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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편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존엄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명정(命定)이고 하나님의 주재이지 사람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습니다. 천성적으로 마음이 착하고 성실하며 늘 업신여김을 당하고 온순해서 딱 하나님을 믿을 사람입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저는 목청이 좋아 천성적으로 노래할 재목감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런 말들이 맞는가? (틀렸습니다.) 어디가 틀렸는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든, 무슨 본분을 하든, 어떤 특기가 있든, 하나님이 택한 사람인지의 여부에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의 주재 가운데에 있다. 사람의 운명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에 사람이 어디에 갈 수 있고 어디에 갈 수 없는지, 매일 어디에서 생활하고 어느 해에 어디에서 생활할지, 어느 해에 또 어디 가서 무엇을 할지, 언제가 전환점이 될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일찍이 예정해 놓은 것이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너의 이전 몇 세대까지도 하나님은 이미 다 안배해 놓았고, 금생에 어느 해에, 누구 집에서 태어나고 부모가 누구일지, 어느 날에 이 단계 역사를 받아들여 하나님 앞에 오고 언제부터 본분을 할지, 어떤 특기가 있고 키가 얼마나 될지, 어떤 생김새이고 어떤 목소리일지, 어떤 춤을 출 줄 알고 장차 어떤 본분을 할지도 일찍이 정해 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좀 맹목적이지 않습니까? 좀 막연하지 않습니까?” 막연한가? (막연하지 않습니다.) 막연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막연하지 않다면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영 안에 강렬한 반응이 있어야 하고 감동이 있어야 하며 또한 강렬하고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래야 막연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맞는가?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이 하신 이상, 우리가 아주 분명하고 뚜렷하게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전생이나 내세는 볼 수 없다 해도 최소한 금생의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거라도 봐야죠.” 이런 것을 볼 필요가 있는가? 정상적인 사유가 있는 사람, 정상 인성과 이지 그리고 양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성인이 되었을 때, 오늘까지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하나하나 겪어 왔는지 돌이켜 보아라.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느 하나라도 너의 타산대로 되었는지 앉아서 조용히 되돌아 보는 것도 괜찮다.

만약 네가 “저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많은 일들은 제가 스스로 타산하고 계획해 온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인정하지 않고 맞서며 내기를 한다면 지금부터 시작해서 앞으로의 2년 계획을 하나하나 적어 봐라.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할 계획이고, 이번 달은 이 일을 해서 어떤 목표에 도달하고 다음 달은 또 어떤 일을 해서 어떤 목표에 도달할 거야.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잘 거야!’라고 적어 놓고 나서 날마다 시간에 맞춰 자신의 목표와 계획에 따라 하면서 2년 후에 몇 가지를 실현하고 몇 가지가 목표에 도달하고 너의 소망대로 현실로 이루어졌는지 지켜 봐라. 어떤 사람은 사소한 일에 집착하기 좋아하고 맞서기 좋아한다. ‘뭐든지 다 하나님이 안배하셨다고 하는데 두고 볼 거야, 얼마나 많은 일이 하나님이 안배해 놓으신 것이고 얼마나 많은 일이 나 혼자 계획해서 한 것인지.’ 그럼 한번 맞서 봐라, 매일마다 그 계획대로 생활하면서 너의 뜻대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는지, 너의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되는지, 네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너의 상상보다 더 좋은 일이 얼마나 되는지, 또 너의 생각보다 더 나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되는지 다 기록해 봐라. 너무 멀리까지 계획할 필요는 없다. 만약 20년 내의 일을 계획한다면 보통 사람은 그만한 두뇌가 없고 그만한 능력이 없으며 또 그렇게 먼 일에 대해 전면적으로 기획하지 못하고 계획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디까지나 아무런 초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2년 내의 일은 짧은 기간이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건강을 어떻게 챙길지, 머릿결을 어떻게 가꿀지, 키와 체중을 어떻게 관리할지, 자신의 기능을 어떻게 키울지, 그리고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읽을지, 노래를 얼마나 외울지, 생명이 어느 정도로 자라날지를 다 적어 봐라. 2년이 지나서 네가 이 기록을 꺼내 보면 사실이 다 드러난다. 상상해 봐라, 마지막이 어떤 결과이겠는가? 네가 상상하거나 예상치도 못한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떤 일들이 네가 상상하거나 예상치도 못한 것인가? 네가 어떤 일들을 예상할 수 있는가? (어떤 일도 예상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좀 무책임하고 아직 너무 이르다. 왜냐하면 지금부터 2년 사이의 시간 동안 아직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모두 흐리멍덩하게 이렇게 지내왔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에 느낌이 조금 있을 것이다. ‘많은 일들은 다 하나님이 안배하신 거야. 하지만 구체적인 일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고 하나님의 주재를 확실히 보지 못했어.’ 그럼 향후 2년 내의 일을 네가 잘 짐작해 보고 계획해 보라, 그다음 도대체 어떤 일이 정말 하나님이 안배해 놓은 것인지를 보라. 그런 일들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주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네가 계획하든 하지 않든, 이런 일들을 참답게 대하든 그렇지 않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참으로 하나님을 알아 가기를 추구하고 진리를 깨닫기를 추구한다면 2년이 아니라 2개월 동안 발생한 많은 일에서도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고, 하나님이 너의 매일의 생활을 주재하고 안배하고 있다는 것을 각기 다른 정도로 영 안에서 느끼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다음 달부터 아침 몇 시에 일어나고 저녁 몇 시에 자며, 하루에 영적 수양은 몇 시간 하고 본분하는 시간 외에 자신이 무엇을 하겠다고 계획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갑자기 발생하면 두 달 동안의 모든 계획이 전부 깨진다. 네가 수그러들지 않고 다시 계획하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 또 발생한다. 이렇게 여러 번 계획하다가 너는 마침내 분명히 알게 된다. ‘휴, 계획하지 말아야겠어. 계획할 새도 없이 바뀌어 버리니까. 사람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손에 있으니 사람은 마음대로 계획하지 말아야 돼.’ 너는 매일 자신의 생활에 규칙이 있게 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안배할 수 있고, 매일의 본분을 잘 하고, 시시각각 하나님 앞에서 살며, 자신이 매일 한 일과 지나친 것 그리고 깨달은 것을 반성해 볼 수는 있지만, 내일이나 모레 무엇을 해야 하고 장래에 무엇을 해야 할지는 계획할 수 없다. 너에게는 단지 하나의 소망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주재에 순복하고 매일 하나님이 안배한 환경과 하나님이 준 생활에 순복하고 즐겁고 평안하게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 돼.’ 너에게 이런 마음 상태가 있다면 부지 중에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주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주재되어 있고 사람의 일생도 모두 하나님의 손에 주재되어 있다는 이 말은 좀 과장된 것 같고 빈말인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너의 매일, 매 시기, 매 단계를 하나님이 인솔하고 있고 매일의 생활을 주재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진실하고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면 “하나님이 사람의 운명을 주재하고 있다”라는 이 말을 다시 하기가 아주 쉽지 않겠는가?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리고 매일의 생활마다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장악되어 있고 자신의 타산과 안배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되고 진정 느끼게 될 때 자신의 일생과 사람의 한평생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장악되어 있음을 느끼는 것이 어렵겠는가? 하나님의 주재와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를 체험하는 것은 세밀한 일이어서 어떤 일들은 사람이 경력(역주: 체험)이 얕으면 짧은 기간 내에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많이 겪고 체험하게 되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방인에게는 “오십에 천명을 안다”는 말이 있다. 즉 사람이 20세가 되어 금방 세상을 접하고 체험하기 시작해서부터 40세가 되면 좀 깨닫고 별로 버둥거리지 않으며 50세가 되면 천명을 알게 된다. 그때 뒤돌아보면서 ‘이 30여 년 동안 세상을 떠돌며 힘들게 일했는데, 쉽지 않았어! 결혼하고 가업을 일구고 자녀를 낳아 기른 것이 어느 하나도 내 계획과 타산대로 된 게 없어.’라고 생각한다. 천명을 알고 깨닫고 나서는 버둥대지 않는다. 50세면 사실 사람이 버둥대지 않는 연령이다. 버둥대는 나이의 때는 깨닫지 못해서 어리석다. 사람의 한평생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장악되어 있음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늘 버둥대려 하고, 자신에게 능력이 있고 어떤 특기와 자본이 있어서 고위급 간부가 될 수 있고 큰 돈을 벌 수 있으며 지위가 있을 수 있고 명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늘 목표가 있고 수그러들지 않으며 한 번 더 겨뤄 보고 시험해 보고 맞서 보려 한다. 나이가 오십이 되면 버둥댈 힘도 없고 지치기도 했고 이러한 일들을 꿰뚫어 보게 되는데, 꿰뚫어 보면 버둥대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류의 운명을 주재한다. 이방인이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하나님이 주재하는 방식은 같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깨달으면 이런 일에 대해 점차적으로 환히 알고 분명히 알게 된다. 인생은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님이 인류를 주재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의 이 한평생은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일에 대해 흐리멍덩하지 않게 된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기껏해야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버둥거리지 말고 순리에 맡기자! 자녀들이야 뭐, “다 제 복을 타고 나는” 거니까, 상관치 말자, 자기들 스스로 버둥거리라지. 그러다가 오십이 되면 천명을 알고 버둥대지 않을 거야. 사람은 대대로 다 이렇게 지내왔어. 모두가 발버둥 쳐 봐야 돼. 몇 년 버둥대고 나면 그만두겠지. 나이 들면 발버둥 칠 수도 없고 천명도 알고 나면 많이 얌전해져서 그렇게 오만하거나 방자하지 않고 많이 듬직해질 거야.’ 이방인들은 기껏해야 여기까지만 알 뿐이다. 그들이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오십에 천명을 안다” 해서 사람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의 운명은 하늘이 정한다”는 것을 믿는다 해서 사람이 하늘의 뜻에 순복한다고 할 수 있는가? 네가 하나님 앞에 오지 않고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이런 것을 알아도 쓸모없다. 이런 것을 알면 단지 버둥거리지 않을 뿐이다. 어차피 버둥거릴 수 없으니 버둥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진리를 깨달은 것은 아니다.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려면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야 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말씀, 진리, 생명의 공급을 받아들여야 이 모든 비밀을 깨달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50~60세, 70~80세까지 살면서 늙어갈수록 버둥거리지는 않지만 ‘사람이 사는 건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왜 사는 걸까? 사람이 세상에 한 번 왔다가 그저 이렇게 가는 거야? 이렇게 끝나면 다야? 그럴 리가!’라고 생각하며 더 알고 싶어 하고 내려놓지 못한다. 이방인들이 죽을 때를 보면 다 내려놓지 못하고 이것저것 걱정한다. 즉 여한을 안고 떠나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다음 생에 태어나도 여전하다. 가련하지 않은가? 한 세대 또 한 세대 그저 이렇게 가련하게 왔다가 가고, 갔다가 또 오면서 한 무리 또 한 무리 이렇게 이어간다. 살아가는 사람은 죽은 사람을 보내고 또 새로 태어난 사람에 의해 보내진다. 흐리멍덩하게 이렇게 여한을 품고 무덤 속에 들어가는데, 다시 오면 어떠한가? 하나님 앞에 오지 않으면 여전히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너희는 다르다. 너희에게 주어진 이 기회는 너무나 좋다. 말세에 하나님이 공급하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복이 있다. 말세에 하나님은 모든 비밀을 다 열어 놓았다. 하나님은 3단계 역사를 하여 인류를 구원하고 경영하는 취지 등 각 방면의 이상(異象)을 인류에게 다 공개하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또한 이런 말씀들을 받아들였고 이런 말씀에서 많은 비밀을 알게 되었으며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런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주 별하늘, 천문 지리 그리고 주역팔괘(周易八卦)를 알거나 과학 연구를 하는 것보다 가치가 있지 않는가? 그런 것을 아는 사람은 마지막에 죽을 때 여한이 없겠는가? 죽을 때가 될수록 여한이 남지 않겠는가? 그가 그렇게 많이 알고 있는데 여한이 남을 게 뭐가 있겠는가? 지구는 얼마나 크고 동에서 서까지 몇 걸음인지, 지구 끝은 어디에 있는지, 지축은 어디에 있는지, 지구핵은 비어 있는지, 지구 표면에는 물이 얼마큼 분포되어 있는지, 산과 나무는 얼마나 되고 육지는 얼마나 되는지, 각종 나무는 몇 종류가 있는지, 각종 생물은 모두 몇 종류로 나뉘고 어떤 계절에 생겨서 자라며 모두 어느 위치에 분포되어 있는지를 다 분명히 알고 있고, 매일 밤에 얼마나 많은 별들이 나오고 어느 시간에 나오는지, 언제 달이 둥글어지고 이지러지는지를 다 알고 있는데 죽을 때는 왜 또 여한이 있는가?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 갈수록 이 안에 오묘한 비밀이 있다고 여기며, 이런 것들을 연구할수록 이런 일들이 신비하다고 여긴다. 봐라, 사람이 만든 플라스틱 조화는 언제나 시들지 않지만 하나님이 만든 식물은 정상적인 신진대사가 있다. 날이 따뜻해지면 꽃이 피고, 날이 추워지면 낙엽이 지는 이러한 자연법칙이 있다. 사람은 어떤 것을 아무리 잘 만든다 해도 이런 법칙은 만들어 낼 수 없다. 사람이 어떤 고깃덩이로 심장을 하나 만들어 사람 속에 넣는다 해도 사람은 살 수가 없다. 사람의 심장은 어떤가? 사람 몸에서 뛰고 있고 숨이 멎지 않는 한 사람은 살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왜 사람에게 숨이 있고 심장이 뛰기만 하면 살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움직일 수 있고 모든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알지는 못한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사람의 육체에서 겉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인 세포, 분자, 혈액, 경락은 그들이 다 보았고 분명하게 알지만 사람이 왜 숨을 쉬면 살 수 있고 말을 하거나 일을 할 수 있으며 생각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할수록 더욱 이것이 오묘한 비밀이라고 여기게 되며, 죽는 날까지도 알지 못하면 여한으로 남는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이런 진정한 비밀들은 물질 세계에서 연구해 낸 것들로는 대체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서만이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물질 세계에 있는 분자 공학이나 이온 공학 그리고 주역팔괘, 과학, 화학, 의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연구할수록 공허함을 느끼며 연구할수록 ‘신비해! 너무 신비해! 정말 너무너무 신비해!’라고 여기며 연구할수록 답을 찾지 못하며 나중에는 자기 자신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죽을 때는 여한을 남기고 떠나간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물질 세계의 지식, 이론, 학술은 사람이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진리를 깨닫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사람은 오직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이 한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이 만물을 주재하는 사실과 실상을 알아야만 모든 것을 알게 되고 그 어떤 여한도 남지 않는다. 설령 오늘 죽는다 해도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서 죽는다고 여기고 마음속에 위로를 받으며 여한이 없고 두려움도 없다. 죽든 살든 다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나 여한이 남을 일이 없다. 이런 저런 지식을 알거나 이런 과학을 연구하고 저런 비밀을 연구하는 사람은 진리를 모르기에 그런 것을 알거나 연구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여기지만 결국엔 그런 것을 알면 알수록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총명한 사람들이다.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인류를 경영하는 취지와 인류를 경영하고 구원하는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으며 하나님의 주재를 알게 되어 편안하고 충실하며 사는 것이 정의롭고 떳떳하다. 하나님이 너를 살도록 허락한 이상 네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피조물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산다면 사는 것이 정의롭고 떳떳하다. 만약 네가 살아도 산송장이고 숨만 쉬고 영이 없으며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깨닫지도 못하며 육체만을 위해 산다면 네가 살아가는 것이 정의롭거나 떳떳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네가 사는 것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너희가 사는 것은 정의롭고 떳떳한가? (그렇습니다.) 그럼 이 정의롭고 떳떳함은 어떻게 온 것인가? 너는 이렇게 보아야 한다. 이 광활한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이 인류 가운데서 너희를 예정하고 택하여 이 시대에 그것도 큰 붉은 용 국가에 태어나게 하였고 지금의 본분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너희는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이다. 이것은 복이 있는 일이 아닌가? 하나님이 너를 마음에 들어하여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게 하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하게 한 것은 복 있는 일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본분을 한다고 말할 수 없어. 지금은 높이 바라보기가 두려워. 하나님을 위해 효력한다고 할 수밖에 없어, 피조물의 직책을 다하기 위해 조금이나마 힘을 쓰고 내 자그마한 힘이나마 바치는 거야.” 지금 너희가 매 하루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말세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살 수 있으면 이런 삶은 하나님이 칭찬하는 것이다. 쉬운 말로 하면 하나님이 너희에게 이렇게 살아가도록 허락하고 이런 기회를 너희에게 준 것이다. 네가 말해 봐라, 하나님이 너에게 이런 기회를 주어 이렇게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게 한 것은 정의롭고 떳떳한 일이 아닌가? 이후에 누군가가 또 너희에게 이렇게 사는 것이 정의롭고 떳떳하냐고 묻거나 혹은 “당신은 뭐가 그렇게 떳떳하죠? 좀 자만한 거 아닙니까?”라고 묻는다면 너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대답할 겁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 마땅히 이 기회를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영광스럽게 여겨야 한다. 이 연령대에 살면서 이런 환경과 조건에서 이런 본분을 할 수 있는 것은 얻기 어려운 기회이다! 하나님이 이 인류 가운데서 세심하게 골라 너희를 택하였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주어진 기회이고 가장 큰 복이다. 이 복은 역대의 성도들이 받은 복보다 더 크다!

너희가 누리는 복은 작지 않다! 비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끔은 고난도 좀 받고 훈계와 책망도 좀 받고 심판과 형벌도 좀 받으며, 가끔은 여기저기 부딪치기도 하고 연약하여 소극적일 때도 있지만 오늘까지 걸어온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이 복은 대가를 치러서 온 것인가? (아닙니다.) 어떻게 온 것인가?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준 것이다. 지난날 종교인들은 자신이 복이 있다고 여겨질 때면 늘 “하나님은 은총을 베풀고 싶은 자에게 베푸십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 말인즉 “하나님은 지금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셨어요. 어때요? 부럽죠? 샘 나죠? 이건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겁니다.”라는 뜻이다. 얼마나 떳떳한가! 자만해서는 안 되지만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사람에게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 있어서 거의 나무 인형이나 다름 없다. 사람은 의식하지 못해도 다 하나님의 손에 있고 혹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다 하나님의 지배와 주재와 안배 아래에 있다. 다만 사람에게 때때로 거역과 패괴된 성정이 있으며, 늘 사욕이 있어 항상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려 하며, 늘 이렇게 계획하고 저렇게 타산하려 하며,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할 줄 모르고, 어떻게 진리를 구할지 모르며, 늘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할 수 없고 늘 패괴된 성품이 흘러나올 뿐이다. 어떤 때는 지위를 다투고, 어떤 때는 한 마디 말로 인해 소극적이 되어 연약해지며, 어떤 때는 체면때문에 본분하는 데 영향을 주고, 어떤 때는 누가 높이 평가 받고 중용되면 자기의 체면이 말이 아니어서 마음의 평정을 잃기도 하며, 늘 보잘것없는 이런 사소한 작은 일들 때문에 속박 받고 연약하여 소극적이 되고 영향을 받는다. 이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닌가? 만약 너희가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다면 생명 진입의 방면에서 정말로 길이 좀 생겼고 정말로 진입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이런 일에서 아무 체험도 없다면 다른 사람이 “당신은 왜 연약해지지 않습니까?”라고 물을 때 “연약해질 게 뭐 있어요? 소극적이 될 게 뭐 있어요? 하나님을 사랑해야죠! 하나님을 잘 믿으면 되죠! 지금이 어느 때라고, 하나님이 이 정도까지 말씀하셨는데 아직도 그렇게 연약하면 어떡해요?”라고 말한다.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경력한 것이 별로 없으면 사람은 빈말을 하기 좋아하고 빈 구호를 외치기 좋아한다. 경력이 조금 있는 사람은 연약하여 소극적이 되거나 혹은 책망을 받고 나서 조금 괴롭거나 혹은 어떤 일에 대해 자신의 생각이 좀 있다가도 책망과 훈계를 통해 내려놓고, 나중에 일을 어느 정도 겪고 나서 하나님이 주재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되면 “난 하나님께 순복할 거야. 사람은 목을 곧게 세우면 안 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줄 알아야지 거역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해선 안 돼.”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에게는 정상적인 사유가 있고 정상 인성의 성장 과정이 있는데 이러면 생명 진입이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것들이 없고 연약함도 없이 영원히 굳세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평소에 늘 구호만 외치고 생명 진입은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 패괴 성정이 있는데 연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가지 작은 일로 인해 전혀 옴니암니 따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정을 전혀 유로(역주: 흘러나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것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다. 패괴 성정은 하나님이 보기에 사실 해결하기 쉬운 것이다. 다만 사람의 생명이 어려서 어떤 때는 시달리면 견뎌 내지 못할 뿐이다. 시달리기만 하면 그는 ‘끝장이야! 오늘 또 오만을 유로했으니, 이미 맹세해서 앞으로 다신 오만을 유로하지 않고 하나님 마음을 상심케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오늘 왜 또 유로했지? 맹세했어도 그대로 하지 못했으니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늘 하나님의 마음을 상심케 하고 하나님을 거역했으니 나같은 사람은 구제불능이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떤 표현인가? 분량이 너무 작은 것이다. 마치 어떤 어린아이가 항상 만점을 받고 싶었는데 한번은 만점을 받지 못하자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느니, 살고 싶지 않다느니 울고불고 떼쓰는 것과 같다. 어른은 어떻게 하겠는가? (달랩니다.) 어떻게 달래는가? “괜찮아, 괜찮아, 이번에 만점 못 받으면 다음에 받으면 되지. 이번에 만점은 못 받았어도 반에서 1등이잖아.” 이런 상황에서 너는 달래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한바탕 때리면 된다. “어디서 생떼야? 만점 못 받으면 생떼야,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만점 받았을 거 아냐? 좀 적당히 놀았으면 만점 받았을 거 아냐?” 그 애가 혼자 ‘맞아, 많이 놀았어, 그러고도 만점 받으려 한 게 잘못이지! 앞으론 좀 적게 놀자!’라고 생각해 보게 되는데, 말을 듣게 만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무슨 방법이든 있어야 하고 써봐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이리저리 부딪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네가 만약 정말 생명 진입이 있어서 이런 정형을 다 잘 분별하고 장악하여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정상적이고 어떤 상황에서는 훈계와 책망을 받아야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다른 사람과 교통하여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면 너는 자라난 것이다. 만약 소극적인 상황에 빠질 때가 너무 많고 한 가지 일만 여의치 않아도 ‘끝장이야, 이번에 또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드리지 못했으니. 난 왜 늘 이 모양일까?’라고 하면서 자주 이런 소극적이고 의기소침한 것들이 생기고 스스로 독립 생활을 할 줄 모르고 자신의 정형을 조절할 줄도 모른다면 이것은 사람의 분량이 너무 작다는 것을 증명한다. 너희는 지금 분량이 어떤가? 좀 자라났는가 아니면 아직도 아주 작은가? (아직도 아주 작습니다.) 어느 정도 작은가? 한 번 실패하면 괴로워하고 자신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규정한다. ‘이 오만은 못 고쳐, 오만이 한두 번 유로된 것도 낯 뜨거워 죽겠는데 왜 계속 유로되지? 이젠 끝장이야, 구제불능이야!’ 이렇게 자신에게 마침표를 찍는다. 이러면 되겠는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 진입을 처리하면 맞지 않다. 너는 정확하게 대하는 동시에 방법을 찾아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적극적으로 향상하려는 태도이고 가장 효과적인 태도이다. 너는 문제를 해결해야지 그 속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그 속에 빠져 있으면 영원히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너는 그 속에서 나와 또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억제해도 안 되고 어떤 때는 꼭 해부해야 되고 어떤 때는 심판 형벌이나 훈계와 책망을 좀 받아야 하고 어떤 때는 징계를 받아야 한다.

사람 육체의 패괴 성정 안에 있는 오만한 성품, 독선적인 것들은 고질병이다. 마치 사람 몸에서 자라나는 악창이나 악성 종양과 같아서 네가 고생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우연하게 생기는 작은 부스럼이나 여드름처럼 혈액 순환이 정상적이면 며칠 안 돼 다 가라앉는 것과는 같지 않다. 고질병은 잔병이 아니어서 극한 방식으로 대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내막을 너희가 알아야 한다. 즉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는데, 사람의 각 방면의 패괴 성정은 진리를 추구함에 따라, 생명이 자라남에 따라, 진리에 대해 인식하고 경력한 정도에 따라 점차적으로 적어진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로 적어지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네가 이것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된다. 그것이 어떤 때에 유로되긴 하지만 네가 그것을 따르지 않고 배반할 수 있으면 된다. ‘유로될 거면 되라지. 내가 어떻게 본분을 다해야 하고 어떻게 일해야 하고 어떻게 충심을 다해야 하고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렇게 하면 돼. 그것의 통제를 받지 않을 거야.’ 이런 성품이 유로되고 이런 뒤섞임이 있는 줄 스스로도 알지만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이 방면의 성품은 너에게 있어서 이미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것을 이기고 초월한 것이다. 이러면 자라난 것이다.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저는 일만 하면 패괴 성정이 유로되니 아예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말라.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하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왜 어리석다고 말하는가? “목이 메어 식음을 전폐한다”라는 성어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저번에 밥을 먹다가 목이 메었는데 앞으로 다시는 밥을 먹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밥을 먹지 않으면 결과는 무엇인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네가 만약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패괴 성정이 유로되지 않으니까요, 이러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변화가 없습니다.) 패괴 성정은 마치 너와 마주하고 있는 원수와 같아서 네가 피할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으므로 너는 그것을 상대해야 한다. 네가 그것을 이기지 못하면 그것이 너를 통제하게 되지만, 네가 그것을 통제하고 그것을 이길 수 있고 그것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너는 자유롭게 된다. 그것이 어떤 때는 생각 속에 나타나 너를 우쭐거리며 뽐내게 하거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기는 이런 생각만 들게 할 뿐이지 네가 일을 할 때 그것이 너의 손발을 묶지 못하고 너의 본심도 묶지 못한다. 네가 만약 “저의 본심은 하나님 집의 이익을 위해 생각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며 피조물의 본분과 충심을 다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런 성품을 유로하지만 조금도 그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된 것이다. 이 패괴 성정은 사실 너에게 있어서 기본적으로 해결된 것이다. 사람의 성품이 변화되는 것은 막연한가? 바로 이렇게 실제적이다. 네가 만약 “비록 제가 많은 진리를 깨달았지만 어떤 때는 또 여러 가지 생각이 있고 마음과 생각에 많은 뒤섞임이 있는데 어쩌면 좋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그런 마음과 생각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 제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게 해 주세요! 하나님, 저를 징계해 주세요! 하나님, 저의 마음과 생각을 멈추게 해 주세요, 허튼 생각을 하지 않게 해 주시고 그 생각이 계속 이렇게 마구 퍼지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필요가 없고 그것을 상관할 필요도 없으며 생각하게 내버려 두고 그것에 묶이지 말라. 너의 생명이 자라나고 일부 긍정적인 것들이 너를 점유하여 네가 일부 긍정적인 것과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진리에 부합되는 것을 깨닫게 되면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은 차츰차츰 대체되고 없어지며 열세를 보이고 우세를 점하지 못한다.

생명 성품의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각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패괴 성정의 통제를 받아 늘 자신을 “끝장이야!”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여러 번 계속 그렇게 유로하면 통제하기 어렵다고 스스로 여기는 상황에서 자신을 정죄하고 자신이 가망 없고 변화될 수가 없다고 규정하는데, 이것은 보통 사람이 가장 크게 곤혹스러워하고 잘못 인식하고 있는 부분이다. 사람들은 패괴가 유로되거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생기면 그 성품이 속에 있어 본분을 해도 소용없고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며 정지되어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이것을 해결한 다음 깨끗하게 하나님 앞에 와서 본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가능한가? 네가 생명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이런 것들은 필수적인 것이며, 하나의 싸움이다. 성품이 변화되는 과정은 바로 네가 깨달은 진리로써 너의 원래 패괴 성정과 겨루고 사탄과 겨루는 것이고, 네가 깨달은 진리로써 네가 원래 인정하던 사설과 그릇된 이론들을 점차적으로 대체하고 너의 패괴 성정 안에 존재하던 것과 사탄에게서 온 것 즉 사상 논리와 처세 철학 그리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 사람의 사악한 속셈과 간사함을 대체하는 것이다. 너의 성품이 어느 정도 변화되었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네가 진리를 얼마큼 깨닫고 얼마큼 실행했는지, 진리를 얼마큼 살아 낼 수 있는지, 네가 깨닫고 얻은 진리가 패괴 성정을 얼마큼 대체하고 어느 정도까지 네 안의 패괴 성정을 통제할 수 있는지, 즉 네가 깨달은 진리가 어느 정도로 너의 사상과 본심 그리고 너의 매일의 생활과 실행을 주도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너의 패괴 성정이 우세를 점하는지 아니면 네가 깨달은 진리가 우세를 점하고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지, 이것이 바로 너의 분량과 생명 진입을 가늠하는 표준이다.

지금 너희는 분량이 작아서 너희가 깨달은 진리로 너희의 생각과 그릇된 인식 그리고 자신의 속셈과 패괴 성정을 이겨 내기가 매우 어렵다. 늘 양쪽으로 흔들리거나 비틀거리고 좌우로 치우치며 극단 속에서 산다. 조금 깨닫고 본분을 좀 잘하면 공이 튀어 오르는 것보다 더 높이 뛰고, 요 며칠 아주 순조로우면 날아갈 듯이 걷다가 좀 순조롭지 않아 기분이 별로면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면 좋겠어, 나같은 사람은 희망이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의기소침해진다. 변덕이 심하고 좌우로 흔들리는데 이것이 바로 분량이 작은 표현이다. 분량이 좀 있는 사람은 자라나 홀로 설 수 있으므로 생활 환경의 영향이나 외적인 사물의 영향도 별로 받지 않는다. 오늘 한 일이 그리 순조롭지 않으면 ‘순조롭지 않아도 좋아,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으니까, 난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할 거야,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돼. 괜찮아, 소극적이 되지 말자.’라고 한다. 오늘 일을 잘 해서 노래 한 곡을 작사 작곡했는데 형제자매들이 다 좋아하면서 영감이 있고 성령의 깨우침도 있다고 말하면 ‘하나님께 감사해! 하나님이 하신 것은 다 좋아, 이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나한테서 나온 게 아니야. 이만한 은사에 사람이 협력할 심지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고 이토록 많은 것을 베풀어 주셔서 사람이 상상하고 바라던 것을 훨씬 초월해. 사람은 자랑할 만한 게 없어.’라고 한다. 일부러 참아 자신을 낮추어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정말로 이런 정형이 있는데, 이러면 안정적이지 않은가? 만약 이것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분량이 너무나 작은 것이다. 기쁘면 얼마나 높이 뛰는지 천정에 구멍을 뚫을 태세이고, 의기소침해지면 땅굴을 파고 들어가 아무리 불러도 나오지 않다가 스스로 좀 깨닫게 되면 ‘이렇게 사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워, 방식을 바꿔서 살아야지.’라고 하면서 또 나온다. 분량이 작은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인가? 바로 안정적이지 못하고 성품이 안정되지 않은 것이다. 기뻐하거나 괴로워하는 것이 도가 지나쳐 아무리 달래도 안 된다. 바로 자신의 정서를 거의 이겨 내지 못하고 자신의 정형을 조절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진정시키거나 장악하기가 매우 어렵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 수 없으며 하나님이 안배한 주위의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에 순복하는 마음을 가지기가 어렵다. 잘 하면 “하나님께 감사드려요! 다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라고 구호를 좀 외치지만 잘 하지 못하면 또 원망한다. “하나님, 왜 제 체면을 깎이게 하십니까? 왜 저를 낯을 들지 못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왜 저를 인도하시지 않고 다른 사람을 인도하십니까? 하나님은 왜 저를 축복해 주시지 않습니까?” 늘 요구가 있고 불평이 있다. 사람에게 이런 것이 있으면 순복하기 쉽겠는가? 예를 들어, 사람이 분량이 작을 때 그에게 이 본분을 시키면 “예, 할게요.”라고 말하고 저 본분을 시켜도 “괜찮아요, 문제 없어요. 잘 협력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겉으로는 순복하는 것 같지만 정말 일이 닥쳐 아주 괴로울 때, 자신의 뜻에 맞지 않을 때는 사람이 가장 하기 힘든 것이 바로 순복이다.

무엇을 진실한 순복이라 하는가? 네 뜻대로 되면 무엇이든 다 만족스러워하고 적합하다고 여기며, 너를 나서게 하고 얼굴을 내밀게 하면 아주 영예로운 일이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다. 그러나 너를 구석진 곳에 두어 네가 늘 나서지 못하고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으면 너는 기분이 언짢아한다. ‘나는 하나님께 순복할 거야, 하나님께 순복할 거야’라고 하루 이틀은 자제할 수 있으나 시간이 길어지면 ‘내가 하나님께 순복했는데 하나님은 거들떠보시지도 않고 두어 마디 칭찬하시지도 않으셨어, 하나님은 왜 나를 조금도 언급하지 않으시지? 다른 사람의 이름은 언급하시면서 왜 나는 없지? 정말 안 좋아, 나도 하나님을 믿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거들떠보시지도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조금 불평한다. 게다가 “누가 했어요?” “제가 했어요.” “왜 그렇게 했어요?”라고 책망하면서 책임을 좀 물으면 생각해 보고 나서 ‘그것 봐, 얼굴을 내미는 일은 내 자리가 없고 책망받는 일은 왜 매번 다 내 차지야? 정말 재수 없어!’라며 불평이 생긴다. 이것은 분량이 작고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며 순복이 없는 것인데, 일이 닥치면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다. 만두를 먹는다고 하니 그는 팔짝팔짝 뛰어 와서 “생활이 좋아졌네. 하나님 은혜야,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워워터우를 먹는다고 하니 “또 워워터우 먹어요?” “워워터우도 하나님이 주신 거니 하나님께 감사해야죠!” “그래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이 “진심으로 감사하는 거예요 아니면 가식이에요?”라고 물어보면 ‘흥! 하나님께 감사해? 이번에 이렇게 일을 많이 해서 온종일 너무 피곤한데 또 워워터우를 먹으라고? 이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 같은데? 하나님의 은혜라면 워워터우를 먹게 하진 않을 거야! 어제 위에서 신물이 난 걸 저 사람들도 모를 리 없을 텐데 왜 또 워워터우를 먹으라는 거야?’라고 한다. 순복할 수 없겠지! 진정으로 순복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분량이고 정말로 자란 것이다. 네가 일을 책임질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면 그 말은 심령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구호를 외치거나 어린애가 어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배워서 하는 것도 아니며 바로 분량인 것이다. 그럼 분량이란 무엇인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가 있으며 패괴 성정이 모두 해결되고 자신이 모두 겪어 봐서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애 쓰는 마음을 체득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자라면 부모가 자녀를 기르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부모가 한평생 얼마나 수고했는지를 알게 되어 부모가 과거에 지나치게 했던 일이나 혹은 너를 때리고 욕했던 일에 대해 따지지 않는 것과 같다. 사람이 어릴 때는 늘 이해하지 못한다. 부모가 새 옷 한 벌 사 주면 “아빠 정말 좋아! 엄마 정말 좋아!” 하다가도 부모가 뺨을 두어 번 때리고 발로 차면 “우리 아빠 아니야, 다른 집으로 아빠 찾으러 갈 거야!”라고 억지를 부린다. 그렇지! 어른이 되면 이런 어리석은 말을 하지 않는다. 화를 좀 내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화내지 말자, 그분들도 쉽지 않아, 어쨌든 우리를 이렇게 키워 주셨고 온갖 고생을 참고 견뎠는데 똥오줌도 받아내며 적지 않은 고생을 하셨잖아!’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마음속 정형과 생명 안의 것들이 달라졌는데 이는 자라난 것이다. 그것은 자라난 것이지 세월이 흘러서 생긴 것이 아니고 또 여러 해 동안 구호를 외쳐 쌓여진 것도 아니다. 이것은 완전히 사람이 하루하루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경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체험과 경력 그리고 인식이 있게 되어 도달한 효과이다. 이런 효과는 일반적인 역경에도 순복할 수 있는 것이다. 순탄한 환경은 일반적으로 순복하기 쉽다. 역경이나 너의 뜻에 맞지 않는 것, 너를 상심케 하고 연약해지게 하는 것, 체면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 것, 너의 허영심과 체면이 만족을 얻을 수 없게 하는 이런 환경, 육체적인 고통과 심령의 고통을 받게 하는 것에도 순복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면 너는 정말로 자라난 것이다. 이것은 너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닌가? 너희에게 만약 이런 결심과 목표가 있다면 괜찮고 희망이 있다.

사람의 패괴 성정은 단지 그런 것들이다. 생각이 좀 있고 작은 개성이 좀 있으며, 자신을 좀 드러내기 좋아하고 독선적이고 간사하며, 쉽사리 남에게 머리 숙이지 않고 또 어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원칙이 없는데, 가장 심각하고 가장 주요한 것은 바로 사람의 오만한 성품이다. 오만한 성품은 사람 패괴 성정의 고질병인데, 이것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가? 사람에게 오만한 성품이 있으면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장 심각한 것은 바로 안중에 하나님도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긴 하지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데, 이것은 오만한 성품의 실질이고 근원이며 사탄에게서 온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것은 사소한 일이지만 관건은 사람의 오만한 성품이 사람을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기 싫어하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게 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한다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면 우선 오만한 성품을 해결해야 한다. 너의 오만한 성품을 철저히 해결할수록 너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더욱 생기는데, 이야말로 진정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이 제물을 좀 보내왔는데 귀중한 것도 있고 평범한 것도 있다. 그런데 일부 인솔자들이 꿀꺽하고 훔쳐 먹었다. 이 사람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화비하면서 가정과 사업을 포기했지만 이 한 가지 일로 끝장났다. 제물을 훔쳐 먹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너희들이 말해 봐라.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래서 바치는 제물은 하나님 집에 바치는 것이고 본분을 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주는 거야. 하나님 집에 바친 것은 모두의 것이니 여러 사람이 헌납한 물건을 함께 누리면 돼, 하나님과 관계 없어. 그러니 너에게나 나에게나 그에게나 모두에게 다 몫이 있는 거야.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균등하게 가지면 돼.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잖아? 공의롭다는 건 바로 공평하다는 건데, 각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거야. 10몫을 가져왔는데 만약 10명이 있다면 한 사람이 한 몫씩 가지고 만약 20명이 있다면 한 사람이 반 몫씩 균등하게 가지면 돼. 균등주의와 공평을 공의라고 하는 거야.’ 이런 속셈이 있기에 제물을 훔쳐 먹은 것이다. 제물을 훔쳐 먹은 이 일이 두렵지 않은가? (두렵습니다!) 그러면 제물을 훔쳐 먹은 사람은 증오스럽지 않은가? (증오스럽습니다!) 제물을 훔쳐 먹은 사람이 제명되거나 하나님 집에서 처리되면 동정할 가치가 있는지 너희들이 말해 봐라. (동정할 가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제물을 훔쳐 먹는 것이 뭐 큰일이라고. 누군가 하나님께 바친 것을 훔쳐 먹고 누렸는데, 조금밖에 안 되잖아? 이방인들은 관직에 있거나 혹은 작은 기관의 운전기사와 같은 작은 직책에 있어도 횡령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데, 하나님의 집에서 요만한 제물 훔쳐 먹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어떻게 이렇게 사소한 일을 크게 만들어 처리할 수 있지?”라고 말하는데, 너희가 말해 봐라, 이 사람들이 억울한가? (억울하지 않습니다.) 왜 억울하지 않은가? 이런 것들을 바치는 사람들의 출발점은 무엇인가? 만약 지명하여 어느 형제자매에게 주려고 했다면 그는 “이것은 김○○자매한테 주고, 이것은 이○○ 형제한테 주세요.”라고 말하면서 누구한테 전해 주라고 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제물이라면 너희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제물을 분배할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물건은 마음대로 처리해도 돼요, 어차피 이 물건은 싼 거니까. 하나님께서 분명히 안 받으실 거예요. 하나님은 귀하고 좋은 것만 받으시고 안 좋은 것은 받지 않으세요. 더구나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원하시지 이런 것들을 원하지 않으실 거예요. 가져가세요.”라고 말하는데 사람에게 분배할 권리가 있는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싼 양말 두 켤레를 하나님께 드려서 뭐 해요! 보내 드릴 필요 없어요, 보내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실 테니 우리가 신으면 돼요. 하나님께 알려 드릴 필요 없고 누구에게도 알릴 필요 없어요, 우리가 신으면 하나님 집에서 양말을 살 필요가 없으니 돈도 절약되잖아요!”라고 말하는데 이런 관점은 어떤가? 이 물건은 너에게 주는 것이 아니므로 물건이 어떻든 간에 네가 마음대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만약 ○○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면 너는 ○○에게 “누가 당신에게 양말 두 켤레를 줬는데 받을 거예요?”라고 말해야 한다. “어떤 양말이죠?”라고 물으면 “보통 양말인데,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다 보내 드릴 테니 당신 마음대로 처리하고 분배하세요. 어떻게 처리하든 우리는 당신 말을 듣고 순복할 겁니다.”라고 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이지적인 처리 방식이 아닌가? 사람이 이렇게 처리하는 것은 어떤 위치에 선 것인가? 사람이 어떤 진리들을 구비해야 이렇게 처리할 수 있는가? 우선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행하는 것은 이지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 물건이 어떻든 간에 우리에게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린 것이니 우리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는데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은 무슨 문제인가? 그 사람이 너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했는가? 너에게 처리하라고 시켰는가? 너에게 맡겼는가? 그 사람이 너에게 전해 주라고 부탁했지 쓰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너에게는 이 물건을 처리할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누구에게 보내 주라고 했으면 그 사람에게 보내 주면 되고, 보내 준 후에 만약 그 사람이 받지 않고 너에게 준다면 네가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너에게 준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이 물건은 너에게 속하지 않는다. 보내 주라고 부탁했다 해서 너에게 속하거나 네 마음대로 처리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이지가 없다.

형제자매들이 내는 제물에 대해서만 이런 방법으로 처리하라는 말이 아니라 이방 친척이나 친구에게 물건을 전해 줄 때에도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 괜찮은 사람이나 조금 믿음직스러운 사람 그리고 비교적 믿을 만한 사람은 다 이렇게 처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물건을 가져와 너에게 “이 물건을 내 친구에게 보내 주어라”라고 말하면서 무엇인지 알려 주지도 않고 너에게 보여 주지도 않았다면 너는 어떻게 처리해야 사람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가? 우선, 그 물건을 받고 뒤져 보거나 “이게 뭐예요? 좀 봅시다!”라고 묻지 말라. 그럴 정도까지 친하지 않으면 그런 말을 하지 말라. 너에게 보라고 하면 보고, 보지 말라고 하면 열지도 보지도 말라. 만약 네가 본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인격이 천박한 것이다! 만약 네가 “이게 뭐예요? 좀 보여 줘요, 저에게도 조금 주면 안 될까요?”라고 말한다면 더욱 형편없는 사람이다. “왜 그 사람에게만 보내 주고 나한테는 조금도 나눠 주지 않지? 나보고 전해 주라고 했으니 반은 남겨야 돼, 나도 덕 좀 봐야지!”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인가? 인격이 천박하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것이다! 하나는 전해 준 물건이 적어진 것이고 또 하나는 너에게 내일 전해 주라고 했는데 내년에 보내는 것이다. 부탁한 사람은 답장만 기다리고 있다. “물건 보내 줬어요?” “아, 깜박했어요! 그 물건이 뭐였죠?” “이 사람, 너무 믿음직스럽지 못해, 이다음엔 이 사람한테 부탁해 일을 처리해선 안 되겠어. 물건을 보내 주기는커녕 물건을 잃어버리다니.”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더욱 화나게 한다. 전해 주라고 한 물건이 마침 요 사이에 그에게 필요했던 거라 썼는데 쓰고 나서도 아무 말도 없다. 이 일을 처리한 것이 어떤가? 다른 사람이 물건을 전해 주라고 건넬 때 “나중에 저에게 알려 주세요!”라고 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알려 주지 않는다! 이는 어떤 사람인가? (신용을 지키지 않고 인격이 없습니다.) 인격이 없고 신용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나 이지가 없는 사람은 신뢰할 만한가? 신뢰할 가치가 없는 사람은 정상 인성이 있는가? 정상 인성이 없는 사람을 사람이라 할 수 있는가? 그를 사람이라 하자니 사람 가죽을 쓰고 사람 일은 하지 않고, 그를 짐승이라 하자니 가끔씩 사람 말을 좀 하고 말해 보면 또 잘 알고 있다. 이런 사람을 만약 교육하면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쉽게 변할 수 있겠는가? 인격이 이렇게 천박하고, 인정머리가 없으며, 음험하고, 악독하고, 탐욕스럽고, 물건을 횡령하기 위해 누구 덕이든 다 보려 하며, 누구 물건이든 함부로 쓰고 제물에도 감히 손을 대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고 인격은 논할 나위도 없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이런 사람은 변화되기 어렵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혹시 가난해서 그렇지 않을까요? 사람이 가난하면 비열해지잖아요! 가난에 쪼들려 좋은 물건을 보면 정신을 못 차리고 손을 길게 뻗으면서 덕을 좀 보려 하겠지만 만약 물건이 많으면 눈독을 들이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가? 가난해도 마음이 꿋꿋한 사람이 있지 않은가? (있습니다.) 어느 부류의 사람들인가? (인격이 좀 있고 존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말이 맞다. 나는 이런 말을 듣기 좋아한다. 너희가 ‘존엄’이라는 두 글자를 말할 수 있는 걸 보니 너희도 마음속으로 이런 사람을 증오하는구나. 체면과 존엄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사는 것이 기개가 있고 남의 덕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의 덕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존엄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살아도 인격이 없고 뻔뻔스러우며 부당한 이득을 챙겨 놓고도 손가락질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물을 훔쳐 먹어도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징벌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존엄이 없는 사람이 살아서 뭐하겠는가? 살 자격이나 있는가?

만약 네가 누구의 집에 갔는데 그를 믿을 만한 사람으로 여겨 가방을 그곳에 놓고 나갔다가 나중에 돌아와서 보니 가방이 열려져 있었다면 너는 어떤 느낌이겠는가? 우선, 그 사람에 대해 좋은 느낌이 없을 것이다. ‘이 사람, 손 버릇 정말 나쁘네. 물건이 없어졌는지는 둘째 치고 잃어버리지 않았다 해도 이렇게 뒤지는 건 너무 역겨워! 30~40세나 된 사람이 나잇살 먹고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지?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고 예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일을 처리할 수 없어.’ 보통 사람은 모두 이런 예의를 안다. 네가 말해 봐라, 그가 정말 모르는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가 아니면 탐심의 지배를 받아서인가? (탐심의 지배를 받아서 그런 짓을 해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아주 자연스럽고 거침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습관이 되었고 자주 그런 짓을 하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나쁜 일이나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네가 말해 봐라, 이 부류의 사람들은 마땅히 질책해야 하지 않겠는가? 질책한 후에 깨끗지 못하고 고약한 그의 손 버릇이 고쳐지겠는가? 뼛속까지 도둑 근성이 있는 사람은 고치기가 쉽지 않은데 이 부류의 사람들은 역겹다.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그 자신은 모른다. 만약 그가 ‘이런 일을 하면 사람들이 업신여겨. 이전엔 그렇다 치고. 이런 일을 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과 만나기도 민망한데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하지 말아야지.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지 말고 인격이 좀 있어야 돼.’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조금 자제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인격이 천박한 사람이나 아주 비열한 사람은 변화되기 쉽지 않다. 그는 뻔뻔스럽고 존엄이 없으며 많은 일에서 미덥지 못하다. 이 부류의 사람들이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데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을 수 있겠는가? 그가 “난 사람 안 무서워. 어쨌든 남의 물건을 훔치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어쩌다 남의 물건에 손대고 남의 덕을 좀 보는 건 별거 아니야.”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이라고 조금 덜하고 자제할 수 있겠는가? (아마 처음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본성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에게도 틀림없이 똑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그 말이 맞다. 이것을 본성이라 하는데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그가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데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떠하겠는가? 뜻밖에 만나게 되면 ‘하나님이시니 좀 자제하고 조심해야지. 결점을 드러내면 안 되고 잘못을 저지르면 안 돼!’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보통 사람이네. 아무 일 없어, 해 보자! 큰 잘못은 안 저지를 거니까. 별다른 말 없을 거야.’라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그의 본성 안에 이런 것이 있고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일을 함에 있어서 사람에게든 아니면 하나님에게든 다 똑같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그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그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어떤 때 사람을 조금 미워하는 마음이 있고 기분이 언짢을지라도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는 일을 해선 안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상케 하는 일을 해선 안 돼. 이렇게 사람을 대하면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고 진리에 부합되지도 않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생각한 대로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럼 그가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떠하겠는가? 어떤 때는 하나님께서 하신 이 일이나 그 일이 사람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보고 생각해 보더니 ‘그분은 하나님이시니까 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돼.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해선 안 돼.’라고 한다. 하나의 생각이 그를 지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상케 하는 일을 하지 않게 할 수 있다. 탐욕의 본성이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며칠만 함께 지내면 그의 본성이 드러나게 되는데 여우의 꼬리는 감출 수 없는 법이다! 그는 남의 덕을 보지 않으면 마음이 근질거리는데 마치 좀도둑 같다. 훔치는 것이 습관이 되면 돈이 있어 궁하지 않아도 훔치고 싶어지는데, 이미 본성이 된 것이다. ‘도둑질’이 그의 생명의 일부분이 되면 문젯거리가 되고 습관이 되면 쉽사리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길 수가 없다. 그에게 이러한 인격과 인성이 있는 데다가 존엄까지 없고 뻔뻔스러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쉽게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때로는 “이 사람은 체면을 중히 여긴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무슨 나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체면을 중히 여기는 것은 뻔뻔스러운 것보다는 낫다. 최소한 이 사람은 양심 지각이 조금 있고 자존심이 있으며 사는 것이 존엄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최소한 이것은 긍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체면을 너무 중요시해서 때로는 본분에 영향을 끼치는데, 이러면 좋지 않다. 이것은 패괴 성정의 부추김을 받는 것인데 사람의 약점이다.

사람은 사는 것이 존엄과 기개가 있어야 하고 또한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단지 기개 있게 사는 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면 네가 사는 것은 진리가 있고 정말로 존엄이 있고 인격이 있는 것이다. 너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에 대해 진실한 순복이 없으며 일을 함에 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흐리멍덩하며 오락가락하고 어떤 원칙도 알지 못하면서 열심뿐이라면 네가 아무리 체면을 중히 여겨도 안 되고 역시 어떤 존엄도 없으며 하나의 멍텅구리이다! 이런 사람은 가치가 있는가? 역시 가치가 없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네가 얼마나 높은 도를 듣고 얼마나 많은 도리를 알든지 간에 결국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데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근본이고 가장 중요한 것인데, 관건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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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②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③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④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⑤워워터우: 잡곡 가루를 원뿔 모양으로 빚어서 찐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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