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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편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어야만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된다

진리는 사람의 생활과 사람됨의 필수적인 일처리 원칙과 방향이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맹목적으로 하지 말고 늘 높아지려 하거나 비현실적인 이상만 추구하지 말며 실제적인 일을 배우고 차근차근 착실하게 일해야 하며 목표가 명확해야 하고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한다. 이렇게 네가 매번 한 가지씩 배우면 그것을 실제적인 곳에 사용할 수 있다. 아마도 너의 기초 이론이 결코 높지 않고 전문적인 지식이 풍부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너는 실제적인 일을 할 수 있고 실제적인 효과를 낼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한 걸음씩 우선 목표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너희가 말해 보라, 매 한 가지 일을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관계가 있는가, 없는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매 한 가지 실제적인 일을 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진리는 무엇인가? 하나의 기술인가? 하나의 학문인가? 각 사람에게 있어서 그리고 각 사람의 생명과 각 사람의 생활에 있어서 진리는 도대체 무엇인가? 너희가 이렇게 오랜 시간 하나님을 믿었고 본분도 이렇게 오랜 시간 했는데, 진리가 바로 사람의 생활과 사람됨의 필수적인 일처리 원칙과 방향이라는 것을 느꼈는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 되새겨 보아라. 우선 확실한 것은 진리는 학문이나 지식이 아니고 어떤 규례도 아니며 더욱이 어떤 규정과 제도도 아니고 어떤 법률도 아니며 어떤 기술이나 이론도 아니다.

진리는 사람됨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진리는 사람됨의 일처리 원칙과 방향입니다.) 그러면 사람됨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은 무엇인가? 위인, 유명인, 초인간, 외계인, 고상한 사람이 되라는 것인가 아니면 도덕성과 수준이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인가? 혹은 문화적 수준이 높은 사람이 되고 “오강사미삼열애”를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인가? 문명, 예절, 위생을 강조하는 것이 정상 인성에서 살아가는 기준인가? 공산당이 너에게 이런 기준을 정해준 것을 보라, 문명을 중요시하고, 욕을 하지 말며, 말을 함에 고상하고 저속하지 말며, 예절을 중요시하고, 선생님이나 노인을 보면 인사하며…… 이런 뒤죽박죽의 것들이 진리와 관계가 있는가? 사람됨과 관계가 있는가? 확실히 관계가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사람됨의 기준은 무엇인가? 인격, 존엄, 양심, 이지가 있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또 무엇이 있는가? 최종에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인데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이런 것이 모두 다 진리와 관계가 있다. 이런 내용을 사람에게 구체화하여 만약 도달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 (진정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사람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나님 편에서는 “진정한 사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너희는 이런 일들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모두가 흐리멍덩하여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너희는 어리둥절해 한다. 만약 자세히 따지지 않으면 너희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 “본분을 하는 것” “충심으로 화비하는 것”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라고 힘차게 구호만 외칠 줄 아는데 진지하게 따지면 너희의 이런 말은 모두 체계적이거나 구체적이지 못하고 모두 수박 겉핥기 식이다.

진리의 실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 눈의 진정한 사람이다. “진정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도를 준행할 수 있고 즉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나는 것 외에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이 정상 인성이 곧 진리를 갖추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높은가? (높지 않습니다.) 왜 높지 않다고 말하는가? 모두가 정상적인 사람이 도달할 수 있고 정상적인 사람이 반드시 갖춰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런 것에 도달하고 이런 것을 갖추고 실행하여 이런 것에 진입할 것을 요구한 이상 지금 사람에게 이런 정상 인성이 있는가? 확실히 없고, 이런 것들이 갖춰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네가 정상 인성을 구비하기 전에는 일을 함에 있어 틀림없이 건성건성 하고 흐리멍덩하고 여기저기 부딪치며, 많은 일을 함에 있어 이성(理性)과 목표가 없고 매우 맹목적이며 더군다나 기준이 없다고 한다. 기준이 없는 것은 어떻게 초래된 것인가?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고 진리를 얻지 못해 초래된 것이 아닌가? 네가 말해 보라, 사람이 지식과 학문만을 갖추고 예절이 밝고 가정 교육만 갖추거나 많은 규례를 알고 있다 해서 이런 것들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기준과 관계가 있겠는가?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요구하는 기준은 무엇과 관계가 있는가? (정상 인성을 갖출 수 있는가와 진리의 실제가 있는가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큰 항목인데, 즉 진리 실제를 갖추고 정상 인성을 갖추는 것이다. 진리 실제는 정상 인성과 어떤 관계인가? (진리 실제를 갖추면 정상 인성을 살아 낼 수 있습니다.) 맞다! 그러면 사람의 일처리와 사람됨에 어떤 표현들이 있어야 진리 실제를 갖춘 것인가? 사람의 본분을 하고 살아 내는 것에 어떤 것을 갖춰야 진리 실제를 갖춘 것인가? (본분을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해 충심이 있을 수 있고, 대충대충 해서 속이지 않으며, 살아 냄에 있어 성실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일이 닥치면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 실제를 살아 내는 이 몇 가지 표현 중에서 하나를 너희가 말해 보라. 본분을 함에 있어 대충대충 해서 속이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충심이 있는 것을 예를 들어 네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님에 대해 충심이 있는 데에 도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생각해야 대충대충 해서 속이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가? 어떤 마음과 어떤 정형을 갖춰야만 비로소 이러한 진리 실제를 구비할 수 있고 이러한 진리 실제를 살아 낼 수 있는가? (자기 안의 그런 야심과 욕망 그리고 뒤섞임을 내려놓고 옳은 것과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보아하니 너희는 평소에 이런 일을 함에 있어 모두 구체적이지 못하고 바쁘면 곧 잊어버리는 것 같다. 결과는 본분도 하고 힘도 썼지만 진리를 빠뜨렸는데, 이것은 손해가 아닌가? 하는 데에만 신경 쓰고 바쁜 것에만 신경 쓰다 보니 생명 진입에 관한 일을 소홀히 한 것이다.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일을 소홀히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기 쉬운가? (진리를 얻지 못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사람이 진리를 얻지 못하면 진리를 살아 낼 수 있는가? 이것은 사람이 수년간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큰 유감이 아닌가? 가장 큰 손실이 아닌가? 사람이 진리를 얻지 못하면 헛되이 믿은 것과 같다. 헛된 믿음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복을 얻지 못한 것인가? (하나님과 생명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다 도리이고, 진리를 얻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가장 큰 유감이 아닌가? 구원을 받는 것은 네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큰 목표가 아닌가, 네가 속으로 가장 이루고 싶은 최대의 소망이 아닌가? 이런 최대의 소망은 진리를 얻는 것과 관계가 있는가, 없는가? 얼마큼의 관계가 있는가? 가장 큰 관계이다. 그렇지!

그러면 어떻게 진리를 얻을 수 있는가? 네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면 곧 진리를 얻은 것이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진리를 얻으면 너는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칭찬하는 사람이다. 네가 말해 봐라,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원하지만, 만약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얻지 못했다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가? 하나님께 드리기 쉽겠는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는가?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이런 사람은 곳곳에서 관념과 패괴를 유로(역주: 흘러나옴)하고 곳곳에서 거역과 대적을 유로한다. 네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네가 일을 할 때 너에게 진리 실제가 없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고 원칙을 장악하지 않고 진리를 얻지 못했다면 네가 행하고 생각하는 것이 겉으로는 유로되지 않았지만 너의 마음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것들은 다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므로 서로 합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구원받아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는 무엇인가?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얻는 것이다. 다른 두 번째 길을 선택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저는 힘을 많이 썼고 애를 많이 썼으며 많이 버리고 많이 포기했으며 많이 바쳤어요.”라고 말하는데, 구원받아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는가, 진리를 얻고 진리를 깨닫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도리상으로 다 알고 있다, 그렇지!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면서도 무엇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그렇게 힘들어 하는가? 어떤 사람은 너무 거만해서이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흐리멍덩해서이다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늘 소홀히 해서이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 시간이 없어서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원인이 맞는 것인가? (다 주 원인이 아니고 바로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면 가정과 사업을 포기한 사람, 고생을 많이 한 사람, 지금 일심으로 본분하면서 화비하는 사람들은 조금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이 말을 들으면 마음속으로 불편해 한다. ‘만약 우리가 진리와 긍정적인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가정과 사업을 포기한 우리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이미 각 사람의 의례적인 말이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무엇인가? 여기에 이런 객관적인 원인이 하나 있다. 한 측면으로는 사람이 진리가 무엇인지 마음속으로 깨닫지 못하고 진리에 대한 개념이 매우 모호하며, 다른 한 측면으로는 다수의 사람들도 진리를 추구하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추구하는지 모르고 길과 방향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차츰차츰 시간이 오래 지나자 시종일관 힘써 본분을 하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목표가 되고 진리를 추구하는 대체품이 되었는데, 이것은 객관적인 원인이 아닌가? 주관적으로 보면 대다수 사람들은 마음으로 이 방면에 그다지 노력을 들이지 않는데, 바로 여러 항목의 진리 사이의 관계를 깨닫지 못하고 아예 할 말도 없다. 이것은 나에게 한 가지 일을 뚜렷이 보게 해 준다. 즉 대다수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서 도무지 길이 없는데, 추구하고 싶어 하고 각 항목의 원칙도 장악하고 싶어 하고 무엇이 진리 실제인지도 알고 싶어 하고 진리 실제에도 진입하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진입하는지 모르며,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 아주 신비하고 난이도가 아주 높아 한 가지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난이도가 높다고 보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사실 별로 신비한 일이 아니다. 진리를 얻게 되는 것도 사실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는 일이 아니고 힘들지 않으며 어려움이 없다. 가장 간단한 길은 바로 네가 하나님 말씀의 글자 표면상 뜻에서 무엇을 깨달았든지 너는 이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네가 진리를 사랑하며, 진리를 실행하기 원하고 진리를 얻기도 원하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를 원하면 너는 하나님 말씀에서 성실한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보았을 때 성실한 사람은 바로 솔직한 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럼 좋아, 난 우선 내가 이해한 이 점에서부터 시작해 성실한 사람이 되고 거짓말을 안 할 거야.’ 그러면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거짓말을 하지 않는가? 모든 일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어떤 사람과도 거짓말이나 허튼소리를 하지 않으며 어른이나 아이 모두 속이지 않고 특히 하나님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람이 여기는 성실한 사람이 되는 기준인데, 사람이 최소한 도달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첫 번째 항목이다. 너는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처음에는 난이도가 있는데 어떤 난이도가 있는가? (어떤 일들은 입을 열기가 어렵고 공개적으로 내놓지 못하며 말을 꺼내면 남들이 자신을 간파하고 휘어잡을 것 같아 이런 상황에서는 말하기 꺼려합니다.) 자신에게 이런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너는 어떻게 실행하는가? 이런 어려움을 발견했을 때 너는 마음속으로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게 아주 쉽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실행하자니 정말 쉽지가 않네. 정말 힘들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처음 실패했을 때 솔직한 말을 하지 않다가 두 번째 또 실패하면 ‘이대로 나가선 안 돼’라고 깊이 생각해 본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깊이 생각해 본다. ‘솔직한 말을 하라고? 성실한 사람이 되라고? 난이도가 조금 있긴 하지만 성실한 말을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말하자!’ 말하고 나서 깊이 생각한다. ‘힘들지 않아, 아무것도 아니네. 이것이 진리를 실행하는 거 아닌가?’ 그는 좋다고 여기고 성실한 사람이 되었다고 여긴다. 사실 그렇게 간단한 것인가? (아닙니다.) 안에 또 어떤 것들이 있는가? (마음속에 아직도 간사함이 있고 자신의 속셈이 있습니다.)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의 난이도는 주로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네가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로막는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려 하지 않고, 무엇이 긍정적인 것이고 무엇이 부정적인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지 못했으며,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마음 역시 크지 못합니다.) 그러면 말해 보라, 어떤 사람이 긍정적인 사물을 좋아하는 마음이 크다고 해서 그가 단번에 일률적으로 실행해 낼 수 있는가? 그렇게 쉽지 않겠지?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이 되는 이런 진리 실제에 진입하려면 상당한 시간을 훈련해야 한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실행할 생각이 전혀 없다. 즉 하나님 말씀을 보고 나서 알면 끝이고, 여태껏 추악상을 드러낸 적이 없으며 성실한 사람이 되려 하거나 성실한 말을 하려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는 마음이 강퍅하여 시종일관 자신의 이익과 체면 그리고 속셈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남에게 들려주면 끝이고 여태껏 실행할 생각을 한 적이 없다.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고 또 실행하려고 하는 사람은 훈련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난이도가 있어 ‘이번에 말할 때 체면을 생각해서 솔직한 말을 하지 못했는데 아직 멀었어, 안 돼! 다음번에 더 계속 노력해야겠어.’라고 생각하는데 다음에는 또 조금 좋아지고 그다음에는 더 좋아지며 점점 더 좋아진다. 언젠가 드디어 자기 마음속에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을 조금도 숨김없이 말하게 되면 마침내 진정으로 성실한 사람이 한 번 된 것이다. 그는 속으로 드디어 성실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아직은 겨우 시작에 불과하여 앞으로 더 잘해서 마음속으로나 겉으로나 모두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성실한 사람이 되는 기간에, 성실한 사람이 되는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훈련 기간에 사람의 각종 정형과 사람 마음의 온갖 생각과 속셈들이 다 변화되고 있지 않겠는가? 사람에게 있는 패괴를 부단히 발견하지 않겠는가? 사람에게 간사함과 속셈이 있고 늘 유동적인 생각과 사심이 있으며 늘 자신의 체면과 허영심 그리고 이익을 고려한다. 성실한 말을 함에 있어 어떤 때는 두 글자도 그렇게 힘들고 한참 입에 맴돌다가도 말을 꺼내지 못한다. 사람은 이런 것들에 통제받고 패괴 가운데서 사는데 확실히 하나님이 좋아하거나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사람에게 패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너는 사람에게 패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자신이 하나님이 원하는 성실한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기를 바라는가? 그러나 이렇게 한동안 지나도 사람이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성실한 사람의 기준에 늘 이르지 못하면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정형에 어떤 파동이 있는가? 어떤 표현이 있는가? 인류의 패괴 성정과 하나님이 드러낸 그런 실정에 대해 사람이 진정으로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가? 너에게 정확한 인식이 있을 때 너의 마음 깊은 곳에서 당연히 “아멘, 하나님 말씀은 정말 맞아”라고 말해야 한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너는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맞고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느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진리여서 사람의 생명이 될 수 있다고 느낄 수 있는가? 너는 하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진리이고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 하나님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하나님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네가 느낄 때, 너는 마음속으로 하나님은 사람이 믿고 의지할 가치가 있고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께 의지해야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이러한 느낌은 뚜렷하지 않은가? 사람의 심령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한 가지 흠모, 즉 진정한 흠모와 진정한 앙망이 아닌가?

성실한 사람이 되는 이러한 소소한 진리 실제에 사람이 만약 정말로 진입하고 정말로 심혈을 기울여 실행한다면 부지중에 사람이 실행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진보하고 변화되는 과정에서 이런 것들을 얻을 수 있으며, 너로 하여금 부지중에 하나님이 사람이 보기에 이렇게 보잘것없는 요구 기준을 주어 이런 것들을 얻게 하므로 너무나 실제적이라고 느끼게 한다! 사람이 관념 가운데서 ‘성실한 사람이 되는 건 아무것도 아니네! 이게 어디 진리야!’라고 생각하는데, 사람의 거만한 성품이 사람에게 일으키는 첫 느낌과 첫 반응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이거 틀렸어! 이건 진리가 아니야, 이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약간의 작은 도리이고 또 너무 깊이가 없어! 뛰어난 유명인들이 말한 그런 심오한 도에 비하면 훨씬 못해! 이게 어디 진리야!’ 그러나 네가 진정으로 이 말씀을 경력하고 체험했을 때, 이런 말씀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효과는 생명의 변화이다! 이 변화는 크지 않은가? (큽니다.) 어느 정도로 큰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는가? 자신이 너무나 비열하고 인류가 너무나 보잘것없으며 너무나 거만하고 무지하다는 것을 느낀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렇게 간단한 요구를 했는데 전혀 사람의 눈에 차지 않아 사람은 하나님의 이런 한 가지 요구를 멸시하는 눈빛으로 대한다. 그러나 사람이 실행에 옮기기 시작할 때는 고귀한 형상이 있고 지식과 문화로 가득찬 현대인들이 오히려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고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이런 일 하나가 너의 인식과 관념을 철저히 변화시켜 너로 하여금 사람에게 패괴가 있고 사람은 타락된 인류이고 사탄의 종류라는 것을 알게 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할수록 하나님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너무나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이 행하는 사역과 발표한 말씀은 사람이 보기에 평범하여서 이해하기 쉽고 그렇게 심오하여 짐작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오히려 생명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실하지 않은가? 너희에게 이런 체험이 있는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이렇게 간단하다. 네가 이런 말씀을 글자 표면상의 뜻에 따라 실행하면 실행하는 기간에 자신도 모르게 너의 영 안의 정형이 변화되고 너의 생명도 자라나며 하나님에 대한 너의 인식과 너와 하나님의 관계도 앞으로 발전되어 가고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만약 이 말씀을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겉으로 아름답게 혹은 화려하게 갖춰야 할 것으로 여긴다면 너는 영원히 이런 것을 느낄 수 없고 영원히 이런 수확이 없게 되는데, 이렇게 현실적이다!

사람이 뽀즈(속이 있는 찐빵)를 먹을 때 “나는 뽀즈를 먹으면 껍질만 먹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면 뽀즈를 먹는 것이라 하지 않는다. 뽀즈를 먹는 것은 주로 속에 있는 것을 먹는 것인데, 속까지 먹는 것이라야 뽀즈이다. 속을 먹지 않으면 그것은 만터우(속이 없는 찐빵)라고 한다. 뽀즈를 먹는 것은 주로 속을 먹기 위해서이다. 그러면 진리를 실행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주로 진리를 얻기 위해서이다.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리로 모두가 인정하고 부인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오랜 세월을 살면서 자신이 아주 솔직하고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아주 솔직하며 간사하고 교활한 일이나 악덕상인이 된 적도 없으며 또한 이방인들처럼 감언이설도 하지 않았다고 여기는데, 결과는 진리를 실행하면 벽에 부딪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솔직하지 않단 말인가? 나는 아주 솔직해! 솔직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고 부모님도 나를 솔직한 아이라고 하셨고 학교 선생님들도 나를 성실한 아이라고 하셨는데, 왜 하나님 앞에 와서 성실한 사람이 됨에 있어서는 아니란 말인가? 대체 긴가민가?’ 이것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시작이 아닌가? 더 실행하고 나면 그는 ‘성실한 사람이 되는 건 쉽지 않아! “성실한 사람”, 이 다섯 글자는 내 생각에 내 생명 안에 있는 것 같아! 나는 성실한 사람 안에서 살고 내가 바로 성실한 사람이야. 근데 왜 내가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려고 하면 그렇게 힘이 들고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까? 어째서 실행하지 못할까?’라고 생각한다. ‘만약에 실행하지 못하면 우리는 성실한 사람이 아니야!’라고 골똘히 생각하는데, 이것은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변화인가? (자신에 대해 인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진보한 것이 아닌가? 수확이 아닌가? 만약 이 방면의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면 자신에 대해 이러한 인식이 있을 수 있는가? 이러한 수확이 있을 수 있는가? “너희는 다 간사하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한 것을 보자 어떤 사람들은 “저는 인정합니다. 아멘, 저는 간사한 사람입니다. 이러면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한다. 이것은 진실하게 인정하는 것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우선 그는 간사한 사람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직 대조하지도 못했고 입으로만 인정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너에게 “당신은 어째서 키가 이렇게도 작아요?”라고 말하면 너는 곰곰이 생각하고는 “네, 저는 키가 작습니다.”라고 말한다. “당신 키가 작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되었죠?” “옷 입는 게 크지 않고 다 작은 사이즈니까요.”라고 말한다. 이것으로 자신의 키가 작다는 것을 정말로 인식했다고 할 수 있는가? 언제 사람이 심령 깊은 곳에서 자신이 정말 키가 작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가? (형제자매들과 함께 있을 때 형제자매들이 저보다 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전등 선이 손에 안 닿아 불 켜는 게 너무 힘들 때 깊이 느끼게 됩니다.) 자신의 키가 작다는 것을 발견하는 이 과정이 쉽게 오는가? 만약 이런 환경이 없으면 너는 자신의 키도 작지 않다고 느끼지 않겠는가?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체득인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도 이와 같다. 네가 정말로 자신이 간사한 사람이고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때, 너는 하나님의 구원과 인솔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공급이 필요하며, 또한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질 그리고 심판 형벌로 너로 하여금 이러한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게 하는 것도 필요하다. 너에게 이런 흠모와 갈망이 있을 때, 이러한 소망이 있을 때 너는 마땅히 ‘어떻게 성실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해야 성실한 사람이 되는 걸까?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성실한 사람의 표현일까?’라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이성이 있는 사람이 마땅히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 아닌가? 네가 이런 일을 깊이 생각하는 기간에 너는 진공 속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고 본분을 하지 않을지라도 사람들 무리 가운데서 생활하는 것이므로 날마다 말을 하고 날마다 사람들과 접촉하고 날마다 일을 처리한다. 예를 들면, 네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때 누가 너에게 “어디 가요?”라고 물으면 “그냥 산책해요.”라고 이 한 마디 거짓말이 나오는데 사실 너는 오락실에 가려고 했던 것이다. 나중에 ‘아니야, 원래는 오락실에 가고 싶었는데 결국 그냥 산책한다고 말했어. 이건 거짓말이 아닌가? 남을 속이는 말이 아닌가? 이게 어디 성실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고 부지중에 의식하게 된다. ‘성실한 사람이 되는 건 어려워도 거짓말을 하는 건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나 유창해 무심결에 하고 입가에 달고 있어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내뱉는 것은 다 거짓말로 너무나 쉽다!’ 이때 마음과 영이 있는 사람은 어떤 느낌이겠는가? 그의 심령과 생명 정형에 어떤 반응이 있겠는가? (양심이 평안하지 못하고 참소가 있습니다.) 맞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날마다 거짓말하기에 참소가 있고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이런 가책은 어디서 온 것인가? 인성과 양심에 부지중에 느낌이 있는 것이다. 이런 느낌이 있는 것은 변화가 아닌가? 진보한 것이 아닌가? 그전에 그렇게 간사한 사람이 되었을 때는 그에게 지각이 있었는가?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했는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지각도 없던 것에서 지금은 가책을 받기 시작하면서 거짓말하면 안 되고 말한 후에 자신의 마음이 편치 않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하고 불안해 하며 참소 당하는데, 이런 정도에 이르면 변화가 아닌가? 참소 당할 때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사람과 이성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앞길과 사람됨의 원칙을 선택하는가? 일반적으로 인성의 주관상에서 즉 본능적으로 그는 우선 이런 참소와 가책에서 벗어난다. 왜냐하면 그의 주관적 염원은 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힘들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방면에서 길이 없을 때 그는 소극적인 방면에서 이러한 참소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하는가? 바로 말을 적게 하는 것이다. 다시는 거짓말하지 않기를 원하지만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성실한 말과 성실한 일을 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참소에서 벗어날 때 그의 마음에 또 새로운 가책이 있게 된다. ‘늘 말하지 않는 것도 맞지 않고 본심이 옳지 않아. 이것 역시 속이려는 것이 아닌가? 늘 속이려 하면 이것 역시 간사한 사람이고 좋은 놈이 아니야! 내가 왜 이러지? 나도 성실한 사람이 아니구나!’ 또 이런 참소가 있게 되는데 생명이 또 자란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자라고 있는데 이것은 한 걸음씩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향해 매진하고 육체의 속셈과 관념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단계까지 온 것이 아닌가? 이것이 변화가 아닌가? 그러면 이 정도로 변화되면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에서 멀리 있는가? 얼마만큼 먼 것인가? (방향은 맞습니다.) 그러면 실행하기 쉬운가? 이때 이성이 있는 사람, 정상 인성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는 것을 선택하고 어떤 일을 하여 자신의 소극적인 정형을 돌려세우고 자신의 마음이 평안과 기쁨이 있게 하고 하나님 앞에 살게 할 수 있는가? (악에서 떠나고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 않는 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회피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방면에서 사람은 어떤 협력을 하고 서로의 뜻을 맞추며 자발적으로 실행하는가? (툭 터놓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첫 단계이다. 마땅히 툭 터놓고 드러내야 하며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참으려니 괴로워, 툭 터놓고 말해 보자, 이런 방법을 택해서 해보면 어떨까?’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들에게 툭 터놓고 드러내는가? 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은 비교적 내 생각과 맞으니 내가 그에게 말을 한 후에도 내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거야, 나를 너무 망신시키지는 않겠지.’ 드러낸 후에 어떤 느낌인가? 마음이 개운한데, 이방인들에게 “속을 풀었다”라는 말이 있듯이 편안한 느낌인 것이다. 편안한 느낌이 있음과 동시에 사람의 마음이 즐거우면 깊이 생각해 본다. ‘이렇게 하는 게 아주 좋아, 비록 내가 일부러 한 사람을 선택했지만 진리 진입의 첫 단계의 느낌은 달라, 달콤해! 누림이 있어!’ 진리 실행의 기분을 느끼고 좋은 점을 맛본 것이다. 이것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정형에 진입하는 것은 좋은 현상인가 아니면 평범한 현상인가? (좋은 현상입니다.) 이 단계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쉽지 않다. 겹겹의 난관과 층층의 차단막을 뚫어야 하며 마음이 하루에도 얼마나 뒤바뀌는지 모른다. ‘이 말을 할까 말까? 누구와 말하지? 어떻게 말하지? 에휴, 괴로워 죽겠어, 숨 막혀 죽겠어, 막 질식할 것 같아! 어떻게 해야 마음이 즐겁고 통쾌하며 편안하고 누림이 있을 수 있을까?’ 마지막에는 이런 길을 택한다. 선택적으로 몇 사람을 찾아가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마음속 말을 하니 통쾌하고 마음이 평안하며 양심이 참소를 받지 않는데 사람이 이 한 걸음을 내딛기가 쉽지 않다.

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을 시작해서 점점 더 좋아지는데, 기본적으로 생명 진입은 좋은 효과를 일으키는 방향을 향해 발전한다. 비록 이 기간 동안에 몸부림치고 가로막힘도 있으며 또한 소극적이고 연약할 때도 있으며 많은 실패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은 패괴 성정에 묶인 멍에를 푼 것이다. 계속해서 일반인은 어떻게 하는가? 다수의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 솔직한 말을 하고 또한 자신을 들춰내며 자신이 전에 했던 거짓말과 나쁜 일 그리고 자신의 속셈과 관념을 드러내는데 이것이 바로 진보한 것이다. 또 계속해서 자신이 매번 거짓말하고 매번 기만하고 매번 수작을 부리고 음모와 간계를 부리는 것에 대해 자신도 평안하지 않다고 느낄 수 있다. 그다음 매번 이렇게 할 때 놓치지 않고 또한 어떤 일들이 속이거나 수작을 부리는 것이고 성실한 사람의 표현이 아닌지를 자발적으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다. 이것이 정확한 길을 향해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정형은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정형이 아닌가? 이 과정은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체험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하는 과정이 아닌가? 진리를 체험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닌가? 패괴 성정을 벗어버리는 과정이 아닌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닌가? 모두 다이다. 또 계속해서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에게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요소가 더 많아지고 자신이 말을 하고 일을 하는 매 하나의 세부적인 것을 성찰하고, 매번 했던 말과 매 하나의 본심 그리고 자신 안의 패괴 성정과 자신의 관념을 성찰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너는 깊은 곳에 있는 것들과 숨겨져 있는 것들 그리고 자신이 여태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발견했을 때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기를 갈망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의지함으로써 이런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으면 점점 더 좋아진다. 사람은 사람의 패괴 성정을 느끼고 사람의 간사함과 본심 그리고 여러 방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이 깊이 뿌리박혔다는 것을 느꼈을 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더는 하나님의 은혜나 축복 그리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안위, 권면, 일깨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 채찍질, 심판과 형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래야 비로소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의 깊이 뿌리박힌 것들과 패괴 성정을 해결할 수 있고 사람의 패역을 해결할 수 있다. 네가 이 정도까지 나아가야 비로소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질,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으며 아무 불평도 없게 된다. 생명이 이 정도까지 자라고 이 정도까지 진입해야 사람은 비로소 하나님의 징계와 채찍질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형벌 심판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며 비로소 하나님의 형벌 심판이 사람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그리고 징계와 채찍질을 받아들였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장하고 중임을 담당할 수 있으며,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이 그리 힘들거나 힘겹지 않고 난이도나 가로막음이 그리 크지 않으며 점점 쉬워진다고 더욱더 느끼게 된다. 사람이 성실한 사람이 되어 마음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으며 하나님이 곁에서 지켜보거나 징계하거나 채찍질하는 것이 필요치 않을 때 자발적으로 진리의 원칙에 따라 실행할 수 있다. 이때면 하나님이 사람을 얻은 것이 아닌가? 사람이 이 정도까지 나아가면 진리가 사람 몸에서 사람의 생명이 된 것이 아닌가? 진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면 사람이 진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지 않는가? 네가 진리 실제를 살아 내어 진리가 너의 생명이 되면 진리를 얻은 것인데 바로 이러한 과정이다. 사실 진리를 얻는 것도 정말이지 복잡하지 않고 어떤 난이도도 없으며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도 훨씬 간단하다. 단지 사람이 그것을 복잡하게 상상했을 뿐이다. 패괴 성정은 진리를 실행하기 원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 그 자체가 바로 사람이 마땅히 도달해야 하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리는 천일야화가 아니고 심오한 천문 이론도 아니라 사람이 도달할 수 있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너희가 말해 봐라, 진리를 실행하는 이 과정이 어려운가? 복잡한가? 내가 보기에 뽀즈(包子)를 먹는 것과 비슷해서 속을 먹을수록 맛있고 씹을수록 고소하다. 사람은 늘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데, 그것은 네가 안으로 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늘 표면에서, 도리상에서 떠다니고 안으로 실행하지 않으며 안의 각종 정형을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는 언제나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면 진리를 얻을 수 없고 진리를 얻지 못하면 진리가 너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지를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방금 말한 성실한 사람이 되는 이 과정을 너희들이 돌이켜 보면 걸음걸음마다에 모두 어떤 것이 있는가? 실족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연약할 때가 있지 않았는가? 가로막음이 있지 않았는가?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섞여 있지 않았는가? 사람의 패괴 본성이 안에서 얼마나 큰 작용을 일으키는가? 주된 작용을 일으킨다. 하지만 사람이 만약 계속 앞으로 전진한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겠는가? 문제가 되지 않고 어려움도 아니다. 가장 어려운 그 부분은 어느 단계인가? 사람이 진리를 실행할 때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다음 자신이 왜 이토록 패괴 성정이 많고 뿌리 깊은지를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어려움인가? 어려움이 아니다. 네가 만약 자신의 패괴가 그토록 깊다는 것을 정말로 깨닫고 인식하였다면 이건 그래도 좋은 일이다! 두려운 건 사람이 처음부터 흐리멍덩하면서도 자신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저는 솔직합니다.” “저는 착실합니다.” “저는 단순한 사람입니다.” “저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저속한 취향을 벗어난 사람입니다.” “저는 공평하고 사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순진한 여자입니다.” “저는 말을 잘 듣는 아이입니다.” “저는 보는 사람마다 다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생활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저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입니다.” “저는 선행을 잘 베풀고 다른 사람을 기꺼이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저는 거짓말을 전혀 할 줄 몰라요. 거짓말하고 나면 가슴이 콩닥거리고 얼굴이 빨개져요.” 자신의 패괴를 알 수 있다면 이러한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어디가 나은가? 사람이 자신을 알게 되면 이것이 생명 진입에 있어서 가장 큰 수확이 아닌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너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거울을 봐서 자신의 오관이 바른지, 머리카락이 얼마나 되는지, 키가 큰지 작은지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럼 자신의 성격이 좋은지 나쁜지를 보는 것인가? 자신의 특기가 얼마나 되는지를 보는 것인가? 자신의 대인 관계가 어떤지를 보는 것인가? 주로 무엇을 인식해야 하는가? 사람의 패괴 성정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것들과 사탄에게 속하는 것들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것 가운데 어떤 것은 지식에서 오고 어떤 것은 교육에서 오고 어떤 것은 가정 환경에서 오며 또 어떤 것은 사람의 관념에서 오고 사회 환경과 사회 문화에서 오며 서로 다른 부분에서 오는데 주로 사탄의 패괴에서 온다. 너희들이 이런 과정을 돌이켜 보면 매 한 가지 진리를 실행하는 기본적인 과정은 다 이러하다.

진리는 긍정적인 사물이다. 네가 진리를 접할 때 사람의 패괴 성정이 분명히 진리와 싸움을 하고 반응을 일으키게 된다. 만약 네가 늘 자신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여기지만 안의 정형이 전혀 바뀌지 않고 미적지근하다면 진리를 깨닫기에는 아직 멀었다! 만약 누군가 “저는 진리를 좀 깨달은 것 같고 진리 실제에 진입한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면 어떤 표현이 있겠는가? 바로 생명 안의 정형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각과 관념, 일처리 원칙, 처세 방식, 본분하는 그 본심과 동기가 심령 속에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느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너로 하여금 사람에게 패괴, 사욕, 오만, 이기적, 탐욕, 대적과 여러 가지 욕망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사람이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간사함과 야심이 있다는 이런 점들을 스스로 발견하게 한다. 진리가 사람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사람의 생각 속에서, 심령 속에서 사람의 심령으로 하여금 일부 긍정적인 것들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역할이다. 만약 네가 “진리를 제가 많이 읽고 많이 들었지만 심령 속에서 그 어떤 변화가 일어나거나 발생한 것도 전혀 없고 그 어떤 느낌도 생기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는가? 이것은 바로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고 근접하지도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제가 막 하나님을 믿었을 때는 하나님에 관한 일을 말하기만 하면 늘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았어요. 저녁에도 항상 잠을 이룰 수가 없었는데, 밤새도록 감동을 받았어요!” 이것이 진리를 깨달아서 도달한 효과인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 사람이 막 하나님을 믿었을 때는 비록 패괴가 있지만 성령 역사가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 사람을 즐겁게 하고 평안을 느끼게 하며 기쁘게 하여 고민을 잊어버리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감동은 영원히 진리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변화를 대신할 수 없다. 만약 대신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사람과 마주하여 이런 말씀을 하고 이런 진리를 발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하나님을 여러 해 믿어서 여전히 성령의 감동을 받고 성령이 주는 평안 희락의 느낌 속에 있으면서 그 정도에 머물러 있다면 문제가 아니겠는가? 어떤 부류의 사람이 그런 정도에 머물러 있기 쉬운가? 하나님을 믿은 햇수로 말한다면 보통 믿은 지 1~2년 된 사람들이 잘 이런다. 하지만 많은 진리를 들은 후에도 그것을 자본으로 삼고 기준으로 삼는다면 문제가 아닌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사람은 너무나 무지하고 가련하고 어려서 진리를 얻기 쉽지 않다. 3~5살 아이가 손에 장난감을 쥐고 기뻐하는 것은 정상이지만 30살 되는 사람이 장난감 차를 타고 온 거리를 다니면서 진짜 승용차처럼 몰고 다닌다면 비정상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흔히 어떤 사람들인가? (바보나 멍청이입니다.) 멍청이가 손에 장난감을 갖고 다니는 시기를 벗어날 수 있는가?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인가? 바보나 멍청이의 아이큐가 그 정도밖에 안 되기에 나이가 얼마든 상관없이 60세가 된다고 해도 그 모양이다. 이것은 나이와 무관하다. 만약 한 사람이 하나님을 여러 해 믿었어도 늘 성령이 그때 얼마나 그를 감동시켰고 하나님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었다는 것만 말하고 진리를 얼마나 들었든 진리를 실행하는 데 관한 일은 꺼내지도 않고 알아듣지도 못하며 예배를 아무리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이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꼴통이고 곤란한데, 이런 부류의 사람은 위험하다.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을 여러 해 믿었어도 아직도 장난감을 갖고 노는 사람이 있는가? 도를 이렇게 많이 들었는데 너희는 진리가 너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진리를 실행하는 중요성을 의식했는가? (의식했습니다.) 그럼 너희는 바보나 멍청이도 아니고 정신병자도 아니라 보아하니 그래도 정상적인 사람인 것이다.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고 그리 심오한 일도 아니며 추상적이지도 않고 별로 어려움도 없으며, 이지가 있고 인성이 정상적이면 모두 도달할 수 있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말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마땅히 진리를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짬만 나면 함께 교통을 하고 모두가 상고하며 “저의 이 정형이 맞습니까? 제가 늘 이렇게 생각하면 맞습니까? 이게 관념이에요 아니면 상상이에요? 아니면 진리를 실행함에 필연적인 상황이나 과정인 거예요?” “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이렇게 털어놓으면 방식이 맞는 건가요? 제가 이렇게 털어놓는 게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지, 어떤 폐단이 있는지 혹은 일부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지는 않는지 봐주세요.”라고 말하면서 이런 일을 논하면 부지중에 주변 사람이나 네가 모두 진보하게 된다. 그리고 말을 하고 일을 하는 것이 모두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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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얻고 진리를 얻는 것은 가장 행복한 일이다

사람은 이것을 바치겠다, 저것을 바치겠다고 말하는데, 한 마디 말만으로는 안 되고 정말로 버려야 한다! 버려야 할 때는 정말로 버릴 수 있어야 이것을 진실한 실제라고 한다. 정말로 결정적인 때에 너에게 버리라고 하고 이것을 내려놓고 저것을 내려놓으라고 할 때, 네가 이것도 내려놓지 못하고 저것도 내려놓지 못한다면 안 되고, 하나님에 대해 아직도 진심이 아닌 것이다. 결정적인 때일수록 사람이 더 순복할 수 있고 자신의 이익이나 허영심과 체면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하나님이 기억하는데, 이것은 모두 선행이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 사람의 허영심이나 체면과 하나님의 영광을 비교하면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자신의 책임과 자신의 이익을 비교하면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가? 자신의 책임이 가장 중요한데, 이것은 도의상 밀어낼 수 없는 책임이다. 이것은 구호가 아니다. 네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또 그대로 실행한다면 실제에 진입한 것이 아닌가? 최소한 이 방면의 실제가 있다면 자신의 일시적인 주관적 의향과 허영심과 체면은 이런 일이 닥칠 때 문제나 가로막음이 되지 않으며, 자신의 본분과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과 자신의 책임을 우선순위로 하고 모두 첫자리에 놓게 된다. 이것은 얼마나 좋은 간증인가, 이것은 사탄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이 일을 사탄은 어떻게 보는가? 사탄이 이 모든 것을 볼 때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네가 실제적으로 이렇게 하면 바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사탄을 배반하기 위해 실제적인 행동으로 진실하게 표현한 것이지 구호가 아니다. 이것은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다. 각종 방식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고 각종 방식으로 사탄에게 사탄을 배반하고 내버리려는 너의 결심을 보게 한다면 매우 좋다!

비록 너희가 집을 떠나고 부모와 가족을 떠나 고통을 어느 정도 받았지만 심령이 위로를 얻어 보람되고 충실할 뿐만 아니라 생명 방면에도 점점 진보가 있다. 어쨌든 이 동안에 허송세월하지 않고 헛되이 보내지 않아 너무나 충실하였다! 이 1년은 네가 10년, 20년을 살아온 가치를 능가한다. 지금 생각해 봐라, 네가 세상에서 장사를 하고 결혼하여 애를 낳고 가정을 일구고 자립하며 어떤 유명인이 되거나 어떤 사업을 한다면 어떤 것이 지금보다 더 가치가 있는가? 지금보다 더 가치 있거나 의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 네가 세상에서 걷는 길이 얼마나 긍정적이고 인류 가운데서 얼마나 정의로운 사업이라고 느끼든지, 네가 한 것이 얼마나 좋고 사람들이 얼마나 찬성하고 성취가 얼마나 크든지 네가 걷는 길은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을 등지는 것이다. 지금 네가 하는 본분을 봐라, 그 본분이 크든 작든, 언급할 가치가 있든 없든 너는 바른길을 걷고 있으며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진다. 너희가 집을 떠나서 본분을 하면 교회 생활도 정상적이고 본분도 매우 바빠서 심령도 충실해지고 부지중에 자라난다. 이렇게 자라나면 자신이 이전보다 성숙되었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중임을 짊어질 수 있고 각항 업무 방면에서 비록 아직은 혼자서 한 방면을 담당할 수 없지만 생명 진입 방면에서 너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는 길에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가 점점 커지고 갈수록 책임감이 있으며 갈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고 하나님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껴지게 한다. 이런 느낌은 근거 없이 얻어 온 것인가? 너희가 2년 전에 이런 심지가 있었는가?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단지 하나의 소원이고 하나의 구호일 뿐이어서 지금처럼 실제적이지 못했다. 지금은 더욱 실제적이어서 최소한 본분하는 일부 원칙을 장악했고 일부 진리의 실제를 깨달았으며 자신에게 어떤 부족한 점이나 결점이 있는지도 알게 되었는데, 진보가 작지 않다! 네가 봐라, 사람이 본분을 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푸대접하는가? 너에게 맛있는 것을 먹게 하고 따스한 것을 입게 하면 너를 푸대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의 생명과 진리를 너에게 베풀어 주어 너로 하여금 하나님에게서 진리와 생명의 공급을 얻게 한 다음 너의 심령 안의 그 생명이 조금씩 자라나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한 걸음씩 걸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런 길을 걸어가는 것이 행복한 일이 아닌가?

너희 이 세대의 대다수는 다 외동자녀이다. 많은 외동자녀들은 모두 그만큼 우월감이 있다. ‘뭐든 다 내 거고 나랑 빼앗거나 다툴 사람이 없어, 내 혼자 몫이야!’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 생활의 각 방면에서 물질적으로 모두 너무 풍부하다고 느끼는데, 그것은 어떤 느낌인가? 단지 육체상의 고만한 행복감이 있는데, 심령의 그런 행복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람의 육체가 누리고 있는 각종 물질은 사람에게 심령의 위로를 가져다줄 수 있는가? 생활의 우월감, 풍부한 물자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으로 하여금 타락되게 하고 방향을 잃게 한다. 터놓고 말하면 바로 좋고 나쁨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갈수록 분수를 모르고 무모하게 날뛰고 갈수록 안일을 탐하게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생활의 자립 능력까지 잃어 어떻게 자신을 돌볼지 모르고 독립적으로 생활할 줄 모르며 탐심도 점점 커져 이것을 얻으면 또 저것을 얻고 싶어 하며 끝이 없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월한 생활 조건과 풍부한 물자들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타락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고 좋은 것이 하나도 없다. 육체는 네가 잘 대해 줄수록 탐욕이 점점 커지기에 고생을 좀 하는 것이 적절하다. 고생을 좀 하면 사람은 바른길을 걷고 본연의 일을 하게 되며, 고생을 하지 않으면 사람은 안일을 탐하게 된다.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나면 사람은 아무 일도 이룰 수 없고 진리도 얻을 수가 없으며 사리도 몰라 시간이 길어지면 초래되는 결과는 사람이 갈수록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례가 많지 않은가? 많은 가수, 스타들이 처음에 이름을 떨치지 못했을 때는 고생을 잘 견뎌 내면서 직업에 최선을 다했지만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자 그 결말이 어떠한가? 자살하는 사람과 단명한 사람이 아주 많다. 그것은 무엇으로 초래된 것인가? 바로 물질적 누림이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이다. 너무나 안일해서 어떻게 누리고 어떻게 자극을 받을지 몰라 마약을 복용하고 더욱 강한 자극과 재미를 찾는 것이다. 마약을 복용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끊을 수 없는데 어떤 사람은 과다복용으로 죽었고 어떤 사람은 어떻게 해탈할지 몰라 마지막에는 아예 자살이란 해탈 방식을 찾는다. 이런 예는 너무나 많은데, 이런 것이 다 전형적이 아닌가! 네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입든, 얼마나 좋은 곳에서 살거나 얼마나 편안한 생활을 누리든 너의 욕망이 얼마나 큰 만족을 얻든 최종의 결과는 바로 죽음이고 공허한 것이다. 네가 말해 봐라, 이방인이 추구하는 그런 행복이 진정한 행복인가? 사실 그것은 행복이 아니라 사람이 상상한 것인데, 하나의 타락의 방식이고 사람을 타락시키는 길인 것이다. 사람이 그것을 추구하는 자체가 바로 정상 인성에 있어야 할 목표가 아니고 사람의 삶의 가치가 있는 부분이 아니다. 사탄이 사람에게 심어 놓은 것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목표로 하게 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마비시키고 패괴시키고 꾀고 유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이 행복이라고 느끼게 하고 그 목표를 향해 가게 하는데, 사람은 그것을 얻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하다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얼마나 큰 힘을 쓰든지 모두 그 목표를 향해 가려 하고, 결국 얻어도 진정한 행복을 얻지 못했다고 느낀다. 이는 그것이 바른길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가는 길임을 실증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여기는 행복은 무엇인가? 어떤 다른 점이 있는가? 네가 봐라, 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은 후 큰돈을 벌거나 세상에서 형통하거나 어떤 사업을 하거나 유명인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생활이 아주 간소하고 삶의 질에 대해서도 바라는 것이 별로 높지 않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먹고 입는 문제만 해결하면 만족한다. 이런 인간 세상에서 그가 놀랍게도 이런 길을 택할 수 있는데 큰돈을 벌 줄 몰라서인가? 너는 무릇 하나님 집의 모든 형제자매들, 하나님을 믿는 형제자매들이 다 큰돈을 벌 능력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럼 사람은 무엇을 보았는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은 후 심령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이미 느꼈다. 이 행복은 그 어떤 물질 세계의 물질이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시도도 해보았지만 사회에서 몸부림치던 그 몇 년 동안 매우 힘들었고 고생스러웠으며 돈도 좀 벌면서 누리긴 했어도 또 어떠한가? 사는 게 존엄이 없고 점점 피곤하여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기보다 못하였다! 이런 일을 이미 꿰뚫어 본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서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걷고 하나님을 위해 일생을 화비하고 봉헌하는 것은 심령이 가장 위로를 얻는 일이고 일생에서 가장 큰 일이며, 하나님을 얻고 진리를 얻는 것은 가장 행복한 일이며 사람의 심령을 가장 평안하게 하는 일이다.”라는 것을 그가 이미 진실로 체험한 것이다. 이런 행복을 사람들이 이미 느꼈는데 그것은 상상해 낸 것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을 믿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리를 깨달은 것이 많든 적든, 깊든 얕든 이미 진리의 실제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어떠한 상황이든지 한 가지는 분명한 것이다. 네가 그에게 하나님을 믿지 말고 세상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아무리 말해도 그렇게 하지 않고 때려 죽여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세상은 당신에게 커다란 황금산을 줍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당시에 아마 ‘황금산을 준다면 괜찮을 거야’라고 궁리하다가 또 ‘아니야, 황금산을 줘도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하는 것보다 행복하지 못해. 그건 행복이 아니야. 당시에는 매우 기쁘겠지만 그 뒤에는 고통이 클 거니 아무리 해도 그 길을 갈 수 없어. 겨우 하나님을 찾았는데, 만약 돌아간다면 나중에 또 어떻게 다시 믿지? 이 기회는 얻기 쉽지 않아!’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는 목숨을 구해 주는 지푸라기를 잡은 것과 같다. 네가 말해 봐라, 물에 빠진 사람이 구명튜브를 잡았을 때 어떤 느낌이겠는가? (꽉 잡고 절대로 손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느낌이다. 그가 구명튜브를 잡았을 때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젠 죽지 않겠구나, 드디어 살 수 있게 되었어! 이제 보니 죽음이 닥칠 때도 한 줄기 살 희망이 있어. 이건 온 힘을 다 해서라도 손을 놓으면 안 되는 거야. 상처를 얼마나 받든지,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고생스럽든지 놓칠 수 없어. 마지막 숨이 붙어 있는 한 이 구명튜브를 꽉 잡아야 돼.’ 사람이 살 희망이 있다고 느낄 때 행복하다고 느끼지 않겠는가?

지금 너희는 어떤 때 거기 앉아서 깊이 생각하거나 기도하거나 영적 수양을 하면 늘 이런 감동과 행복하다는 느낌이 있지 않는가? (있습니다.) 이러면 옳은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본분을 할 때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 일부 진리를 얻게 되면 이런 진리가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행복은 바로 그런 물질과 평안, 누림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행복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은 네가 많이 얻을수록 더욱 만족할 줄 모르고 좋고 나쁨을 더욱 모른다. 진리는 사람이 분명하게 깨닫고 많이 얻을수록 더욱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고 은혜에 감격할 줄 알며 마음속에 풍족함이 있게 된다. 물질이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무엇인가? 공허와 타락이지만 사람은 좋고 나쁨을 모르고 욕망이 점점 커진다. 무엇 때문에 사람은 장사를 오래할수록 간교해지는가? 돈을 적게 벌어서가 아니라 사람이 점점 탐욕스러워져서이다. 처음에는 1위안을 벌어도 “됐어!”라고 만족한다. 2년이 지난 다음 “1위안만 벌어서 되겠어? 한꺼번에 10위안을 벌어야 돼!” 또 몇 년이 지나면 10위안을 벌어도 만족을 느끼지 않는다. “20위안을 벌어야 돼!” 이렇게 20위안을 벌다가 점점 또 만족을 느끼지 못해 “한 가지 물건으로 단번에 몇 백원 몇 천원씩 벌어야 돼!”라고 한다. 점차적으로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있어서 다 중요하지 않고 돈만 바라는데,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누구나 다 속이고 점점 엉큼해진다. 일반적으로 장사꾼에게 다 이런 규칙이 있지 않는가? 네가 말해 봐라, 돈이 사람을 구할 수 있는가? 돈이 사람의 탐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가? 만족시킬 수 없으며 사람의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이 사람들은 왜 내려놓을 수 있는가? 어떻게 내려놓게 되었는가? 매일 기도하고 억제하여 도달한 것인가? (아닙니다.) 어떻게 꿰뚫어 보게 되었는가? (한 방면은 자신도 어느 정도 체험하고 한 방면은 또 하나님 말씀을 통해 점차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된 일이다. 네가 깨닫고 내려놓을 수 있다면 네가 이미 진리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사람에 대해 말씀한 것과 사람에 대한 요구를 네가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아멘 하고 받아들이고 너의 실제로 된다면 이 실제가 지금 바로 너의 생명인 것이다. 네가 봐라, 네가 본분하는 가운데서 저도 모르게 생명이 있게 되는데, 너는 아직도 아무런 느낌도 없다. 너는 ‘나의 분량이 아직도 너무 작은 것 같아. 많은 일들을 아직도 알지 못하니 말이야.’라고 여긴다. 사실 하나님의 생명이 이미 너의 안에 만들어졌는데, 단지 네 자신이 아직 훨씬 멀었다고 느낄 뿐이다. ‘나에게 진리가 있어? 함부로 말 못하겠어. 이렇게 말하면 좀 오만하고 떠벌리는 게 아닌가?’ 감히 말하지는 못하지만 사실 부지중에 이미 있게 된 것이다. 생명은 아주 자연스러워 네가 느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실 네가 자라고 있고 이미 변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 진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동시에 사람의 마음도 부지중에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한다. 네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있을 때가 하나님이 너를 얻을 때가 아닌가? 이 과정을 자세히 생각해 보라, 아주 행복하지 않은가? 너무나 행복하다, 말세에 태어난 것이 너무나 행복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직접 너의 안에 만들어 넣어 너의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실제적인 생명이 되고 진리가 실제적인 생명이 되면 사람이 사는 것이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부지중에 존귀해지지 않겠는가? 차츰차츰 사는 것이 존엄이 있지 않겠는가? 어제까지만 해도 아직 이 일을 몰랐는데 오늘 한 가지 큰 비밀을 발견한 것이다. 알고 보니 자기 안에 이미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있는데 진리를 실제적인 생명으로 하고 그 영 안의 작은 생명이 이미 싹트고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선기(仙氣)를 안에 한 입 불어넣었다가 언제인지 모르게 한 번 불면 또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이며 생명이 맺은 열매인데, 이것은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다. 이후에 너희가 또 부지중에 징계와 채찍질, 심판과 형벌을 어느 정도 경력하고 또 받아들일 수 있고 순복할 수 있어 부지중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이런 일에서, 이런 진리에서 점점 진보가 있게 되면 이것이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 아닌가? 너희도 그날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진리를 발표하고 진리를 통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을 얻게 한다. 지금 사실에 근거해 보면 이 일은 이미 해놓은 것이 아닌가? 이미 실현되지 않았는가? 이미 성취되지 않았는가? 이전에 사람은 ‘아, 정말 어려워. 쉽지 않아.’라고 여겼지만 지금 보면 쉽지 않은가? 네가 믿음이 있고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협력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생명이 부지중에 너의 생명이 된다. 이렇게 부지중에 너의 이 생명 안에 곧 하나님이 발표한 진리의 요소가 있게 되고 이런 실제가 있게 되고 이런 살아 냄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네가 부지중에 하나님과 합하지 않겠는가? 네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얻으면 너에게 부지중에 하나님과 합하는 요소가 있게 된다. 사람에게 하나님과 합하는 요소가 있으면 사람이 하나님을 완전히 만족게 하여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될 희망이 있는 데에 도달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아무런 난이도도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한, 그를 증거하는 한 무리 사람들을 온전케 하고 한 무리 이기는 자들을 온전케 하려는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는가? 너희는 이 일에 대해 원래 그다지 투철하지 않았고 좀 막연하고 헷갈린다고 느끼지 않았는가? ‘온전케 할 수 있을까? 이 일이 가능할까? 이 몇 마디 말씀만으로 사람을 변화시킬까?’라고 생각하는데, 일부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항상 물음표를 달고 있다. 지금 보면 이 일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인가? 하나님에게 있어서 성사되기 어려운 일이 없고 하나님이 한 말씀은 모두 일일이 응하며 모두 성취된다. 특히 하나님이 진리를 사람에게 베풀어 주어 사람의 생명으로 되게 하고 사람을 온전케 하여 구원받게 하려 한다고 말씀한 것은 머지않은 장래에 틀림없이 성취될 수 있다. 지금 이 사람들에게서 이미 효과를 보았는데, 이것이 사실이 아닌가? 좋은 일이 아닌가? 이것은 기쁘고 축하할 만한 일이며 큰일이다! 여유로울 때 너는 이 몇 년간, 이 나날들에 하나님에게서 얻은 것, 자신이 수확한 것, 사람에게 베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정말로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잘 사색해 보고 구해 보고 상고해 보고 생각해 보아라. 네가 이런 것을 느낄 때, 너의 마음속에서는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슬픔과 번뇌가 없게 되며 적극적으로 진취할 수 있고 소극적이거나 후퇴하지 않고 움츠러들지 않게 된다. 어떤 때는 자신이 좀 연약해지고 성깔이 나거나 부족한 점과 어려운 점이 좀 있어도 어려운 일이 아니고 장애물이 아니어서 너의 정상적인 생명 진입을 가로막지 못한다. 너에게 있어서 아무런 난이도도 없고 기도하거나 교통하면 해결할 수 있다. 그러면 너의 분량이 점차적으로 자라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여유로울 때, 영적 수양을 할 때, 항상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얻은 것을 잘 생각해 보고 ‘이 몇 년간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신이 모두 어떤 일들을 했는지? 하나님의 보호와 보살핌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걸어왔는지? 하나님의 인도 아래에 자신의 분량이 어떻게 자라났는지?’를 되새겨 봐야 한다. 여유로울 때 이런 것을 돌이켜 보면서 마음속으로 은혜에 감격할 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에 이런 세 구절이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이것은 도달하기 쉬운가? 이것은 실행에 옮겨 실제로 되게 해야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이것은 항상 기뻐하는 하나의 근원이다. 이러면 너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네가 기쁨이 있고 은혜에 감격하고 하나님이 한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것을 알고 네가 하나님에게서 은혜를 얼마나 얻었고 축복을 얼마나 얻었는지를 안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게 된다. 네가 이런 마음이 있고 이런 인식이 있어야 비로소 만족스럽게 여길 수 있고 하나님이 배치한 모든 환경에 순복할 줄 알고 하나님께 진정 순복할 수 있으며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 이 몇 마디를 기억했겠지! 이런 말은 간단한 말이지만 사람의 생명이 진보되는 과정에서 모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심오한 도리와 큰 도리라 해서 사람을 구원할 수 있거나 사람에게 만족함을 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간단한 말을 사람이 만약 실행할 수 있고 항상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변화될 수 있고 정형이 돌려져 굳세지고 두려워하거나 후퇴하지 않게 되며 자신감이 생기게 된다.

일이 닥치면 항상 우는 사람은 어떤가? 항상 우는 것은 어떤 정형인가? 우선 그의 마음속에 기쁨이 없다. 항상 기쁨이 있는 사람은 울기 좋아하는가? 기쁨이 없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가? 걱정, 슬픔, 고통, 억울함, 원망, 몰이해, 어쨌든 이런 소극적인 요소들이 모두 안에 쌓여 있으므로 일이 닥쳤을 때 울기만 하면 며칠씩 우는데, 생각나기만 하면 운다. 이런 사람은 어떡하겠는가? 일이 없으면 이 몇 마디 말을 되뇌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네가 범사에 감사하면 자라난 것이고 어린애가 아니다. 자주 우는 사람은 어떤 일이든 고통스럽고 해결할 수 없으며 내려놓지 못하고 방법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하나님 앞에 올 줄도 모른다. 이는 어른인가 아니면 어린애인가? (어린애입니다.) 그럼 너희는 지금 어린애인가 아니면 어른인가? (어린애입니다.) 어린애일 경우가 많은가 아니면 어른일 경우가 많은가? (어린애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몇 마디 말이 너희에게 아주 적합하다. 기억했겠지? 이 말이 어떤가? 이것이 성경의 어느 부분에 있는지를 상관하지 말라. 이 말은 실용적이고, 사람의 생명이 자라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실제적인 일부 실행이며, 사람이 갖춰야 할 정형이고, 갖춰야 할 실행의 길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한 가지 태도이다. 우선 이것은 한 가지 태도인데, 너에게 이런 태도가 있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열납되며 동시에 네 안의 정형 즉 소극적인 정형, 타락된 정형, 패역한 정형, 그런 부정적인 것들이 점점 적어질 것이고 그런 정형들이 따라서 점점 좋은 방향으로 돌려질 것이다.

생명 진입에 관한 일은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라 사람이 마음속에 시시각각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의 생명에 관련되므로 마땅히 너의 마음속에 담고 있어야 하며 너와 조금도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높은 도나 심오한 도를 꼭 말하거나 구호를 외쳐야 사람에게 생명 진입이 있게 하거나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일부 간단한 말이 너에게 보잘것없는 것 같지만 그것이 정말 너를 총명해지게 하고 지혜가 있게 하며 하나님의 열납과 인정을 얻게 한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한 마디 알려 주겠다. “너희가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고 좋은 생명 진입의 시작이 있으려면 도리를 중요시하지 말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되기를 중요시하지 말라.” 어느 누구의 설교가 높으면 부러워하고 누가 말을 잘하면 부러워하며 누가 설교할 때 패기가 있으면 부러워하는데, 이 관점이 옳은가? 이 추구 목표가 옳은가? (틀립니다.) 그럼 무엇이 옳은 것인가? 너는 마땅히 어떤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야 하는가? (묵묵히 착실하고 실속 있는 사람이 되고 실제적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맞다. 실속 있는 사람이 되고 실제적으로 일을 하고 매사에 기도를 떠나지 않고 항상 하나님 앞에 오고 하나님을 멀리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근본의 근본이다! 우리의 생명이 얼마나 크고 분량이 얼마나 크든지, 진리의 실제에 얼마나 진입했든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 네가 “저는 하나님을 너무 멀리는 떠나지 않을 테니 좀 돌아다니다 오면 안 돼요?”라고 말한다면 이는 무슨 말인가? 이 일에는 멀거나 가까운 것이 없다. 너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없으면 이미 하나님을 멀리한 것이다. 여기에는 실제의 거리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하면 수시로 사탄에게 노략당한다. 그다음에는 일을 하고 말을 함에 유로하는 것이 다 무엇인가? 이때면 사람이 일을 틀리게 하고 패역을 유로할 것이고 방해를 할 것인데 수시로 사탄에게 이용당하고 노략당할 위험이 있다. 이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너의 마음이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고 시시로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가지 태도이다. 네가 이 태도를 갖춰야 비로소 하나님이 너를 잘못된 길을 걷지 않도록 보호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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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오강사미삼열애(五讲四美三热爱): 1980년대 초에 실시한 국민교육운동(문명ㆍ예절ㆍ위생ㆍ질서ㆍ도덕을 강조하고, 마음ㆍ언어ㆍ행동ㆍ환경을 아름답게 하며, 조국ㆍ사회주의제도ㆍ공산당을 사랑할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함.)

②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③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④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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