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목차

제82편 늘 진리를 묵상해야 행할 길이 있게 된다

본분을 잘하고 싶다면 먼저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데, 진리에 더 마음을 기울여 찾고 구해야 한다. 진리를 찾고 구하는 실행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 말씀의 진정한 함의를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진정한 함의를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바로 하나님께서 한 그 말씀은 무슨 뜻인지,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지, 그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구하고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진리의 실제를 깨닫는 것이다. 진리의 실제를 깨달으면 실행 원칙을 명확히 잡을 수 있고, 그와 동시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게 네가 전에 깨닫지 못했던 일에서 깨우침을 받아 새로운 인식이 있게 되고, 네가 본 것과 인식한 것에서 깨우침을 받아 점차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그다음은 그것을 써먹을 수 있다. 그와 반대로 네가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무책임한 것이고, 어떻게 해서 쉬우면 그대로 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 하기 쉬운 대로 하는 것은 어떤 마음 가짐이냐? (얼렁뚱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얼렁뚱땅 하는 것인데, 본분에 대한 충성심도 책임감도 사명감도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누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미더운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너는 ‘나는 본분할 때마다 힘도 반만 쓰고, 마음도 반만 기울였어! 무책임하게 마음도 많이 쓰지 않고 노는 것처럼 가볍게 대했구나!’라며 돌이켜 보게 된다. 그러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결국 사람들이 보고 “저 사람은요, 본분을 해도 그저 그래요. 어디까지나 형식만 차리는 거죠”라고 말하게 된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실까?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지 아느냐? (‘이 사람은 무엇을 맡기고 신뢰할 만한 존재가 못 돼’라고 하십니다.) 미덥지 못하다. 다시 말해, 너에게 일을 맡겼을 때, 네가 중요한 책임을 맡았든 평범한 책임을 맡았든, 마음을 다하지 않았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으며, 그 일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으로, 맡겨 주신 부탁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것을 자신의 본분이나 의무로 여겨 하지 않았다면, 너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미덥지 못하다’는 몇 글자이냐? ‘미덥지 못하다’라는 이 6글자로 네가 한 본분의 성질을 정하게 되었는데, 너라는 사람은 인품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너에게 일을 하나 맡기면, 그런 태도로 대하고 그런 방식으로 처리하는데, 앞으로도 본분을 맡길 수 있겠느냐? 큰일을 맡길 수 있겠느냐? 아마 맡겨 주어 너의 태도를 지켜볼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은 항상 너에게 마음 놓지 못하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늘 마음을 놓지 못하고 만족하지 못하는 구석이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겠느냐?

사람이 본분을 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고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표현한 말이 있었는데, 무엇이었지? “심령과 성실로 하나님을 경배한다”이다. 지금 이 말을 본분하는 데에 적용하면 된다. 심령과 성실한 자세로 본분하면, 그 태도는 많이 바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런 자세가 있으면, 이제 그것을 어떻게 실생활 속에 적용해야 할까? 바로 이 말을 너의 실제가 되게 해야 한다. 네가 얼렁뚱땅 하여 넘기고 싶을 때마다, 잔꾀를 부리고 싶을 때마다, 농땡이를 피우고 싶을 때마다, 한눈을 팔고 싶을 때마다, 놀고 싶을 때마다 ‘아, 내가 이렇게 놀면 미덥지 못한 게 아닌가? 이게 지금 마음을 기울여 본분하는 것인가? 이렇게 하면 충성심이 없는 게 아닌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부탁을 저버리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해 보면서 반성해 봐야 한다. 그럼 그렇게 하는 것이 충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된 이상, 어떻게 해야 할까? ‘아, 이 구절에서 참답게 대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려 지나갔어! 착실하게 대하지 못했어, 조금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크게 여기지는 않았어!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것을 크게 여기지 않았기에 아직까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구나! 나라는 사람은 정말 별로구나’라고 하는데, 결점을 찾아내고 자신에 대해 조금 알게 된 것이다. 자신에 대해 알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알고 나면 그만일까? 네가 죄를 자백하면 그만일까?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어떻게 돌이켜야 할까? 이전에 본분하던 태도가 옳지 않았고, 마음도 옳지 않았고, 마음이 본분에 있지도 않았어. 늘 쓸데없이 뛰어다니며 딴짓만 했었구나. 이제는 바로잡아야겠다! 하나님께 다시 그런 마음과 자세가 있으면 징계하고 꾸짖어 달라고 기도해야겠다며 돌이켜야 한다. 전에 얼렁뚱땅 넘긴 곳이 있다고 생각되면, 얼른 가지고 와서 그 부분을 어떻게 고치면 좋을지 보고 바로잡아야 한다. 바로잡은 다음에도 다시 찾고 구해 보고, 기도해 보고, 다시 형제자매들 중에 더 좋은 의견이나 건의가 있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모두가 찬성하며 “좋다”, “괜찮다”라고 말할 정도가 되어야 검증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번에 한 본분이 합격됐고, 최선을 다했고, 마음도 다 썼으며, 자신의 보잘것없는 기능도 다 하고, 다 발휘했으며, 그렇게 능력껏 했으니 양심에 거리낌도 없다고 느낀다. 네가 하나님 앞에 그 일을 내놓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너는 ‘이 일이 하나님 편에서는 60점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전력을 다하였고 온 마음을 다했어! 농땡이를 피우거나 잔꾀를 부리지 않았고, 더구나 여지를 남긴 것도 없어’라고 할 정도면 어떠냐? 이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는 이 실제를 현실 생활에 적용한 것이 아니냐? 이 몇 가지의 실제를 살아낸 것이 아니냐? 그러면 이 몇 가지의 실제를 살아냈을 때, 너는 어떤 느낌이 들까? (편안합니다.) 맞다, 편안하다. 그렇게 하면 사람은 나름 잘 살고 있다고 생각될 것이다. 사람 모양도 조금 있고 산송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 그렇게 하기가 쉬울까? (사실 쉽기도 합니다.) 사실 쉽다. 하지만 아주 어렵기도 하다. 그렇지?

사실 대부분, 각 사람의 마음에는 본분을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저울이 있다. 사람은 늘 설교(원문: 道)를 듣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늘 함께 교통하기 때문에 스스로도 속으로 거의 비슷하게 가늠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은 자신이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늘 얼렁뚱땅하여 넘겼다는 걸 속으로 잘 알고 있다. 특히 본분을 대하는 일에서 늘 보고도 못 본 체하고, 대충 넘어갈 수 있으면 넘어가려고 한다. 자기는 문제점을 발견했어도 상면에서 별다른 지적이나 말이 없으면 ‘내버려 두자, 그렇게 피곤하게 할 게 뭐 있어!’라고 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영 안의 정형이 갈수록 나빠진다. 네가 부담도 없고 충성도 없으면, 결과는 일할 때 아무리 해도 어떤 새로운 깨달음이나 빛 비춤이 없다. 그리고 또 하나, 평소에 사람은 진리 실행을 중시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제가 본분하고 있는 것이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요?”라고 말한다. 그것은 일을 하는 것이다. 일하는 것과 진리 실행은 완전히 다르다. 일하는 것은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외적으로 과정만 밟는 것이다. 너를 보면 바삐 보내고 있다. 하지만 너의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와 겉으로 보여지는 것은 다르다. 네가 마음으로 생각하고 달성하고자 하는 것과 겉모습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늘 일을 끝마친 뒤에는 ‘많은 힘을 들이고 많은 일을 했는데도 결과는 어째서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라고 하는데, 그것은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바로 겉으로 일하는 것과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른 세상인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일을 하고 있다. 마치 사람에게 허상을 보여 주는 것과 같다. 본분을 하고 있고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런 일들이 마음에는 없다. 즉, 진리를 실행하는 것, 진리를 참답게 대하는 것, 진리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 모르는 일은 어떻게 찾고 구하고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이런 생각들이 없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겉으로 보면 본분을 하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마음은 거기에 없다. 손도 와 있고 몸도 와 있지만, 마음은 오지 않은 것이다. 마음이 본분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너희들이 평소에 늘 설교를 듣거나, 서로 교통하거나, 예배를 드리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신 후에, 책을 덮고 예배 장소를 떠나면 마음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그것은 진리, 하나님의 말씀, 자신의 생명 진입에 관한 문제를 묵상하지 않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임하는, 일상 생활 속에 임하는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데서 알아차릴 수 있다. 너의 마음은 늘 하나님 앞에 있지 않고, 일은 그저 일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다수가 진리에 더 깊이 진입하기 매우 어려워하며, 표면적인 글귀 도리에만 머물러 있다. 도리적, 대체적인 것만 아는 데에서 멈춰 더 깊이 진입하는 것은 아주 어려워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이 그쪽으로 쏠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진리에 더 깊이 진입하는 방면, 진리 실제 방면에 깊이 진입하는 정도가 아주 한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믿어지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본분하는 데에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하느냐?”라고 묻는다면, 너희는 아마 모두가 이렇게 답할 것이다. “고통받고 화비할 수 있고, 고난받을 심지(心志)가 있고, 많이 기도하고, 본분을 하면서 농땡이를 피우지 말고 속이지 말며,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상면에서 말하는 대로 따르고 순복해야 합니다.” 본분하는 방면의 진리와 그런 도리적인 것들에 관련되는 진리는 너희가 겉면의 것은 다 말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각 진리의 세부적인 실행 방면에 대해 너희는 얼마나 알고 있고 깨닫고 있을까? 모르고 있구나! 그렇지? 모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진리의 표면적인 것만 잡고 있을 뿐, 진리의 실제는 깨닫지 못한 것이다. 바로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도 진리의 글귀 도리는 말할 줄 아는데, 그것으로 진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너희는 앞으로 무엇을 중시해야 하겠느냐? 한 방면은 정상적인 영 생활이 있어야 한다. 바로 겉으로 보여지는 것, 즉 기도하고, 예배하고, 먹고 마시고, 설교를 듣고 찬양하는 것이다. 겉면의 이런 것들을 지키는 것 외에 자신의 본분을 지체하지 말고 잘해야 한다. 그리고 또 너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네가 진리를 추구하고 싶고, 진리를 깨닫고 싶고, 진리를 얻고 싶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안정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진리를 묵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묵상하는 법을 습득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묵상하는 법을 익혀야 하는데, 묵상에 형식이 필요하냐? 규례가 있느냐? 시간적인 제한을 받느냐?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장소의 구애를 받느냐?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진리를 묵상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지? (네.) 그러면 훨씬 쉬워졌다. 언제 어디서나 진리를 묵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평소에 멍하게 있는 시간을 다 진리를 묵상하는 데에 쓰라는 것이다. 너희들이 속으로 이 생각 저 생각, 쓸데없는 것 생각하는 시간을 아껴 진리를 묵상하는 데에 쓰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이 헛되지 않을 것이 아니냐?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동안 사람은 다 무엇을 하느냐? 잡담을 하거나 멍하게 있거나 바보처럼 넋을 놓고 있고, 그렇지 않으면 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집 생각도 좀 하고, 이전에 알던 사람 생각도 해보고, 또 과거 자신의 모습도 되돌아 보고, 지난날 화려하고 잘나갔을 때도 생각해 보고, 또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거나, 이번 생애에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나이가 들면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해 본다. 그러면서 ‘백발이 되면 어떤 모습일까? 얼굴에 주름이 생기려나? 얼굴은 커질까, 작아질까? 이가 몇 개 빠지면 어떤 모습일까? 등이 구부러질까? 다리를 절게 될까?’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영적인 것들을 생각해 보는데, ‘미래의 국도는 어디에 있을까? 지옥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믿지 않는 어느 동창을 보게 될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것은 무의미하지 않으냐? 그렇게 잡담을 하거나 무의미한 시간들을 다 비워 안정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안정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안정해서 뭘 해야 할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묵상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며, 자신이 그동안 행한 것들을 반성해 보면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져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야 한다. 그다음엔 자신이 의식할 수 있거나 인식할 수 있는 큰 문제가 있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큰 문제나 치명적인 부분이나 자신의 패역 부분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지 거기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보아야 한다.

하나님 말씀의 어떤 내용들을 묵상해야 하는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내용은 사실 정하기 매우 쉽다. 바로 너희들이 자주 입에 달고 있는 소위 말하는 영적 용어나 영적 도리이다. 또한 스스로 늘 옳다고 생각하는 영적인 실행 원칙이다. 이런 것들을 꺼내 찾고 구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어야 한다. ‘나는 영적인 어휘나 표현을 이론적으로는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고, 도리적으로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고, 글귀로도 잘 알고 있어! 그럼 이런 것의 실제적인 면은 어떤 것일까? 난 어떻게 실행해야 할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런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묵상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진리에 진입하기 매우 어렵고 진리를 깨닫기가 매우 어렵다. 사람이 진정으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을까?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면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진리를 얻지 못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아주 힘들 것이다. 예를 들면,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다’라는 말을 한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말 한 마디를 잘못했는데, 이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일까, 아닐까? 이렇게 말하는 건 악행일까, 선행일까? 하나님께서 기억하실까? 하나님 편에서 정죄하실까? 어떤 것들이 악이지?’ 이렇게 묵상해 보아야 한다. ‘자신의 마음, 떠오르는 생각, 마음가짐, 견해, 관점, 말을 하고 일을 하는 동기와 근원, 유로되는 여러 가지 성정, 이런 것들은 악에 속하는지? 그중의 어떤 것들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인지? 어떤 것이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인지? 어떤 것이 하나님께 정죄받는 것인지?’ 이런 것들은 묵상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으냐? ‘어떤 일에서 쉽게 큰 잘못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은 다 묵상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지? 너희는 평소에 묵상해 보느냐? (묵상보다는 멍하게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다른 것을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너희는 지금 나이가 어느 정도 되느냐? 20대, 아직 30살이 안 되었다, 그렇지? (네.) 30살도 안 되었다, 그러면 너희들이 제대로 된 사고력을 가지기 시작해서부터 지금까지 몇 년 정도 되었느냐? (20년가량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일, 어른스러운 일을 생각할 줄 알고, 성숙한 생각을 하게 된 지가 20년가량은 되지 않겠지? 너희는 겨우 20살이 넘었는데, 20년가량이라고 하면 네댓 살이나 대여섯 살 때부터 그런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단 말이냐? (아닙니다.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할 줄 몰랐습니다.) 17, 18살쯤부터 계산을 해 보자, 그러면 몇 년이냐? (10년입니다.) (7, 8년입니다.) 7, 8년 정도, 좀 더 하면 10년이다. 그렇지? 그러면 그 10년 동안 너희가 보낸 허송세월은 얼마나 되느냐? 진리와 관계 있는 일, 하나님을 믿는 일과 관계되는 일, 생명 진입과 관계되는 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과 관계되는 일들을 얼마나 생각해 보았느냐? 몇 번이나 생각해 보았느냐? 기억이 있느냐? (하나님, 저는 10년이 되었지만, 8년은 허비한 것 같습니다.) 8년을 헛되이 보냈다. 그러면 나머지 2년은 무엇을 했느냐? 그 2년은 의의 있는 일을 했느냐? (그 2년 동안은 의의가 있는 일을 생각해 본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는 어떤 일들이 의의가 있느냐? 예를 들어 보아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자신의 정형과 패괴된 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진리로 해결하거나 해부하는 시간들입니다. 그렇게 계산해 보면, 10년 가운데서 2년 정도만 진정으로 조금 진입이 있었던 때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은 그저 일만 했거나 육체적인 일, 하나님과 무관한 일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그 2년 동안 수확이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너희가 언제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을 믿는 것, 진리와 관계되는 일을 묵상하여 성과가 있게 되면, 그때가 너희의 생명 진입이 시작되는 때인데, 생명 진입이 있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 묵상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생명 진입이 없다. 한 사람이 생명 진입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줄 알고, 문제를 제대로 생각할 줄 알고 그런 것을 묵상할 줄 알게 되면, 진리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인데,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말했느냐? (한 사람이 생명 진입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줄 알고, 문제를 제대로 생각할 줄 알고 그런 것을 묵상할 줄 알게 되면, 진리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인데,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럼 너희는 지금 시작했느냐? 고개를 가로젓기만 하는 걸 보니 하지 못했다는 뜻이구나, 그렇지? 아직 묵상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묵상할 줄 모르면 진입이 없다.

사람이 나이에 상관 없이 가족을 어떻게 먹여 살릴지, 어떻게 하면 돈을 좀 벌어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 혹은 집안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언제쯤이면 자신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런 일들을 생각하게 될 때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제는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이 성숙해진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생각할 때면, 그 사람의 무엇이 시작되는 것이냐? 그 사람의 독립생활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냐?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면, 자신이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기술을 배워도 좋고 혹은 어떤 졸업장을 따도 좋고, 어떻게 사회로 진출하고, 어떻게 처세하고, 앞으로 자신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지 등등,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면, 그 사람은 성숙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나 이런 생각이 없을 때는 어떠하냐, 여전히 부모에게 의존한다. 먹는 것도 지내는 것도 부모에게 의존하고, 생활도 부모에게 의존한다. 그러면 부모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 용돈도 부모에게 손 벌리고, 먹고 입는 문제도 부모에게 손 벌리며, 부모 집에서 같이 산다. 만약 부모가 상관하지 않으면 굶어야 한다. 또한 인생의 대사나, 결혼하여 자립하는 것이나, 삶이나 앞날이나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성숙하다고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저 사람은 마흔이야! 마흔인데도 아직 그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이 그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분량을 갖추었느냐? 그 나이가 되었음에도 그런 일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분량을 갖춘 것이냐? (갖추지 못했습니다.) 부모가 죽거나 부모가 그를 밀어낸다면, 그 사람은 밖에서 굶주려야 한다. 그런 사람이 있지 않으냐? 아무런 생활 능력도 없고 수완도 없다. 나가서 밥벌이를 해도 어디를 가나 이틀을 넘기지 못한다. 생존하지 못한다. 물 하나도 끓일 줄 모른다. 물을 끓여도 다른 사람에게 “이거 어느 정도 돼야 끓은 건가요?”라고 물어봐야 한다. 다른 사람이 “당신 바보예요? 물 하나도 끓일 줄 모르다니요!”라고 하면, “끓여 본 적이 없어요!”라고 한다. “그럼 당신은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요?”, “엄마가 끓여 주셨어요.”라고 한다. 옷이 더러워도 빨래할 줄 모르고 라면조차 끓일 줄 모르는데, 그런 사람을 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이로 보면 어른이다. 그렇다고 나이에 따라 성숙한지를 논할 수는 없다. 그게 객관적이지 않으냐? (객관적입니다.) 그런 것이 객관적이다. 어떤 사람은 18, 9세, 어떤 사람은 20대에 철이 들어 머리로 이런 제대로 된 일을 생각하는 것이다. 앞으로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립할 수 있고, 스스로 먹고 살려면, 자기 구실을 하고 기술을 익혀야겠다는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계속 생각하다 보면 ‘뭐라도 배워야 되겠지? 어디 가서 직장이라도 찾아야겠지?’라고 하지 않겠느냐? 돈 벌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하면 자립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자립하여 생활을 하려면 어떤 재능과 기술을 가져야 하는지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생각하다 보면 시작하게 된다. 직장에 나가 돈을 벌기 시작하고, 자립하려면 어떤 것들을 조심해야 하고 어떤 것들을 배워야 하는지를 익혀 둔다. 그렇게 배우다 보면 서서히 점차 자립할 수 있게 된다. 점점 자립하다 보면 천천히 자기 부모도 부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완전히 성장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지금의 너희는 어느 단계에 있느냐? 너희는 어른이 된 단계라고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는 어떠하냐? 만약 지금 너희를 양육해 주는 사람도 없고, 예배도 없고, 설교 교통도 듣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상면에서 너희에게 교통을 해 주지 않고, 너희를 이끄는 사람도 없으며, 너희끼리 말씀을 보고, 너희에게 찬송가를 제공해 주고, 때에 맞춰 설교 교통을 내려보내 줘서 너희들 혼자 들으라고 하면 정상적인 진입이 있을 수 있느냐?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것 봐라! 그게 문제이다. 그러면 정말 곤란한 것이다. 너희는 지금 매우 위험하다! 지금 너희에게 있는 그 환경을 보아라, 그런 환경이 있어 너희는 본분을 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 모양이 있도록 보호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환경을 벗어나면 어떻게 될까, 너희 분량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드러나지 않겠느냐? (드러납니다.) 그럼 너희의 분량이 드러나게 될 때, 그 분량이 도대체 얼마나 클 것 같으냐? 진리 실제를 얼마나 구비했느냐? 진리 실제를 얼마나 깨달았느냐? 그때 가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보아도 땡전 한푼 없는 것 같은 지경이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시련이 임했을 때, 어떻게 간증을 서야 할지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야 할지 모른다. 네 마음에는 이런 것들이 없는데, 길이 없고, 방향이 없고, 또한 네 안에 네가 그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뿌리내린 진리도 없고, 그만한 분량도 없다면, 시험이 닥쳤을 때, 너는 역시 벗어나지도 간파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로 너는 도태되는 것이다, 알겠지?

지금 한 사람이 사회에 나간다면 시험이 많지 않겠느냐? 어디를 가나 다 시험이다. 사악한 조류는 어디 가나 다 시험인 것이다. 여러 가지 말들, 여러 가지 관점, 여러 가지 사상, 다양한 인간들의 갖은 유혹, 다양한 인간들의 갖가지 마귀 몰골들이 너에게는 다 시험이 된다. 만일 네게 진리가 조금도 갖추어져 있지 않고 실제 분량이 없다면, 그런 것들을 간파하지 못한다. 그러면 너에게는 하나하나가 다 함정이고 다 시험인 것이다. 하나는 네가 여러 부류 인간의 사탄 몰골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며, 그것을 이기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진리 실제가 없으면 너는 각종 사악한 조류, 사악한 관점, 그릇되고 망령된 사상이나 논조, 이런 것들을 막아 내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오면 너에게는 몰아치는 한파와 같은 것이다. 가벼우면 감기에 걸리고 심하면 독감(원문: 中寒)에 걸리는 것이다. 독감에 걸리면 죽는다. 까딱 잘못하면 너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이방 세상의 사탄 말 두세 마디가 너를 혼미하게 만들고 얼떨떨하게 만든다. 그러면 너는 도대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옳은 일인지,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모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어쩌면 오늘은 예배도 드려서 아주 좋을지 모르지만, 내일은 집에 가서 한국의 멜로 드라마를 보게 된다. 그러면서 울고불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되면서 그 드라마가 전개되는 데에 따라 운다. 그러다가 밤에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아, 기도를 깜빡했구나!’라고 하게 된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 드라마, 또 언제 하지? 계속 봐야 하는데!’라고 하게 된다. 이틀 정도 봤는데 벌써 얼굴은 시커멓게 되고 하나님은 사라진다. 그리고 너는 그 속에 빠져 ‘나도 언제즘 연애 한 번 해 볼 수 있을까? 뜨거운 연애를 한 번쯤 해 본다면, 그래도 인생을 헛살지는 않은 건데 말이야. 이 나이가 되도록 사랑 한 번 제대로 못 해 봤잖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보아라! 드라마 두 편에 관점이 바뀌었다, 어떠하냐? 분량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무엇이냐? (사탄의 시험입니다.) 그런 것들은 아주 빨리 받아들인다. 너희는 지금 사악한 조류를 이겨 낼 수 있는 분량이 있는 것 같으냐? 지금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온실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를 잊지 말라. 너희는 지금 온실 안에 있는 꽃이다. 비바람을 견디지 못한다, 그렇지? 그것은 시험이다. 버티지도 간파하지도 못하고 언제 어디서나 사탄의 포로가 될 수 있다. 사람의 분량은 그렇게 작고도 가련하다. 왜냐하면 너희에게 진리 실제가 없고,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속하는 그런 모든 말들이 너희에게는 독약인 것이다. 빠지면 나오지 못한다. 네가 “난 안 들을 거야”라고 한다고 어떻게 듣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렇다고 네가 진공 속에서 살 수 있겠느냐? 듣기만 하면 버티지 못하고 막지 못하고 빠져들게 된다. 또 “난 기도하고 저주할 거야”라고 한다. 기도와 저주가 끝나고 몸을 일으키는 순간 ‘아까 뭐라 그랬더라? 안 돼, 그래도 봐야겠어, 그 주인공은 어떻게 됐을까? 마지막에 그 여자와 결혼할까?’라고 하게 된다. 그게 뭐였지? 인연이 있으면 뭐가 된다고 했지? (‘인연이 있으면 결국 부부가 된다’입니다.) 그것 보아라! 그런 말들이 너희들 입에서 술술 나온다, 그렇지? ‘그래도 봐야 해!’라며 버티지 못하게 되지? 그런 것들이 너의 삶과 생각을 좌우하고, 너의 행동을 좌우하고, 너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고, 또한 인생의 방향, 심지어 네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통제할 수 있다면, 너는 철저히 끝장난 것이고, 희망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시험 방면이다.

지금 너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도 있고, 심지도 결심도 있고, 더욱이 소망도 꿈도 있는 것 같겠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 너에게 임하면 어떻게 대할 것이냐? 너는 “전 순복할 거예요.”라고 말하겠지만, 하나님이 너에게 어려운 문제를 내놓으면 너는 순복하지 못하게 된다. 너의 관념에도 상상에도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네 앞에 놓인 것은 난제(難題)이지 빵이 아닌데,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에게 상을 베풀어 줄 때는 그것이 사람의 심리적 수요에 맞고 또한 사람의 관념에도 부합되고 사람의 구미에도 맞기 때문에 사람은 순복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거두어 가면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어떻게 대하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마련해 준 환경에서 굳게 설 수 있느냐? 간증을 설 수 있느냐? 이것은 문제가 아니냐? 너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아느냐? 네가 “난 틀림없이 간증을 설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허풍을 떠는 것이고, 어리석은 말이고 무지하고 우매한 말이다. 하나님이 너에게서 어떻게 하려는지 아느냐? 하나님이 너의 어떤 것을 시련하려는지 아느냐? 하나님이 너에게서 무엇을 검증하려는지 아느냐? 너는 “난 고난받을 심지가 있어! 두렵지 않아!”라고 하겠지만, 때로는 고난받는 것이 아니다. 너는 “난 준비가 됐어! 두렵지 않아! 하나님께서 어떤 시련을 주신대도 난 준비되어 있어! 두렵지 않아”라고 말하겠지만, 때때로 갑자기 찾아오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네가 생각하지도 못하고, 네가 준비하고 있던 것과 같지도 않다. 그것은 너희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인데, 준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소용이 없다. 예를 들어, 네가 지금까지 아주 건강하고 본분도 오래 했다. 본분하는 몇 년 동안 하나님의 보호로 아픈 곳도 없이 아주 순조롭게 지내 왔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검진을 받게 되었다. ‘어? 어떻게 이런 병에 걸리지?’라고 하면서 주위 사람들을 살펴본다. ‘아무도 걸리지 않았는데, 어떻게 해서 내가 이런 병에 걸린 거지? 왜 하필 내가 걸린 거지? 내가 가장 적극적이었고, 고통도 가장 많이 받았고, 하나님도 가장 오래 믿었는데, 왜 내가 걸린 거지? 이 병에 걸린 건 뭔가 잘못됐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게 아니야, 이건 아니야, 다시 검사해 봐야겠어.”라고 말한다. 재검사해도 그런 결과라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시는 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너는 기도도 하고 믿음도 생긴다. 한동안 기도를 하면서 지내다가 ‘병이 호전되는 것도 보이지 않아! 아, 하나님은 나보고 죽으라는 거구나! 내 목숨을 거두시려는 거구나!’라고 하게 된다. 그래도 순복할 수 있을까? 울게 된다. “하나님! 저는 죽고 싶지 않아요, 저는 마음껏 살지 못했어요, 아직 어려요, 죽을 나이도 되지 않았단 말이에요! 흰 머리카락 하나 없어요, 인생을 이제 반도 경험하지 못했어요, 좀 더 살게 해 주세요, 저 아직 많은 힘을 쓸 수 있어요!”라고 하게 된다. 기도해도 소용없고 아무리 검사해 봐도 죽는 것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것에 직면해야 합니다.) 직면해야 하니 가서 치료를 해야겠지! ‘치료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 걸,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하게 된다. 많은 경우에, 사람이 하나님의 검증을 막 느끼게 될 때는 ‘하나님이 하시는 건 옳은 것이야! 다 좋은 거야!’라고 느끼지만 명확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느낄 때면 ‘어쩌면 하나님의 뜻은 정말 내가 죽는 것일지도 몰라! 살지 말라는 것인가 보다! 하나님에게는 날 살게 하려는 뜻이 없어 보여!’라고 생각하면서 사람은 죽기를 기다린다. ‘어쨌든 죽는 거잖아! 어떻게 죽든 결과는 죽는 거잖아! 그럼 죽어야지, 하나님이 죽으라고 했으면 죽어야지!’ 그러고는 죽기만 기다린다. 죽기를 기다리는 자세는 옳은 것일까? 그것은 어떤 태도이냐? (소극적인 태도입니다.) 맞다, 소극적인 태도이다. 거기에 순복하는 성분이 조금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사람은 죽고 싶어 하느냐?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맞다, 죽어야 할 때 사람은 방법이 없으니까, 안 죽을 수도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지? ‘인정’했다는 것은 소극적이고 대항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간증이 아니다! 그럼 어떤 사람은 ‘죽으라고 하는 판에 뭘 더 간증합니까?’라고 한다. 하나님이 죽게 했다고 너는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 것이냐? 하나님이 죽게 하면 본분을 하지 않을 것이냐? 너희의 본분은 다 했느냐? 잘 했느냐? (못했습니다.) 그럼 어떤 마음 자세를 갖춰야 피조물로서 해야 할 간증을 하는 것일까? 어떤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하느냐? (‘숨이 붙어 있는 한 본분을 잘해야 한다’는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럼 본분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건강했을 때보다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건강했을 때에도 마음을 다 쓰지 못했는데, 그렇게 심한 병을 얻어 당장 죽게 되었는데, 마음을 쓸 수 있을까? 마음만 있을 뿐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입니다.) 그럼 현실적인 것을 말해 보아라!

어떤 일이 임하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옳은 것이다. 한 방면으로는 반성하고, 한 방면으로는 본분을 지체해서는 안 된다. 네가 반성한다면서 본분을 멈추고 “난 반성하고 있으니 본분할 시간이 없어”라고 말하면 옳은 것일까? 옳지 않은 것이다. 어떤 시련이 임하든, 너는 그것을 하나님이 네게 준 짊어질 책임으로 여겨야 한다. 이가 아파도 정말 고통스러운데, 어떤 사람은 더 심한 병에 걸린다. 더 고통스럽지 않겠느냐? 이가 둘이나 하나만 아파도 죽을 정도로 괴로워한다. 그런데 어떤 병은 오장육부에 생긴다. 만지려고 해도 만질 수 없고 통증도 멈추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겠느냐? 심지어 어떤 사람은 죽음을 마주하게 되는데, 어떡해야 하겠느냐? 대부분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시련은 사람에게 짊어질 것을 더해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얼마만한 것을 주면, 너희는 그만한 것을 짊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네가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너의 분량이나 네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주지 않는다. 네게 짊어질 양을 주는 것도 한계를 넘지 않는다. 틀림없이 네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을 준다. 그러나 어떤 것을 짊어지게 하든 어떤 시련을 주든 너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너희가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든, 기도하여 명확한 깨우침과 빛 비춤을 얻게 되든, 그것이 너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나 하나님이 네게 주는 어떤 경고적인 의미라는 것을 깨닫게 되든 그렇지 못하든, 너의 일, 본분을 멈춰서는 안 된다! 자신의 본분을 지키고 멈추지 않아야 하나님도 흡족해하고 너 또한 간증을 선 것이 된다. 어떤 사람은 중병에 걸려 죽을 것이라고 하면 가만히 생각해 보면서 ‘죽는다고? 그럼 난 아직 정말 많은 일들을 하지 못했어! 먼저 내 일부터 처리해야지, 본분은 일단 내려놓자.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살기 위한 것인데, 지금 보니까 장담하기 어렵구나! 하나님을 믿어도 죽어야 한다면, 먼저 내 일부터 해결해야 돼! 아직 풀지 못한 소원이나, 한평생 아직 누려 보지 못한 것들을 먼저 하자! 내 자신의 일을 먼저 해결해야 하니까 본분은 우선 하지 말아야겠어! 내가 본분을 이렇게 오래 했는데도 하나님은 죽게 하시니 본분은 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다. 이것은 어떤 자세이냐? 본분을 그렇게 오랫동안 했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것이다. 본분을 그렇게 오래 하고 그렇게 많은 교통도 들었지만, 너는 시련 하나에 무너지고, 쓰러지고, 풀이 죽고, 기운이 빠지고, 시련 하나에 본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마음에 둘 가치가 있겠느냐? 이것은 충성심이 손톱만큼도 없는 것이다. 그럼 그동안 했던 본분은 무엇이 되겠느냐? (효력이 됩니다.) ‘효력’이라고 부른다. 노동력만 판 것이고, 노동력만 판 존재가 된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병을 주시거나 어떤 여의치 않는 일이 닥치게 하실지라도, 하나님이 어떻게 하셔도 난 순복하고, 피조물의 위치에 잘 서야 해! 우선 순복 방면의 진리를 실행하고 실제적으로 적용시켜 하나님께 순복하는 실제를 살아내야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 하라고 하신 것, 또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본분을 내버려선 안 돼! 마지막 숨이 붙어 있다고 해도 내 본분을 지켜야 해”, 이 정도가 된다면, 간증이 있는 것이 아니냐? 네게 이런 심지가 있고 이런 정형이 있다면,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이 목숨도 하나님께서 주셨어! 하나님께서 주신 걸 헛되게 해선 안 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해, 하나님이 이렇게 오랫동안 공급해 주시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면하게 해 주셨어!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얼마이고, 주신 진리가 얼마인데, 역대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던 진리와 알지 못했던 심오한 비밀을 얼마나 많이 깨달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건 너무 많아, 하나님께 보답해야 해! 예전엔 분량도 작고 철도 없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만 했어, 어쩌면 앞으로 하나님께 보답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잖아!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았든지 있는 힘을 다 바쳐야 해! 할 수 있는 건 다 바치고 다 하나님께 드려야겠어! 하나님께서 위안을 받으시고, 더 이상 맘 아프지 않고 실망하지 않으시도록 우리 피조물에게 이렇게 오래동안 공급해 주신 것이 헛되지 않고 성과가 있다는 것을 보여 드려야 해!’라고 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떠냐? (좋습니다.) 너는 ‘병이 언제면 좋아질까? 좋아져야 본분도 제대로 잘할 수 있지! 충성을 다해야 하는데, 온몸에 병밖에 없으면 어떻게 충성을 다할 수 있겠어? 어떻게 피조물의 본분을 다할 수 있겠어?’라고 생각하면서 살길을 찾고 벗어나려고 하지 말라! 숨이 붙어 있기만 하면 본분을 할 수 있지 않으냐? 숨이 있는 한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숨이 있는 한, 의식이 있는 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 건 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할 수 있다’고 쉽게 말하지만 그 일이 정말 너희에게 닥치게 될 때에도 쉬울까? (쉽지 않습니다.) 맞다, 쉽지 않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늘 진리에 노력을 기울이고, 많이 묵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을지, 어떻게 피조물의 본분을 다할 수 있을지를 묵상해 보아야 한다. ‘피조물’, 피조물이란 무엇을 말할까? 피조물의 책임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내기도 해야 한다. 너희의 책임과 의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그렇게 많은 진리, 길, 생명을 준 것을, 하나님이 너희에게 살아내라고 그렇게 많이 준 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희가 살아내어 하나님을 증거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피조물이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다. 늘 이런 일들을 묵상해 보아야 한다. 늘 묵상하다 보면 각 방면의 진리에 더 깊이 진입할 수 있다.

사람이 진리에 노력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넘어질 것이고 굳게 서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사실이 임하고 시련이 닥치면, 글귀 도리 한두 마디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귀 도리는 실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다! 네가 진리의 각 방면을 분명하게 알고 있고, 평소에 그런 일들을 묵상하여 명확하게 깨달아 알고 있고 자신이 있어야만 일이 임해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그렇게 묵상하지 않으면 이런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묵상해 보지 않으면 네가 얼마나 많이 들었든, 말로 얼마나 많이 할 수 있든, 그것은 영원히 글자 표면만 갖게 되는 것이고, 글자 표면에만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글자 표면의 것들로 늘 착각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신은 이미 성과가 있고 분량이 아주 크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열심도 있고 열정도 있기 때문에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사실이 임하면, 너는 그런 것들로는 시련이 닥칠 때마다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고, 검증을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을 보면, 일이 임하면 항상 ‘아, 일이 생겼어. 어떻게 하지? 빨리 찾아봐야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비춰 보아야 해! 어떤 일들에 맞춰 봐야 하는지 빨리 각 원칙을 찾아봐야겠어!’라고 한다. 그럴 때면 자신이 갖춘 진리가 너무 적고, 깨달은 진리가 너무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지? 쓸 때가 되어야 적다는 것을 알게 된다. 쓸 일이 없을 때는 늘 많고, 넘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넘치는 것은 다 무엇이냐? 바로 글자 표면의 것이다. 그런 느낌은 잘못된 것이다. 스스로 차고 넘친다고 여길 때는 위험한 것이다.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고 많은 일들을 알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어떻게 진입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늘 자신에게는 뭔가 있다고, 가득 차 있다고 느끼고, 자신은 참 괜찮다고 느끼면서 자신을 인식하고 하나님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험한 신호이다. 네가 그렇게 생각할수록 아무것도 모르고, 어떤 진리 실제도 없다는 것을 더욱 증명한다. 너희는 이 말을 묵상해 보거라! 묵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에 있어야 하는 아주 중요한 한 가지이다.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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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이 한 편의 교통을 보고 얻은 성과가 있느냐? (하나님께서 아주 상세하게 교통해 주시니 진리를 묵상해야 하는 중요성과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어떤 내용을 묵상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상세하게 교통했다. 그럼 더 자세하게 교통할 필요가 있느냐? 이 정도로 상세하면 너희는 진입할 수 있지 않겠느냐? 이 정도로 상세하게 했는데도 진입하지 못한다면, 어떤 사람이냐? 그러면 바보이고 멍청이이다. 더 어떻게 가르쳐 줄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이 묵상하고 찾고 구하는 과정이 필요 없이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는 일만 남은 격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그것에 따라 실행하고 있느냐? (지금 실행하고 있습니다.) 효과가 좀 있느냐? 그 교통을 들은 지 며칠 되었느냐? (일주일 됐습니다.) 일주일 되었다. 일주일이면 그대로 실행하는 데에 감이 좀 잡히지 않았느냐? 실행하기 시작했느냐? (시작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형식이나 규례로 실속 없이 과정만 거친다면, 결국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 실제적인 것을 얻을 수 있겠느냐?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실제에 적용하고 실제 속에서 구체화시켜야 진리를 얻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겉으로 보여지는 형식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거나 예배나 기도에서 다 실제적인 효과가 일정하게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게 되는지 아느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은 어떤 것을 기뻐하시고, 사람이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지, 사람에 대한 요구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알아야 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실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종교적인 신앙과 지금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의 차이는 무엇이냐?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도 않습니다.)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목적은 살아내기 위한 것이다. 실행의 목적도 살아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을 너의 생명이 되게 하는 것, 깨닫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을 너의 생명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너의 생명으로 만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네가 일을 하고 생활하고 처신하고 살아가는 뿌리와 원천으로 만들라는 것이다. 보통말로 ‘삶의 방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원래는 어떤 것으로 살았느냐? 신앙이 있든 없든, 사람은 무엇으로 살고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살고 있느냐?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사는 것이 피조물에게 있어야 할 모습이냐?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데에 있어야 할 목표가 아니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은 피조물에게 있어야 할 모습이고, 그렇게 살아야 하나님의 눈에 진정한 피조물로 비친다. 그러므로 너희는 생각을 해 보고, 평소에 묵상해야 한다. 네가 하는 일들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또 네가 하는 말과 행동, 일처리 원칙, 삶의 목표, 처세 방식, 생활 방식에서 어떤 면들이 하나님과 서로 잘 맞는지, 네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요구에 따랐는지, 어떤 면에서 자신의 뜻대로 살아 하나님의 말씀과 요구와는 무관했는지, 이런 것들을 묵상해 보아라! 그러면 천천히 진입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을 묵상하지 않고 겉으로 노력하고 열심히 해 봤자 소용이 없다. 형식적인 과정만 거치고 규례를 지키고 의식이나 행사를 한다면, 결국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저렇게 말했지만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사실,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이 하나님의 눈에 진정한 피조물로 비춰지게 되는 과정이다. 사람이 지금 사탄의 성정으로, 사탄의 본성으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눈에 만족스러운 피조물로 비춰지겠느냐? 네가 입으로는 믿고 있다. 하나님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주재를 인정하고 있고,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었다는 것도 인정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냈느냐?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았느냐?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였느냐? 그런 모습을 가진 피조물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느냐? 하나님과 함께 생활할 수 있겠느냐? 네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느냐? 네가 살아내었고, 가고 있는 길이 하나님과 맞는 것이냐? 거기까지 도달하였느냐? (못했습니다.) 도달하지 못했다. 그럼 지금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의의는 무엇이냐? 정상 궤도에 들어섰느냐?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입으로만 하나님을 따르고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믿고 시인하면서 하나님을 자신의 조물주로, 자신의 주재자로 인정했을 뿐이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주재와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과 완전하게 맞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의의가 아직 목표에 도달할 정도로 실현되지 않은 것이다. 아직 실질적인, 하나님을 믿으면서 있어야 할 실제적인 면에 진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이렇게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간단하냐? (간단하지 않습니다.)

너희도 이제는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으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모든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과 외부 환경으로 인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와서 많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에게 너는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신자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을 믿는 일에서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이다. 너의 믿음이 인정받은 것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너는 하나님의 이름을 시인하고, 하나님은 만물의 주재자이고, 조물주라는 것을 믿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의 삶 속에 진리와 관련되고, 하나님의 요구와 관련되고, 피조물이 해야 할 것과 관련되는 것이 조금도 없는 그런 사람이 되지는 말라! 그렇게 되면, 결말은 참 곤란해지지 않겠느냐? 그런 것과 상관없다면 하나님 앞으로 올 수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 앞으로 오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그런 믿음을 인정하겠느냐?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은 너 같은 피조물이 싫다는 것이다. 인정하지도 않고 필요치도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너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고 칭찬하지 않는데, 네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러면 끝장이다. 결말이 결정되지 않았느냐?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그럼 너희는 이런 결말을 원하느냐? (원치 않습니다.) 너희는 어떤 결말을 원하느냐? (하나님께 인정받는 결말을 바랍니다.) 너희 역시 하나님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그렇지? 하나님에게 인정받으려면 사람은 무엇부터 알아야 하느냐? 어떤 것부터 진입해야 하느냐? 너희가 어떤 일들을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지, 어떤 일을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솔직한 말이 아니냐? 네가 그렇게 하고 그렇게 행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이 맞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인지 아니면 증오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눈에 의롭고 선하게 보일지 아니면 악하게 보일지를 너는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마음에 그런 기준이 있고 선이 있어야 한다.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너희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눈에 다 악으로 보일 것이다. 악으로 보여지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겠느냐?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네가 한 일은 해야 할 것이냐, 하지 말아야 할 것이냐?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유효일까, 무효일까? (무효입니다.) 무효가 되는 것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악이나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무효라는 걸 알았다. 그럼 일하는 원칙, 모든 일을 하는 원칙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길이 있어야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그것이 유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범사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더듬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 알고 있구나. 그렇지? 진리를 찾고 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듬어야 하는데, 그럼 더듬어서 알게 되면 곧바로 실행할 수 있느냐? 깨닫자마자 바로 실행할 수 있느냐?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러려면 사람은 고난받을 줄 알아야 한다! 진리를 위해 고난받아야 한다! 자신의 욕망, 속셈, 야심, 육체의 안일함 같은 이런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이런 것들을 내려놓지도 않고 진리를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진리를 알고도 싶어 하고 얻고도 싶어 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화비도 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다. 자신의 앞날을 버리지 못하고, 육체의 안일을 버리지 못하고, 가족의 화목을 버리지 못하고, 자녀를 버리지 못하고, 부모를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속셈과 목적과 욕망을 다 버리지 못한다. 어떤 일이 닥치든 자신의 일을 맨 앞자리에 놓고 진리는 맨 뒷자리에 놓는다. 일이 임할 때마다 사욕을 채우는 일을 앞자리에 두고, ‘자신’이란 글자가 앞자리를 차지한다. 육체의 이익을 만족시키고 사탄의 패괴 성정을 만족하는 것이 첫 순위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은 부차적이어서 맨 뒷자리에 놓는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해서 언제 진리 실제에 진입하겠느냐? 언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겠느냐? 너희들의 말대로 겉으로는 본분을 하면서 쉰 적이 없다. 하지만 패괴 성정은 조금도 해결받지 못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이것은 다 알고 있다. 그렇지? 오로지 진리를 실행하려고 할 때는 어렵다. 너는 진리를 실행하는 일에 고난과 대가를 바쳐야 한다. 그것을 규례를 지키고 과정을 거치는 그런 일에 바치지 말고 진리를 실행하는 일에 바쳐야 한다. 진리를 위해 받는 고난이 아무리 많아도 다 가치가 있다.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만족게 하기 위해 받는 고난은 하나님이 열납하고 인정한다.

지금 너희 눈앞에 놓인 문제는 어떤 것이냐? 하나는 진리의 세부적인 것을 아주 많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에 기준이 없어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알고 있는 진리를 실행할 때 힘들어하는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게 되는 그 기간에, 처음에는 힘들다가 실행할수록 더 쉬워지고, 실행할수록 패괴 성정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진리가 더 우위를 차지하게 되며, 진리를 실행하려는 심지가 갈수록 더 우위를 차지하고, 정형이 갈수록 더 정상이 되면서 육체의 욕망, 육체의 뜻, 사람의 뜻이 갈수록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게 된다면, 정상이 된 것이다. 그러면 가망이 있고 희망이 있는 것이다. 만약 정말 오래 실행했음에도 자신의 이익이나 사욕이나 속셈이나 패괴 성정 같은 것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여 삶의 작은 것에서부터 모든 방면을 지휘하고 주도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 사람이 본분은 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진리 실행과 무관하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네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든, 네가 처해 있는 환경이 어떠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너의 정형이다. 진리를 실행하는 정형이 갈수록 더 좋아지는지, 하나님과 너의 관계가 갈수록 더 정상이 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과 너의 관계가 갈수록 정상이 되면, 너의 이지(理智), 양심, 인성, 피조물로서 바쳐야 할 충성심도 점점 더 좋아지고 많아지지 않겠느냐? 다시 말해, 긍정적인 것이 갈수록 많아지고 갈수록 우위를 차지한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것을 놓고 말할 때, 하나님이 요구하는 긍정적인 것들이 너의 정형에서 끝까지 보이지 않고, 진보도 별로 보이지 않고, 발전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면, 성정 변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 부류 사람에게는 진리 실제가 전혀 없다. 다시 말해, 이런 사람은 진리 실제에 전혀 진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입하지 못했다는 것은 실행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난 실행도 했고 노력도 했어요.”라고 한다. 노력했는데 왜 성과가 보이지 않을까? 그것은 네가 힘을 들이고 노력도 쏟았겠지만 효과는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것은 무엇을 대표하느냐? (진리를 진정으로 실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효과가 없다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효과가 없다는 것은 네가 진리를 실행하려는 시도를 얼마나 많이 했든, 최종 결과는 여전히 너의 패괴 성정과 사탄 본성이 이기고, 일어섰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너는 진리 실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사탄의 성정을 이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다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 (맞습니다.) 그럼 너는 승리자일까, 실패자일까? (실패자입니다.) 그건 실패자이다! 그건 승리자가 아니다! 네가 진리를 실행할 때, 속에는 전쟁이 있다. 속에서 싸움을 한다. 자신의 속셈을 내려놓지는 못하겠지만, 진리가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고 있고,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싸우는 과정에서 진리는 내려놓고, 진리는 포기하고, 진리는 실행하지 않고, 결국엔 자신의 사욕을 만족시키고, 패괴 성정을 유로하고, 살아낸 것은 여전히 사탄의 본성이어서 진리를 실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 그 성과는 무엇이냐? 결과는 어떻게 됐느냐? (실패했습니다.) 실패했다! 싸움에서 보게 된 것은 네가 여전히 사탄의 패괴 성정에 따라, 옛사람의 모습에 따라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는 길은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네 자신의 이익이 먼저였고, 자신의 욕망, 사욕, 사심은 만족시켰지만,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했고, 진리의 편에 서지 못한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실패자이다. 이것이 싸움의 결과이지?

그럼 싸움의 또 다른 결과는 어떤 것일까? 일이 닥치면 똑같이 전쟁이 있다. 괴롭고, 고통스럽고, 연약해지고, 심지어 품위나 인격이 다 도전을 받는다. 사람의 허영심도 만족을 얻지 못한 데다가 책망과 훈계, 혹은 사람들의 무시, 체면이나 품위, 인격을 잃게 되는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은 그 속에서 싸우면서 기도한다. 일단 기도를 하면 마음이 강해지고 진리를 찾고 진리를 실행하려는 힘이 커지는데, 그 힘이 매우 커져서 그 일들을 다 간파하게 된다. ‘난 체면도, 지위도, 허영심도 다 갖지 않을 거야! 이번엔 반드시 하나님을 만족게 할 거야.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할지라도, 오해받을지라도 이번 만큼은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릴 거야! 난 하나님을 흡족게 하고, 진리 실행하는 것을 선택할 거야! 이 일에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마음 아프지 않게 할 거야.’라고 하면서 마지막에는 체면, 허영심, 사심, 자신의 속셈, 야심을 모두 포기한 다음, 하나님 편에, 진리의 편에, 정의의 편에 서게 된다. 그렇게 다 실행하고 나면 마음이 매우 만족스럽고 평안하고 즐거우며, 하나님의 축복을 느끼게 되고, 진리를 실행하면 참으로 좋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진리를 실행하여 심령이 만족을 얻고 자양을 받으며, 사람답게 살았고 사람 모양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탄의 패괴 성정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사탄의 패괴 성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일에서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서고, 피조물로서 서야 할 간증을 서고, 서야 할 입장에 섰으니 마음은 든든하고 마음에 누림이 있고 행복이 있다. 이것이 또 하나의 결과이다. 너희들이 보기에 이런 결과는 어떠하냐? (좋습니다.) 좋지? 하지만 이 ‘좋은’ 것은 쉽게 생기느냐? 이 ‘좋은’ 것에는 과정, 싸움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 아마 사람은 이런 식으로 한두 번은 다 실패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그 실패로 교훈을 얻어 진리를 실행하지 않아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하는 삶은 의의가 없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느끼게 된다. 비록 한두 번 실패는 했지만 이런 느낌, 하나님께 미안한 느낌이 들고 불안한 느낌이 든다면, 나중에 다시 그런 환경이 닥칠 때,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점차 사탄의 패괴 성정을 이기게 되고, 차츰 절대적으로 진리 실행하기를 선택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정상적인 과정이고, 승리하는 정상적인 과정이며,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정상 과정이다. 지금 너희는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어려우냐, 아니면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이 어려우냐? 어떤 것이 어려우냐?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맞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 그렇다면 자신의 뜻대로 하는 것은 어떠냐? 그것은 쉽다. 그것은 항상 있는 일이라 생각할 필요도 없고, 머리를 쓸 필요도 없다. 잠시 싸우다가 너무 괴롭고 자기 손실이 너무 크니, 손을 놓고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한다. ‘아차’ 하는 순간 사람은 겁쟁이가 되고, 사탄의 패괴 성정에 사로잡힌 실패자가 된다. 그렇게 쉽게 간증을 잃고, 하나님의 인정을 잃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서는 사람,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서는 사람이 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울까? 거기에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사람이 생각으로 다퉈야 한다. 계속 생각하는 중에 이쪽으로 넘어갔다가 또 저쪽으로 넘어갔다가, 이쪽 면을 좀 더 많이 차지하다가 또 저쪽 면을 좀 더 많이 차지하게 된다. 그러면서 속에서 싸움이 일어나고 끊임없이 싸운다. 싸우고 싸우다가 마지막에 결과가 나온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실행해 내고, 간증도 서고, 승리자가 된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뜻이 너무 강하고, 인성이 너무 나쁘고, 인격이 낮고 비천한 사람은 사욕을 택하고 자기 욕망 만족을 택하여 철저히 사탄의 패괴 성정에 통제된다. 너희는 어떤 것을 택하겠느냐?

너희는 일상생활에서 일에 부딪칠 때, 사탄의 패괴 성정을 이기느냐, 아니면 사탄의 패괴 성정에 사로잡히고 통제되고 있느냐? 대부분의 경우, 어느 정형에 놓여 있느냐? 너는 그것에 근거하여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진리를 실행하지 않는 사람인지를 보아야 한다. 그것에 근거하여 너를 가늠하면 된다. 대부분의 경우, 네가 사탄의 패괴 성정을 이기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다면, 너는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만약 대부분 자신의 사욕을 만족시키고, 사탄의 패괴 성정을 이기지 못하고 또한 진리의 편에 서서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 아니고 그런 사람에게는 진리의 실제도 없다. 진리의 실제가 없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믿지만 생명 진입이 없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이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지? 그렇다면, 너희들은 스스로 가늠해 보아라. 잘 가늠할 수 있느냐? (잘 가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윤곽이 뚜렷한 것이다. 그렇지? 윤곽이 뚜렷해졌다. 그럼 너희는 대부분 어느 편에 서게 되는지 가늠해 보아라! 작은 일은 말하지 말고 큰일에 대해 말하자! 너에게 임한 큰일에서 네가 선택을 해야 할 때, 너는 어느 편에 섰느냐? (처음에는 육체 쪽에 섭니다. 그러고는 괴로움을 겪고 한바탕 싸움을 하고 난 후, 마지막으로 기도하고 찾고 구하고 나서야 진리의 편에 서게 되고, 육체도 배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육체를 배반하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기준인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무엇을 실행했느냐 하는 것이다. 육체를 배반하여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진리를 실행한 것은 아니다. 이런 구별도 있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너희의 상황은 어떤 것이냐? (어떤 때는 육체를 배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정으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아니고 억제하는 것입니다.) 보아하니, 대부분이 그런 정형이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지금 도대체 어떤 정형이냐? 아직도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정말 그런 정형이다.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도 생명 진입이 없다. 생명 진입이 없다는 것은 아직 진리 실제가 없다는 것이다. 너희는 바로 그런 정형에 처해 있기 때문에 많은 일들을 분간하지 못한다. 분간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원인일까? 분간하지 못하는 것은 그저 진리의 겉면과 글귀에만 정통하였기 때문이다. 아직 진리 실제에는 진입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아직 많은 정형을 체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너희는 경력이 없기 때문에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원인이다. 어떤 일이든 다 자신이 직접 체험해야 한다. 네가 체험해 봐야 세부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그러면 너의 느낌과 생각과 과정에 다 세부적인 것이 있게 된다. 그 세부적인 것들이 바로 실제적인 것이다. 그런 것이 없으면 글 표면의 인식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앵무새처럼 흉내만 내는 것이다. 글 표면의 인식이라는 것은 글자에만, 글자 그대로의 이해에만 머물러 있고, 아직 자신의 것으로 바뀌지 않은 것이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않으냐? (맞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번 교통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 실행하거라. 묵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진리를 실행하면서도 묵상해야 한다. 묵상하면서 실행하고, 실행하면서 묵상하다 보면, 세부적인 것을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점점 더 깊이 진입하게 된다. 그래야 너는 진리의 실제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네가 체험을 하고 경력이 있어야만 진리의 실제를 갖춘 것이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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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심령과 성실로: (한글 성경)신령과 진정으로.

②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③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