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목차

제75편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최소한 기본 양심과 인성을 갖추어야 한다

중국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든 신중하지 못하고, 거칠고, 참답지 못하다. 또 어떤 일을 하든 잔꾀를 부려 쉽게 하려고 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한다. 이것이 중국 사람의 특성이다. 이런 특성은 날건달의 성질을 띠고 있지 않느냐? 어떤 일을 하든 참답게 하지 않으며 눈을 슬쩍 감고 ‘괜찮아! 그 정도면 비슷해! 됐어!’라고 하는데, 결국은 이래저래 제 자신만 망치고, 아무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중국 사람은 요리를 하는 것도 그렇다. 요리사에게 “소금 얼마 넣어요?”라고 물으면 “조금만, 적당하게.”라고 말한다. “국은 얼마 동안 끓여야 돼요? 시간에 신경써야 하나요?” “봐 가면서 끊이면 돼요, 냄새를 맡아 보고 다 된 것 같다 싶으면 돼요! 그러면 먹을 수 있어요.” “한 끼에 어느 정도 먹으면 좋아요?” “두 그릇요.”라고 대답한다. 남쪽 지방의 국그릇은 아주 작고 북쪽 지방의 국그릇은 아주 커 서로 다르다. 그 말에는 얼마라는 양이 없다는 것이다. 몇 리터, 몇 밀리리터, 몇 그램인지 엄격한 기준치가 없고 대략적인 것만 있다. 뭐든 다 “조금”, “적당하게”, “비슷하면 된다”고 두리뭉실하게 말한다. 결국은 자신만 망친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뜻으로 너희에게 이 말을 하겠느냐? 어떤 일을 하든 다 엄격해야 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해야 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늘 잔머리만 굴리려 하고 대단한 일이나 체면 세울 일만 하려고 하는데 그런 건 너무 역겹다. 사람을 역겹게 만든다! 어떤 분야를 전공하든 그렇게 배운다면 다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자세히 배우지 못한다. 그러면 인재가 될 수 없다. 사실, 너희가 본분을 하면서 좀 생소한 일을 접하게 되면 그것은 너희에게 낯설거나 숙련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적인 부분이 조금밖에 없거나 난이도가 조금밖에 안 되는 일에도 너희는 노력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최고로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같이 모여 많이 교통하지 않는다. 그저 대체적으로 두리뭉실하게 끝내면 그만이다. 마지막에 가서 아무리 해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수고가 아니냐? 뭘 해도 다 두리뭉실하게 하고 다 얼렁뚱땅 한다. “모르겠어! 80%? 아마도? 그럴지도? 그냥 이렇게 하지 뭐!” 이러면 문제가 된다. 어떤 일이든 제대로 하지 못하면 결국은 어떤 일도 잘 해내지 못한다.

중국 그 큰 나라에 인구만 해도 10억이 넘고, 유구한 역사도 있고, 인재도 적지 않다. 그런데 왜 중국 사람들이 만든 제품은 세계에서 앞서는 것이 없느냐? 왜 해외 시장에 내놓을 만한 인기 상품이 없느냐? 경공업에서 중공업까지, 일상생활 용품에서 중공업 제품까지, 또 자동차, 비행기, 무기 등 중공업 제품 중에 왜 해외 시장에 내놓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느냐?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외국의 어떤 제품은 개발된 지 200년이 된다. 그렇지만 그 가공 기술력이나 제품의 품질, 디자인은 200년이 넘어도 뒤처지지 않고 가격도 계속 인상된다. 브랜드 제품들은 계속 그 가격을 유지하고 그렇게 시장에서 그 가치를 유지해 나간다. 하지만 중국 사람은 모조품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 사람이 200위안에 판매하는 상품을 중국 사람이 똑같이 만들어 20위안에 내놓아도 사는 사람이 없다. 얼마나 낯 깎이는 일이냐? 중국 사람마저도 사지 않는다. 원인은 무엇이냐? (신뢰가 가지 않고 품질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탓하겠느냐? (중국 사람 스스로를 탓해야 합니다.) 음, 자기 탓이다. 이방인들이 ‘자업자득’이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누굴 탓하겠느냐? 만든 그 제품의 질이 안 좋아 품질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국 사람은 자신이 만든 제품에 대해 스스로도 인정해 주지 않으면서 늘 허풍만 친다. 세계 시장에서 선두를 달린다느니, 경쟁자가 없다느니 하면서 큰소리만 친다. 그건 3살 짜리 아이를 속이는 격이 아니냐? 해외 시장에 가보면 어디 그런가? 나는 한 가지 문제를 발견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일을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혹은 기업을 운영하거나 수공업을 해도 다 어떤 특징이 있고 어떤 특성이 있다. 그것은 무엇을 하든 끈기가 없고 무엇을 하든 깊이 파고들지 않으며 그저 대충 때울 생각만 하는 것이다. 뭔가를 조금 배우고 지식이나 이치를 좀 알았다 싶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더 깊이 파고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중에 생산해 낸 제품이나 만든 상품들을 보면 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만든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잘 만들려고 생각하지 않고 멀리 보지 않는다. 눈앞의 이익만 챙기면서 얼렁뚱땅 날짜만 채우려고 한다. 외국의 어떤 기업이나 브랜드 제품, 혹은 가족 기업은 200~300년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데, 그 제품들은 다 특색이 있고 품질도 좋아 오래 버틴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 수 있을까?’라는 이런 것만 생각하고 집중하여 잘하려고 한다. 하지만 중국 사람들은 마음에 잡초가 자란 것처럼 늘 큰돈만 벌려고 하지, 일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고 제품 품질에도 신경 쓰지 않으며 늘 쉽게 돈 벌 생각만 한다. 중국 사람은 이런 성질이 있어서 어떤 일을 하든 파고들어 더 세심하게 하지 않고 늘 얼렁뚱땅 지나가려고 한다. 결과는 어떻게 되겠느냐? 자신을 망치게 된다.

중국 사람들이 서양에서 제품을 많이 만들었지만 품질 보장이 안 돼 이미지가 땅에 떨어졌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느냐? 중국 사람들이 그 지방에 더 머물려고 해도 어렵게 되었다. 중국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고약해졌는지 보아라. 아이들 장난감을 만들 때, 헝겊 인형이나 마론 인형 속에 수술실에서 지혈용으로 사용했던 솜을 넣었다. 결국 기소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 솜들은 어떤 전염병을 유발시킬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는데, 이미지가 좋을 수 있겠느냐? 상대방은 너를 신뢰하여 너와 거래를 하고 밥벌이도 할 수 있게 해 주었는데, 결과는 어떠냐? 스스로 바른길로 가지 않아 신용을 깨뜨리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상대방이 너에게 오더를 주지 않아 일도 잃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어떤 사람들은 “외국인들은 우리를 업신여기고 차별합니다, 인종 차별하네요.”라고 말한다. 사실이 정말 그런 것이냐? (아닙니다.)

중국에서 미국에 개 사료를 만들어 주었는데, 사료는 비율대로 재료들을 섞으면 된다. 미국에서 어떤 기준을 줬으면 그 기준대로 해주면 되는 문제다. 개 사료 기준은 사람의 음식 기준보다 낮다. 그렇지? 그런데 뭘 넣었는지 많은 개들이 그 사료를 먹고 죽었다. 어찌 된 일이겠느냐? (기본재료를 나쁜 것으로 사용했습니다.) 음.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다. 원재료가 나쁜 것이다. 중국에서는 시중에 판매되는 소시지의 첨가제 중독으로 사람이 죽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는데, 하물며 개는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그렇지? 중국 사람은 생명을 대하고 자신의 신용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다. 이것은 날건달 성질이 아니냐? (맞습니다.) 쉽게 변할 수 있느냐? (쉽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가르쳐 주고 교육하면 되겠느냐? (안 됩니다. 뿌리가 이미 깊숙이 박혔습니다.) 법적으로 제재를 가한다면 되겠느냐? 이것이 중국 사람들이 일처리하는 방식이다. 그리하여 개도 그 피해를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중국 사람은 마음이 음흉하다.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건 괜찮아, 이거 하나 넣는다고 죽겠어? 죽는다 한들 어쩔 건데? 설마 개 한 마리 때문에 소송까지 할까?’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대하는 것도 그렇게 참답지 않고 세심하지 않은데, 개는 더 개의치 않는다. 그렇지? 이건 어떤 문제냐? (사람의 마음 문제입니다.) (스스로 이름을 더럽히고 책임감이 없습니다.) 이것이 단지 책임감이 없는 문제일 뿐이냐? 단지 태도에 관련된 일이냐? (인성이 없습니다.) (이미 기본적인 양심마저 없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따지지 않는다. 자신의 이미지나 신용은 다 뒷전이고 돈만 벌면 된다고 한다. 개가 식중독으로 죽는 것은 둘째 치고 사람이 죽는다 해도 안타까워하지 않고, 눈도 깜짝하지 않으며, 마음에 걸리지도, 놀라지도 않아 하고, 별로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인성이 없다. 그렇지? (네.) 인성이 없는 것이다. 단지 책임감이 없다거나 도덕에 어긋난다고 볼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중국 사람과 접촉하거나 거래를 하면 느낌이 다르다. 마음에 계속 안심이 안 되고 불안한 생각만 든다. ‘저 사람에게 일을 맡기면 뒤에 가서 또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날 망치지는 않을까? 피해를 주거나 등쳐 먹지 않을까?’라고 하면서 계속 마음에 걸린다. 중국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다 이런 성질이 있다. 신용이 전혀 없고 신용을 지키지도 않기에 기본적으로 뭘 할 수가 없다. 그렇지? 서양에는 법률 제도가 있고 또 전통적인 것들이 있어서 사람들은 신용을 염두에 두고 단골 손님을 염두에 둔다. 그래서 신용이 깨질까 봐, 나중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한다. 하지만 중국 사람은 그런 것을 겁내지 않는다. 무엇이든 다 짓밟을 수 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다른 것은 개의치 않는다. 장사를 해도 어떻게 하면 고객의 마음을 끌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 수 있을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장사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품질이나 신용에 마음을 기울여 고객들을 단골 손님으로 만들고 신뢰를 얻어 제품에 관심을 갖게 할 것인지, 이런 것에는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하면 잔머리를 굴려 힘을 들이지 않고 이익을 얻으며, 적은 투자로 큰돈을 벌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자신은 힘을 들이지 않을 수 있을지만 궁리한다. 이건 어떤 길이냐?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이 맞느냐? (아닙니다.)

장사를 한다면 너희들도 그런 길을 갈 수 있느냐? (마찬가지입니다.)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 그렇다면 문제가 된다! 너희도 그런 길을 걸을 수 있단 말이냐? 지금 하나님을 믿는데도 그런 길을 갈 수 있느냐?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을 믿은 뒤에는 얼마나 절제할 수 있느냐? 너희들의 최저선은 어디냐? (양심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양심이 깨지고 최저선이 사라지느냐? 여기에서 최저선이 사라진다는 것은 ‘이 일에서는 최소한의 양심 같은 거 필요 없어, 일단 벌고 봐야지. 다른 사람이 손해 보는 것쯤은 괜찮아, 아무도 모를 테니까! 지금 사업해서 돈 벌기도 힘든 마당에 어렵게 생긴 기회인데 벌어야지. 아무도 모를 거야.’라고 하는 이런 것이다. 어떤 때 최저선이 무너지게 되겠느냐? 어떤 상황에서 최저선이 사라져도 괜찮다고 생각되겠느냐? (패괴 성정이 어느 정도까지 심해져 스스로 절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저선이 사라집니다.) 그럼 그건 어떤 상황이냐? 구체적인 상황을 말해 보아라. 다들 방금 한 말이 맞다고 보느냐? (좀 두리뭉실합니다.) 두리뭉실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내용이 대략적이라는 뜻입니다.) (도리입니다.) 두리뭉실하면 바로 도리인 것이다. 그럼 너희는 도리를 말하지 말고 실제 상황이나 구체적인 것을 말하여라. 한 가지 정형이나 실제 상황을 예로 들어 말해 보아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더는 살아갈 길이 없을 때입니다.) 음, 그건 한 가지 상황이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방법이 없게 된 데다 수중에 정말 돈까지 없으니 사기라도 치지 않으면 자금 유통이 안 돼 장사도 못하고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이것은 일종의 상황인데, 도덕의 최저선이 무너질 수 있다. 그렇지? 양심이나 신용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징벌도 무서운 줄 모르게 되며 도덕의 최저선을 넘게 된다. 또 어떤 상황이 있느냐? (가장 적은 대가로 얻은 보수가 평소 양심에 따라 일해서 번 돈의 몇 배를 훨씬 초과할 경우, 이런 기회가 생기면 아마도 양심을 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일종의 상황이다. (또 다른 상황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하여 해고당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두 사람만 알고 있는 경우, 어떤 사람은 솔직하게 누가 했으면 했다고 인정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끝까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자신에게 아주 불리한 결과가 돌아오기 때문에 양심의 최저선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 그건 자신의 이익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또 있느냐? (한 가지 상황이 생각났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돈을 아주 많이 벌었는데, 자신은 양심을 지키면서 벌다 보니 별로 많이 벌지 못했을 때입니다. 처음에는 계속 양심적으로 돈을 벌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생활이나 여건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데 자신은 계속 그 정도밖에 벌지 못할 때, 사람 마음속의 최저선은 점차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도 일종의 상황이다. (설날에 집에 갈 돈이 없으면 도둑질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또는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렸는데 갚지 못해 빚 독촉 때문에 도둑질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결혼 날짜는 다가오는데, 결혼 비용은 마련하기 힘들 때면 도둑질을 하게 됩니다.) 그건 어떤 상황인가? 다 수중에 돈이 없어 막다른 골목에 이르거나 막막해서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이다. 그렇지? 네가 말한 상황은 도둑질하거나 혹은 강탈하게 될 때 그 최저선을 넘는 것이다. 또 있느냐?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중에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세상에서 돈 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징벌하거나 혹은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도 보이지 않자, 자신도 돈 벌이를 하러 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거기에 완전히 빠져버립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이냐? (이익에 눈이 어두워졌을 때는 이미 하나님을 잊은 것입니다. 당장 어떤 징벌이 내리는 것이 보이지 않으니 간이 커진 것입니다.) 그런 상황은 어떤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구나, 방금 말한 그 상황이 도덕의 최저선이 사라졌거나 혹은 최저선을 넘어서거나 포기하는 것과 관련되는지 누가 말해 보겠느냐? 이것은 어떤 상황이냐? (일종의 배반입니다.) (그것은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처럼 양심과 이지를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구나. 누가 더 말해 보아라. 방금 저 자매가 말한 것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어 성정 변화도 진리도 추구하지 않으면서 계속 세상에 빠져 일반인들처럼 생활하고, 살림살이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돈도 잘 벌고 잘 사는 걸 보고, 자신은 아직도 여기서 바보같이 ‘믿음’을 지키고 있는 것 같고,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며, 하나님을 믿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연약해져 세상으로 가 버린 것이다. 이것은 도덕의 최저선이 무너지거나 그것을 포기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그렇지? (네.) 이것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연약해져 그 고난을 받기 싫어 세상으로 갔고 본분도 하기 싫어진 것이다.

방금 어디까지 말하였느냐? (‘어떤 상황에서 양심의 최저선이 무너지게 되는가’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음, 어떤 사람의 최저선은 양심에 어긋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도덕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물 먹여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돈을 위해 양심을 팔아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한다. 최저선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럼, 언제 이 최저선을 넘어서게 되는가? 하나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라고 여길 때이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해도 보는 사람 편에서나 혹은 자신의 양심으로나 혹은 객관적인 조건에서나 어느 편에서 보든 모두 정당하고, 합당하며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때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게 되고 도덕의 최저선을 넘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 면이다. 그 말인즉 ‘내가 이 지경이 됐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되겠어? 그렇게 안 하면 살길이 없어.’라는 뜻이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지 않는데, 최저선을 버리고 양심과 도덕 기준을 버릴지라도 그렇게 하려 하고,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은 정당하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또 다른 하나는 이익 혹은 유혹이 너무 클 경우이다. 누군가가 “이거 그냥 한 번만 속이면 10위안이나 벌 수 있는 일인데, 안 할래?”라고 하면 “안 해! 사람 등쳐 먹으면 얼마나 양심에 걸리겠어? 10위안을 번다 해도 속이 편치가 않아, 그러면 안 돼!”라고 한다. “그럼, 100위안 벌 수 있으면 어때?”라고 하면 잠깐 고민을 해 보더니 “100위안이라……” 하면서 마음이 흔들린다. “100위안? 아, 100위안이라……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 또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100위안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게 좋을까?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야.”라고 하면서 마음이 ‘덜컥’ 한다. “100위안 때문에 사람을 속이다니, 그러면 너무나 비열해. 사람을 해치는 거니 그러면 안 돼. 근데 그렇게 100위안 번다니까 정말 쉽긴 하네!”라고 하면서 마음이 동한다. 그러나 100위안은 별로 큰 돈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동하기는 하나 그래도 자제할 수는 있다. 그렇지? 100위안이면 몇 끼니 먹을 수 있느냐? 고기를 몇 번 먹을 수 있느냐? 돼지고기 3~4kg 정도 살 수 있다. 그렇지? ‘하지만 별로 이득이 되지 않는다. 돼지고기 3~4kg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거나 발각이라도 된다면 그건 아니지! 게다가 하나님을 믿는데 100위안 때문에 징벌받으면 그건 너무 가치 없잖아! 100위안에 돼지고기 3~4, 4~5kg 먹겠지만 반대로 한평생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 얼마나 더 많이 먹는데! 그러면 안 되지!’라고 하면서 100위안은 너를 유혹하지 못하고 너의 마음을 흔들지도 못한다. 너는 그래도 양심이 있고 지각이 있다. 그럼 1,000위안은 어떻겠느냐? (마음이 좀 크게 흔들릴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입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아, 1,000위안이라, 정말 좋은 기회네! 이 돈을 놓친다면 굴러들어 온 금덩이를 차버리는 격이잖아? 1,000위안이면 돼지고기가 아니라 온 가족이 잘 먹을 수 있는데! 그것도 한동안 먹을 수 있는데! 1,000위안이면 좋은 거 정말 많이 살 수 있잖아!’라고 한다. 보아라, 가치를 따져보는 것도 달라지고 마음이 흔들린다. 그때가 되면 거의 양심을 버린 상태이다. 양심의 지각도, 도덕의 최저선도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무너지려고 한다. 만 위안이면 어떻겠느냐? (완전히 타락할 것입니다.) 만 위안이면 마음이 동한다. 생각하다가 “어떻게 하면 돼? 어떻게 하면 되는데? 언제 하면 돼? 누구랑 같이 하는데? 누구랑 거래해?”라고 하면서 따진다. 보아라, 턱을 만지작거리고 머리를 긁적이다 보면 그쪽으로 방법이 나오기 시작한다. “양심은 뭔 양심이야, 만 위안이 쉬운 일인가, 그 돈 벌려면 얼마나 오래 일해야 되는데! 정당하게 장사하면서 만 위안 벌려면 날밤을 얼마나 새야 되는지도 모르잖아!”라고 하면서 마음이 흔들려 양심을 버리려고 하고 최저선이 완전히 무너진다. 그때 양심이 작용할 수 있겠느냐? (하지 못합니다.) 음, 하지 못한다. 인성 내면의 양심, 너의 최저선, 곧 도덕의 최저선과 인간됨의 최저선이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하게 될 때,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음, 없다. 그래서 이익에 관련되는 유혹이 클 때, 즉 큰 이익이 너를 유혹할 때는 8위안, 10위안, 100위안, 200위안 같은 문제가 아니다. 네 앞에 큰 이익이 놓이면 너는 마음이 움직인다. 양심과 도덕의 최저선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이 두 가지가 너를 절제할 수 있게 한다면 너는 곧바로 ‘야, 돈의 유혹이 정말 만만치 않네! 하지만 이 돈이 정말 내가 얻어도 되는 것일까? 내가 일해서 얻는 돈일까? 일해서 번 돈이 아니라면 내가 가질 돈도 아니고 가져서도 안 되는 거지! 그렇게 하면 안 돼! 설사 그렇게 해서 아무도 모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아시잖아! 하나님 앞에 가서 할 말이 없게 되니 절대 그럴 수 없어. 그렇게 하면 벌받을 거야! 양심의 가책을 받는 데서 그칠 일이 아니라, 징벌 받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보아라, 인성 있는 사람으로서 양심적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떤 일은 절제할 수 있고 그 일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너의 손발과 마음을 묶어 둘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양심과 도덕이 네 마음에 자물쇠를 잠그게 된 것이다. 그러면 너는 ‘그렇게 하면 안 돼! 사람이 어떻게 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게 되는 거야! 모든 사람이 모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아셔! 하나님은 모르실 리 없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익, 큰 이익이 사람을 유혹할 때, 대다수가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렇지? 사람은 어떤 상황이어야 절제가 가능한가? 우선 양심이 있고 인성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양심은 무엇이냐? (사람으로서 있어야 할 품위와 인격의 최저선을 말합니다.) 음, 품위(원문: 尊嚴)와 기본 양심이다. 기본 양심과 품위, 즉 네 스스로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도대체 어떤 성질인지 아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엇이냐? 방금 무엇이라고 했었지? (인성이라고 했습니다.) 음, 인성이다. 인성에는 인품, 인격이 들어 있다. 인격의 높이가 충분해야 하고, 이익 앞에서 의(義)를 잊어서는 안 되며, 또한 이득을 챙길 만한 것을 보기만 하면 달려가거나 큰 이익에 눈이 멀어 마음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인격이란, 네가 얻어야 할 것이 아니고 정상적인 경로로 온 것이 아닌 것을 볼 때, ‘난 부러워하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을 거야. 가지려고도 하지 않고 거기에 손대지도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격이다. 네가 얻어야 할 것, 즉 하나님이 너에게 베풀어 주신 것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베푸심에 감사드리면 되고, 네가 얻어야 할 몫이 아니고 정상적인 경로로 온 것도 아니라면 가질 수 있을지라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이런 것을 인격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격과 기본 양심을 갖고 있느냐? (갖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 그러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죠!”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우선 무엇을 갖추어야 하느냐? 최소한 무엇을 갖추어야 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소질이 있어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냐? “믿음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맞는 말이냐? (맞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이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는데, 맞느냐? (맞지 않습니다.) 이런 말들은 다 무엇이냐? 도리이다. 어떤 사람들은 또 “패괴 성정이 너무 깊어서 그렇습니다. 너무 깊게 패괴되었어요!”라고 하는데, 그럼 그것은 맞는 말이냐? (실질적이지 못한 말입니다.) 이런 말들이 도리적으로는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일과 부합되느냐? (부합되지 않습니다.) 왜 부합되지 않느냐? (실질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네가 내린 정의나 결론이 이 일의 실질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렇지? (네.)

많은 경우에 너희가 보기에는 맞는 말이고, 또 이치를 말했거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보거나 들은 것을 기억했다가 그대로 따라 했는데, 왜 도리를 말한다고 하겠느냐? (경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부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대체적인 것만 말해서 그렇습니다.) 그 말만 따로 놓고 보면 맞느냐? 틀린 점이 있느냐? (없습니다.) 틀린 것이 없는데, 왜 도리라고 하겠느냐? (저희가 말한 것은 다 이론적이거나 감성적인 인식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일의 실질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핵심을 말했다. 바로 그 일의 실질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네가 한 가지 일이나 도리를 말할 때, 그 일의 실질에 부합되지 않고 그 일의 실제에 맞지 않는다면, 즉 말한 그 도리가 문제의 실질을 해결하지 못하고 문제의 실제 정형과 실질을 밝히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도리인 것이다. 이런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그럼 평소에 너희들은 이야기를 나누거나 문제를 해결할 때, 대부분 도리를 말하느냐 아니면 실제를 말하느냐? (대부분 도리를 말합니다.) 거의 도리를 말한다. 그렇지? 도리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해결하지 못합니다. 기껏해야 사람에게 권고만 해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지는 못합니다.) 음, 바로 그런 것이다.

좀 전에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지? 제일 먼저 기본 양심과 무엇에 대해 말했느냐? (방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려면 그것이 무엇과 관계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무엇과 관계되는지 말해 보아라. (한 사람의 인성 품격과 그 사람의 양심, 인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큰 관련이 있는지 말해 보아라. 어떤 부분이 관련되느냐? 생각해 보아라. 기본 양심이 없고 인성 품격이 없는 사람, 즉 인성 품격이 극히 악랄한 사람, 인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 답은 분명 부정적인 것이다. 그렇지? 왜 그렇냐? (양심이 있는 사람은 양심적으로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악한 것인지 압니다. 양심이 없고 인성이 없는 사람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마음은 선한 것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려는 주관적인 생각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에서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그 밖에, 양심과 인성이 없는 사람은 또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고 긍정적인 것이 어떤 것이고 부정적인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계속 부정적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가 긍정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 너희들이 말해 보아라. 누구의 말이 가장 적절한지, 가장 실제에 부합되는지 다 같이 분별해 보자. (양심이 있는 사람은 영이 통하는 사람입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은 영이 통하지 않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영이 통하는 사람만이 일을 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짐승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런 것을 모르기에 어떤 짓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또 말해 보아라. 더 없느냐? (양심과 이지가 없는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이 도대체 합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의식하지 못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인, 방화를 하고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오늘, 나를 무시했으니, 꼭 너에게 복수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아,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긴 했지만 난 그래도 최소한 사람을 죽이거나 불을 질러서는 안 돼.’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래도 최저선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음. (어떤 사람이 인성이 없어서 자신도 존중하지 않을 정도라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추측이다. 그렇지? 그것은 감성적인 인식이냐 아니면 체험한 것이냐? 아니면 본 것이냐? 말해 보아라. (제가 느낀 것입니다.) 더 말해 보아라. 방금 어떤 문제를 말하였느냐? (양심이 없는 사람은 원칙이나 기준이 없이 일한다고 했습니다.) “원칙이나 기준이 없다”, 그 뒤에 더 없느냐? 거기에서 끝이냐? 너희는 이 문제를 다시 읽어보고 말해 보아라. (‘기본 양심과 인성 품격이 없고 인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는가?’) 너희는 이걸 다 적었느냐? (적었습니다.) 모두들 잘 가지고 있어라. 그런 다음, 혼자 잘 묵상해 보아라. 한동안 묵상해 보고 경력해 보아라. 난 너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 너희가 함께 교통해 본 다음,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기는지, 이 문제를 가지고 실천하면서 경력해 보고 스스로 체험해 보아라.

너희는 평소에 이런 문제를 묵상해 보느냐? (묵상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에는 생각들이 막 스쳐 지나가지만 깊게 생각해 보지 않고 포기합니다. 그저 생각만 해 봅니다.) 너희는 평소에 이런 문제를 경력하지 못한다. 생각한다 할지라도 겉에서 맴돈다. 현상만 보고 깊이 이해하지도 못하고, 더 생각하지도 않기에, 경력 가운데서 그 문제를 체험하고 실제화하지도 못한다. 그렇지? (맞습니다.) 앞으로 이 문제를 잘 생각해 보아라.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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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자업자득: 원문은 발에 생긴 물집은 자신이 걸어서 생겼다는 뜻.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