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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5편 진심을 하나님께 맡기면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자신의 속셈과 욕망을 내려놓아야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다

인솔자는 인재를 질투하지 말라. 이러면 너희는 합격되고 너희의 책임과 충성을 다한 것이다. 너희는 남들이 너희보다 뛰어나고 다른 사람이 인재가 되어 너희보다 두각을 나타낼까 봐 늘 두려워한다. 이것은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질투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표현인가? 이것은 어떤 성품인가? 바로 악독한 것이다! 자신의 이익만 고려하고 자기 욕심만 만족시키면서 오히려 하나님 집의 이익이나 다른 사람의 본분은 고려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은 개인의 이익에 관련되지 않는다. 네가 다른 사람을 인재로 배양해서 하나님 집에 인재가 또 한 명 늘면 사역을 잘한 것이 아닌가? 네가 본분을 함에 있어서 충성을 다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한 것이다. 너는 일을 함에 있어 사람 앞에서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하고 하나님의 감찰과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이러면 너의 마음을 바로잡은 것이다. 네가 늘 사람에게 보여 주려고 생각하면 너의 마음을 늘 바로잡을 수 없다. 그 밖에, 일을 함에 있어 늘 자기를 위하거나 자기의 이익, 지위, 체면, 명예를 고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놓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본분을 함에 있어 섞임이 있는지, 충성을 다했는지, 책임을 다했는지, 전력을 다했는지, 온몸과 마음을 다해 본분을 잘했고 하나님 집의 사역을 위해 생각해 봤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너는 이런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면 네가 본분을 하는 것이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설령 네 소질이 낮고 체험이 얕으며 경험이 없거나 혹은 업무에 익숙하지 못하고 능통하지 못해 사역하는 가운데 약간의 실수와 결점이 있거나 혹은 더 잘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너는 이미 최선을 다했고 네가 한 것은 개인의 사욕이나 자신의 이익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 매사에 하나님 집의 사역을 고려하고 하나님의 이익과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생각한 것이다. 너의 마음을 바로잡으면 네가 하나님 앞에서 선을 쌓는 것이다. 이렇게 선을 행하는 사람은 진리 실제가 있는 사람이 아닌가? 이러면 간증이 있는 것이다. 네가 늘 개인의 욕심에 따라 살고 늘 자신의 사욕을 만족시킨다면 하나님 앞에서 간증이 없고 사탄 앞에서 간증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기호(記號)이고 매사에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입니까?”라고 너는 말하는데, 네 마음과 생각, 일하는 속셈, 일하는 목적, 일하는 동기, 일을 저지른 결과는 매사에 사탄을 만족시키고 사탄의 웃음거리가 되게 하며, 또한 사탄에게 약점을 잡혀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간증이 조금도 없다. 네가 매사에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진실한 간증이 없다면 하나님이 네가 한 것을 기억하겠는가? 마지막에 하나님은 너의 모든 행위와 네가 한 본분에 어떤 결론을 내리겠는가? 공정한 결론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성경에 주 예수가 말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무엇 때문에 주 예수가 이 말씀을 했는가? 주의 이름으로 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전도하면서 뛰어다닌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악을 행한 사람이 되었는가? 악을 행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그 사람들인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인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또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포기하며 자신의 본분도 다했지만, 본분을 함에 충심이 없고 간증이 없으면 이런 사람은 악을 행한 사람이 된 것이다.

사람의 모든 행위가 선인지 악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네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 유로(역주: 흘러나옴)하는 것, 행하는 것에 진리를 실행한 간증과 진리 실제를 살아낸 간증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너에게 만약 이런 실제와 살아냄이 없다면 의심할 것 없이 너는 바로 악을 행한 사람이다. 악을 행한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겠는가? 즉 네가 마음에 생각한 것과 겉으로 한 것은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거나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패배시킨 것이 아니라 매사에 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기호가 되는 것이고, 또한 너는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너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을 위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함’이라는 속뜻은 무엇을 위함인가? 사탄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하나님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할 것이다.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고 상이 없으며 하나님 편에서는 선행이 아니라 악행이 된 것이다. 이것은 수포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지금 네가 주관적인 의향에서 진리를 추구하기 원하든 아니면 무엇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인지를 잘 모르든 간에 가장 간단한 한 가지 실행법은 바로 먼저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고 매사에 하나님 집의 이익을 생각하며, 개인의 욕심과 체면, 지위 그리고 개인의 동기와 속셈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것은 최소한 해야 할 것이다. 만약 본분하는 사람이 이 정도도 할 수 없다면 본분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러면 본분을 하는 것이 아니다. 너는 먼저 하나님 집의 이익과 하나님의 이익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것을 다 우선순위에 놓고 그런 다음 자기의 위치에 똑바로 섰는지 다른 사람은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러면 되지 않겠는가? 두 단계로 행하고 절충하면 너희는 어느 정도 쉽다고 느껴지지 않겠는가? 시간이 지나다 보면 너는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느껴질 것이다. 그 밖에, 사람이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자신의 의무와 본분을 다하며, 개인의 욕심과 자신의 속셈 그리고 동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이익과 하나님 집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놓을 수 있다면, 이렇게 처신하면 좋고 사는 것이 광명정대하며 무능하지 않고 추하거나 비열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 마땅히 살아내야 할 형상이고 당연히 해야 할 것이다. 서서히, 네가 개인의 이익을 만족시키려는 욕망은 점점 더 작아진다.

일부 사람들은 비록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오래되었지만, 진리를 추구하고 실행하며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면의 공과에 진입한 것이 깊지 않고, 진실된 경험 또는 체험이 별로 없으며 진실한 간증도 내놓을 수 없다. 지금 너희에게 간단한 실행법을 하나 알려 주겠다. 먼저 자신의 속셈과 이익 그리고 개인의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이렇게 한동안 실행하면 네 안의 정형에 부지중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 희미하고 별로 흥미도 없고 그다지 싫어하지도 않는 이런 애매모호한 정형에서 다른 한 가지 정형으로 바뀌게 된다. 즉 하나님을 믿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좋다고 느끼며,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 동력이 있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에 흥미를 느끼고, 이렇게 사는 것이 의의 있고 마음이 윤택해지며 심령이 안정되고 평안하며 누림이 있다고 느낀다. 이것이 바로 성과이다. 이 성과에 사람이 협력한 한 측면도 있고 성령 역사의 한 측면도 있다. 반대로 사람 안에 만약 한 가지 좋지 않은 정형이 있다면 예를 들어, 의기소침하고 소극적이며 연약하거나 취약하며, 혹은 무능하고 혹은 약간의 비열한 속셈이 늘 있거나 혹은 개인의 소질이 낮다고 여기고 혹은 체면, 사욕, 이익 이런 것에 늘 시달림을 받는 이런 상태에서 살고 있다면 성령 역사를 얻기가 매우 어렵다. 성령 역사를 얻기가 매우 어렵다면 사람 안의 적극적인 것이 매우 적고 진리를 얻기가 매우 어렵다. 사람이 늘 의지로만 누르면 이렇게 저렇게 억제해도 소극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며 그런 정형에서 여전히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사람이 자기에게 적합한 실행의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고 다른 측면 또한 중요한데, 바로 사람이 항상 소극적이고 의기소침하며 부정적이고 타락된 그런 정형에 빠지고, 이런 것에 점유되어 성령의 깨우침과 빛비춤 그리고 새로운 빛을 얻기 매우 어려우며, 성령이 간혹 너에게 깨우침을 주지만 크게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매우 힘들고 어떤 일을 봐도 쉽게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너의 소극적인 정형은 바뀔 수가 없고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이 두 방면의 원인으로 인해 너는 적극적이고 정상적인 정형에 진입하기 매우 어렵다. 비록 너희가 지금 본분을 함에 있어서 고통과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으며 많은 공을 들이고 가정과 직업을 버리고 뭐든 다 버렸지만, 사람 안의 정형은 아직 진정한 변화를 얻지 못했다. 너를 묶어 진리를 실행할 수 없게 하고 진리의 실제에 진입하는 것을 깨달을 수 없게 하는 얽매임이 너무 많고, 개인의 관념, 상상, 지식, 처세 철학 그리고 개인의 소극적인 것과 개인의 욕심, 이익, 체면, 사람들 사이의 분쟁 등 이런 각 방면의 것들이 사람 안에 가득 찼다. 사람 안에 긍정적인 것은 없고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것은 머릿속에 꽉 찼으며 사람의 마음은 사탄의 것으로 가득 차고 점유되었다. 이것은 각 사람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네가 이런 것을 제거하지 않고 이런 정형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활발하고 귀엽고, 순진하고, 단순하고, 진실하고, 순결한 어린아이의 진정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올 수 없다면 너는 진리를 얻기 매우 어렵다.

현재 너희 몸에 취할 만한 것이 한 가지 있다. 즉 너희의 고생하려는 심지와 믿음인데 바로 이 점이 너희를 구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고생하려는 심지가 없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려는 정신과 동력이 없으며 본분을 함에 힘이 없다. 어떤 사람은 한동안 본분을 하다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돼 떠났는데, 배우자를 구한 사람도 있고 결혼한 사람도 있으며 직장을 다니는 사람도 있고 돈벌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는 여기에서 시간을 쓰면 아무런 결과도 없을 것 같아 시간을 들일 신심이 없는데, 이것은 청춘과 좋은 시간을 허비하고 생명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다행히도 너희 대부분은 이런 것에 얽매이지 않고 일찍이 여기에서 나왔다. 하지만 너희의 머릿속에 꽉 찬 관념, 상상, 지식, 개인의 속셈과 욕망은 아직도 그대로이다. 그래서 하나님 집에서 독창하는 사람, 선창(先唱)하는 사람, 지휘자, 낭송 인재 그리고 작사 작곡이 가능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 지위와 체면 그리고 명예에 관련되니 각 사람마다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고 항상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하거나 ‘큰 그릇’이 되고 싶어하며, ‘스타’가 되려 하고 늘 유명해지고 싶어하며, 늘 자기를 부각시키고 싶어하며 양보하려 하지 않고 항상 겨루려 한다. 겨루지 않자니 내키지 않고 겨루자니 체면이 서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 집에서는 서로 빼앗는 것이 먹히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두각을 나타내는 것을 보면 질투하고 미워하며 불공평하다고 여긴다. ‘왜 나는 나서지 못할까? 왜 항상 나는 빠지지? 왜 자꾸 그 사람보고 나서라 하고 나에게는 차례가 오지 않는 거지?’라고 조금 원망을 한다. 원망이 있으면 억제하고, 억제할 수 없으면 기도한다. 기도하면 한동안 좋아지지만 나중에 이런 일이 또 임하면 역시 이겨 내지 못한다. 이것은 분량이 작은 것이 아닌가? 이런 정형은 올무가 아닌가? 이것은 사람에 대한 사탄의 패괴 본성의 결박이다. 너희가 생각해 봐라, 사람이 만약 이런 패괴된 성품에서 벗어난다면 자유롭고 해방된 것이 아닌가? 사람이 무엇을 얻어야 비로소 이런 것의 곤혹과 얽매임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을 수 있는가? 한 방면은 일을 꿰뚫어 봐야 한다. 이런 명리와 지위가 바로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키고 옭아매며 잔혹하게 해하여 사람을 타락시키는 도구와 방식인데, 이론 상에서 먼저 이 방면을 간파해야 한다. 그 밖에, 이런 것을 내려놓음에 있어 그 어떤 사람에게든 즉 젊은이든 늙은이든, 새신자든 오래 믿은 사람이든 간에 다 난이도가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 난이도는 성격이 외향적인 그 사람들보다 적지 않다. 각 사람마다 이 일에서 이겨 내지 못하는데, 사람 안의 정형은 같다. 사탄이 사람을 이런 것으로 패괴시켜 사람에게 이런 것을 채워 넣을 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패괴 본성은 같으나 단지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즉 어떤 사람은 말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말해서 드러나며, 어떤 사람은 겨루고 빼앗고, 어떤 사람은 겨루지도 빼앗지도 않지만 뒤에서 나쁜 짓을 하고 말을 퍼뜨리며, 어떤 사람은 속으로 불평하고 불만을 털어놓고 물건을 내팽개치고 부순다. 방식이 다르지만 본성에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이 다 같으며 대부분 다 이런 것이다. 이런 것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너희에게 길이 있는가? 네가 늘 이런 것을 잡고 겨루기에 마음속에 이런 것들로 꽉 들어찼고, 늘 잡고 놓지 않으려 하기에 이런 것에 통제되고 얽매여 그것의 노예가 되었으며 내려놓지 못한다. 너는 겨루지 말고 빼앗지 말며, 나서는 일이나 체면을 세울 일이 임하면 머리가 터지도록 겨루려 하지 말고 빼앗으려 하지 말라. 너는 포기하고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하고 양보할 줄 알아야 하며 다른 사람을 추천하여 나서게 하면서 자신은 뒤로 물러설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본분은 지체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해도 사람 앞에서 본분하여 드러내 보이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묵묵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가 포기하고 내려놓을수록 마음이 더 평안해지고 마음의 여유가 점점 커지며 너의 정형이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네가 겨루고 빼앗을수록 너의 정형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질투심과 미워하는 마음도 더 커지며 더 얻고 싶어진다. 얻고 싶어할수록 얻지 못하고, 얻지 못할수록 너는 더욱 미워하게 되며, 미워할수록 너의 안이 더 캄캄해지고, 캄캄해질수록 너는 본분을 잘하지 못하게 되며, 본분을 잘하지 못하면 점차적으로 너를 쓰지 않게 되고 너는 도태된다. 이것이 바로 악순환의 고리인데 믿지 못하겠다면 네가 시험해 봐라! 네가 이런 정형을 되돌리고 싶어하고 이런 것에 통제받지 않으려 한다면 너는 반드시 먼저 내려놓고 먼저 포기해야 한다!

성령이 사람 몸에서 역사하여 사람의 한 가지 정형을 되돌리려면 사람이 상당한 정도로 변화되고 내려놓고 고생해야 하며 또 사람이 포기해야 하고 조금씩 되돌리고 협력해야 한다. 네가 잘 하지 않고 늘 나서려고 하며 늘 지위를 다투고 체면을 세우고 명예나 이익을 다투려 하는데, 너는 효력하고 싶은 것인가? 네가 효력하고 싶다면 해도 좋다. 하지만 네가 효력을 다 하기도 전에 아마 드러날 것이다. 너를 드러내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다. 드러나기만 하면 너의 마지막 날이 온 것인데 말일이 오면 되돌리기가 쉽겠는가? 그때면 정형이 바뀔 수 있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자칫하면 결말이 정해지게 되는데 그러면 위험하다. 사람은 평소에 패괴 성정을 유로하고 작은 잘못을 좀 범하거나 개인의 욕심을 만족시키고 속셈을 갖고 말하며 기만한다. 그러나 만약 큰 문제가 생기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고 하나님 사역에 엇나가지 않고 방해하지 않는다면 다 봐줄 수 있다. 하지만 일단 큰 화를 저지르고 큰 악을 행했다면 되돌릴 수 있겠는가? 마치 부부간에 약간의 마찰이 있고 조금 나무라거나 우연히 말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 해도 서로 참고 양보하고 한 걸음씩 물러서면 함께 생활할 수는 있지만, 만약 상대방이 외도하고 뉘우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도 돌이킬 수 없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너에게 마음이 없고 사랑하지 않으며 마음속에 네가 없고 꼭 다른 사람과 살려 하고 너와 같이 살 수 없다면 이런 혼인은 파탄이 나서 이혼할 수밖에 없다. 설사 두 사람이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한다고 해도 혼인은 이미 유명무실해져 이혼을 하나 안 하나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본분을 하면서 만약 그 정도에까지 이르렀다면, 다시 말해서 네가 좋은 기회를 아주 많이 놓치고 너의 마음이 계속 강퍅하고 계속 회개하지 않고 뉘우치지 않으며 하나님이 아무리 너에게 기회를 줘도 네가 무작정 그렇게 하고 그렇게 추구하며 자기의 속셈과 목적 그리고 추구하는 방식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어느 날 한 가지 작은 일이나 한 마디 말에서, 또는 하나의 아주 평범한 환경에서 너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없고 진리를 얻을 수 없으며 줄곧 각종 속셈과 사탄의 패괴 성정에 묶여 통제되어 있는데, 이런 속셈과 개인의 욕망에서 살면서 나오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아주 위험하다. 실족하고 드러나는 것도 조만간의 일이다. 아마 네가 지금은 넘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넘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아마 네가 지금은 여전히 본분을 할 수 있고 몸과 마음을 바칠 소망과 염원이 좀 있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위해 고생하고 온전케 될 심지가 좀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으로 네가 진리 실제에 진입했음을 대신할 수 없고 네가 앞으로 연약해지지 않는다거나 실족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살얼음 위를 걷고 칼날 위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바로 이방인들이 말하는 ‘임금을 모시는 것은 호랑이를 옆에 두는 것과 같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건 정말로 무시무시한 일입니다! 말 한 마디 잘못하고 일 하나 잘못 처리하면 도태되고 끝장나며 목숨을 잃고 지옥에 떨어져 멸망됩니다!” 이런 말들이 옳은가? 모두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말의 표면적인 뜻은 대략적으로 모두가 아주 위험하다는 뜻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사자와 호랑이를 길들이는 것처럼 매일마다 살얼음 위를 걷고 칼날 위에서 사는 것과 같다. 호랑이와 사자는 냉혈동물이어서 사람과 아무리 오래 함께 지낸다 해도 정이 없으며 야수의 본성이 수시로 발작해 너를 잡아먹고 싶으면 잡아먹고 해치고 싶으면 해친다. 네가 그것을 길들여 너를 알아보고 주인으로 여긴다 해도 굶주리거나 일단 피비린내와 땀내를 맡으면 그것이 너를 잡아먹을 것인데 사람을 잡아먹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그럼 이런 말을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데에 적용하면 맞는가? 너희는 가끔씩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믿는 건 정말 살얼음 위를 걷는 것과 같아 언제 끝장날지 모를 일이야.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 건 순식간의 일이어서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교체하고 싶으면 교체하며 누가 눈에 거슬리면 도태시키고 드러내고 내버리며 안 쓰겠다고 하면 안 써.’ 이런가? (아닙니다.) 보아하니 모두가 이 일에 대해 다 체험이 있고 알고 있어서 미혹되지 않을 것 같다. 이것은 그릇된 논리이고 황당무계한 논법이다.

사람이 간사하든 혹은 솔직하고 패기가 없고 나약하든 사람의 속셈과 욕망은 다 비슷하다. 너희가 이런 정형에서 벗어나고 되돌릴 수만 있다면 최소한 너희 눈앞의 본분을 잘할 수 있다. 만약 너희가 늘 속셈을 갖고 개인의 동기와 욕망을 품고 본분을 한다면, 이 본분을 잘하기 매우 어렵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하기가 매우 어렵다. 비록 너희가 지금 건성으로 하고 속이며 섞임도 너무 많지만 이런 것을 상관치 말라. 우선 속셈과 욕망을 다 해결하면 네 안의 정형도 점차적으로 바뀌게 된다. 정형을 잘 조절하고 바꾸어서 적극적인 것이 점점 많아지면 네가 하는 본분에 섞임이 점점 적어지고 너의 마음이 갈수록 단순해지고 간단해지는데, 바로 본분을 잘하기 위해서 본분을 하게 된다. 이러면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 그런 생각과 관점 그리고 철학이 너를 쉽게 통제할 수 없어 너는 갈수록 해방되고 홀가분해지며 유쾌해진다. 네가 봐라, 만약 사람이 보따리를 이고 주전자, 솥, 삽, 숟가락에 가방 2개를 들고 게다가 아이 둘을 데리고 부엌 세간들을 쨍그랑쨍그랑 소리내며, 아빠 엄마를 부르며 칭얼대는 애까지 질질 끌고 길을 다니면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고 몸이 가볍지 않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겨우 이런 물건들을 다 내려놓으면 어떤 느낌이겠는가? 갑자기 홀가분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제 보니 이런 것을 메지 않으면 이렇게 홀가분하구나!’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방과 자유를 얻은 느낌이다. 어느 날엔가 너희가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얻으면 일기 한 편을 쓰거나 영적 수양 노트를 해서 네가 어떤 짐을 내려놓았는지, 어떤 속셈을 발견했는지, 자기의 어떤 방면의 속셈과 동기를 배반했는지, 마음속에 어떤 느낌이 있는지, 어떤 깨우침을 받았는지, 정형은 어떻게 되돌린 것인지 이런 것들을 기록하라. 언젠가 네가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얻고 어떠한 짐이나 얽매임도 없어졌다면 곧 자유인이 되고 욥과 같은 사람이 된 것이다! 욥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홀가분하게 그 몇 마디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이 하루아침의 일이겠는가? 그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라 하루하루, 한 해 한 해 연단 받아 조금씩 내려놓은 것이다. 네가 내려놓을수록 홀가분해지고 마지막에는 자유로워지고 해방될 것이다. 어느 날 네가 자유로워지고 해방될 때 너는 네가 버린 그런 것이 짐이고 네가 진정 얻은 것은 귀중한 보배로 되었으며 가장 가치가 있고 가장 귀하게 여길 만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너는 네 자신이 좋아하는 물질적인 누림과 명리, 지위, 돈, 사람의 과대 평가 또는 체면들이 가치없고 너를 해롭게 했다고 느끼기에 도로 너에게 줘도 싫다고 할 것이고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은 아직 안 된다. 벗어날 수가 없다. 말해 보라, 사람이 사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겨루지 않으면 또 내키지 않고 겨루자니 그 길이 옳지 않다고 느껴져 우왕좌왕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의 참상이고 가련한 모습이다. 마음속은 온종일 한 가지 작은 일로 뒤집히고 부글부글 끓지만 겉으로는 그래도 매우 냉정하다. 네가 말해 봐라, 이 사람의 꿍꿍이속이 얼마나 깊은가! 나이는 어리지만 너무 노련하고 속셈이 너무 깊어서 겉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는데 모두 ‘사회인’이다. 인류에게는 기본적으로 이런 얕은 인식밖에 없다는 것을 체험하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너희는 지금 아마도 그런 것이 얽매임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마치 그 ‘퉌라오얼’(屯老二)과 같다. 배낭을 여러 개 짊어지고 열차 시간에 맞춰 간신히 차에 올랐는데, 매표원이 “손님, 배낭을 내려놓으세요, 차에 타면 멜 필요 없어요. 무겁잖아요.”라고 말하자 그가 어떻게 대답했겠는가? “감사합니다, 제가 앉은 것만 해도 무거운데 짐까지 내려놓으면 더 무겁지 않겠습니까? 차를 좀 가볍게 해 줘야죠!” 늘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차에 오르자마자 서둘러 물건을 선반 위에 올려놓거나 바닥에 내려둔다. “짐을 멨더니 정말 힘들어, 이젠 차에 올라 탔으니 잠깐 쉬어보자!” 그런데 ‘퉌라오얼’은 이 도리를 모르기에 차를 탔어도 여전히 배낭을 메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있지 않는가?

지금은 너희가 본분을 하는 가장 좋은 시기이다. 어떻게 패괴 성정을 벗어버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얻을 수 있는지를 체험하며, 어떻게 충심으로 자신의 본분을 잘하는지를 체험하고, 어떻게 속이지 않고 자기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는지를 체험하고, 본분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행사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행사를 보는 것을 체험하는데, 이것은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어느 날엔가 너희가 조금 바뀌어 지금처럼 너희에게 지위를 다투려 하지 말고, 남을 질투하지 말며, 체면 싸움을 하지 말라고 하면 괴로워서 ‘이건 너무나 어려워, 뭐든 다 상관하네!’라고 느끼지 않고 이 일을 말하기만 하면 “말할 필요 없어요, 우린 이젠 이런 걸 겨루려 하지 않아요. 서로 양보하면서 이런 일의 구속을 받지 않죠. 이런 것은 다 애들이나 이방인들이 하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오랫동안 믿었는데, 아직도 이런 분량이 없겠어요? 누구한테 차례가 가면 누가 하는 게 공평하고 합리해요.”라고 말할 수 있다면 된 것이며 누구나 다 정상적으로 본분을 할 수 있다.

만약 한 사람이 늘 진실한 말을 하고, 솔직한 말을 하고, 평범한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은 희망이 있다. 만약 그 사람이 항상 포장하고 감싸며 늘 가상(假象)을 보인다면, 그 사람은 위험하다. 큰일인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상 생활 속의 말과 행동에서 그 사람의 앞날이 어떠할지를 알 수 있다. 그 사람이 늘 가장하고 폼을 잡는다면 위험한 것이고, 바른길을 가지 않는 것이다. 너희는 어떤 길을 가는 사람이냐? 진솔한 사람이 되는 이 길을 가면 어떤 상황에서든 다 옳은 것이다! 다른 사람이 너를 바보라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당신은 왜 어떤 말이든 다 하죠? 자신이 생각한 일까지 다 다른 사람에게 알게 하는데, 왜 그렇게 어리석죠?”라고 말한다면, 너는 이 말을 듣고 나서 어떤 느낌이겠는가? (상관없습니다.) 그러면 된 것이다. “상관없어요. 좋을 대로 생각하세요. 진솔한 사람이 되는 것은 저의 일이고 저의 책임이며 제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선택해야 할 가장 정확한 길이 바뀌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된다. 사람이 늘 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항상 속이고 숨기며 늘 폼을 잡고 꾸미며 항상 다른 사람에게 과대 평가를 받으려 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진실한 생각과 진실한 정형 그리고 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것을 싫어한다면 이런 사람은 어리석지 않으냐? (어리석습니다.) 그가 가는 것은 어떤 길이냐?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길입니다.) 바리새인이 갔던 길은 위험하지 않으냐? 그것은 어떤 길이냐? 멸망의 길이다!

진솔한 마음을 갖추어야 진리를 얻을 수 있다

지금 너희는 어떤 시련을 감당할 수 있는가? 너희에게 이미 토대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시험이 임하면 굳게 설 수 있는가? 예컨대, 환경, 지위와 명예, 혼인, 돈의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는가? 시험은 여러 등급으로 나누는데, 너희는 어느 등급의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네가 아는 한 사람이 인성이 괜찮고 하나님을 아주 열심으로 믿으며 가정과 직업도 버리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잡혀 형을 선고 받고 나중에 또 그가 맞아 죽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면 이것은 너에게 있어 시험이 아닌가? 이런 시험 가운데서 너는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 이런 일이 임하면 너는 진리를 찾고 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진리를 찾고 구하겠는가? 어떻게 자신이 이런 시험에서 굳게 설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들어도 아마 네가 두려워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잡혀가는 것을 보거나 다른 사람이 모진 고문을 받는 것을 봐도 아마 두렵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너에게 직접 이런 환경이 닥치면 너는 굳게 설 수 있는가? 이것은 큰 시험이 아닌가? 이런 시험을 이겨 내기 쉽겠는가? 이것은 특별한 일이 아닌가? 특별한 일과 일반 규칙에 어긋나는 일을 너는 어떻게 체험하겠는가? 어떻게 아무런 원망도 없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아무런 관념도 없으며 순조롭게 이런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것이 아닌가? 너희가 지금 어느 단계의 분량을 갖추었고 어느 등급의 시험을 감당해 낼 수 있는지 마음속에 자신이 있는가? 너희는 자신이 어떤 분량을 갖추었는지, 어떤 진리들을 장비했는지, 어떤 시험을 이겨 낼 수 있는지, 어떤 시련이 임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시련 속에서 네가 마땅히 어떤 진리를 구비하고 추구해야만 하나님이 만족해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이런 것을 마음속으로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것, 사람이 자주 부딪치는 것, 자주 말하는 것, 사람의 생각속에 갖춰져 있는 일이나 사물이 너에게 임하면, 사람의 관념과 상상에 비교적 부합되는 것은 네가 이겨 낼 수 있지만, 만약 너의 관념과 상상에 부합되지 않는 한 가지 일에 부딪치면 어떻게 체험하겠는가? 네가 어떻게 진리를 장비하고 어느 방면의 진리를 장비해야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마땅히 찾고 구해야 할 것이 아닌가? 너희가 평소에 겪는 시험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지위, 명예, 남녀 이런 것은 대부분 다 흔히 보는 것이다. 흔히 겪는 이런 것에 대해 너희의 지금의 분량대로라면 너희는 어떤 시험 가운데서 자신을 장악할 수 있고 자신의 본분을 잘할 수 있으며, 진리에 어긋나는 일, 엇나가거나 방해하는 일, 대적하거나 거역하는 일,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방면에 실행의 길이 있는가? 한 방면으로는 자신을 성찰하여 자신에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없는지를 봐야 한다. 다른 한 방면으로는 또 항상 진리를 찾고 구하면서 자신이 행한 것이 진리에 부합되는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되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것인지,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인지를 봐야 한다. 네가 이 두 가지 방면에 모두 도달한다면 본분을 잘할 수 있다.

시험이 임할 때 어떤 사람은 “대부분의 경우에 저는 어떻게 구해야 할지 모르겠고 구해도 답을 찾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많은 경우에 저는 기도하고 구하고 기다리기도 했지만 결과가 없었습니다. 또 하나님 말씀이 너무나 많아서 저는 어떤 말씀에 비춰 봐야 할지,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너희가 일에 부딪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는 하나의 최저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목숨을 구하는 한 올의 지푸라기이고 한 방면의 실행 원칙이자 가장 잘 지켜야 할 최저선이기도 한데, 이 최저선이 바로 양심에 따라 일을 하는 것이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때 너의 양심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너의 인성이 어떠한가에 달렸다. 네가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양심적이지도 않기에, 네가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 어떤 부분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어떤 마음도 볼 수 없다. 이것은 어떤 사람인가? 정확한 정의는 바로 이런 사람은 인성이 없고 사람의 최저선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그는 양심이 없고 이지와 양심에 따라 일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많은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원칙도 장악하지 못했기에 어떻게 하면 적합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가장 낮은 최저선이 바로 양심에 따라 하는 것이고, 바로 사람이 진실된 마음으로 행하여 우리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준 하나님께 떳떳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양심의 역할이 아닌가? 너에게 이런 최저 기준이 있으면 보호를 받아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을 쉽게 하지 못하고 쉽게 본분을 내팽개치지 않을 것이며 네가 쉽게 건성으로 하거나 속이지 못하고 쉽게 자신의 지위와 명리 그리고 퇴로를 도모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양심이 역할을 한 것이다. 한 사람의 인성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하게 갖춰야 할 것은 바로 양심과 이지이다. 만약 한 사람이 양심을 갖추지 않고 정상 인성의 이지도 갖추지 않았다면 이는 어떤 사람인가?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인성이 없는 사람이다. 이 부류의 사람은 모두 어떤 특징이 있는가? 모두 어떤 구체적인 유로가 있는가? 이기적인 것이 한 가지 표현이고 비열한 것이 또 한 가지 표현이다. 그 외에 그는 일을 함에 있어 대충대충 하고 속이며 자신과 무관한 일이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하나님 집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증거하거나 본분을 함에 있어서 그 어떤 부담도 책임감도 없다. 그는 무엇을 고려하는가? 그는 먼저 자신을 고려한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아실까? 사람들이 봤을까? 내가 이렇게 힘들이고 이렇게 참답게 하고 있는데, 아무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도 보시지 못한다면 내가 이렇게 힘을 들여도 쓸데없고 이런 고생을 해도 소용없어!’ 이것은 이기적임과 동시에 아주 비열한 속셈이다.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하는 것에 양심의 역할과 요소가 있는가? 이런 사람은 문제를 발견하거나 누군가 방해하고 엇나가도 잠자코 있고 제지하지도 않으며, 하나님 집의 이익이나 자신의 본분과 직책을 조금도 고려치 않고, 그저 자신의 체면과 지위 그리고 이익과 영예를 위해 말하고 일하며 나서고 공을 들이고 힘을 쓸 뿐이다. 그의 속셈과 모든 행위는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얼굴을 내밀 기회가 있고 복을 누릴 때가 오면 그는 뛰쳐나오고 얼굴을 내밀 기회가 없거나 고생해야 할 때가 오면 목을 움츠린 거북이가 된다. 이런 사람에게 양심과 이지가 있겠는가? 그가 이렇게 일을 하면 자책하겠는가? 이런 사람의 양심은 그 어떤 작용도 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자책해 본 적도 없는데, 성령이 그를 책망하고 징계하면 그가 느낄 수 있겠는가?

성령은 흔히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 역사하는가? 사람은 최소한 양심과 진솔한 마음을 갖추어야 하는데 양심 속에 진솔의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고 모든 것을 살펴보며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고 사람은 사람의 겉모습을 본다고 늘 말한다. 하지만 사람은 일부 사람들이 왜 성령의 깨우침을 얻지 못하는지, 왜 항상 은혜를 얻지 못하고 기쁨도 없으며 늘 의기소침하고 적극적일 수 없는지를 전혀 모른다. 그럼 네가 그들의 정형을 관찰해 봐라. 각 사람마다 분명히 양심의 역할이 없고 진솔한 마음도 없다. 늘 평안과 기쁨이 있고 본분을 함에 늘 적극적으로 향상하고 자신에게 늘 인식이 있으며 한동안 지나면 소득과 수확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얻은 것은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인가? 책에서 배운 것인가? 그들은 어떻게 얻은 것인가? 성령 역사를 배제할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바로 성령 역사이다. 네가 진솔한 마음을 갖추고 인성이 갖춰야 할 양심과 이지를 갖추었다면 하나님이 감찰한다. 너희는 성령 역사의 규칙이 사람의 마음이 매우 진솔할 때 감동과 진입이 있으며 일을 함에 있어 모두 순조롭다는 것을 알아냈는가? 너에게 이런 느낌이 있는 이상 성령이 어떤 사람에게 역사하는지 알고 있지 않는가? 만약 이 사람이 아주 진솔하지만 한동안 그의 마음이 하나님을 등졌고 소극적인 정형에 빠져 향상하려 하지 않고 협력하지도 않는다면 이런 상황에서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 사람이 일시적으로 정형이 흑암해지고 일시적으로 타락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데, 하물며 인성의 지각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할 수 있겠는가? 더더욱 할 수 없다. 인성의 이지와 양심이 조금도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겠는가? 하나님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 사람들에게 길이 있겠는가? 그에게 진실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우선 마음을 하나님께 터놓고 자기의 매 하루, 매 일분, 매 일초를 다 하나님께 맡겨 하나님이 주관하게 해야 한다. 너는 먼저 시험적으로 자신의 체면과 허영심 그리고 이익을 내려놓은 다음, 온몸과 마음을 네 본분과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역에 전념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너를 인솔하는지를 보고 너의 안에 평안과 희락의 인증이 있는지의 여부를 보라. 너는 먼저 자신을 맡기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네가 이런 것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고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를 거절한다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는다. 성령 역사에는 조건이 있다. 하나님은 사악함을 싫어하는 하나님이고 거룩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반드시 다 역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직 악령 역사만이 사람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강요한다. 성령 역사는 특별히 온화하여 너에게 감동을 줘도 느끼지 못하고, 너는 마치 자신도 모르게 알고 깨달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반드시 진실한 회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

마음을 맡기는 데에는 어떤 표현이 있는가? 어떤 구체적인 행동들이 있는가? 바로 너를 얽어매는 체면, 명예, 지위와 너를 하나님 앞에 오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들을 다 내려놓는 것이다. 네가 짐을 지고 온 것이 아니라 양손이 빈 채로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에게 하게 하고 이끌도록 하는 것이다. 너에게 이런 진심이 있다면 하나님이 보고서 성령이 역사할 것이다. 우선 너는 진실한 회개의 행동이 있어야 하고 네 마음과 사람도 움직여야 한다. 너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라지. 어쨌든 난 이 모양이니까”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대항하고 거역하는 것이라고 한다. 너는 하나님이 꼭 너를 구원해야 하고 네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런가? 하나님의 사역이 왜 이방으로 방향을 돌리고 왜 이스라엘을 떠났겠는가? 양심과 이지를 갖춘 사람들도 칭찬할 만한 데가 없고, 단지 인성의 가장 기본적인 것만 좀 갖추었을 뿐이기에 자만자족의 정형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되며, 또한 늘 기도해야 하고 자신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했는지, 진리에 부합되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사람이 얼마나 좋은 인성을 갖추었고 얼마나 높은 양심과 이지를 갖추었든지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영원히 끝이 없다. 사람이 양심만 갖추어서는 절대 부족하며 진리를 구비해야만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인성이 괜찮고 양심을 조금 갖췄으나 아직도 부족한데 어떻게 하겠는가? 매사마다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나는 무골호인이야. 중용의 길로 가는 건 내가 한평생 일을 하는 원칙이고 목표이다.”라고 말한다. 겉으로 보면 아주 인성적이고 아주 이지적이어서 대부분의 경우에 발언을 하지 않고 관점을 발표하지도 않는 것 같지만 이것은 사람에게 이지가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 사람이 위장을 잘 해서 빈틈이 조금도 보이지 않으며 속셈이 아주 깊다는 것을 뜻한다. 네가 사람에게 아무것도 드러내거나 털어놓지 않는데 하나님에게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너는 진심을 하나님께 바친 사람인가? 틀림없이 아니다. 네가 봐라, 성령이 역사하여 너를 깨우쳐 한 가지 일을 알게 하는 것은, 어떤 때에는 아주 빠르고 어떤 때에는 한동안 체험하게 해 점차적으로 깨닫게 한다. 성령 역사는 어떤 원칙이 있는가? 바로 너에게 환경과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을 배설해 겪게 하여 매 한 가지 일에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른 인ㆍ사ㆍ물 속에서, 배우고 점차적으로 성장하게 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진리를 깨닫게 한다. 무슨 일이든 너를 겪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너에게 묵시만 하거나 일부 무미건조한 글귀나 도리를 깨우쳐 주고 또는 너에게 빛비춤이 좀 있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 역사는 아주 자연스럽다. 전적으로 인성의 자연적인 성장 법칙에 근거해 하는 것이지 그 어떤 강요도 없다. 성령의 이런 역사 원칙과 역사 범위에 근거해 사람이 만약 최소한 갖추어야 할 인성과 이지 그리고 양심을 갖추지 않는다면 성령 역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인도와 깨우침을 얻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람은 항상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많이 깨달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한 가지 일을 소홀히 한다. 사람은 모두 이렇게 여긴다. ‘나의 인성이 좋든 나쁘든, 양심이 있든 없든,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맡겼든 안 맡겼든 나는 진리를 더 추구할 거야. 많이 듣고 보며 많이 쓰고 본분을 많이 하고 많이 힘쓰고 고생을 많이 하면 돼.’ 그러나 가장 기초의 기초를 사람은 의식하지 못했고 모른다.

사람이 진리를 깨닫고 싶고 진리를 얻고 싶어한다면 최소한 진솔한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 진솔한 마음을 갖추는 데에는 어떤 표현들이 있는가? 인성이 있고 진심을 갖추며 양심과 이지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공허하거나 막연하여 사람이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 너는 어디서나 이것이 다 실제적인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이기적이라고 말하면 그의 행위에서 네가 볼 수 있고 대조할 수 있지 않는가? 한 사람이 진솔하고 진심이라고 말하면 이런 행위를 네가 볼 수 있지 않는가? 한 사람이 간사하고 교활하며 비열하다고 말하면 네가 볼 수 있지 않는가? 너는 눈을 감고도 그가 말하고 일하는 것을 통해 이 사람의 인성의 그 부분이 악랄한지 아니면 좋은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인성의 좋고 나쁨은 공허한 어휘가 아니라고 한다. 이기적이고 비열하며 교활하고 간사하며 오만하고 독선적이라고 말하면, 이런 것은 다 사람이 실제 생활 가운데서 사람을 접촉할 때 느낄 수 있는 인성 안의 부정적인 것이다. 그럼 인성이 마땅히 구비해야 할 긍정적인 것, 즉 진솔하고 진리를 좋아하는 것도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한 사람에게 성령 역사가 있는지의 여부와 하나님의 인도를 얻을 수 있는지의 여부도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다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무엇을 통해 분별하는가? 그의 살아냄과 그가 일하는 실질을 통해 분별한다. 이 두 가지로써 그의 인성의 자질을 증명한다. 한 사람을 접촉하여 그가 진리를 좋아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리고 진리를 얻을 수 있는지를 분별하려면 먼저 그의 인성 자질을 봐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입으로 말하는 것은 듣기 좋지만 실제적인 일을 하지 않고, 실제적인 일을 할 때면 자기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고생하고 대가를 치러야 할 때면 그는 먼저 ‘고생하고 대가를 치르는 일이면 당신들이 먼저 해, 난 거의 다 돼서 성과가 있으면 그때 나설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무슨 인성인가? 이런 표현을 통틀어 ‘인성이 없다’라고 한다. 인성이 없는 사람이 진리를 얻기 쉬운가? 사람은 모두 패괴 성정이 있지만 일이 닥치면 어떤 사람들은 양심이 역할을 하고 가책을 느낀다. 그가 비록 주관적 생각에 “난 진리를 추구하고 있다. 난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지만 그는 ‘그렇게 해선 안 돼. 하나님의 은혜와 택하심에 떳떳해야지.’라고 생각하는데, 그의 양심이 이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럼 이런 역할을 할 때는 그가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 진리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는 진리를 실행하는 길에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쉽게 진리를 얻는다. 이것은 사람이 진리를 얻는 가장 기초의 기초이다. 일이 닥치면 어떤 사람은 앞으로 나가지만 어떤 사람은 뒤로 빼고, 어떤 사람은 위험한 일이 닥치면 피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앞으로 돌진해 다른 사람을 보호하며, 어떤 사람은 일이 닥치면 양보하지만 어떤 사람은 다툰다. 여기에서 한 사람의 인성 자질을 볼 수 있다. 사람의 인성에 차이가 있지 않는가?

모두가 다 심지를 세우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한다. “저의 일생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한평생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제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은 항상 겨루고 빼앗고 전혀 양보하거나 포용하지 않으며 여태껏 양심적으로 일한 적이 없는데, 이런 사람이 진리를 얻고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가 쉽겠는가? 어떤 부류의 사람이 하나님께 온전케 되기 쉽고 진리를 얻기 쉽겠는가? (인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인성이 좋은 것에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즉 중용의 길을 걷고 다른 사람의 흉을 전혀 보지 않고 남의 물건을 전혀 훔치지 않으며 늘 베푸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감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그리고 일에 대해 그에게 진실된 마음이 있음을 모두가 보거나 느낄 수 있으며 하나님은 더욱더 감찰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자기가 인성이 좋고 여태껏 나쁜 일을 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 적이 전혀 없으며, 남의 물건을 차지하지도 않았고 항상 다른 사람이 유익을 보게 하고 자기는 손해를 봤으며 지금껏 남의 흉을 본 적이 없었다고 자랑하지만,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할 때는 오히려 농간을 부리고 항상 자신을 위해 도모하고 하나님의 이익을 생각한 일은 한 가지도 없으며, 하나님이 조급해하는 것을 조급해하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한 일은 한 가지도 없고, 본분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은 일은 한 가지도 없으며 여태껏 자기의 이익을 포기한 적이 없다. 이것은 좋은 인성이 아니다. 그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상관없이 그의 살아냄과 유로를 봐야 하고 본분이 왔을 때의 그의 태도가 어떤지, 그의 내면의 정형이 어떤지,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봐야 한다. 만약 그가 자기의 명리를 좋아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충심과 하나님의 이익을 뛰어넘고 하나님에 대한 헤아림을 뛰어넘는다면 이런 사람이 인성이 있는 사람인가? 그의 표현을 사람이 볼 수 있고 하나님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진리를 얻기 매우 어렵다고 한다. 모두가 다 진리를 추구하고 다 함께 예배드리고 다 함께 본분하면서 본분하는 시간이나 하나님을 믿은 시간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읽은 양도 거의 비슷하고, 고생한 것과 심지 그리고 처음에 한 맹세도 비슷하며 연령과 소질도 거의 비슷한데 인성에만 차이가 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진리를 얻기 쉬운가? (하나님에 대해 진심이 있고 진솔하고 인성과 양심 그리고 이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며 이 일은 확정된 것이다.

진리를 얻는 것이 한 사람의 출생 배경, 나이, 생김새, 가정 환경, 한 사람의 소질, 문화, 특기, 갖고 있는 기술과 관련이 있는가? 거의 관련이 없다. 일부 사람들은 소질이 낮아 사람이 보기에는 매우 둔한 것 같지만 그는 솔직하고 항상 한결같으며, 그가 일을 할라치면 요령을 생각해 내고 해내는 성과도 괜찮고 모두가 생각지 못한 것이어서 상상밖이라고 한다. “그가 어떻게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지?” 어떤 사람은 질투하는데 질투한다고 소용 있는가? 이 일을 누가 결정하는가? 만사만물이 다 하나님 손에 있다는 것을 너는 분명히 보고 믿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고 진리를 깨닫게 함에 있어서는 그 사람의 생김새가 어떠하고, 몸치장을 잘하는지, 말을 잘하는지, 학력이 높은지, 소질이 좋은지를 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저는 말주변이 없는데 다른 사람은 말주변이 얼마나 좋아요! 제가 이렇게 못생기고 키도 작으니 별 볼 일 없잖아요!”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은 내면의 상태가 어떤가?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지 않는가? 이런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은 패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그는 잘 생기고 말주변이 좋으며 문화 지식이 높고, 춤 잘 추고 글 잘 쓰며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다 인재이고, 하나님이 구원하고 깨우쳐 주고 인도하거나 혹은 온전케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여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은 항상 하나님이 공의롭고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한다고 말하지만, 일이 닥치기만 하면 하나님을 오해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본다. 사람이 표현해 내는 것은 다 사람 마음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너의 마음이 진솔하면 너에게 좋은 인성이 있고 일정한 정도에서 너는 점차적으로 진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너의 마음이 너무나 간사하고 폐쇄적이며 강퍅하고 이기적이며 좋은 인성이 없고 관념 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한다고 상상하며, 일이 닥칠 때면 하나님을 오해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네가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진리를 얻지 못하면 자신을 탓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을 탓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할 것인가? (자신을 탓해야 합니다.) 그럼 이런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표현과 실행이 있어야 한다. 네가 이기심을 유로할 때 어떻게 하면 이기적이지 않을까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먼저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한 번에 조금씩 내려놓아야 하는데 내려놓을수록 편안함을 느끼고 내려놓을수록 이렇게 처신하는 것이 어깨를 펼 수 있고 ‘사람’이란 이름값을 하고 이렇게 세상에서 사는 것이 광명정대하고 진정한 사람이며 하나님이 베풀어 준 이 모든 것에 떳떳하다고 느낀다. 네가 이렇게 살아갈수록 마음이 더욱 편안해지고 환해지는데 이러면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이 아닌가? 사람의 이기심, 비열함, 간사함, 거만함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사실, 내려놓을 수는 있지만 사람이 이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고 너무나 강퍅하고 자신의 이익을 너무 소중히 여기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항상 흐리멍덩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가려서인가? 하나님이 그를 가리거나 그에게 보지 못하게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줄곧 사람에게 공개했지만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께 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은혜를 공짜로 가지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은 “네가 이런 은혜를 가지고 이런 진리를 얻으려면 한 가지 조건밖에 없다. 너 개인의 이익을 내려놓고 너의 진심을 나에게 줘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 하나의 조건에도 사람은 다 도달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게 은혜를 요구하고 평안과 희락을 요구하며 진리를 얻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사람인가? 사탄의 종류가 아닌가? 이렇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있는가? 사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이렇게 하려 한다는 것을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하나님은 줄곧 너를 인솔한다. 단지 사람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사람의 마음이 너무나 강퍅하므로 늘 얻지 못할 뿐이다. 사람은 흔히 “하나님은 은총을 베풀고 싶으신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신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뜻을 모르고 오히려 이 말의 뜻을 오해한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잘 대해 주고 싶으신 사람을 잘 대해 주시고 은혜를 주고 싶으신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기에 하나님은 주고 싶으신 사람에게 주신다.’ 정말 그런가? 만약 진정으로 현실에 비추어 보지 않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대로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고 여기지만, 사실상 하나님은 결코 사람을 차별 대우 하지 않으며 각 사람에 대해 모두 공평하고 고르게 분배한다. 단지 일부분 사람의 마음이 너무나 강퍅해서 하나님 앞에 오지 않고 자신의 두 손으로 아름다운 생활과 미래를 창조하기를 원하고 자신의 미래를 장악하려고 할 뿐 하나님이 장악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는 “제가 어떻게 하든지 역시 하나님 손에 있으니 아예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이러면 사리에 맞고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런 이지가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항상 자기가 총명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집도 버리고 뭐든 다 버리고 진심까지 하나님께 바쳤지만 나중에 뭘 얻었지? 내가 얼마나 속셈이 많은지 봐, 난 안경을 쓰지 않아도 주판알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튕겨. 내가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으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가 어떻게 타산하는지 아무도 몰라. 난 이렇게 따르고 양다리를 걸치면서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아무것도 지체하지 않아도 나중에 구원받을 수 있어. 저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좀 봐! 외곬으로 가고 하나님이 나중에 어떻게 하실 줄도 모르면서 전부를 다 바치고 자신에게 뒷길도 남기지 않았으니.’ 도대체 누가 어리석은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리석다! 이것이 바로 인성의 차이이다.

하나님이 칭찬하고 원하는 사람은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다. 사실, 하나님은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지 않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진심이다. 너희 개개인의 이익을 빼앗아 가고 너희의 모든 것을 박탈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모든 것을 성취하고 너희에게 훈련할 기회를 주어 갖가지 재능을 발휘하게 하려는 것이다. 네가 어떤 곳에서 본분하든지 하나님은 너에게 가장 큰 공간을 주어 개인의 재능이나 특기를 발휘하게 하고, 나중에 여러 가지 환경과 갖가지 본분 가운데서 진리를 얻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며 사람답게 살게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늘 마음이 좁아서 ‘세상에서 성악을 배웠는데, 이렇게 본분하면 성악의 길이 끊어지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끊어졌는가? 끊어졌다고 한들 무슨 손해라도 되는가? 더군다나 지금 끊어지기는커녕 더욱 정상적으로 발휘하고 쓸 수 있는데, 이것은 좋은 기회가 아닌가? 너희 개개인의 취향과 특기를 발휘할 곳이 있게 된 것이다. 그 외에, 사람이 이 기간에 피조물의 본분을 할 수 있고 진리를 얻을 수 있으며 인생의 바른길에 들어서게 된 것이 얼마나 큰 경사이고 복인가! 사람이 죄악되고 패괴된 곳을 멀리하고 사악한 사람들을 멀리하면 최소한 너의 사상이나 정신 그리고 심령이 더는 계속 짓밟히거나 패괴되지 않는다. 네가 오염되지 않은 곳에 오고 하나님 앞에 오면 이것이 크나큰 복이 아닌가? 사람이 한 세대 한 세대 지금까지 윤회되어 오면서 이런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는가? 말세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비로소 이런 기회가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이것은 좋은 일이다! 마음으로 기뻐하라, 이것은 밑지는 일도 아니고 손해 보는 일도 아니다. 하나의 피조물로서 이 만물 가운데서, 이 지구 상의 몇 십 억 인구 가운데서, 어느 누구에게 피조물의 신분으로 창조주의 행사를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책임을 바칠 이런 기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이 많은가? 이 비율이 얼마인가? 몇 만 분의 일이 되는가? 되지 않는다. 너무나 적다! 특히 너희의 목청으로, 너희가 배운 지식으로 본분을 하는 것은 다 너무나 의의 있다! 네가 증거하는 것은 하나의 사람이 아니고 네가 하는 것은 한 가지 사업이 아니라 창조주를 섬기는 일이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이 기간에 너희에게 양육을 받을 수 있는 이렇게 좋은 환경과 기회가 있게 되었는데, 만약 실속있는 것과 진리를 얻지 못한다면 이것은 유감이고 사람의 비웃음을 살 일이며 이 일을 꺼내면 체면을 잃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기회를 잡아 놓치지 말고 어느 정도는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본분을 하는 기간에 잘 표현하고 진리를 얻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고 가장 의의 있는 인생이다! 피조물 가운데서 너희보다 복 있는 무리의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바로 윤회를 위해서이고 이 세상이 흥성거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너희가 사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피조물의 본분을 하기 위해서인데 이런 삶의 가치는 너무나 높다! 그러므로 너희가 하는 본분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생명 진입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집에서 다양한 형식의 하나님 말씀 시가 영상과 낭송 영상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듣거나 보게 한다.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 말씀을 상고하면서 오랜 시간이 흐르면 이런 하나님 말씀이 사람 마음속에 뿌리를 내려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일부 말씀에 대해 조금이나마 인상이 있게 된다. 이런 말씀이 일단 사람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면 사람의 생명 정형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너희가 노래하고 낭송하는 이런 말씀이 어떤 성질의 말씀인가? 우선 확실하게 말해서 이것은 진리이다. 이런 진리가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 너희는 이런 말씀이 사람 심령에 필요한 것이라고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말씀은 사람 심령의 기둥이고 동력이며 또한 사람의 생명 정형을 변화시킬 수 있고 사람의 생명 영 안의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너희 대부분 사람들은 실제적인 체험도 별로 없고 도리만 조금 깨달았는데도 이렇게 큰 힘이 생기는데, 만약 항상 이런 말씀을 듣고 교통하고 먹고 마시고 실제적인 경험과 체험이 있다면, 너희는 대단한 것이고 생명 정형에 천지개벽할 변화가 생길 것이며 지금처럼 이렇게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정형이 좋지 않아 다른 사람과 교통해도 안 되고, 견딜 수 없어 밤에 자지도 못하고 곰곰이 생각도 해보고 기도를 해도 괴로워한다. 어떤 일은 이겨 내지 못하지만 하나님 말씀을 펼치고 두 단락을 베끼면 마음이 밝아지고 기운이 나면서 괴롭지 않게 되고 침대에 누워도 많이 평온해져서 날이 밝을 때까지 잘 수 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사실 그가 베껴 쓴 그 두 단락의 하나님 말씀을 그가 깨달았는가? 베끼고 나면 실제적인 체험이 생기는가? 절대 아니다. 베껴 쓰는 것은 실제 체험을 대체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분명히 말할 수 없다. 열심히 읽고 상고하다 보면 비록 큰 깨달음은 없지만 글자 그대로의 뜻만 좀 이해해도 안에 동력이 생기고 마음속이 편안하며 안의 정형이 바뀌고 소극적이거나 연약하지 않으며 일이 닥치면 이겨 내게 된다.

너희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어 오면서 하나님 말씀이 사람에게 일으킨 역할에 대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느낌이나 너희들의 각도에서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대했는지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은 대체적으로 감성적인 인식이 좀 있어서 사람이 굳세든 연약하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어느 방면의 역할을 했든지 간에 결론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시도 떠날 수 없다고 느낀다. 너희 대다수 사람들은 무슨 실제적인 체험도 없고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도 아무런 느낌도 없는데 마치 공기와 물처럼 여긴다. 사람은 매일 공기와 물을 떠날 수 없지만 오히려 그것을 가장 평범한 것으로 여긴다. 네가 일상생활에서 물을 마실 수 있고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을 때, 공기와 물이 너에게 있어서 생활 속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라고 여겨져 “공기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하고 물이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또한 물과 공기를 잃으면 어떤 심정이고 느낌일지를 체험하지 못하고 그것이 너의 육체의 생명에 대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의식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어느 날, 네가 갑자기 진공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게 된다면 너는 공기가 너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될 것이고, 혹은 네가 사막 지대에 있어 물 한 방울도 보지 못해 매우 목마를 때, 너는 물이 너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끼게 될 것이다. 지금 너희가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대략적으로 이런 정형일 것인데,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고 너희에게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느끼지 못하지만, 날마다 조금씩이나마 읽어야 하고 한동안 읽지 않으면 심령이 괴롭고 의지할 데가 없다고 느끼고 읽기만 하면 곧 몸에 힘이 생기고 동력이 생기며 믿음도 생긴다.

지금 너희 대부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모두 감성적인 인식이 조금 있다. 무엇을 감성적인 인식이라고 하는가? 바로 이론을 조금 말할 수 있는데, 이론상에서 들으면 “맞다!”. 그러나 사람을 심판 형벌하고 사람의 패괴 성정을 들춰낸 말씀에 대해 너희는 단지 시인하거나 하나의 인지만 할 뿐이다. 성품 변화의 이 방면에서 너희가 실제 체험이 없으니 아직도 더 깊이 들어가야 하고 더 깊은 경험과 체험이 있어야 하는데, 이러면 생명이 자라난다. 지금 너희 마음속의 그 한 알의 씨앗은 싹만 텄을 뿐, 아직 꽃이 피지 않았고 열매도 열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체험과 인식을 말하기 아주 어려운 것이다. 너희가 지금 이런 정형에 처해 있는데 생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진리 실제에 진입했다고 할 수 있는가? 진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평소에 도리는 잔뜩 말하지만 일이 닥치면 실행할 줄 모르고 원칙과 길이 없으며 정확한 실행의 길을 모른다. 일반적으로 업무에 관한 것은 3년이면 거의 다 배우고 무예를 배우는 사람도 일반적으로 3~5년이면 다 배워서 고수가 된다. 단지 생명 진입의 일만은 가장 더디다. 진리 실제에 진입하는 속도가 가장 느린데, 이것은 시간을 때우는 일이 아니고 며느리가 시집살이를 오래하면 시어머니가 되는 그런 일이 아니다. 사람은 각 방면에서 진입해야 한다. 한 방면은 개인의 소질과 개인이 추구하는 목표에 달렸고 좋은 사람이 인솔해야 하며 또한 견지하고 고생하려는 심지와 기꺼이 버리고 헌신하려는 등 각 방면의 조건을 갖춰야 한다. 다른 한 방면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고 예배를 많이 드리며 다른 사람과 많이 교통해야 하는데 이러면 빨리 자라난다. 사람이 일단 이런 길을 알게 되면 진입하는 데에 방법이 있게 된다. 이후에 너희가 본분을 하는 중에 또 순복할 줄 알고, 여러 가지 훈계와 책망, 여러 가지 훈련을 받아들일 줄 알며, 책임진 사람이든 보통 형제자매든 모두 조화롭게 협력할 줄 알고,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하나님의 갖가지 요구를 만족게 하고 각자의 본분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생 동안에 가장 기념할 만한 한 시기이고 가장 잊기 어려운 한 시기이다.

본분을 하는 기간에 사람이 만약 진리를 얻을 수 있고 진리를 실행하고 생명 진입의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온당하고 자신 있게 되며 이후에 작은 시련이나 작은 환경이 닥쳐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기간에 너희가 모두 서로 돌보고 도와주며 연약한 형제자매를 보면 많이 도와주고 많이 돌봐 주어 모두가 뿌리를 내리도록 노력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길과 생명 진입의 길을 찾을 수 있으며 체험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이 있으면 더욱 좋은 것이다. 일단 뿌리를 내려서 생명이나 영 안의 정형이 변화된다면 너희의 앞길이 온당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가장 힘든 때가 바로 열심으로 하는 시기에서 실제에 진입하는 단계이다. 열심으로 하는 시기는 바로 글귀 도리를 말하고, 구호를 외치고 분량이 작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바보 같이 그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다고 여기고 좋은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이 시기에서 진리 실제에 진입하고 자라서 성숙되는 시기로 바뀌는 것은 모색기(摸索期)이고 과도기이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금방 믿기 시작하면 열심으로 무작정 하기만 하는데, 하기 좋아하고 나서기를 좋아한다. 너희가 만약 열심으로 하는 단계에서 무엇이 진리 실제이고 무엇이 글귀 도리이며 무엇이 구호를 외치는 것이고 무엇이 실제에 진입한 것이며 무엇이 진리를 깨달은 것인지를 아는 이 단계로 넘어가면 온당한 것이다. 그러면 일반적인 작은 시련이나 시험은 너에게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고 어려운 고비가 아니며 너희가 이 본분을 하는 것은 가치가 있고 적지 않은 것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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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②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③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④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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