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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편 패괴 성정을 해결해야 부정적인 정형에서 헤어나올 수 있다

지금 너희는 본분하는 기간에 생명 진입 방면에 어떤 길이 있다고 생각되는가? 생명 진입 방면은 어떠한가? 보아하니 지금 본분하면서 힘이 넘치는 것 같은데, 기운 없고 나태한 사람이 없는가? 그리고 본분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 조금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 환경을 바꾸고 싶어 하거나 혹은 본분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느냐? (지금은 없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생명 진입 방면에서 어떤 새로운 깨우침과 빛 비춤이 있는가? 생명 진입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첫째 가는 중요한 일이고 본분하는 것도 첫째 가는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본분을 잘할 수 있고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으며 본분에 충성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도달하느냐? 어떤 경로를 통해 도달하느냐? (진리를 추구해서 도달합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경로는 무엇인가?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진리를 깨닫는 전제는 무엇인가? 진리에 공을 들여야 한다. 진리에 공을 들이는 데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진리에 아주 많은 공을 들여 매우 많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임할 때 이런 진리는 다 효과가 없고 쓰지 못합니다. 왜 진리가 그렇게 무력하다고 생각될까요? 일이 임하면 이런 진리가 왜 사람의 어려운 점을 해결할 수 없습니까? 왜 진리에 비춰볼 수 없는 것입니까?” 사람은 일이 임하면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왜 이렇게 부족할까? 왜 이렇게 빈궁할까? 왜 이렇게 가련할까? 나는 평소에는 깨달은 게 아주 많은데, 왜 이토록 무력하게 보이는 걸까? 진리를 많이 깨달았는데!’ 하지만 말할 때는 일사천리이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 몇 단락 정도는 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진리를 많이 깨달았어. 날마다 듣고, 쓰고, 기억하고 있어. 노트에 기록하고, 마음에 새기고, 머릿속에 기억해 둔 것도 아주 많아!’ 한가하면 이런 것들을 꺼내서 생각해 보고 다른 사람과 담론하면서 얘기한다. 다른 사람이 한 단락 말씀을 3~5분 교통하면 자기는 10분까지 할 수 있도록 훈련하고, 다른 사람이 10분까지 할 수 있으면 자기는 20분까지 할 수 있도록 훈련한다. 마치 외국어 하나를 배우는 것처럼 말할수록 할 말이 많아지고, 말할수록 더 잘 말하고, 말할수록 더 유창하고, 말할수록 더 익숙해지고, 말할수록 자신이 아주 영적이라고 생각되고, 진리를 아주 많이 깨달았고, 자신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진리를 많이 장비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어느 날, 아주 작은 일이 임하면 자신에게 관념이 있고 상상이 있으며 자신의 속셈이 있고 자신의 타산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주 사소한 일이 임해도 패괴가 나오고 천성적인 것들이 나온다. 하지만 이 문제를 아무리 기도해도 해결받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그와 교통하면 그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이런 도리는 제가 다 아니까 말하지 말아요. 제가 당신보다 더 잘 알아요! 나는 당신보다 진리를 더 많이 깨달았고, 도리도 당신보다 더 잘 말해요. 당신보다 설교도 더 많이 들었고, 공도 더 많이 들였어요. 내가 하나님을 믿은 시간도 당신보다 더 기니까 저에게 말할 필요 없어요. 저는 뭐든 다 알아요.”라고 한다. 하지만 애로 사항만은 해결할 수 없다. 자신의 패괴 성정, 자신의 속셈, 자신의 욕망이 쏟아져 나오려고 할 때, 소위 네가 깨닫고 있는 그런 진리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너에게 말했던 것은 너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 너희는 이런 문제에 늘 부딪치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은 하나님을 믿는 데에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평소에 교회 생활을 하고 별다른 일이 없을 때, 어려움이 닥치지 않았을 때, 시험이 임하지 않았을 때, 심각한 문제에 부딪치지 않았을 때, 자신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았을 때는 어떤 일이든 다 잘 처리할 수 있고 어떤 일이든 다 내려놓을 수 있지만, 바로 이런 일들이 임하면 내려놓지 못하는 거예요. 자신의 이런 어려운 점만은 해결할 방법이 없어요.”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에 어려움이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없어요. 매일 시간을 정해 정해진 양대로 먹고 마십니다.”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당신이 교회 생활을 하는데 당신을 골치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라고 물으면 “없습니다.”라고 한다. “당신이 본분을 하는 데에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없어요. 환경과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조건은 다 괜찮아요. 어떤 어려움도 없어요.” “그럼 당신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일이 임하면 헤어나오지 못하고 해결할 수 없는 거예요.” “그것은 당신이 깨달은 진리가 적기 때문이에요.” “아니에요. 저는 늘 설교를 들어요. 매번 설교 때마다 꼭 듣고 더군다나 중요한 부분은 다 기록하는데 깨달은 것이 적지 않아요.” 또 어떤 사람이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데에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에요.”라고 하자 너는 곰곰이 궁리하다가 “그것도 아니에요. 저는 아주 열심히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셔요. 밤이 깊어 조용할 때나 다른 사람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저는 가장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 말씀을 읽어요. 매번 하나님 말씀을 읽기 전에는 꼭 기도를 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고 도와 주시며 저와 함께해 주시길 구하고 저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시길 구해요. 저는 가장 조용하고 가장 안정된 상태에서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기도를 훈련하여 마음을 안정한 후에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십니다. 만일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신다면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그러면 무슨 문제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거나 본분하는 태도가 단정치 못하고, 본분을 함에 속셈이 있고, 늘 복 받을 것을 생각하는 이런 문제가 아닙니까?”라고 말하면 너는 곰곰이 생각하고 잘 성찰해 본다. ‘본분을 하는 데에 늘 속셈이 있다고? 늘 복 받기를 생각한다고? 그것도 아니야. 내가 본분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니 본심은 아주 올바른 거야! 나는 모든 것을 버렸어. 직장도 사직했고 가정도 버렸으며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도 버리고 포기했는데, 내 이익을 내려놓은 게 아닌가? 그런데 왜 본분하는 본심과 태도가 바르지 않다고 하는가? 그것도 아니야!’ 그러면 도대체 무슨 문제인가?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명 진입 방면에서 자주 부딪치게 되는 난제이고 또한 사람의 가장 큰 애로 사항이다. 일이 임하지 않았을 때는, 너는 자신이 꽤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고 또한 일정한 분량이 있고 일정한 기초도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일이 임하는 것을 볼 때 자신이 잘 파악할 수 있고, 심지어 본분하는 기간에 적지 않은 고통을 받을 수 있으며 많은 대가를 치를 수 있다고 여기고, 심지어 자신의 아주 많은 어려운 점과 육체의 나쁜 버릇, 질병, 결점 이러한 것들을 극복할 수 있으며 이런 것은 다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유일하게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사람에게 일이 임할 때 표현되는 패괴 성정인 것이다.

‘패괴 성정’, 이 단어는 사람들이 다 분명하게 알고 있고 익숙하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패괴 성정이겠는가? 도대체 어떤 유로(역주: 흘러나옴)가 패괴 성정인가? 어떤 생각들이 패괴 성정에서 비롯된 것인가? 어떤 행위가 패괴 성정에서 비롯된 것인가? 이것은 아마 사람마다 다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잠시 이런 문제를 제쳐놓고 패괴 성정에 대해 말해 보자. 사람이 만약 무엇이 패괴 성정인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어떤 행위가 패괴 성정의 유로인지를 모른다면 사람은 항상 패괴 성정대로 살면서도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겠느냐? 이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 이런 정형이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네가 만일 무엇이 패괴 성정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전혀 알지 못한다면 자신을 알 수 있겠느냐? 자신의 패괴 본성을 알 수 있겠느냐?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다. 이것은 틀림없이 부정하는 것이다. 그럼, 네가 무엇이 패괴 성정인지 모르는데, 너는 어떻게 하면 진리를 실행하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옳은 것인지, 어떻게 하면 틀린 것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가? 무엇을 알아들었다고 하고, 무엇을 못 알아들었다고 하는가? 그 기준이 무엇인지 가늠해 보아라. 너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알아들었는지, 혹은 못 알아들었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무엇이 알아들은 것이고 무엇이 알아듣지 못한 것인가? 이런 것을 알고 있느냐? (저는 방금 하나님께서 교통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저의 체험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진리를 깨닫지 못해서 패괴 성정대로 일을 처리하면서도 도리어 진리를 실행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자신의 이런 유로를 생각하면 비춰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춰 볼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터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터득할 수 있다’, 이 말은 무엇을 가리켜 한 말이느냐? (어느 정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한 말이느냐? (바로 이 말을 마음으로 확실히 인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생명 진입의 이 길이 많은 정형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정형은 무엇을 말하는가? 너희의 언어로 해석해 보아라. (바로 매 번 임하는 일과 환경 그리고 하나님께서 배설하신 이런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을 포함해, 저의 생명 안에서 유로되어 나오는 일을 보는 관점과 일부 사상입니다. 그것은 저의 언행을 좌지우지하고 지배할 수 있어 제가 이런 환경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데, 살아내는 이런 것들을 바로 정형이라고 합니다. 이해한 것이 아주 얕습니다.) 조금 근접했다. 누가 다시 말해 보라. 정형, 늘 ‘정형’을 언급하는데 “너는 어떤 정형이 있느냐?” (저는 정형이란 바로 사람이 어느 한동안의 시간이나 혹은 한가지 일에서 마음이나 생각이 어떤 패괴 성정에 통제되어, 이 기간에 줄곧 마음속에서 맴돌면서 말하고 행하는 것이 이런 패괴 성정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상대적으로 큰 훈계와 책망이 임하거나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어떤 사람은 아마 소극적인 정형에 처하게 될 것인데 정형이 그리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무릇 하나님 말씀과 서로 어긋나는 상태를 바로 정형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간혹 가족을 생각하고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정서 속에서 살면 본분에 충성하지 않습니다. 간혹 훈계와 책망이 임한 후에는 아주 교만하고 자신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없는데 나중에 사역을 대함에 있어도 자신감이 없어지고 소극적이 되며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또 어떤 깨달음이 있느냐? 말해 보라. 평소에 ‘정형’이라는 이 단어를 자주 말하느냐?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느냐? 너희가 이해하지 않으면 쓸 수 있느냐? (전에 저도 한 가지 정형에서 살았습니다. 본분을 해서 성과를 조금 냈을 때 자신이 아주 괜찮다고 느끼면서 자만자족하는 정형에서 살면서 진보하기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는 추구하는 힘이 생기지만 일이 순조로우면 자신이 마치 각 방면에서 아주 괜찮다고 느끼면서 교만하고 자대하는 정형 속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은 제가 이해하고 있는 정형입니다.) (본분하는 가운데서 어려움이 좀 있으면 제 자신은 어렵다고 소리치는 정형이 유로됩니다. 때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또한 자신을 공평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일이 임할 때면 평소에 갖추었던 그런 진리들이 마치 단번에 머리에서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기도를 한다 해도 종교 의식을 지키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소극적인 상태로 빠지는 것입니다. 나중에 형제자매들과 함께 찾고 구하고, 하나님 말씀을 먹고 마시고,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하니 마치 기운이 또 솟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런 패괴 성정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면, 자신의 힘이 솟는 것을 자신이 이미 어느 정도 조절을 한 것으로 여기는데, 사실 정형이 결코 진정 해결되지 않은 것입니다.)

너희들이 말한 정형은 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방면의 것이다. 그럼 옳은 정형은 없느냐? 긍정적인 정형은 없느냐? (있습니다.) 그럼 ‘정형’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예를 들어 말하면 무엇을 긍정적인 정형이라고 하느냐? (있는 힘껏 하나님을 만족게 할 때, 육체를 배반하고 진리를 실행할 때, 이런 정형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넘어지면 백절불굴로 다시 일어나 계속 향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옳은 정형이고 좋은 정형이며 긍정적인 정형이다. 그럼 너희들이 방금 말한 그런 것은 다 어떤 방면의 정형인가? 모두 무엇을 가리키는가? 너희가 말한 것은 무엇이냐? 내가 물은 것에 대답했느냐? (아닙니다.) 그럼 너희가 무엇을 말했느냐? 너희들이 나름대로 정의해 보아라. (유로해 낸 패괴이고 외적인 정형입니다.) (부딪친 일에서 유로한 부정적인 생각들에 정형을 규정해 놓았습니다. 이렇게 터득하는 것은 한 가지 방면입니다.) 너희들이 일부 정형을 말하긴 했으나 무엇이 정형인지 정의하지 않았다. 그럼 지금 정의를 내리도록 하자. 무엇을 ‘정형’이라 하는가? 바로 너희가 말한 이런 정형에 대해 너희 스스로 도대체 무엇을 정형이라고 하는지 다시 정리해 보아라. 정형은 사람에게 일이 임했을 때의 하나의 관점이 아닌가? 사람에게 일이 임했을 때의 하나의 상태가 아닌가? 이런 상태에서 그의 생각이나 입장, 그리고 그가 계속 살고 있는 하나의 정서가 아닌가?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내가 몇 가지를 말했는가? (관점, 상태, 생각, 입장, 그리고 정서, 이렇게 다섯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몇 가지는 다른 점이 있는가? 비슷한 부분은 있는가? 태도와 입장은 비슷하지 않느냐? (비슷합니다.) 사상과 관점도 사실 비슷한 것이다. 그저 어떤 경우에 서로 다른 곳에 사용할 뿐이다. 상태와 정서는 어떠한가? 차이가 좀 있다. 하지만 이런 단어는 다 쓸 수 있으며, 무엇이 정형인지를 해석할 수 있다. 그럼 지금 너희가 해석해 보아라, 무엇을 정형이라고 하느냐? (일이 임하면 유로하게 되는 다섯 가지, 즉 생각, 상태, 정서, 유로한 관점과 입장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본분을 하는 일에서 네가 책망을 받았다면 책망받고 나서 마음이 아주 괴로울 것이고 소극적인 정형이 있을 것이다. 이때 소극적인 정형에서 유로된 관점과 태도, 너의 입장이 있는데 바로 소극적인 정형에서 살게 된다. 이때 하나의 태도가 있다. 이 태도는 무엇인가? 이것은 정형의 세부적인 것에 관련된다. 그럼 너희들이 평소에 겪었던 사실과 연관되지 않겠는가? (연관됩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활과 서로 연관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너희들이 다 체험이 있고 경험도 있다. 이것은 사람마다 일상 생활과 관련되는 것이고 사람이 날마다 부딪치고 느끼고 체험하고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이때 어떤 정형 속에 있는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소극적이 되어서 하나의 소극적인 정형 속에 있게 된다. 그럼 그 소극적인 정형에서 어떤 것들을 유로하겠느냐? (오해하고 도피하고 자신을 규정하고 자포자기하고 심각할 때는 일에서 손을 뗍니다.) 심각할 때는 일에서 손을 뗀다는 것은 무엇이느냐? 태도와 입장인가 아니면 무엇이냐? (정서와 상태입니다.) 이때 그의 태도는 무엇이느냐? (협력하지 않고 대립하고 반항하고 마음속으로 저항하는 것입니다.) 이때 본분을 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소극적으로 나태하게 합니다.) (원동력이 없습니다.) (형식만 지킵니다.) (대충대충 합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에 관련된다. ‘원동력이 없다’는 것은 빈말이다. 빈말을 하지 말고 실제 상황을 말하여라. 네가 본분을 할 때 원동력이 없으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에게 네가 이런 정형이 있고 이런 상태에서 살아간다고 느끼게 하지 않겠는가?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유로하였는가? 네가 유로한 패괴 성정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체험이 있겠지? 그렇다면 이때 유로한 패괴 성정은 무엇이느냐? 패괴 성정이 없느냐? (본분을 대함에 있어서 대충대충 하고 건성으로 대합니다.) 아니다. 그것은 네가 일을 하고 난 다음 네 자신에게 내린 정성(定性)평가이다. 대충대충 하고 건성으로 대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의 행위이다. 너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무엇이 너로 하여금 대충대충 하도록 했는가? 이것을 깊이 파헤쳐야 하지 않는가? 이 속에 뭐가 들어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네가 파보아라. 깊이 파보아라. 계속 파보면 패괴 성정 그 부분을 파게 된다. 대충대충 하는 것은 본분을 한 효과이므로 사람들이 보고 나서 “저 사람이 대충대충 하면서 제대로 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반항하네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너는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였기에 대충대충 하게 되었고 이전처럼 그렇게 힘이 있지 못하는가? 너는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 생각이 바로 패괴 성정이고 이런 생각을 초래한 그것이 바로 너의 본성이다. 알았느냐? 그럼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어떻게 생각했었느냐? (자신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될 대로 되라지, 별 수 없지 뭐.’ 마음속으로 힘들다고 외치면서 드러누워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첫 며칠은 이런데,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 보면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되면서 죄송한 마음에 생각을 돌려오게 됩니다.) 이건 돌려오는 과정이다. 당시에는 어떻게 생각했는가? (마음속으로 ‘끝장이다, 될 대로 되라지. 내 능력이 요 정도니까.’ 그러면서 자포자기합니다.) 음, 자포자기하게 된다. ‘내 능력이 요 정도밖에 안 되는데 날 책망해? 내가 아는 것도 많지 않은데 뭘 얼마나 더 할 수 있다고 그러지? 일을 잘 하려고 해도 배워야 할 것이 아닌가? 나도 쉽겠는가? 젊은 나이에 가정을 버리고 직장을 버리는 게 쉽겠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이해해 주지도 않으시고 못하는 걸 억지로 시키네! 누가 많이 아는 사람 있으면 그 사람에게 시키면 될 걸. 난 이것밖에 안 돼. 어차피 난 이 모양이니 이 정도밖에 못해!’ 이런 생각이나 말은 자주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이런 것은 다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완벽한 사람은 없고 누구도 천사가 아니며 진공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나 패괴 유로는 사람마다 다 있다. 사람마다 이런 것이 다 있고, 이런 것을 늘 살아내며, 이런 것을 늘 유로하고, 이런 것들이 늘 흘러 나오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해결했는가? 사람에게 이런 것이 있어서 자주 이런 것을 유로하고 자주 이런 정형에서 살고 있는데, 사람 자신도 어쩔 수 없고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안 된다. 일이 임하지 않을 때는 정형이 매우 적극적이고 매우 노력하면서 아주 긍정적이다. 하지만 일이 임하기만 하면 이런 것들이 나오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막힘없이 전혀 얽히지 않고 수시로 유로되고 게다가 다른 사람이 부추길 필요가 없고 자신이 고민해 볼 필요도 없다. 자그마한 일이 임하여 틀리다는 말만 듣거나 잘못된 것을 보기만 해도 혹은 그릇된 것이라고 느껴지기만 하면 이런 패괴 성정은 수시로 흘러나온다. 왜 수시로 흘러나오느냐? (사람의 본성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사람에게 이런 본성이 있고 사람의 실질이 바로 사탄의 패괴 성정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너희들도 이미 느꼈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의 패괴 성정은 다른 사람이 강압적으로 더해 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주입시킨 것도 아니며 더욱이 다른 사람이 가르치거나 부추기거나 시킨 것이 아니라, 바로 네 자신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패괴 성정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람은 옳고 긍정적인 정형 속에 살 수 있는가? 이런 패괴 성정은 왜 늘 나타나는가? 처음 하나님을 믿어서부터 지금까지 네가 이제는 변화되어야겠다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그런 고질병을 버려야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그릇된 생각을 내려놓고 되도록 이런 패괴 성정이 유로되지 않게 피하겠다고 하는 이런 의식이 처음 있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의 이런 정형은 얼마나 변화되었는가? 나오는 빈도가 많아졌는가 아니면 적어졌는가? 아니면 전혀 변화되지 않았는가? 얼마 유로하고 또는 얼마 변화되었는지,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느냐? (하나님 사역을 체험하면서 조금의 변화와 진보가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바로 너의 이런 정형들이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깊게 변화되었는지, 얕게 변화되었는지, 어느 정도로 변화되었는지가 바로 너의 생명 진입의 정도를 대표하고 진리를 깨달은 정도를 대표하며 진리 실제에 진입한 정도를 대표한다. 이 말을 깨달았는가? 아마 진리 실제에 대해 체험이 좀 있는 사람은 이 말을 조금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터득이 없는 사람은 무엇이 생명 진입인지도 모른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수도 있다. 내가 좀 전에 왜 너희들에게 무엇이 정형인지를 물었겠는가? 만약 너희들이 무엇이 정형인지 모른다면 내가 하는 매 한 마디의 말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너희는 아예 모른다. 너희는 ‘당신이 큰 소리치고 빈말만 하기에 우리는 무슨 뜻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당신이 하는 말이 다 맞다고 들으면 됩니다. 다 들으면 되는 것입니다.’라고 여긴다. 너에게 만약 이런 관점이 있다면 너에게 체험이 없고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람이 생명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며 진정한 생명 진입이 있으려면 많은 정형을 장악하고 많은 정형에 들어가야 한다. 또한 자신에게 존재하는 많은 문제들을 알고 장악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의 단계나 혹은 자신에게 임한 그 일에서 어떤 정형에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하고, 그 정형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사람이 틀린 정형에서 유로하는 것이 어떤 패괴 성정인지, 그 패괴 성정의 실질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고 장악하지 못한다면 한편으로는 자신이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변화되어야 하고 자신을 알아야 하는지 모르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디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진리에 진입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너희들도 자주 그런 일에 부딪치게 되지 않는가? 내가 어떤 일을 말하면 너희는 듣고는 그저 그 일이 어떤 일이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어떤 정형을 가리키는지는 모르고 또 자신을 거기에 맞춰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아직 거기까지 체험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만약 네가 이런 것에 대해 좀 안다면, 예를 들어, 사람이 날마다 하는 본분에 관한 일이나, 본분하는 중에 유로되는 패괴 성정, 그리고 사람의 속셈과 교만한 성정, 건성으로 대충대충 하는 것, 그리고 본본할 때의 태도, 이렇게 너희와 연관이 있고 가장 근접한 것을 가지고 말하면 너희는 자신과 맞춰 볼 수 있겠지만 일부 더 깊은 것은 아마 맞춰보지 못할 것이다. 이럴 때가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자신과 맞춰지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냥 도리로 듣고 흘려보내게 된다. 자신과 맞추어 볼 수 있는 것은 어떻게 들어야 하겠는가? 그런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앞으로의 일상 생활에서 생명진입의 경로로 만들어야 합니다.) 네가 들었을 때 어떤 말들이 생명 진입의 경로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좀 전에 하나님께서 교통하신, 무엇이 사람의 정형인가에 관한 것과 자신의 정형을 장악해야만 진정으로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방향으로 진입하고 실행할지를 안다고 하신 부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 실질을 포함하여 자신이 한동안 있었던 일을 보는 관점, 어떤 속마음이 있는지, 적극적인 마음 상태인지 아니면 소극적인 정형인지에 대해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개인의 실행과 진입에서 길이 있게 됩니다.)

사람의 패괴 성정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두리뭉실한 말이다. 패괴 성정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패괴 성정을 아는 것에는 경로가 있다. 즉 너에게 어떤 일이 임했을 때 네 자신의 관점이 무엇인지, 너의 태도는 어떤지,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 어떤 입장에 서서 그 문제를 대하고 처리하고 대응할 것인지 이런 것들을 통해 자신을 알고 인식해야 한다. 자신을 인식하는 목적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자신의 정형을 더 잘 파악하고 성정이 변화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지금 어느 단계에 있는가? 자신이 서로 다른 시기나 혹은 서로 다른 일이 임했을 때 어떤 정형에 처해 있는지 너희는 알고 있는가? 얼마나 알고 있는가? 혹시 이런 방면에서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는가? 공부를 한 적이 있는가? 어떤 진입이라도 있느냐? 어느 정도로 진입하였느냐?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때는 실행할 수 있고 어떤 때는 하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태도가 매우 완고하여 오랫동안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서 발버둥치는 상태에 처하게 되는데, 어떤 것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해도 깊지 못하고 매우 얕은 것만 조금 인식하게 됩니다. 또 어떤 때는 심각한 문제로 대하지 않고 여전히 경만한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어떤 정형에 놓여 있는지도 몰랐고 느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한동안 체험하고 나서야 자신이 어떤 정형에 놓여 있는지 조금 의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실행의 길이 없는 그런 단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 더 말해 보아라. (어떤 때 큰일이 닥치면 자신에게서 유로되는 어떤 것은 잡을 수 있지만 좀 세부적이고 지엽적인 작은 일 같은 경우는 쉽게 홀시하면서 지나가고 잡지 못합니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자신이 바로 이런 정형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무감각합니다.) 무감각할 때가 많으냐? 아니면 느낌이 있을 때가 많으냐? (무감각할 때가 더 많습니다.) 무감각할 때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 어떤 상황에서 무감각한가? (예를 들면 어떤 작은 일들에서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패괴 성정을 유로하게 되고 그 패괴 성정으로 살게 됩니다. 그런 때면 무감각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무감각’이란 사람이 그것을 그저 일로만 여겨 처리하고 생명진입이나 혹은 패괴 성정과는 전혀 아무런 관련을 짓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무엇을 할 때, 독선적인 것을 유로했거나 혹은 다른 어떤 패괴 성정을 유로했을지라도 아예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 그냥 일만 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나 혹은 생명 진입에 관련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매우 쉽게 무감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가지 정형이다. 본분을 일로 여기고, 어떤 직업이나 임무, 책임으로 여기면서 그저 마비되어 하면서 생명 진입과는 연결을 시키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정형이다. 그냥 일만 하는 것이다. 그저 일로만 여기면서 일하고 있을 뿐, 생명 진입을 하는 어떤 경로나 혹은 어떤 방식으로는 여기지 않는다. 마치 일하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 일하는 것은 그냥 살림살이를 하면서 돈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는 수단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직업을 사업으로 생각하고 생명과 연결시키고 자신의 흥미와 취미,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꿈과 목표와 접목시킨다. 어떤 사람은 일하는 것을 책임으로만 여긴다. 일을 안 하면 안 되고 매일 제시간을 지키면서 칼같이 출근하고 퇴근한다. 일하는 것은 그저 돈 두푼을 벌기 위한 것이고, 돈을 벌면 집으로 가져가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그 어떤 인생의 목표나 꿈은 없으며, 큰일을 한다거나 하는 그런 마음이 없는데, 인성과 동떨어진 것이다. 그러면 너희들 대부분이 놓여 있는 정형이 이렇지 않은가? 생명 진입과 동떨어지고 하나님을 믿는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은가? 비록 의식성을 가진 기도나 자신을 아는 것 혹은 영 생활 방면에서는 말씀을 먹고 마시며, 예배를 드리거나 혹은 가끔씩 모여 앉아 교통을 해도 그냥 형식적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만약 시간이 너무 오래 되면 ‘내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맞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는가? 믿는 사람의 일부를 차지하는 사람이 맞나?’라는 느낌을 가진다. 단지 조그마한 가책을 받을 때에나 조금 돌이켜 보면서 생명 진입에 관해 생각해 볼 뿐, 그 밖에 평소에 일을 할 때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한다. 기쁠 때나 기분이 많이 좋을 때는 좀 잘하다가, 어느 날 밤잠을 제대로 못 자고 악몽을 꿔 심경이 불편해지면 여드레나 열흘씩 기분이 좌우된다. 그러고 나면 너의 본분의 효과에 영향을 주지만 마음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모호하고 멍청하게 지낸다. 그렇게 열흘씩, 보름씩 허비하면서 얼렁뚱땅 지나간다. 그럼 이런 정형에서 살고 있으면 생명 진입은 정체되어 전진을 멈춘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생명 진입이 정체되면 사람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하는 일과 모든 본분이 하나님을 흡족게 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렇게 확실하냐? 어떤 때 한동안 너는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별 문제가 생긴 적이 없어. 그냥 이렇게 해서 크게 잘못한 것도 없고, 이치에 벗어나는 일을 한 적도 없으며, 원칙을 범하는 일을 한 적도 없고, 또 하나님의 성품을 범하는 뚜렷한 악이나 나쁜 일을 한 적도 없잖아. 늙은 소처럼 계속 본분을 하고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가면서 일을 지체하지 않았고 하고 있는 일을 지금까지 그만둔 적도 없어. 마음도 많이 썼으니 이렇게 본분하면 돼.’라고 생각한다. 이 자체가 하나님을 건성으로 믿는 것이다. 혹은 흥미를 가지지 않거나 태만한 일종의 태도이다. 갑자기 어떤 일을 잘못했거나, 혹은 원칙을 어겨 책망을 한바탕 받게 되면 ‘아, 형벌과 심판이 임했구나.’라고 생각한다. 놀라서 정신 차리면 한 이틀은 정신을 가다듬고 하면서 각성한다. 그러면 정신을 가다듬은 그 이틀에는 생명 진입을 하는 정상적인 정형이 있었는가? 훈계와 책망이 임해야만 변화가 조금 있는데, 마치 송곳으로 찔러 앞으로 밀고 가는 것 같이 앞으로 조금 나아간다. 네가 앞으로 조금 나아가는 것이 너희 생명 진입에 영향이 되는가? 겉으로는 한 발 진보한 것 같이 보이고, 훈계와 책망, 심판과 형벌에 대해서는 조금 느끼는 것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주관적으로 보고 말한다면 사람이 자신의 패괴 성정과 자신이 놓여진 소극적이고 처진 각종 패괴 정형에 대해 아예 알지도 못하고 장악하지도 않으며, 전혀 세세하게 파보지도 않고 또한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는다면 생명 진입의 정상적인 정형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진리의 실제로 진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본분을 할 때 모든 일에서 다 원칙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것은 진리를 알고 있는 것이고 실제에 진입한 것이 아닌가요?”라고 말한다. 규례는 지키기 쉽고, 겉면의 행실도 지키기 쉽다. 예를 들면 너에게 매일 아침 기상 시간이 5시를 넘으면 안 되고 저녁에 취침 시간이 10시를 넘으면 안 된다고 하고, 수면 시간을 규정한 것이 바로 이런 원칙이고, 이런 시간이며, 이것이 일종의 원칙이라고 할 때, 너에게 시간을 지키라고 하면 네가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너에게 시간을 지키는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알라고 한다면 너는 알 수 있느냐? (없습니다) 왜 알지 못하느냐? (주관적으로 그런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저 피동적인 것 같습니다. 겉면의 어떤 추세의 구속을 받거나 혹은 떠밀려 가는 것 같습니다. 강제성적인 일종의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느냐? (마음에 어떤 주관적인 태도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다. 예를 들면 너에게 아침 5시에 기상하고 12시에 취침하라고 한다면 너는 의견이 없겠느냐? (있습니다.) 어떤 의견이 있겠는가? (너무 일찍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너무 일찍 일어난다.”라는 이 생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육체에서 나왔습니다.) 육체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왜 “너무 일찍 일어난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가? 여기에는 어떤 생각이 지배하고 있다. 어떤 생각이겠느냐? (나태한 것입니다.) 나태한 생각은 무엇이 지배한 것이냐? 그냥 나태한 것만 말했지 패괴 성정에 관련되지도 않는다. 나태한 것은 고생을 하기 싫은 것이다. 이것은 패괴 성정과 관련이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어떤 패괴 성정에 관련되느냐? 그럼 5시에 기상하라고 했을 때는 의견이 생기는데, 10시에 기상하라고 하면 의견이 있겠느냐? (없습니다.) 아무런 의견도 없다. ‘잘 됐어. 알아서 눈 뜰 때까지 잘 수 있구나.’라고 하면서 다들 좋아한다. 5시에 기상하라고 하면 ‘왜 맨날 이렇게 빨리 일어나야지? 남들은 다 8시 넘어서 일어나던데 우리는 왜 맨날 5시지? 너무 일찍이잖아!’라고 하면서 싫어하고 의견이 생긴다. 10시에 일어나도 된다고 하면 기뻐한다. ‘야! 너무 좋아. 드디어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구나! 맨날 일찍 일어나는 건 너무 힘들어! 일어나서 더는 바쁘게 일하지 않고 12시 넘어서 오후에 천천히 할 수 있으면 더 좋을텐데! 그러면 정말 편할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는 기쁘고 하나는 기쁘지 않은 것에서 어느 것이 맞느냐? (다 맞지 않습니다.) 다 맞지 않다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다 개인의 속셈과 목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가늠하는 기준이 없습니다. 자신의 육체 이익에 맞으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자신이 이득을 보면 마음이 흐뭇할 것인데, 5시에 기상하면 마음이 항상 언짢다. 이 두 가지 표현은 다 썩 좋지 않은데, 그럼 몇시에 기상하는 것이 좋은 표현인가? 8시? 만약 8시에 기상한다고 해도 어떤 게으름뱅이는 일어나기 싫어하면서 “8시도 너무 일찍이에요! 새들도 아직 안 나왔는데, 좀 더 자게 해 주세요!”라고 하면서 12시까지 실컷 자고 기상해서는 동서남북도 찾지 못한다. 이런 삶은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다. 그렇지? 우리 이 일을 가지고 사람의 패괴 성정을 말해보자. 사람의 이 패괴 성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먼저 패괴 성정의 대부분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말해 보자. 좋은 것이 있느냐? 긍정적인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왜 없느냐? (패괴 성정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대립되기 때문입니다.) 그 단어를 가지고 말하면 당연히 좋은 것이 없고 다 패괴된 것이다. 글을 놓고 하나씩 분석하고 따진다면 이 단어에는 틀림없이 긍정적인 것이 없다. ‘패괴 성정’이지 않은가, ‘패괴’라는 단어 자체가 원래 좋은 의미의 단어가 아닌 부정적 의미의 단어이다. 정말 글자만 놓고 말하면 좋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실질을 가지고 말한다면 패괴 성정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 5시에 기상하는 것과 10시에 기상하는 이 일을 가지고 예를 들어 말하자, 그러면 너희는 좀 더 알게 될 것이다. 5시에 기상하는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5시에 일어나면 저녁에 10시가 됐을 때 일찍 잘 수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잠 잘때 누우면 바로 잠들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쉽게 실면(失眠)하지 않는다. 일단 이런 휴식 시간은 인체의 생체리듬와 잘 맞고 인체의 자연법칙과도 잘 맞는다. 다시 말해, 네가 일찍 일어나면 일찍 잘 수 있는 것이다. 일찍 자면 밤을 지샐 필요가 없으니 인체에도 아주 좋다. 하지만 사람은 그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사람은 다 일찍 일어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5시면 한참 잘 자고 있을 때고, 이불 속도 따듯하다. 그때 일어나면 밖은 아주 춥고 아직 캄캄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고 재미 있게 놀 것도 없다. 뭘 먹어도 넘어가지 않는다. 몸의 각 부분의 느낌이나 심정이 찝찝하고 상쾌하지 않다. 하지만 그 시간에 일어나면 인체에는 확실히 좋다. 그저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10시에 기상하는 것은 어떤가? 인체의 자연법칙을 따라 봤을 때 10시에 기상하면 저녁에 몇 시가 되어야 졸리느냐? (새벽 두세 시입니다.) 새벽 두세 시가 되어야 졸린다, 그렇지? 아침 10시에 기상하고 저녁 10시에 취침하라고 하면 너는 잠들 수 있느냐? (잠들지 못합니다.) 잠들지 못하면 뭐하느냐? (그냥 누워 있습니다.) 그냥 누워만 있는다고 하는데, 그렇게 얌전한 사람이 있는가? 졸리지 않으면 어디에서 좀 더 지샐 것인지, 어디서 좀 더 놀 것인지를 궁리한다. 이것이 요즘 현대인의 삶이다. 이것도 건들고 저것도 건들면서 자지 않는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본연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버틴다. 몇시까지 버티다가 자려는 생각이 드는가? 12시가 넘어야 한다. 그렇지? 12시가 넘으면, 지금 안 자면 눈꺼풀에 성냥개비를 받쳐야 하니까 빨리 자야지 하고 누워 잔다. 그렇게 자다 보면 일어나기 싫어진다. 너무 늦게 잤는데 5시에 기상하려다가 ‘좀 더 자자.’라고 생각하고, 8시에 기상하려다가 또 ‘조금만 더 자자.’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자다 보면 11시, 12시까지 자면서 일어나지 못한다. 일어난 다음 다른 사람들이 물어본다. “너, 어디 갔었니?” “아니, 어디 안 갔는데?” “근데 눈이 왜 팬더가 된 거야? 어떻게 된 거야?”라고 한다. 이런 생활방식과 질서가 사람에게 좋은 점이 있느냐? 시간이 길어지면 좋겠느냐? 아니면 나쁘겠느냐? (나쁩니다.) 사실, 이런 것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다 체험한 것이다. 너무 늦은 시간까지 밤을 새고 일찍 일어나면 피곤하며 일어나고 싶지 않고 일어나면 계속 졸린다. 아침에 너무 늦게 일어나면 저녁에 잠이 오지 않는다. 잠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가? 그저 밤새 지새고 버텨야 한다. 이런 악순환이 오래 되면 몸에 자연적인 정상 생리 신진대사가 균형을 잃게 된다.

어찌 되었든 우리가 예를 들고 있는, 아침 5시에 기상하고 저녁 10시에 취침하는 이 규칙은 아주 좋은 것이다. 인체에도 참 좋지만 사람은 수용하지 못한다. 사람이 수용하지 못하는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네가 이 방면의 도리를 모르거나 이 방면의 상식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고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왜 수용하지 못하는가? 왜 사람은 그 시간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가? 왜 그런 방식과 규칙에 따라 살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은 긍정적인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것’이라는 매우 큰 이름표를 만들어 붙이는구나. 또 다른 견해는 없느냐?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켰기 때문에 사람은 심심하면 TV를 보거나 게임을 합니다. 그런 것들이 다 사람을 매혹시켰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늦게 자도 할 일이 없으니 그냥 일고여덟시면 잤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다 이런 것들에 매혹되었기 때문에 날밤을 지새게 되었고 생체리듬이 깨졌습니다.) 예전 사람들을 일찍자고 일찍 일어났고, 패괴 성정이 없었으며, 패괴 성정은 다 현대인들만의 것이고 젊은이들만의 것일 뿐,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는 없고, 선대들에게는 다 패괴 성정이 없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는 그런 것인가? 보라, 너희는 또 일에 빠졌다. 내가 너희에게 간단한 예를 하나 들면 너희는 바로 일에 빠지는데 이것은 어찌 된 일인가? 왜 늘 깨닫지 못하는가? 내가 예를 든 것에서, 사람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싫어하는데, 왜 이렇겠는가? 사람의 어떤 육체의 이익과 연관된다. 육체의 어떤 이익인가? 너희가 말해 보아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활 습관을 바꿔야 됩니다.) 사람의 어떤 육체의 이익과 관련되는 것이다. 사람은 고생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으며 육체를 배반하려고 하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려 하지 않는 것은 더 자고 싶어서가 아닌가? 더 자고 싶은 것은 육체가 좋아하는 것과 육체의 느낌을 따르고 싶어서가 아닌가? 그럼 일찍 일어나는 사람과 늦게 일어나는 사람의 이익의 차이는 어디 있는가? 육체가 편한 것과 불편한 것, 육체가 안일한 것과 안일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것은 사람 육체의 안일과 충돌이 생긴다. 충돌이 생기면 사람은 마음에서 꺼려하고 생각이 불쾌하다. 그 생각이 불쾌해지면 사람은 ‘일찍 일어나는 것이 몸에 좋다’는 것을 수용하겠는가? (그러지 못합니다.) 그런 말을 수용하지 못하고 그런 사실을 수용하지 못한다. 보라, 이렇게 작은 이익, 몇 시간짜리 이익도 사람은 버리지 못해 자신을 극복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며 자신이 자신에게 사고방식을 개선시켜야 하고 환경의 영향도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일어나자 늦잠 자고 싶지만 ‘안 돼! 부끄러우니까 빨리 일어나자.’라고 하면서 매일 그렇게 부득이하게 피동적이다. 일어날 때면 마음이 매우 불편하다. 사람의 이런 생각과 이런 정형을 너희는 세세하게 파보아라. 여기에는 어떤 것이 그런 것을 유발시켰는가? 그 속에 사람이 육체의 안일을 탐하는 것과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고 싶어하는 것과 또 일종의 나태한 생각과 방종하려는 생각이 있다. 한편으로는 인체의 정상 법칙을 고려하지 않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하는 본분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자신의 육체 이익에서부터 출발한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패괴 성정에는 무엇이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이 늘 육체를 방종하려 하고, 절제하려 하지 않고, 심지어 어떤 때 사람의 패괴 성정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정말 제멋대로인 것이다. 이렇게도 작은 일이 사람의 이익과 관련되는 것을 볼 때, 이 이익이 크냐? (크지 않습니다.) 크지 않다, 작다 못해 어느 정도인가? 사실 그 정도이다. 극복하다 보면 할 수 있는 것이다. 계속 더 자고 싶고 이불의 따듯함을 탐하는 것이고 이부자리를 떠나기 싫어하는 것이다. 요 정도의 작은 이익도 사람은 포기하기 힘들어한다. 요렇게 작은 이익인데도 네가 지켜야 할 원칙과 충돌될 때면 너는 마음에서 원망이 생기고 마음이 불쾌하다. 늘 ‘왜 한번도 자유롭지 못한 거지? 왜 한번도 마음대로 못하는 거야? 언제면 이런 환경을 떠나서 여드레나 열흘 좀 실컷 잘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늘 이런 생각이 나온다. 사람이 사는 것이 참 가련하지 않느냐? (가련합니다.) 사람은 가련하게 살고 있다.

이 정형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그러려면 매일 기도해야 한다. 아니면 알람이라도 켜놔야 하는가? 이런 일은 이같이 해결해야 한다. ‘너는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하여 본분에 충성심이 있어야 하고, 자기 육체의 애로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하며, 최대한 자신을 성숙하게 해야 하고, 안일을 탐하지 말고 고난을 받을 수 있게 달라져야 하며, 본분을 충성되게 하며 마음대로 하지 말고 자신을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을 절제하기란 쉽느냐? (쉽지 않습니다.) 왜 쉽지 않다고 하느냐? (사람이 절제하려 하지 않고 간섭받는 것을 싫어하며 자신을 방종시키기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절제할 줄 모르고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고 자제 능력이 안 되면 너무 어리다. 나이가 얼마든 막론하고 어린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는 성숙되지 못했구나. 나이도 꽤 있어 보이는데 왜 절제를 못하지? 보면 어리지는 않은데, 왜일까? 그냥 성장하지 못한 거고 아직 성숙되지 못한 반 어른이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을까?’라고 한다. 보라, 이렇게 작은 일이 사람의 이익에 관련되면 사람은 패괴 성정이 유로된다. 패괴 성정이 유로될 때에 필요한 것은 진리로 해결하고, 진리의 실제로 진입해야 하며, 상응되는 진리를 깨달아 그런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곧 상응되는 진리를 깨달아 상응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부지중에 성숙되고 커가면서 이 방면에서 변화가 있게 된다. 변화가 있는 동시에 사람은 자신의 애로를 극복하게 되고, 자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게 되며, 자신을 방종하는 것과 안일함을 탐하는 그런 타락된 생각을 극복하는 힘이 점점 더 커지게 된다. 그러면 그렇게 나약하거나 여리지 않게 된다. 너희에게는 이런 체험이 있는가?

방금 간단한 예를 들었다. 이렇게 작디작은 일에서 사람의 패괴 성정을 보았고, 사람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을 보게 되어 파내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파내면서 너는 자신이 어느 부류의 사람인지 발견할 수 있는가? 이런 패괴 성정을 파내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확실히 패괴된 사람이고 진리가 없는 사람이며 패괴 성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 않았는가? 이런 것을 장악한 다음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아라! 자신이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총결해 보아라!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패괴 성정을 파내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있는 서로 다른 정형을 인식하는 것을 통해 혹은 자신에게 임하는 서로 다른 일들에서 생기는 자신의 견해와 관점 그리고 태도를 인식하면서 자신이 비열한 소인배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인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악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교만 자대하며, 자신을 나타내기 좋아하고, 높은 자리에 앉고 다른 사람 위에 앉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을 보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한동안 파내다 보니 자신이 허위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또 어떤 사람은 한동안 파내다 보니 자신은 정말 쓸만한 데가 하나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전에는 자신이 재능도 좀 있고 능력도 있고, 업무에 능숙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정말 아무런 재능도 없고 쓸 만한 곳이 없어요! 게다가 일도 참 바보같이 하고 원칙도 없어요.”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한동안 파내면서 자신이 정말 속이 좁고, 좀스럽고, 정인군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다. 다른 사람이 조금만 터치해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의 말 속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도 안 되며, 다른 사람의 말 속에 자신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관련되면 안 되는데, 좀스럽게 따지고 참을성이 조금도 없으며 양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렇게 노력하고 중시하면 성과가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자신을 인식하는 데서 이런 성과를 얻은 다음엔 생명 진입에 도움이 있지 않겠느냐? (있습니다.) 어떤 도움들이 있느냐? (자신의 교만하고 자대하는 본성을 알게 될 때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알게 되면 찾고 구하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이런 것을 직시하지 못하면 사람은 전혀 구하고 찾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패괴 성정을 유로하는 상태에 놓여 있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만약 자신을 모르면 사실 자신의 처지가 아주 가련하다는 것을 모르고 인식하지 못하지만 본 다음에는 마음에 헤어나오려는 정형이 생기며, 진리를 찾고 구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정형이 생기게 됩니다.) 만약 사람이 자신을 참 위대하다고 느끼고, 정의감이 넘치고, 아량이 넓으며, 재능이 뛰어나다고 느끼며, 사람을 아주 잘 포용하고, 매우 착하고 진솔하며 타인에게 특히 충성되는, 이런 여러 가지 좋은 것은 자신에게서 다 찾아볼 수 있기도 하고 한 방면의 유로와 실제 상황을 찾아볼 수 있다고 느끼면서 자신에게 있는 패괴 성정은 곧 일반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교만이나 독선적인 것, 미워하는 것, 질투하는 것이고 이런 것은 다 별것 아닌 작은 결점으로 여기며, 그런 작은 흠 외에는 자신이 아주 완벽하고 타인보다 존귀하며, 사랑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꼼꼼하고 깨끗하며 고상하다고 여기는 이런 정형이 늘 사람 마음 속에 있다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진실하게 회개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떤 상황에 있어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을 인식하고 진정으로 엎드리면서 “하나님, 저는 패괴된 인간이고 옳은 게 아무것도 없는 인간입니다. 저는 사탄에게 매우 깊이 패괴되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저의 이익과 조금만 관련되어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 사람이며, 이기적이고 비열한 사람입니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언제면 이런 진실한 회개가 있을 수 있는가?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매우 잘나고 이쁘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자신이 미녀라고 생각하고 남자는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날 누군가가 “아이구! 거기에 점이 있네요! 그 점은 참 안 좋다는 말이 있는데…”라고 한다. 아직 더 말하지도 않고 구체적인 말은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 한 마디가 그에게 영향을 주고 타격을 주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완벽한 이미지를 깨뜨린다. 그의 마음은 말이 아니다. “내 얼굴에 점이 있다고! 너한테 있는 그렇게 많은 점은 왜 못보는 거야? 너한테는 더 많네!”라고 말한다. 이런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왜 이런 말을 하게 되는가? 어떤 정형이 이런 말을 만들어내고, 이런 기분을 만들어 낸 것이냐? (자신을 알지 못하는 정형입니다.) 아니다. 그런 사람도 평소에는 자신을 인식하면서 “저는 나쁩니다. 정말 삶이 실패입니다. 인성이 나쁘니 인성이 없습니다.”라고 한다. 그도 자신을 인식할 줄 아는데 왜 점에 관련된 그렇게 작은 일이 닥쳤을 때 그렇게 화나고 성나고 보복하려는 악독한 심리가 생기게 되었는가? 어떻게 유발된 것이겠느냐? (그 사람은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이 그에게 점이 있다면서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무엇을 건드렸는가?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수록 건드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주 작은 일도 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가시를 다친 것이다. 네가 그의 완벽한 이미지를 깨뜨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에게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네가 흠이나 의심을 가지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너는 어떻게 말해야 하겠는가? “어, 점이 있네요! 근데 그거 참 좋은 거예요. 들어봤는데, 점이 그 부분에 있으면 부귀의 상징이라서 다 누리지 못할 복이 있다고 하더군요! 참 좋은 운을 가지셨네요! 그 점이 없다면 운명에 무언가 빠졌을 텐데, 다행히도 그 점이 있었네요.” 이렇게 하면 그는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러니까! 원래 좀 잘 생겼는데 이런 점까지 있으니 나도 내가 좋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부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진작에 사주보는 사람이 운이 좋다고 했었는데, 당신이 역시 발견했군요! 다른 사람은 발견하지도 못하던데, 눈도 멀었지!’라고 하면서 기뻐한다! 이렇게 기뻐하는 사람이 전에 화를 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 맞는가? 같은 사람인데 왜 두 가지 다른 유로가 있는 것인가? 어떤 것이 패괴 성정이냐? (둘 다 입니다.) 둘 다이다. 어떤 것이 더 비열하냐? (두 번째입니다.) 왜 두 번째가 비열하냐? (너무 거짓됩니다. 자신도 피장파장이라는 것을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허위적이고 무지하며, 어리석고, 비열하고, 더럽고, 추하다. 그렇지? 일단 좋다고 말하면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인가? 좋고 나쁜 것이 사람의 말에 달렸는가? 사람의 말 한 마디로 결정되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기뻐하느냐? 이런 것을 어리석다고 한다. 왜 어리석다고 하는가? 자신도 남도 속이기 때문이다. 그 점 하나를 다른 사람이 좋게 말해주면 정말 좋은 것인가?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듣기 좋은 말 몇 마디 하는 것은 치켜주는 것이거나 네가 그런 말을 듣기 좋아하니 칭찬해 주어 좀 기쁘게 해 주면서 놀리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너는 왜 그렇게 좋아하는가? 너는 나쁠까 봐 두려워하고 안 좋은 것은 듣지 않으려 하며 사실을 존중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 너의 운명은 도대체 좋은지 나쁜지 아직 일생이 지나지도 않았으니 너 자신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안 좋다고 말하면 왜 그렇게 괴로워하는가? 심지어는 공격하고 미워하고 보복하려는 심리가 생긴다. 두어 마디 좋은 말을 하면 왜 그렇게 좋아 하는가? 심지어는 밥도 살 기세다. “정말 참 좋은 분이네요! 그 말은 금언(金言)이네요. 그 말은 꼭 이루어질 거예요! 저는 정말 좋은 운명인 거죠!”라고 하면서 자신의 성도 잊을 정도다. 이런 사람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게 아닌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어리석은 데다가 가련하기까지 하다. 말은 듣기 싫게 말했을지라도 그것은 사실이다. 사람의 이런 무지함과 어리석음, 사람의 각종 추한 얼굴의 서로 다른 모습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사람의 패괴 성정에서 온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운명과 자신이 앞으로 누릴 복과 삶에 대해 일종의 욕망이 있고 바람이 있다. 그 바람은 정당한 것인가? 아니면 부정당한 것인가? 그것이 어떻든 결론적으로, 사람이 이 일을 대할 때, 이런 일이 임했을 때 있게 되는 이런 태도, 흘러나오는 모든 것은 정당하지 않고, 인성에서 구비해야 할 이지와 양심이 아니고, 정상 인성이 살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이런 일을 대할 때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저를 좋다고 칭찬하면 입 다물 것이고, 제가 나쁘다고 말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예요. 냉정하게 처리할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런 의젓한 태도는 얼마나 좋은가? ‘난 패괴 성정이 없어! 욕심도 없고 얻으려는 것도 없어.’라고 하는 이런 것은 어떤가? 더 이성적이지 않은가? “저 사람 태도를 봐봐!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이성적이네. 자신의 운명의 호불호나 복을 받든 화를 입든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고, 아무런 구상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게 하네.”라고 하는 이런 태도는 어떤가? 잘 구별하지 못하겠지? 만약 이런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 너희는 간파하지 못한다. ‘저 사람 도대체 뭔 뜻이지? 무슨 태도지?’ 좀 더 끌어내고 좀 더 좋은 말을 하면서 계속하여 “그 점을 내가 여러 책에서 봤는데 정말 좋은 점이더라구요! 인터넷에서도 봤다니까요! 그리고 정말 그런 점이 있는 사람을 몇 명 봤는데 나중에 진짜 좋은 신랑을 만나고, 집에 돈도 많아 정말 잘 살면서 평생 다 누리지 못할 영화 부귀를 누리더라니까요! 정말 좋은 운명이네요!”라고 말하면서 계속 칭찬해 주고 또 칭찬해 주면, 마지막에 가서 그녀는 참지 못하고 “그래요? 정말 그래요? 그렇다면 이 점은 정말 가치가 있네요. 없어지면 안 되지! 하마터면 없애 버릴 뻔했네요.”라고 한다. 참지 못한다, 그렇지? 감추지 못한다. 사람은 아무리 감추어도 한 시기는 감출지 몰라도 평생 감추지는 못한다. 아무리 잘 감춘다 해도, 위장을 잘하고 꽁공 포장한다 할지라도 너의 패괴 성정은 감추지 못하고 포장하지 못한다. 네가 마음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머리로 어떻게 생각하고, 마음에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 없고 자신도 기만할 수 없다. 결국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을지라도 너는 조용할 때 마음으로 ‘나도 다른 사람이 나를 안 좋다고 하는 것은 싫어, 다른 사람이 칭찬해 줬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든 네가 유로를 했든 하지 않았든, 결론적으로 사람의 마음에서 생각하고 생기는 이런 모든 것은 강렬한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혹은 뚜렷하든 그렇지 않든 다 사람의 패괴 성정을 대표한다. 사람이 매우 자연스럽게 유로하는 것은 다 패괴 성정이다. 그러면 이런 패괴 성정은 아주 자연스럽게 유로된 것이 아닌가? 언제 어디서나 다 유로되지 않는가? 한순간 방심하고 말을 하여 자신의 마음속 깊은 것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고는 후회하며 ‘다음부터는 말을 적게 해야지.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은 법이야! 말을 하지 않으면 패괴 성정이 유로하지 않을 거잖아?’라고 생각한다. 일을 하다가 방심하면 또 잘못하게 되고 또 패괴 성정을 유로하게 되면서 자신의 속셈을 또 드러내게 된다. 그 속셈이 드러나는데 패괴 성정이 어떻게 또 드러난 거지? 언제 어디서나 막으려야 막을 수 없다. 그렇지? 그러므로 사람의 패괴 성정을 해결하지 않으면 그 어떤 요새도 그것이 유로하지 않도록 보장하지 못한다.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이 너에게 패괴 성정을 유로하지 않게 할 수 있는데, 유로하는 것이 이성적이고 양심과 이지가 있게 하며, 정상 인성의 유로가 되게 할 수 있다. 오로지 한 가지 방법만이 이를 보장할 수 있는데 어떤 방법이겠느냐? 억제하는 것이 방법이냐? (아닙니다.) 억제하는 것은 방법이 아니다. 절제하는 것도 방법이 아니다. 어떤 때 훈계와 책망을 받는 것은? 나흘이나 닷새에 한 번 훈계하고 책망하면 조금 해결되고, 열흘이나 보름에 한 번 훈계하고 책망하면 조금 해결되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그럼 어떤 때는 1년을 가도 한 번도 책망을 받지 않게 되는데, 이 패괴 성정은 해결하지 않을 것인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려면 사람이 패괴 성정을 발견했을 때, 그것이 어떤 문제인지 알아야 한다. 왜 이런 패괴 성정이 유로되는지, 왜 자신의 내면에는 여전히 이런 더럽고 비열하며 어리석고 무지한 행실과 생각들이 존재하는지, 심지어 언제 어디서나 유로되어 자신을 낯뜨겁고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하고, 체면이 깎이고 존엄을 잃게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방금 패괴 성정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말했는데, 우선 인식하고 해부해야 한다. 이런 패괴 성정이 어디서 왔는지를 해부하고 그다음 상응되는 실행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빈말을 하지 말고 방금 전의 그 일을 얘기해 보자. 미녀는 자신이 아주 이쁘고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얼굴의 점을 거론하니 싫어하고 자존심 상해한다. 자존심 상하고 패괴 성정이 유로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의 생각과 다르고 자신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 임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선 이런 일은 어떻게 대해야 인성이 있고 이성적인 것인가? 일단 냉정하게 분석을 해야 한다. ‘저 사람이 하는 말은 뭔 뜻이지? 나를 보고 하는 말인가? 나한테 보복하려는 건가? 어제 내가 좀 싫은 내색을 보였다고 오늘 나와 맞서는 거야?’ 일단 이 일을 분석하면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 어제 내가 한 마디 했는데 상처를 줬어. 근데 오늘 나와 맞서다니, 오늘 끝을 볼 거야!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나한테 잘하지 않으면 나도 질 수는 없지, 복수를 해야겠어.’ 이런 것은 무엇인가? 이런 것은 어떤 유로인가? 여전히 패괴 성정을 유로하는 것이다. 이런 패괴 성정의 유로는 실질을 해부하면 악독한 것이 아닌가? 성질은 악독한 것인데 그럼 어떤 행위인가? 보복하려는 생각이 있다. 속셈을 품고 보복하려 한다. 보복하는 그 행위의 성질은 무엇인가? 악독한 것이 아닌가? 악독한 본성이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악독한 본성이 없다면 보복하겠는가? 보복하지 않을 것이고 그럴 생각을 하지도 못할 것이다. 보복하려는 생각을 했을 때 나오는 말은 “너나 점이 있지! 넌 점이 그렇게 많으면서!”라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일종의 공격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가? 이런 공격과 보복은 긍정적인가 아니면 부정적인가? 좋은 의미이냐 아니면 폄하하는 것이냐? (폄하하는 것입니다.) 혹시 중성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 단어는 매우 뚜렷하다. 매우 분명하게 갈라놓았다. 이것은 폄하이다. 보복하고 공격하는 것은 사탄의 악독한 본성에서 나온 일종의 행위이고 유로이다. 이것은 패괴 성정이 아니냐? (맞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이 있다. ‘네가 잘하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는 못 있지! 나를 이렇게 대하면 나도 그대로 할 거야! 너도 안 봐 주는데 내가 왜 봐 줘! 네가 내 체면을 안 봐 주는데 내가 왜 봐 줘?’ 이것은 어떤 생각인가? 이것도 보복하려는 생각이 아닌가? 이런 사상 관점은 일반인이 볼 때, 성립되는 것이고 맞는 것이 아닌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다’ 그리고 한 마디 더 있다. ‘당한 만큼 그대로 갚아 준다’. 이런 것들은 이방인 가운데서 다 성립되는 이치이고, 어디서든 꺼내 들 수 있는 것이며, 정인군자의 행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에 가져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진리 깨닫기를 추구하고 성정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가져와 보면 이런 말은 맞는 것인가? 이런 생각과 관점이 맞는 것이냐? (틀렸습니다.) 왜 틀렸는가? 이런 것들은 다 어디서 왔는가? 사탄에게서 온 것인데, 이를 의심해서는 안 되고 의문을 품을 것도 없다. 사탄의 무엇에서 온 것인가? 악독한 본성이다. 여기에는 독을 품고 있으며 사탄의 악독하고 추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본성 실질이 들어 있고, 이런 본성 실질의 관점, 생각, 유로, 말, 심지어 표현 행위까지 들어 있다. 이런 것의 성질은 무엇인가? 사탄에게 속한 것이 아닌가? 사탄에게 속한 것이다. 사탄에게 속한 이런 것이 인성에 어울리느냐? 진리에 맞느냐? 진리 실제에 맞느냐?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있어야 할 행실과 사상 관점이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너에게 이런 행실과 생각이 있고 이런 유로가 있을 때 너의 이런 행실, 생각, 유로들이 다 하나님 뜻에 맞는 것인가? 이런 것들이 사탄에게서 온 것이라면 그것은 인성과 양심과 이지에 맞는 것이냐? (맞지 않습니다.) 이제는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이런 것을 알기 전에 너희는 이런 행실과 생각을 해도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가? 또한 어떻게 여기는가? ‘내가 보복하고, 억압하며 내가 하는 이런 말들은 다 정당한 거야! 나는 광명정대하고, 나는 정인군자다. 나는 떳떳해, 내가 너를 미워하고 보복하고 뭐라고 하는 것은 다 드러내놓고 하는 것이다. 나는 공격해도 다 드러내놓고 하지, 뒤통수치는 비열한 소인배처럼은 안 해, 음험한 소인배처럼 안 해! 나는 정인군자가 되고 당당하게 하는 거야.’라면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런 것들과 이런 이론은 사람의 마음에 가득 차고 점유되어 있어, 사람의 생각과 행위, 하는 방법과 사람의 각종 정형, 관점을 주도하고 있다. 그럼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반대로 사람은 이렇게 떳떳하게 내놓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과 사람의 생각에 맞다고 여기는 것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고 지키고 있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그럼 이제 근원을 찾았는가? 사람은 왜 진정한 성정 변화에 도달하지 못하는가? 왜 진정으로 자신의 어려운 점을 해결하지 못하는가? 너희는 이 길을 따라 파보아라! 어떤 것들이 자신이 타당한 것이고, 당연한 이치에 맞고 인정 세태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런 이유와 행실, 관점, 논리 사상을 자신이 떳떳하게 내놓을 수 있고, 광명정대하고 당당하다고 여기는 행위와 생각들을 마음에 두고 패괴 성정이 아닌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보아라! 너희는 잘 파보아라! 더 많지 않느냐? (많습니다.) 아직 더 많다.

다시 좀 전의 그 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가 그런 말을 들은 다음 정상 인성에 따르면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어떻게 대하겠는가?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것과 듣기 좋은 것, 이런 두 가지 서로 다른 말을 마땅히 어떻게 대해야 가장 정확하고 가장 인성이 있으며 가장 이성적인 표현과 유로이겠는가? 좀 전에 우리가 말한 사람의 내면의 그런 생각들이 사람이 맞다고 여기든 아니면 틀리다고 여기든 다 사탄에게서 비롯된 것인데 그것은 정확하지 않고 진리가 아니며 다 패괴 성정에서 나온 것이다. 네가 생각한 것이 아무리 맞다고 해도, 네가 아무리 많은 사람이 찬성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해도, 그것은 진리에서 온 것이 아니고, 진리 실제에서 유로하고 살아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이 일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인성이 있게 대해야 하는가? 너희들은 이런 일에 부딪친 적이 있겠지? 너를 칭찬해 주면 좋아서 웃음꽃이 활짝 피고 네가 좀 좋지 않다고 하면 화가 나서 눈이 다 벌게지겠지? 이런 일은 늘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늘 부딪치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점에 불과한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갑자기 너의 정수리에 흰 머리가 난 것을 발견하고는 “아유! 흰 머리카락 하나 나왔네!”라고 말하면 너는 마음이 철렁 내려앉아 “흰 머리? 내가 늙었단 말이야? 너나 늙었겠지! 넌 흰 머리카락 두 개나 있으면서 뭐!”라고 말해야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일을 마땅히 어떻게 대해야 이성적이고 정상 인성이 있겠는가? 잘 생각해 보아라. 먼저 악독한 보복 심리가 생겨서는 안 된다. 이는 하나의 태도이다. 그 외에 너를 칭찬하는 말에 너에게 날아오를 것 같은 느낌이 없어야 하는데 이것은 한 가지 정형이다. 그 밖에 너를 나쁘게 말하는 데 대해 반감이 없고 보복할 심리가 없으며 싫어하지 않고 마땅히 정확한 태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너를 칭찬하든 하지 않든 혹은 너를 좋지 않다고 해도 네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정확한 태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무슨 태도인가? 우선 먼저 냉정해져야 하는데 똑바로 앉아 단정히 하고 허리를 펴고 깊게 호흡한 다음 그에게 물어본다. “자매님, 저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무슨 뜻입니까? 저한테 점이 생긴 게 자매님에게 영향을 주었습니까? 누구인들 얼굴에 점이 몇 개씩 없겠어요? 설마 점을 저한테서만 봤다는 건가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한테 있는 점은 왜 보지 못했나요? 어떻게 하필 저한테만 그래요? 저는 이 점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냥 말하지 않았을 뿐이에요. 저는 순리에 따르면서 생긴 대로 받아들이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생김새를 고쳐서는 안 되고, 순복해야 하며, 마땅히 하나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 다 좋으시니 저는 바꾸기를 원치 않습니다. 당신이 오늘 저에게 좋지 않다고 해도 저는 여전히 피조물이고 당신이 저를 칭찬해도 저는 여전히 피조물입니다. 저의 좋고 나쁨은 다 하나님 손에 달린 것이지 사람은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점 하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단언하는 한두 마디 말에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관상책에 말한 것이 어디 맞는 것이 있습니까? 당신은 왜 그렇게 미신적입니까? 점 하나가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까? 점 하나가 사람의 운명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은 작은 일이니 점에 관해서 말하지 말고 어떻게 본분을 잘할 것인지, 우리가 어떤 패괴 성정의 유로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말합시다. 그러면 얼마나 좋나요? 당신이 저의 점에 대해 말하는데, 저는 흥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저 자신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고 인식하지 못한 저의 어느 방면의 패괴 성정의 유로에 대해 말해 준다면 저는 흥미를 가질 것입니다. 점에 관한 건 언급하지 말고 마땅히 패괴 성정의 유로에 관한 일을 언급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는 좋아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런 일을 교통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 진입에 다 진보가 있고 더욱 깊이 진입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점을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것을 끼니로 때울 수도 없고 본분하는 데 효과를 줄 수도 없는데, 말해 봤자 쓸데없습니다. 당신이 이 점이 좋지 않다고 말해도 저는 개의치 않을 것이고 당신이 그것이 좋다고 해도 저는 마음에 두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저를 칭찬하려고 한다면 아마 무슨 목적이 있을 것인데 혹시 저를 구슬려서 뭘 해달라는 거 아닙니까? 만약 좋은 말로 구슬려서 일을 시키려 한다면 그렇게 할 필요없이 그냥 도와드리겠습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면 도와드리고 만약 도울 수 없는 것이라면 저도 당신에게 건의를 제기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이런 방식으로 저와 교제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면 가식적이고 저도 마음속으로 역겹고 닭살이 돋습니다. 당신이 제게 점 하나가 좋지 않다고 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저를 시험하여 시험에 빠지게 하고 혈기를 부린 다음 보복하고 당신을 공격하라는 것입니까? 저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저는 사탄의 궤계에 빠지지 않습니다. 점 하나가 아니라 온 얼굴에 점이 났다 해도 저는 당신이 비웃을까 두렵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어떠하냐? (좋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무엇이라 하는가? 이것을 사탄을 반격하는 것이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틈만 생기면 이런 쓸데없는 일을 말하는데 이것을 무엇이라 하는가? 허튼소리이다. 틈만 나면 허튼소리를 한다. ‘허튼소리’란 말은 듣기 거북하고 품위가 없다. 그러면 그가 말한 그런 일은 품위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가 한 그 일도 품위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틈만 나면 늘 “네 눈썹이 참 예쁘게 생겼네!” “너, 이가 이쁘다, 누구누구 닮았네.” “네 몸매는 정말 멋지구나!” “너는 복 있게 생겼어.”라고 허튼소리를 하는데, 이런 말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가 실력이 좀 있고 생김새가 좀 괜찮고 쓸 만한 가치가 좀 있으면 기어코 접근하고 각종 비열한 수단으로 가까이해서 치켜세우고 칭찬하고 아첨하고 따라다니는데, 얼마나 역겨운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속셈과 뻔뻔스럽고 비열한 수단으로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만족시키는데, 역겹지 않으냐? (역겹습니다.) 그럼 이런 일들에 부딪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 것이 맞겠는가? 시간이 있으면 그와 교통하고, 시간이 없으면 그에게 심하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이렇게 말하면 힘이 있지 않으냐? (너무 지나칩니다.) 너무 ‘영적’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실, 이런 일은 해결하기가 쉽다. 이런 일에 부딪치면 한 마디를 해서 그런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그럼 어떤 말을 해야 하는가? “허튼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이 한 마디가 어떤가? 품위가 있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현대에 사는 문명한 사람들이다. 지적이고 지식도 있고 신분도 있는 사람들이니 이런 거친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거친 말이나 비열한 말을 하면 사람들이 얕잡아보기에 품위 있는 말을 찾아서 해야 한다. “당신은 왜 그렇게 미신적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힘이 없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당신은 왜 그렇게 한가해요? 말같은 말은 못해요? 그런 말 해서 뭐해요?” 몇 마디인가? 세 마디이지? 보통 할 말이 없을 때,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데, 하는 말들이 너무 허위적이고 닭살이 돋아 듣기 싫고 듣고 싶지도 않으면, 이 몇 마디로 대답하면 그만이다. 여유가 없으니 상세하게 상대해 줄 필요가 없다. 시간이 된다면, 앉아서 그와 계속 교통을 하라. 교통이라고 하면 여기에는 패괴 성정이 없고 혈기가 없고 천성적인 것들이 없고 공격하거나 보복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없고 사람을 혐오케 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교통을 시작하면 네가 유로하는 것은 정상 인성에 부합되고 양심과 이지에 부합되고 진리 실제가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덕이 되고 유익을 얻게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은 다 긍정적인 유로이다. 그럼 부정적인 유로는 어떤 표현들이 있는가? 종합해 보아라. (보복하고 공격하고 이는 이로 갚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것들이 있는가? 딱 봐도 틀리는 것들은 말하지 말고 사람의 전통 관념에 맞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말해 보아라. “당한 만큼 그대로 갚아 준다” “당당하게 하지 비열하게는 하지 않을 거야. 뒷통수 치기는 싫어.” 사람이 맞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은 진리에 부합되느냐?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은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 분별하기 좋은 것은 사실 보기만 해도 일반적으로 알기 때문에 잘못할 리가 없다. 바로 이렇게 맞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쉽게 지키면서 그것을 진리로 삼고 진리의 실제로 삼아 지켜나간다. 그러고는 ‘내가 살아낸 것은 진리 실제이고 정상 인성이야. 난 정말 완벽하고 착하고 광명정대하고 떳떳해!’라고 여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자주 범하는 잘못이다. 혈기, 천성, 육체에 속하고 인위적이고 윤리 강상(綱常)과 도덕에 속한 이런 것들을 진리와 진리 실제로 삼아 행동에 옮기면서 진리를 대신한다.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하는데, 혈기에서 나온 것, 천성에서 나온 것들을 깊이 파헤쳐 이런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 이런 것들을 해결하면 네가 평소에 유로한 것들이 어떤 것은 진리 실제에 부합되게 된다. 진리 실제에 부합되는 것은 정상 인성에서 유로하는 것이어서 양심과 이지의 기준이 있다. 진리 실제에 부합되는 이런 유로는 패괴 성정이 아니고 혈기가 아니며 천성이 아니다.

이전에 한 사람이 너에게 해를 입혔다면 네가 그를 어떻게 대해야 가장 정당하고 진리 실제에 부합되는가? 되받아 똑같은 방법과 수단으로 그를 대하면 인성에 맞는가? 인성에 맞지 않지만 그것은 아주 ‘정당’하다. 그가 너에게 해를 입혔으니 너도 그에게 해를 입히고 보복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은 그가 너에게 해를 입힌 적이 있으니 너도 당연히 그에게 해를 입히고 보복해도 된다는 것이다. 네가 그에게 아주 비참하게 당했으니 네가 어떤 방식으로 그에게 보복하고 제재하고 다스린다 해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다 아주 당연하고 합리적인 것이고 질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무엇인가? 혈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가 너에게 해를 입힌 그런 행동은 사탄 패괴 본성의 유로이다. 하지만 네가 그에게 보복을 가한다면 그의 행동과 같은 것이 아니냐? 네가 그에게 보복하려는 심리와 출발점, 그리고 근원은 그와 같은 것이 아니냐? (같습니다.) 그러면 행동으로 옮겼을 때 그 일의 성질은 혈기에 속하는 것이 아니냐? (맞습니다.) 천성과 혈기에 속하고 사탄에게 속한다. 그럼, 사탄에게 속하고 혈기에 속하는 이상, 그런 행동을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 일을 하는 출발점, 속셈과 동기를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 (바꿔야 합니다.) 어떻게 바꾸겠는가? 네가 보기에, 해를 크게 끼친 것이 아닌 작은 일이어서 네가 증오할 정도나 보복할 정도가 되지 않았을 때, 너는 “둘이 허심탄회하게 얘기 좀 하죠, 그때 왜 저에게 해를 입혔는지 시원하게 얘기해 봐요. 사실대로 말하면 제가 용서해 드리고 너그럽게 대할게요. 너그러이 받아들이죠. 그렇지만 저한테 꼭 사과는 해야 돼요. 그러면 이 일은 없던 일로 치죠.” 네가 찜찜하기는 하지만 아직 너의 이익에 관련되지 않았고 네가 목숨 걸고 보복할 정도가 되지 않았기에 원한을 쌓지 않고 내려놓을 수 있고 혈기대로 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인성에 따라 정당하고 냉정하게 그 일을 처리할 수 있어 잘 풀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원한이 너무 깊은 상황에서 보복하려는 생각이 있고 네가 이가 갈릴 정도가 되어 고통스러운 지경에까지 이른다면 참을 수 있겠는가?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켜 ‘난 보복하지 않을 거야. 혈기대로 하지 않고 이성적이고 정상 인성대로 살며 진리 실제대로 살아야 돼. 난 보복하지 않고 천성을 유로하지 않고, 사탄의 악독한 본성대로 보복해 그와 똑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을 거야.’라고 할 수 있느냐? 일이 어느 지경인지에 따라 서로 다른 정형이 있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들은 어떤 상황에 부딪쳐 봤었는가? 너의 밥 한 술을 더 먹어서 불이익을 조금 봤다거나 한 술을 더 먹는 이런 작은 일이다. 고기 한 점이 원래는 네 것이었는데, 그가 집어가서 네가 한 점을 적게 먹는 그런 일은 괜찮다. 그런 것은 원한이 쌓이는 일이 아니다. 혹은 네 물건을 훔쳐갔는데, 네가 또 새 것을 살 수 있으면 원한이 쌓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너는 고기 한 점이나 자존심 때문에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고 그렇게 하면 품격이 떨어지는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너는 아주 이성적으로 그 일을 처리하게 된다. 이성적으로 일 처리를 한다고 해서 네가 이 방면의 진리 실제를 살아냈다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한 가지 정형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대하지 못하는 일에서 네가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처리하고 혈기나 패괴를 유로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진리가 필요하다. 오직 진리만이 사람의 본성에서 유로되는 문제, 사람의 패괴 성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런 유로는 이치를 좀 말하거나 또는 앉아서 마음을 나눈다고 패괴 성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모두 사람의 패괴 성정과 패괴 본성에 관련되는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어서 다른 사람이 좀 건드리거나 듣기 거북한 말을 해도 허허 웃으며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은 속이 좁아 내려놓지 못하고 한평생 속에 쌓아둔다. 이 두 부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에게 패괴 성정이 있는가? 사실은 다 있다. 사람이 천성적으로 성격이 다를 뿐이다. 사실, 성격은 사람의 패괴 성정에 영향을 주지 않고 패괴 성정의 깊고 얕은 정도를 결정하지 못한다. 사람의 소양, 교육, 가정 환경도 패괴 성정의 깊고 얕음을 결정하지 못한다. 그럼 사람이 배우는 것과 연관이 있는가, 없는가? 어떤 사람들은 “저는 문학을 배워서 책을 많이 읽었어요. 그래서 품위가 있고 소양도 있고 기본이 되어 있고 지식도 있어서 인내력이 좀 강한 편이고 타인에 대해 이해심도 많고 속도 넓은 편이어서 일에 부딪치면 스스로 풀 수 있어요. 이치로 스스로를 달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저의 패괴 성정은 아마 그렇게 깊지 않을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음악을 배웠어요. 좀 특수한 인재라고 할 수 있죠! 음악은 사람의 심령을 적셔 주어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있죠. 음절들이 사람의 마음에 와 닿을 때마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변화되고 마음 상태가 바뀌죠. 장르가 다른 음악을 듣다 보면 서로 다른 마음 상태와 다른 분위기를 가져다주죠. 그래서 저는 기분이 꿀꿀하면 음악을 듣고 풀 때가 많아요. 그러면 저의 패괴 성정은 점차적으로 가라앉고 생각도 단순해지고 패괴 실질도 음악을 듣다 보면 음악에 빠져드는 정도에 따라 차츰차츰 해결돼요.” 노래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노랫소리나 곡은 사람 마음을 즐겁게 해요. 저는 노래를 하면 할수록, 제 노랫소리가 더 감미롭다고 느껴지고 노래 실력이 점점 더 늘고 업무 수준도 더 빨리 제고됩니다. 업무 수준이 제고될수록 기분도 좋아지고 정형도 좋아져요. 정형이 좋아지다 보면 패괴 성정도 점점 적어지지 않겠어요?”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패괴 성정에 대한 인식과 이해에 잘못된 부분이 많고 오해가 많은데, 교육을 좀 받은 사람이면 패괴 성정이 적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이가 좀 지긋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젊었을 때 고생을 많이 하다 보니 생활이 규칙적이고 깨끗하고 소박하고 절약하게 되더라구요. 낭비하지도 않고 생활이 규칙적이어서 패괴 성정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젊은 사람들은 사회 환경 영향을 많이 받아 마약도 하고 사악한 사회 풍조도 따르고 남녀 불륜의 관계나 음란한 일을 저지르죠. 사회 풍기에 너무 깊게 물들어 패괴 성정이 깊죠! 파헤치기가 힘들어요!’ 패괴 성정에 대해 잘못되고 그릇된 그런 인식과 이해로, 사람은 자신의 패괴 실질과 자신의 사탄 본성에 대해 서로 다른 느낌이 있게 되었다. 이런 느낌으로 인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비록 패괴 성정이 있고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패역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래도 그나마 괜찮다고 여긴다. 특히 자신이 규칙에 따르고 착실하고 바르게 정상적으로 규칙적인 영적 생활을 하고 거기에 또 영적인 이치를 좀 말할 줄 알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성과가 좀 있고 패괴 성정도 대폭 해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정형이 괜찮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본분에서 성과나 성취가 좀 있을 때, 자신이 이미 아주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영에 속하는 사람이어서 이미 온전케 되고 정결케 되어 성결한 인류가 되었고 이미 패괴 성정이 없어졌다고 여긴다. 이런 것은 다 사람이 패괴 성정과 사탄의 본성 실질에 대해 깊은 인식이 없는 상황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착각이 아닌가? 이런 착각은 사람이 패괴 성정을 해결하고 자신의 애로 사항을 해결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가장 큰 장애물이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오늘 이렇게 교통했는데, 좀 알아들었는가? 핵심을 잡았는가? 어떤 문제를 발견했는가? 사람의 패괴 성정을 해결하지 않으면 사람은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패괴 성정이 있는지 모르고 자신의 사탄 본성 실질에 도대체 어떤 것들이 있고 그 실질이 도대체 어떤 것이고 무엇인지 모를 때 자신이 패괴된 인류라고 진실하게 인정할 수 있겠느냐? (없습니다.) 사람이 참으로 자신이 사탄에게 속하고 패괴되었고 또한 패괴된 인류 중의 일원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실하게 회개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진실하게 회개하지 못할 때, 늘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자신은 아주 존엄 있고 품격 있고 신분이 있는 사람이고 아주 존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늘 이런 생각과 정형들이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그럼 이런 정형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요약해서 말한다면 사람의 패괴 성정을 해결하지 않으면 그 어떤 부정적인 정형도 해결하기가 어려워진다. 다시 말하면 너에게 한 방면의 패괴 성정이 있는데 해결하지 않으면 너는 부정적인 정형에서 나오기 어렵게 되고 그 정형을 벗어나기도 어렵게 된다. 네가 자신의 그 정형이 맞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지키고 고집하면서 자신의 그런 정형이 아주 맞고 정확하고 진리에 부합된다고 여기기에 거기에서 나오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럼 어느 때 벗어날 수 있는가? 언젠가 네가 이런 정형으로 인해 하나님을 대적하고 오해하고, 또 일에 부딪쳤을 때 자신이 하나님과 합하지 못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공격하고 하나님의 정확성에 대해 부인하고 게다가 하나님은 진리이고 하나님은 다 옳다는 것도 부인하며 또 하나님은 모든 긍정적인 사물의 실제이며 근원이라는 것도 부인하면서 자신이 다 맞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정형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소위 올바른 정형이고 정확한 정형이라는 너의 생각도 확실치가 않은 것이고 절대적으로 맞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어느 때 정형이 틀렸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가? 바로 네가 고수하고 있는 그 관점이 진리에 부합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서로 대립되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할 때이다. 즉, 하나님이 너에 대해 요구가 있을 때, 진리가 너에게 임할 때, 사실이 너에게 임할 때, 네가 고수하던 그런 정형으로 인해 네가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하고 순복할 수 없게 되고 너의 그 정형과 그런 실행 방식으로 하나님을 흡족게 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네가 고수하던 그런 정형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실증한다. 너희들은 이런 상황에 부딪쳐 보았는가? 자신이 가장 정확하다고 여겨 왔던 것이 사실로 임할 때, 스스로 의심이 들고 길이 없다고 느끼고 하나님에 대해 오해와 저항이 생기게 된다. 이럴 때가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물론, 너는 네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분명 고수하지 않을 것이다. 즉, 네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면 너는 계속 그런 정형 속에 살게 된다. 네가 맞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살아가고 그렇게 고집하고 지키다가 결국 어느 날엔가 사실이 임하면 그 일이 맞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이 맞지 않다는 것이 드러날 때, 너희들은 맞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의식할 때가 몇 번 있었는가? 네가 만약 대부분의 경우 맞지 않다는 것을 의식할 수 있는데, 마음속으로는 계속 저항하고 그 정형에서 나오지 못하고 자신의 이유를 말하고 그 일이 흐지부지 지나가고 없어진다면 너는 이 방면에 진입이 없고 해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그 일의 근원과 뿌리가 여전히 너의 속에 남아 있게 된다. 비록 겉으로 네가 더는 유로하지 않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겠지만 근원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럼, 어느 때 네가 하나님에 대해 저항이 없겠는가? 네가 그 정형을 돌려세울 때이다. 너는 이 방면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근원을 해결하고 파내야 한다. 즉, 자신이 고수하던 그 관점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자신이 분명히 알고 파헤치고 해결해야 옳은 정형에 들어갈 수 있다. 네가 옳은 정형에 들어갈 때, 하나님에 대해 오해가 없게 되고 공격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때, 너의 이 방면의 패역이 해결된 것이다. 이 방면의 패역이 해결되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알게 되면 이때, 네가 하는 것이 하나님과 합하지 않겠는가? 이 일에서 너는 하나님과 합하게 되면 네가 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겠는가? 그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행동과 실행 방법은 진리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너는 이 일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이때 너는 옳은 정형 속에 살게 된다. 네가 옳은 정형 속에 살 때, 네가 유로하고 살아내는 것은 패괴가 아니라 정상 인성이고 또 정상 인성과 이성(理性)에도 부합되는 것이며 진리의 실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 대다수는 여기까지 체험하지 못해 아직 그다지 잘 모르고 흐릿할 것이고 두리뭉실한 뜻만 좀 알고 이치상으로는 이해가 되고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하고 또 못 알아들은 것 같기도 할 것이다. 알아들은 것은 이치 부분이고 알아듣지 못한 것은 정형이나 실제 부분이다. 천천히 체험하거라. 꼭 파헤쳐 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즉, 일이 임할 때의 너의 정형이다. 그럼 정형에는 몇 가지가 포함되느냐? 말해 보거라. (생각, 관점, 상태, 정서, 입장 이 다섯 가지가 포함됩니다.) 대체적으로 도리상 알아들었구나. 그럼 이 일을 어떻게 겪어야 하느냐? (일이 임할 때, 자신이 유로한 생각들이 어떤 패괴 본성에 속하는지 성찰하고, 자신의 사상 관점을 인식하고 자신이 유로한 마음 상태를 인식해야 합니다. 이 방면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다.

너희들은 집 생각을 했는가? 집 생각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 집을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가? 그 장소를 생각하는 것인가? 아니다. 가족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 (네.) 대부분 다 부모가 있다. 그럼, 너희는 부모가 그리울 때, 무슨 생각을 하느냐? (맛있는 음식을 해 준 것이나 배려해 주었던 것을 생각합니다.) 부모를 그리워하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너희는 자주 부모를 그리워하는 정형에 있는가? 부모가 그리울 때를 말해 보라, 이것은 현실적인 체험이다. (외국에 갓 나왔을 때, 엄마와 언니가 제일 그리웠습니다. 전에는 그들이 곁에 있어서 계속 그들을 의지해 왔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갓 나왔을 때는 하나님께 의지할 줄 몰라 계속 그들이 그리웠었습니다. 하지만 외국에서 많이 체험하고 나니 지금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고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더 이상 그들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음, 이건 두 가지 정형이다. 한 가지는 무엇인가? 자주 집 생각을 하고 엄마와 언니를 그리워하는 정형이다. 이 정형에서 세부적인 것을 말해 보아라. 그들이 생각날 때, ‘난 이것도 저것도 다 할 줄 모르는데, 그들이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면서 의지할 데가 없다고 느껴지고 가족이 옆에 없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의지할 데가 없다는 정형이다. 그렇지? 아침에 눈을 뜨면 생각하고 저녁 잠 자리에 눕기 전에도 생각한다. 이렇게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정형에 있다. 그렇지? (네.) 그럼,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가? 환경이 바뀌어 그들과 떨어져 있어서 마음속에 그들에 대한 그리움이나 의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의지하던 것이 습관이 되었고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생활해 오던 것이 습관이 된 것이다.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것들이 생명 속에서 이미 떨어질 수 없게 되어 계속 그리운 것이다. 이런 정형에 처해 있다. 그럼 지금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떤 정형에 처해 있는 것이냐? (본분을 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구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환경을 배설하여 저를 많이 변화시켜 주셨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배우게 해 주셔서 마음에 위로가 많이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 방면은 하나님의 주재를 알아가는 것을 통해 사람의 운명도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사명이 있고 저에게도 저의 사명이 있어서 지금은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말해 보아라, 이 문제는 해결되었느냐? (잠시 해결되었습니다.) 잠시 해결되었다. 만약 어느 날, 한 자매를 만났는데 딱 너의 어머니처럼 생겼다면 너는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또 그리워할 것입니다.) 한 자매를 만났는데, 생김새도 그렇고 또 말하는 어투까지 정말 언니랑 너무 닮았다. 혹은 함께 생활할 때 너를 대하는 방식이나 배려하고 보살펴 주는 것이 너를 여동생으로 대한다면 언니도 이렇게 날 대해줬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말하다가 또 그리워할 것이다. 한번 생각했다 하면 며칠 가고 또 그리워하는 정형에 빠지게 된다. 생각해 보더니 ‘아니지. 사람한테 의지하면 안 돼. 그 자매가 언니처럼 생기긴 했어도 언니는 아니니까. 그럼 언니로 삼을까? 그럼 그리워할 필요도 없고 눈앞에 있는 거니까. 그럼 해결된 거잖아?’라고 한다. 그 뒤로 또 생각하게 되는데, 사실, 해결되지 못한 것이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근원에서부터 해결하겠는가?

너는 가족을 그리워할 때 어떤 것을 생각하는가? 한 사람이 그리울 때, 집 생각이 나고 가족이 그리울 때, 분명 가슴 아팠던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다 즐거웠던 일 그리고 자신이 기억할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일, 행복한 일만 생각한다. 그렇지? 보통, 사람이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렸을 때 어머니가 어떻게 자신을 보살피고 아껴 줬고, 병이 났을 때 어떻게 병원에 데려 가고, 링거를 맞을 때 옆에서 얼마나 오래도록 지켜 주었고, 어린 친구한테 업신여김을 당했을 때 어머니가 나서서 속이 후련하게 내 편을 들어줬고 어떻게 보살피고 사랑해 주었는지 그런 좋은 일만 생각한다. 그래서 생각을 멈추지 못하고 생각할수록 빠져들고 점점 더 생각하게 되어 자제를 하지 못할 정도가 된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도 다 마찬가지예요!”라고 하면 “안 돼요. 그래도 보고 싶어요.”라고 했다가 생각해 보고는 “그럼 하나님께 기도할게요.”라고 한다. 기도를 하다 보면 생각하지 않지만 내일 가서 생각하다 보면 또 생각난다! 생각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하나는 나이가 적어서 그렇고 다른 하나는 집문을 나선 적이 없어서 그렇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지금까지 어머니와 떨어진 적이 없어요. 어머니 바지 가랭이에 묶여 있었어요. 어머니가 어디 가면 따라다녔으니까요. 전 어머니가 입는 몸에 붙는 솜옷처럼 어머니 곁을 떠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집문을 나서니 생각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생각하는 것도 정상이에요.” 사람의 육체는 바로 이렇고 사람도 이렇다. 패괴된 인류는 다 정 속에서 산다. 이렇게 살아야 사람이지, 가족도 그리워하지 않고 생각하지도 않고 기대는 곳도 없다면 ‘내가 사람이야? 그럼 동물과 같은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가족의 정도 없고 애틋한 정도 없고 그리워하지도 않는다면 사람은 인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 관점은 어떤가? 생각하고 안 하고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생각해도 틀리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틀리지 않다. 어떤 사람은 독립적이고 어떤 사람은 부모에게 매달려 있다. 하지만 너희는 오늘 여기에 앉아 있고 집을 떠나 부모를 떠나 본분을 하고 있다. 우선 사람이 본분을 하려는 마음이 있고 본분하려는 태도도 바르고 본분할 심지도 있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심지도 있다. 심지는 있지만 사람의 애로 사항은 힘을 바짝 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바짝 노력해서 형식적으로 해냈다고 해서 패괴 성정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치적으로 다 알고 있다. 그럼 이 일을 어떻게 근원으로부터 해결해야 하겠는가? 그의 나쁜 면을 생각하면 그리워하지 않게 된다. 이 일은 해결하기 쉽지 않은가? ‘한 번은 내가 한 시간 집에 늦게 들어갔다고 어머니가 나한테 벽을 마주서서 벌을 세워 반성하라고 하면서 밥도 주지 않았어. 어머니는 나빠! 벌을 줬으니!’ ‘한 번은 시험에서 60점 맞았다고 날 발로 차면서 벌을 줬었지. 자지도 못하게 하고 밥도 세 끼나 못 먹게 했어. 어머닌 참 나빠! 너무 사나워! 날 심하게 단속하니까!’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생각하지 말자!’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며칠은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 생각해 보면 ‘그래도 어머니가 가장 친근해. 누구랑 마음을 좀 터놓으려고 해도 그럴 사람도 없고 다른 사람과 어리광을 부리고 떼를 쓰려고 해도 누가 받아주겠어? 받아줄 사람이 없으니. 그래도 “세상엔 어머니가 제일 좋아.” 생각 안 할 수가 없어!’ 또 이틀이나 생각해 보더니 ‘그래도 어머니 나쁜 점을 생각해야 돼. 한 번은 어머니가 날 한바탕 호되게 때렸었지. 친구랑 다퉈서 선생님 말을 안 듣는다고 벌을 섰었는데, 선생님이 어머니를 불러오는 바람에 어머니가 체면이 깎였다고 집에 와서 날 한바탕 때렸어. 정말 막무가내야. 선생님도 어머니도 다 날 이해해 주지 않고 어떻게 된 건지 묻지도 않고 날 한바탕 때린 거야. 그래 놓고는 잘못했다고 반성하라고 했어. 어머니는 나빠. 생각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톱질하는 식으로 생각이 왔다 갔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아무리 해도 생각을 멈추지는 못하고 계속 생각한다. 혈연관계가 있기 때문에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안 되고 자주 생각한다. 위로로 삼아도 좋고 의지로 삼아도 좋고 무엇으로 삼든 늘 생각한다. 자신도 모르게 독립생활을 2~3년 하다 보니 자라나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정말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누가 너에게 누구랑 가장 친하냐고 물으면 공식적인 대답은 이렇게 한다. “하나님과 가장 친해요. 하나님은 저의 가장 친근한 분이에요!” 또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고는 ‘하나님이 어디에 있지? 난 보지도 못했잖아. 그래도 어머니가 가장 친해. 어머니가 날 제일 아껴 줘. 난 어머니 몸에서 났으니까. 어머니는 제일 날 사랑하고 이해해 주고 날 가장 잘 알아주는 분이야. 내가 가장 어려울 때, 가장 고통스러울 때, 어머니가 내 곁에서 위로해 주고 도와주고 보살펴 줬어. 지금 병이 났는데 보살펴 주는 사람도 없어. 하나님이 좋다고는 해도 현실적이지 못하잖아.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지? 마음속에 있지.’라고 한다. 스스로 위로는 하지만 그래도 현실적이지 못하다고 느낀다. 하나님이 가장 친하다고 말하는 것도 그마나 머리가 맑을 때 스스로 하는 위선적인 말이다. 사실,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어머니가 가장 친한 사람이라고 여긴다. 왜 그런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도 어머니가 인도한 거야, 어머니가 없었으면 나도 없었어.’ 사람의 패괴 성정이 해결되지 않고 영적인 생명이 어느 정도 자라나지 않으면 어떤 때는 구호로 외칠 수는 있지만 그 일을 영원히 하지는 못한다. 그 원인은 너에게 그 분량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얼마만큼 힘이 있으면 그만큼 큰 일을 할 수 있고, 얼마만큼 큰 분량이 있으면 그만큼 큰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다. 네가 진리 실제를 얼마만큼 깨달았으면 진리 실제에 그만큼 진입한 것이고 진리 실제를 그만큼 살아낸 것이며, 이에 따라 너의 패괴 성정의 유로도 그만큼 해결될 수 있고 자신의 어려운 점도 그만큼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은 서로 대응되는 것이다. 어느 날엔가 네가 더 이상 어머니나 부모가 가장 좋은 분이라고 여기지 않고 그들도 패괴된 인류 중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너는 더는 가족의 눈길로 그들을 대하지 않을 것이고 더는 육체의 각도에서 그들을 대하지 않을 것이며,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의 각도에서 그들을 대할 것이다. 그들의 처세와 사람됨됨이, 하나님을 믿는 데에 대한 그들의 관점, 세상에 대한 그들의 관점, 그들이 일을 처리할 때의 관점이나 하나님을 대하는 관점을 보게 될 때, 너는 그들이 도대체 좋은 사람인지 아니면 나쁜 사람인지 분명하게 보게 된다. 만약 그때가 되어 그들이 너와 같이 다 패괴 성정이 있는 사람이고 또 그들에게 있는 많은 것들과 많은 점들이 너로 하여금 탄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메스껍게 하고 비하하게 하고 멸시하게 하여, 네가 정말로 역겹다고 느끼고 혐오스럽다고 느끼게 되면, 너는 더는 그들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고, 더는 지금처럼 떨어지지 못할 것 같지 않고, 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어질 것이고, 또 마음속에 그들을 가장 친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완전히 정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되어 진정 정에서, 가족의 정에서 벗어나게 된다. 네가 가족의 정과 육체의 정에서 벗어날 때, 너는 이런 것들이 사람이 가장 귀중히 여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때면 너는 오히려 이런 가족의 정, 가정이나 가족이 네가 진리를 깨닫고 이런 정을 벗어나는 데에 있어서 걸림돌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들이 너와 그런 가족 관계가 있고 육체 관계가 있기에 너를 마비시키고 너를 잘못 인도하며 그들이 좋다고 생각하게 하며 그들이 가장 좋고 가장 친하고 너를 제일 보살펴 주고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한 것임을 알게 된다. 또 너를 마비시키고 너를 잘못 인도하여 그들이 도대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 네가 여기에서 벗어났을 때, 우연히 그들이 생각나도 이전처럼 가슴을 도려내 듯 그들이 그립고 걱정이 되겠는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너는 “저는 어머니와는 떨어질 수 없어요. 저를 가장 아껴 주시고 저를 가장 사랑하시고 저를 가장 잘 보살펴 주고 아껴 주시는 분이 어머니예요.”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이런 깨달음이 있을 때, 그들이 생각난다 해도 눈물을 흘리겠는가? 울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어려운 점이 있는 문제나 일에서 만약 이 방면의 진리를 얻지 못하였고 이 방면의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였다면 너는 이런 어려움, 이런 정형 안에 빠지게 되어 영원히 나올 수가 없다. 만약 네가 이 방면의 어려움과 그릇된 정형을 너의 생명 진입의 일부분이라고 여겨 진리 실제로 이것을 해결하고 대한다면 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그릇된 정형이나 어려움 속에서 나오게 되어 부지중에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너는 자신이 그들과 그다지 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본성 실질도 더 뚜렷이 볼 수 있으며 심지어 그들을 부류로 나눌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우리 엄마는 마귀이다! 우리 아버지는 마귀이다!’ ‘우리 아버지는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진리를 싫어한다, 우리 엄마는 무골호인이다. 우리 엄마는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 ‘우리 엄마는 큰소리만 칠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 엄마는 위선적인 사람이다.’ ‘우리 엄마는 악인이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는 진리의 편에 서서 그들과 선을 분명하게 긋게 되는데,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이다. 네가 그들과 선을 분명히 긋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별할 수 있을 때면 여기에 정이 남아 있겠는가? 혈육간의 정이 있겠는가? 육체의 것들이 있겠는가? 그럼 이런 정에 관한 일을 네가 칼로 베듯 끊을 필요가 있는가? 억제할 필요가 있는가? 그럼 이런 어려움이 해결될 때 어떤 과정이 있는가? 억제할 필요가 있는가? 억울함을 당할 필요가 있는가? 껍질을 한층 벗겨 낼 필요가 있는가? 수술할 필요가 있는가? 다른 사람이 너의 생각을 설득할 필요가 있는가?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다. 보잘것없는 일이다! 그럼 다시 얘기해 보자, 그들을 그리워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진리를 구해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말이고 빈말이다. 실제적인 것을 좀 말해 보아라. (하나님 말씀에 결부시켜 그들의 실질을 꿰뚫어 보고 그 실질에서 그들을 분별하게 되면 혈육간의 정을 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 실질을 분별하고 본성 실질에서 분별과 인식이 있어야 한다. 네가 먼저 혈육의 정, 육체 관계에서 나와 누구에 대한 정이 제일 깊으면 그 사람을 먼저 해부하고 인식하면 된다. 이 해결 방법이 어떤가? (좋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니 차마 그러지 못하겠어요! 얼마나 독하면 자신과 정이 제일 깊은 사람부터 해부할 수 있어요? 듣기만 해도 오싹하고 섬뜩하고 가슴이 서늘합니다!” 네가 만약 이런 분량이 없다면 일단은 분별하지 말고 그리워하면서 연락하며 관계를 유지해도 된다. 분별하라고 하여 관계를 끊으라는 것이 아니고 모자 사이, 모녀 사이를 단절하라는 것이 아니고 그들과 선을 분명히 그으라는 것도 아니며 그들을 비판하라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은 그러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그럼 좀 늦게 해도 된다. 너에게 충분한 분량이 있어서, 이런 시련을 감당할 수 있을 때, 혼자서 자발적으로 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때 이런 실제에 진입해도 늦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무의미한 고통을 많이 받았다. 옆에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그것은 헛수고이고 쓸데없는 고통이다. 쌤통이다! 왜 쌤통이라 하는가? 이 일이 만약 다른 사람에게 임하여 그 두 사람 사이가 모녀나 가족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그런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정형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관계가 있기에 그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다. 봐라, 그는 혼자서는 이것을 간파할 수 없다. 만약 그가 미리 간파했다면 일찍 벗어나지 않았겠는가? 그럼 이런 고통을 받을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에 사람이 괴롭고 눈물 흘리고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지만 어떤 고생은 가족이나 친척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자업자득이고 대가가 없으며 기억해 줄 사람도 없다. 바로 쌤통이다! 자기 스스로 인식하게 되는 날이 오면 너는 헤어나오게 되고 전에 그런 고통을 겪었던 것이 무지하고 우매하게 느껴지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이 눈이 멀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서 자신의 미련함을 탓한다. 이 일은 해결하기가 쉽다. 그렇지? 해결이 되었느냐? (길이 보입니다. 해결되었습니다.) 줄거리를 얘기했는데, 뜻은 모두 알아들었겠지? (알겠습니다.) 알겠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알겠다는 것은 바로 알아들었다는 뜻이고, 알아들었다는 것은 바로 알고 이해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뜻이지? (네.) 빈말만 하는구나. 무엇이 빈말인가? 바로 이 말이 쓸데없는 말이고 소용없는 말이라는 뜻이다. 조금 전에 너희들에게 무엇을 물어보았느냐? (정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었냐고 물으셨습니다.) 해결되었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길은 아직 실제적으로 겪지 못했습니다. 단지 이런 일이 임할 경우 참고할 수 있는 근거가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뜻이다.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했는데, 실제적인 일이든 아니면 너희들이 생각하는 길을 말했든 다만 너희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즉, 이런 일이 임하거나 한 가지 일이 임할 때마다, 모두 해결할 길이 있고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행위적인 문제가 아니고 논법의 문제도 아니며 실제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네가 진입하게 되고 얻게 되는 것이다. 네가 진입하지 않고 빈 구호나 규칙으로 삼아 지키면서 듣는 데서 끝난다면 너는 이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 네가 해결하지 못하면 벗어나지 못한다. ‘해결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것인가? 해결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에 부딪쳤을 때 길이 있고, 어떻게 할지, 어떻게 실행하고 대응할지 알았고, 추측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뜻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럼, 너희는 왜 말하지 못하느냐? 그러면서 “알았습니다. 해결했습니다. 깨달았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젠 알았습니다.”라는 말만 무더기로 하는구나. 이번엔 정말 해결되었고 깨달은 것이 맞느냐? 길이 있으면 된다. 내가 말한 것이 네가 듣기에 한 가지 일이라고 해도 좋고 도리라고 해도 좋다. 말을 얼마나 했든, 예를 얼마나 들었든, 네가 듣고 나서 어느 방면에 관한 일이고 어느 방면의 일은 어떻게 해결하고 길은 무엇인지 알면, 네가 그 방향대로 해 나가고 실행하면서 점차적으로 진입하면 된다. 1~2년에 좀 벗어버리고 2~3년에 또 좀 벗어버리고 3~5년에 예상한 효과에 도달하지 못했으면 계속 노력하면 된다. 어쨌든 이 길이 맞고 내가 이미 진입하여 정형이 점점 좋은 방향으로, 좋은 효과를 가져오는 방향으로 발전하면 되는 것이다. 길이 맞으면 정말 해결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정형에 대해, 패괴 성정에 대해 교통했다. 그리고 또 어떻게 진리 실제에 진입할 것인지, 일에 부딪치면 어떻게 정확하게 대할 것인지, 마땅히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어떻게 자신의 패괴 성정을 해부하고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교통했는데, 조금씩 해결하여라.

생명 진입에 관한 이 일, 이 공과는 언제까지나 보완해야 한다. 언제 보완하고 어느 때 시작하든 늦지 않다. 그럼 언제가 늦은 때인가? 죽을 때가 되면 늦은 것이다. 아직 살아만 있다면 늦지 않았다. 너희는 지금 살아 있느냐 아니면 죽었느냐? (살아 있습니다.) 정말 살아 있느냐? (예.) 확신하느냐? 숨이 붙어 있기만 하면 살아 있는 것이고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영어로 이런 말이 있다. 바로 “난 여전히 살아 있다”라는 말이다. 혼자 가만히 있을 때면 자신이 마비되거나 혹은 어떤 일이 임하면 어찌 할 바를 모르거나 혹은 이미 이 사회의 조류에 휘말려 들어갔거나 혹은 자신이 이미 너무 타락에 빠졌다고 늘 생각되면 자신을 바늘로 찔러 보거나 혹은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다 보면 ‘아, 난 그래도 아직 살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건 무슨 뜻인가? 마음이 아직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으니 마땅히 추구해야 하고 사람답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타락되어 세상을 따랐고 사악한 조류 속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다시 정신 차리고 일어서서 더는 타락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서양인들은 참 도를 찾지 못해 삶에 대해, 인생에 대해 아주 막막하다. 그래서 그들은 말을 해도 탄식하면서 소극적이고 답답해한다. 즉, 의지할 데 없는 그런 감정이나 정서가 안에 있어서 늘 자신이 사는 것이 사람 같지 않다고 느끼지만 또 반드시 이렇게 살아가야 하고 귀신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살아가야 하며 동물이든 짐승이든 다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되는가? 방법이 없다.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 길이 없어 사는 것이 가련하다. 너희들은 지금 이런가? 너희들이 만약 어느 날엔가 한숨을 쉬면서 “아, 난 아직 살아 있구나. 마음이 아직 안 죽었어.”라고 하는 지경에서 살게 되면 느낌이 어떻겠는가? 이미 아주 위험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놓고 말하면 이미 아주 위험한 것이다. 너희는 절대 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야, 내가 아직 살아 있구나. 육체는 껍데기만 남아 시체나 다름없지만, 마음은 아직 살아 있구나. 마음에 그나마 아직 소망이나 꿈 같은 것이 조금 남아 있네. 아직 살아서 이 육체를 지탱하고 있구나.” 절대 이 지경에까지 가면 안 된다! 그 지경에까지 가면 이미 구원받기 힘들다. 지금 우리 상태는 아직 괜찮다. 그들은 송곳으로 찔러야 느낌이 좀 있지만, 너희는 바늘로 찔러도 조금 느낌이 있지 않느냐? (있습니다.) 그럼 그나마 괜찮다. 그것은 너희들이 아직 깨어 있고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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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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