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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9편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함에 있어 구비해야 할 다섯 가지 방면의 정형

사람의 패괴 성정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각 사람의 인성에 다 있는 공통된 문제이다. 바로 인성에서 가장 약한 부분이자 사람의 본성 실질에서 가장 찾아내기 어렵고 가장 변화되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 자체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이 무소불능이 될 수 있는가? 완벽해질 수 있는가? 흠이 없는 정도에 도달할 수 있는가? 모든 일에 능통하고 다 깨달을 수 있고 다 해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사람 안에 약점이 하나 있는데, 사람이 한 가지 기술이나 업무를 배우고 나면 ‘난 능력이 생겼어, 난 신분이 있는 사람이고 몸값 좀 나가는 사람이야, 나는 ○○전문가니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능력이 얼마나 크든지 사람은 그것을 보여 주기도 전에 자신을 위대하고 용맹하고 완전무결하고 어떤 결함도 없는 것처럼 포장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고 해내지 못할 일이 하나도 없는 대단한 사람이 되려 한다. 만약 남에게 도움을 청하면 자신이 무능하고 약하고 남보다 못하다는 것이 드러나서 얕보인다고 여겨 그는 언제나 포장하려고 한다. 누군가 그에게 “이 일, 할 줄 알아요?”라고 물으면 “알아요!”라고 하고, “그럼, 해 보세요!”라고 하니 2~3일이 지나도 해내지 못한다. 하지 못하면서도 아무런 말도 없이 몰래 뒤에서 자료를 찾는다. 검색하고 보고 배우지만 며칠씩 배워도 모른다. 그 사람이 또 묻는다. “할 수 있어요, 없어요? 어떻게 됐어요?”, “다 돼 가요!”라고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감이 안 잡히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다 되긴? 아직 멀었어!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안 돼, 포기 못해, 계속 하는 척이라도 해야 돼! 남에게 얕보이거나 내 결점과 약함을 보여 주면 안 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떤 성품인가? 오만하기 그지없다. 그는 평범한 사람, 정상적인 사람, 범속한 사람이 되는 것을 싫어하고 언제나 뛰어난 사람이 되려 하고 심지어 특별한 기능을 가진 사람이나 남다른 재주가 있는 사람이 되려 하는데 이러면 아주 문젯거리이다! 무릇 정상 인성의 약점, 결점, 무식함, 우매함이나 혹은 알지 못하는 것을 그는 모두 감싸거나 포장하여 남에게 보여 주지 않으려고 한사코 가장하기만 한다. 누군가 그에게 “이 일, 알고 있어요?”라고 물으면 생각해 보고 나서 “알아요.”라고 한다. “그럼, 얘기해 보세요!”라고 하니, 이렇다 저렇다 말은 하는데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말하면 그때서야 “저도 그 뜻이에요, 미처 말을 못했을 뿐이죠!”라는 말로 한사코 가장하고 자신을 포장한다. 이런 사람은 계속 뜬 구름 속에 있지 않는가? 꿈꾸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어떻게 해야만 정상 인성을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르고 여태껏 실속 있는 사람으로 산 적이 한 번도 없다. 사람됨에 있어서 만약 이런 길을 선택하여 늘 구름 속에 있으려 하고 땅에서 착실하게 걷지 않고 자꾸 날려고 하거나 뜨고 싶어 한다면 위험하다. 네가 선택한 인생의 길이 틀린 것이다. 네가 만약 이렇게 한다면 내디딘 첫걸음의 근원이 틀렸기 때문에 아무리 믿어도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너는 마땅히 땅에서 걷는 것을 배워야 하고 착실하게 한 걸음에 한 발자국씩 제대로 걸어야 한다. 네가 걸을 수 있으면 걸어야지 뛰는 것을 배우려 하지 말고 한 걸음씩 걸어야지 두 걸음을 한 걸음에 가려고 하지 말라. 네가 착실한 사람이 되어야지 뛰어난 사람, 위대한 사람, 높고 큰 사람이 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사탄 성품의 지배로 인해 사람 안에는 한 가지 욕망과 야심이 있는데 이것은 인성 안에 감춰져 있는 것이다. 모두 땅에 있기 싫어하고 늘 반공중으로 올라가려고 한다. 반공중에는 누가 있는 곳인가? 거기는 사탄이 있는 곳이지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어서 땅에 두고 먹고 입고 싸고 하는 생활 규칙 모두를 정상적이게 하였고, 사람됨의 기본 상식과 어떻게 생활하는지 그리고 또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는지를 배우게 했지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 주거나 반공중에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날개 달린 것은 새이고 반공중에 떠돌아다니는 것은 사탄이고 악령과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만약 늘 이런 야심을 가지고 늘 자신이 평범하지 않고 출중하며 남다르고 특이해지려고 한다면 문제가 생길 것이다! 우선 너의 이 생각의 근원이 틀렸다. “평범하지 않고 출중하다”는 것은 무슨 사상인가? 금계독립인가? 군계일학인가? 비할 바 없는 것인가? 이런 말들을 정상 인성의 추구 목표에 사용하면 좋은가? 완전무결ㆍ천하일색ㆍ자수성가, 이런 단어는 좋은가? 걸출하고, 훌륭하고, 특별한 인재, 이런 단어는 좋은가? 카리스마, 인격적인 매력, 스타, 명인, 위인, 마음의 우상, 이런 것은 정상 인성을 가진 사람이 추구해야 할 사람됨의 목표인가? 모든 진리 가운데 너에게 이런 사람이 되라고 한 말씀이 한 마디라도 있는가?

사람은 본래 사람이다. 사람이 본능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들어 준 것이다. 사람이 어떤 것들을 구비하는 것이 비교적 정상적인 표현과 유로(역주: 흘러나옴)인가? 먼저 희ㆍ로ㆍ애ㆍ락 즉 사람의 육체가 소유하고 있는 감정 안의 긍정적인 이 몇 가지를 말해 보자. 사람이 슬플 때 표현하는 방식은 우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눈을 만들어 주어 눈물을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는 것은 정상 인성의 자연적인 유로이다. 슬프거나 속상하면 울어도 되고 눈물을 좀 흘려도 되니 가장하지 말라. ‘난 안 울어, 사내 대장부니까, “사나이는 울 일이 있어도 함부로 눈물 흘리지 않아!”’, ‘난 비록 여자지만 남자처럼 굳세야 돼! 난 화목란(花木蘭-역주: 뮬란), 여걸, 이청조(李淸照)가 될 거야, 전족한 여자는 되기 싫어!’, 이러한 생각이 올바른가? 이것은 어떤 인성인가? 이것은 가장하는 것이지 진실된 것이 아니다. 정상 인성에서 나오는 표현과 유로가 아니라 가장한 것이라면 모두 사람에게 주는 가상이고 인성의 자연적인 유로를 왜곡하는 것이다. 화목란은 어떻게 된 일인가? 억지로 꾸민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를 대신해 종군한 것인데 어쩔 수 없었다. 뒤에선 일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전족한 여자들의 옷을 입고, 울고 싶으면 이불 속에서 남몰래 울어야 했고 밖에선 또 남자처럼 행동하면서 남들에게 여자임을 들키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네가 화목란으로 되겠다는 것은 너에게 그런 배경이 있는가? 그래서 사람이 슬플 땐 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표현은 남몰래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고, 어떤 사람은 소리 내어 크게 울고, 어떤 사람은 작은 소리로 흐느끼며, 어떤 사람은 두어 방울 맺힌 눈물을 닦고는 ‘별거 아니야, 속상해 하지 말자, 지나갔으니까, 울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일이 생겨 비통해 하고 걱정하고 한숨 쉬거나 혹은 표정이 좀 엄숙하거나 입맛이 떨어지거나 하는 이러한 것들은 모두 정상 인성에서 당연히 표현되는 것이다. 감정의 표현에서 유로되는 것은 누구도 감출 수 없다. 사람이 기쁠 때 웃는 것은 정상적인 유로이다. 어떤 사람은 웃는 게 부끄러워서 자꾸 입을 막거나 몰래 웃고 남들이 비웃을까 봐 걱정하는데 이는 정상적인가? 이것 역시 가식이다! 그녀는 여자들은 공공장소에서 마음대로 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이러면 남에게 경시를 받고 업신여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 웃을 때 작은 소리로 웃어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보이지 않게 좀 자제해야 된다고 한다. 사람에게 이런 사상 관념이 있게 된 것은 중국의 전통문화 교육을 받은 결과이다.

희로애락이 비정상적인 사람은 항상 남에게 자신의 정상 인성의 이런 표현과 필요를 보여 주지 않으려 한다. 그의 생각 속에는 하나의 사상이 그를 지배하고 있는데, 모두 어떤 것들이 지배하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것 역시 가식이다. 이 사람은 정상 인성을 살아내는 길ㆍ원칙ㆍ방향ㆍ목표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없고 진리를 추구하는 길에 대해 분명한 깨달음이 없다. 그 밖에, 이 사람은 무식하여 20~30년을 살아도 어떻게 정상적인 사람이 되고 정상 인성에는 어떤 필요한 자연적인 유로와 요구들이 있는지에 대해 모르고 온통 한도 끝도 없는 일과 공허하고 허무맹랑한 일만 생각하며 터득하는 것을 보면 완고하고 그릇되고 이상하다. 너희들 가운데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가, 없는가? 이틀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고 사흘 굶어도 배고프지 않으며 본분을 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함에 있어서 끝까지 충성하겠다고, 임무를 완성하지 않으면 절대 그만두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여태껏 누구와도 말을 나누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과 마음속 말을 나누는지를 모르며 전혀 소극적이거나 나약해지지 않는다. 생명 진입의 일에서도 여태껏 어려움이 없고 구할 일이 없으며 다른 사람과 교통할 일도 없고 다른 사람의 도움과 지도가 필요 없으며 그 누구의 교통과 공급도 필요하지 않은데 마치 모든 일을 다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 같다. 누군가 그에게 “소극적으로 된 적 없었나요?”라고 물으면 그는 “가끔씩 소극적이긴 한데,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 심지를 세우고 맹세를 하면 금방 좋아져요.”라고 대답한다. 혹시 겉보기에 이런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지만 사실은 이런 정형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지금까지 믿어 오면서 3~5년이 되었든, 8~10년이 되었든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무엇인지 모르고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모르고 어떤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야 할지 모른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것은 신선이 되고 도를 깨닫는 것이어서 마치 불교도들이 말하는 육근(六根)이 깨끗하고 맑으며 마음을 평정시키고 욕심을 줄이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좋은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하고 선행을 베풀기를 좋아하고 수녀ㆍ승려ㆍ여도사로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 방향을 향해 노력하고 힘을 쓴다. 도를 얼마큼 들어도 그의 추구 목표는 바뀌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관점도 바뀌지 않는데, 이러면 위험하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누가 너의 하나님 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네가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믿는 이상(異象) 방면에 대해 아예 아무런 인식과 깨달음도 없는 사람의 모든 행위는 진리를 사랑하는가의 여부에 관련이 없다.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중국 사람의 문화 배경에는 도교와 불교가 있다. 이런 전통적인 사회의 큰 배경 하에 중국 사람의 사상은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기 아주 어렵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은 채식하며 염불하고 살생하지 않고 좋은 일을 하고 시주하고 선을 베풀고 남을 도우며 때리거나 욕하지 않고 살인하거나 방화하지 않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인데, 먼저 불교와 도교의 이러한 사상 관점의 밑바탕이 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시간이 얼마나 걸려야 이런 것들을 없앨 수 있고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의의를 깨달아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할 수 있는가? 한 사람의 정형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고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그의 마음속에 있는 그 하나님의 형상이 부처나 관음 그리고 미륵불이 아니고 옥황상제나 천지신명이 아니면 되는 것인가?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면 우선 그의 사상 관점이 허무맹랑하지 않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의 전체 정형ㆍ생각ㆍ사상이 모두 공허하지 않고 또한 그의 추구 목표와 방향도 이치적이 아니거나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들이 아니라 그의 모든 마음과 생각이 땅에 발을 붙인 것이다. 너의 모든 생각이 만약 허공에 떠 있으면서 아직 방향이 없고 어느 쪽으로 날아가야 할지도 모르며 아직도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 많은 생각과 공허한 생각, 이치적인 생각과 사람의 각종 사상과 관념 그리고 상상이 있다면 너의 전인은 반공중에 매달려 있고 아직 땅에 서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생각한 것과 행한 것 그리고 네 마음속의 추구 목표는 하나님을 믿는 진리, 하나님의 요구와 전혀 관계가 없고 상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이 한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인가? 사람이 총결해 낸 경험이나 사람의 처세 철학에 근거하고, 사회나 가정 혹은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사람의 머리로 상상하고 총결해 낸 것에 근거한다. 예를 들어 한 가지 일이 닥치면 사람은 종합해 보고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그렇게 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에게 “이 일이 진리에요?”라고 물으면 그는 “네, 올바른 것이면 진리이고 긍정적인 것이면 모두 진리이죠.”라고 대답하고는 그 방식대로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장애물에 막히고 책망을 받고 나면 그는 자신이 한 것이 사람의 상상과 관념에서 온 것이지 진리의 원칙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정식으로 진입하기 전에 행한 많은 일은 모두 이치가 없고 모두 두뇌와 상상 혹은 사람의 취향ㆍ열성ㆍ끈기 혹은 사람의 아름다운 소망과 바람 심지어 사람의 욕망에서 온 것이다. 이런 것이 사람이 일을 하는 출발점과 근원이다.

한 사람이 언제, 어떤 정형 하에서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이미 진입하였다고 실증할 수 있는가? 여기에 하나의 표징이 있는데, 아마 너희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이미 이런 정형 안에서 살고 있을 것이고 혹은 전에 이런 정형 안에서 살아본 적이 있겠지만 일시적인 어떤 생각이나 노력에 의해 도달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열성과 취향 그리고 자신의 두뇌 상상에 의해 하나님을 한동안 믿고 한동안 체험한 후,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믿으면 좋지 않고 진리를 얻지 못할 것 같고 실속이 없고 실제적이지 못함을 발견하고, 문득 자신이 원래 하나의 피조물이어서 마땅히 참된 피조물이 되어야 하고 참답고 착실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하며 자신의 마음과 힘을 다하여 피조물의 본분을 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착실하고 진지하게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일하는 기간에 도대체 어떻게 하면 진리에 부합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며 어떻게 하면 자신의 취향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는지를 상고하고 구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사람은 하나님을 만족게 하고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는 이런 소망이 생긴다. 이것은 바로 사람이 진리를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하기를 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너에게 이런 소망이 있고 이런 정형에 진입할 때면 한 방면으로는 자신의 지위에 정확하게 선 것이다. 즉 하나의 참된 피조물이 된 것이다. 다른 한 방면도 중요한데, 네가 마음속으로부터 하나님이 너의 주, 너의 하나님임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곧 너의 생명이 되고 너의 진리로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에게 이러한 심지, 이러한 소망, 이러한 필요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과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여 네가 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데에 이르고 또한 하나님께 순복하려는 소망이 있다면 너의 생명 정형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너는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서게 된다. 사실, 이러한 말씀을 요약해 보면 아주 간단하다. 즉 한 사람이 자신이 피조물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참된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는 소망이 생기는 동시에 하나님을 자신의 주, 자신의 창조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모든 요구와 모든 주재에 순복하려는 소망도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으며 자신이 계획한 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으며 어디서든 하나님을 생각하고 일을 함에 있어 곳곳에서 하나님의 뜻과 진리의 원칙을 구하며 주관적인 의향은 어디서든 하나님을 만족게 하려 하고 진리에 부합되게 일을 하려고 한다. 한 사람에게 이러한 정형이 있다면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진리를 구하고 실행하는 것을 배우고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네가 이러한 정형이 있고 이러한 일들을 배우기 시작할 수 있다면 말할 필요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존경하여 높이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만족게 할 수 있는지를 아주 자연스럽게 배우기 시작하며 자신이나 남을 만족시키지 않고 더욱이 자기의 사욕을 채우지 않게 된다. 네가 이러한 정형에 진입하면 너의 패괴 성정과 패괴 본성이 더는 너의 사상 혹은 생각을 주도하거나 통제하거나 좌지우지하지 못하며 그것이 너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네가 이런 정형이 있을 때 주관적인 의향에서 생각한 것이 긍정적인 것이면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것이 패괴를 유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독단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기적이고 비열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잘 장악할 수 있다. 이러면 비록 네가 아직도 사탄의 패괴 성정에서 살고 여전히 패괴 성정도 있지만 패괴 성정이 더는 너의 모든 것을 주도하지 못하고 더는 너를 통제하지 못한다. 이때 진리가 곧 네 몸에서 주권을 잡게 되는 것이다.

너는 ‘이 일에서 내 솜씨를 좀 자랑하고 싶고 한 수 보여 주고 싶어’라고 생각하고는 그대로 하고, 하고 나면 사람들이 아주 메스꺼워하는데도 네 자신은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자랑하고 싶은 대로 자랑하면서 마음속에서 생각하는 그대로 하는데, 그 어떤 사상이나 힘도 너의 이 패괴 성정의 유로를 통제할 수 없다. 패괴 성정이 유로될 때나 혹은 자신의 사욕이 아주 강할 때 너는 이러한 것을 인식할 수는 있지만 너의 분량과 힘으로 그것을 조금도 억제할 수 없어 아주 연약하고 무력해 보인다. 보라, 어떤 사람은 간사하여 그에게 바른대로 말 한 마디 하라고 해도 꼭 둘러대고, 둘러대도 솔직한 말이 아닌데, 스스로 억제하지 못한다. 패괴 성정 앞에서, 추악한 사탄의 본성 실질 앞에서 사람은 정말로 보잘것없고 연약하고 무력하며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사람은 늘 범죄하고 늘 잘못을 저지르고 늘 소극적이 된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뜻은 너희가 이런 정형에 처해 있으면 아직도 진리의 실제에 대한 진입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지 못한 사람이 진리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가? 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마음속에 진리가 있겠는가? 진리가 없는 사람은 일을 함에 있어서 무엇에 의지하는가? 본분을 함에 있어서 긍정적인 일을 좀 하는 것은 무엇에 속하는가? 힘만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하나님이 일꾼을 고용하여 하나님을 위해 힘을 쓰게 하는 것과 같다. 네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지 못하면 바로 힘만 쓰는 것이다! 네가 말해 봐라,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힘만 쓰고 그의 말씀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그의 요구를 만족게 하지 못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이런 모습을 보기 원하겠는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은 것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이지 사람에게 힘을 쓰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이토록 힘을 쓰고 최선을 다하는데도 하나님은 만족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의 진심을 원하십니다.) 설마 사람이 힘을 쓰는 것이 진심이 아니란 말인가? 네가 여기서 힘을 쓰는 것이 진심이었든, 성의였든, 너의 출발점이 무엇이었든 하나님은 너를 얻지 못하였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원한다는 데에는 거짓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마음인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였는가? 조금도 향하지 않았다고 하면 좀 억울해서 너희들은 “저는 이미 사탄을 배반하고 따르지 않아요. 저는 이미 사탄을 미워하고, 미워서 이를 갈 정도인데 하나님은 왜 아직도 만족하시지 않나요?”라고 말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사람의 열성 즉 열렬하고 화끈하고 들끓고 고동치며 불 같이 뜨거운 마음이겠는가? 그런 것인가? 마음을 표현하는 이런 한 무더기 단어들이 성립되는가? 진리를 추구하는 데 역할을 하는가? 그 단어들을 진리와 비교하면 실용적인 가치가 있는가? 그것들은 실없는 단어여서 텅 빈 것이고 도리이고 쓸모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어떤 마음인가? 우선 그 마음이 진솔해야 한다. 착실하여 원대한 포부나 높은 목표 없이 땅에서 한 걸음에 한 발자국씩 하나님을 따르고 경배하면서 피조물이 되어야지 하늘의 새나 행성에서 사는 그 어떤 피조물이 되려 하지 말고 더욱이 무슨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그 외에 이 마음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면 주로 긍정적인 사물을 사랑하고 정의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반드시 양심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 양심의 기준은 실제 속에서 최소한 어디에 사용해야 진리의 원칙에 부합되는가? 어떤 사람은 “비록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는지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고 지금까지 사는 것도 하나님이 친히 공급해 주시고 영양분을 주어 우리를 자라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숨을 주셨으니 우리 자신이나 사탄을 위해 숨 쉬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 숨 쉬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위해 산다”, 이것도 역시 도리이고 상대적으로 실속이 없다. 그럼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사는가? 이것은 양심과 관련된다. 지금 우리가 일을 하고 있는데, 이치대로 말하면 사람의 본분을 하고 있는 것이고 실제로는 하나님을 위해 하고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탁한 것이 바로 우리의 본분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부한 일이며 하나님이 명정해 놓은 것이고 하나님이 예정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재하는 것이다. 보통 말로 하면 바로 하나님이 너에게 맡겨 이 일을 완성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양심에 따라 이것을 완성하고 잘 할 것인가? (스스로 최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한 방면의 표현이다. 그리고 마음을 다하고 책임을 다하고 대충대충 해서 속이지 말아야 한다. “저의 몸에는 하나님의 심혈과 대가가 있고 기대가 있습니다. 또한 저에게 이 책임을 다하고 이 본분을 하도록 예정하셨으니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실망하시게 하거나 슬프시게 하지 않고 이 일을 잘해 하나님께 완벽하고 만족스러운 답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의지하여 스스로 배우고 구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저를 살아가게 하셨으니 이 본분을 잘해 하루를 살더라도, 하루만 이 위치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부탁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여기고 인생에서의 큰일, 첫 번째 일로 생각하고 완성하겠습니다. 완벽함을 추구하지 않을지라도 양심대로 일을 해서 사탄의 참소가 없고 양심에 가책이 없게 하여 하나님을 만족게 함으로써 그 어떤 아쉬움도 남기지 않겠습니다.” 네가 40~50세 또는 70~80세가 되어 돌이켜 보면 그때는 자신이 젊고 아는 것이 없고 또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그래도 일을 함에 있어서 성심성의껏 하고 줄곧 양심에 따라 하여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실망케 하거나 슬프게 하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감찰과 검열을 받으면서 했다면 일을 다해서 내놓았을 때, 답안지를 제출했을 때 하나님이 “비록 이 일을 잘하지는 못했고 보통이지만 너는 최선을 다했고 직책을 다했다.”라고 말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양심에 따라 일한 것이 아닌가? 그러면 사람에게 늘 패괴가 있고 자신의 선택ㆍ욕망ㆍ취향이 있어 늘 양심의 기준을 넘어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배반하고 기도를 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이 너를 통제하여 너의 양심 기준을 넘어서게 해서는 안 된다. 너의 양심 기준이 너의 행위와 생활을 주도하고 너의 생명을 주도할 수 있다면 네가 그것을 이긴 것이고 이 방면의 진리를 얻은 것이다. 사람에게 늘 있어야 할 정형은 바로 최소한 양심의 기준을 갖추는 것이다. 만일 한 사람에게 양심의 기준이 없다면 그는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런 성취도 없게 된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다. 먼저 지위를 놓고 말하자면 사람은 피조물이고 비천하며 하나님은 창조주이고 지고지상하다. 이성적으로 말하면 네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 이것은 이지와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이 일을 이렇게 하는 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또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요.”라고 말하는데, 만약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떤 표현이 있겠는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나는 이렇게 할 거야, 괜찮아, 어쨌든 나의 본심은 좋으니까.” 여럿이 아무리 설득해도 안 되고 누가 말해도 듣지 않고 소용이 없다. 어쨌든 계획을 세워 놓았고 그렇게 하려고 작정을 했으니 소 아홉 마리라도 끌어오지 못한다. 혹은 혼자 궁리해 본다. ‘이렇게 말하면 나에게 이롭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내가 손해를 보고 체면이 구겨지는 데다가 또 지위도 지키지 못하게 될 거야. 어떻게 할까?’ 고민 끝에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게 좋아, 거짓말 한 번 하는 건 별거 아니야, 자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더군다나 거짓말을 해도 괜찮던데 뭘. 그래,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고 마음을 굳히고는 전혀 두려움이 없고 그 어떤 망설임도 없으며 하나님의 감찰도 받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 경외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표현이 있는가? (마음대로 하거나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매우 좋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인가? (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하고 나서 ‘내 것이 잘못된 거야, 그런데 그 형제 걸 듣자니 또 내키지 않고. 만약 그 형제 말을 듣고 내 걸 부인하면 그 형제가 나보다 낫다는 거잖아! 평소엔 내가 그 형제보다 더 괜찮았었는데, 이번에 그 형제가 나보다 낫게 되면 어쩌지? 안 돼! 내 것이 안 되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 형제 것도 안 되게 해야 돼, 이렇게 하는 거야! 뒤에서 루머를 좀 퍼뜨리거나 혹은 설득을 하고, 꾀 좀 써서 그 형제 것도 안 되게 해야겠어. 서로가 대등해야지, 누가 높지도 낮지도 않게 말이야.’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고 나서 목적을 달성하면 하나님이 징계하지도 감찰하지도 않았으니 잘됐고 성공했고 음모를 이루었다고 여긴다! 실질적으로 말하면 이런 행위가 제멋대로 하는 것이 아닌가? 겉으로 보기엔 제 것이 좋지 않아 포기한 것 같지만 속에는 딴 속셈이 있는데 바로 다른 사람의 좋은 일까지 망쳐버리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를 줄지언정 사람들 마음속에서의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지킨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가? 100% 없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할 수 있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전혀 가책 받지 않고 두려움이 전혀 없으며 어떠한 거리낌이나 걱정도 없고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모두 이렇게 하고 일관적으로 이렇게 표현하는데, 결과는 무엇이겠는가? 위험해지지 않겠는가? 작게 말하면, 이런 사람은 질투심이 너무 강하고 개인의 명예ㆍ지위심이 너무 강하며 너무 간사하고 음험하다. 크게 말하면, 실질적인 문제인데, 바로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면 이것은 빈 말이다. 실제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유아독존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보다 높게 보고 진리보다 높게 본다.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지위가 없고 하나님이 그의 마음속에서는 언급할 가치도 없고 가장 보잘것없다. 이런 사람은 일을 함에 있어서 항상 제멋대로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지위가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진리의 진입이 있겠는가? 그가 평소에 아주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많은 힘을 쓰는 것은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사람은 그래도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본분을 하면서 가정과 모든 것을 버리고 많은 고생을 했다고 말하지만 그가 일을 하는 모든 출발점ㆍ원칙ㆍ목표는 다 자신을 위한 것이고 자신의 모든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문제가 아닌가? 위험하지 않은가?

너희가 말해 봐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광신자가 아닌가? 사탄이 아닌가? 어떤 부류의 놈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가? 짐승을 제외하고 마귀, 사탄, 천사장 그리고 하나님과 겨루는 자들은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 그러면 너희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어떠한 일을 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고, 어떠한 일을 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가? 너희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한 사람을 미워할 때 ‘내가 저 사람 좀 혼내 줘야지, 좀 괴롭혀야지, 보복 좀 해야지.’라고 궁리를 하는데,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매우 끔찍하다! 너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일을 저지를 수 있는데 이 성품이 매우 악랄하고 매우 심각하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 있는 것은 정상 인성에 있는 것이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일을 저지르고 보복해서 자신의 목적과 의도를 달성한다면 이것은 끔찍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미워만 하는데, 미워하다 그만두며 한동안 지나서도 그 사람과 마음이 맞지 않으면 멀리하고 피한다. 하지만 자신의 본분에 영향을 주지 않고 정상적인 대인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으며 어떠한 일도 저지르지 않는데 그것은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에게 미워하는 생각과 나쁜 마음은 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기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을 노하게 할까 봐 두려워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는 전혀 일을 저지르지 않고 정도에 지나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며 이런 일에서 하나님을 노하게 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슨 표현인가? 처신함에 원칙이 있고 공적인 일은 공정하게 처리한다는 것이다. ‘내가 비록 이 사람과 성격이 맞지 않아서 이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할 것이고 같이 일을 하면서 공적인 일은 공정하게 처리하며 본분으로 분풀이를 하지 않고 본분에 손실을 가져오지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으로 분풀이를 하지 말아야지.’ 이것은 무슨 표현인가? 이것이 바로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좀 더 좋다면,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결점이나 약점이 있는 것을 봐도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고 그의 비위를 거슬리게 했거나 그의 이익에 손해를 준 적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다면 이것은 더욱 좋은 것이다. 이는 바로 인성이 있고 진리 실제가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다. 현재 너희가 이 분량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원칙 있게 일을 처리하고 처신하며 사람을 대함에 원칙이 있다면 이것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만약 너희가 이것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제할 수 없다면 역시 아주 위험하고 끔찍하다. 너에게 지위를 주기만 하면 사람을 괴롭히고 억눌러 수시로 적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 적그리스도가 된 사람은 도태될 사람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좋고 나쁘고,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사람에게는 일을 처리하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가 어떤 결말일지, 하나님이 그를 징벌할지, 심판 형벌을 할지는 하나님의 일이니 사람이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나서지 못하게 하며 어떻게 처리할지는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이 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지 않았고 그를 제명하거나 징벌하지 않았다면 그는 구원받는 기간에 있기에 너는 마땅히 사랑과 인내로 도와줘야지 그의 결말을 정해서는 안 되고 사람의 수단으로 억눌러서도 안 된다. 네가 도와주거나 책망과 훈계를 해도 괜찮고 또는 진솔한 마음으로 마음을 터놓고 그와 교통을 해도 괜찮다. 하지만 만약 네가 하나님을 대신해 억누를 궁리를 하거나 하나님을 대신해 나서서 그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이것은 진리에 맞는 것인가? 우선 이것은 사탄에게서 온 것이고 혈기에서 나온 것이고 사람의 원한과 질투, 증오에서 나온 것인데 이 방법은 진리에 맞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 아니며 보응을 받을 일이다. 너희는 어느 누가 눈에 거슬리고 너와 마음이 맞지 않는다 하여 갖은 방법으로 억누를 수 있는가? 너희는 이러한 일들을 한 적이 있는가? 늘 말을 돌려서 사람을 비하하고 비꼬고 풍자하지 않는가? 너희는 이런 일을 저지를 때 마음이 어떤 정형인가? 그 당시에는 분이 풀리고 통쾌하고 우위를 차지한 것 같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일을 한 것이 비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으며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에 가책이 있지 않는가? 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없지만 너희는 그나마 양심의 지각이 좀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런 일을 또 할 수 있겠는가? 누구를 미워하고 누구와 마음이 맞지 않는다고, 혹은 누가 너의 말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하여 그를 공격하고 보복하고 트집을 잡아서 궁지에 몰아넣어 본때를 보여 줄 궁리를 하겠는가?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지금은 억누르지 않아도 기회를 봐서 감쪽같이 억누를 거야. 그래서 나에게 항복하고 용서를 빌게 해서 나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알게 해 줄 거야. 내 센 맛 좀 보여 줘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해 줘야지. 앞으로 누가 감히 나를 건드리나 보자.’ 이것은 어떤 인성인가? 인성으로 보면 악독한 것이고 진리로 가늠한다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일을 함에 원칙 없이 제 마음대로 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다. 너희가 이 방면에 원칙이 없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면에서 생명 진입이 있겠는가? 분명히 없고 100%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일에서 진입이 추호도 없다면 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일부 사람들은 말한다. “재난이 왔다거나 어느 지역에 온역이 발생했다고 하면 저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을 한 시각도 떠나지 못하며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구합니다. 밤길을 걸을 때, 혼자일 때, 위험이 닥쳤을 때도 저는 계속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못하고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합니다. 본분을 할 때 저는 시시각각 하나님께 부르짖어 대충대충 해 속이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이 하시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지 않는다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네가 의지할 데가 없고 갈 길이 없으니 하나님을 찾는데 이러면 하나님은 네가 이용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이게 어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 너는 매우 기쁠 때에는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린다. 너는 가장 유쾌할 때, 가장 즐거울 때, 순풍에 돛 단 듯이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지위가 있어 자부심을 느낄 때, 사람들이 아첨하며 치켜세울 때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의 감찰과 인도를 구하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께 네가 한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물어보지 않았는가? 네가 악을 행할 때, 네가 자신을 높이고 증거할 때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왜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는가? 너는 왜 자제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어떤 문제인가? 이러한 모든 정형들을 통틀어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다면 본분을 잘할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진리의 실제에 진입할 수 있겠는가? (없습니다.) 없다는 정도가 얼마나 큰가? 어려운가, 비교적 어려운가 아니면 매우 어려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너는 마음속에 늘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담고 있고 하나님과 진리와는 추호도 관계가 없는데, 그 길이 옳지 않고 그 길의 방향 자체가 틀린 것이다. 너희는 “남원북철(南轅北轍)”, 이 사자성어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가? 이 옛이야기는 한 가지 문제를 설명하는데, 사람에게 ‘네가 아무리 많은 노력을 들였다 할지라도 만약 너의 목표와 방향이 그릇된 것이라면 네가 앞으로 가면 갈수록 정확한 방향과 목표와는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래서 너희가 본분을 하는 기초에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목표와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가까워질 것인지를 지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너희 대다수 사람들의 현재의 실행 방향과 실행 원칙과 방식에 따라 앞으로 나아간다면 진정한 목표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너희 대다수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단지 조금의 표면적인 것과 글귀 도리, 규례 그리고 자기의 소망과 심지와 열성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희의 출발점과 가장 기본적인 실행 표준은 정확한 기초 위에 세워지지 못했고 아직 이 진리의 실제에 진정 진입하지 못했으며 다만 규례를 좀 지킬 뿐인데 이렇게 걸어간다면 아주 위험하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햇수를 세거나 날짜에 따라 계산해서 그 햇수가 차면 되는 그런 일이 아니다. 이 이치는 너희가 마땅히 알 것이다.

우리는 모두 네 가지 방면을 얘기했다. 또 한 방면도 가장 관건인데 바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마음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은 일이 닥치면 사실 정확한 실행 원칙과 실행 방향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는 태도와 정형의 문제가 있는데 이것 또한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이다. 예를 들겠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누가 어떻게 했었다는 것도 못 들었어. 이 일은 나의 상상과 관념에 좀 맞지 않아 마음속으로 조금 망설이고 조금 언짢았는데,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지?’ 제일 간단한 실행 방법이 있는데 바로 먼저 순복하는 것이다. 순복은 겉면의 행실이나 논법이 아니고 하나의 형식도 아니라 여기에는 하나의 정형이 있다. 우선 긍정적인 태도가 있어야 하는데, 먼저 받아들이고 옳고 그름을 분석하지 말라. 누군가 말한다. “당신이 이 일을 잘못했어요!” “네,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어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면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어요?” “잘 모르겠지만 받아들일 수 있어요.”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의 긍정적인 태도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방면과 소극적인 방면에도 하나의 태도가 있는데 우선 저항하지 않는 것이다. 저항하지 않는 것에는 몇 가지 표현이 있는가?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객관적인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그 일은 무엇 때문이고…” “제가 그날 잘 쉬지 못해서…” “제가 그날 좀 헷갈렸어요…” “그날 누가 누가 방해했어요. 제 탓이 아니거든요. 누구누구 탓이에요…” 누군가 묻는다. “이 일에서 당신이 정말 잘못한 게 없나요?” “어쨌든 잘못했지만 그래도 저는 이유가 있어요!” “이유가 진리인가요?” “진리는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객관적 이유죠.” 지금 너의 그 객관적인 이유 즉 이 일이 왜 발생했고, 어떻게 초래된 것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의 성질이 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네가 만약 이 점을 인식한다면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진정으로 저항하지 않을 수 있는데 우선 이 태도가 아주 관건이다. 일부 사람들은 책망이 임한 후 궁리한다. ‘이 일은 나만 탓해서는 안 돼. 왜 책임을 모두 나에게만 미는 거지? 왜 나만 탓하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어? 왜 나를 대신해 나서고 말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 나 혼자 책임지라고 하고, 이거 정말 “콩 볶아 같이 먹고 솥이 깨지니 한 사람만 탓한다”는 거구나. 정말 재수 없어! 나쁜 일은 다 나한테 닥치고 저런 좋은 일은 왜 나한테 안 오는 거지?’ 이것을 무슨 정서라고 하는가? 저항이라고 한다. 누군가 물어본다. “잘못했죠?” “잘못했어요.” “받아들이겠습니까?”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비록 머리를 끄덕였지만 마음속에는 아직도 원망이 있다. ‘이 일이 왜 나한테 닥쳤지? 책망하는 건 괜찮은데, 왜 그렇게 듣기 싫게 말하지? 게다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사람 취급도 안 하네! 작은 잘못을 좀 범했을 뿐인데 왜 끝도 없이 자꾸 말하면서 계속 나를 들춰내는 거지? 나는 사람도 아니란 말인가!’ 이것을 무슨 정서라고 하는가? 이것을 저항하고 거부하고 완고하게 대항하고 또한 억지 부린다고도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해야 돼! 너, 이 사탄, 누가 제멋대로 잘난 척하고 함부로 일을 처리하고 방해하고 혼란스럽게 하라고 했어! 말해도 사탄을 말하는 거지 나를 말하는 게 아니니까. 사탄을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게 해야 돼! 사람들이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라지, 난 받아들여. 어쨌든 내 문제가 아니라 사탄의 짓이니까!’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사탄에게 돌리고 사탄에게 죄를 씌우는데, 이 생각이 어떤가? 일을 저지른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입니다.) 사람에게 이런 정서와 생각이 있다면 진실로 순복하는 태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 이러한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거부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있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진정한 순복의 태도가 있겠는가? 네가 어떠한 진리와 긍정적인 생각을 갖춰야 이 두 가지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순복이란 이 공과는 제일 배우기 어렵다. 너의 관념에 맞는 것을 받아들이면 당시에 느낌도 괜찮고 순복하고 난 후 모든 일이 순조롭고 마음도 평안하고 안정되어 가책이 없고 게다가 기쁘고 즐거우며 생명이 크게 진보한다. 너의 관념에 맞지 않는 일에 순복하려면 모래를 삼키듯이 삼키기 힘들고 괴롭고 마음이 찔리고 고통스러우며 이유가 있어도 말할 수 없어서 마음이 답답하고 억울함이 가득해도 하소연할 데가 없다. ‘그분이 말씀하신 게 맞아. 그분이 나보다 지위가 높고 하나님이신데 내가 안 들으면 되겠어? 어쩔 수 없으니 받아들여야지. 다음에는 조심하고 앞장서지 말아야겠어. 앞장서 봐야 좋을 게 없어! 누구든 앞에 나서면 책망받고 앞장서면 늘 당하니까 난 앞장서지 말고 될대로 되라지. 이 순복, 쉽지가 않아, 힘들어! 나는 제일 작은 자가 되고 싶지, 앞장서는 자는 되기 싫어.’ 이 태도가 어떤가? 또 어떤 사람은 ‘나의 이 불 같이 뜨거운 마음에 찬물을 끼얹어 식어버렸어. 이건 나를 탓할 수 없어. 나의 원래 마음은 이렇지 않았어. 나도 처음에는 단순하게 마음을 터놓았는데 결국에는 늘 책망받았어. 나는 이제는 이렇게 처신 안 할 거야, 이렇게 하면 너무 힘들어. 다음부터는 뒤로 물러나야지, 아무한테도 속마음을 터놓지 말고 누가 물어봐도 말하지 말고 참고 있을 거야.’라고 한다. 어떤가? 이것은 하나의 극단에서 또 다른 하나의 극단으로 들어간 것이다. 당시에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힘들었든지, 개인의 체면과 허영심 그리고 명예가 얼마나 손해 봤든지 이것은 다 부차적인 것이고, 주된 것은 너의 정형을 돌려세우는 것이다. 어떤 정형인가? 사람이 어떠한 정형에 있든지 자신이 잘못을 범했거나 혹은 잘못을 범하지 않은 정형에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강퍅함과 패역된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존재하는 사람의 심리가 있다. ‘제가 한 것이 맞고 속마음도 옳고 비뚤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니 당신은 마땅히 저를 열납해 주셔야지 이렇게 책망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 저는 순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것은 사람의 이치이고 여기에는 순복이 없다. 그는 이 일을 진리에 맞게 했는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는 말하지 않고, 자신의 이치를 진리로 여기는 반면에 진리를 별개의 일이라고 여기며 그의 이치에 맞으면 진리가 이치이고 자신의 이치에 맞지 않으면 진리는 이치가 아니라고 한다. 이 순복의 공과는 사람의 어떤 정형을 해결해 주는가? 사람이 만약 순복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의 이성(理性)이 있어 “이 일을 한 것이 맞든 틀리든 이왕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으신다면 저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요구를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사람이 갖춰야 할 이지이고 첫째로 마땅히 이것을 갖춰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든, 우리의 속마음이 무엇이든, 당시에 우리의 이치가 무엇이든 이왕 하나님이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진리이기에 하나님과 이치를 따지지 말고 논쟁하지 말아야 한다. 네가 만약 이러한 이성을 갖추고 순복할 수 있다면 즉 무릇 어떠한 상황에서도 패역이 없고 너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반항하지 않고 하나님 요구의 옳고 그름, 좋고 나쁨도 분석하지 않는다면 사람의 패역된 정형과 강퍅한 정형, 이치를 따지는 정형을 해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에게는 ‘내가 한 것이 상식에 맞기만 하면 당신의 말이 틀리기에 나는 사리에 맞게 순복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이러한 정형들이 늘 나타난다. 그러나 네가 만약 그런 이성을 갖추었다면 일부분의 이런 정형을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저는 깔끔한 것을 좋아합니다. 냄새나는 것을 싫어하고 더러운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며 역겨운 것을 보기 싫어합니다.”라고 말한다. 만약 하나님이 너에게 환경을 배치해 너와 한 침대를 쓰는 그 사람이 저녁에 잠을 잘 때에는 코를 골고, 밥을 먹을 때에는 입을 쩝쩝거리고, 한가하면 이를 쑤시고, 큰소리로 가래를 뱉고, 코를 풀고는 아무데나 문지르며 유독 네가 싫어하는 것만 한다면 이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사람을 미워하면 되겠는가? 네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귀찮아 하지 않고 그 사람을 도와 나쁜 습관을 고쳐 주려고 한다면 이 목적과 속마음이 맞는가? (틀립니다.) 그러면 너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순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안배하신 것인데 제가 투정이 너무 심합니다. 밥 먹을 때 파리가 옆에서 윙윙 거려도 밥을 못 먹고, 누가 이를 쑤시고 있는 것을 봐도 역겨워서 밥을 먹지 못하는데 저는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많다 보니 어떤 사람은 밤에 잘 때 늘 방귀를 뀌고 코를 고는데 문제가 많다. 네가 상대방의 이것도 싫어하고 저것도 싫어한다면 곤란하다. 비록 네가 잠을 잘 수는 있지만 속으로는 늘 ‘이렇게 고귀한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랑 함께 섞여 있지?’라고 여기고 밥 먹을 때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얼른 피하거나 그 사람의 쩝쩝거리는 소리를 듣고서는 “역겨워요, 좀 그만 쩝쩝거리고, 그 나쁜 습관 좀 버리세요. 저는 그 쩝쩝거리는 소리만 들으면 구역질이 나요.”라고 말한다. 일을 이렇게 처리하면 되겠는가? 비록 말을 직설적으로 했고 진솔한 말이지만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사람에게 덕이 되지 않는다. 그는 입을 쩝쩝거린 지 오래되었기에 쩝쩝거리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가 없다. 그는 오히려 입을 쩝쩝거리지 않는 네가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당신은 밥을 먹으면서 왜 소리도 내지 않아요? 맛이 없어요? 뭘 그렇게 우아한 척해요?’ 그렇다면 서로가 적응을 해야 한다. 사람이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한평생 십중팔구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다. 이것도 눈에 거슬리고 저것도 눈에 거슬리는데 어떤 것은 사실 자신의 문제이기에 별것 아닌 일에 크게 놀라지 말라. 사람이 오래 살다 보면 자신도 존귀하지 않고 남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고 고상하고 존귀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누가 입을 쩝쩝거려도 못 들은 척하고, 누가 가래를 뱉어도 못 본 척하고, 누가 크게 코를 풀어 몸에 비벼도 모른 척해야 한다. 어떤 형제들은 이런 나쁜 버릇이 있다. 코를 풀고는 손등에 문지르고 몸에도 비비는데 옷이 온통 다 번들거린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건강하고 큰 병이 없다. “깨끗하지는 않지만 먹어도 병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를 봐라, 이것도 문제고 저것도 문제고 늘 깔끔 떨더니 오히려 바짝 말라서 온몸에 병뿐이다. 누굴 탓하겠는가?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우선 견식을 넓혀야 한다. ‘별의별 사람이 다 있고 별의별 생활 습관도 다 있는데 생활 습관은 인성이 아니다. 너의 생활 습관이 규칙적이고 정상적이고 고상해도 너에게 진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일을 꿰뚫어 보아야 하고 이 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에게 안배한 이 환경은 너무 좋다. 너에게 문제가 너무 많아 적응하는 것을 배우게 하는데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잡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와 잘 지내고 그에게 다가가고 그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 그다음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신의 나쁜 습관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순복하는 태도와 실행이다. 만약 정말 싫어서 견딜 수가 없고, 자신이 비위가 약해서 늘 밥을 먹지 못하고 늘 토하고 식욕에 영향을 줘서 건강이 나빠져 본분을 할 수 없다면 좀 멀리하고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말라. 무엇을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하는가? ‘그 사람의 나쁜 버릇을 고쳐 놔야지, 그의 나쁜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내 성을 갈 거야!’ 이렇게 처신한다면 어떤가? 건방지고 방자하고 무지한데 이런 사람이 되지 말라. 우리는 눈 둘에 코 하나에 입 하나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다. 남이 입으로 밥을 먹으면 너도 입으로 밥을 먹어야지 코로 밥을 먹는다면 사레들린다. 남이 두 다리로 걸으면 너도 두 다리로 걸어야지 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이 손으로 일하면 너도 손으로 일해야지 발로는 하지 못한다. 너는 어떤 특별한 것이 없고 그 어떤 초능력도 없으며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도 없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일 뿐이기에 자신을 너무 존귀하고 위대하게 보지 말라. 설령 특별한 기술과 특기가 있다 하더라도 자랑할 것 없다. 우선 자신의 위치에 정확히 잘 서야 일이 닥치면 크게 놀라거나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대지 않고 순복할 수 있다. 주위의 이러한 일들을 너는 꿰뚫어 보아야 한다. 정말 순복할 수 없어서 너무 괴롭고 생활에 영향을 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기도해서 하나님이 지배하게 하고 하나님이 하게 해야지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훈련하게 한다면 순복하고 훈련해서 성과를 얻고 사람다운 모습을 살아내어 하나님으로 하여금 보게 하고 만족하게 해야 하는데, 우선 고통받을 심지가 있어야 한다. 환경에 순복한다는 것에서 이 환경이 많은 경우에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단지 눈앞에서 어떤 사람이 쩝쩝거린다든가 방귀를 뀐다든가 코를 곤다든가 코를 푸는 것만이 아니다. 너는 이러한 나쁜 습관을 가진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한 성품에 관련된 일과 성격에 관련된 일 그리고 행위에 관련된 일들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러므로 너는 일을 하고 일을 처리하거나 혹은 일이 닥쳤을 때 자기 뜻에 따라 하지 말고 혈기에 따라 하지 말라. 우리가 기도를 해서 하나님 앞에 오고 하나님이 하기를 구하는 것이 순복하는 태도이고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마음의 교양이다. 만일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이러한 환경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고 자신이 무리하게 나서서 하나님보다 먼저 나서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살아야 가치가 있다.

순복하는 공과는 그렇게 배우기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마다 다 진공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활상에서 보면 사람은 모두 먹고 마시고 싸고 자고 모두 여러 가지 감정과 욕망이 있고 모두 개개인의 소망과 주관적인 생각과 욕구가 있다. 객관적인 생활 조건에서 보면, 어떤 사람이 말을 하고 일을 하든 모두 너의 뜻과 완전히 맞을 수는 없다. 그래서 가장 필요한 공과가 바로 각 사람이 이러한 환경에 순복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려는 소망과 목표에 따라 실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는데 네가 그 콧물을 굳이 싫어해야겠는가? 네가 다른 사람이 쩝쩝거리고 방귀 뀌고 코 고는 것을 굳이 싫어해야겠는가? 네가 “그 사람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으니 나도 실행하지 않겠다. 그 사람도 순복하지 않는데 왜 나보고 순복하라고 하는가? 그 사람도 참지 않는데 왜 나보고 참으라고 하는가? 그들이 항상 하지 않는 일을 무엇 때문에 늘 나보고 하라고 하고 나 혼자만 고생하게 하는가?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은 하지 않는가? 나도 안 할 거야!”라고 한다면 이 태도가 어떤가?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은 너의 일이고 너와 하나님 사이의 일이지 다른 사람과는 상관이 없고 다른 사람은 너와 협력해 줄 어떠한 의무도 없다. 너는 너고 그는 그다. 그가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지 않는다면 최후에 버림받는 사람은 그 사람이지 네가 아니고 너는 손해 보지 않는다. 네가 말해 봐라,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하면 손해를 보는가? 만약 너희가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너무나 어리석다.

그래서 진리를 놓고 말할 때, 설마 깨알만한 한두 마디 말씀이라고 해도 네가 만약 그것을 진리로 여겨 이 진리, 이 “깨알”이 너의 안에서 뿌리내리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너의 생명으로 된다면 너는 진리를 살아내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좋은 결과인 것이다. 하지만 만약 네가 이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내가 한 광주리나 한 포대 또는 한 열차라고 말해도 너희가 아무도 마음에 두지 않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으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게다가 자기의 의향과 상상, 관념대로 산다면 내가 헛되이 말한 것이 아닌가? 진리는 양의 다소에 있지 않고 너희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실행하느냐에 달렸다. 진리는 정말 사람의 생명이지 하나의 학문이 아니고 지식이 아니며 어떠한 민속이나 하나의 논조도 아니다. 진리는 곧 사람의 생명이므로 너에게 살아가는 방향과 목표가 있게 하고 사탄의 매임에서 벗어나고 패괴 성정을 벗어 버리게 하여 더욱 힘이 있게 하고 굳세게 살게 하며 삶의 목표가 있고 더 윤택하게 한다. 진리는 사람의 생명으로 될 수 있다. 네가 믿어지지 않는다면 테스트해 보아라. 만약 네가 늘 연약하고 소극적이라고 느낀다면 진리를 얻지 못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네가 진리를 얻었다면 현재 그렇게 무기력하고 연약하고 힘없고 늘 소극적이고 늘 세 갈래 길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그런 정형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이것은 100%다! 너희는 이 다섯 가지를 모두 기억하라. 할 일이 없을 때 너희는 매 한 가지를 놓고 마음을 나누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 어떤 것을 실행했는지, 한동안 어떤 것을 실행했는지, 일을 함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일을 하고 본분을 하는 가운데서 진솔한 마음이 있었는지, 대충대충 해 속이는 정형이 있었는지, 늘 대충대충 해 속이려는 생각이 있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일정한 기간마다 반드시 성찰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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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전족: 중국 당나라 시기에 여성의 발가락을 발바닥 쪽으로 구부려 발이 자라지 못하게 헝겁으로 동여매는 풍습으로, 보수적이고 소심한 사람을 비유.

③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④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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