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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편 성정 변화란 무엇인지와 성정 변화의 길

성정 변화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성정 변화에 대해 논하는 것은 주요한 이상 방면에 속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은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패괴 성정이나 사탄 독소가 없고 또 하나님을 거역하는 성정이 없는 금방 만들어 놓은 사람이 아니라, 사탄의 패괴 성정과 사탄의 독소가 있는, 사탄과 똑같은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다. 예컨대, 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받아야 하고 암에 걸린 사람은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수술 치료를 받는 과정이 아주 복잡하지 않으냐? 우리는 암환자들이 어떻게 치료를 받는지, 어떻게 수술대에 오르는지, 그리고 수술을 받은 후에 화학 요법에 어떤 반응이 있는지, 시간이 얼마 지난 후에 재검사를 받아야 하는지 등의 아주 복잡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보았다. 그러므로 너는 성정 변화를 간단한 일로 보지 말라. 그것은 겉면의 결점이나 사람 생활 습관의 변화가 아니다. 게다가 성정 변화는 네가 변화되고 싶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많은 과정이 있는데, 그 과정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다 있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그날부터 마땅히 하나님을 믿는 관점이 변화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착한 사람, 단정하고 예의 바른 사람, 법을 준수하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거나, 사고할 줄 모르고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전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성정이 변화되는 것은 아주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겉으로 사람다운 모습이 좀 있다든가, 교양이 있다든가, 인내할 수 있다든가, 겉으로 경건하다든가, 겉으로 사랑이 있다든가, 남을 도와줄 수 있다든가, 베풀기를 좋아한다든가 하는 것인데, 총괄적으로 말하면 사람의 관념과 상상으로 생각하는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 “돈이 많으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베풀라”고 한 말과 같다. 모든 사람의 관점에는 이런 관념이 존재하고 이런 것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도 한 방면의 독소이다. 이전에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아무도 이 방면의 문제를 분명하게 교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이 낯설었다. 태어나 살면서도 이런 일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네가 기독교를 몇 년 믿는다고 이런 일을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하나님이 이 일에 관해 친히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았고, 친히 이 방면의 사역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지 겉면의 행위가 좀 바뀌고, 겉면의 사상이 좀 바뀌고, 겉면의 행실이 좀 바뀌는 것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고생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먹지 않고, 좋은 옷도 입지 않는 것이라고 여긴다. 마치 이전의 서양 천주교의 한 수녀와 같다(천주교도 종교이다. 사실 그녀들에게는 역시 신앙이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일생 동안 고난을 많이 받고 맛있는 것도 적게 먹고 좋은 것도 적게 누리며, 돈이 있을 경우 가난한 사람들이나 구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며, 또는 선한 일을 많이 하고 남에게 많이 베풀고 남을 많이 도와주면 된다고 여겼다. 자신은 일생 동안 고생하고 맛있는 것도 먹지 않고 좋은 것도 입지 않았는데, 임종시에는 몸에 2달러밖에 안 되는 의복만 입고 있었다. 하루 생활비는 아마 몇 달러도 안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행적은 아마 전 세계의 일반 뉴스나 주요 뉴스에서 보도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느냐?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인류 마음속의 착한 사람이고 선한 사람이며, 종교계에서 사람들이 여기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며, 변화가 있는 사람이고 참으로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도 아마 예외가 아닐 것이다. 너희도 하나님을 믿고 신앙이 있다고 하면 틀림없이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일까? 남을 때리지 않고, 욕하지 않고,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고, 나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 기독교를 믿는 사람, 이전에 믿음이 있었던 모든 사람, 혹은 방금 하나님을 믿은 사람의 심리 상태이다. 그들은 이런 것이 성정 변화이고, 이렇게 해야만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고 천국에 갈 수 있고 후에 좋은 처소가 있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이 이전에 너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혔든 아니면 모양이 형성되었든 되지 않았든 또는 네가 이전에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든 없었든, 어쨌든 이런 것이 너의 마음속에 틀림없이 있다! 왜냐하면 지금 어떤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많이 보았어도 도대체 성정 변화란 무엇인지,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열납하는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얻으려고 하는지를 더듬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가 이런 것을 모르면 너의 마음을 점유한 그런 것이 네 안에 아직도 뿌리박혀 있고, 아직도 모양이 형성되고 있으며, 아직도 너의 사상을 주도하고 있고 너의 관점을 주도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저는 지금도 자신에게 변화가 없다고 생각해요. 애가 말을 듣지 않거나 남편이 밖에서 한 일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냅니다. 이것은 여전히 천연적인 것이 드러난 것이 아닙니까? 여전히 성정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닙니까?” 또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보면 그들을 증오하게 됩니다. 이것은 여전히 성정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닌가요?” 너희는 이런 말이 맞다고 생각하느냐? 이 말은 어디가 틀렸느냐? 겉면의 행위만 중요시한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말씀하는 성정 변화가 이런 겉면의 성질이나 성격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냐? (성정이 변화된다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완전히 정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네가 지금 하나님과 관계가 매우 가깝다고 느끼고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과 합하게 되었다고 느끼지만, 어떤 때에는 여전히 크게 화를 내고 또 사람을 욕하고 싶거나 네가 좋지 않다고 여기는 일을 여전히 할 수 있는데, 너희는 이런 정형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이런 정형을 어떻게 분별하느냐? 이런 정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너희는 성정 변화에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는지 아느냐? 성정이 변화된 후 사람의 정형과 표현이 어떠한지 아느냐? (모릅니다.) 너희는 이 일에 대한 인식이 없는데, 생각해 보지도 않았느냐? 그럼 너희는 성정 변화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우선 너희에게 이런 문제를 물어볼 터이니 생각해 보아라. 너의 성정이 변화되고 너에게 진리가 있게 되면, 너의 관점이 하나님과 합하게 될 것이다. 너의 관점이 하나님과 합하게 될 때, 너는 여전히 패괴된 사람과 합할 수 있겠느냐? 그러지 못하겠지? 너는 패괴된 사람과 대립되고, 그들을 싫어할 것이고, 그들에게 반감을 가질 것이며, 그들을 혐오할 것이다. 이런 효과가 있지 않겠느냐? 그럼 너는 그들의 실질을 꿰뚫어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이미 자신의 실질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다. 너에게 변화가 있게 되면 패괴된 인류의 실질을 꿰뚫어 볼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패괴된 인류의 실질을 꿰뚫어 보고 하나님과 합하게 된다면 패괴된 인류를 혐오하게 되지 않겠느냐? 너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사람을 혐오하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과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을 혐오하지 않겠느냐? 그럼 네가 그 사람들과 어찌 여전히 합할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네가 성정이 변화되었다면 틀림없이 그 사람들을 혐오할 것이고 그 사람들에 대해 반감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패괴된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밖에 없고, 지혜롭게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너는 성정이 변화되었다고 해서 그들을 거들떠보지 않거나 그들과 큰소리로 말다툼해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마땅히 지혜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적합하다. 또 너희가 아직 잘 모르는 문제가 하나 있다. 너희는 성정이 변화되어 하나님과 합하는 것을 이방인들에게 화내거나 화내지 않는 이런 것과 연결시키는데, 이것은 틀린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할까?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려고 많은 말씀을 하였고, 많은 사역을 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하는 걸까? 진리로 사상을 주도(主導)하고 진리를 삶의 좌우명으로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목석 같은 사람처럼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식물인간처럼 성질이 없고 정상적인 희로애락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며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고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을 혐오하고 내버릴 수 있는 그런 정상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마땅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정이 변화되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많은 말씀을 했다. 그는 말씀을 하여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고 각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온전케 하려는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너희는 이런 것을 생각해 보았느냐? 나는 많은 형제자매들이 “저는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지만 겉면의 어떤 일에서는 아직도 속박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자 어떤 자매는 “이방인이 어떤 옷을 입은 걸 보면 저도 그걸 입고 싶고, 누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면 거기에 귀가 솔깃하며, 누가 예쁘게 꾸민 걸 보면 몇 번 더 보고 싶어집니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형제는 “누구 집에 돈이 많고 부유한 것을 보면 저도 가서 돈을 벌고 싶고, 예쁘게 생긴 여자를 보면 더 보고 싶어집니다. 제 뜻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면 화를 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도 이런 성정이 여전히 변화되지 못하여 일이 임하면 늘 허튼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 하면 이런 것을 제어할 수 있습니까? 이런 것이 언제면 변화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들이 성정 변화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고 말한다. 너희들은 행위에서, 겉면의 행실에서, 성질에서, 성격에서 자신을 규제할 뿐이다. 그렇게 하면 성정이 변화될 수 없다. 하나님이 “너희는 자신을 규제해야 하고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되며 아무렇게나 희로애락을 표현해서는 안 되고 마구 성질부리거나 천성적인 것을 드러내서는 안 되며 제멋대로 옷을 사거나 제멋대로 옷을 입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한 적이 있느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했느냐? 하나님이 설사 어떤 부분을 언급하였다고 해도 주요한 것이 아니고 성정이 변화되게 하는 주요 방면의 진리도 아니다. 하나님은 다만 사람의 패괴 실질에 대해 많이 언급했을 따름이다. 어떻게 사람의 패괴 실질을 인식해야 할지, 사람이 어떻게 해야 성정이 변화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참으로 사람의 패괴 실질을 인식할 수 있고 그런 패괴 성정에서 나와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말했다. 그럼, 너희가 이런 문제를 깨달은 후에도 여전히 이런 겉면의 행실에 관심을 두겠느냐? 여전히 겉면의 이런 일에 매달리겠느냐? 그러므로 네가 성정 변화란 무엇인지를 모르면 영원히 성정 변화의 실질을 파악할 수가 없고 영원히 성정이 변화될 수 없다. 특히 종교에서 넘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상 관념이 종교 의식과 종교의 사상 관점에서 아직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고, 아직도 영적인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고 있으며, 아직도 경건한 사람, 인내심이 있는 사람, 타고난 착한 사람, 선행과 기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고 있는데, 이러면 크게 틀린 것이다! 네가 만약 이런 사람이 되기를 추구한다면, 너는 영원히 하나님께 칭찬받지 못할 것이고 영원히 성정이 변화되지 못할 것이다. 네가 이런 사람이 된다면 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진리의 실질을 깨달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공을 들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성정이 변화되고 싶은 사람은 우선 성정 변화란 무엇인지,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성정 변화는 의식(儀式)이나 규례에서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옷차림이나 겉면의 행위, 겉면의 성격, 성질에서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다. 느긋한 사람을 급한 사람으로 변화시키거나 급한 성격을 느린 성격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고, 내성적인 사람을 외향적인 성격으로 변화시키거나 내성적인 성격을 비교적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거나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비교적 말수가 적어지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와는 너무나 멀다. 차이가 너무 크다! 사람이 처음에 하나님을 믿을 때 흔히 이런 일에 공을 들이는데, 일단 그렇게 되면 중요한 일을 지체하게 된다. 이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렇게 2~3년 추구하면서 굽은 길을 많이 가게 되면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이런 겉면의 행위에서 변화되라고 한 것이 아니었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 늘 그런 것을 말하다 보니 길이 없게 되는데, 하나님을 믿는 것이 끝에 이르렀고, 아무것도 할 것이 없고, 아무것도 실행할 것이 없다고 느낀다.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보더니 아직도 자신이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말씀에 진입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되어 문득 깨닫게 된다. 그제야 ‘아, 이제 보니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성정이 변화되라고 하신 것은 먼저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패괴 실질을 인식하여 그 패괴 실질에서 뿌리를 파내고 공을 들이고 근원을 찾으라는 것이었구나.’라며 알게 된다. 너희는 이제 깨달았느냐? 너희가 이렇게 오랫동안 믿었지만 성정이 변화되지 못한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 그것은 성정 변화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시인하지 않을 것이다. “저는 성정 변화란 어떤 것인지를 압니다. 하지만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항상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신이 맞다고 여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너에게 어떤 논법이 있든, 총괄적으로 말해서 너에게 이런 논법이 있으면 네가 아직 성정 변화란 어떤 것인지 모른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제는 알았겠지? 너희는 왜 대답이 없느냐? (알겠습니다.) 대답이 너무 늦구나. 마음이 매우 무겁구나, 그렇지? 성정 변화에 관해 말하면 말할수록 너희는 거리가 너무 멀다고 느껴지고, 더욱 자신에게 성정 변화가 없다고 느껴지며, 성정 변화와 사람의 본성 실질을 폭로하는 것에 관해 말할수록 너희는 자신에게 그런 것이 조금도 없고 자신이 계속 노력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렇지? 내가 왜 너희에게 묻겠느냐? 사실, 어떤 일은 너희가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 어떤 사람은 “그럼 당신께서 우리를 난처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대답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왜 우리에게 물으십니까?”라고 말한다. 너희를 난처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묻는 말을 너희가 마음속에 새겨 두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너희는 말마다, 교통하는 화제마다 평소에 잡담하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들으면 그만이라고 여기지 말라. 우리가 지금 교통하는 일마다, 한 방면의 내용마다 우리가 이후에 하나님을 믿는 노정에서 필요한 과정이고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것이며 어느 하나도 부족해서는 안 되고 또한 이런 것은 각 사람의 사상 관념 속에 없는 것이다. 너희에게 묻는 목적은 너희도 스스로 반성해 보고, 자신의 마음속에 이런 것이 있는지 스스로 성찰해 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너희가 이전에 스스로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면, 마음속으로 이 화제를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너희가 전에 스스로 생각해 보았거나 전에 이런 관점이나 관념이 있었다면, 지금도 자신에게 이런 것들이 있는지를 다시 자세히 파 보고 성찰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가 오늘날 예배하는 것은 종교처럼 형식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시간이 되면 듣고는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간단하냐? 아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화제는 모두 인류의 가장 수준 높은 화제로, 그 어떤 화제보다도 중요하다! 너희는 이 말에 동의하느냐?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화제는 인류 훗날의 처소에 관한 것이고 또한 만물을 주재하는 하나님의 우리 인류에 대한 요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화제를 논하고 있고 또한 날마다 이런 화제를 교통하고 있다. 지금까지 교통했어도 어떤 사람들은 별로 깨닫지 못하고, 지금까지 교통했어도 이런 화제는 아직 다 교통하지 못했으며, 지금까지 교통했어도 어느 한 화제도 완전하게 다 말하거나 밝히 말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생명에 관한 일은 사람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말하자면, 기록을 하고 집에 가서 글을 쓰고 또 녹음한 것을 많이 듣고 책을 많이 보고 그다음 유명한 구절들을 암송하며, 예배할 때에 그런 것으로 여러 사람들과 얘기하고 교통하면 끝나는 이런 간단한 것이 아니다. 너는 중요시해야 한다. 모든 화제는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이고, 모든 화제는 우리 각 사람이 반드시 갖춰야 할 진리이기 때문이다. 네가 이 일을 아주 중요하게 본다면 마음에 새겨 둘 것이고, 네가 이 일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고 관심도 없다면, 영원히 이런 것을 얻지 못할 것이고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에게 깨우쳐 주고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숨는다. 너에게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찾고 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너를 깨우쳐 주고 너의 마음속에 역사하여 분명하게 깨닫게 하고 각 방면의 진리에 대해 조금씩 환해지게 할 것이다.

성정 변화라는 이 화제가 중요하지 않으냐? 확실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너희는 지금 이 방면의 진리를 급히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도 자신이 변화되지 못하여 재난이 올 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재난 속에서 고통받을까 봐 두려워한다. 그렇지? 물론 어떤 사람들은 현재 깨달은 진리가 너무나 적어 이후에 하나님이 사람을 시련할 때 굳게 서지 못하고 넘어질까 봐 두려워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번에 하는 사역은 마지막 단계 사역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 단계에서 구원을 받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럼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마침표를 찍게 되고 끝나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성정이 변화되려면 먼저 성정 변화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방금 우리가 사람 관념 속에 있는 성정 변화에 대해 말했는데 너희도 그런 논법이 틀리고 그런 것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진실한 성정 변화가 아니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럼 하나님이 요구하는 진실한 성정 변화는 어떤 것일까? 너희는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느냐? 우선 성정 변화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조건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방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성정이 변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정이 변화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결점이나 패괴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성에 대조해 보고 사람 안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을 파헤쳐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외에 또 어떤 책이나 어떤 방면의 자료가 사람의 성정을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 없겠지?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다면 성정 변화는 틀림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싶지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많아 어느 방면부터 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성정이 변화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어요?”라고 말한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 싫어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괜찮다.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 시가가 있지 않으냐? 그런 시가를 많이 부르면 된다. 시가에는 곡이 있기에 하나님 말씀을 보는 것보다 효과가 좋을 것이고, 하나님 말씀을 쉽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먼저 이런 말씀에서 자신의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보아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심에 있어 또 흥미까지 불러일으켜야 하니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와 얼마나 거리가 머냐? 사람의 흥미까지 불러일으켜야 하니 사람이 정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좋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사람에게 유익한데 사람이 좋아하지 않으니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와 그야말로 너무나 멀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때마다 너는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당신의 말씀을 아주 사모합니다. 저도 성정이 변화되고 싶습니다. 저는 재난 속에 떨어질까 봐 두렵고 제게도 좋은 처소가 있기를 원합니다. 저도 진정한 사람이 되고 싶고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하신 말씀은 너무나 많아 별로 먹고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인도하고 도와주셔서 당신의 말씀이 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를 많이 깨우쳐 주셔서 당신의 말씀에서 더욱 많은 진리를 깨닫고 당신 말씀의 중요성을 알고 당신의 말씀이 바로 저의 생명이고 제가 얻어야 할 것임을 알게 해 주십시오.” 네가 이렇게 성심성의로 기도하면 부지중에 하나님이 너에게 역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얕은 데에서 깊은 데로 점점 더 많이 깨닫게 할 것이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걸 아주 좋아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다 읽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가장 주요하게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고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모르고 어떻게 성정이 변화되어야 하는지도 모르며 어떤 진리로 자신에게 대조해 보아야 하는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겠느냐? 지금 교회에서 하나님이 인류의 패괴 실질을 심판, 형벌하고 폭로한 말씀을 남김없이 발췌한 소책자를 나누어 주지 않았느냐? 그럼 너희는 일단 하나님의 긴 말씀은 제쳐 놓고 먼저 이 소책자의 말씀을 읽은 후 다시 이런 말씀을 하나님 말씀의 내용에 결부시키면 범위가 다소 줄어든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공을 들여야 한다. 너희들이 분명하게 교통하지 못하는 화제는 교통할 수 있는 만큼 교통하고, 정말 분명하게 교통하지 못하는 것은 먼저 제쳐 놓은 다음 이해하기 쉽고 지금 체험할 수 있는 것을 골라 먼저 교통하면 된다. 얕은 데에서 깊은 데로 진입하는 것이다! 너는 한 번에 깊은 데에서 더욱 깊은 데로 진입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도 사람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작은 데에서 조금씩 자라고 조금씩 쌓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면서 자신에게 성정 변화가 있는지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한다. 이것은 많은 형제자매들이 관심을 갖는 문제이다. 어린애가 태어나면 엄마가 젖을 먹이는데, 어린애가 스스로 자신이 언제면 자라게 되는지에 관심을 갖겠느냐? 어린애가 스스로 자신이 자랐는지에 관심을 갖겠느냐? 그럴 필요가 있느냐? 그럴 필요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럼 저는 제가 변화되었는지, 얼마나 변화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너는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네가 변해야 할 때가 되면 자연히 변하게 되고, 이미 변했을 때는 그것을 스스로 느낄 수 있고 얼마나 변화되었는지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네가 처해 있는 단계마다, 시기마다 하나님은 일을 어느 정도 하거나 너에게 어떤 환경이 임하게 하거나 어떤 인ㆍ사ㆍ물을 배치하여 공과를 배우게 할 것이다. 네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돌이켜 보면 처음에 네게 어떤 관점이 있었고 지금은 또 어떤 관점이 있는지를 대조할 수 있는데, 대조해 보면 자신에게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게 된다. 지금 너희에게 가장 주요한 것은 많이 먹고 마시고, 많이 교통하고, 교통을 많이 듣고, 하나님의 말씀에 공을 많이 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틀리지 않는다. 이것은 성정이 변화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네가 이것을 떠난다면 어떻게 성령의 감동을 더듬고 어떻게 영 안에서 살 수 있고 어떻게 영에 속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고 어떻게 마음이 밖으로 도망가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 안정될 수 있는지, 어떻게 정해진 시간에 기도할 수 있는지 하는 이런 것은 다 부차적인 것이다! 그럼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면 살아갈 수 있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매일 옷을 입고 집은 정리하지만 밥은 먹지 않는 것과 같다. 집을 아주 깨끗이 정리하고 자신을 아주 예쁘게 단장해도 밥을 먹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매일 밥은 먹지 않고 겉면만 꾸미는 것과 같다. 네가 얼굴을 아무리 깨끗하게 씻고 껍질이 일어날 정도로 문질러도 소용없다. 그렇지 않으냐? 하지만 네가 하나님의 말씀에 공을 들인다면 들인 만큼 수확을 얻을 것인데, 이 수확이 얼마나 큰지는 네가 따질 필요도 없고 가늠할 필요도 없으며 더욱이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할 것이고 하나님이 너에게 답을 줄 것이고 깨우쳐 줄 것이며 하나님이 너에게 알게 할 것이니, 네가 관심을 갖거나 따질 필요가 없다. 그것은 너의 책임이 아니다. 알았겠지? 그러므로 이후에 또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은 언제 저를 시련하십니까? 제가 굳게 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공정을 검증하셨습니까? 저의 성정은 도대체 얼마나 변화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왜 잠자코 계십니까? 하나님은 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 이것은 사리에 어두운 말이다. 너는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어느 날, 네게 분량이 있게 되었을 때, 너의 성정이 정말 변화되었을 때, 어떤 환경이 임하면 네가 이겨 낼 수 있고, 정확히 대할 수 있고, 하나님이 요구한 방식에 따라 그런 일을 대할 수 있는데, 그때가 되면 너는 자신이 이미 변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변화는 겉면의 것이 아닌 내면의 것이고 성정과 실질상에서의 변화이다. 물론 성정 변화는 일조일석에 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 결점을 고칠 때부터 자신이 늘 실패한다고 느낀다. 실패하여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후에도 한동안 소극적이 되면 ‘끝이야, 나 같은 사람은 구제 불능이야. 성정 변화는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 나는 도저히 변화될 수 없어. 이렇게 작은 결함과 나쁜 습관, 나쁜 취미도 이렇게 변하기 어려운데, 성정 변화는 더욱 어렵지 않겠어?’라고 생각한다. 그는 소극적이 되고 자신에게 희망이 없다고 느껴져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고 싶어 하지 않고 누가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말하면 반감을 가지고 누가 본분하는 일에 대해 말해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일에 대해 전혀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어떤 정형이냐? 너희는 이런 체험이 있었느냐? 너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느냐? 너희는 자신이 정말 성정이 변화되고 싶을 때, 항상 실패하고 항상 소극적이 되고 항상 넘어지고 항상 연약해질까 봐 두렵지 않으냐? 두렵든 두렵지 않든, 성정 변화는 일조일석에 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성정 변화는 사람의 패괴 실질의 근원을 파헤쳐야 하는 이런 변화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암환자가 종양 제거 수술을 받으려면 수술대에 올라가야 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지 않았느냐? 수술대에 올라가야 하고 해부해야 하고 배를 갈라야 하며, 그다음 칼로 그 종양을 떼어 내야 하고 많은 고통을 받아야 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복잡한 과정이 있다. 이 과정에서 너는 아마 많은 일을 겪어야만 한 가지 일에 대해 깨닫게 될 것이고, 많은 일을 겪어야만 한 방면의 성정이 변화될 것이며, 많은 인ㆍ사ㆍ물을 겪고 서로 다른 많은 환경을 겪고 굽은 길을 많이 가야만 조그마한 변화가 있게 될 것이다. 얼마나 큰 변화가 있든, 그 변화는 소중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귀중히 여기고 기념할 것이다. 왜냐하면 네가 많은 고통을 겪고 많은 대가도 치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기에 너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너의 연약이 무엇인지도 알며 더욱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성정이 변화되기 전에, 우리가 단지 성정 변화 방면의 진리를 교통할 때 마땅히 심지가 있어야 한다. 즉, 얼마나 큰 환경이 임하든, 어떤 어려움이 임하든, 어떻게 연약하고 어떻게 소극적이든, 우리는 성정 변화 방면에 대해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약속을 주었으니, 사람은 받아들일 심지가 있어야 하고 의지력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겁쟁이를 좋아하지 않고 심지가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설령 네가 많은 패괴를 유로(역주: 흘러나옴)했을지라도, 많은 굽은 길을 갔을지라도, 중간에 많은 과오가 있고 하나님을 대적한 적이 있을지라도, 또는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마음을 품었거나 원망했거나 저항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것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은 단지 사람이 언제 변화될 수 있는지만 본다. 성경에 그런 예가 하나 있는데, 탕자가 돌아온 이야기이다. 왜 그런 비유를 하였겠느냐?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사람에게 변화될 기회도 준다.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이해해 주는데, 사람의 연약을 잘 알고 사람의 패괴 정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넘어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사람이 어릴 때에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어릴 때 체질이 아무리 좋고 아무리 튼튼해도 걸음마를 배울 때에는 엎어질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으며 부딪칠 때도 있고 걸릴 때도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잘 알고 있는 것같이 하나님도 그렇게 각 사람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각 사람의 어려움과 연약함을 알고 있고 각 사람의 필요도 알고 있으며 더욱이 각 사람이 성정 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에 부딪힐지, 어떤 연약함이 있을지, 어떤 실패가 있을지도 알고 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한다고 하는 것이다. 네가 어떻게 연약하든 오로지 하나님의 이름을 저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이 도를 떠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성정이 변화될 기회가 있다. 우리에게 성정이 변화될 기회가 있다면 살아남을 희망이 있는 것이고, 살아남을 희망이 있다면 하나님께 구원받을 희망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정 변화란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될 때, 성정이 변화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알게 될 때, 두려워하지 말고 마땅히 믿음이 있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같이 패괴된 인간을 보면 너무 깊게 패괴되어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더욱이 성정 변화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니, 정말로 당신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정말 당신께서 저를 도와주고 공급해 주셔서 어떻게 당신의 말씀을 깨닫고 어떻게 당신의 말씀을 실행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말씀에서 인식과 체험이 있고 당신의 말씀을 저의 삶 속으로 가져와 제 삶 속의 일언일행, 일거일동, 속마음마다, 일마다 당신의 인도가 있기를 바라고 갈망하고 있습니다. 저는 정상 인성을 살아내기를 갈망하고 진정한 사람의 모습을 살아내어 당신을 흡족게 하기를 갈망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안 됩니다. 저의 패괴가 너무 많고 아직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니 당신께서 저를 드러내시고 또 저를 도와주시고 공급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지금 저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너는 마땅히 이런 기도가 있어야 하고, 이런 심지가 있어야 한다. 네가 이렇게 기도하면, 너의 마음과 너의 삶에 부지중 변화가 있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대로 그 기도를 이루어 주고, 우리에게 심지가 있으면 그 심지대로 이루어 주기 때문이다. 네가 늘 두려워하는데, 늘 두려워하면 안 된다. 사실, 아직 아무 일도 임하지 않았는데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정 변화에 대해 심지가 없고 믿음도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선 성정 변화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의 패괴 본성이 하루아침에 사탄에게 이렇게 깊이 패괴되었겠느냐? 사람은 이미 사탄에게 몇천 년 동안 패괴되어 패괴 본성이 이미 여지없이 드러났고 이미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사람의 자연적 유로가 사탄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은 정도에 이르렀고, 하나님과 적이 되는 정도에 이르렀다. 또 진리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반감을 가지고 귀찮아하고 흥미를 가지지 않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 정도로 마비되었는데 성정이 그렇게 빨리 변화될 수 있겠느냐?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정 변화에 대해 정확한 터득이 있어야 하고 정확한 태도로 이 일을 대해야지 허황된 생각을 해서는 안 되고 한술에 배를 불리려고 해서도 안 된다. ‘내가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 하나님의 이렇게나 많은 말씀을 이렇게 먹고 마시면 변화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사역을 좀 더 하시고 표적과 기사를 더 행하신다면 변화되지 않겠는가!’라고 해서는 안 된다. 성정 변화의 일에서 보다시피, 하나님의 역사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탄의 패괴 실질에서 구원하고 사람을 사탄의 손아귀에서 빼앗아 올 능력이 있고, 사람의 성정을 변화시킬 능력과 지혜도 있다.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된 이 일에서, 하나님의 경영 계획 방면에서, 하나님은 사탄을 패배시키기 위해 인류를 구원하는 경영 계획이 있게 된 것이냐 아니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탄과 싸움을 하는 것이냐?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탄과 싸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경영 계획에 대해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럼 우리가 이후에 “하나님은 왜 사탄을 멸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사탄이 없으면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 구원받지도 못하고 또한 하나님의 이 경영 계획으로 구원받아 살아남게 될 한 무리 사람도 없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한 무리 사람들을 얻기 위해 사탄과 싸움을 하는 것이지 사탄과 싸움을 하는 김에 사람을 조금 얻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경영 계획 취지의 핵심을 보았다. 하나님이 얻으려고 하는 것은 한 무리 사람, 한 무리의 진정한 사람들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경영 계획이다. 보다시피,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정이 변화되어 완전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하나님이 얻으려는 정상 사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

어떻게 성정이 변화될 수 있는지, 너희에게 길이 있느냐? 어떤 것을 변화시켜야 하는지 너희에게 인식이 있느냐? 너희는 이 방면의 진리를 교통한 적이 있느냐? 방금 말했듯이, 성정 변화는 그런 겉면의 행위, 행실이나 규례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것일까? 너희는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성정 변화는 성격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성정을 변화되게 하는지, 어떤 것을 변화되게 하는지 깨닫고 이해해야 한다. 문화 지식이나 객관적인 사상 방면에서 변화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각 사람의 사상 관점을 바꾸려는 것인데, 이것이 한 방면이다. 그리고 사람됨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너의 인생관을 가리킨다. 이것이 또 다른 한 방면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깊이 뿌리박힌, 사람이 유로하는 사탄의 패괴 본성도 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성정 변화는 바로 이 3가지 방면이다.

사람의 사상 관점이란 매사에 대한 사람의 견해인데 하나님은 이것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사상 관점 방면의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우리는 지식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지식에 대한 관념은 무엇이냐? 다시 말해, 사람의 사상 관념 속에 이 세상의 ‘지식’에 대해 어떤 인식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지식은 이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느냐? 사람은 지식이 있을수록 이 세상에서 더욱 지위가 있게 되고, 더욱 상층 인물이 되고, 더욱 교양이 있는 사람이 되고, 더욱 고귀한 사람이 되기에 지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여길까? 공부를 잘하고 지식이 풍부하면 모든 것이 다 있게 되는데, 지위도 있고 돈도 있게 되고 좋은 직장과 앞날도 있게 되기에 지식이 없으면 안 된다고 여긴다. 또 이 세상에서 지식이 없으면 사람들이 깔보고, 공부를 적게 해도 사람들이 깔보고 사귀려는 사람이 없기에 지식이 없고 지위가 없는 사회 하층민과 왕래하고 접촉할 수밖에 없다고 여긴다. 너에게 이런 관점이 있으면, 너는 지식을 아주 숭상하고 숭배하며 지식을 아주 높고 중요하게 보는데 그것은 심지어 진리를 초과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럼 저에게 지식이 없다면 하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지식과 글을 빌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한다. 그것은 서로 별개의 일이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지식은 인류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역사(歷史)며 현대 과학 기술이며 문학이며 또는 한 방면의 기능이며 한 방면의 과목이며 또는 상업이며 정치며 지리 등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것을 한 방면의 특기로 여기고, 지식이 있으면 이 세상에 발붙일 수 있고 지식이 있으면 모든 것이 있게 된다고 여겨 지식을 특별히 중요하게 본다. 네가 어떻게 보든 그것은 너의 한 방면의 사상 관점이다. 고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다. “만 권의 책을 읽으면 만 리 길을 갈 수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그것은 네가 책을 많이 읽을수록 형통하게 되고 책을 많이 읽을수록 식견이 더욱 많아지며 어디에 가더라도 더욱 지위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각 사람의 마음속에는 다 이런 사상 관점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자신이 공부를 해야 할 그 연령대에 가정 조건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여 졸업 증명서를 받지 못하고 또 아무런 학력도 취득하지 못한 것을 아주 후회하고 그 당시에 가정 조건이 좋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만일 자신에게 여건이 된다면 자손에게는 꼭 대학을 다니게 하여 학력을 얻게 하고, 심지어 해외에 나가 더 깊이 배우게 하려고 한다. 이것은 지식에 대한 각 사람의 갈망과 관점과 사상, 그리고 지식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러므로 많은 부모들은 어떤 대가도 아끼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아들딸을 대학에 보내는데 심지어 가산을 다 들여서라도 자녀에게 공부시키고 게을리하지 못하게 한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아이를 어느 정도까지 단속할까? 그들은새벽 1시에 잠을 자게 하고 새벽 4시면 깨어나게 한다. 하루에 3시간만 자게 하면서 아들딸에게 “네가 출세하려면 공부를 많이 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몰아댄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상투를 들보에 매고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매서 공부했던 옛 사람을 따라 배우라고 하면서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계속 공부하라고 한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런 이야기와 이런 비극이 각 사람에게서 생기고 있다. 이것은 지식에 대한 갈망과 지식에 대한 사상 관점의 지배를 받아 하게 되는 모든 사람의 행동과 행위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너희는 아마 아주 반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너희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지식 수준이 아주 높거나 학력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너희의 학력이 높으면 좋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반드시 이 일을 정확히 대해야 한다. 즉, 너희는 지금 사탄의 것을 정확하게 대해야 하고, 정확한 터득과 인식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공부하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고, 더욱이 너희에게 자녀가 대학에 다니거나 학력을 취득해 좋은 직장을 구하도록 키우지 말라고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너희들을 제한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나의 관점을 말하고 모든 패괴된 인류가 지식을 숭상하는 정도를 말했을 뿐이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이런 지식을 배우지 않았다면 당신께서 지금 우리에게 교통하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현재 네가 무엇을 배웠든, 얼마나 높은 지식 수준이 있고 머릿속에 얼마나 높은 관념과 사상이 있든, 공부를 얼마나 했고 대학을 얼마 다녔거나 얼마나 높은 졸업장과 학력이 있든, 내가 교통하는 이 화제는 너희에게 본래 있는 그런 것과는 상관이 없다. 나는 단지 사실대로 말할 뿐이다. 지금 나는 지식에 대한 사람의 관점과 지식에 대한 나의 관점을 말하고 있다. 너희는 하나님이 지식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알고 있느냐? 방금 한 자매가 “하나님은 사람의 과학이 발달하기를 바라시고, 사람이 많은 것을 깨닫기를 바라십니다.”라고 말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바란다는 것은 물론 맞다. 하나님은 그것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좋아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야 맞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효력을 하게 하는 것이지 결코 그런 것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것으로 진리를 대체하지 않고, 그런 것으로 사람의 인성을 보완하거나 사람의 성정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간혹 지식 방면에 대한 관점과 견해가 조금 언급되어 있다. 물론 너희는 그리 명확하게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확실히 이런 글귀가 조금 언급되어 있다. 예를 들어 유가며, 유가 학설이며, 사회 과학을 대표적으로 조금 언급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마땅히 하나님이 인류의 지식을 혐오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식은 단지 단순한 문구나 단순한 공식이 아니다. 지식 안에 어떤 것, 어떤 사상 관점이 들어 있고, 어떤 독소가 그 안에 들어 있다. 지식마다 그 지식의 독소가 들어 있고, 지식의 내용마다 그 지식 내용의 독이 그 안에 들어 있다. 사람이 이런 독을 배우고 습득하면 그 독이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게 되어 사람도 그 방면의 지식에 패괴되고 노략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배운 지식이 많을수록, 습득한 지식이 많을수록 사람은 더욱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어렵게 되고 더욱 쉽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지식은 유물론적인 것이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세상의 것들을 연구하고 습득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네가 역사책을 읽어 본다든가, 명인들의 저작을 읽어 본다든가, 위인들의 전기를 읽어 본다든가 혹은 어떤 방면의 과학 기술이나 기교를 배우면 무엇을 얻게 되겠느냐? 만일 사람이 물리를 배워 물리 원리, 뉴턴 학설이나 어떤 학설을 어느 정도 습득하고 그런 학설을 배워 마음속에 둔다면 그런 것에 통제되고, 그런 것이 네 안에서 맴돌게 되고 네 안에서 너의 사상을 주도하게 된다. 그런 후에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너는 ‘어, 하나님의 말씀에는 왜 지구의 인력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 하나님의 말씀에는 왜 우주가 언급되어 있지 않을까? 달에는 공기가 있을까? 하나님의 말씀에는 왜 지구상에 산소가 얼마 있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을까? 하나님은 왜 이런 일들을 언급하시지 않았을까? 하나님은 이런 일을 밝히셔야 마땅해. 이런 일이야말로 밝힐 필요가 있는 것이니 마땅히 밝혀야 하고 인류에게 알려 주셔야 해.’라고 생각할 것인데, 네 안에 싸움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는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길 것이고, 너의 지식과 이론을 주요한 위치에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것이다. 어쨌든 그런 지식은 사람을 착각하게 할 것이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할 것이다. 너희가 믿든 안 믿든, 너희가 오늘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언젠가는 그런 일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지식은 사람을 멸망으로 끌고 갈 것이고,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것을 알았겠지? 어떤 사람들은 아마 이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들 가운데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 있고, 학벌이 높고 학력이 높은 사람들이 있으며, 스스로 학력이 아주 높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을 풍자하는 것이 아니고 비꼬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지금 너희에게 당장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이 방면에 인식이 있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다. 지식, 이것이 네가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는 데의 장벽이 되어 너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어렵게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며, 너의 지식과 머리로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을 분석하고 대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너에게 지금 지식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어떤 것들이 지식적인 것인지, 지식적인 것이 어떻게 너와 하나님의 정상 관계를 가로막고 방해하며 하나님을 믿는 데에 정상적으로 진입하는 것을 방해하는지를 인식하고 해부할 필요가 있다. 너는 마땅히 이렇게 인식해야 한다. 그러면 정확하다. 너희는 이 화제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나는 어떤 형제자매들이 분명 학력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너희를 타격하는 것도 아니고 비웃거나 배척하는 것도 아니라, 오늘 갑자기 이 화제를 논하게 되니 먼저 대표적인 한 방면을 말하여 일깨워 주려는 것이다. 너희 중 어떤 사람이 학력이 높거나 지식과 문화가 좀 있다고 해서 일부러 난처하게 하거나 너로 소극적이 되거나 의기소침해지게 하려는 이런 뜻이 아니다. 너희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겠지? (네.) 정확히 이해할 수 있으면 마음이 놓이고, 한숨 돌릴 수 있겠다.

방금 우리는 많은 것을 말했다. 너희도 지금 보다시피, 성정 변화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너의 사상 관점으로부터 너의 어떤 것이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인지,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인지,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인지를 파헤쳐야 한다. 너에게 지식이 있든 없든, 네가 어떤 사람이든, 너의 사탄 본성은 네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다 똑같은 것이다. 네 안에 있는 그런 것을 놓고 말하면, 어느 것이나 다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고, 하나하나의 속에 있는 근원, 실질, 내용이 인성 실질에 부합되거나 진리에 부합되는 것은 전혀 없다. 이 말은 인정하겠지? 방금 내가 사상 관점 중의 지식 방면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에 대해 말하니 어떤 사람들은 기분이 언짢아한다. 아직 너희 중 어느 사람을 겨누어 말하지 않았다. 단지 모두에게 이런 문제를 논의하게 하고 하나의 문제를 교통할 뿐인데, 어떤 사람들은 기분이 언짢아한다. 너희의 아픈 곳을 건드려 너희는 기분이 아주 언짢아하고 불편해한다. 이런 것을 교통하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이 말씀한 모든 사실과 하나님이 말씀한 너희가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모든 것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고 또한 받아들이기를 시도해 볼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과 갈수록 가까워질 것이고, 하나님의 요구와도 갈수록 가까워질 것이다. 만일 이렇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영원히 구호를 외치는 것이 될 것이고, 실질적인 면이 없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오늘 실질적인 문제를 좀 말하여 너희를 난처하게 하였는데, 너희의 기분이 언짢았다면 미안하다. 우리는 어쨌든 이런 현실에 직면해야지 이런 현실을 피해서는 안 된다. 네가 피한다면 너의 사상 관점 안에 존재하는 것이 틀린 것인지 맞는 것인지를 언제 알 수 있겠느냐? 너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이런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 이방인들은 “며느리 될 사람이 못생겨도 결국 시부모를 만나야 한다”라고 말한다. 못생겨도 언젠가는 그 집의 시부모를 만나야지 “못생겼으니 영원히 그들을 만나지 않을래요.”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사람에게 시집가지 않으면 몰라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네가 이제는 하나님을 믿었으니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을 받아들여야 한다. 변화가 있고 진입이 있고 구원에 이르려면 이런 사실에 직면해야 한다. 아마 처음에 직면할 때는 사나흘 괴롭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려고 해도 합당한 말이 없어 할 말이 없게 된다. 다음에 이런 일이 임하면 또 사나흘 괴롭고 할 말이 없다. 그다음에 이런 일이 임하면 부지중에 사실 가운데서 너는 자신의 사상 관점과 자신의 마음속에 확실히 이런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한 말씀에 머리를 끄덕이고 인정할 것이며, 하나님이 한 말씀이 진실하고 거짓이 조금도 없고 확실히 하나님이 우리 인류를 가장 잘 알고 우리 각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음을 사실대로 진정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어느 날엔가 네가 이 정도로 체험하게 될 때면 하나님을 믿는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이고, 생명 성정이 변화되는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네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대할 때 저항이 없고 괴롭지 않으며, 하나님이 너를 폭로한 하나하나의 사실을 대할 때 너의 마음이 언짢아하지 않고 반감이 없으며 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상적으로 직면하게 되는데, 그때는 네가 하나님 말씀에 이미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오늘 우리는 가볍게 시작하고 슬쩍 테스트를 해 보았다. 너희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고 난감해하는 면도 좀 있었지만 괜찮다. 나는 개의치 않으니 너희도 개의치 말기를 바란다.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는 말씀은 이보다 더욱 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말 너희 각 사람을 심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보다 더욱 엄할 것이다. 하나님이 패괴된 사람을 보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 이치로 깨우칠 수 없는 사람을 보면서 말씀하는 태도가 좋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폭로하는 태도가 좋을 수 있겠느냐? 틀림없이 좋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히 매우 엄할 뿐만 아니라 매우 깊고 한 마디로 정곡을 찌를 것이다! 네가 오늘 이런 사실, 오늘 우리가 교통한 그 조그마한 일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 형벌을 잘 받아들이기 시작했음을 증명한다. 우리가 교통한 첫 번째 문제는 사상 관념의 문제이다. 하나의 작은 예를 들었는데, 너희가 다 알고 있는 지식 방면의 화제를 예로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괴로워할까 봐 많이 교통하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의 기분을 고려해 조금만 말하다 보니 완전하지도 아주 분명하지도 않기에 너희가 체험하는 중에서 천천히 상고하기를 바란다. 이 방면에서 약간 일깨워 주었을 뿐이니 체험하는 중에서 스스로 천천히 체험하고 이 방면의 진리를 천천히 찾고 구하며 지식이 사람에게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체험해 보아라. 아마 이후에 또 이 방면의 화제를 교통할 것이니 이 방면의 화제를 교통할 그때, 너희의 마음이 괴롭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딱 나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닐까?’라고 여기지 말라. 첫 번째 화제는 여기까지 교통하겠다.

다음으로 두 번째 화제인 인생관에 대해 교통하겠다. 너희의 인생관은 무엇이냐? 너희 삶의 원칙은 무엇이냐? 너희는 인식이 좀 있느냐? 원칙이 좀 있느냐?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속으로 알고 있느냐? (지금 인식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알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말해 보아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느냐? 그냥 이대로 믿으면 된단 말이냐?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또 다른 관점이다. 말하자면, 네가 대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고, 너의 인생관과 인생의 방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제 듣자니 너희는 “남아 있는 반평생에 하나님을 따르고 더 이상 사탄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또 다른 자매는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겠습니다.”, “하나님께 구원받기를 추구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이런 것은 모두 아주 좋다. 이것은 사람마다 속으로 힘을 내고 있고, 생각이 비어 있지 않고, 끝까지 따르려고 다짐하고 있고, 어떤 사람이 되려고 생각하고 있고, 목표와 방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마음속에는 이미 어떤 내용이 있고 비어 있는 것이 아니며,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럭저럭 공밥만 얻어먹는 것도 아니며, 그동안 너희에게 진보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것이 바로 변화이다. 적어도 이방인처럼 “인생은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전부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너희는 이런 말은 꺼내지 못한다. 지금은 너희가 이런 말을 들으면 괴롭고 혐오스럽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너희는 이 말에 반감을 가지지 동감하지 않는다. 너희가 지금 어느 정도로 진입했든 결론적으로 말해, 지금 이 말을 들으면 ‘그것은 나에게 지금 있어야 할 것이 아니고 내가 마음속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야. 나의 지금 목적은 하나님을 잘 따르는 거야. 하나님께서 그분의 비밀과 뜻 그리고 경영 계획의 취지, 우리를 구원하는 뜻을 이미 우리에게 나타내셨는데, 우리가 계속 피동적이면 하나님께 너무 미안하고 너무 빚지게 될 거야!’라고 느낄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영이 이제는 깨어나고 있고,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렇지 않으냐? 그럼 어떤 사람들은 “저는 아직 아무런 관점이 없는데요.”라고 말한다. 아무런 관점이 없다고 말하는데 아마 네가 지금은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아마 몰래 결심을 했을 수도 있다. ‘내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도 관점이 있어. 나도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려고 이미 결심을 했어. 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했다가 때가 되면 깜짝 놀라게 할 거야.’ 어쨌든 결론적으로 말하면, 각 사람의 관점은 모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고 추구하고 있는데, 그것은 옳은 것이다. 어느 방면의 관점도 그 방면의 실제적 의의가 있다. 말해 보아라.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 마땅히 있어야 할 관점이 아니겠느냐? 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을 혐오케 하지 않고, 더 이상 노하게 하지 않고, 그 노가 끊이지 않는 일이 없게 하며, 하나님의 마음이 위로를 얻게 하여 아브라함처럼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인생관이 아니겠느냐? 이것이 사람에게 있어야 할 인생관이다. 너에게 이런 인생관이 있고 이런 사상이 너의 마음에 뿌리박히고 네가 이 방향을 향해 추구한다면, 네게는 세상의 돈, 지위, 명리의 시험이 좀 작지 않겠느냐? 유혹이 좀 작지 않겠느냐? 네가 이 관점을 향해 노력하고 실행하고 체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부지중에 네 안에서 너의 좌우명이 되고 너의 삶의 토대가 되며, 부지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의 생명이 되고, 네 안에서 너의 인생길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네게는 하찮아지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너의 인생관이 무엇인지도 아주 중요하다. 즉, 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떤 방향을 향해 추구하고 있는지, 정확한 방향이 맞는지, 바른길이 맞는지, 하나님의 요구와 거리가 얼마나 먼지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이 도달하라고 요구한 것에 따라 추구하고 또 그 추구 방향이 맞다면 설사 네가 좀 치우치게 가거나 좀 연약하거나 좀 실패할지라도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지 않고 계속 너를 돌봐 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느냐?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우매해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심지가 있는 사람, 진솔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네가 우매하고 연약하고 지혜가 없을지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다만 네가 추구하지 않는 것을 혐오하고, 너의 인생관이 세상 사람과 같은 것을 혐오하며, 네가 추구하는 것이 짐승같이 영혼이 없고 인생의 추구 목표와 방향이 없는 것을 혐오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너의 태도를 혐오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면서 성정이 변화되려면 어떤 인생관이 있어야 하는지도 아주 중요하다. 그럼 어떤 사람들은 “저의 인생관은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떠냐? 이것은 좋긴 하지만 사람의 분량은 제한되어 있고, 사람의 소질과 사람의 조건도 같지 않다. 네가 추구하는 그 목표는 맞긴 하지만 꼭 너에게 적합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생관이란 네가 진리가 있고 인성과 양심과 이지가 있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 즉 진정한 사람이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올바른 추구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지금은 진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까?”라고 말한다. 우리의 겉모습에서 보면 우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코와 눈이 있고 형상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우리의 실질에서 보면 우리는 진정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한 사람, 진리가 있는 사람, 하나님께 경배하는 사람이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 이것으로 족하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 쓰임받거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소질이 갖춰져 있고 또 이 조건이 갖춰져 있다고 하는 것에 관해서는 따로 얘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실행 방면의 일이다.

계속해서 세 번째 방면, 사탄의 본성에 대해 교통하겠다. 이것도 성정 변화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가장 주요한 한 방면이다. 사탄 본성은 사람의 패괴 성정이자 또한 사람의 패괴 실질이다. 이 방면의 화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많은 편폭을 차지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방면을 폭로한 것이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이 방면의 하나님 말씀이 가장 엄하고, 여기에는 또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어떤 방식은 직접 폭로하고 직접 심판하는 것이고, 어떤 부분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어떤 방식으로 완곡하게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말씀하든,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고 어떤 어조로 말씀하든,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드러낸 것은 사람의 실질인데, 여기에는 거짓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사탄 본성에 관하여 가장 전형적인 한 방면을 말씀했다. 하나님은 2개의 편폭으로 이 방면을 드러냈다. 사탄 본성 안에 있는 대표적인 실질이 무엇인지 너희는 알고 있느냐? (배반입니다.) 맞다! 배반 본성이다. 바로 ≪배반 (1)≫, ≪배반 (2)≫의 하나님 말씀에서 드러낸 배반 본성이다. 이것은 사탄 본성을 전형적으로 대표하는 것이다. 나머지 방면들, 예컨대 사람의 독선, 교만방자, 사람의 사악, 사람의 대적, 사람의 궤사를 각 편의 말씀마다 어느 정도 언급했다. 어느 편의 말씀에서도 하나의 화제로 오로지 그 방면의 진리만 상세히 논술하거나 말씀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오직 ‘배반’이란 실질에 대해서만 두 편의 말씀을 하였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배반을 어떻게 보고 배반의 실질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의 배반을 기뻐하지 않고 사람의 배반을 증오하고 혐오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를 배반하는 것을 혐오한다. 그것은 전형적인 사탄의 본성인 배반이다. 사람의 배반 본성의 근원은 어디에서 왔느냐? 사탄에게서 왔다! 그러므로 이 방면의 성정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배반의 근원은 사탄에게서 왔고, 사탄 본성은 바로 배반이다. 즉, 사람이 많은 일을 통해 유로하는 것을 하나님은 모두 배반이라고 여긴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큰 편폭으로 말씀했겠느냐? 사람은 무시로 배반하고 시시각각 배반하며, 또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즉, 사람이 어떠하든지 사람의 본성 안에 깊이 뿌리박힌 것은 하나님을 저항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하나님을 저항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는 안 된다. 너의 내면에 배반 본성이 있는데, 배반 본성이 있는 한 너는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할 것이고, 하나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하지 못해 그것을 너의 생명으로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신 지가 얼마나 되든,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얼마나 있든 배반할 것이다. 너의 본성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고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생명이 되게 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 방면의 진입이 없으면, 너의 실질은 영원히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너에게 성정 방면의 변화가 없으면 너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어떤 사람은 “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깨달을 수 있고 받아들이기도 원하고요. 그런데 왜 제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요?”라고 말한다. 네가 받아들이기 원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네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전케 된 것도 아니다. 그렇지 않으냐? 배반 방면의 진리는 좀 깊기에 너희는 체험 방면에서 이것과 아직 거리가 좀 멀 것이다. 하나님의 눈에 그를 믿는 각 사람이 한 모든 일은 다 그와 적대되는 것이다. 이 말을 너희는 아마 또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 집에서 본분을 하고 많은 일을 하였는데, 그런 것은 모두 좋은 일이잖아요.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역 안배에 따라 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나요? 자매님은 왜 늘 우리의 적극성을 없애는 겁니까? 우리가 겨우 가정과 직장을 버리면서 결심을 내려 하나님을 따르려고 하는데, 당신은 왜 또 이렇게 책망하는 겁니까?” 내가 이렇게 말하는 목적은 우리에게 좋은 행위가 좀 있고 좀 버리거나 좀 고생을 한다고 해서 우리 안에 있는 그 본성이 변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고생도 해야 하고 본분도 해야 하지만 우리 안에 이런 패괴 본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 사람 안의 생명 성정이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하기에는 거리가 멀고, 하나님의 뜻에 도달하기에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이다!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네가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하나님과 맞서는 것이고, 네가 하나님과 맞서는 행위는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배반에 관한 화제는 여기까지 교통하겠다. 다음 화제는 사탄 본성의 전형적인 유로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교만이다. 사람의 교만은 곳곳에서 유로되고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막으려야 막을 수 없고 억제하려야 억제할 수 없다. 시시로 유로되고 시시로 폭발되고 있어 사람은 스스로 어찌할 방법이 없다. 폭발한 다음 또 후회하고 후회한 후 다음번에는 더 이상 폭발하지 않고 유로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어찌할 수 없다. 왜 그럴까? 그것은 사람의 성정이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이런 것이 안에 존재하고 있기에 자연적으로 유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언제면 이런 것이 유로되지 않겠느냐? 너의 성정이 조금씩 변화되고, 이지가 정상적이 되고, 진리를 많이 깨닫고 많이 장악하고, 일을 보는 관점이 변화되고 갈수록 깊어지고 갈수록 실제적이 되고 하나님이 요구한 것에 가까워지면, 너의 교만이 어느 정도 약해지고, 드러나는 것도 어느 정도 절제되어 지금처럼 이렇게 오만하거나 방자하지 않을 것이고 너무 뚜렷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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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③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④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⑤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

⑥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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