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목차

제81편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만 구원받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

자신을 아는 것도 쉽지 않지만, 자신의 패괴 성정과 패괴 실질을 아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사람이 자신의 패괴 성정을 인식하지 못하고, 패괴 실질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어떤지를 알겠느냐?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가치가 어떠한지, 하나님이 도대체 사람을 기뻐하시는지, 사람이 알고 있느냐? (모릅니다.) 확실히 모르느냐? 그럼 확실히 모르는데도 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괜찮다고 여기며 즐겁게 믿고 있는 걸까? 너희가 모르고 있다면, 본분은 어떤 방향으로 하고 있느냐? 자신을 인식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자신의 실제 분량, 자신의 패괴 성정,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어떠한지, 어느 차원인지에 대해 인식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렇지? 그럼 사람들은 그동안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얻었느냐? 진리를 얻었느냐? 구원받는 길에 들어섰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교회 생활을 하고, 본분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관계가 있겠느냐? 사람이 어떤 것을 하고, 어떤 길을 가고,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위치에 서야 조물주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알고 있느냐? 또 곤란해졌구나! 너희는 이런 화제를 접해 본 적이 없다. 그렇지? (네.) 왜 진리에 관련되기만 하면 사람은 어리둥절해하느냐? 너희가 평소에 하는 글 작업은 많은 내용과 많은 사항에 관련된다. 찬양, 문장, 설교 교통, 이런 것들은 많은 내용에 관련되는데, 너희는 그런 것을 모르면서 어떻게 작업하였느냐? 작업하면서 많이 힘들지 않느냐? 어떤 때는 어휘가 부족하여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한다. 영적 용어를 찾고 뒤지면서 ‘어휴, 이건 사용했던 거네. 또 사용하면 중복되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라고 생각한다. 늘 이런 상황에 부딪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더 어려운 것은 무엇이냐? 말도 보태 넣었고, 문법도 맞는데, 그 말을 그곳에 두면 과연 적합한지는 모른다. 그것이 글귀 도리인지, 아니면 진리 실제인지, 거기에 두는 것이 적합한지? 거기에 필요한 것인지, 그 말을 더하면 사람들에게 어떤 폐단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혹은 효과를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가늠하지도 못한다. 이것은 문제가 아니냐? (맞습니다.) 이런 일들이 임했을 때, 너희는 어떻게 해결하였느냐? 대부분은 다 ‘일단 이렇게 보충하고 나중에 다시 보자. 천천히 경력(역주: 체험)하다 보면 알겠지. 지금은 이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아.’ 이런 식으로 해결하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그럼 이렇게 해결하면, 마음이 매우 찜찜하고 난감하지 않으냐?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렇지? 이 본분을 안 했을 때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나, 이 본분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어려움뿐이다. 그런 어려움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본분이 너무 어려운 탓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부탁을 참답게 대하지 않은 탓이냐? 아니면 진리의 글귀를 넉넉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냐? (진리 실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리 실제가 없는 것은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그럼 사람이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추구하지 않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아라. 진리 실제가 없는 것에 대해 방금 어떻게 물었었느냐? (“진리 실제가 없는 것은 어떻게 초래된 것이냐, 그럼 사람이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을 물어보았다. 그렇지? (네.) 내 말을 알아듣기 매우 힘드냐? 아니면 속도가 빨라 너희들이 따라오지 못하느냐? (따라갈 수 있습니다.) 너희들이 도대체 기억했는지 똑똑히 알아들었는지를 알아야 내가 말을 계속 이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모두 잘 알아듣지 못했는데도 내가 보지 않고 계속 말한다면, 그건 헛되지 않겠느냐? 사람에게 밥 먹일 때 보면, 무엇에 따라 속도를 맞추느냐? (먹는 속도입니다.) 사람이 씹고 삼키는 속도에 맞춘다. 한 입 삼키고 숨을 고른 뒤에 입을 벌리면 그건 무슨 뜻이냐? 입안의 것을 다 먹었으니 한 입 더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속도다. 그렇지? 먹이는 사람이 그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만약 그 속도를 벗어나면 먹는 사람이 어떻게 되겠느냐? (목이 멥니다.) 목이 메일 때면 먹여 주는 사람이 알아차리고 먹이지 않기 때문에 죽지는 않을 것이다. 속도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아 편하게 먹지 못할 뿐이다. 그럼 내가 지금 말하는 속도는 어떠냐? (저희는 알아들을 수 있고,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늘 어리둥절해하고, 반응이 느린 것은 어찌 된 일이냐? 너희는 이런 것이 아닌지 한번 보아라! 너희는 평소에 이런 세부적인 것들을 묵상하는 법을 모르고, 이런 세부적인 것들을 함께 말씀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고, 교통하고, 찾고 구하는 법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사용하는 영적 용어나 표현들, 글자나 구두상으로 자주 사용하는 그런 말들을 늘 입으로 되뇌이기는 하지만, 참답게 구하지는 않고, 영 안에서 마음을 안정시키지도 않는다. ‘이건 무슨 뜻일까? 알맞게 적용하려면 어떻게 비춰 보아야 할까? 어떻게 실제적으로 실행해야 할까? 이걸 어떻게 현실이 되게 하고, 나의 실제가 되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하지 않으며, 또 그것을 도리나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람 생활 속의 일부분이 되고 나아갈 방향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 너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생활의 일부분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 하려면 어떤 표현들이 있어야 하지?’ 이렇게 생각해 보면 아주 많은 세부적인 것들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너희는 어떠냐, 평소에 늘 이런 세부적인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 이런 세부적인 것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으면, 대부분 늘 입으로만 말하는 그 진리는 오직 글자 표면의 뜻과 글자 표면의 이해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 그렇게 글자 표면의 이해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면, 사람에게서 어떤 것을 보게 되겠느냐? 사람이 늘 그런 이론, 표현, 용어를 말은 하지만, 사람이 실행에, 생활에 적용할 때에는 그런 용어와 표현의 실제적인 유로와 살아내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너희는 아주 큰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어떤 문제일까? 하나님을 믿어 어느 정도가 됐을 때, 만약 너희들을 이끌어 주고, 부축해 주고,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게 될 때면, 너희가 믿다가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이런 거네 뭐! 항상 말하는 이런 영적 용어나 표현이나 형식을 잘 알고 기억하면 됐어! 그러면 하나님을 믿으면서 얻은 것이고, 진리를 깨달은 거야! 아마 하나님도 흡족해하시겠지!’ 사람에게 이런 정형이 있고, 사람이 이런 정형에 빠지고, 이 정도까지 이르게 되면, 어떤 일들이 생기겠느냐? 사람의 패괴 성정 방면에서 어떤 것들이 유로되겠느냐? 교만한 성정이 해결되겠느냐? 관록을 내세우고, 고참 티를 내고, 자격을 논하는 그런 정형들이 있지 않겠느냐? 누가 하나님을 더 오래 믿었는지 비교하지 않겠느냐? 누구의 지위가 더 높고, 누가 예전에 어떤 본분을 하였는가를 따지지 않겠느냐? 누가 상면과 접촉하였고, 누가 상면을 위해 일을 한 적이 있고, 누가 상면과 왕래한 적이 있는지, 이런 겉면의 일들을 비교하지 않겠느냐? 예를 들면, 너희가 문장팀의 본분을 한 적이 있는 데다가 늘 그 본분을 하면서 생명 진입에 진보가 없고, 새로운 발전도 전혀 없고, 깨달았다고 하는 도리도 별로 많지 않으며,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진리 실제에 대한 인식이 조금도 없다면, 너희는 어떤 생각이 들겠느냐? 너희는 어떤 일을 하게 되겠느냐? 알고 있느냐? 너희에게서 어떤 패괴 성정이 유로되겠느냐? (교만 자대하는 것이 유로됩니다.) 교만 자대하는 것이 본래보다 더 심해지겠느냐, 아니면 원래 그대로이겠느냐? (본래보다 더 심해집니다.) 왜 원래보다 더 심해질까? (자신은 자격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격이 생겼다. 그렇지? 그 자격의 크기는 무엇에 근거하느냐? 자격의 크기는 그 본분을 한 시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냐? 또 하나는 그 본분을 하면서 자신이 총결한 경험의 양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냐? 차츰차츰 너희는 자격을 따지고 서열을 정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할 겁니다.) 왜 그런 길로 가게 될까? 예를 들면, 영희 자매가 있는데,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오래되었고, 이 본분을 하는 사람 중에서 제일 고참이기에, 그 자매가 발언권이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이다. 철수 형제는 맨 나중에 왔다. 그는 비록 소질이 좀 뛰어나지만 이 본분을 한 경험이 부족하고 하나님을 믿은 시간도 짧기에, 발언권이 가장 작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발언권이 가장 크다는 사람은 어떤 느낌이겠느냐? ‘됐어, 난 이런 자격이 있게 되었으니 내가 하는 본분은 합격이야! 뭘 더 높이 추구해야 할 것도 없고, 뭘 더 진입해야 할 것도 없어. 본본도 잘했고, 사역도 이만하면 괜찮게 했으니, 하나님께서도 흡족해하실 거야.’ 이것은 진리 실제에 진입한 표현이냐? (아닙니다.) 그럼 이건 무엇이냐? 보아라, 사람에게 자본이 없을 때에는 그래도 일을 그르칠까 봐 신중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자본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기게 된다.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느냐? 알고 있느냐? (교만하고 독선적이며, 안하무인하고, 눈에는 하나님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어깨에 힘을 주기 시작하면 틀림없이 위험하게 된다. 사람이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기 시작하고, 자격을 따지고 서열을 정하며, 자신에게 자본이 있다고 여기기 시작하면,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되겠느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관계가 없고, 아주 위험하게 된다. 관계가 없고, 하나님을 한쪽에 밀어 놓게 된다. 사람은 은연중에 단체를 만들었는데, 독립적인 단체, 독립적인 팀을 만들어 본분하는 장소를 독립 왕국을 세우는 장소로 만들었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장소를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사람의 집단으로 만들었다! 사람의 집단으로 바뀌면, 거기에 진실한 경배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없다. 진리 생명의 진입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본분을 하고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람의 사업을 하고 있지 않느냐? 사람의 경영을 하고 있지 않느냐? 사람의 경영을 하고 사람의 사업을 한다면, 네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고, 일을 하고 본분을 할 때 진리에 근거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되지 않겠느냐? 그건 아주 무서운 일이 아니냐? 사람들 무리 속에 있다 보면, 사람은 가장 쉽게 그런 길로 가게 되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그런 길로 가기 가장 쉽다.

예를 들면, 너희에게 선거하라고 하면, 너희는 통솔자, 인솔자를 뽑는다. 그러나 당선자가 너희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너희는 계속 대립하고 맞서면서 계속 협력하지 않고 저촉하다가 본분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너희가 인정하게 된다면, 너희가 그 사람을 완전히 인정하게 된다면, 나중에는 모두 그 사람을 따라가게 되고 완전히 그 사람의 말을 듣게 되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완전히 그 사람의 말을 듣게 되면 그 사람에게 끌려간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 사람에게 끌려가게 되면, 그 무리는 그 사람을 두목으로 하는 집단이 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 사람을 두목으로 하는 무리는 본분을 하고 있는 것이냐?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본분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겠느냐? (관계가 없습니다.) 관계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럼 그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렇지? 그것은 위험하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어디에서 본분을 하든, 두 사람이든 열 사람이든 스무 사람이든, 그 사람들이 일단 겉으로는 본분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무관한, 하나님과 무관한 집단이나 단체가 되었다면, 그 무리는 아주 위험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어떤 일에서든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고, 어떤 일이든 진리에 따라, 진리의 원칙에 따라 행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람에게 좌우되고 사람에게 제어된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본분을 하면서 전혀 기도하지 않고, 진리의 원칙도 찾고 구하지 않으며, 오로지 사람에게 물어보고 사람의 말을 듣고 사람의 눈치만 보면서 일을 하는데, 다른 사람의 지휘봉이 가리키는 대로 움직인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막연하고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기에 간단하고 쉬운 방법을 택하는데, 사람을 의지하고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도 쉬우니, 차라리 사람의 말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매사에서 사람에게 묻고 사람 말에 따르다 보니, 오래 믿었어도 일이 임했을 때는 단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찾고 구함으로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을 하거나 행한, 이런 경력이 없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냐?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왜 사람들 속에 섞이기만 하면 하나님을 믿다가 사람을 믿는 형식으로 쉽게 바뀌고, 하나님을 따르다가 한순간에 사람을 따르는 형식으로 쉽게 바뀌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도 빨리 변하는 걸까? 하나님을 오래 믿었음에도 왜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걸까? 하나님을 오래 믿었는데 놀랍게도 지금까지 마음에는 하나님의 지위가 전혀 없고,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다. 일을 하든, 말을 하든, 삶에서든, 처신 방법에서든, 심지어 본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서도 그 사람의 모든 행위, 유로(역주: 흘러나옴)되는 모든 행위와 표현, 심지어 마음과 생각까지도 다 하나님과 무관하다. 그럼 그 사람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 온 것이냐? 하나님을 믿는 분량이 있는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인지를 하나님을 믿은 시간으로 결정하고 말할 수 있느냐? 그렇다고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럴 수 없다. 그렇지? 내가 무슨 뜻으로 이 말을 했을까? 너희는 내가 이 말을 왜 했는지 좀 생각해 보아라!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일을 형식적으로 하고, 겉으로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데, 이것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냐? 너희는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진리를 들었고, 지금까지 오랫동안 믿었고, 오랫동안 따라오면서 도리상으로는 아주 많이 알게 되었다. 당연히 일부는 도리라고 할 수 없다. 전적으로 다 도리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시 말하면, 일부는 진리 실제가 좀 있는 셈이다. 하지만 완전히 구원받기 전에 너희는 자신이 영원히 사탄을 따라가지 않고, 사람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처럼 종교 신앙생활만 하고 하나님을 참으로 믿지 않는 그런 퇴보의 길을 가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느냐? 너희는 자신이 그런 길을 가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느냐?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느냐? 너희는 지금 너희들이 믿는 방식, 관점, 정형에서 어떤 것들이 기독교인들과 유사하고 비슷한지, 어떤 것들이 똑같은 정형인지 좀 생각해 보아라! 사람이 진리를 규례로 삼아 지킨다면, 종교의식이 되기 쉽지 않겠느냐? (쉽습니다.) 그런 종교의식은 기독교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 말하는 면에서는 아마 좀 더 깊어지고, 좀 더 앞서고, 좀 더 새로워졌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깊이 진입하고 좀 심화된 것이다. 하지만 규례가 되고 의식이 된다면, 그건 기독교가 된 것이 아니겠느냐? 교리상에서는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의 구별이 있다. 하지만 교리가 단지 이론일 뿐이고, 사람에게서 단지 의식이 되고 규례가 되기만 하고, 마찬가지로 그 가운데서 진리 실제를 얻지 못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믿음법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기독교의 실질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너희가 본분을 하면서 어떤 부분에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과 비슷한 관점을 갖고 있느냐? (규례를 지키고, 글귀 도리를 갖추는 것입니다.) 규례를 지키고, 글귀 도리를 말하고, 진리를 글귀 도리로 삼는다. 또 있느냐? (사역을 중시하고, 생명 진입을 중시하지 않습니다.) 힘쓰는 것만 중요시하면서 생명 얻는 것은 중요시하지 않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도 중요시하지 않는다. 또 있느냐? (겉면으로 영적이고 겸손하고 순복하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겉면의 경건과 좋은 행위를 중요시합니다.) 그런 것들을 너희들이 좀 말했는데, 내가 총결해 주겠다. 말하자면 겉면에 좋은 행위가 있기를 추구하면서 영적인 겉모습으로 자신을 극력 포장하여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따라 비교적 지지받는 일을 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거짓되게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외식하고 높은 자리에 서서 글귀 도리를 말하며,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자선을 베풀고, 좋은 사람이 되고,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 있느냐? 일을 하면서 진리를 전혀 찾고 구하지 않고, 오로지 사람의 뜻에 따라 하는 것은 없느냐? (있습니다.) 일이 닥치면 전부 사람의 뜻밖에 없고, 하나님은 한쪽에 버려두는 것이다. 또 있느냐? (기도를 형식적으로 합니다.) 기도가 형식적이라면 그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거짓되게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은 그중의 한 가지이다. 영적인 도리를 말하고, 영적인 맞는 말을 하며, 또 겉모습을 영적인 사람으로 위장하여 영적인 사람인 체하는데,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유로하는 것은 다 영적인 겉치레이다. 하지만 일이나 본분에서는 진리를 전혀 찾고 구하지 않고, 전혀 진리의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 또한 진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요구하는 기준은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이런 것에 대해 전혀 참답게 대하지 않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다. 이런 일을 상관하지 않는다.

총결을 해 보자. 이런 표현들, 이런 정형들, 이런 겉면의 행위들과 내면의 정형, 이런 믿음법을 너희는 총결해 보아라. 그것들은 주로 무엇이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종교적인 신앙입니다.) 종교적인 신앙인 것은 틀림없다. 지금 분석하고 있지 않느냐! 왜 그것을 종교적인 신앙이라고 할까? 너희는 잘 모르는구나! 그렇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무관하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아닙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든,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의 표현은 어떤 것이 있느냐? 그런 사람들은 어떤 길로 갈 수 있느냐? 그들은 날마다 무엇을 갖추고 있느냐? 모두 어떤 길을 가고 있느냐? 온종일 글귀 도리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냐? 날마다 글귀 도리로 자신을 무장하고 포장하여 자신을 더욱 바리새인처럼 더욱 영적이고, 더욱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행위는 전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냐?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하나님을 기만하고,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맞다.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고,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고, 종교의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목으로 종교의식을 함으로 하나님을 기만해 복받으려는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지,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교회당에서 소위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되지 않겠느냐?

너희가 볼 때, 율법시대에 하나님을 믿었던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오늘날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떤 구별이 있느냐? 이렇게 말해 보자.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구별이 있느냐? 믿는 이름이 같으냐? (다릅니다.) 그럼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은 누구의 이름을 부르짖느냐? (여호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누구의 이름을 부르짖느냐? (예수님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다. 이것이 구별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지키느냐?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믿느냐? (율법과 계명을 지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킨다. 그들이 성령의 역사를 아느냐? (모릅니다.) 범죄는 아느냐? (압니다.) 범죄에 대한 것, 죄짓는 것에 대해서는 안다. 그렇지! 그럼 그들이 십자가를 지는 길을 아느냐? (모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진리, 길, 생명이라는 사실을 아느냐? 이런 개념이 있느냐? (없습니다.) 모른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들은 말씀을 그들은 아느냐? (모릅니다.) 그러면 기독교, 예수를 믿는 사람들, 은혜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을 어떻게 보느냐? (뒤떨어지고, 낡은 것을 지키고, 성령의 역사를 따르지 못했다고 봅니다.) 주로 그들이 하나님의 발걸음을 따라오지 못했다고 알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왔고 메시아로 불렸다. 하나님은 메시아로 불릴 것이라고 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도성육신(역주: 성육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니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완고하게 저항하며 주 예수가 도성육신한 하나님임을 받아들이지 않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뒤떨어졌고 도태되었는데, 은혜시대에서 도태되었다. 은혜시대에서 말한 많은 길(원문: 道)을 그들은 모른다. 구속과 십자가의 길, 이런 것을 그들은 모른다. 그들은 회개의 길을 모른다. 그들은 많은 것들을 알지 못하는데, 이것은 구별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은혜시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이냐?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과 다른 점은 무엇이냐? 그들은 또 어떤 것을 알게 되었느냐? 우선, 그들이 믿는 이름은 같지 않다. 그들은 여호와를 믿는 것이 맞다고 인정할까?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맞고, 여호와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습니다.) 맞다.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과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은 또 어떤 다른 점이 있느냐? 우선, 성경을 놓고 말하면, 그들은 신약과 구약을 보는데, 신구약을 다 본다. 그리고 믿는 이름으로 보면 어떠하냐? 믿는 이름으로 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더 이상 여호와라고 부르지 않고 기본적으로 늘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렇지? 그리고 실행하는 것은 무엇이냐?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고, 인내하고, 겸손하고, 계명을 지키고, 십자가를 지고, 고난받는 십자가의 길을 가고, 죽은 다음엔 천국에 간다고 한다. 이미 많은 부분에서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렇지? 그들도 성령 역사를 부르짖고, 기도를 중시하고, 성령 충만을 부르짖고, 성령 인도를 중요시하며, 주님이 우리와 함께한다고 말하고, 평안과 희락이 있다고 말한다. 이러면 다르지 않으냐? (다릅니다.) 말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 맨 처음에 언급했던 화제로 다시 돌아왔다. 이 두 단계에서 그들이 믿는 이름과 각 방면은 다르지만 마지막에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결론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어찌 된 일일까? 하나님은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명명하였느냐? 유대교다. 교파가 되었다. 그러면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규정하였느냐? 기독교가 아니냐? (맞습니다.) 하나님은 유대교, 기독교를 종교 단체로 본다. 하나님은 왜 이같이 규정했을까? 가장 간단하게 묻겠다. 무릇 하나님이 규정한 이런 교파에 있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들,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고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없습니다.) 그럼 너희는 잘 보아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명의로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 하나님과 관계있는 사람일까?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없습니다.) 그럼 너희는 어느 날엔가 하나님이 교파로 여기는 자들로 전락되지 않을 수 있느냐? 모를 일이다. 그렇지? 교파로 전락된다면, 그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이다. 교파, 하나님이 보기에 교파가 되었다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일까? 하나님 집의 사람일까? (아닙니다.)

그럼 이제 생각해 보고 총결해 보자.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닌 그런 사람들, 하나님에게 교파로 인식되고 또한 명의로는 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그들은 어떤 길을 가고 있느냐?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하나님의 도(道)를 준수하지 않는 길을 가고,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저버리는 길을 간다고 할 수 있지 않느냐?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길을 가고, 하나님을 믿지만 사탄을 경배하고, 마귀를 경배하고, 사람의 경영을 하고, 독립 왕국을 세우는 길을 가고 있다. 이것은 실질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계획과 관계가 있느냐? (없습니다.) 너희는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든 믿는 방식이 일단 하나님에게 교파나 단체로 정해진다면, 하나님 편에서 그 사람들은 이미 구원받지 못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왜 이렇다고 할까? 하나님의 역사가 없고, 하나님의 인도가 없고, 하나님을 전혀 경배하지 않는 집단이고 무리라면, 그들은 누구를 경배하는 것이냐? 누구를 따르는 것이냐? 그들이 겉으로는 사람을 따르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누구를 따르는 것이냐? (사탄입니다.) 그들은 의식상에서, 명의상에서는 아마 사람을 따랐을 것이고, 또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지만 사실상 사람에게 좌우되고 사람의 지배를 받으며 사람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이 따르는 것은 사탄이고 마귀이며, 하나님의 적대 세력이고 하나님의 원수이다. 이런 사람들의 무리를 하나님이 구원할까? (하지 않습니다.) 왜 구원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은 회개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간판을 내걸고 사람의 사업을 하고 사람의 경영을 하며,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계획과 엇나가기 때문에 그들의 결말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구원할 리가 없고, 그런 사람들 또한 회개할 리가 없다. 그들은 이미 사탄에게 사로잡힌 것이고, 완전히 사탄에게 넘겨진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데에 믿은 시간이 얼마인지가 중요하냐?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지는 믿은 시간에 달렸느냐? 네가 어떤 의식을 지키고, 어떤 규례를 지켰는지에 달렸느냐? 이런 것을 보느냐?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행위를 보느냐? (보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의 수를 보느냐? (보시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보느냐? 하나님은 일부 사람들을 택했는데,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지, 하나님이 그 사람들을 구원할지는 무엇에 근거하느냐? (사람이 가고 있는 길에 근거합니다.) 맞다! 그 사람들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에 근거한다. 은혜시대의 말씀(원문: 道), 사람이 깨달아야 할 진리,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려 준 진리가 비록 지금보다 많거나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었고,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럼 이 시대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진리를 들었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음에도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지 못하고 구원받는 길로 가지 못한다면, 최종 결말은 무엇이겠느냐? 최종 결말은 기독교, 유대교의 사람들과 같을 것이다.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다! 교통(원문: 道)을 얼마나 많이 듣고 진리를 얼마나 많이 깨달았든, 결국엔 여전히 사람을 따라가고 사탄을 따라가며, 끝까지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지 못한다면, 그런 인류는 하나님께 버림받는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사람들이 겉으로는 많은 글귀 도리를 말할 수 있고 많은 진리를 깨달은 것 같아 보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편에서는 교파, 사람의 단체, 사람의 집단, 사탄이 기거하는 곳으로 규정되는데, 그들을 통틀어 사탄의 집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철저히 증오받는다.

그럼 너희가 지금 해야 할 급선무는 무엇이냐? 너희의 급선무는 하고 있는 일을 잘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지금 너희의 급선무는 본분을 지체하지 않으면서도 될수록 빨리 단시간 내에 구원받는 길을 감으로 하나님께 버림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버림당한다면 정말 큰일이다! 하나님이 네가 하나님의 도(道)를 준행한 적이 없고 절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없다고 규정하려 할 때, 하나님이 너를 버리기로 뜻을 정하실 때면, 하나님은 더 이상 너를 꾸짖거나 징계하지 않고, 더 이상 책망과 훈계를 하지 않으며, 더 이상 너를 심판, 형벌하지 않는데, 너를 철저히 포기하는 것이다. 그때 너의 느낌은 아주 좋고 매우 홀가분하며, 너는 너를 상관하는 사람이 없어 자유롭게 된다. 네가 사탄을 경배해도 가책이 없고, 충성으로 본분하지 않고 교란하고 가로막고 온통 자신의 욕망뿐일지라도 가책도 징계도 없다. 심지어 네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있어도 가책도 징계도 없고, 네가 책망과 훈계에 대해 반항하고 저촉하면서 배후에서 사람을 논단하고 무너뜨리려고 하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하여도 역시 가책도 징계도 없다. 그것이 좋은 것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조짐이냐? 좋은 조짐이냐? 상관하는 사람이 없고 물어보는 사람이 없으며, 더군다나 너를 책망하고 훈계하는 사람도 없다. 하나님도 너를 질책하지 않기에 모든 것이 다 네 뜻대로 되는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조짐이냐? (아닙니다.) 그것은 확실히 좋은 조짐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를 포기하려고 할 때, 너는 더 이상 가책이 없고, 더 이상 징계를 느끼지 못하며, 또한 더 이상 심판, 형벌도 느끼지 못한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포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이 한 사람을 포기할 때, 우선 그 사람은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데, 날마다 둥둥 떠 있고 제멋대로 방종하고 제멋대로 타락하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아무리 방탕해도 책망도 징계도 없으며, 더욱이 편치 않거나 평안하지 않은 느낌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질책과 징계를 벗어나면, 어떤 길로 갈 수 있겠느냐? 너희는 상상해 보아라. 먼저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말해 보아라. (나쁜 일입니다.) 그것은 일을 망치는 것이다!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일을 그르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떠하겠느냐? (그 사람은 점점 더 타락하고 방탕해집니다.) 그 사람은 타락하기 시작하고 방탕하고 방종해지며 나쁜 짓을 하게 되는데, 위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어떤 사람은 온종일 아주 신나게 산다. 진리 실제가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보면 ‘아, 저 녀석은 위험해, 일이 생기겠어, 저 사람의 저런 주제넘은 행동을 보면 좋은 일이 아니야. 이건 하나님이 저 사람을 싫어하는 거야.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지경이 됐을까? 하나님이 싫어하고 버렸는데도 자기 자신은 아직 모르고 있어!’라고 한다. 너희는 기독교계에서 하는 나쁜 짓을 많이 듣지 않았느냐? 누구나 다 어느 정도 들었는데, 그들에게 큰 징벌이 있는 것 외에 평소에 징계가 있느냐? 질책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았느냐? 하나님의 태도를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만일 너희들도 그 정도까지 된다면,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가 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다.

지금의 급선무는 무엇일까? 사람이 어떻게 해야 그 지경까지 전락되지 않겠느냐? (진리를 추구하고 본분을 잘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본분을 잘하는 것 외에, 또 늘 하나님 앞에 와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인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요 근래 우리가 자주 말하던 화제는 무엇이었느냐? 순복에 대한 공과를 말하지 않았느냐? (맞습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너에게 배치해 준 모든 환경과 모든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에 순복하려면, 늘 기도해야 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며, 늘 하나님 앞에 안정하고 방종하거나 방탕하지 말아야 한다. 일이 임하면 가장 기본적으로 먼저 안정해야 한다. 안정해서 무엇을 하느냐? (기도로 찾고 구합니다.) 안정한 다음에 빨리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고, 기다리고, 찾고 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가 아니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좋은 정형이고 좋은 시작이 아니냐? (맞습니다.) 너에게 그런 마음이 있고 그러한 협력과 실행이 있으면, 너는 보호받을 수 있어 시험에 들지 않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득죄하지 않고 하나님의 경영 사역을 가로막지 않으며, 하나님의 증오를 유발하지 않게 된다. 네가 그런 실행이 있고, 늘 그런 정형에서 살며, 늘 그런 정형으로 하나님 앞에 안정하고 하나님 앞에 와야 자신도 모르게 시험을 멀리하고 악한 일을 멀리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어떤 악행들은 너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거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있지 않으면 저지를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너에게 패괴 성정이 있기 때문에 너는 자신의 패괴 성정을 제어할 수 없어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네가 일단 악을 저질러 교란하고 방해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심각하지 않겠느냐? 가벼우면 책망과 훈계가 임할 것이다. 심하면 어떻겠느냐? 심하면 형식상으로는 아마 출교되겠지만 하나님께 버림받는다. 반대로, 너에게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이 있고, 또한 마음을 늘 하나님 앞에 안정시켜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너는 많은 악에서 떠날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여 ‘아, 이 일을 한다면 하나님이 두려워. 하나님께 득죄할까 봐 두려워! 하나님의 사역을 가로막아 하나님이 증오하실까 봐 두려워!’라고 한다면 이것은 일종의 태도가 아니냐? 일종의 정형이 아니냐? 너의 그런 두려움은 무엇으로 인해 생긴 것일까?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입니다.) 맞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두려움이 생기면, 너는 악한 일을 보고 멀리하지 않겠느냐? 너는 피하게 된다, 그렇지? 그러면 너는 보호받은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러면 보호받은 것이다. 사람에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어떻겠느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담이 큰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담이 커지면 단속받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이 단속받지 않으면 충동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겠느냐? (맞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고 싶어 한다면 좋은 일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뜻, 열심, 천성과 패괴 성정에 따라 하게 되는 일은 다 어떤 것이냐? (악한 일입니다.) 그것은 다 악한 일이다. 하나님이 보기에는 다 악한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으면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으면 악에서 떠날 수 있지 않으냐? (있습니다.) 그러면 악에서 떠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냐?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건 정말 쉽지 않네요. 본분도 해야 하고 고난받고 대가도 치러야 되잖아요!”라고 말했다고 하자. 너는 이 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느냐? 이것은 선한 말이냐, 악한 말이냐? (악한 말입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답하겠느냐?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아이를 못 본 지가 5, 6년이나 됐어요, 만약 하나님을 얻지 못한다면 정말로 억울할 거예요.”라고 말할 것이다. 이 말을 내뱉었으니 모두가 어떤지 보고 분석해 보거라. 이 말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느냐? 이 말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분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건 무엇을 하는 것이냐? 이건 저촉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마음을 터놓고 한담을 하기 시작했다. 한담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공통 언어를 찾게 됐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어 그런 말을 내뱉게 되었는데, 그건 무슨 표현이냐? 그건 하나님께 저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를 믿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도 없는데, 악에서 떠나기가 쉽겠느냐? (쉽지 않습니다.) 악에서 떠날 수 없다. 그렇지? 5초 사이에 그 사람이 몇 마디를 했다. 그 몇 마디 말을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느냐? 1분도 되지 않았다. 그 말을 하고 나서 1초도 되기 전에 상대방은 바로 “그러게 말이에요.”라고 맞장구친 것이다. 이것이 악에서 떠난 것이냐? “그러게 말이에요” 몇 글자이냐? (7자입니다.) 7자이지만, 악행을 하게 된 것이다. 악에서 떠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가장 작은 악이다. 사람의 패괴 성정은 이렇게 무섭다. 바로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너희는 똑똑히 보았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패괴 성정에서 자연히 유로되는 것은 그것이 사람의 배후에서 하게 되는 말이든,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이든 전부 악이다. 너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조그만 일에서도 너의 패괴 성정이 모조리 다 드러날 수 있고, 너라는 사람의 인격과 추구하는 것, 속셈들이 드러날 수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너의 불만도 드러나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할까? 방금 그 사람이 몇 마디 했는데, 너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네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산다면, 너는 마땅히 그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느냐? 어떻게 그와 교통해야 하겠느냐? 너는 어떤 말로 대화를 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면, 정형은 다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있는 대로 말하고,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툭’ 내뱉는다. 내뱉으면 그것은 기정사실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보고 ‘이 사람은 나를 경외하지 않고, 악에서 떠나지도 않는구나! 오히려 악한 일을 보면 다가가고, 악한 일을 보면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 나쁜 짓을 하는구나!’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대화를 하겠느냐? 방금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했었느냐? 너희들이 다시 말해 보아라. (“하나님을 믿는 건 정말 쉽지 않네요. 본분도 해야 하고 또 고난받고 대가도 치러야 되잖아요.”) (“그러게 말이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첫마디에 “그러게 말이에요”라고 할 수 있을까? (없습니다.) 그러면 첫마디를 어떻게 떼어야 하겠느냐?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 건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반박해야 합니다.) (“그것은 불신파의 관점이에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네요.”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 말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첫마디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너희는 이런 일이 임했을 때 할 말이 없고 견해가 없다. 그 사람의 그런 말은 무슨 뜻이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내키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그 복을 포기하려니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복은 받고 싶으면서도 고난받기 싫고 대가를 치르기도 싫으니 “하나님을 믿는 건 정말 쉽지 않네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원망하는 정서가 있지 않으냐? 원망하는 정서가 있다. 하나님에 대해 불만과 원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그 사람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너무 높아! 복을 좀 주면서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하다니,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건 안 되는 거야!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사랑이 없어. 진실한 긍휼이 아니야. 하나님은 고생만 시키셔, 복을 좀 받으려면 정말 쉽지 않아.’라고 여기는 것이다. 다른 말로 이런 뜻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너는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하겠느냐?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맞는지 보아라. “우리가 받는 요 정도 고난이 다 뭔데요? 하나님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으시는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에 오셔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으셨나요! 생명까지 바치셨어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고통은 우리가 받는 이 고통보다 훨씬 더 크지요. 우리가 받는 요만한 고통은 고통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게다가 우리가 고통을 받는 건 당연해요. 우린 복받기 위해 하는 게 아닌가요? 하나님은 우릴 위해 대가를 치르시고, 비미은장하여 사람들 가운데 오셔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으시는데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고난받을 자격조차도 없어요!” 이렇게 말하면 어떠냐? 이렇게 말하면 겉으로는 맞다. 도리상으로는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설득력이 있느냐? 간증이 있느냐? (없습니다.) 간증이 없다. 이건 건성으로, 도리상으로 권고하는 것이다. 이건 권유하는 것이고, 도리로 설득시키는 것이어서 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피상적인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교통해야 하겠느냐?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마음에 어떤 느낌이 있겠느냐? 생각해 보면 ‘아, 저 사람은 하나님 믿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구나. 고생하며 본분하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구나.’라고 보게 된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달갑지 않으면 그런 거지 뭐,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랑 무슨 상관이야! 저 사람이 날 원망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건데 뭐, 내 이익에 관련되는 것도 아니잖아. 하나님을 원망하는 건 저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이니 스스로 해결하라고 하자! 나와는 상관없어!’라고 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인지상정이어서 틀린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임하면, 먼저 ‘아,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구나. 저건 아니잖아!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큰일인데 고통받지 않고 되겠어? 그리고 왜 고통받는데? 사람에게 패괴 성정이 있기 때문이잖아? 하나님이 사람에게 고통받게 하시는 건 좋은 뜻이야! 그건 사람에게 유익해! 사람을 온전케 하는 것이고, 사람에게 도움이 돼, 사람이 고통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어. 이건 하나님의 긍휼이고, 하나님의 은총이야. 이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구원이야! 이 사람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저런 말을 한다면 난 싫어! 교통을 좀 해야겠어. 이 사람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게 할 순 없어. 내가 해결해 줘야겠어! 여기저기 퍼트리지 못하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막아야지. 이 일에서 나는 하나님을 위해 나서고, 하나님에 대한 저 오해를 풀도록 하나님을 위해 말해야지. 이 사람에게 정확한 깨달음을 주어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지. 저렇게 오해하면 하나님이 억울하시잖아?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사랑과 구원이 얼마나 큰데? 이 사람은 왜 저렇게 생각하지!’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 이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단지 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보하여 실제가 있게 되고, 실제적인 행동 표현이 있고, 실제적인 유로가 있고, 실제적인 실행이 있게 된 것이다. 네 안에 진리가 있게 된 것인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서 진리가 있게 되고 진리를 얻게 된 것이다. 그저 구호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고,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너에게 이런 인식이 있다면, 그와 어떻게 말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은 모든 심혈을 기울여 사람을 구원하시는데, 사람은 패괴 성정이 있어 늘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예요.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과 적이 된 것이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고통받게 하신 게 아니죠. 사람이 대가를 조금 치르고, 조금 버리고, 조금 화비하는 것은 자신을 위한 거지 하나님을 위한 게 아니잖아요. 당신이 고통받는 건 패괴 성정이 있기 때문인 거예요! 진리를 얻어야죠. 그래서 듣기 거북하게 말하자면, 사람은 고통받아도 싸죠! 그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더해 준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고통받게 한 것도 아니에요. 당신에게 패역 성정이 있는데, 고통받지 않고 되겠어요? 고통받지 않으면, 당신은 죽어야 하고, 멸망되어야 하고, 징벌받아야 해요. 그럼 어떤 걸 택하겠어요? 하나님은 당신이 고통받는 걸 원치 않으시지만, 고통받지 않으면 당신이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겠어요? 고통받지 않으면 일 처리를 진리 원칙에 따라 할 수 있겠어요? 고통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를 수 있겠어요?”라고 하면, 상대방은 이 말을 듣고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지 않겠느냐? 우선 이런 말들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느냐? 진리에 부합되느냐? (부합됩니다.) 진리 실제에도 부합되고, 진리에도 부합된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악에서 떠나고 있는 것이냐, 아니면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있는 것이냐? (악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무엇을 갖춰야 악에서 떠날 수 있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맞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악에서 떠날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설 수 있고,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악에서 떠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야 악에서 떠날 수 있다. 이건 이제 깨닫게 되었다, 그렇지?

너희들이 말해 보거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늘 어떤 정형 속에서 살고 있느냐?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건 아니지 않느냐. 그 사람들도 매일 기도하고,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제때에 예배드리고, 그릇에 따라 본분하는데,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있느냐?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면, 그런 것에 이를 수 있겠느냐? 그런 것을 할 수 있겠느냐? 또 모르겠느냐? (일을 할 때,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행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이고, 다 겉면의 행위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늘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악에서 떠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네가 마음을 항상 하나님 앞에 두고 산다면, 너는 단속을 받게 되어 많은 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으므로 정도를 벗어난 일, 방탕한 일, 하나님이 증오하는 일을 하지 않고, 이지(理智)가 없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감찰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인다면, 너는 많은 악행을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악에서 떠난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사람이 늘 흐릿한 상태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지도 모르고, 속으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안정하지도 않고, 일이 임하면 기도하지 않고, 늘 충동적이고, 항상 자기 뜻대로 하고, 항상 천성적인 것을 드러내고, 항상 자신의 교만한 성정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감찰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징계도 받지 않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도 없다면, 이런 사람은 마음을 항상 사탄 앞에 두고 살며, 사탄에게 제어받고, 패괴 성정의 통제를 받는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전혀 경외하지 않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악에서 떠날 수 없다. 또한, 이런 사람은 악한 짓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마음에 생각하는 것은 다 악한 것이기에 다 진리와 무관한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원문: 道)과 무관한 것이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지 않느냐? 그들은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다고 말은 하지만,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나온 적이 없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을 자신을 주재하시는 조물주로 대한 적이 없고,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의 주인이라고 시인한 적이 없다. 이런 사람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생각도 없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악을 저지르는 것을 자신의 권리로 삼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나 자신의 일은 내가 결정해! 아무도 나설 생각 하지 마!’라고 한다. 악행을 자신의 권리로 여기고, 하나님 믿는 일을 입버릇으로, 의식으로 여기는데, 이런 사람은 불신파가 아니냐? (맞습니다.) 이런 사람은 불신파이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이런 사람들을 무엇이라고 정하느냐? (불신파라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종일 생각하는 것은 다 악이기에 하나님 집에 있는 인간말짜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 집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 집의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 자신의 주재자로 시인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집의 사람일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조물주이고,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 집의 사람이 맞을까? (아닙니다.)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을 진리로,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하나님을 만물의 주재자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표현이 있을까? 어떤 실행들이 있고, 어떤 정형들이 있으며, 어떤 살아냄이 있을까? (범사에서 진리를 찾고 구합니다.) 그것은 한 방면이다. 또 있느냐? 더 말해 보거라.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모든 상황과 인ㆍ사ㆍ물에 순복하면서 그 속에서 공과를 배우고 진리를 얻습니다.) 또 있느냐? (일을 하면서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하나님께 득죄하려고 하지 못합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감찰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나타나는 표현이다. 또 다른 하나는? (마음에 하나님의 지위가 있습니다.) (범사에서 하나님을 크게 높입니다.) 그것은 다 빈말이다. 그것은 모두 틀에 박힌 말이다. 하다 보니 틀에 박힌 말이 나오는구나! 너희도 참 대단하구나. 앞에서 했던 말들은 그래도 좀 적절했는데, 하다 하다 이쪽으로 빠지는구나! 가장 중요한 하나는 바로 일이 임하면 ‘진리를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계속해서 진리를 찾고 구할 마음이 있든 없든, 우선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돼! 난 함부로 하지 않을 거야! 난 하나님을 경외할 거야, 우선 하나님께 득죄하지 않을 거야.’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보고 ‘야, 저 사람은 말도 함부로 하지 않고, 일을 할 때는 침착하네! 저 사람은 아주 안정적이고, 경솔하지 않아. 방탕하지 않고, 성급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구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뭔가가 있고, 하나님과 교제도 하는구나! 외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라고 한다. 이런 살아냄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맞습니다.) 그러면 늘 이런 살아냄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느냐? (맞습니다.) 늘 이런 살아냄이 없는 사람들은 일을 해도 경솔하다. 성정이 오만하여 단속을 받지 않고, 방탕하며, 온종일 시시덕거리면서 본분에 마음을 쓰지 않고, 말은 내키는 대로 하고, 무엇을 하든 매우 성급하게 움직이며, 조금도 안정하지 않는다. 말을 하고 일을 하면 무지막지하여 이방인과 같다. 그럼, 이런 유로와 표현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냐? 그런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표현과 유로이냐? (아닙니다.) 그럼 그런 표현이 있는 사람들, 그들의 정형은 어떠하냐? 그 마음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습니다.) 틀림없이 없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정죄받고, 하나님께 증오받는 자들이다.

오늘 우리는 가장 크고 중요한 화제를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무엇과 관련되는 것이냐? 하나님을 믿어 구원은 받고 싶어 하면서도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고, 너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런 관계도 없고, 너와 하나님 사이에 어떠한 연관도 없다면, 너는 영원히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받는 길이 막혔으므로 네게는 죽는 길밖에 없다. 네가 이름만 걸고 있어서는 소용없다.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네가 이름을 걸어 놓았어도 소용없고, 아무리 많은 글귀 도리를 말할 줄 안다고 해도 소용없으며, 아무리 많은 고생을 했을지라도 소용없고,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소용없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야,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신다. 무엇으로 정죄되었느냐? (악을 행하는 자로 되었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으로 정죄되었다. 너는 하나님과 무관하다. 하나님은 너의 주재자가 아니고, 너의 조물주가 아니며, 너의 하나님이 아니고, 너의 경배 대상이 아니며, 네가 따를 대상이 되지 않은 것이다. 네가 따르는 것은 사탄이고 마귀인 것이다. 너 자신이 너의 주인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국에는 도태되고, 버림받고, 하나님께 징벌받게 될 대상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자신의 주재자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진리로, 사람이 나아갈 길과 생명의 근원으로 받아들이고, 사람이 행하는 것과 가는 길이 다 진리와 관계가 있고 하나님과 관계가 있으며,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것과 관계가 있어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정죄받을 대상이다. 사람이 요행을 바라는 심리를 가지면 되겠느냐? 항상 자신의 관점만 고수하면 되겠느냐? 늘 막연한 상상만 가지고 있으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요행을 바라는 심리를 가지지 마라! 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알겠지?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이런 것들이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냐? (중요합니다.) 너희들에게 경종을 울려 주는 것이다. 그렇지? (그렇습니다.)

방금 말한 것에서 모르는 것이 있느냐? 내가 말하지만, 너희가 이런 도를 듣고 난 후, 네가 어떤 것에 몰두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찌 됐든, 결국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날 수 있는 것이 바른길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른길이다. 네가 믿고 믿다가 하나님과 무관해지고, 하나님이 너의 주인이 아니고 너의 조물주가 아니게 되며, 하나님이 너의 운명을 주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이 너를 위해 마련한 모든 것에 순복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진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으려던 너의 꿈도 깨지게 된다. 네가 이런 길을 가게 된다면, 그것은 멸망의 길이다. 알겠지? 너는 “내가 중요시하는 것과 추구하는 것, 내가 매일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을 통해 나는 마땅히 갈수록 조물주께 순복해야 한다고 느끼게 되고, 하나님은 바로 나의 주인이시기에, 나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지배 그리고 나에게 안배해 주신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끼게 돼! 또한 갈수록 순복하게 되고, 갈수록 기꺼이 원하게 되고, 정형도 갈수록 정상이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갈수록 가까워지고, 하나님에 대한 내 사랑도 더욱 순결해져!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치한 욕망과 원망, 오해도 갈수록 적어지고, 내가 행할 수 있는 악도 갈수록 줄어들고 악을 점점 멀리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점점 더 진실해지게 돼.”라고 말하게 된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구원받는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받는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아주 정당하고, 추구하는 길이 아주 좋고 아주 고급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추구하다 추구하다, 그 길을 가다 가다 징계도 없고, 하나님의 심판, 형벌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감찰도 받기 싫어지고, 자신의 뜻대로 하고 싶어진다면, 그것은 바른길을 가는 것이냐? (아닙니다.) 어느 날에 무엇을 잘못하거나 자칫 하나님께 득죄하는 일을 할까 봐 심히 두려워 갈수록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고 느끼게 되는데,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되기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고 느끼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징계와 하나님의 책망,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떠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를 잃은 것과 같다는 것을 어느 날엔가 의식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 저를 심판하고 형벌해 주시고, 저를 질책하고 징계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저를 감찰하셔서, 제가 악에서 떠날 수 있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더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구하게 될 것이다. 이 길은 어떠냐? 정확한 길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렇다. 이 길은 옳은 것이다. 이 기준에 근거해 너희는 자신을 가늠해 보거라. 이것으로 가늠하기가 쉽겠느냐? 너희는 지금 구원받는 길에 들어섰느냐?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근접했느냐? (근접하지 못했습니다.) 근접하지도 못했다. 그러면 구원받는 길에 들어서기가 쉬우냐?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도 의지해야 하고, 자신에게도 달렸다. 이 교통을 듣고 나서 “뭐? 내가 아직 구원받는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고? 들어서지 못했으면 못했지, 뭐가 그리 대수라구, 언젠가는 들어설 수 있을 거야. 급해할 것 없어.”라고 한다면, 이런 관점은 어떠냐? 이런 관점이 있게 되면 힘들다. 그 길에 들어서기 아주 어렵다. 정말 힘들 것이다. 그러면 어떤 심지(心志)가 있어야 이 길에 들어설 수 있겠느냐? ‘어? 난 아직도 구원받는 길에 들어서지 못했구나! 그럼 난 매우 위험하잖아! 방금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더라?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셨어. 그럼 어떻게 하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있을까? 기도를 많이 하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경박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해. 됐어! 바로 실행할 거야.’ 이러면 근접한 것이 아니냐? 어떤 사람들은 듣고 “어, 그렇게 간단한 거였어요?”라고 한다. 바로 이렇게 간단하다! 듣고 곧바로 실행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좋은 사람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들은 다음에도 매우 완고하고, 감각도 없고, 무디고, 본체만체하면서 경만한 태도로 대하고,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낸다면, 이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냐? (아닙니다.) 좋은 사람이 아니면 어떤 사람이냐? 멍청한 사람이고 폐물이 아니냐? (맞습니다.) 사람이 늘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는 데에는 속성법(速成法)이 없을까?’라는 식으로 찾아보려고 하는데, 나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너희들에게 이런 간단한 길을 알려 주었는데, 너희가 듣고 난 후에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어떤 존재이냐? 돼먹지 못한 존재이다, 그렇지? 사리 분간을 못하니 어쨌든 쓸만한 존재가 못 된다. 이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절대로 못 받는다고 할 수도 없다. 아무튼 힘들다. 객관적이어야 한다. 혹시라도 어느 날, 한잠 자고 일어나 생각하다가 ‘나도 이제는 적은 나이가 아닌데,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하루 종일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그날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더라?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셨지. 난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는 거지? 이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아니잖아. 아직도 졸면서 꿈을 꾸고 있잖아, 얼른 기도해야겠다!’ 각성한 것이다. 성장했다. 제대로 된 일을 할 줄 알게 되었다. 보아라. 이것도 늦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늦지는 마라. 좋은 시간을 허튼 곳에서 다 지체하고 7, 80세가 되고 8, 90세가 되어 거동도 불편하고, 말하는 속도도 느려지고, 사유도 느려지고, 걷기도 힘들고, 기력도 없을 때가 되어서야 추구하는 일은 없도록 하여라. 그것은 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귀숙도 사라지고, 결말도 사라지고, 구원받을 가장 좋은 시기를 놓쳐 버리게 되면, 후회해도 소용없다!

지금 너희가 급선무로 실행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믿으면 빨리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하고, 하나님 앞에 와야 한다. 네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면,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실까? 하나님이 너를 인정하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너를 하나님 집의 사람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도록 잘해야 한다. 너는 강퍅하지 말고, 패역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한다. 하나님 앞에 나가 하나님을 너의 주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알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너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곧바로 실행하여 실제 상황에 적용시켜야 한다. 그러면 되지 않겠느냐? 오늘 이렇게 잠깐 교통하면서 나눈 이런 일들을 너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삶 속에 적용시켜 너희 삶의 전부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얻은 것이 되고, 오늘 나눈 내용이 헛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거나 만나거나 하는 것은 다 중요하지 않다. 관건은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일을 해도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고, 하나님을 크게 높이며, 행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내놓아 하나님과 관계가 있어야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믿는 모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너에게 하나님을 믿는 실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서로 만났든 안 만났든, 이야기를 나눴든 안 나눴든, 너희는 이런 말을 다 듣지 않았느냐? 사람이 오늘날 얻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길이고, 얻는 것은 생명이니, 만나고 말고 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냐? 내가 너희와 만나기만 하면 너희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되는데, 너희가 분주해지면 본분도 지체하게 된다. 그렇지?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흡족게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항상 겉으로만 하게 된다. 내가 어디에 가면 차를 따라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을 건네는 사람도 있고, 또 슬리퍼를 주는 사람도 있고 한데, 그런 건 부담스럽다! 그렇게 분주해지면 내 마음이 힘드니 나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하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하려고 한다. 내가 보니, 내가 어디에 가기만 하면 거기에 폐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에게 폐가 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사람은 다 좋은 마음에서 한 것이다. 하지만 육체에서 비롯되고, 상상에서 비롯된 일들을 어느 정도 꼭 하게 된다. 그러면 곤란하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인데 어디에 갔을 때, 사람들이 여왕으로 대하고 황태후로 대한다면, 나는 어떤 느낌이겠느냐? 마음이 편치 않고 찝찝하다. 어떤 사람은 “당신에게 그렇게 잘하는데 왜 불편해하시는 거죠? 뭐 그렇게 불편해할 게 있나요? 다른 사람들은 찾아서 누리는데!”라고 한다. 말해 보아라, 내가 그런 걸 누리는 것이 마땅할까? 나는 너희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흡족하지 않다. 그럼 너희가 어떤 일들을 해야 내가 흡족해하고 좋다는 느낌을 받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다 앉아 있고,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너희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나는 스스로 의자 하나를 가져다가 너희 가운데 앉는다. 그다음 너희는 교통을 한다. 교통을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달았고, 거기에 실행까지 하고, 일이 임하면 찾고 구하기도 한다. 한눈에도 이 사람들의 정형이 정상이고, 방탕하지 않고, 이방인들의 기풍이 없고, 마음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현이 있으며, 경건하고, 성도의 품격이 있다는 것이 보인다면, 내가 참 흡족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너희는 이런 마음을 알아야 한다. 이건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 (네.) 너희는 무엇을 이해했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겉으로 하나님께 얼마나 잘하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다 진리를 실행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기를 바라십니다.) 보아라. 너희는 교통을 듣고 난 후,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일정한 기간이 흘러 사람에게 변화가 있고, 이런 말들이 사람에게 유익하여 정형에 변화가 생기고 나아갈 방향도 바뀌고 확실히 호전된 것을 보면, 나는 너희를 보고 “야, 참 잘됐구나. 내가 했던 말이 헛되지 않았구나. 사람의 마음에 닿았고 귓전으로 흘려 듣지 않았구나.”라고 하면서 흡족해진다. 내가 두세 번 말해도 너희들이 듣지도 않고 대수롭게 여기지도 않으며, 여전히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키는 대로 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너희를 미워하겠느냐, 아니면 조급해하겠느냐? 조급해해야 하느냐, 아니면 미워해야 하느냐? 그런 모습을 본다면, 심정이 말이 아니다! 알겠지? 아무리 듣기 좋게 말해도 소용없고, 네 겉면의 표현이 아무리 좋아도 소용없다. 그러면 너를 보기만 해도 언짢고, 눈에 거슬린다.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알았겠지? 오늘은 여기서 마치자.

─────────

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저촉(抵觸): 대립하고 저항하는 심리 상태.

③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④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⑤비미은장(卑微隱藏): 낮추고 드러내지 않다.

⑥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⑦귀숙(歸宿):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결말, 처소, 본향을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