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목차

제76편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 진입이다

네가 마음을 들여 열심히 본분한다면 네가 해낸 것의 가치는 30~50%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네가 마음을 들이지 않고 힘만 쓰고 현 상태에 만족한다면 ‘아무튼 난 예전에 해왔던 대로 날마다 그렇게 할 거야. 기존에 해왔던 대로, 쌓아온 경험으로 하면 돼. 그렇게 애쓸 필요까진 없어.’라며 날마다 흐리멍덩하게 아무런 생각 없이 본분할 것이다. 보아라, 너는 열심히 하려는 마음이 없고 대충 하려고만 한다. 바로 답보 상태에 머물려는 마음으로 본분을 하는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힘을 쓰는 것이라고 한다. 마음을 쓰지 않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합격되게 본분을 하지 못한 것이고, 마음을 다하지 않고 힘만 낸 것이다. 힘을 내는 것만으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최선을 다하려면 마음을 다해야 한다. 먼저 마음을 다해야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렇지? (네.) 지금 어떤 사람은 본분을 점점 더 잘한다. 이는 너희가 본분을 할 때 틀림없이 더 노력하고, 더 마음을 쓰고, 또 마음을 기울여 본분할 줄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최소한 일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본분을 잘할 수 있고 그 실제에 진입할 수 있는지, 또한 어떻게 마음을 들여 자신의 본분을 잘하고 피조물이 마땅히 해야 할 본분을 잘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사람들은 상면의 지시나 명령만 기다리고 상면에서 정해 주기만 기다리면서 소극적으로 피동적으로 본분을 대하지 않는다. 소극적으로 피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요소가 조금 생긴 것이다. 너희가 만들어 낸 작품과 완성한 일에서 이런 진보를 좀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좋다! 하지만 우리는 현 상태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일부 기술적인 것은 영원히 개선할 공간이 있다. 화려하거나 다채롭거나 기발한 것은 필요 없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진보하고 끊임없이 모색하면서 우리가 하려는 것을 더욱 잘 하도록 분발해야 한다.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데, 우리라고 왜 할 수 없겠느냐? 남들도 두 손에 머리 하나인데, 우리도 남보다 못한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잘할 수 없겠느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사람이 생명에 진입하고 진리에 진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사람이 최선을 다하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왜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정상인에게 있어야 할 패기이고 기개인 것이다. 그렇지? 남들이 우리 교회를 모함하면서 이것저것 다 별로라고 말하면 우리는 자존심을 걸고 더 잘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그 사람들에게 우리의 실력을 보여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냐? (네.)

본분하는 것을 놓고 볼 때, 네가 좀 해이해지면 효과도 좀 떨어지고 점수도 좀 낮아지게 된다. 네가 좀 노력하면 점수도 좀 높아지고 효과도 좋아지며, 크고 보람찬 성과가 있게 되고 얻은 수확도 크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어떤 심리가 있게 되는가? ‘에휴, 이 일을 잘하려고 하니 쉽지 않지만, 하나님을 만족게 하여 마음이 평안하고 평온해지기는 쉽구나.’ 왜 쉽다고 하겠느냐? 사람이 양심의 기능을 발휘하여 양심껏 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느냐? 우리는 하나님의 수중에서 살고, 하나님의 권세와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서 살고 있으며,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한 목숨을 주셨으니 마음을 기울여 최선을 다해 본분하여 사탄을 수치당하게 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한다. 힘을 남겨 두지 말고 전력을 다해 하나님을 만족게 해야 한다. 이것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너에게 이렇게 하려는 마음이 있고 작은 사심이나 속셈도 없이 자신에게 여지조차 남기지 않고 잔머리도 굴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런 너의 마음을 감찰할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마음과 생각, 너의 속셈 그리고 네 자신이 마음 깊이 생각하는 것과 날마다 고려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판단할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속마음을 보고 너에게 깨우쳐 줄 것인데, 아주 작은 일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깨우쳐 주지 않으면 너는 영원히 그런 영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그 방면에서 돌파하지 못하게 된다. 사람의 머리와 지혜, 소질대로 한다면 많은 것들은 몇백 년 심지어 몇천 년이 지나도 돌파할 수 없다. 왜 돌파할 수 없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때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소용없다. 이것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렇지? 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사람은 협력할 뿐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사람에게 진심이 있으면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너를 위해 모든 나갈 길을 열어 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어려움도 문제 되지 않는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네가 전력을 다하고 마음을 다한다면, 하나님은 너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것이고, 하지 못할 일을 너에게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입만 살아 생각 없이 말은 했지만 할 마음이 없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끝인 것이다. 네가 이런 태도로 본분을 대하고 하나님을 대한다면, 하나님이 거기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너를 대하기는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렇지? 네가 하나님을 속이면 결국 누구를 속이는 것이 되느냐?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맞다, 바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 된다. 마지막에 하나님은 “이 사람은 마음이 너무 궤사하구나! 전혀 성실하지 못해 믿을 수가 없고 부탁하지도 못하겠구나. 이런 사람은 한쪽에 내버려 두자!”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어디에 두겠느냐? 중하면 사탄, 악령, 더러운 귀신에게 넘겨주고, 경하면 한쪽에 내버려 둔다. 그러면 너는 아무 일도 통찰하지 못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는 늘 깨우침이 있고 빛 비춤이 있지만 너에게는 늘 없다. 너는 늘 마비 상태에 있어서 진리를 교통하거나 생명 진입에 대해 교통하기만 하면, 눈꺼풀이 내려오고 졸게 된다. 이것은 어떤 현상이냐? 이런 현상을 본 적이 있느냐? 하나님은 역사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이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작디작은 피조물이 살아갈 의욕도, 동력도 없고 살아갈 자본도 없게 된다면 더 살아갈 자격이나 있겠느냐? 그래도 사람이겠느냐? 개돼지보다 못한 것이다. 너의 행위, 네가 행한 모든 것이 하나님께 믿음을 주지 못했고 신뢰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하였기에, 하나님은 마음속으로 너를 증오하여 포기하거나 잠시 너를 한쪽에 내버려 두는 것이다. 나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왜 마음속으로 괴로워하지 않을까? 왜 저렇게 마음에 두지 않을까?’ 네가 진심으로 믿든 아니면 가식으로 믿든 너는 이미 많은 도리를 알고 있다. 이 세상에서 너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너를 버려도 너는 살아갈 수 있다. 네가 성인이면 살아갈 수 있고, 누가 너를 버려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유독 하나님이 너를 버리고 포기하겠다고 하거나 혹은 하나님이 이미 그 사람을 포기하려고 생각했다면, 그런 사람은 산다 한들 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나는 가끔 이런 사람을 보게 되면, “이 사람 참, 정말 대수로워하지도 않네!”라고 한다. 하나님이 누구를 포기한다고 하면 보통 사람 같으면 눈이 빠질 정도로 울지 않겠느냐! 죽고 싶은 마음까지 생길 것이고 살고 싶은 마음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빨리 방법을 강구해 돌아서야 하고 회개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기쁘게 받아주실 수 있을까? 내가 어떤 일을 잘못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했으면 자신을 증오하면서 스스로 뺨을 때려야 해. 어떤 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기에 이토록 하나님의 미움을 샀을까? 일시적인 불찰로 그렇게 됐다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지. 하지만 사람의 일시적인 불찰이라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거야.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도 억울하게 대하지 않아! 아, 그럼 아마도 내 이 본성이 너무 악하고 하나님을 너무 심하게 거역해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들일 부분이 전혀 없어서 증오하신 거야! 하나님은 심혈을 기울이면서 오랫동안 날 기다리셨는데, 난 전혀 회개하지 않은 거야. 내가 너무 강퍅했어!’ 그렇다면 빨리 방법을 생각해서 분별력이 좀 있는 사람과 교통해야 하고, 갖은 방법을 다해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빨리 하나님 앞에 와서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고 자신의 패역과 본성 실질, 하나님을 대적하는 부분을 해부해 봐야 한다. 조금씩 빨리 인식해야지 강퍅해서는 안 된다. 그대로 가다간 좋은 일이 없다! 너는 너의 아버지나 어머니와는 사이가 틀어져 한평생 만나지 않아도 괜찮고, 살아갈 수 있다. 또 너는 너와 관계있는 그 어떤 사람과 단절되어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유독 하나님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느냐? 그렇게 되면 빈껍데기가 아니겠느냐? 무슨 낙으로 살겠느냐? 누구든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되면 귀숙을 논할 여지가 없게 된다. 유일하게 나갈 길은 바로 빨리 하나님 앞에 와서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너에게 정말로 진실한 마음이 있고 진실한 회개가 있다면 하나님은 너의 과오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어느 때든, 혹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든, 혹은 이런 일에서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있든, 또는 자신이 일을 잘못 처리한 적이 있든, 혹은 전혀 모르고 있든, 너는 하나님과 맞서지 말고 하나님을 외면하거나 하나님과 등지지 마라. 언젠가 네가 자신의 마음이 강퍅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정형이 생겨서 ‘난 꼭 이렇게 할 거야. 하나님이 날 어떻게 하시는지 볼 거야. 난 누구도 두렵지 않아! 이전에도 그렇게 했었는데, 뭐 어때서?’라고 한다면 위험하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본성이 내면에서 폭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강퍅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아주 위험하다는 것, 또는 그 일을 잘못 처리했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마음속에 두려움도, 참소도, 가책도 없고, 걱정도 없으며, 괴로움도 더더욱 없다면 여기에는 강퍅한 정형이 있게 된다. 이러면 위험해진다. 사람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데도 여전히 그렇게 마비되어 있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가 쉽겠느냐?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정상 관계를 회복할 수 있고, 또 어떻게 해야 네가 하나님 앞에 오는 것은 천경지의라고 느끼면서 하나님께 순복하고 부복하며, 너의 모든 것을 다 바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다 받아들여 진리로 인정할 수 있겠느냐? 언제 이런 정형으로 회복될 수 있겠느냐? 얼마나 먼 길을 걸어야 이런 정형으로 회복될 수 있겠느냐? 이것에는 아마 일정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생명 정형의 문제로, 너의 마음속에 이런 실제적인 문제가 있는지, 이런 진리 실제에 진실로 진입했는가의 문제이지, 시간적 문제가 아니고 걸어야 할 길이 멀고 짧은 문제도 아니며 구체적인 거리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5년, 6년, 10년, 20년을 믿었으면서도 진리로 진리 실제와 자신에게 존재하는 문제들을 조금도 해결하지 못한다. 게다가 자신은 그 속에 있는 엄중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또 늘 자기만족의 정형 속에서 살고 있고, 그런 패역한 정형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전혀 느낌이 없다. 일을 잘못 처리하거나 잘못 말하고, 마음에 패역이 있어 강퍅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대립하고 거역하고 대적하며 완고하게 자기 것을 고수하면서도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다면, 너는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런 정형과 거리가 얼마나 멀겠느냐? 너희는 그 거리를 가늠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왜 가늠할 수 없느냐? (전에 하나님께서 교통해 주신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멀고 가깝다는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배반하여 사탄의 권세 아래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생명 정형의 문제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 자체는 거리를 가늠할 수 없고 잣대로 잴 수도 없는 것이다.

너희는 지금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신의 본분을 잘 하는 것 외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마음속에 그런 의식이 있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줄거리만 말한 것이다. 그럼 무엇을 줄거리라고 하느냐? 바로 큰 방향으로 봤을 때, 이런 이상(異象) 방면의 진리가 너의 마음에 밑바탕이 된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행이나 진입, 그리고 생명 진입 방면에서 관건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 방면이다. (범사에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한 방면이다. (진리로 자신의 정형을 해결할 줄 알아야 하는데, 패역한 상황과 잘못된 상황을 해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음, 또 있느냐?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며, 생명 진입 방면에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하는데, 이것이 아주 관건적인 것이다. 일이 임했을 때, 그대로 흘려보내지 마라. 바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 방면에 연관된 생각이 있거나 혹은 그 방면에 연관된 표현이 있다면 그 일에 대해 교통해 봐야 한다. 너는 그 방면에서 자신이 조금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은 있지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어찌 된 일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면, 너는 그 일을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러면 다들 교통해 봐야 하지 않겠느냐? 내놓고 좀 교통해 봐야 한다. 문제를 발견하면 교통해야 한다. 그렇게 교통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너의 문제와 네가 의구심이 들던 것들은 점점 적어지게 되고, 깨닫는 진리는 점점 더 많아지게 된다. 그러면 너의 분량은 자신도 모르게 자라게 된다. 네가 계속 그런 일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면, 누가 한가하게 너에게 억지로 주입시켜 주겠느냐? 너는 스스로 향상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앙이란 것은 책 속의 지식과 도리만 좀 알면 됩니다. 그러면 제 생명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봐, 지금 전체적인 이 환경이 얼마나 좋아, 귀동냥으로도 알 수 있어. 형제자매들이 날마다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교통하고 있으니 이렇게 듣다 보면 될 거야. 나도 날마다 기도하는데 뭐, 체계적으로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찬송을 부르고 본분하고 있는데 뭘. 한 가지도 빠뜨린 게 없이 해야 할 사역은 다 했어. 마지막에 전체적인 환경이 좋아지게 되면 나도 따라 그렇게 되지 않겠어? ‘근묵자흑(원문: 近朱者赤, 近墨者黑)’이라고 지금 환경이 이렇게 좋으니 여기에 젖어 들면 돼. 자신의 생명 진입 문제와 패역 문제를 해결하려고 혼자 노력할 필요 없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어리석은 사람과 흐리멍덩하게 믿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이런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 봐요. 지금이 얼마나 좋아요! 환경도 아주 좋고 상황도 아주 좋잖아요!” 누가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말하면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먹을 것이 있으면 저도 굶지는 않을 거니까요.”라고 한다. 또 누가 “어떻게 지내세요? 댁의 닭은 먹이가 있어요? 돼지는 먹일 것이 있어요? 댁의 아이는 입을 옷이 있나요?”라고 하면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하면서 큰소리친다. 큰소리치다가 어떻게 되겠느냐? 다른 사람은 다 잘 살고 있는데, 그 사람은 아직도 가난에 쪼들리고 있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 길은 가장 현실적인 길이다. 늘 큰소리치는 사람, 늘 실속 없는 사람은 아무런 수확도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떤 사람에게 수확이 있겠느냐? 착실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관건적인 부분을 잡을 수 있고, 실제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하는 일마다 착실하게 하고 또 고려하며, 하나하나의 진리에 진입하고 하나하나의 일을 대한다. 그런 사람은 큰소리치지 않고, 하는 데에만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마음을 기울여 체득하고 또 마음을 기울여 처리한다. 그런 다음 그 일이 지나고 나면 체득이 있다. 자신에게 다른 생각이 있었거나 또는 어떤 특수한 시기에는 자신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느낀 바가 있다. 이런 사람을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런 사람이 마지막에 진리를 얻게 된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결국 진리를 얻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힘을 내는 데에만 신경 쓰고 자신을 나타내는 데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진리를 얻기 아주 어렵다. 이 정도로 말했는데, 잘 생각해 보아라. 어떤 부류의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느냐? (실제적으로 일을 하고, 착실하고, 마음을 쓰는 사람입니다.) 착실하고 마음을 쓰고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바로 이 부류의 사람이 현실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을 비교적 중요시한다. 이것이 한 가지 방면이다. 그리고 비교적 실속 있고 긍정적인 것과 진리를 좋아하고 실제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 부류 사람은 최종에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얻을 수 있다. 너희는 어떤 부류의 사람이냐? (실속 없고 잔머리만 굴리면서 늘 체면이 서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언제 그렇게 했느냐? (지금까지 계속 그렇게 했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그렇게 하면서 가책이 없었느냐? (있었습니다.) 그런 일과 정형을 해결할 수 있는 길과 돌파구를 찾았느냐? (찾았습니다. 지금도 돌려세우고 있습니다.) 돌려세우는 과정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스스로 알고 있느냐? (조금 느낌이 있습니다.) 그럼 때가 돼서 그 느낀 바를 말하면 그것이 바로 너의 경력(역주: 체험)인 것이다. 생명이 자라는 과정은 바로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경력이고,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력이며, 생명이 자라난 경력인 것이다. 이런 것은 귀한 것이다.

하나님이 마지막에 어떤 사람을 포기하는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끝까지 강퍅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정형은 어떠한지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어떤 부류의 사람이 이런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그 정형을 말해 보아라. (어떤 일은 자신도 틀렸다는 것을 분명 알면서도 포기하려고 하지 않고 계속 고집하려고 합니다.)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은 아무리 말해도 반응이 없고, 아무리 많은 사람이 말해 주어도 회개하려는 마음이 없으며, 남에게 잘못했다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아무것도 대수로워하지 않고, 아예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정형에 대해 더 말해 보아라. (자신이 계속 본분을 참답게 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임했을 때, 자신이 진입해야 할 것을 참답게 대하지 않으며, 언제든 진리 방면에서 향상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어떤 일이나 다 꼼꼼하게 대하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꼼꼼하게 대하지 않는 것도 상황을 따져 봐야 한다. 어떤 사람은 젊은 데다 성격이 그렇다. 또 어떤 사람은 작심하고 그렇게 하려 하는데 깨달아도 실행하지 않는다. 즉, 일관되게 그렇게 한다. 깨닫지 못했을 때에도 그렇게 하고, 진리를 깨달았거나 듣고 나서도 여전히 그렇게 하는데, 눈곱만큼도 변화되지 않았다. 누가 말해도 손톱도 안 들어가고 끝까지 완고하게 대항하려고 한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이것을 강퍅하다고 하는 것이다! ‘강퍅하다’란 이 단어는 긍정적인 단어냐 아니면 부정적인 단어냐? (부정적인 단어입니다.) 좋은 의미의 단어냐, 부정적 의미의 단어냐? (부정적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럼, 사람이 ‘강퍅하다’란 이 단어와 관련이 있고 대조된다면, 이런 사람은 결말이 어떻게 되겠느냐? (하나님께 버림받습니다. 하나님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며 내버려 두십니다.) 어떤 사람이 가장 심각하고, 또 하나님이 포기하려는 대상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내가 말해 주겠다. 그런 사람은 결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잘못을 인정한다고 해도 핑계와 이유를 찾아 자신을 위해 변호하고 또한 변명하며 시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으로 더욱 교활하게 남의 눈을 속이려 한다. 잘못한 것을 분명 알면서도 시인하지 않고 잘못에 또 잘못을 더하면서, 그 잘못들을 인정하고 회개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 이런 사람은 곤란하다. 하나님은 왜 이런 사람을 포기하려고 하겠느냐? 알고 있느냐? (그런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양심에 이미 지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은 이렇게 말한다. “착한 아이라면 절에 버리겠습니까?” 이 말은 무슨 뜻이냐? 바로 이런 사람은 구제불능이고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고 쓸데없는 공을 들이지 않는다. 바로 이런 뜻이다. 겉으로 봤을 때,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상,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된 것이냐? 겉으로 볼 땐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고 버리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 데는 실제적인 원인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하는 말로 한다면,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하나님의 구원에 맞서는 것이다. ‘당신이 저에게 순복하라 하고, 진리를 깨달았으면 실행하라 하는데, 제가 손해 보고 덕도 되지 않고 이익에도 영향이 끼치면 안 할 거예요. 그 일을 잘못했다고 시인하고 회개하라고 하는데, 안 할 거예요. 왜냐고요? 제 명예가 훼손되니까 그러죠. 저 혼자 밑지고 손해 보면 절대 안 할 거예요.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에요. 다른 이유를 찾아서라도 구겨진 체면을 살릴 거예요. 회피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을래요. 힘을 쓰라고 하면 그렇게 하고, 효력하라고 하면 효력할 순 있어요. 근데 이런 방식으로 저를 변화시키려 하고 진리를 얻게 한다면 저는 못해요. 절대 그렇게 실행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따르긴 할 거예요.’라고 한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한 것이지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는 것은 진리를 거절하고, 진리에 진입하고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고, 다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 없다고 하고 하나님이 하는 것은 다 불필요한 것이라고 여기면서 자신만 믿는다. 그럼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지 않는 것이냐?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그 유일한 길은 바로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고, 진리에 진입하고 실행하는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여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구원받아 최종에 도달하려는 것이고, 또한 사람이 표현해 내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네가 이 길을 가지 않는다면 선택할 수 있는 두 번째 길은 없다. 네가 이 길을 가지 않는다면 너는 진리가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이 모든 말씀이 너를 변화시킬 수 있고 참된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할 수밖에 없다. 더 깊이 말한다면, 하나님이 진리임을 전혀 믿지 않고, 진리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부분부터 해부하고 가늠해 보든, 이런 사람은 마음이 너무 강퍅해 구제불능이고 구원할 길이 없다. 그렇지? (네.) 그럼 너희도 가끔 이런 정형이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이런 정형이 있는 사람은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런 사람의 실질은 변화되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정형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일시적인 표현이기에 진리를 받아들이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 이것을 갈라놓아야 한다. 일시적인 정형이 있는 사람과 그런 부류의 사람은 별개의 문제이다. 일시적인 정형이면, 사람이 아직 완전하게 구원받기 전에, 구원받는 과정에서 패역한 표현이 좀 있고 패괴를 좀 유로(역주: 흘러나옴)하긴 해도 그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회개한다. 그는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또 하나님의 심판, 형벌과 채찍질을 거듭 받아들인다. 받아들이고 난 뒤에 그가 또 패괴가 있고 패역이 흘러나오면 그는 또 하나님의 심판, 형벌과 채찍질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나중에 생명이 또 자란다. 끊임없이 회개하고, 죄를 인정하고 계속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아들여 생명도 계속 자라고 영 안의 정형도 계속 변화된다. 사람의 패괴 성정은 이런 과정에서 차츰차츰 벗겨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발전이 있고 변화가 있다. 그에게 패역이 있어서 네가 그 표현을 보면 그도 마찬가지로 아주 강퍅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에게 가끔 그런 정형이 있는 것이지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다. 그런 정형은 있지만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에게는 분명 긍정적인 표현이 있고 긍정적인 발전이 있다. 이런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다. 너희는 어느 부류의 사람에 속하느냐? (잘못했다면 의식할 수 있고 회개하려 하고 고칩니다.) 네가 자신이 한 일, 즉 잘못한 일, 패역, 패괴 성정이 흘러나온 것을 의식하고 나서 마음속으로 가책받고 후회한다면 해결하기 쉽다. 그러면 구원받을 희망이 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패역, 패괴에 대해 조금도 의식하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객관적으로 누가 지적하면 또 한사코 따지면서 받아들이지 않고 심지어 펄쩍 뛰면서 지적해 준 사람을 욕한다면 문젯거리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짧아 3년밖에 안 됐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잘 모르니 아직 어린 아기라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10년 믿은 지금도 계속 그렇다면 문젯거리가 아니겠느냐? (그렇습니다.) 그러면 문젯거리가 된다!

너는 너의 상황에 따라 어느 단계에 있는지 봐야 한다. 그렇지? 물론, 소질이 뛰어나고 진입이 빨라서 믿은 지 1년이나 2년밖에 안 돼도 생명 진입에 대해 아는 사람도 있다. 아마 그가 접촉한 사람이 생명 진입이 아주 좋거나 혹은 괜찮은 사람이고, 또 진리 실제가 있고 깨달은 진리가 많으므로 그가 사모하고, 사모하다 보니 많이 듣고 얻는 것이 많아 진입이 빠를 수도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너희는 이런 일을 분별할 줄 아느냐? 내가 거짓말하는 일로 너희에게 예를 하나 들겠다. 어떤 부류가 강퍅하고 구제불능인지, 어떤 부류가 구원할 수 있고 정상적인 상황에 속하는지 분별해 보아라. 한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그는 평소에도 거짓말을 자주 한다. 이번에 거짓말 해놓고 상대가 바뀌었는데 또 거짓말을 하고 나니 ‘이건 아닌데’라며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또 거짓말했어, 왜 고치지 못하지? 안 되겠어!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걸 드러내야겠어, “저 거짓말했어요. 왜 거짓말했냐면요, 체면 깎일까 봐 그랬어요, 말하려니 참……”라고 내 진상을 털어놓고 해부하고 이 일을 분명하게 밝혀야겠어.’ 이것저것 다 말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와, 거짓말했을 땐 그렇게 고통스럽더니 성실한 사람이 되니까 이렇게 홀가분하구나. 성실한 사람이 되니 너무 좋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리켜 주신 길은 정말 좋구나, 이게 바로 사람이 갖춰야 할 모습인 거야.’ 이런 행복감을 좀 느꼈지? 그후부터는 거짓말을 적게 하고, 되도록 거짓말을 안 하고, 무슨 일을 저지르면 솔직하게 말하고, 성실하게 말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는 데에 신경 쓴다. 그런데 부지중에 자기 체면에 관련되는 일이 닥치면 자기도 모르게 또 거짓말한다. ‘또 거짓말했네, 어떡하지? 왜 난 입 단속 하나 못하지? 이 주둥이! 이거 진짜 본성이야! 왜 또 거짓말했지? 또 거짓말했는데 어떡하지? 저번처럼 그렇게 실행하자!’ 거짓말을 한 후, 진상을 드러내고 자신을 해부하면서 말한다. “보기엔 그저 거짓말을 좀 한 것 같지만 사실 왜 이런 거짓말을 했냐면요, 이런 이기심이 좀 있어서 거짓말한 거예요.” 보아라, 자신이 거짓말한 것을 해부하면서 속셈까지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패괴 성정의 문제도 발견했다. 일거양득이다. 또 한 번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실행했고 또 깨우침받아 자신의 패괴 성정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패괴 성정을 발견한 후 생각해 본다. ‘에휴, 변화돼야 돼. 나한테 아직도 이런 문제가 있네, 왜 이제야 발견했지? 정말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신 거야!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 진리를 실행하는 맛을 또 좀 체험했다. 그러나 어느 날 또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하는데 그러면 또 똑같은 방법으로 실행한다. 이렇게 한두 번씩 실행하다 보니 3, 5년 사이에 거짓말이 점점 적어지고 성실한 사람이 될 때가 점점 많아지며, 마음이 점점 깨끗해지고 마음에 평안과 기쁨도 점점 많아지며, 하나님 앞에서 살 때도 점점 많아지고 정형도 점점 정상이 된다. 이것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성실한 사람이 되기를 실행하는 정상적인 정형이다. 하지만 네가 말해 보아라, 지금 와서 그에게 거짓말이 없겠느냐? 거짓말을 하지 않겠느냐? 참으로 성실한 사람이냐? (아닙니다.) 아직은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수 있고, 성실한 사람이 되는 진리를 실행할 수 있으며, 성실한 사람이 되기를 실행하는 과정에 있긴 하지만 그는 아직 성실한 사람으로 완전히 변화되지는 못했다. 그는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고, 기꺼이 진리를 실행하려는 사람이다. 기꺼이 진리를 실행하려는 사람은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럼 실행해 냈는데 ‘좋아한다’는 이 말은 이론인 것이 아니냐? 실행까지 했고 사실로 나타났다면 그 사람을 진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확정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냐? 이것은 한 가지 예이다. 물론, 성실한 사람이 되기를 실행하는 기간에 그것을 단숨에 해낸다고는 말할 수 없다. 자기 속에 있는 어떤 것도 한번에 다 드러내고, 마음속에 아무것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항상 얼마간 남겨 두고 보수적으로 실행하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실천한다. 그러나 그는 실천하는 과정에서 성실한 사람이 될수록 마음이 밝아지고, 깨닫는 진리가 많아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점점 더 받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에 대해 믿음이 더 커진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 되는 기간에, 성실한 사람이 되는 단맛을 보고 실제적인 경력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에 대한 일부분의 인식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수확이 아니냐? 이것은 운 좋게 얻은 것이 아니라 생명 진입의 정상적인 과정에서 사람이 얻어야 하고, 또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이것이 한 방면의 예이다.

다른 한 방면은, 또 한 가지 예가 있으니 너희들이 계속해서 들어 보고 이런 부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보아라.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잘하여 버릇이 되었다. 거짓말하기 좋아하는 데다가 또 해도 너무 잘하여, 입을 열지 않으면 몰라도 입을 열거나 어떤 일에 대해 말했다 하면 허풍이 심하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아무튼 하는 말들은 다수가 모두 믿을 수 없다. 어느 날 그가 거짓말을 했는데, 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가 거짓말했네. 거짓말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아.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다른 사람들이 내가 거짓말한 것을 알게 되면 창피해. 누군가 알아차린 것 같아.’ 또 골똘히 생각한다. ‘알아차렸어, 그래도 괜찮아. 다른 화제를 찾아 말하는 방법을 바꿔서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면 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시비를 가리지 못하게 해서 내가 한 거짓말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간파하지 못하게 해야겠어. 그럼 내 머리가 비상한 거잖아? 앗싸. 이렇게 하는 거야.’ 그 사람과 마주치거나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제가 그날 말한 그 일 말이에요. 어떻게 됐냐면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보다 기교가 더 뛰어나 아마 그 일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쿵저러쿵 빙빙 돌려 가며 그 일에 대해 말한다. 그런 다음 한 가지 방식으로 원래의 그 거짓말을 앞뒤가 맞게 맞추는데, 다른 거짓말로 그 전에 한 거짓말을 덮어 감추는 것이다. 즉, 더 큰 거짓말로 전에 한 거짓말을 덮어 빈틈없이 사람을 속여 넘기고는 자신이 아주 대단하다고 여긴다. ‘내 머린 역시 비상해. 잘 돌아간단 말이야. IQ가 높아! 팽팽 돈다니까! 내가 거짓말하려고 하면 눈만 깜빡거리지 않으면 돼. 일부러 알아차리게 하지 않는 한, 보통 사람들은 다 알아차리지 못해. 역시 난 거짓말 고수야! 이것도 능력이지!’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한번 거짓말하면 거짓말 무더기로 둘러맞추어야 하니 더 힘들어져요.”라고 하니 “저는 별로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한다. 이번 일이 들통나지 않고 성공적으로 거짓말한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럴듯한 다른 거짓말로 이전의 거짓말을 잘 덮어 넘어가게 되니, 어깨를 으쓱하며 마음속에는 가책도 참소도 없고, 양심에 아무런 느낌도 없게 된다. 이는 어찌 된 일이겠느냐? (이것은 그의 본성입니다.) 그의 본성인 것은 틀림없다. 그는 거짓말하는 이 일의 위해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자신을 얼마나 큰 곤경에 빠뜨리는지는 의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 거짓말로 저 거짓말을 둘러맞추어 자신의 체면이 서게 되었거나 자신이 얻고자 했던 이익을 얻게 된 것이 그에게는 아주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데, 그것이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실행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다고 여긴다. 그는 왜 가책을 받지 않겠느냐? 그가 이 일에 대해 아예 중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자신의 체면과 명예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래서 가책이 없다. 그는 이렇게 하다 보니 아예 다른 사람과 마음을 열어 놓고 교통하지 않고, 오히려 가상으로, 외식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거짓말을 덮어 감추며, 심지어는 더 많은 거짓말로 다른 사람들과 교제하고 또 상대하게 된다. 하지만 가책이 없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거짓말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나 했던 거짓말을 덮어 감춘다. 거짓말을 아무리 많이 했어도 가책받지 않고 괴로워하지 않는다. 밤에 자리에 누울 때, 일반적으로 양심이 좀 있고 인성이 좀 있는 사람은 ‘아, 거짓말했더니 괴롭네. 이 일을 어떻게 넘길까? 나 같은 사람은 아직도 체면을 세우려 하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밤에 자리에 누우면 완전히 긴장을 풀고 다리를 꼬아 쳐들고는 ‘흠! 오늘 또 거짓말로 그 멍청이를 속여 넘겼어. 내가 손에 땀을 쥐고 있었는데도 그가 눈치채지 못했어!’라고 하면서 흐뭇해한다!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몇 가지 정형이 있느냐? 거짓말, 이것은 본성의 유로이다. 그가 자연적으로 유로할 때는 어떤 자제도, 어떤 속박도 없이 입을 열었다 하면 나오고 본성에 따라 나오는데, 이것이 한 가지 경우이다. 그와 동시에 거짓말하고 나서 가책이 없고 괴로워하지 않고 참소가 없다. 그는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다 감찰하시기에 자신이 거짓말하고 그 일을 저지른 뒤에 분명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예 걱정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나서 그 거짓말이 들통나거나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어 드러나게 될까 봐 더 많은 거짓말로 그 거짓말을 덮어 감추고, 또 머리를 짜서 어떤 과정과 방식을 찾아 자신이 한 거짓말과 자신의 진상을 덮어 감추려 한다. 이런 사람의 정형에 처음부터 끝까지 회개가 손톱만큼이라도 있느냐? 가책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느냐? 가책이 조금도 없다. 그렇지? 그럼 돌이키려는 뜻이나 괴로워하는 뜻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그가 어떻게 하겠다는 속셈이냐? (계속 그렇게 하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의 속셈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주 좋기에 변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맞다. 그가 그렇게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 되라고? 어떤 내막이든 다 털어놓으라고? 나는 그렇게 못해! 그렇게 하면 어리석은 거지. 너는 어리석어도 난 아니야! 내가 한 거짓말이 탄로 나면 큰일이니까, 다른 이유를 찾든지 아니면 핑계로 둘러맞춰서 덮어 감춰야 돼. 다들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될 순 없어. 그럼, 바보 천치가 되는 거잖아?’라고 여긴다. 보아라, 그는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진리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진리를 사랑할 수가 없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런 사람의 마음속 정형은 어떤 것이겠느냐? (돌아서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돌아서기 싫어한다는 것은 네가 객관적인 표현에서 본 것이다. 그의 기본 정형은 어떤 것이냐? 원하니 원하지 않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는 아예 진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성실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 말씀이 바른길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시인하지도, 수용하지도 않는데, 받아들이지 않는 그 자체를 강퍅하다고 한다. 그의 강퍅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그에게 이런 사상이 있다면, 곧 그런 강퍅한 정형, 행실, 표현이 나타날 수 있다. 알았느냐? (네.) 그것은 사람의 본성 실질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네가 본 것은 그가 겉으로 유로해 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이 부류의 사람이므로 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에게 며칠이나 말했는데도 변하지 않아요, 들어야 말이죠. 사실, 아주 쉬워요. 우리는 듣자마자 받아들였잖아요? 바로 인정하고, 죄를 회개했잖아요? 근데 그 사람은 왜 그럴까요?”라고 말하면서 이해도, 상상도 안 된다고 한다. 그렇지? (네.) 정상 인성이 없고, 정상 인성의 양심과 이지가 없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양심의 역할이 없고, 그 기능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에게 정상 인성과 이지도 없는 것이다. 정상 인성과 이지에서 기본이 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냐? 긍정적이나 부정적인 것을 듣고 나서 선택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가 분별하지도, 선택하지도 않고 바로 자신의 부정적인 것을 고집한다면, 여기에 정상 인성과 이지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다. 그렇지? (네.)

이 두 가지 예에서 하나님은 어느 부류의 사람을 원하겠느냐? (첫 번째 부류 사람입니다.) 사람은 첫 번째 부류의 사람에 대해 이렇게 본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이 왜 요 모양이죠? 아직도 거짓말하고 있잖아요! 죄를 짓는 것 같기도 하구요, 완벽한 사람이 아니네요!” 그는 ‘완벽’이란 단어를 여기에 사용했다. “여전히 패괴된 인류잖아요!” 이 말은 어떠냐? 이것은 생명이 자라나는 정상적인 과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이 구원하는 사람은 패괴 성정이 있는 사람이고 사탄의 패괴를 거친 사람이지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이나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진공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쩌다가 또 하나님을 대적했네. 이젠 끝장 아닐까? 어쨌든 구원받긴 글렀어. 왜 아무리 해도 안 되지? 이젠 나도 포기야. 하나님도 분명 날 버리셨을 거니까!’ 이 태도는 어떠하냐? (틀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이렇게 소극적이면서 정형에 문제가 있으니 마침 사탄에게 틈탈 기회를 준 것이다. 사탄은 너를 조소할 것이다. “저 바보 좀 봐, 하나님이 구원하고 있는데도 괴로워서 저 꼴이네! 왜 포기하는 거지? 포기하고 나한테 오면 딱이네!” 그러면 사탄은 거저먹기가 되는 것이다. 너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생명이 자라는 정상적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연약해지거나 또는 어떤 때에 길을 잘못 걷고 곁길로 가거나 또는 한동안 그에게 정상적인 표현이나 아주 정상적인 표현이 좀 있고 또 생명이 어린 정형이 좀 나타나면 하나님은 다 정상적으로 보고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생명이 자라는 정상적인 과정으로 본다. 네가 어떤 때에 부딪치기도 하고, 걸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한 마디 잘못 말해도 이런 것은 하나님의 눈에 다 정상적이다. 자라는 과정에, 성장하는 과정에, 사람이 구원받는 기간에 이런 것은 다 정상적이다. ‘에휴, 난 왜 계속 하나님을 흡족게 하지 못할까?’라며 자신을 알고 있다. 이렇게 후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흔히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다. 반대로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 없고 자신이 이미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흔히 하나님이 구원하는 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겠느냐? (자신을 정확하게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경력하면서 흘러나오는 것들을 정확히 대하고, 생명 진입을 중요시하면서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고 사탄에게 틈탈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는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 ‘꼭 자랄 날이 있을 거야. 내가 연약해지고 넘어지고 실패했어도, 언젠가는 자랄 거야. 언젠가는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고, 진리도 깨달을 수 있고, 완전히 구원받을 수 있을 거야.’ 너에게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 어떤 좌절과 어려움에 부딪치든 혹은 실패하고 넘어지든 소극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구원하는지 알아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께 구원받을 자격이 없고 하나님이 싫어하거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다. 가끔 그런 정형이 있을 때가 있고, 혹은 자신이 지난날 한동안 완전히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했고, 완전히 하나님께 버림당한 사람이라고 느꼈을 때가 있을 것인데, 이것도 문제 되지 않는다. 네가 지금 알았어도 늦지 않았다! 회개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너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그러니 아직 늦은 편은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생명 진입과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맞다. 생명 진입을 하는 것이 1순위로, 가장 중요하다. 네가 어떤 본분을 하든, 하나님을 몇 해 믿었든,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든, 나이가 얼마이든 생명 진입을 하는 것이야말로 1순위이다!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은 20년이나 믿었는데, 저는 남들보다 한참 늦게 믿어 이제 겨우 5년밖에 안 됐으니 희망이 없잖아요? 뒤떨어졌으니까요!”라고 한다. 이것은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 이유와 핑계가 될 수 없다. 20년을 믿었으면 어떻고, 30년을 믿었다고 한들 어떠하냐? 도태된 사람들이 수두룩하지 않느냐? 내 말이 사실이 아니냐? (예, 맞습니다.) 3~5년을 믿었거나 1~2년을 믿었어도 그 사람들보다 더 착실하게 본분을 하는 사람들이 없느냐?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 덤으로 복을 얻은 사람이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실을 알 수 있느냐?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공의로우시고 공정하시다. 하나님은 네가 전에 어떠했는지, 지금의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보지 않고 단지 네가 무엇을 추구하고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를 본다. 절대로 하나님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네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인데, 어찌 그렇게 패괴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또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다. 딱 반대이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사람은 패괴 성정이 있고, 사탄에게 패괴되어 사탄에게 속하는 인류이다. 그렇지? 하나님은 왜 천사를 구원한다고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천사를 구원한다고 말씀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하나님이 구원하는 사람이 진공 속에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맞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한 적이 없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내가 구원하고자 하는 인류는 사탄에게 패괴되고, 사탄의 손에서 빼앗아 온 인류이고, 사탄의 패괴 성정이 있고, 나를 적대시하고 나를 대적하고, 나를 거역하는 인류이다.”라고 말씀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말씀하였다. 그런데 사람은 왜 이런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이냐? 이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있다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해결해야 한다. 그건 너의 관념이고 상상이다. 하나님은 네가 넘어지고, 실패하고, 잘못하는 것을 허용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시간을 주어 진리를 깨닫고 진입하고 실행하게 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이 살아내라고 요구한 대로 살아내기를 바란다. 그러나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느냐?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진리를 듣고 깨닫고서도 실행하지 않고, 완고하게 대항하면서 자신의 방법으로 하나님과 겨루려고 하고, 기만하며 얼렁뚱땅 넘기려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싫어한다. 너에게 패괴 성정이 있다고 하는데 너의 그런 정형은 성질이 다른 것이다. 너는 그냥 단순하고 일반적인 패괴된 인류가 아니다. 너는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인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완고하게 대항하는 사람인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한다면, 그것은 그냥 관념이 있거나 오해가 있는 것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작심하고 하나님과 끝까지 대항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구원하겠느냐? 구원하지 않는다. 네가 하나님을 적으로 여기는데 하나님이 너를 구원해 주겠느냐?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 너희는 느낌이 어떠하냐? (정말 좋습니다.) 너희가 조금 깨닫게 되면 조금 얻게 되고, 조금 얻게 되면 진리 방면에서 진입이 조금 있게 되고, 진입이 있게 되면 너의 생명은 자라나게 된다. 생명 진입이 없다면 생명이 자라날 수 없다. 어린 새싹을 보아라. 싹이 트면 물을 주고 비료도 주어야 한다. 비료를 주지 않으면 영원히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없다. 싹이 튼 후에, 물도, 비료도 주지 않고, 햇빛도 쐬어 주지 않고, 영양 공급도 해 주지 않고, 정성스레 배양하고 가꾸지 않는다면, 마지막에는 새싹도 말라죽고 자랄 수 없게 된다. 알겠지? (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겠느냐? 네가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만사형통하는 것이 아니고, 보험에 가입된 것도 아니다. 그건 안전하지 않고 방금 발을 들여놓은 것에 불과하다. 알겠느냐? (네.) 이것을 알면 된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길에 들어선 그 자체만으로도 사실 이미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이걸 포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 구원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사람이 수천 세대를 살아왔지만 이런 기회를 접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보아라, 너희 이 세대는 이런 기회를 접하게 되었구나! 이것은 축복이다. 너희는 아마 이 축복을 지금은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저 지금 하나님을 믿으니 좋고, 이 길이 옳은 길이고 인생의 바른길이기에 세상의 길을 가지 않고 그릇된 길을 가지 말아야겠다고 느낄 것이다. 이 바른길을 걸으면 최소한 지금, 이 생애에서는 행복한 것이다. 더 이상 사탄에게 참해를 당하지 않고, 더 이상 이 사회와 인류에게 참해를 당하지 않으며 완전히, 진실하게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예로운 일이고 행복한 일이며, 또한 이생에서 느끼게 되는 행복한 일이다. 그럼 내세는 어떻겠느냐?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네가 구원받도록 해 줄 뿐만 아니라 너에게 진리와 생명을 공급해 주고 또 약속도 해 주었다. 어떤 말씀이었더라? (“이생에 백배를 얻고 내세에 영생을 얻으리라.”입니다.) 그래, 그렇게 약속하셨다. 그러니 이 일을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진리를 위해, 구원받기 위해, 조그마한 대가를 지불하고 고통을 좀 받는 것은 다 잠시적인 것이다. 훗날,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얻게 되면, 그 행복과 즐거움, 누리게 되는 축복은 아마 아무도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시 말해, 네가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얻게 되면, 그때는 정말 보험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하나님은 너를 구원할 수 있고, 값없이 너에게 모든 진리와 생명을 공급해 주신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결국은 네가 어떤 길을 가고, 어떻게 가느냐에 달린 게 아니겠느냐? 그 결정권은 바로 네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말해야 하겠느냐? 네 자신의 귀숙, 네 자신이 “이생에 백배를 얻고 내세에 영생을 얻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되고 이어받을 수 있을지, 그 축복과 그 복을 이어받을 수 있을지, 이 기회는 네 자신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다. 그 누구도 너를 좌우지하거나 도와주지 못하지만, 너를 제한하지도 못한다. 하나님이 이미 너에게 그런 권리를 주셨으니 너에게는 그런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으냐?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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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②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③천경지의(天經地義): 하늘이 정하고 땅이 받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나 법칙을 뜻한다. 천경지위라고도 한다.

④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