한 믿음 때문에, 또한 하나님에 대한 많은 관념과 적절치 않은 많은 방법들 때문에 몸에 문제가 생긴다. 몸에 징후가 보이고 병이 생기면 마음으로 원망하기 시작하면서 ‘난 그동안 하나님을 믿으며 본분도 성심성의껏 하고, 잔꾀를 부리지도 않았어! 근데, 하나님은 왜 날 보호해 주지 않으시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지도 않고 은혜를 주지도 않으시니 몸에 문제가 생긴 거잖아!’라고 불만스러워한다. 이런 생각은 옳은 것이냐? (옳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사람의 몸에는 정상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병이 날 수도 있고, 외부적인 요소가 발병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 집에서 본분하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세상에서 일을 해도 병에 걸리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 말이 맞다. 사람은 도리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본분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사실, 사람에게 아주 큰 관용을 베푼 것이다. 사람은 본분을 함으로 인해 많은 보호를 받고, 또한 많은 은혜도 누리게 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 본분하는 기간에 기회가 있게 된 것인데, 그 기간에 적지 않은 진리를 얻게 되고, 적지 않은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럼 진리를 얻는 것이 중요하냐, 아니면 몸 관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냐? 진리를 얻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할 때도 있다. 사람은 어느 정도 화비를 해야 하고,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도리를 알아야 하고, 어떤 일이든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순수하게 대해야 한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60년이나 70년 혹은 80년, 심지어 수백 년을 산다고 해도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다. 또 세상에서 생활을 위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밥벌이를 위해 살면서 힘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평생 장사를 하거나 생활을 위해 살면서 50대가 되어 몸에 문제가 조금도 없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 말하자면 왕궁에 살던 왕비는 병이 없었느냐? 잔병이 더 많았다. 그 여자들은 고생을 하기라도 하느냐? 매일 보양한다며 몸보신하고, 꽃단장을 하고, 산해진미를 먹었다. 잘 누리고 환경도 좋았지만 결국에는 그 여자들도 온몸에 병이 들지 않았느냐? 그 여자들도 장수하지는 못했다!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떠냐? 그중에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런 사람은 없다! 그들은 세상에서 생활을 위해 살면서 한 가지의 병은 다 걸린다. 다른 하나는 결론적으로 그들에게는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먹고 입는 것을 위해, 생활하기 위해, 먹기 위해 살면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들과 똑같이 매일 하루 세끼를 먹고, 24시간을 보내지만, 삶은 그들보다 가치가 있다. 너희가 보내는 하루, 너희가 보내는 한 해는 다 가치가 있다. 그 가치는 어디에 있느냐? 사람이 조물주 앞에 와서 본분을 하는 것이다. 피조물로서 자신의 본분을 하였고, 조물주로부터 진리를 얻었다.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하나님이 보기에 유용한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경영 계획 가운데서 자신의 미약한 힘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희가 하루하루를 사는 가치가 아니냐? 그것이 하루하루의 가치이다. 그것은 보배이다! 네가 그렇게 가치 있는 하루를 살고 있는데, 고난을 좀 받고 질병이 조금 있는 것을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습니다.) 맞다, 원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사람이 얻은 것은 너무도 많다. 하나님 앞에서 얻은 것은 너무나 많다, 네가 누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은혜, 보이지 않는 축복, 보이지 않는 보호는 네가 느낄 수 있는 그런 질병보다 훨씬 많다.

세상에서 일을 한다고 병이 나지 않을까? 병이 나면 누가 신경 써 주느냐? 신경 써 주는 사람도, 노후를 책임져 주는 사람도 없다. 관심을 가져 주지도 않고 신경 써 주지도 않으며 보장해 주는 사람도 없다. 네가 세상에 나가 살면서 아무런 보장을 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계속 살아가야 하지 않느냐? 매일 그렇게 보내야 하지 않느냐? 그렇다고 어디 가서 일을 할 때에 보장이 되어야 하겠다고 말할 수 있느냐? 아무런 병도 나지 않고, 안전이 보장되어야 하겠다고 할 수 있느냐? 그러면 고용하는 사람이 없고 계약을 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지? 그럼 지금 하나님 집에서 본분하는 사람은 어떠하냐? 보장되는 것이 있느냐? 너희는 어떤 것이 보장되는 것을 보았느냐? 너희가 인식한 보장은 어떤 것이냐? (외부 향략 세계에 물들지 않고, 마음이 편합니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지내면 하나님 집이 좋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행복감이 듭니다.) (저는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하는 것은 세상과 완전히 다른 것을 느낍니다. 세상에 있으면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부담감이 들지만, 하나님 집에서는 일단 하나님을 의지하고, 마음과 힘을 다하고, 능력껏 최선을 다하면, 세상에서 받는 그런 스트레스는 없습니다. 비록 때로는 심판과 형벌 그리고 책망과 훈계가 임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라보면 세상에서 받는 그런 고통은 느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돈벌이를 하는 것은 서로 빼앗고 다투면서 아주 격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집에서는 형제자매들 사이에 견해나 선입견이 어느 정도 있긴 하지만 영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 그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집에 있으면서 때로는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형제자매들과 함께 교통하면 마음이 편하고 든든해져 세상에서 다투고 경쟁하는 그런 느낌은 없습니다.) 모든 방면이 다 다르다. 외부 환경에서부터 속으로 느껴지는 것까지 다르다, 그렇지? 가장 중요한 것, 사람이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한다는 것은 너라는 피조물이 쓸모가 있다는 것이고,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이다. 육체를 위해, 사탄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 추구를 위해 살고, 하나님을 흡족게 하기 위해 산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본분하는 기간에 사람이 많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귀한 것이다. 너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고, 진리 실제를 얻게 되었으며, 너에게는 진리가 생명이 된 진리 실제가 있게 되었고, 진리 실제가 너의 생명이 된 것이다. 너는 지금 하루하루를 가치 있게 보내는 것 외에, 하나님 앞에서 보장받을 수 있지 않으냐? 받는 보장이 있다. 어떤 부분을 보장받느냐? (사탄에게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는 사탄에게 사로잡혀 가지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너를 만들어 놓고, 너를 인정해 준다는 것이다. 너에게 진리 실제도 있고, 네가 본분도 하고, 하나님의 뜻도 깨닫고,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면, 보장받고 있지 않느냐? 그 보장은 무엇이냐? 하나님께 훼멸되지 않을 자격을 확보한 것이다. 이것이 너희가 살아가는 자본이 아니냐? 만약 너에게 이런 것들이 없다면 어떠하냐? 여전히 살아갈 자격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자격은 어떻게 온 것이냐? 사람이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할 수 있으며, 진리 실제를 가졌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이 되게 하였는데,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런 것 때문에 너는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고, 하나님의 눈에 합격된 피조물로 보여지는 것이다. 네가 합격된 피조물이 되면, 하나님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어떤 자들을 훼멸하느냐? 하나님은 어떤 부류의 피조물을 훼멸하느냐? (악을 행한 자들입니다.) 악을 행한 자들이다. 그건 아주 분명하다. 그리고 또? 하나님과 지위를 다투는 자, 불신파, 피조물의 본분을 전혀 하지 못하는 자, 피조물의 본분을 하지 않는 자, 진리를 증오하는 자, 하나님과 적이 되는 자, 진리를 추구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과 끝까지 맞서는 자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훼멸하려고 한다. 그렇지? 피조물의 본분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은 본분을 해도 하나님의 눈에는 제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 편에서 봤을 때, 합격된 본분이 아닌 것이다. 합격된 본분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해도 되지 않는 것이다. 본분하는 기간에 악행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만 하고, 하나님과 맞서기만 하고, 방해만 하는 사람이 하나님 눈에 합격된 피조물로 보여질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합격된 피조물로 보여지지 못하면 최종 결과는 어떤 것이냐? 합격된 피조물로 보여지지 못하면 살아도 가치가 있겠느냐? 어쩌면 스스로는 ‘난 살 가치가 있어, 계속 살아갈 거야, 난 살아가면서 뭐라도 할 수 있어.’라고 여기겠지만, 하나님이 봤을 때, 그 사람은 가장 기본적인 피조물의 본분도 하지 못했기에 그 본분은 합격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눈에 살아 있을 가치,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겠느냐? 그런 사람이 존재할 가치가 없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원하겠느냐?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할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도태시킨다. 가볍게 처리할 경우, 한쪽에 제쳐 두고 더러운 귀신과 악령에게 맡긴다. 중하면 어떨까? (중하면 징벌받습니다.) 더 중하면? (훼멸됩니다.) 맞다, 훼멸된다. 보다시피, 본분은 그렇게 심각한 결과와 관련된다, 이게 작은 일일까?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멍청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여전히 맡겨진 본분을 하고 싶으면 좀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본분이 많은 진리와 관련되는 것은 모르고 그저 그것을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일하는 것처럼, 이방인에게 일을 해 주는 것처럼, 힘을 쓰고 노동력만 제공하면 되지, 진리를 실행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맺을 필요도 없고, 하나님께 솔직하게 말할 필요도 없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할 필요는 더욱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은 잘못되지 않았느냐? (잘못되었습니다.) 어디가 잘못되었느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본분을 무엇으로 여겼다는 것이냐? 본분을 일종의 직업, 힘을 쓰는 것, 일을 하고 돈을 버는 도구처럼 생각한 것이다. 본분하는 것과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 (본분은 마음을 기울여 해야 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과는 효과 자체도 다르고, 마음가짐도 다르고, 태도도 달라야 합니다.) 너희는 어느 정도 얘기할 수 있구나! 깨달았구나! 본분은 곳곳이 진리와 관련된다. 하지만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것은 어떠하냐? 모든 면에서 사람의 패괴 성정, 사람의 비열한 속셈과 사심을 이용해 교묘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고, 갖은 방법을 통해 큰돈을 벌려고 한다. 그것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고,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그럼 본분은? 본분은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이냐? 본분은 진리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지, 자신의 이익을 만족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각 사람이 본분을 하는 것은 다 자신의 경영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하나님 집의 일을 하는 것이고, 너의 본분을 하나님께 제공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이방인이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일하는 태도는 어떤 것이냐, 어떤 상황이냐? 그것은 모든 면에서 다 거래하는 것이다. 나에게 시간당 얼마를 주면 그만한 노동력을 제공하겠다는 것인데, 심지어 돈을 더 많이 받았으면 좋겠고, 더 나아가 노동력은 제공하지 않고 돈만 받고 공짜로 돈을 챙길 수 있다면 더 좋다고 한다. 일이 없으면 차나 마시고, 신문이나 보다가 상사가 오기라도 하면 눈앞에서는 열심히 하면서 조금 신경을 쓰고 힘을 쓴다. 그것은 다 승진을 위한 것이고, 돈을 많이 받고 많이 벌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 다 교묘한 수법을 쓰는 것이고, 음험한 수법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 자신의 사욕을 채우고, 자신의 이익을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다 궤계이고 전부 사탄의 철학, 사탄의 악독한 본성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분을 하는 것은 어떠하냐, 본분에서 그런 것들을 용납하느냐? 어떤 사람은 ‘사람이 많으면 좀 많이 하고, 사람이 없으면 좀 놀기도 하고 누워서 잠이나 잘 거야! 그러다가 사람이 들어오면 바쁘게 일을 해야지.’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냐, 사람을 기만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네가 돈을 벌기 위해 이방인에게 일을 해 주는 그런 마음 자세로 본분을 한다면 본분을 잘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본분을 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가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결국 어떤 지경까지 가게 될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드러낼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축복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무 은혜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드러낼 때에는 항상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다. 뭘 하기만 하면 문제가 생기고, 뭘해도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총명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수단을 잘 부릴 수 있지 않느냐? 처세 철학이 높지 않으냐? 그런데 왜 계속 문제가 생길까? 그렇게 하나님이 사람의 일거일동을 감찰하고, 사람의 모든 생각을 감찰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방인들 속에서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사람 중에 이런 일에 신경 쓰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모두가 다 그렇게 한다. 다 살아 있는 사탄의 무리이다. 다 그렇게 누가 교묘하고 편법을 잘 쓰면, 그 사람은 바로 고수로 불린다. 만일 본분을 하면서 그렇게 한다면 어떨까? 어떤 사람들은 똑같이 교묘하고 절묘한 수를 부리는데, 결국엔 어떻게 되었느냐? 어떤 사람은 스스로 똑똑한 줄 알면서 ‘난 정말 똑똑해! 하나님 집에서 어떤 것이 필요하든 난 다 할 수 있어! 난 전에 이방인들 속에서 일할 때부터 정말 똑똑했어! 상사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가지고 놀았지!’라고 한다. 정신 못 차리게 가지고 놀았던 수법을 본분하는 데에도 쓴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까? 먹히지 않는다! 잔머리를 굴려 보지만 성령의 깨우침이 없다. 아무리 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되니 ‘다른 사람은 말할 수 있는 실제적인 경력(역주: 체험)이 있는데, 난 왜 없지?’라고 하게 된다. 왜 없는 것일까? 너무 똑똑한 탓이다, 그렇지? 그것은 똑똑한 것이 아니다. 그건 너무 교활하고, 너무 간사하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고 우롱한 것이다, 그렇지? 너희에게는 이런 정형이 없느냐? 가끔씩 본분하는 마음의 태도가 이방인들에게 일을 해 주면서 그들을 대하던 그런 마음의 태도와 같은 정형은 없느냐? (있습니다.)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성정이 변화되지 않고 심판과 형벌을 받지 않은 사람이 본분을 한다면, 이런 현상은 흔히 볼 수 있다. 그건 언제 어디서나 밖으로 튀어나오고 흘러나온다. 막으려야 막을 수 없고 참으려야 참을 수도 없다. 마치 홍수에 터져 버린 물처럼 밖으로 넘쳐 나온다. 그럼에도 본인은 스스로 아주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똑똑하긴 뭐가 똑똑하냐? 그 사람의 생명에는 거래하는 것과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비열하고, 탐욕스럽고, 간사한, 이런 것뿐이다. 이런 것들이 있는데도 본분을 하면서 늘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진리를 찾고 구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과 늘 교통도 하지 않는다면, 너는 이런 것들로 살 수밖에 없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네가 진리도 깨닫고, 또 항상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네가 깨달은 진리 원칙에 따라 본분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면, 네가 살아내는 것은 무엇이겠느냐? (진리 실제입니다.) 맞다. 그러면 네가 살아내는 것은 진리 실제인 것이다. 네가 살아내는 것이 진리 실제라면, 말할 것도 없이 너는 무조건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사람일 것이다. 이 말이 맞느냐? 틀림없이 하나님을 만족게 할 것이고, 하나님도 틀림없이 너의 그 본분을 열납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항상 진리를 찾고 구하지도 않고, 자기 뜻대로만 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상상대로 한다면, 항상 제멋대로 무모하게 행동할 것이다. 제멋대로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느냐? 알고 있느냐?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틀에 박힌 말이고 도리이다. 도리를 말하지 말고 빈말을 하지 마라. 자기 뜻대로 한다는 것은 해석한 것이다. 제멋대로 하는 무모한 행동은 어떤 것을 말하느냐? 바로 네가 어떤 일에 부딪혔을 때,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하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는 과정이 없이 생각한 그대로 하려고 하는 것이다. 누구의 말도 들어가지 않고, 누가 말해도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견해를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너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것이 옳다고 고집하는데, 다른 사람의 말은 도리가 있어도 듣지 않고 자기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설사 네 것이 옳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참고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참고하지 않는다. 그럼, 사람들이 ‘저 녀석은 고집이 너무 세서 옹고집이다.’라고 한다. 고집이 어느 정도일까? 소 열 마리의 힘으로도 돌려세우지 못할 정도이다. 생억지로 고집을 피우고, 교만방자하고, 지나치게 멋대로 한다! 어느 정도일까? ‘관을 보기 전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실패하기 전에는 뉘우칠 줄 모른다는 뜻)라고 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것이 제멋대로 구는 것이 아니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하면서 누가 말해도 듣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면 진리에 부합되지 않아요.”라고 해도 “진리에 부합되지 않아도 이렇게 할 거야!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해도 난 도리를 만들어 낼 거고, 이유를 하나, 둘, 셋 만들어서 내 말을 듣게 만들겠어! 난 꼭 이렇게 할 거야.”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면 방해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뒤탈이 생겨요. 아주 엄중한 결과가 생기게 되고, 하나님 집에 손해를 끼치게 돼요.”라고 해도 듣지 않는다. ‘난 그냥 이렇게 할 거야! 어쩔 건데? 난 꼭 이렇게 하고 싶어.’라고 하면서 자기 이유를 댄다. ‘네가 하는 것은 다 옳지 않아! 내가 하는 건 이유가 있어.’라고 한다. 혹시 네가 하는 것이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어떤 뒤탈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성정은 어떤 성정이냐? (교만한 본성입니다.) 맞다, 교만한 본성이다. 교만한 본성 때문에 너는 성미대로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성미대로 하는 성정이 있으면 제멋대로 무모한 행동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럼 그런 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통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기꺼이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낮추어 다른 사람과 많이 협력하고, 많이 의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하는 것은 사람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지 너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사람은 어떻게 협력해야 하겠느냐?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들과 많이 교통해야 합니다. 자신이 고집하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과 많이 의논하고, 많이 교통해야 합니다.) 맞다. 자신에게 생각이 하나 있으면 내놓고 확실하게 밝혀야 한다. 나는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보고 있다며 그것을 꺼내 놓고 다른 사람과 교통해야 하는 것이다. 교통하다가 다른 의견이 나와 네가 받아들일 수 없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첫 단계로 제멋대로 무모하게 하지 않고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너와 다른 의견을 꺼내 놓을 때, 너는 제멋대로 무모하게 하는 것을 어떻게 극복하겠느냐? 이것이 두 번째 단계이다. 첫 단계는 네가 우선 자신의 관점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 제멋대로 무모하게 하는 행위와 그 성정을 극복하는 첫 단계의 실행이다. 두 번째 단계는 누가 다른 의견을 꺼낼 때, 너는 어떻게 제멋대로 무모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많이 하면서 찾고 구하고, 여러 사람들과 서로 의논하고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요하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교통하게 해야 한다. 너는 자신(원문:身段)을 먼저 내려놓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에게 교통하게 해야 한다.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해도 자신의 것을 견지하지 않는 그 자체가 일단은 진보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진리를 찾고 구하는 태도이고, 자신을 부인하는 태도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너에게 그런 태도가 있어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기도로 하나님께 보여 달라고 구하는데, 옳고 그름을 모르겠으니 하나님께 보여 달라고 구하고,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지, 가장 합당한지 알려 달라고 구하며 다 함께 교통한다면, 교통 중에 성령이 깨우쳐 줄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깨우쳐 주는 것에는 과정이 있다. 어떤 때에는 너의 태도를 본다. 네가 완고하게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하나님은 네게서 얼굴을 돌리고 너에게 마음을 닫을 것이다.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는 태도를 가져 봐라. 하나님은 너에게 실패를 보게 할 것이다, 너를 드러내고 네가 실패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너에게 옳은 태도가 있다면, 자기 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독선적이지 않고, 제멋대로 무모하지 않고, 찾고 구하는 태도와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지고 다 같이 교통한다면, 성령이 그 가운데 역사하여 교통 중 어떤 사람의 말 한 마디에 네가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어떤 때는 성령이 깨우쳐 주는 것이 몇 글자 되지 않는다. 한두 마디 정도로 그 속에 있는 그 일의 핵심 포인트를 깨우쳐 준다. 그러면 너는 문득 깨닫게 된다. 그렇게 깨닫게 되면 너는 ‘아, 내가 원래 고집했던 것은 잘못되었구나! 틀렸구나.’라고 하며 잘못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 봐라! 너는 어떻게 하면 가장 합당한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 정도가 되면 사람은 악행을 피하고,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피하고, 일을 그르쳐 나쁜 결과를 감당하게 될 것을 피하게 되지 않겠느냐? 이런 결과는 어떻게 생긴 것이냐? (순복하고 찾고 구하는 마음이 있어서 생기게 된 것입니다.) 맞다. 순복하고, 찾고 구하는 마음이 있어서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럼 이제 그런 결과가 생겼고, 결과적으로 합당하게 처리도 했고, 하나님의 마음도 만족게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는 것은 너의 태도에 달렸다고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하는 것에 달렸다고 해야 하느냐? 네가 스스로 자신을 구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너를 구한 것이냐? (사람의 태도에 따라 성령의 깨우침을 받는 데에 달렸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 너희는 무엇을 보았느냐? 많은 경우,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악을 행하지 않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사람의 태도와 사람의 실행에 달렸다. 너에게 찾고 구하고 순복하고 먼저 자신을 내려놓는 태도가 있다면, 하나님은 너를 깨우쳐 주어 그 속에 있는 진리 실제가 무엇인지, 핵심 포인트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완고하게 자기 주장을 고집하고, 진리를 거부하고, 성미대로 하고, 누구의 의견도 받아들이지 않고,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으면서 오직 자신만 믿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는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할까? (하나님은 상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너를 상대하지 않고 한쪽에 방치해 둘 것이다. 너는 네 성미대로 하지 않느냐? 너는 교만하지 않으냐? 자기 것은 무엇이든 다 맞다고 하지 않느냐? 너에게서 순복이 전혀 보이지 않고, 찾고 구하는 것도 전혀 보이지 않고, 네가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닫고 있는 태도를 취하고, 완전히 대항하는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를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왜 너를 상대하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네가 닫았는데, 하나님이 깨우쳐 준다고 받아들이겠느냐?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너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나님이 꾸짖는다고 네가 느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느낌이 없다. 사람이 강퍅할 때, 사람의 사탄 본성, 그 수성(獸性)이 발작할 때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사람은 느끼지 못한다.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소용없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너에게 완고하게 대항하는 이런 태도가 있다면,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은 네게서 숨는 것이다. 하나님은 불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로 네가 그렇게 완고하게 대항하고 마음을 닫았을지라도 억지로 더해 주고 감동시켜 하나님이 어떻게 하기를 원한다는 느낌을 주거나 깨우쳐 주거나 인도해 주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사람의 성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어떤 성정일까? (교만한 본성,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성정입니다.) 그것은 한 방면이다. 하나님이 보게 된 것은 주로 사람의 진리를 싫어하고 납득시킬 수 없는 수성(獸性)이다. 야생 동물의 야성이 발작할 때를 보아라! 그때 사람이 노래를 불러 주면 소용 있느냐? 사람이 도리를 말해 주면 효과가 있느냐? 위안을 해 준다고 효과가 있느냐? 사람이 가까이 갈 수 있느냐? 다른 말로 형용한다면, 그때는 벌써 ‘납득 불가능’ 상태인 것이다. 수성이 발작하여 납득시킬 수 없다. 사람이 수성이 발작하고 납득 불가능 상태가 되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은 상대하지 않는다. 네가 납득시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말을 더 해 봤자 불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에게 복이 될까, 화가 될까? (화가 됩니다.) 너는 유익을 얻었느냐 아니면 손해를 보았느냐? (손해를 보았습니다.) 그것 보아라! 이렇게 좋은 일을 놓고도 판이한 태도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누가 초래한 것이냐?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스스로 초래한 것이다. 그럼 최종적으로 이런 결과를 뭐라고 해야 하겠느냐? 사람은 아주 괴롭다고 한다. 하나님이 상대해 주지 않아 하나님을 더듬을 수 없고, 흑암에 빠졌고, 다운되고 영적으로 손해를 본다는 것이다. 두 글자로 선사해 준다면 뭐라고 할까? (‘싸다’입니다.) 맞다. 그래도 싸다! 네 자로 한다면? (‘자업자득’입니다.) 자업자득이다. 또 뭐가 있지? 죄의 보응도 있다. 이것 보아라. 일이 임했을 때, 그것이 아주 간단한 일, 네가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일, 늘 부딪히는 일이지만 판이한 태도에 따라 너의 생활에든 영적인 정형에든 전혀 다른 결과가 있게 된다. 너희는 어떤 결과가 좋으냐?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는 결과가 좋습니다.) 하나님의 깨우침,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사람에게는 어떤 태도가 있어야 하겠느냐? 순복하고 찾고 구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항상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본분을 하든, 사람들과 어울리든, 혹은 특이한 일이 임하여 그것을 처리해야 하든, 반드시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너에게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태도가 있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너에게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태도가 있어야만 하나님을 경외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약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태도가 아니라면, 그 외에 어떤 태도가 있겠느냐? 완고하게 대항하고, 자기 것을 고집하며, 진리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좋지 않습니다.) 어떻게 좋지 않으냐? (성령이 역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것뿐이겠느냐? 또 어떤 결과가 있느냐?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것뿐이냐? (하나님께서 상대하시지 않습니다.) 완고하게 대항하며 진리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결국 사람이 아무리 많은 일을 경력했을지라도, 아무리 많은 상황이 임했을지라도, 하나님이 안배해 준 공과를 아무리 많이 경력했을지라도 진리를 깨달을 수 없고, 그 결과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도 못하는 결과를 맞게 된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지 못하면, 사람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지 못한다. 바로 이런 결과를 낳게 된다. 이것 봐라! 사람은 매일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서도 항상 본분을 하겠다고 외치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외친다. 하지만 그것이 간단한 일이냐?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생의 대사이다!

본분을 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방금 너희에게 비법을 알려 주었다. 바로 네가 부딪힌 일에서 찾고 구하고 순복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너는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다. 네가 보호받으라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라는 것이다. 이게 비법이 아니냐? (맞습니다.) 범사에서 이런 태도를 가지고 경력해 보아라. 그러면 본분을 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것이 더 이상 빈말이 아니고 더 이상 구호가 아니며, 더 이상은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적지 않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너는 이렇게 경력하면서 수확이 있는지 없는지 지켜 보아라! 틀림없이 수확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이렇게 경력하기만 한다면, 나이가 어떻게 되든, 믿은 시간이 얼마나 되든, 지식 수준이 높든 낮든, 어떤 본분을 하든, 이런 태도가 있기만 하면, 틀림없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일이 임했을 때, 찾고 구하는 태도가 없고 순복하는 태도도 없다면, 진리를 깨닫지도 못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도 못할 것이다. 항상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아라! 그런 사람은 ‘진리란 무엇일까? 진리 실제란 무엇일까? 무엇을 도리라고 하는 걸까? 난 왜 모를까? 다른 사람은 듣기만 해도 깨닫는데, 난 왜 깨닫지 못할까?’라고 생각한다. 그를 보면 노력도 한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책도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배우고 적는데, 스스로 적어 놓은 것만 해도 몇 권이나 된다. 주머니에는 늘 작은 노트를 넣고 다니면서 누구에게 무엇이 좋다는 말만 들으면 서둘러 메모하고, 어디에서 교통한다고 하면 바로 가서 듣는 등, 노력은 적지 않게 들인다. 하지만 아쉬운 건 항상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진리가 매우 심오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돋보기를 가지고 몇 배의 크기로 확대시켜 자세히 연구하고, 과학 실험실에 가지고 가 조금씩 해부해야 하는 격이다! 그런 사람은 진리와 진리 실제를 아주 추상적인 것으로 본다. 사람이 거기에 도달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것으로 생각한다. 조금만 유의하지 않거나 생각 하나만 놓쳐도 진리 실제를 놓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매일 모든 마음과 생각을 글자에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 글자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사람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렇게 공력을 쏟을 필요가 있을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깨닫는 것은 글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것처럼 네가 책을 많이 보면 글을 생동감 있게 쓸 수 있고 언변이 뛰어나게 되는 것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너희는 이제 진리를 얻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느냐? (일이 임하면 진리를 찾고 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다음 진리를 실행해야 합니다.)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과 진리를 실행하는 것, 이 두 가지이다. 이렇게 간단하다. 너희는 깨달았구나! 너희가 볼 때, 너희가 의류 제작을 하는 것이 진리를 깨닫는 데에 영향을 주느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마 글 관련 본분을 하는 형제자매들은 진리를 많이 깨달을 거예요!”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는다. 진리, 하나님이 발표한 진리는 모두 글자라는 방식으로 쓰여져 나오지만, 진리 실제는 글자라는 형식이 아니다. 진리 실제는 어디에 있을까?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사람이 행하고, 사람이 체험하고, 사람이 살아내는 것이다. 마음 속에 있는데, 그것은 형식도 아니고, 문자도 아니고, 이론도 아니다. 진리 실제는 날마다 사람과 동반하는 존재이고, 사람 삶 속의 작은 것까지도 동반하는 존재이다. 진리는 무엇이냐? 진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론의 토대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이 살아가는 일처리 원칙입니다.) 맞다. 사람이 살아가는 실행 원칙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토대이다. 네가 무엇으로 사는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일을 하는 방향과 목표가 무엇인지를 물어보았을 때, 너에게 진리 실제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진리 실제가 바로 네가 살아가는 목표와 방향과 원칙인 것이다. 너에게 진리 실제가 없다면, 네가 살아가는 목표와 방향, 원칙은 무엇이겠느냐? (사탄의 처세 철학, 사탄의 독소입니다.) 맞다. 사탄의 처세 철학과 사탄의 문화, 사탄의 윤리 도덕과 사탄의 교육 등등의 것들이다. 이렇게 하니 알겠지? (알겠습니다.) 진리를 얻는 것이 쉬우냐? (하나님을 의지하면 쉽습니다.) 하나님께도 의지해야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달렸다! ‘난 사탄의 패괴 성정으로 살고 싶지 않아! 사탄의 패괴 성정에 통제받고 우롱받고 싶지 않아!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추악한 몰골만 보여 하나님께 미움받고, 하나님 앞에서 살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라는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고, 이런 심지(心志)가 있어야 하며, 마음에 이런 요구가 있어야 한다. 너는 마음에 이런 생각이 있어야 하고, 그다음 일이 임했을 때 자신이 깨달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다 그 일에 적용시킨다면, 네 삶의 실행에 적용시킨다면, 진리가 너의 실제가 되는 것이 아니냐? 진리가 너의 실제가 되는데, 진리 실제가 없을까 봐 걱정할 필요가 있느냐! 너에게 진리 실제가 있는지 없는지는 뭘 보고 아느냐? 입을 열기만 하면 다 알 수 있다. 너에게 진리 실제는 없고 도리밖에 없다면, 입을 열었을 때 전부 도리일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평소 삶 속에서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어떻게 보고 알았을까? 어떤 일을 말하든 전부 도리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살림꾼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된다. 말을 했을 때 ‘아이가 아프거나 고열이 있으면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집의 닭은 몇 개월이면 알을 낳을 수 있는지, 알을 품을 수 있는지, 보통 닭은 하루에 알을 최대 몇 개 낳을 수 있는지, 한 달에 백만 원을 번다면 그 생활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어른부터 아이들까지 일상생활 비용은 어떻게 쓰고 어떻게 맞춰야 하는지에 대해 잘 안다면, 들었을 때 그 사람은 살림꾼이라고 판단된다. 집안의 경제 상황, 일상생활에 대한 것들이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장부로 되어 있고, 입을 열었을 때 바로바로 나온다면 그 사람은 바로 살림꾼이다. 경험도 있고, 살림살이를 잘했던 사람이고, 살림을 알뜰하게 꾸려 나갈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 입을 열어 말하거나 사람들과 교통하고 접촉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듣고는 그 사람은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 사람은 네가 하는 말을 듣고, 네게 임한 그 일을 보고, 그 문제를 가지고 나누면서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누가 도리만 가지고 너에게 아무리 얘기해 주어도 풀리지 않았던 문제, 몇 년 동안이나 풀리지 않았던 그 문제를 그 사람에게 가져가니 몇 마디로 해결된 것이다. 그리하여 너는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어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고, 묶여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되었으며, 속박도 받지 않고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말한 것은 진리 실제가 아니겠느냐? 너에게 일이 임했을 때, 누가 와서 아무리 말해 주어도 너는 깨닫지 못하고, 아무리 말해 주어도 들어 보면 네가 말하는 일과는 다른 문제이고 그 문제의 실질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다 무엇이겠느냐? (글귀 도리입니다.) 맞다. 그런 것을 글귀 도리라고 한다. 글귀 도리로 사람에게 공급해 줄 수 있겠느냐? 사람을 도와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글귀 도리는 사람에게 공급해 줄 수도 없고, 도움을 줄 수도 없으며, 사람의 실제적인 애로를 해결해 주지도 못한다. 이제는 잘 알았겠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냐? 진리를 찾고 구하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진리는 어디에 쓰는 것이냐? 진리는 사람의 정신세계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냐? 진리는 사람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 주는 것이냐? (아닙니다.) 진리는 도대체 사람의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냐? 진리는 사람의 패괴 성정을 해결해 주는 것이고, 사람의 패괴 성정을 해결하여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며, 정상 인성을 살아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몰라 늘 진리는 심오한 것 같고, 추상적이고 비밀이라고만 생각할 뿐, 진리는 사람이 실행하라고 있는 것이고, 활용하라고 있는 것임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10년, 20년씩 믿었지만 도대체 무엇을 진리라고 하는지 모른다. 진리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진리를 얻었겠느냐? (얻지 못했습니다.)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은 불쌍하지 않으냐? (불쌍합니다.) 불쌍하다! 찬송가에 이런 것을 표현한 것이 있다, 뭐라고 했었지? ‘잔치상에 있으면서도 굶주린다’, 이런 찬송이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진리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늘 진리를 싫어한다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그러면 진리를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너는 항상 하나님 앞에 나아가 진리를 싫어하는 너의 그 정형을 성찰하고, 자신에게 진리를 싫어하는 표현은 어떤 것이 있는지를 보아라. 자신의 정형에서 어떤 것들이 진리를 싫어하는 것이고, 어떤 것들이 진리를 싫어하는 행위인지, 어떤 태도가 있는지, 임했던 일에서 어떤 태도가 진리를 싫어하는 태도였는지, 항상 이런 것들을 성찰해야 한다. 누가 “본분을 그렇게 하면 안 돼요.”라고 했을 때, 생각하다가 ‘내가 이렇게 본분하면 안 된다고? 그럼 너처럼 본분하는 건 된다는 거야? 내가 본분을 이렇게 하는 게 뭐가 어때서? 내 마음은 하나님이 아셔!’라고 한다면, 이것은 어떤 태도이냐? 이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이냐? (아닙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일이 임했을 때에는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가 없다면, 너에게는 보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없는 것과 같아 진리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진리를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은 것은 허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진리를 얻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얻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실패로 끝난다. 진리를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진리가 너의 실제가 되고 너의 생명이 되어야만 네가 진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이다! 그래야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그 많은 말씀을 왜 하셨겠느냐? 하나님이 그 많은 진리를 왜 발표하셨겠느냐? (사람이 진리를 얻고 실제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맞다. 사람에게 진리를 얻게 하고,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것을 위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무얼 하려고 그 많은 진리를 발표하겠느냐? 설마 성경과 두께를 비교하자는 것일까? 그것은 진리 대학을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진리를 깨닫고 최종에는 진리를 얻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알 것이다. 그렇지? (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진리를 얻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입니다.) 깨달았구나. 깨달았으니 이제는 너희가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지,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것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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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②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③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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