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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편 시련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족게 할 것인가

내가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겠으니 너희가 먼저 잘 생각해 보아라. 지난번에 아직도 7년이란 큰 시련이 있다는 것을 말했는데, 너희는 환난이든 재난이든 그 7년 시련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였느냐? 7년 시련에 대한 반응과 태도에서 사람의 어떤 본성을 보았느냐? 이 일을 어떻게 해부해야 할까? 너희는 잘 생각해 보아라. 나는 교통할 때마다 본성을 말하고, 근원을 파내고, 본성을 해부하고, 실질을 해부하는데, 남은 문제는 너희가 자신의 인식을 교통하는 것이다.

너희는 7년 시련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사람의 본성을 인식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한 마디 한 마디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고 그 속에 진리가 감추어져 있다. 어떤 문제를 교통하고 어떤 진리를 발표하든, 거기에는 사람이 가야 할 길이 있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있으며, 찾고 구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러므로 이번에 시련을 말하고 환난과 이후의 고난을 말하는데, 여기에도 사람에 대한 요구가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 물론, 사람에게는 사람의 태도와 사람의 반응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목석이 아니라 생물이고, 어떤 일에 대해서든 모두 반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반응이 어느 방면의 본성을 대표하는지 하는 이것은 해부할 가치가 있지 않으냐? 교통할 가치가 있지 않으냐? 해부한 후에 사람은 스스로 꿰뚫어 보고, 스스로 인식하고, 마음속으로 알아야만 적합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만일 사람이 흐리멍덩하여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진리도 깨닫지 못하고 더욱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사람이 해야 할 본분, 가야 할 길을 모른다면 이런 사람은 굳게 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후에 갖가지 시련을 겪을 때에 마땅히 가야 할 길에 대해 모두 알아야 한다.

7년 시련을 언급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특별히 괴로워하고 특별히 의기소침해지며, 또 어떤 사람들은 원망한다. 그뿐만 아니라 갖가지 반응이 나오는데, 그런 반응에서 사람에게 지금 그런 시련이 필요하고, 그런 환난과 연단이 필요함을 볼 수 있다.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훗날의 복을 얻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다. 사람에게는 다 이런 속셈과 바람이 있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에 있는 패괴된 것은 반드시 시련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사람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이 해결받지 못했으면 반드시 거기에서 연단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안배이다. 하나님은 너에게 환경을 배치해 주어 네가 어쩔 수 없이 그 환경 속에서 연단을 받으면서 자신의 패괴를 인식하게 함으로 나중에는, 죽는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의도와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주재와 안배에 순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몇 년간의 연단이 없고 어느 정도의 고난이 없다면, 사상 면에서, 심령에서 패괴된 육체의 통제를 벗어날 수가 없다. 사람이 어떤 방면에서 아직도 사탄의 통제를 받고, 어떤 방면에 아직도 자신의 욕망이 있고 아직도 자신의 요구가 있다면, 그 방면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 오직 고난 속에서만 공과를 배울 수 있다. 다시 말해, 그 속에서 진리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진리는 다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안일한 환경에서, 순탄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전능과 지혜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케 하기 위해 적합한 환경을 배치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이 왜 사람을 시련하고 연단시키는지 아무도 모른다. 너희는 모두 “하나님께서 사람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 사람을 정결케 하시기 위해 7년이란 시련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얼마나 인내하십니까? 얼마나 긍휼히 여기십니까!”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네가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이 도리상으로는 다 알지만 사실 실정은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이 7년 시련을 주어 또 7년 사역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물론 사역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지 않아도 그에게 사랑이 있다. 그렇지 않으냐? 너를 구원하면 네가 “이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십니다.”라고 말한다. 그가 이 7년 시련을 안배하지 않고 사역을 즉시 끝낸다고 해도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냐? 2년이나 1년의 시련 혹은 그날이 즉시 임한다고 해도 자비와 긍휼이 있는 것이 아니냐? 네가 상상한 것처럼 ‘7년 시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우리는 순복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다. 어쩔 수 없으니 이렇게 말하는데, 여기에는 어떤 것이 있느냐? 소극적인 것이 있고 원망이 있고 부득이함이 있고 속절없어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7년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7년이면 7년인 거지.’ 그리고는 재빨리 듣기 좋은 말을 한다.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당신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7년의 시련이 없으면 우리는 끝이 아닙니까? 기회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 바로 복받게 해 주기를 원하는데, 그러면 더욱 실속이 있지 않으냐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더욱 한 푼의 가치도 없다. 이 7년 동안에 실제적인 사역이 있다. 이전에 말한 적이 있지 않으냐? 어떤 말씀은 방식이지만 또한 실정이기도 하다. 어느 방면이나 빈말을 하지 않으며, 어느 방면이나 의의가 있다. 또한 어느 방면이나 사람이 보기엔 거의 다 방식이지만 그 방식은 너를 달래는 것이 아니고 속이는 것도 아니라 실제적인 정형이고 실존하는 상황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당신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면 그 7년이 지난 다음 또 시간이 얼마 더 걸릴지도 모르겠네요!’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반응에서 보다시피, 사람의 본성은 고난의 시련이 임하고 육체가 고통을 받으면 피하고 거절하려고 하며 ‘하나님, 제게 고난과 시련을 주세요. 저에게 환난을 주세요. 제가 고통을 많이 받게 해 주세요.’라고 자발적으로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자신의 육체가 고통을 받는 일이거나 자신의 바람과 맞지 않는 일이 임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든,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하고 얼마나 좋은 일이든 사람은 모두 거부한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소극적이지 않습니다. 전에 일생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심지를 세웠습니다. 몇 년이든 저는 기꺼이 원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저는 원망이 없습니다. 어떤 시련이 임하고 어떤 고난이 임하든, 가정을 버려야 하든 질병이 임하든 저는 끝까지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네가 이렇게 원망이 없는 것도 소극적인 정형이다. 왜냐하면 너에게 일이 임할 때마다 너에게 말을 할 때마다 네가 그 속의 함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말한 “저는 반응이 없습니다.”라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는 것, 즉 방법이 없는 방법인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억지로라도 따라야 하고 따르고 싶지 않아도 따라야 한다. 어쨌든 이 7년에서 아무도 도망가지 못한다. 하지만 네가 도망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다. 네가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가지 못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 본성 안의 것이다. 너희가 잘 생각해 보아라,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내게 이런 일이 임한다면, 전에도 10여 년을 따라왔고 적지 않은 고생을 했으니 이제 몇 년이 더 걸려도 견뎌 낼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데에 흐리멍덩하며 참답게 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 안에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 없다면, 너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대적하는 것이다. 비록 너에게 이런 정형이 없고 네가 이런 일을 하지 않았지만, 너의 이 증세, 네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의 안에서 요구하는 것과 바라는 것이 결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하나님이 요구한 것과 하나님이 행한 것에 대해, 그것이 방식이든 실제로 네게 말한 것이든, 네가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그를 찬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라고 요구한 것과 하나님이 사람의 필요에 근거하여 사람에게 안배한 것을 다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태도를 어떻게 표명하든, 작은 인식이 있든, 결론적으로 도리상의 인식으로는 네 내면에 있는 본성의 것을 전혀 해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은 도리상으로 듣기 좋은 말을 하고, 글귀를 좀 말하여 얼버무리고 나중에 기도할 때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이나 지내 왔는데 7년이면 길지도 짧지도 않습니다. 보십시오, 제가 이렇게 나이가 많고 몸도 불편하고 좋은 가정이 없어도 이 몇 년간 계속 당신을 따라왔습니다. 공로는 없다고 해도 고생은 좀 했고, 고생은 하지 않았다고 해도 피곤하기는 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한 번만이라도 은총을 베풀어 몇 년을 감소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사람의 연약을 아시잖습니까…”라고 말한다. 이런 말로 기도하는 것에 마치 순복하는 뜻이 좀 있는 듯하다. 또 “당신은 사람의 연약을 아시잖습니까”라고 말하는데, 이 말 속에는 또 말이 있다. 그 뜻인즉 ‘당신은 사람의 연약을 알고 계시는데도 왜 이렇게 시간을 길게 하십니까?’라는 것이다. 사람 안에 이런 정형이 있지 않으냐? 그러므로 많은 일을 안다고 여기고, 이미 통과되었다고 여기며, 또 마치 이미 진리를 깨달은 것 같지만, 사실 너희는 아직도 진리를 대적하고 진리를 어기고 있고, 너희가 하는 일은 진리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비록 겉으로는 나쁜 일을 하지 않고 듣기 거북한 말을 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행정을 거스르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는 것에 국한될 뿐, 하나님의 뜻을 별로 깨닫지 못하고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고 ‘만약 내가 이 사역을 한다면, 나는 가장 짧은 시간에 이 사역을 끝낼 거야. 하나님의 자민들이 큰 붉은 용의 핍박을 더 이상 받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이 유실되지 않고, 나도 더 이상 고생하지 않도록 말이야.’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뜻이 이렇지 않으냐? 사람은 모두 속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사탄의 세상이 빨리 끝나고, 말씀 한 마디로 사람을 변화시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바란다. 사람의 생각, 사치한 욕망은 결코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 아니며, 거기에는 순복의 실질이 전혀 없다. 이것은 또 “사람의 본성에 있는 것은 100% 다 배반이다.”라는 이 말씀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너희의 어떤 일, 어떤 문제, 어떤 마음, 어떤 반응을 해부하든, 네가 소극적으로 대항하든, 원망하든, 전혀 관심이 없든 아니면 침묵하든, 그 안에는 모두 대적이 있고, 그것은 모두 배반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부하면 정확하지 않으냐? 내가 해부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들은 ‘나 같은 사람은 꽤 괜찮은 셈이지. 몇 년 전에 내게 이런 일이 닥쳤다면 틀림없이 원망했을 것이고, 믿지 않았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는 원망하지 않아.’라고 생각할 것이다. 네가 원망하지는 않지만 너에게 인식이 있느냐? 네게 있는 그 정도의 인식을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느냐? 네게 있는 그 정도의 인식에 진리가 있느냐? 너의 인식이 하나님의 뜻에 맞느냐?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느냐? 너에게 하나님께 순복하는 실질이 있느냐? 너는 기꺼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냐? 이런 것이 아니라면 너는 무조건 하나님께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너를 쓰고 있기 때문에 네가 기분이 좋고 정서가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너를 집으로 돌려보내어 기분이 가라앉아 내면이 어두워지게 될 때면, 네 안에 있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분량이 작은 자, 체험 시간이 짧은 자들은 돌아서서 세상으로 도망칠 것이다. 사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네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지 어쨌든, 그것은 다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배치한 환경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사람의 본성이 곳곳에서 유로(역주: 흘러나옴)되고 있는데, 만약 해부하지 않는다면 사람은 자신을 깊이 알지 못할 것이다. 사람은 어떤 일이 닥치든지 다 배반하고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들의 반응은 싫어하고, 원망하고, 소극적이고, 의기소침해하는 것이다. 네가 “사람은 속으로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데,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 자체가 바로 배반입니다.”라고 말하는데, 단지 이렇게만 말해도 안 된다. 너는 실질을 깊이 해부하지 않았다. 너희는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배반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너희가 해부한 것은 어떠하냐? 너희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 너에게 그런 정형이 있어도 너 자신은 무슨 영문인지를 모른다. 너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배반이 아닌지, 네게 순복이 있는지 자신도 잘 모른다. 너희는 자신의 본성을 분명히 해부하지 못한다. 너희는 일이 임할 때마다 행할 길이 없는데, 마지막에 너에게 시련이 임하면 하나님의 뜻을 더듬을 수 있겠느냐? 너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겠느냐? 너는 마땅히 어떤 길을 가야 하겠느냐? 너는 어떤 이지를 갖추고 어떤 진리로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야겠느냐? 최저 기준은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았느냐?

전에 어떤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이 하는 일에 늘 관념이 있었다. 나중에 교통하는 가운데 한 가지 규칙을 제안하게 되었는데, 그 규칙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은 다 정확하고 다 의의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대적하지 말고 순복해야지 관념을 가지면 반드시 수치를 당하게 된다.’라는 것이다. 사람은 이 말을 기억하였겠지? 일이 닥칠 때마다 ‘우리가 지금은 꿰뚫어 보지 못해도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에는 다 의의가 있으니 절대 관념을 갖지 말고 절대 논단하지 말자.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는 꼭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런 규칙을 지키는데, 이런 규칙만으로도 흐리멍덩하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인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서 매우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고, 일이 닥칠 때마다 이 규칙으로 대하여 매우 많은 것을 끌어낼 수 있다. 만일 깨닫지 못한다면 규례를 지킬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보호를 받아 행정을 범하지 않게 되고 큰 화를 초래하지 않게 된다. 이 규칙은 쓸모가 있다!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각지에 있는 형제자매들은 이 규칙을 다 기억하였다. 어떤 사람은 노트에 적어 놓았고, 어떤 사람은 책 속표지에 적어 놓았는데, 책을 펼칠 때마다 먼저 그 말을 읽어 보기도 하고 외우기도 하고 기도할 때에도 외우곤 한다. 그렇게 하는 것도 유익하여 어떤 사람들은 일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되었고, 경외하는 마음이 조금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적극적인 방면의 진정한 인식은 별로 없고, 아직 소극적인 것이 너무 많다. 겉보기에 너희가 너무 괴로워하지 않은 것 같고, 사역도 멈추지 않았지만 사실 너희 안에는 소극적인 것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고 긍정적인 것이 없다. 이런 일이 임하자 교회 형제자매들의 반응이 이렇게 많은데, 너희는 스스로 총결해 보지 않았단 말이냐? 만일 또 이런 일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배반할 수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아마 인식했을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사람 스스로 장악할 수 없어. 다시는 함부로 대적하지 말아야지. 조심하며 매일 기도해야지!’ 이것도 완전한 대책이 아니다. 나는 너희가 아주 난처해하면서 “아, 사람의 이 본성을 어떻게 하지?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고 장악할 수도 없잖아. 정말 스스로 자신을 주관하지 못하겠어! 내가 어느 날에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겠어. 정말 두렵네. 하나님을 조심스럽게 믿어야겠어. 자칫 잘못하면 일을 망쳐 큰일나겠어.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물건짝인지 모르고 스스로도 자신을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늘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비록 자신에 대한 인식이 있을지라도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너무나 적다. 어떤 일이 임해도 어리둥절해하고 어떤 일이 임해도 조급하여 안타까워하며 방법이 없어한다. 7년 시련이란 이 일이 임했을 때, 이번에는 네가 이겨 내고, 큰 화를 초래하지 않고, 행정도 범하지 않았지만 다음번에는 장담할 수 있느냐? 너는 이런 일에서 어떻게 하면 순조롭게 통과할 수 있겠느냐? 보아라, 큰 환난은 통과하기 쉽다. 여기저기 숨으면서 반년, 1년 숨으면 일이 지나간다. 사람이 숨기는 쉽지만 본성의 것은 숨기지 못한다. 이 일에도 규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시련이 임할 때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뜻이 있다. 어떤 일이 임해도 그 일에 관련된 진리가 갖춰져 있어야만 굳게 설 수 있다. 지금 갖가지 시련을 이겨 낼 수 있는 합당한 진리를 잘 갖춰야만 몇 년의 시련이 있어도 두렵지 않다. 너희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하는 것은 절대 틀림이 없다. 길은 갈수록 환해진다. 갖가지 시련이 없으면 너희가 어떻게 온전케 되겠느냐? 시련이 없으면 간증도 없는데, 너희가 어찌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시련은 너희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나님을 끝까지 따라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기억해 두어라. 너희는 모두 그리스도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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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④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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