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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목차

제63편 자신을 인식하려면 자신 안에 깊이 뿌리박힌 사상 관점을 알아야 한다

요즘의 교통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따라올 수 있느냐? 마음속에 길이 좀 있게 되었느냐? 자신을 인식하는 것, 바른 교회 생활이 있는 것, 구원받는 정상 궤도에 진입하는 것에 대해 길이 있게 되었느냐? 목표와 방향이 있게 되었느냐? 당연히 윤곽이 좀 잡혔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교통한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성실한 사람이 되는 방면도 좀 교통하였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도 좀 교통하였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하는지도 좀 교통하였고 바른 교회 생활에 어떤 실행이 있고 형제자매들이 어떻게 조화롭게 협력할 것인지에 관해서도 좀 교통했는데, 각 방면을 어느 정도 교통했다. 너희는 각 방면에 있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고, 마음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좀 알게 되었으니 이전처럼 어느 방면을 물어보아도 어렴풋하게 느끼지는 않겠지? 지금도 여전히 그 느낌이냐? (지금은 갈수록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갈수록 분명해지면 맞다. 하지만 이런 것을 교통하고 난 후 먼저 어느 방면부터 실행해야 할지 너희 스스로에게 방향이 있게 되었느냐? 또는 삶 속에서 먼저 어느 것을 훈련해야 할지 알고 있느냐? 사실, 어느 방면을 실행하든, 성실한 사람이 되거나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훈련하거나 어떻게 형제자매들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정상 인성에 진입할 것인지, 어느 방면을 추구하든 매일의 삶 속에는 각 방면이 다 있고 다 관련될 수 있다. 하지만 각 방면은 자신을 인식하는 문제에 관련된다.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도 자신을 인식하는 문제와 관련되지 않느냐? 네가 자신이 궤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성실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성실한 사람이 되기를 실행하고, 자신에게 하나님에 대한 순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야 하나님께 순복하기를 실행하거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순복할 것인지를 찾고 구하게 될 것이다. 네가 자신을 모르는데 너에게 성실한 사람이 되라고 하거나 하나님께 순복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빈말이다. 사람에게 패괴 성정이 있기 때문에 어느 방면의 진리를 실행하든 그리 쉽지 않은데, 모두가 사람의 이 패괴 성정 속에서 각 방면의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다. 네가 각 방면의 진리를 실행할 때, 너의 패괴 성정 속의 것과 패괴 성정 속의 각 방면이 틀림없이 유로되어 네가 성실한 사람이 되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고,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며, 또한 형제자매들을 인내하고 포용하는 것을 가로막을 것이다. 만약 네가 인식하지 못하고, 해부하지 않고 파헤치지 않고 자신의 상상으로 진리를 실행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은 진실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느 방면의 진리를 실행하든, 어떤 일을 하든, 먼저 자신을 인식해야 하고 자신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을 알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일언일행, 일거일동이나 자신의 생각, 자신의 속마음, 자신의 관념과 상상, 심지어 세상에서 온 처세 철학이나 사탄에게서 온 그런 독소, 혹은 학교 교육에서 온 지식 문화를 인식하는 것인데, 이런 것은 반드시 해부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은 후 아주 많은 일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사람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살고 있다고 여기고,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 순복하고 있고, 이미 하나님의 마음을 아주 만족게 하였다고 여긴다. 일이 닥치지 않았을 때는 네게 무엇을 시키면 그대로 할 수 있고, 너에게 본분을 하라고 해도 너는 머뭇거리지 않고 반항하지도 않는다. 혹은 하나님 집에서 너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해도 아무런 원망이 없고 그 고통을 받을 수 있으며, 혹은 너에게 뛰어다니라고 하거나 너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해도 너는 다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으로 너는 자신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고 참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너는 성실한 사람이냐? 너는 진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냐? 너는 성정 변화가 있는 사람이냐?”라고 진지하게 따지고, 진리로 각 사람을 대조해 본다면, 합격될 사람은 아무도 없고, 참으로 진리대로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위, 사람의 모든 행실의 근원이 무엇인지, 일을 하는 그 실질이 무엇이고, 그 성질이 무엇인지는 진리로 대조하면 다 정죄받는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사람이 자신을 알지 못하여 늘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방식으로 본분을 하고, 또 자신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이 가득하고 도리가 가득하다고 여기고, 나중에는 자신에게 성과가 가득하다고 여기며, 부지중에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뜻에 맞게 행하였고, 이미 완전히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였고, 이미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였고, 이미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만일 너에게 이런 느낌이 있거나 이미 몇 년을 믿어 어느 정도 수확이 있다고 느낀다면, 그런 상황일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 와서 자신이 이 몇 년간 걸어오면서 하나님 앞에서 한 모든 것이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지, 그리고 어떤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지, 어떤 것이 하나님을 만족게 하였는지, 도대체 자신이 한 것이 이미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하였는지,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할 수 있는지를 잘 성찰해야 한다. 이런 일은 마땅히 해부해야 한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너는 자신이 한 것이 좋다고 여기는 부분일수록, 자신이 한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일수록,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일수록, 자신이 자랑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일수록, 거기에서 더욱 자신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고, 그 속에 도대체 어떤 불순물이 있는지,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없는 것인지를 깊이 파헤쳐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바울을 놓고 말하자면, 바울은 지식이 매우 많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그는 많은 사역을 하고 나서 어떻게 여겼느냐? 그는 이미 자신을 위해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여겼다. 그가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을 해부할 수 있었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그의 겉면의 행위, 좋은 행실이나 자신의 상상으로 좋다고 여긴 것에 그의 심령이 속임당했고, 그의 진면목이 감추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하나님이 드러내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계속 바울을 목표와 푯대로 삼았고, 바울이 자신들이 동경할 대상, 추구할 대상, 모방할 대상이라고 여겼다. 바울의 사례는 지금 하나님을 믿는 각 사람에게 경고를 준다. 즉, 자신이 한 것이 아주 좋다고 여길 때, 자신이 어떤 방면에 특별한 은사가 있다고 생각할 때, 또는 자신이 변화될 필요가 없고, 훈계를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이런 부분에서, 더욱더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본래 좋다고 여기던 부분에서는 틀림없이 그것을 파헤치지 않고, 그것을 중요시하지도 않고, 거기에 도대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있는지를 해부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네가 자신의 마음씨가 매우 착하다고 여겨 이쪽 형제자매 집에 일이 있어도 가서 도와주고, 저쪽 형제자매 집에 일이 있어도 가서 도와주며, 어느 형제자매 집에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가서 권면하는데, 이 사람 저 사람 다 권고해 준다고 하자. 어느 집에 일이 있으면 네가 가서 도와주면서 다른 사람에게 일이 생길 때, 그 사람이 해결하지 못할까 봐 매우 걱정하는데, 너에게는 호의가 매우 많다. 자신의 힘이 닿는 대로 모든 사람을 도와준다고 할지라도 이것저것 많이 도와준 결과는 어떠하냐? 자신의 생명을 지체하고도 큰 자랑으로 여긴다. ‘봐, 내 마음씨가 얼마나 좋아, 누구에게 어려움이 있어도 난 다 도와줄 수 있어.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야.’라고 스스로 득의양양해하며 자신의 행위에 아주 만족해하고 자신이 한 모든 일에 아주 만족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한 것이 틀림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신이 아주 착하고 마음씨도 아주 좋으며, 지금까지 사람을 미워한 적이 없고 해친 적도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떠냐? 그의 천성적인 호의와 천성적인 착한 마음이 그의 자본이 되었다. 이것이 그의 자본이 된 것은 괜찮지만, 그는 이것을 당연하게 진리로 여겼다. 사실, 그가 한 것은 모두 인위적인 호의이지, 진리를 찾고 구한 것이 전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한 그 모든 것은 다 헛수고이다. 왜냐하면 그가 한 모든 것은 다 사람 앞에서 한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하나님의 요구와 진리에 따라 실행한 것도 아니며, 그가 한 그 모든 것은 진리를 실행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한 것이 아니며, 더욱이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한 것도 아니라, 사람의 호의와 좋은 행위로 사람을 도와준 것이기 때문이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그가 한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그런 좋은 행위는 하나님이 보기에 정죄받는 것이고 기념되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너희는 아느냐? 왜 이런 말들을 하겠느냐? 자신을 인식하는 이 일은 각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너는 이 일을 간단히 보지 말라. 너에게 행위를 알라는 것이 아니고, 실행법을 알라는 것도 아니라, 사람의 실질과 사람의 패역 근원이 무엇인지를 알라는 것이다. 사람이 학교에서 지식을 얼마 배우고, 하나님을 믿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하거나, 진리를 인식함에 있어 그런 지식과 도리, 이론적인 것에 늘 방해받고, 또는 사회 배경, 문화 배경하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실행할 때, 그런 것에 늘 방해를 받는다. 중국 사람이 전통적인 관념으로 여기고 있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사람은 마땅히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공자가 교육한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으면 불효자인데, 사람은 어려서부터 그런 것이 주입된 것이 아니냐? 가정마다 거의 모두 이런 것을 주입시키고 있고, 또한 학교에서도 이런 것을 주입시키고 있다. 마땅히 노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해야 한다든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이 있고, 또 다른 것들도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에 대해 말해 보자. 사람의 머릿속에 이런 것이 주입된 후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해.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는 사람은 나쁜 놈이지. 그럼 좋은 사람이 아니라 불효자식이므로 양심이 없다고 비난받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너는 이렇게 생각했겠지? 또 사회에서도 이렇게 교육하였고 가정에서도 이렇게 교육하였다. 네가 하나님을 믿은 후에는 어떠하냐?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이런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말씀에서 사람에게 어떤 원칙으로 사람을 대하라고 요구하였느냐?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이 사랑하는, 참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하는 사람은 네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이 통행되게 할 수 없는 자,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 하나님이 혐오하는 자는 우리가 마땅히 혐오해야 하고 마땅히 단절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요구한 것이다. 우리의 부모가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부모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이면 하나님도 당연히 그들을 혐오한다. 우리에게 부모를 혐오하라고 하면 그럴 수 있겠느냐?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욕하면 그들은 분명 하나님이 혐오하고 저주하는 자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너의 부모는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로막지 않고 어떤 부모는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너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하나님 말씀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은혜시대에도 예수가 ‘누가 내 형제이고 내 부모이며 내 자매이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만이 내 형제요 자매요 부모이니라’고 하였다. 은혜시대부터 이런 말씀이 있었는데, 지금 하나님이 한 말씀은 더욱 적절하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해야 한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이다. 하지만 사람은 흔히 하나님의 이 말씀의 참뜻을 깨닫지 못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겉으로는 아주 좋아 보이거나 혹은 그 사람이 너의 부모이고 너의 가족이라면 너는 그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 사람과 아주 밀접하게 왕래하고 관계도 아주 가깝다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너는 괴로워하게 되고, 마음을 모질게 먹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떠날 수도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여기에 너를 속박하고 있는 전통적인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너는 네가 그렇게 한다면 벼락 맞아 죽을 것이고 심지어 천벌을 받을 것이며, 사회의 버림을 받고 여론의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더욱 현실적인 것은 자신의 양심이 가책을 받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의 이 ‘양심’의 작용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교육이나 사회 문화에 영향받고 전염된 것이다. 그런 것으로 너에게 그런 뿌리와 사상이 심겨져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마음속으로 마땅히 그들을 미워해야 하고, 그들과 단절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너의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지 부모가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고 마땅히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비록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사상적으로도 이런 것이 있지만, 원래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실행해 내지 못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느냐? 바로 그런 것들이 이미 너를 아주 깊이, 아주 단단히 결박하였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런 것들로 너의 사상, 너의 생각, 너의 심령을 결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즉, 그런 것이 이미 네 안에 꽉 들어차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네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한다면, 그것이 네 안에서 작용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요구와 저촉되게 할 것이고, 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그런 결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너는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하게 한동안 발버둥 치다가 나중에는 타협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발버둥 치다가 나오고, 어떤 사람은 발버둥 치다가 타협하여 ‘그래도 전통적인 관념과 전통적인 도덕 기준이 중요해.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제쳐 놓자. 지금 아직도 이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이 사람들을 의지해야 돼.’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이 사회의 여론이나 비난 같은 것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득죄하고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더라도, 사회의 여론이나 전통적인 관념의 속박에 투항한다. 말해 봐라, 사람이 가련하지 않으냐?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지 않으냐?

어떤 사람은 “사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우리의 부모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사실 우리와 관계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듣자마자 “당신의 그 말은 틀립니다. 그렇게 말하면 대역무도한 거죠. 당신은 뭡니까? 당신은 인성이 형편없는 사람이군요.”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감히 이 속박을 깨뜨리지 못하고, 세속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진정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담력이 없고, 그런 믿음도 없으며 더욱이 그런 심지도 없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첫걸음을 떼며 “저의 부모는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마귀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아주 간단치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당신의 부모가 돌아가시면 장사 지내지 않겠습니까?”라고 물으면 “아, 그건 안 되죠. 그래도 장사는 지내야 합니다. 상복을 입지 않고 향을 피우지 않고 절은 하지 않더라도 장사는 지내야 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마음이 괴로울 겁니다. 부모님이 저를 낳아 주셨는데 효도도 못하고 많이 누리시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분들이 한평생 그렇게 많은 고생을 했어도 효도하지 못한 것 같은데, 장사도 지내지 않고 마지막 길마저 보내드리지 못한다면 괴로울 것입니다.” 너의 이 ‘괴롭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그 사상은 누가 준 것이냐? 사탄이 준 것이 아니냐? 부모가 준 것이 아니냐? 이 사회가 준 것이 아니냐? 이 인류가 준 것이 아니냐? 바로 이 패괴된 전통과 패괴된 문화가 준 것이다. 이 패괴된 문화로 시종 이렇게 교육받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준 것이고, 사람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준 것임을 알 것이다. 사람이 마땅히 감사드려야 할 분은 하나님이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푼 그 어떤 사람도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우리의 부모에 대해서도 그래야 한다. 만약 부모를 내려놓거나 자신의 남편, 아내, 아들딸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비교적 굳세고 비교적 정의감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이 사회와 패괴된 세상에서 온 교육과 사상 관념, 도덕 기준에서 벗어나기가 아주 어렵고 이 걸음을 내디디기도 아주 어렵다. 어떤 사람은 이 고통을 받지 않기 위해, 또는 실행할 것 같지도 않아 이 사실을 피하고 이 일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일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네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싫어하고, 진리를 실행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네가 진리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다. 사람 안에 이런 것이 존재하고 이런 사상이 존재하고 있는데, 진리가 들어갈 수 있겠느냐? 예컨대, 더러운 것이 꽉 차 있는 용기가 하나 있다. 거기에 깨끗한 것을 더 넣으려고 한다면 넣을 수 있겠느냐? 넣기 어렵다. 오직 그 더러운 것을 조금씩 꺼내 다 비운 후에 그 용기를 깨끗이 해야만 새로운 것을 넣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서도 우리가 모두 자신을 인식할 수 있고, 모두 자신을 파헤쳐 해부할 수 있고, 이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대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틀림없이 수확이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자신을 인식하는 이 일에서 점차 깊이 진입할 것이고, 깊이 진입하는 동시에 진리를 실행하여 갈수록 진리가 있게 되고, 갈수록 하나님의 말씀 실제가 우리의 생명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자신을 인식하는 이 일에서 진입이 전혀 없다면, 진리를 실행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네가 많은 외적인 현상에 가려져 자신의 행위가 좋아졌다고 느끼고, 자신이 이전보다 정상적이 되었다고 느끼며, 자신이 이전보다 온화해졌고, 남을 생각해 줄 줄 알고, 포용할 줄 알고, 다른 사람을 인내하고, 관용할 줄 알게 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너는 자신이 이미 아주 좋고, 완벽하고, 표준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기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네가 하나님의 요구 기준과는 아직도 거리가 아주 멀다. 그것은 우리가 아직 진리를 진정으로 실행한 때가 언제였고, 진리를 전혀 실행하지 않았던 때가 언제였는지는 모르고 겉면의 행위만 조금 변화되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교회 생활이 아주 정상적이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지낼 때는 서로 포용할 수 있고 또 특별히 사이 좋게 지내며, 어떤 사람과도 다 왕래할 수 있고, 싸우지도 않고 말다툼도 하지 않고, 또한 어떤 일에서든 다 인내할 수 있고, 그 일을 정확히 대할 수 있으며, 형제자매들과 아주 화목하게 지내고, 영 생활도 매우 정상적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도 매우 참답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많은 일에서 관점이 나타날 때에는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하나님과 어긋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인식하는 여러 방면의 이런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고, 자신을 더 깊이 인식하기를 찾고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교통하니 너희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부모에게 효도하는 예를 봐라. 이것은 사람마다 직면하게 될 매우 중대한 일이다. 이 일을 네가 인식하여 내려놓을 수 있고, 이 미로에서, 이 전통적인 사상 관념에서 빠져나오려면, 속으로 얼마나 오래 몸부림쳐야 하겠느냐? 얼마나 많은 진리를 갖춰야 하고,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경력해야만 헤어나올 수 있고, 하나님이 말씀한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한다.”라는 것을 실행할 수 있겠느냐? 여기에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아마 하나님이 우리에게 환경을 배치하여 훈련하게 하고, 그런 사람들의 본래 면모와 진면목을 분명히 보게 하며, 각 사람의 진면목을 분명히 보게 해야 할 것이다. 혹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방면에 정말로 연약이 있고, 우리가 정말로 패괴되어 사상 속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있고, 하나님과 합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기 전, 혹은 우리가 스스로 이 일에 대해 전혀 아무런 의식도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준비를 해야 하는데, 사람 안에 있는 독소를 알고, 교육과 학교와 사회로부터 얻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방금 어떻게 부모를 대할 것인지에 관해 말했는데, 이것은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 아니냐? 각 사람의 삶 속에서 반드시 직면해야 할 중요한 일이 아니냐? 이것은 중대한 일이다. 다른 한 가지는 너에게 아들딸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어떻게 아들딸을 대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네가 아들딸을 어떻게 대하고 부모를 어떻게 대할지는 대하는 그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의 그 관점이 무엇인지, 네가 그 일을 하는 관점이 무엇인지, 너의 태도가 무엇인지에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녀가 있으면 그때부터 계획하기 시작한다. ‘나는 우리 자식이 어떠어떠한 교육을 받게 하고, 어떠어떠한 대학 입시를 보게 한 다음 좋은 직업을 구하게 하고, 사회에 발붙여 지위가 있게 하겠다.’ 즉,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먼저 지식과 학위가 있어야 사회에서 지위와 세력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일생 동안 살아갈 자본이 있게 되고, 세상에서 세력이 있게 되어 생존하기 쉬우며, 철밥통이 있게 되어 그후의 의식주행을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에게 자녀가 있을 때 너는 그들을 위해 계획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녀에게 음악에 천부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우게 하고, 어떤 사람은 자녀에게 문학에 천부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고 책을 많이 읽고 소설을 쓰고 전기를 쓰게 한다. 심지어 유명한 사람을 초빙해 자녀를 양성시켜, 자녀가 자신의 요구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그 길을 가게 하려고 힘쓴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자녀가 매우 예쁘고 곱게 생겼다고 해서 무용이나 연기를 배우게 하려고 계획하는데, 감독이나 연기자가 되고 가수나 스타가 되면, 사회에서, 세상에서 지위가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수입도 좋을 뿐만 아니라 매우 체면이 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자녀를 대함에 있어 자녀가 언젠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기를 바라고, 사회에서, 세상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후 고정 수입이 있거나 세력이 있기를 바란다. 사람마다 이런 관점이 있다. 아들이면 용이 되고, 딸이면 봉황이 되기를 바라는 이런 관점은 맞는 것이냐? 사람은 자녀를 대함에 있어 그들이 다 두각을 나타낼 수 있기를 바란다. 사람마다 자녀를 명문 대학에 보내 학문을 더 닦고 학위를 취득하고 학력을 갖게 한 다음 두각을 나타내어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모두가 다 이런 관점을 갖고 있고, 자녀가 더 높은 교육을 받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든 것은 다 하찮고 독서만이 고상하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의 이 사회에서는 경쟁도 대단히 심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학력이 없고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다면 이후에 생존해 나가는 것도 문제가 된다는 것이 각 사람의 사상 관점이다. 즉, 네가 무엇을 배우고 어떤 학력을 가질 수 있는지로 이후의 직업과 전망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일생 동안 이것에 의지해 살려고 잘 계획해 놓고, 이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고등 교육을 받거나 일류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자녀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큰일로 여긴다. 사실상, 사람이 받아들이는 그런 것, 받아들이는 교육과 지식, 그런 내용과 사상은 다 하나님과 어긋나고 진리와 어긋나는 것이며, 다 하나님이 혐오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사람의 관점은 어떤 것이냐? 사람은 이런 것을 떠나면 살 수가 없고, 이 사회에서, 이 세상에서 발붙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그런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최하층민, 빈민, 천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눈에 누가 지식이 없고 누가 학력이 낮거나 누가 받은 교육이 높지 않으면, 그를 업신여기고 무시하며 그를 멸시하고 안중에 두지도 않는다. 네가 자녀에게 그렇게 하게 하고 자녀를 양성하여 그런 일을 하게 한다면, 너의 관점과 출발점 자체가 틀린 것이다. 너희가 자녀에게 공부를 시키고 교육을 받게 한다면, 틀림없이 급히 필요로 하는 그런 직업이나 전공을 선택할 것이다. 자신의 목적은 자녀에게 좋은 전망이 있게 하고, 일생 동안 직업과 가정, 앞날이 안정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너는 자녀들이 그런 교육을 받은 후 얼마나 많은 독소가 안에 주입될지, 얼마나 많은 사탄의 사상과 이론이 안에 주입될지 생각해 보았느냐? 이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은 바보스럽게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자녀가 일류 대학에 들어가면 출세하고 조상과 가문을 빛낼 것이라는 것만 알고 있다. 어느 날, 자녀가 돌아올 때, 네가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말하면 그는 반감을 가질 것이다. 네가 그에게 진리에 관한 일에 대해 말하면 그가 듣고는 너를 멍청하다고 말하고, 너를 비웃고 네가 한 말을 멸시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휴, 자식을 그런 학교에 보내 그런 교육을 받게 하여 잘못된 길을 가게 하고 길을 잘못 선택하게 했구나.’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후회해도 늦은 것이다. 인간에게 일단 그런 사상 관점이 들어가 뿌리박히고 틀이 갖추어지기만 하면, 그것은 하루아침에 없애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너는 자녀의 그런 *정형을 돌려세울 수 없고, 자녀의 사상을 돌려세울 수 없으며, 자녀의 사상 관점 안에 있는 그런 것을 없애 버릴 수도 없다. 나는 아무도 “자식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무슨 뜻인지 알고, 하나님을 잘 믿도록 학교에 보내 글을 익히게 해야겠어요. 그런 후에 또 유용한 전공을 배우게 해서 좋은 직업이 있게 되면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을 거예요. 만일 우리 아이가 소질이 좋고 인성도 좋다면 하나님 집에서 인솔자로 쓰거나 본분을 하게 하면 더욱 좋지요. 하나님 집에서 쓰지 않아도 스스로 밖에서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직업이 있으면 되는 거예요. 그 나머지는 하나님 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고 사회에서 물들거나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사람은 자녀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믿음과 용기가 없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자녀는 몇 살입니까?”라고 물으니 “8, 9살입니다. 이젠 3, 4학년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 아이에게 세상 교육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잘 믿게 한다면 앞날을 걱정할 필요 없잖아요.” 그는 한참 궁리하다가 “그건 절대 안 돼요. 교육을 받지 않으면 제 딸(아들)은 끝이잖아요. 그럼 어떻게 앞날이 있겠어요!”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아들딸을 대함에 있어 아무도 아들딸을 기꺼이 하나님 앞에 데려와서 완전히 하나님이 요구한 관점과 사상, 혹은 하나님이 요구한 사람이 되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 사회에서 일자리가 없고 앞날이 없을까 봐 두려워 사람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고 감히 그렇게 하지도 못한다. 이 관점은 무엇을 뜻하느냐? 사람이 진리와 하나님에 대해 흥미가 없고, 확신도 없고 더욱이 참된 믿음도 없다는 것을 뜻하고 실증한다. 사람이 마음속으로 앙망하는 것은 여전히 이 세상이고, 마음속으로 우러러보는 것은 여전히 이 세상인데, 이 세상을 등지면 살 수 없지만,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래도 밥을 먹을 수 있고, 옷을 입을 수 있고, 집도 있을 수 있다고 여긴다. 지식을 떠나고 이 사회의 교육을 떠나면 사람은 끝이고, 이 사회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되고 곤란하게 되며,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도태되면 살아갈 수 없다고 여긴다. 너는 “난 이 세상을 등져도 하나님만 의지하면 살아갈 수 있어. 하나님이 나에게 출로를 열어 주시고 나에게 살길을 열어 주셔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실 거야!”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너에게 이런 인식이 있느냐? 그럴 용기가 없다. 그렇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너에게 정말로 이렇게 실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실행하지 않았을 때, 이런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 때에도 이런 사상 관점이 이미 네 안에 형성되어 있기에, 너의 일언일행과 너의 앞날이 통제되고 있고, 네가 이후에 어떻게 하고 어떻게 이런 일을 처리할지가 결정된다. 왜 지금 이런 것을 말하겠느냐? 바로 사람에게 사람의 이 사상 관점이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고, 진리와 맞지 않는 것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자신에게 특별히 믿음이 있다고 여길 때,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있다고 여길 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매우 크다고 여길 때, 네가 파헤쳐 보면 자신 안에 하나님과 근본적으로 적대되는 것과,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혐오하는 그런 것들이 아직도 많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깊이 파헤쳐 볼 가치가 있지 않으냐? 이런 것을 말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이 이미 성결하고, 이미 하나님을 아주 사랑하며, 하나님에 대해 아주 믿음이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으냐? 하지만 이런 것을 드러내면 사람은 ‘휴, 사람은 왜 이럴까? 왜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지? 그래도 이런 것이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다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은데.’라고 여긴다. 말해 봐라, 이런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근원적인 것이 아니냐?

너의 행위마다, 네가 일을 처리할 때마다, 어느 방면으로 하고 목표는 무엇인지, 사실 너의 사상 관점에 의해 이미 네가 어떻게 하고 어떻게 할지가 결정되었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 잘 위장하여 그렇게 하지 않고, 혹은 아주 잘 덮어 감추고 아주 잘 포장하여 그렇게 하지 않기에, 겉으로는 아주 좋은 것 같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어떤 말도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사상 속에 깊이 뿌리박힌 것을 혐오하고 증오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폭로하려는 것이자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흔히 어떻게 여기느냐? ‘우리는 말을 해도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아주 순결하고 아주 이지도 있으며, 우리의 행위에서도 흠잡을 데가 없고, 혹은 우리가 본분을 함에 있어 겉보기에 이미 아주 합당하고 적합하여 흠잡을 데가 없는데, 그럼 우리가 자신에게서 뭘 더 인식해야 합니까? 우리가 자신을 더 인식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부분일수록 더욱 자신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고, 더욱 자신을 인식해야 하며, 더욱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이 말씀을 하는 까닭이다. 봐라, 어떤 사람은 자신이 부모에게 효도를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부모에게 효도하면 하나님이 꼭 기뻐할 것이라고 여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천만 번 지당하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사람에게 양심이 있고, 사람이 아직 근본을 잊지 않았음을 증명하는데, 전통적인 관념으로 볼 때 이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효자라는 것이다. 효자라고 하면 누구나 다 엄지 손가락을 세우고 욕하는 사람이 없다. 불효자를 욕하는 사람은 있어도 효자를 욕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도 좋아하고 부모도 좋아하니 너는 당연히 틀림없이 하나님도 좋아할 것이라고 여겨 일방적으로 ‘하나님도 당연히 좋아하시겠지? 하나님도 당연히 좋아하시고 무조건 좋아하실 거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너는 그렇게 할수록 힘이 나고, 그렇게 할수록 당연하게 여기고, 그렇게 할수록 더욱 자신이 진리를 실행한다고 여기며, 부지중에 자신에게 이미 하나님을 만족게 하는 자본이 있고, 하나님의 칭찬과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자본이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하나님이 네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다고 말씀할 때, 혹은 네가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할 때, 너는 반항할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할 것이며, 하나님이 말씀한 것이 틀리다고 말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해부하지 않았을 때, 사람은 하나님 말씀의 글자 표면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지만, 현실 삶 속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아무도 현실 삶 속의 매사를 가져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조해 보지 않으며, 아무도 일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조해 보지 않고, 모두 입으로 논하면 끝이고 말하면 끝이며, 적합한 장소나 적합한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꺼내 그 말씀을 암송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고 교통하면 끝이다. 사실, 네가 많은 일에서 전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실행하지 않았는데, 네가 하나님 말씀을 되뇐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전혀 소용없다. 하나님은 아무런 누림도 얻지 못했다.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만 하였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 더욱이 소화하지도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글귀 도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얘기하는 것이 어찌 글귀 도리를 말하는 것이란 말입니까?”라고 말한다. 네가 하나님 말씀의 실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실행하지도 못했으며, 더욱이 자신이 경력한 후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인식을 교통한 것이 아니기에, 네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되뇌는 것은 글귀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너의 생명이 될 때 그것이 진리이고, 너를 변화시킬 때 그것이 진리이다. 전혀 너를 변화시키지 못했을 때, 너에게 있어 그것은 도리이다.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겠지? 이 말을 들으니 아픈 곳을 건드렸다는 느낌이 없느냐? ‘내가 그렇게 하면 대역무도한 걸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사람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데, 말해 봐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기준이 높으냐? 사실 높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정감이 영향을 미친 것이고, 사람의 사상 문화가 이미 사람의 생명이 되어 꿈쩍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에 묻은 먼지를 깨끗이 없애기 쉬우냐, 아니면 안에 생긴 종양을 깨끗이 없애기 쉬우냐? 먼지를 없애는 것이 쉽다. 먼지는 무엇과 같으냐? 사람이 어떤 때는 나쁜 습관이나 나쁜 버릇, 즉 행위상의 나쁜 버릇에 물들지만 그것은 사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상 속에 있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것은 네가 사회에서,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이 사람들 가운데서, 네가 살아가는 철학과 원칙, 네 삶의 방식 심지어 네 삶의 토대이다. 네가 그런 것으로 살고 있고 그런 사상으로 살고 있는데, 그런 사상이 너의 일언일행을 지배하고, 너의 삶을 지배하고, 네 삶의 목표와 인생의 방향을 지배하고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은 꿰뚫어 보지 못할 때 뒤로 잠간 미루고, 먼저 그것을 파헤치지 않고 억지로 그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어떤 일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때 우리에게 느낌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이런 것을 교통하는 것은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다.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관점, 우리의 사상 속의 어떤 것이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이고, 어떤 것이 전혀 진리에 부합되지 않고, 진리가 없는 것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의 교만과 독선을 인식하거나 사람의 거짓말과 궤사를 인식하는 이런 것은 패괴 성정 중에서 사람이 인식하기 쉬운 방면이다. 예컨대, 만일 자신이 말하는 것이 매우 교만하거나 성정이 매우 교만한 것은, 진리를 몇 번 혹은 자주 교통하거나 형제자매들이 너에게 정형을 지적해 주면서 지적해 내면 네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너의 그 교만이나 궤사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데 단지 그 정도에 경중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의 사상 관점은 인식하기 어렵다. 이것은 성정 그 부분보다 인식하기 어려우며 이것은 깊이 뿌리박힌 것이다. 그러므로 너의 행위, 네 겉면의 행실에 어느 정도 변화가 있을 때에도 너의 사상과 관념과 관점에, 네가 받아들인 전통문화 교육에 아직도 파헤쳐 보지 못한 하나님과 적대되는 많은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과 적대되게 한 깊이 뿌리박힌 근원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한 일이 너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을 때나 네 상상 속의 하나님과 다를 때, 너는 반항할 것이고 저촉할 것이다. 물론 처음에 사람은 ‘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지? 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에는 다 진리가 있어. 그럼 순복하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순복하려고 해도 순복할 수 없고 아무리 말해 줘도 순복할 수 없다. 왜 순복할 수 없을까? 왜 반항하고 저촉할까? 그것은 사람의 사상 속에 있는 어떤 것과 사상 관점이 하나님과 적대되고, 하나님이 일하는 원칙과 적대되며, 하나님의 실질과 적대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인식하기 쉽지 않다. 이런 것을 인식하기 쉽든 쉽지 않든, 지금부터 이 방면을 교통하겠다. 어느 날, 네게 갑자기 어떤 일이 닥치면, 너는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생겨 ‘이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아니야. 하나님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되시지. 하나님이시라면 이런 말씀은 하시지 말아야 해.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아니야. 하나님께서 전에 하셨던 그런 일에는 모두 진리가 있었는데 이 일에만은 진리가 없어.’라고 한다. 하지만 네가 생각해 보니 ‘아니야. 내가 인식하지 못한 부분에 찾고 구할 진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나 자신을 알아야 해. 내 안에 있는 어떤 사상 관점이 농간을 부려 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역사 방식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이 방면의 역사를 대적하게 되는 거야.’라고 여긴다. 지금 이런 것을 교통하는 것은 너에게 기초를 닦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에게 자신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 어떤 일이 임하거나 하나님의 역사가 너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을 때, 또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의 관념에 부합되지 않을 때, 너는 이 방면의 인식으로 대조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방금 우리는 부모를 대하는 이 일을 교통했다. 너는 부모에게 효도를 잘하고 싶은데, 부모에게 빚진 것이 많고, 부모가 일생 동안 너를 위해 고생을 적지 않게 하고, 너를 잘 보살펴 주었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너를 잘 보살펴 준 것을 알게 될 때, 너는 마땅히 부모의 곁을 지키며 효도하고 위로해 드림으로 그들이 만년을 즐겁게 보내면서 얼마 동안 복을 누리고, 아들딸과 함께 더 행복하게 지내도록 하는 것이 양심적이라고 갑자기 느끼게 될 것이다. 너는 그것이 아들딸로서 반드시 해야 할 책임이고, 반드시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한다. 네가 자신의 이 의무를 실행하고 있을 때, 어느 날 하나님이 너에게 뭔가를 요구하거나 생각지도 못한 시련을 주면서 하나님이 너에게 그렇게 하지 말고 자신의 본분과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요구를 원칙으로 삼으라고 요구한다고 하자. 만약 하나님이 직접 너에게 그런 방식으로 부모에게 효도하거나 부모를 대하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그때 네 마음은 어떠하겠느냐? 너는 너의 사상 관점 속에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인지상정에 맞지도 않고, 너의 그 효심을 만족시키지도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네가 자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효심이 가득하고 정말 인성과 양심이 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이 네가 너의 양심대로, 너의 효심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면 너는 반항할 것이고, 하나님에게 반감을 가질 것이며, 진리를 혐오하고 저버릴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많이 교통한 것은 사람의 패역 본성의 근원과 실질이 주로 사람의 사상 관점에서 온 것임을 인식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사상 관점은 사람이 사회 교육과 가정 교육을 받고, 인류의 여러 가지 문화를 받아들인 데서 온 것이다. 이런 것은 가정에서 전염되고, 사회에서 영향받고, 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조금씩 사람 안에 뿌리박히게 된 것이다. 이런 것이 사람 안에 뿌리박힌 후, 사람은 사회에서, 사람들 속에서 이런 것으로 살고 있고, 부지중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고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하면 질책받거나 비난받을 것이 없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진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네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양심이 없고, 인성에 어긋나고 인성이 없다고 느끼며, 너 자신마저도 납득하지 못한다. 사람의 이 사상 관점은 진리와 거리가 아주 멀지 않으냐? 그것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방향이다. 사람의 사상 관점으로 바라는 것과 사람의 행위, 그리고 사람이 좇아가는 목표는 세상과 이 인류의 것과 육체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정상 인성의 기준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방향이고 두 가지 서로 다른 목표이다. 하나님의 목표에 따라 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면, 너의 인성이 갈수록 정상적이 된다. 너의 그 사상 관점에 따라 하면 어떠냐? 네가 자신이 아주 잘하고 있다고 느낄 때, 네가 이 사회에서, 이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 갈수록 익숙하고, 갈수록 자유롭고, 자신이 이미 영락없는 인류 중의 일원이라고 느낄 때, 너는 이미 진리와 완전히 어긋난 것이다.

현실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은 문화 수준이 높든 낮든, 누구나 다 거기에서 엎어지고 뒹굴면서 지내 왔다. 어떤 사람이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그의 사상 관점 속에 있는 것이 적다고 할 수 있겠느냐? 역시 적지 않다. 특히 중국의 전통적인 여성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자는 반드시 남편을 돕고 자식을 가르치는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현모양처란 자신의 남편과 아들딸을 대함에 있어 반드시 자신의 일생을 다 그들을 위해 화비하고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여성이 다 자신이 마땅히 그렇게 해야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좋은 여인이 아니고, 양심과 도덕 기준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잘하지 못하거나 자기 기준에 따라 하지 못하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자기 아들딸과 남편에게 미안하다고 여긴다. 남편의 하루 세끼, 씻고 닦는 가정의 그 모든 것을 아주 잘해야 하고, 특히 잘해야 하는 것이 당연히 이 사회 현모양처의 기준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을 믿고는 어떠하냐? 너에게 본분을 하라고 하면 너의 본분과 네가 현모양처가 되고 모범 어머니가 되거나 표준 여성이 되는 것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네가 현모양처가 되려고 한다면 너의 본분에 그렇게 100% 시간을 들일 수 없다. 혹은 네가 현모양처가 되는 것과 본분하는 것이 충돌될 때, 너는 어떤 것을 택하겠느냐? 네가 본분을 잘해 하나님 집에 책임을 지거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것을 택한다면, 너는 현모양처가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때 너는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너의 사상에 어떤 파동이 일겠느냐? 너는 아들딸에게 아주 빚졌다고 여길 것이 아니냐? 너의 그 빚짐과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네가 피조물의 본분을 할 때 잘하지 못하면 불안해하겠느냐?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의 사상 관점에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본분을 잘하지 못했을 때에도 가책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네 양심에 이런 긍정적인 것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갖추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현모양처가 되는 것인데, 현모양처가 되지 못하면 착한 여인, 정직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기준이 아니냐? 너는 이 기준에 속박당하여 네가 본분을 할 때, 하나님을 믿을 때에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현모양처가 되는 것과 본분을 하는 이 두 가지 일이 충돌될 때, 혹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할 때, 너는 본분을 하거나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을 마지못해 택할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어느 정도 불안이 있을 것이고, 아주 많은 가책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본분을 하지 않을 때는 집에서 자신의 아들딸이나 남편에게 잘해 주는데, 설사 자신의 육체가 더 많은 고통을 받더라도 그들에게 더 많이 보상해 줄 것이다.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 사상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너의 책임과 의무, 본분을 하였느냐? 자책감이 있느냐? 자책감이 없지 않으냐? 혹은 본분을 대충대충 하여 속일 때, 혹은 아예 본분을 하고 싶지 않을 때, 자책감이 있느냐? 참소가 있느냐? 참소가 전혀 없다. 그것은 사람의 패괴 성정 안에, 인성 안에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네가 본분을 좀 할 수 있지만 사실 너는 진리의 기준과 아직 거리가 아주 멀고, 하나님의 기준과 아주 멀다. 네가 이런 것을 인식하게 될 때 너는 어떻겠느냐? 네가 계속 교만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마지막 몇 편의 말씀 중 “전능자는 인류 생명의 근원이다.”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렇게 말씀한 뜻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우리 각 사람에게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영혼은 부모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더욱이 이 인류에게서, 이 사회에서, 대자연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것이다. 우리 부모의 생명도 그들의 부모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준 것이다.’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기회이고, 하나님이 명정한 것이자 또한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준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그들의 육체를 빌어 태어났고, 우리의 아들딸도 우리의 육체를 빌어서 태어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어떨까? 그들의 운명은 누가 장악하고 있을까? 하나님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질 필요가 없이 오직 하나님에 대해 피조물의 본분을 하면 된다. 이것은 사람이 최우선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이고, 사람이 일생에서 최우선적으로 마땅히 완성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만약 네가 본분을 잘하지 못한다면, 너는 진정한 피조물이 아니다. 사람이 보기에 너는 현모양처이고, 효도하는 아들딸이고, 사회의 모범 국민이고, 아주 훌륭한 가정 주부이고 훌륭한 남편이고 착한 아들딸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냐? 너는 하나님을 거역한 사람이고, 전혀 자신의 의무를 하지 않은 사람이고, 자신의 본분을 하지 않은 사람이며, 하나님의 부탁을 받아들이고는 그 부탁을 완성하지 않은 사람이다. 말해 봐라, 네가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있겠느냐?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한 푼의 가치도 없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아무리 잘해도, 사람의 칭찬과 찬양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우리의 사회 도덕 기준이 아무리 높거나 우리의 사상 관점과 우리가 사회에서 배운 그런 것이 아무리 높고 아무리 능숙해도, 우리가 그런 것을 아무리 잘 준수해도 그것이 우리가 진리를 실행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으며, 더욱이 우리가 정상 인성이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속에 하나님이 전혀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 사람임을 뜻할 뿐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대상이겠느냐?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기준과 아직 거리가 얼마나 멀까? 너무나 멀어 가늠할 수 없다. 사람의 지금의 이 분량과 사람이 지금 마음속에 갖고 있는 것이 너무나 보잘것없지 않으냐? 그래도 자랑할 가치가 있겠느냐? 오만할 가치가 있겠느냐?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은 다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스스로 좋다고 여기는 것, 심지어 우리가 스스로 긍정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진리 안에 나열해 놓았고, 정상 인성에 나열해 놓았으며, 긍정적인 것에 나열해 놓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기에 그런 것은 혐오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한 진리와 거리가 얼마나 멀까? 이것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사상 관점에서 우리의 행실, 우리가 받은 문화 교육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는 다 우리가 깊이 파헤치고 깊이 해부할 가치가 있다. 어떤 것들은 사회 환경에서 온 것이고, 어떤 것들은 가정에서 온 것이며, 어떤 것들은 학교에서 온 것이고, 어떤 것들은 책에서 온 것이며, 또 어떤 것들은 우리의 상상과 관념에서 온 것이다. 이런 것들이 가장 무서운 것들이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에 의해 우리의 언행이 속박당하고 통제당하고 있고, 우리의 사상이 통제당하고 있으며, 우리가 일하는 동기, 속셈, 목표도 통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것을 파헤치지 않으면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고, 영원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 실행할 수 없다. 네 안에 자신의 사상 관점이 있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으면,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그대로 받아들여 원래대로 실행할 수 없다. 너는 틀림없이 속으로 다시 가공한 다음 실행할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 하고 또 그대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데, 사람의 것을 섞고 하나님의 것을 섞고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한다. ‘됐어, 진리를 실행했어. 이제 깨달았어. 모든 것이 다 있어.’ 말해 봐라, 사람의 정형이 가련하지 않으냐? 무섭지 않으냐? 이런 것은 짧은 한두 마디로 철저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삶 속에는 더욱 많은 것이 있다. 예컨대, 우리가 전에 100가지 독소를 총결해 냈는데, 사람마다 그것을 이미 보았고 글귀 도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너 자신에게 어떻게 대조해 보아야 할까? 너는 어떻게 실행해야 할까? 너에게도 이런 방면의 독소가 있지 않느냐? 너도 이렇게 여기는 것이 아니냐? 네가 일 처리할 때에도 이런 원칙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너 자신의 경력(역주: 체험)가운데서 파헤치고 대조해 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런 독소를 가져다 읽거나 보기만 하고 또는 머리로 슬쩍 생각해 보기만 할 뿐이라면 나중에는 그것을 제쳐 놓게 되고, 다만 근거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 어느 단락에서 어떻게 말씀했으면 그대로 받아들여 실행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을 글귀와 규례로만 지키고는 ‘됐어, 진리를 실행했어, 이렇게 간단한 거야!’라고 하는데, 그렇게 쉬운 것이냐? 그렇게 간단한 것이냐? 사람은 생명이 있는 존재이고 살아 있는 존재이다. 사상에 속하는 것이 안에 뿌리박혀 있기에 일을 처리할 때 그런 것이 틀림없이 나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이미 사람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일을 할 때마다 어떤 관점과 원칙에 지배되어 어떻게 어떻게 하게 되고, 어느 방향으로 하게 된다. 네가 일을 하게 될 때면 자신에게 그런 것이 있는지를 알게 된다. 물론 지금 네가 여기에 앉아 자신의 사상 관점을 들춰 보면 자신에게는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어느 방면이나 다 괜찮잖아, 난 아주 성실하고 진실하고 충성심이 있어. 본분하는 것도 기꺼이 원하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고 버리는 것도 제법 있잖아. 괜찮아! 어느 방면이나 다 괜찮아!’라고 여긴다. 하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따져 보면, 직접 너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하거나, 하나님의 어떤 일이 너에게 임하여 네가 그것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볼 때, 너의 사상 관점이 수문을 열어 놓은 것처럼 밖으로 콸콸 흘러나올 텐데, 스스로 통제하려야 통제할 수 없고 막으려야 막을 수 없다. 자신도 어쩔 수 없고 자기 자신을 미워해도 소용없고 자신을 때려도 소용없다. 그것이 밖으로 흘러나오는데, 그것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그러면, 너 스스로도 ‘왜 나 자신도 어쩔 수 없을까? 하나님을 대적하고 싶지 않은데 왜 계속 대적하게 되지? 하나님을 논단하고 싶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념을 갖고 싶지 않은데, 왜 계속 관념을 갖게 되지?’라고 할 것이다. 그때면 너는 마땅히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 너에게서 어떤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것이 하나님이 하는 사역, 하나님이 그때그때 하는 사역과 적대적인 것이고 상반되는 것인지를 인식해야 한다. 이렇게 인식하는 것은 어떠냐? 우리는 학교에서 “사람은 어디서 왔느냐?”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다 알고 있겠지? 사람은 원숭이가 변했다는 것이다. 그럼 너는 언제부터 자신이 원숭이에서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느냐? 하나님을 믿으면서부터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원숭이에서 변한 것이 아님을 정말로 확신했느냐? 그럼 너는 어디에서 왔느냐? 이것은 확정할 수 없으며 이 사실을 믿지도 못한다. 즉, 성경에 기록된 이 사실을 의심하면서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는 그 말을 의심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이론이고 학설이라고 여기지 사실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면 어떻게 만드셨을까? 무엇으로 만드셨을까? 흙으로 빚으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빚으셨을까? 나는 왜 보지 못했을까? 나는 보지 못했으니 믿지 못하겠어. 아무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당분간 이렇게 믿어 보자.’라고 의심한다. 사실 사람은 속으로 찜찜해한다. 하나님이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었고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이 준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한 단계 한 단계 더 깊어지는 것이다. 처음에 하나님은 “사람은 하나님이 만들었고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사람의 죄가 사함받았다.”라고 말씀하였다. 그다음 이 단계에 이르러 하나님은 또 더욱 심오한 비밀을 밝혀 주었는데, 사람은 윤회하고 환생하며, 사람의 생명과 영혼은 하나님이 준 것이고 하나님에게서 왔다고 말씀하였다. 이것은 진리이다. 하지만 이 방면의 진리를 볼 때마다, 너는 이런 말씀을 믿지 않기에 자신의 사상 관점으로 이런 말씀을 가늠할 것이다. ‘사람은 원숭이가 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에게서 왔을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을까? 이렇게 많은 인류를 하나님께서 다 돌보실 수 있을까?’ 보라, 이것은 사람의 머리속에 있는 관점과 사람의 능력 범위 내에 있는 능력으로 하나님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냐? 그는 사람에게 기껏해야 뛰어난 재능밖에 없는데, 하나님에게 그렇게 큰 능력이 있겠는가, 또 그것보다 더 큰 능력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하나님’이라고 부르겠느냐! 너는 모르기에 하나님께 그런 능력이 있을 수 없고, 또 사람을 만들 때 입김을 한 번 불어넣거나 한 마디 말씀을 하여 인류가 생기게 되는 그런 지혜와 권병도 있을 수 없다고 여긴다. 너는 이것이 사실임을 믿지 않고, 이것이 진리임을 믿지 않는다. 네가 이것을 의심할 때, 너는 하나님의 이 말씀에 저촉하는데, 입으로는 믿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마음속에는 저촉되는 정형과 저촉되는 태도가 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면 너는 듣기 싫어하고, 이 말씀을 하면 너의 마음속에 반감을 가지고, 이 말씀을 하면 너는 아멘 하지 않는다. 너의 마음속에 뭔가 있고 다른 생각(원문: 故事)이 있기 때문에 믿지 않고 하나님의 이 말씀에 아멘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떻게 사람을 만들었는지, 사람이 언제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누가 보았는지를 따질 필요가 없다. 본 사람이 있어야 믿고 아무도 보지 못하고 아무도 증명하지 못한다면 믿지 않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다. 근원적으로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였고, 시종일관 인류 가운데에서 사람을 경영하는 사역을 하고 계시며,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하고 계신다. 시종 한 분의 하나님이 역사하고, 말씀하고, 사람을 가르치고, 인류를 인도한다. 이 하나님은 존재한다. 지금에 이르러, 우리는 이미 그를 직접 대면하여 보게 되었고, 그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우리는 그의 역사를 경력하고 있고, 그의 말씀을 먹고 마시며 그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이 되게 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는데, 이 하나님은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한 한 마디 한 마디 말씀이 모두 진실하다는 것을 믿을 이유가 있고, 또한 마땅히 믿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이 말씀한 ‘하나님이 인류를 만들었다’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하고,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만든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네가 이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이상, 지금 이미 그의 앞에 온 이상, 네가 또 여호와가 행한 그 사역이 바로 이 하나님이 행한 것인지를 실증할 필요가 있겠느냐? 만약 실증할 사람이 없고 아무도 볼 수 없다면, 너는 믿지 않겠느냐? 은혜시대의 사역에서 네가 예수를 보지 못했다고 예수가 말씀이 육신 되었음을 믿지 않겠느냐? 지금 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 이 성육신 하나님을 네가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믿지 않겠느냐? 이런 일을 네가 보지 못했거나 이런 일을 실증할 증인이 없다면 너는 믿지 않겠느냐? 이것이 사람 안에 있는 그릇된 관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잘못을 범하고 있다. 어떤 일이나 다 자신이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한다고 하는데, 보지 못하면 믿을 수 없어한다. 하지만 네가 보게 될 때에는 이미 다 늦은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이런 말씀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이미 충분히 믿을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과 그에게서 온 모든 말씀과 모든 역사를 믿어야지 더 이상 따져서는 안 된다. 이것은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이지가 아니냐? 하나님이 인류를 만들 때, 아무도 그 곁에서 보지 못했지만 지금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 되어 말씀을 하고, 말씀이 육신 되어 우리를 구원하고 있으며, 실제적으로 사역을 하면서 뭇 교회를 다니고 있고, 인류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지 않았느냐?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어도 우리는 믿고 있다. 그럼 너는 왜 믿고 있는 것이냐? 너는 이것이 참 도이고 하나님이 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냐? 그럼 네가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 단계 사역을 하셔서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게 되었고, 보게 되었고 더듬어 알게 되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역을 하셨다고 해도 우리는 그분의 못자국을 만져 보지 못했기에,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율법시대에 하셨다는 그 사역, 율법을 반포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모세만이 듣고 모세 오경을 썼는데, 어떻게 쓴 것인지 우리는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런 사람은 어떤 잘못을 범하고 있느냐? 이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와 말씀하신다면 우리와도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혹은 “모세에게 말하면 우리는 듣지 않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혹은 은혜시대에 어떤 사람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보지 못했고, 그가 죽음에서 부활한 것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기에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과 같다. 도마라는 제자가 꼭 예수의 못자국을 만져 보아야겠다고 하니 주 예수는 어떻게 훈계했느냐?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복되도다’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사실 그는 정말 보지 못했느냐? 사람이 본 많은 사실에서 이미 예수가 하나님임이 실증되었고 믿을 수 있었기에 더 이상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할 필요가 없었고, 더 이상 많은 말씀을 할 필요가 없었으며, 더 이상 그의 못자국을 만져 보아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실증하고 믿을 필요가 없었다. 이런 사람은 도마의 잘못을 범한 것이다. 확실히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조금은 있다. 그들이 성육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꼭 보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이냐? “저는 성육신 하나님이 이 땅을 떠나 셋째 하늘에 올라가셨을 때의 참모습이 어떠하신지를 보고 그분의 본체를 보고서야 믿겠습니다. 그분이 성육신하신 기간에는 그분이 하신 이런 말씀을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네가 믿게 될 때는 모든 것이 다 늦었다. 그때는 하나님께 정죄받을 때이다. 네가 봐라, 예수가 도마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였다. 이 말씀의 뜻은 ‘네가 이렇게 오랫동안 따랐는데도 믿지 않는데 무슨 주님을 믿는 사람이냐?’라고 이미 그를 정죄한 것이다. 이것은 복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믿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믿어야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슨 일이나 친히 너에게 나타내어 보게 해서 너를 굴복시켜야 믿을 수 있단 말이냐?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친히 우리에게 나타나 달라고 할 자격이 있느냐? 하나님께 친히 우리 이 패괴된 사람에게 말씀해 달라고 할 자격이 있느냐? 또 하나님이 모든 일을 분명히 말한 후에야 믿을 수 있다고 할 자격이 있느냐? 없다. 그러므로 너에게 이지(理智)가 있다면 하나님이 한 이런 말씀을 보고 믿을 수 있다. 너에게 정말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또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든 개의치 않을 것이다. 이런 말씀이 진리임을 보게 되었다면, 마음속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역사임을 이미 100% 믿은 것이고,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는 준비가 된 것이므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너무나 궤사한 사람이기에 믿지 못한다. 그는 늘 심오한 비밀들을 알려고 하고, 그런 비밀을 다 분명하게 알아야만 믿을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전제는 ‘성육신 하나님은 어떻게 왔을까? 언제 왔을까? 온 다음 언제 갈까? 가면 어디로 갈까? 가는 과정은 어떨까? 성육신 하나님의 영은 어떻게 역사하고 또 어떻게 갈까……’라는 것이다. 그는 비밀을 알려고 하는데, 비밀을 캐러 온 것이지 진리를 찾고 구하러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이런 비밀을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어하는데, 그것이 마치 그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가로막는 것처럼, 그는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여긴다. 이런 사람의 이 관점은 위험하다. 그가 일단 비밀을 연구하게 되면 진리를 대하려는 마음이 없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려는 마음도 없게 된다. 이런 사람이 자신을 인식할 수 있겠느냐? 이런 사람은 자신을 인식하기 쉽지 않다. 네가 그에게 말하면 그는 너의 논법을 반대할 것이고, 네가 바보이고 자신은 똑똑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는 “당신은 바보야. 그 사람의 몇 마디에 바로 믿어? 그 사람은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았잖아. 아무 일도 보지 못했는데 그가 하나님이라고 실증한다고? 왜 그렇게 어리석어? 당신은 나처럼 총명해야 해. 당신은 너무나 멍청해. 사탕 두 알로 달래기 쉬운 3살짜리 어린애처럼 속아 따라가다니 말이야. 나는 어른이고 사회 경험도 있어 일반적인 작은 일에는 속지 않아.”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잔꾀로 행세하는데, 이런 사람이 좋으냐? 어디가 좋지 않으냐? 우리는 그의 결말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중간에 어떤 변화가 있을 수도 있으니 지금은 그 어떤 사람도 이후에 어떻게 될 것이라고 규정하지 못한다. 적어도 이런 사상 관점이 그의 생명이 자라는 것을 지체시키고 그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진입하는 것을 가로막고 영향 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은 아주 위험하다. 우리는 그 어느 부류의 사람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정형과 그런 부류의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이고, 어떤 실질이고, 어떤 정형인지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 그 사람이 모르고 있을 때는 그런 생각이 있을 수 있고, 글귀를 따질 수도 있고, 심오한 비밀을 캐려고 할 수도 있고, 구석구석의 일을 캐려고 할 수도 있으며, 사람들이 주의하지 못하는 문제를 캐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깨우쳐 주거나 형제자매들이 자주 그를 도와주면, 아마 돌려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돌려세워지는 그날이 되면, 그는 자신의 이전 관점이 너무나 황당하고, 자신의 이전 관점이 너무나 교만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너무나 높고 크게 본 것을 느끼며 부끄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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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저촉(抵觸): 대립하고 저항하는 심리 상태.

④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⑤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⑥명정(命定): 명하여 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