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찾는 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색상

테마

폰트

크기

줄 간격

페이지 너비

검색결과 0개

관련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

제57편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요구는 너무나 많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라고 요구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람으로 대하고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늘 요구가 있는데, 이것은 무슨 문제이냐?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늘 관념이 있는데, 이것은 또 무슨 문제이냐? 사람의 본성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나는 사람이 어떤 일에 부닥히든, 어떤 일을 대하든 늘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육체만 고려하며, 늘 자신을 위해 이유와 핑계를 찾고 진리는 전혀 없으며, 모두 자신의 육체를 위해 변호하고 자신의 앞날을 위해 타산하며, 모두 하나님께 은혜를 요구하고 어떤 이득이든 다 얻으려고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왜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많을까? 이것은 사람의 본성이 매우 탐욕스럽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이지가 전혀 없음을 증명한다. 사람이 하는 모든 것, 기도하든 교통하거나 설교하든, 어쨌든 사람의 추구, 사람의 생각, 사람이 동경하는 것은 다 하나님께 뭔가 요구하고, 뭔가 토색하며, 하나님께로부터 뭔가 얻어 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본성에 관련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맞다! 이외에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너무 많고 사치한 욕망이 너무 많은데, 사람 안에 인성에 갖추어져 있어야 할 이지가 전혀 없음을 증명한다. 모두 자신을 위해 요구하고 토색하거나 이유를 대고 핑계를 찾는데, 이것은 다 자신을 위한 것이다. 많은 일에서 사람이 하는 것이 이지가 전혀 없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으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라는 사탄의 논리를 완전히 실증하였다. 하나님께 너무 많이 요구하는 것은 어떤 문제를 설명하느냐? 사람이 사탄에게 어느 지경에 이르기까지 패괴되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전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으면 우리가 뭐하러 하나님을 따르겠습니까? 우리가 따르는 분은 하나님이 아닙니까? 그분이 하나님이신데, 우리가 그분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따라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네가 겉으로는 하나님으로 여겨 따르지만 하나님을 대할 때에 태도상에서, 많은 일에서, 관점에서는 전혀 그를 창조주로 대하지 않았다. 만일 네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고 창조주로 대한다면 너의 위치에 잘 서야 한다. 그러면 너는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해 요구와 사치한 욕망이 없을 것이고, 마음속으로 진실로 순복할 것이며, 완전히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 순복할 것이다.

지금 사람은 어떤 일, 예컨대 7년 시련이 임하니 어떤 사람은 “아직도 7년이나 더 있습니까? 그렇게나 깁니까! 3년 정도면 몰라도. 이 정도는 사람이 견딜 수 있을 텐데.”라고 말한다. 사람에게 이런 요구가 있지 않느냐?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오래 걸린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면 당신은 그 당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위해 헌신하라고 하시지 말았어야죠. 당신은 마땅히 그때에 우리를 깨우쳐 주셔서 우리가 여지를 좀 남기도록 하셨어야죠. 당시에 우리가 우매하게 하지 않고, 열심으로 하지 않고, 매우 알맞게 하도록 하셨어야죠. 그리고 당신이 우리로 당신을 따르게 하는 것은 괜찮지만 그러려면 당신은 우리에게 충분한 경제적 여건과 양식을 예비해 주셔서 우리로 자신 있게 따르게 하셨어야죠.”라고 말한다. “하나님, 저는 7년 시련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단지 모든 일에서 제가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저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 7년 동안 저는 연약해질 수도 있고 소극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저의 뒷받침과 힘이 되어 깨우쳐 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저로 소극적이거나 연약해지지 않게 하시고 당신을 거역하거나 대적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또 하나님께 요구를 좀 제기한다. 일이 임할 때마다 사람 안에 늘 반응이 얼마 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 사람은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에 대해 늘 못마땅해하며 늘 원망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어쨌든 사람은 늘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너무나 많고 순복은 너무나 적다.

처음에 성육신을 증거할 때 사람은 모두 원망하면서 “하나님이 성육신 되신 것도 우리의 마음이 준비가 되도록 미리 깨우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준비가 되면 당신을 거역하거나 대적하지 않고 당신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전능하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당신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것은 사탄의 패괴를 겪어 자신도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당신을 대적하지 않고 순조롭게 통과되도록 당신께서 일을 좀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느냐? 많은 사람이 처음에 조건을 따졌다. ‘우리가 대적하는 것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성육신은 우리의 관념에 너무나 맞지 않습니다. 당신은 육신이 키가 좀 크거나 지식이 풍부하거나 생김새가 출중하고 말재주가 뛰어나거나 육신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거나 혹은 표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거나 또는 사람의 많은 상상에 따라 말씀이 육신 되셨어야 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은 모두 이렇게 요구하였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상상과 관념대로 하지 않았고, 도리어 사람의 관념과 어긋나고 정반대되게 하였는데,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사람의 관념과 요구는 모두 트집을 잡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책망하고 훈계하면 괴로워서 목 놓아 울고 소극적이 된다. 그는 속으로 또 ‘하나님이 저를 훈계하셔서 제가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데 왜 위로해 주시지 않습니까? 형식적이라도 한마디 해 주시면 좋잖아요!’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께 요구하면서도 이유가 가득하다. ‘그럼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 아니시란 말입니까? 당신이 저를 훈계하셔서 제가 이렇게 괴로운데 당신은 마땅히 저를 위로해 주셔서 제게 믿음이 있게 해 주셔야죠 . 하나님은 사랑을 전혀 주지 않으시네요!’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많이 얻고는 속으로 ‘내가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이렇게 많이 얻어도 상은 주시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책망하고 훈계하시다니. 내가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어도 결국에는 여전히 훈계를 받아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너희가 말해 봐라. 사람의 마음속에 진리가 있느냐? 사람의 이런 요구가 합리적이냐? 만일 내가 한 사람을 훈계한 후에 위로해 주면 그는 ‘아, 하나님은 참 좋아. 하나님은 정말 좋으셔.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해 주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라고 느낀다. 내가 한 가지 일에서 또 한 사람을 훈계했는데, 그 사람이 매우 괴로워해도 내가 거들떠보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왜 저 사람은 위로해 주시고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워도 위로해 주시지 않을까? 하나님은 불공평해…’라고 생각한다. 또 마음속에 관념이 생기게 된다. 그런 후, 그는 또 자신의 관념에 대처한다. ‘관념이 있어서는 안 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맞아.’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아무리 봐도 이상해. 왜 나는 위로해 주시지 않을까?’ 심사가 뒤틀리고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많은 무리한 요구가 있고 많은 무리한 상상과 욕망이 있어 적합한 배경이 있기만 하면 드러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서 반응하는 생각, 모든 요구는 하나님과 합하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너는 사람의 본성이 사탄의 본성으로 가득 차 있고, 전부 자신을 위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운 것임을 분명히 아느냐?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요구가 있을 것이다. 기쁘거나 편안할 때 “하나님, 저를 지켜 주십시오. 늘 이 정형 속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이다. 기쁘지 않거나 정서가 다운되어 있을 때도 요구가 있다. “하나님, 왜 제게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지 않습니까? 왜 저는 깨우쳐 주시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왜 저렇게 좋습니까? 저는 왜 이렇게 좋지 않습니까?” 사람이 역경에 처할 때 하나님께 환경을 바꾸어 달라고 강렬하게 요구하고, 순탄한 환경에서는 욕심이 한도 끝도 없이 요구할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얻게 되었을 때 더욱 욕심을 내고, 얻지 못할 때는 절박하게 얻으려고 하는데,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육체에 이익이 되는 것을 얻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 하나도 없고 당연히 얻어야 할 것도 하나도 없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이 나와 함께 지내는데, 그들의 가정이 비교적 빈곤하여 그들에게 입고 쓸 것을 좀 주었더니 어떤 사람은 보고서 언짢아한다. ‘왜 항상 저 사람만 보살펴 주고 나는 보살펴 주지 않을까? 하나님도 공평하시지 않아!’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그래도 넓게 생각한다. ‘오늘 하나님을 믿고 이 길을 갈 수 있고 평안하게 지금까지 따를 수 있게 된 것만도 이미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신 거야. 사람은 그런 물질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돼.’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또 마음이 서글퍼지는데, 도저히 이겨 내지 못할 때는 기도를 하고 그것에 대해서 잠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에는 여전히 뭔가 있는데,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어 마음속으로 늘 궁리한다.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는 왜 보지 못했단 말인가? 겉으로 보이는 이런 일을 처리하시는 것도 공평하거나 합리적이지 않은데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에서 나타난단 말인가?’ 또 생각해 보니 ‘공의는 공평하거나 합리적인 것이 아니니 아무렇게나 끼워 맞춰서는 안 돼.’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아직도 그 일을 내려놓지 못한다. 사람이 많은 진리를 밝히 알지 못할 때에 모순되는 생각이 많이 생기게 되는데, 어쨌든 그런 것은 모두 사람의 본성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모든 요구를 보라. 하나님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저것을 요구하며, 하나님에게 이렇게 요구하고 저렇게 요구하며, 이렇게 타산하고 저렇게 타산한다. 어쨌든 사람이 타산하는 것은 진리 이외의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뜻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어느 한 가지도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이 없고, 모두 싫어하는 것이고 혐오하는 것이며, 사람이 요구하는 것과 진입해야 하는 것과는 관련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사역을 하면서 집에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 하나님은 마땅히 나의 입을 것을 살펴 주고 나의 먹을 것을 살펴 주셔야 하며, 내가 병에 걸리면 마땅히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셔야 해.’라고 여긴다. 시간이 길어지면 마땅히 하나님께 요구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많은 일을 총결해 낸다. 시간이 짧으면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은 자격이 없어.’라고 여기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당연하다고 느낀다. 사람은 다 이렇다. 이것은 사람의 본성이고 그 어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피조물이어서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께 어떠한 사치한 요구도 제기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너무 이르다. 시간이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다. 사람의 본성과 속셈은 어느 날엔가 폭로될 것이고 폭발할 것이다. 사람이 제기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필요 없다고 여기거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더욱이 네가 이미 하나님께 많은 요구를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너 자신이 전혀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요구라고 의식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어쨌든 사람의 안에 이런 본성이 있으면 싹트지 않을 리가 없다. 오늘 왜 이 일에 대해 언급하는 걸까? 바로 사람에게 자기 본성 안의 것이 어떤 것들인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여러 해 믿고 교회 사역을 좀 했다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것이 적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봉헌한 것이 적지 않고, 고생을 한 것이 적지 않기에 마땅히 뭔가를 얻어야 한다고 여기지 말라. 예컨대, 물질적 누림이며, 몸보신이며,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으려 하고 중시받으려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그에 대해 말씀할 때 좀 부드럽게 말하거나 하나님이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늘 그에게 잘 먹었는지, 잘 입었는지, 몸은 어떤지 등등을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시간이 길어지면 안에 이런 것이 부지중에 생겨나는데, 어떤 것을 요구해도 다 당연하다고 여긴다. 시간이 짧으면 자격이 없다고 여기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자본이 있다고 여기기에 사람의 요구가 나오고 본성의 것이 드러난다. 사람은 이렇지 않으냐? 시간이 짧으면 미안해서 감히 그러지 못하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다른 사람은 무얼 사고 어떤 것을 입었는데, 나는 뭘 입고 있지? 나는 뭘 샀지? 아무것도 사지 못했어!’라고 한다. 사람은 왜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맞는지 생각해 보지 않느냐? 그런 것이 네가 당연히 얻어야 할 것이냐? 하나님이 너에게 약속해 준 것이냐? 만일 너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네가 계속 요구하면 그것은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고, 완전히 사탄의 본성이다. 처음에 천사장에게 어떤 표현이 있었느냐? 그것에게 준 지위가 너무 높고 그것에게 준 것이 너무 많으니 나중에는 무엇이든 요구한 대로 얻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 이것저것 요구하다가 결국 “나는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을 가질 거야!”라고 말하는 지경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요구가 너무 많고 욕망이 너무 높은데도 스스로 성찰하지 않으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럼 어느 날엔가 너는 “하나님은 내려오십시오. 제가 하나님이 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할 것이고, “하나님이 입는 것을 나도 입고 당신이 먹는 것을 나도 먹겠소.”라는 정도까지 발전할 것이다. 그 정도가 되면 이미 하나님을 사람으로 대한 것이니 입으로 어떤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그것은 겉면의 말이지 마음속에는 순복이 전혀 없고 경외도 전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면 위험한데, 아마 큰 화를 입을 것이다.

네가 정말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한다면 지위상으로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질에 대해 참된 인식과 경외가 있어야 하고, 절대적인 순복이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한 몇 가지 실행 길을 열거한다. 첫째, 하나님과 함께 지낼 때, 안에 경건함이 있고 진솔한 태도가 있어야 하며, 관념과 상상이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순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 매번 말하는 속마음이나 매번 문제를 제기하는 속마음과 매사에서의 속마음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성찰하고 기도하여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적합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시간이 길어지면 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고 도리어 관념이 쌓이게 되는데, 그러면 너는 적그리스도가 된다. 네가 하나님을 사람으로 여길 때 네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의 막연한 하나님이다. 너는 이미 성육신 하나님을 철저히 부인하였고, 마음속으로 이미 실제 하나님을 시인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적그리스도가 되어 흑암 속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너에게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많아질수록 너의 이유가 더 많아지고 하나님에 대한 너의 관념도 더 많아진다. 그러면 너란 사람은 점점 더 위험해진다. 네게 하나님에 대해 요구가 많을수록 전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너는 서서히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기게 될 것이고, 나중에 교회에서 사역할 때 자신을 증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인가 어떻게 어떻게 하셨어요.”라고 말하는데, 그 뜻은 하나님이 자신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무시하는 말투로 대하고 경외심이 없으며 말하는 어조도 달라지고 성정도 교만해져 나중에는 점차 자신을 높일 것이다. 사람이 내리막길을 걷는 것은 이런 과정인데, 전적으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아 초래된 것이다. 내리막길을 걷는 사람은 다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증거하며 가는 곳마다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드러내는데, 아예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내가 하는 이 말에 대해 너희는 체험이 있느냐? 많은 사람들은 계속 “저는 어떻게 어떻게 고통받았고 어떻게 어떻게 사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대하셨고 나중에 또 저에게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데 저를 아주 중시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어떠어떠합니다.”라고 자신을 증거한다. 말할 때 어떤 말투를 쓰고 어떤 자세를 취하는데, 결국 어떤 사람은 그를 하나님으로 여길 것이다. 사람이 그 정도에 이를 때면 성령이 일찍이 떠난 것이다. 비록 잠시 그를 상대하지 않고 출교시키지도 않지만 그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는 다만 징벌받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떤 곳에 새 신자가 어떤 자매를 치켜세우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 일어났었다. 새 신자가 어떤 자매의 다리를 끌어안고 울면서 “하나님, 가지 마세요! 하나님, 저는 당신이 그립습니다…”라고 소리쳐도 그 자매는 거절하지도 않고 태도를 표시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이 있지 않았느냐? 내가 들은 것만 해도 3~4번은 된다. 하지만 이런 자는 절대로 무슨 좋은 물건짝이 아니다. 아랫사람은 흐리멍덩하고 우매하여 그런 자를 하나님으로 대하는데, 그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다! 다리를 부여잡고 울 수 있는데, 그야말로 우매하여 구제 불능이다! 사탄에게 속하는 패괴된 인류를 하나님으로 대하는데, 그것이 어디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이것은 사탄을 믿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지 않으면 잘못된 길에 들어서기 쉽다. 무지몽매한 사람은 정말 위험하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항상 요구가 있고, 늘 자신의 관념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에게 너의 뜻에 따라 너를 구원하고 긍휼히 여기고 너를 사랑하고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하는데, 너는 자신의 뜻과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하나님보고 너에게 순복하라고 한다. 이것은 무슨 문제이냐? 네가 이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냐? 네가 믿는 것은 순전히 너 자신이고, 네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없고 아무런 진리도 없다. 어떤 사람은 일시적인 열심으로 또 사람의 호의로 나에게 무엇을 사 준다. 어떤 사람은 신발을 사서 나에게 가져왔는데, 내가 신어 보니 맞지 않아 그에게 돌려주었다. 내가 돌려주면 그 사람이 괴로워할까 봐 나는 맞는 사람에게 그 신발을 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어서 “제가 얼마나 신경을 쓰고 돈을 썼는지 아십니까? 얼마나 많이 돌아다녔는지 아십니까? 당신이 그렇게 쉽게 그 신발을 다른 사람에게 주셨는데, 제가 쉽게 번 돈이겠습니까? 당신이 신고 싶지 않으면 제게 돌려주실 거지, 왜 다른 사람에게 주셨습니까?…”라고 말한다. 내가 “누가 네게 사라고 부탁했더냐? 네가 산 것이 맞지 않으면 내게는 필요 없는 것이다. 세상 나라에서도 인권 자유를 말하는데, 나는 선택할 수 없단 말이냐? 네가 사 주는 대로 내가 다 사용해야 하느냐?”라고 말했다. 사람이 이렇게 나를 대하는 것이 맞느냐? 보니, 사람은 헌금에 관한 진리도 모른다. 네가 하나님께 드렸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지 너에게 속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분배하고 싶은 대로 분배하므로 어떻게 처리하든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사람에게 이런 인식이 있느냐? 사람이 나에게 신발이나 양말을 사 주면 꼭 신어야 한다. 그는 감시하기까지 한다. ‘그 양말이 어디로 갔을까? 그 신발은 어디로 갔을까?’ 사람은 이렇게 온종일 연구하고 궁리한다. 또 어떤 사람은 늘 묻는다. “제가 산 것을 전해 드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입으시던가요?” 다른 사람이 “입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좋은 것인데 왜 안 입으신대요?”라고 말한다. 보라, 사람이 또 요구하는데, 사람은 경우도 따지지 않는다! 물건을 살 때는 마치 대단히 큰 사랑이 있고, 하나님을 아주 사랑하는 것 같다.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사 주면 내가 반드시 좋아해야 하지 좋아하지 않으면 사람은 늘 원망하며 나를 구속한다. 나는 사람이 입으로 “하나님을 잘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사람에게 어디 사랑이 있느냐? 사람은 패괴되어 정상 사람의 이지조차 없다. 인성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을 논할 수 있겠느냐? 사람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미움과 원망이고 사치한 욕망이며 사람의 요구이지 사랑은 전혀 없다. 사랑이란 사람에게 있어 단지 추구 목표이고, 단지 사람에 대한 요구일 뿐이다. 몇 사람이나 도달했느냐? 지금 너희가 모두 진리를 추구하고 성정 변화를 추구하려고 하는데, 너는 하나님께 요구할 때마다 마땅히 어떻게 자신을 반성해야 할까? 마땅히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대해야 할까? 어떤 사람은 몇 곳의 교회를 이끌 수 있으면 교만해져 하나님 집에 자신이 없으면 안 되기에 자기는 당연히 하나님의 특별한 대우를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사람의 지위가 높을수록 하나님에 대한 요구도 더욱 높고, 아는 도리가 많을수록 요구가 더욱 은밀하고 더욱 교활하다. 비록 입으로는 말하지 않을지라도 오히려 마음속으로는 숨기고 있어 다른 사람에게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사람 안에 있는 원망과 저항이 언제 드러날지 모르는데, 그러면 더욱 위험하다. 왜 교계의 지도자, 인사일수록 더욱 위험한 적그리스도이겠느냐? 지위가 높을수록 야심이 더욱 크고, 아는 도리가 많을수록 성정이 더욱 교만방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지위를 추구하면 아주 위험한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하고 형벌하는 필요성을 보았겠지? 자신이 많은 진리를 깨닫는 데까지 생명 진입이 되었을 때, 너는 자신이 더욱 위험하다고 느낄 것인데, 그때 너는 사람의 본성 실질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전혀 모르는데, 얕은 인식이 조금 있어도 아직은 도리이고 진리를 얻지 못했다. 그러므로 자신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두려운 줄도 모르고, 자신을 위해 우려하지도 않는다. 지금 새 신자는 오래된 신자의 당시 상황과 같은데, 아무 말이나 막 말하고 아무 일이나 함부로 한다. 일반적으로 비교적 추구하고 심판과 형벌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감히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데,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할지라도 감히 말하지 못한다.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게 되면 재빨리 기도한다. “하나님, 제가 당신을 거스렀습니다…” 어떤 새 신자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모독한다. “하나님께서 고통을 받으신다고? 무슨 고통을 받으신단 말이죠? 잘 드시고 잘 입으시며, 어디에 가시든 접대할 사람이 있어 아무 고통도 받지 않잖아요. 하지만 우리는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분은 하나님의 영이지 사람이 아니니까요.” 어떠냐? 성육신 하나님을 감히 부인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모두 간덩이가 부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전혀 없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것이나 마구 말하며 다 야만성을 띠고 있다. 상면에서 누구에게 좋은 인상을 좀 갖고 있다거나 평가가 좀 좋으면, 아랫사람은 아무개는 한창 잘 나가고 하나님 집에서 매우 환영받는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에게 진리가 있느냐? 마음속에 있는 것은 아직 세상의 것인데, 일을 보는 그의 관점을 보면 완전히 세상 사람의 관점이고, 세상 사람의 취향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을 보는 것이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 이런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없고 일을 보는 관점은 세상 사람과 같으며 확실히 불신파에 속한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항상 요구가 있다.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이 본성을 해부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요구가 있는지 요구마다 해부해야 한다. 왜 그런 요구가 있게 되는지, 사람의 출발점이 무엇이고 목적이 무엇인지 다 해부해야 한다. 네가 이렇게 참답게 해부할수록 자신의 본성에 대해 더욱 인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갈수록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네가 만약 세부적으로 해부하지는 않고 단지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그저 이지가 없는 것에 속한다고만 인식하고 그친다면, 너는 나중에도 여전히 진보가 없고 변화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요구가 많은 것은 본성이 너무나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한다. 만일 네가 정말로 사람의 본성 실질을 인식하게 될 때면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인데,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스럽다. 사람은 어떤 때에 사람의 요구가 매우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요구하기 때문에 마치 너의 요구가 지나치지 않고 정당한 것 같다. 뚜렷하게 보여지는 그런 사치한 요구나 억지 요구나 막무가내에 대해서는 네가 해부하면 인식하기 쉽고 자신을 증오할 수도 있다. 만일 네가 그것이 합리적이고 합법적이라고 생각하고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아직 진리가 없기 때문에 환하게 인식하지 못했음을 설명한다. 내가 예를 하나 들겠다. 한 자매(형제)가 있는데, 그는 여러 해 동안 따르면서 갖은 고생을 겪었다. 이 사람은 겉면으로 보면 시종 표현이 괜찮다. 예컨대, 인성 방면에서나 고생하는 방면에서나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 방면에서는 그런대로 괜찮다. 이 사람은 비교적 양심이 있고, 평소에 사역하는 데에서도 자신의 발걸음을 조심할 줄 알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려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나중에 이 사람에게 순복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그 사람을 쓰지 말라고 분부했다. 그가 교회 사역을 여러 해 동안 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고 또 그에게 실제적인 어려움이 어느 정도 있었어도 나는 해결해 주지 않았다. 만일 이런 상황이 있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우선 많은 사람이 “그러면 안 됩니다. 그와 같은 경우에는 마땅히 최대한 긍휼히 여기고 은총을 베풀어 주셔야 해요.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잖아요. 그렇게 하나님을 오래 따른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다 도태시킨다면, 우리 같은 사람도 끝난 게 아닙니까?”라며 그 사람을 두둔할 것이다. 사람은 또 요구하는데, 하나님에게 그 사람을 더 많이 축복해 주고 살아남게 해 주라고 하며 “그 사람은 하나님께 할 만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불공평하게 대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한다. 사람의 많은 요구는 사람의 양심 기준과 윤리 도덕 관점으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가늠하여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마땅히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고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한다면서 사람은 모두 인간 세상의 그 공평 합리한 양심 기준으로 하나님을 가늠한다. …이것이 어찌 진리에 부합되겠느냐? 왜 사람의 그 요구는 다 막무가내라고 말하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어디 진리가 있느냐? 사람이 사람의 실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양심의 기준에 따라 사람을 대하라고 요구하고 사람의 기준을 하나님에게 가져와 하나님께 요구한다. 그러므로 진리에 부합되지 않고 모두 막무가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작은 일에서는 그래도 참을 수 있지만, 나중에 결말을 정할 때에는 참지 못할 수도 있고 요구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원망의 말과 정죄의 말이 입에서 쏟아져 나올 것이고 사람이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는 사람의 본성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시종 사람의 관념에 따라 요구하고 사람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에게 요구한다. 사실, 사람의 이런 요구는 아주 많다. 너희가 아마 평소에 주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가 어떤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무엇을 간구하는 것이 무슨 요구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네가 자세히 해부해 보면 많은 요구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고 매우 이지가 없는 것이며 심지어 아주 황당한 것이다. 이전에는 이 방면의 심각성을 몰랐지만 앞으로는 천천히 알게 될 것인데, 그때면 네게 실질적인 인식이 있게 될 것이다. 체험 중에서 조금씩 인식하고 분별하고 또 진리에 결부시켜 교통해야만 점차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고, 이 방면에서 진리에 진입할 것이다. 네가 정말로 사람의 본성 실질을 명확히 인식하게 될 때면 너에게 성정 변화가 있게 될 것인데, 그때면 너에게 진리가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은 내가 너희에게 세부적으로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있는 것은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이 한 것이 너의 뜻에 부합되지 않고 너의 뜻에 따라 하지 않으면 너는 반항하기 쉬운데, 이것은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설명한다. 이 문제는 반드시 진리를 추구함으로 인식하고 해결해야 한다. 진리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요구가 많다. 참으로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요구가 없고 자신이 하나님을 만족게 한 것이 너무 적고 하나님께 순복한 것이 너무 적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에 대해 늘 요구가 있는 것은 사람의 패괴 본성이 반영된 것이다. 만일 네가 이것을 엄중한 문제로 대하지 않고 긴요한 일로 대하지 않는다면, 너의 길에는 후환이 있고 위험이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일은 이겨 낼 수 있고 작은 일에서는 넘어지지 않겠지만, 너의 운명과 앞날, 귀착지에 관련될 때는 이겨 내지 못할 것이다. 그때에도 네게 진리가 없다면 아마 옛 병이 도질 것이다. 그러면 너는 멸망될 대상이다. 많은 사람이 계속 이렇게 따른다. 따르는 기간에 계속 표현이 괜찮아도 그것이 앞날을 결정하지 못한다. 너의 치명적인 부분과 본성에서 유로되는 것,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을 네가 시종 모르고 아직 화근이 조성되지 않았기에 인식하지 못하겠지만, 아마 마지막까지 가서 사역이 끝날 때면 너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가장 엄중한 일과 하나님을 모독하는 가장 심각한 일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마지막에 가장 위험할 때 도망쳤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남아서 교회 사역을 하려고 생각하였다. 후에 예수가 그에게 나타나 “설마 내가 너를 위해 두 번째로 십자가에 못 박히란 말이냐?”라고 말씀하자 그는 즉시 순복했다. 그가 그때 자신의 요구가 있어 “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고통스러운 것이 두렵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았습니까? 왜 또 제게 못 박히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제가 못 박히지 않으면 안 됩니까?…”라고 말했다면, 그에게 이런 요구가 있었다면 그동안에 걸어온 길이 다 헛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시종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사람이었으므로 나중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완전히 순복했다. 만약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뜻에 따라 했다면 길을 잘못 가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직접 깨닫는 기관이 없다. 하지만 네가 진리를 깨달은 후에도 계속 순복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사람의 배반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늘 요구가 있는 것이 사람의 본성에 관련된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 문제도 여러 방면의 진리에 관련된다.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가늠하려면 사람에게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있는지의 여부를 보아야 한다. 너에게 요구가 있으면 순복이 없는 것이고, 요구가 있으면 네가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너는 자신의 뜻을 선택하고 있고 자신의 뜻에 따라 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배반이고 순복이 없는 것이다. 너에게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있다는 자체가 바로 이지가 없는 것이다. 네가 정말 그를 믿고 정말 그가 하나님임을 믿는다면 감히 그에게 요구를 제기하지 못하고, 이치가 있든 없든 그에게 요구를 제기할 자격도 없다. 만약 너에게 참된 믿음이 있고 그가 하나님임을 믿는다면 너는 다른 선택이 없이 오로지 경배하고 오로지 순복할 것이다. 지금의 사람은 선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님께 그의 뜻에 따라 하도록 요구한다. 그는 자신의 뜻을 선택해서 하나님이 그의 뜻에 따라 하도록 하지만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진정한 믿음이 없고 믿음에 포함되어 있는 실질이 없다. 네가 언제 하나님에 대해 요구가 적어지면 참된 믿음의 요소가 많아지고 순복의 요소도 많아지며 아울러 너의 이지도 비교적 정상적이 된다. 흔히 이치를 따지는 사람일수록, 이유가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다루기 어렵다. 그는 요구가 많을 뿐만 아니라 또 욕심이 끝이 없는데, 이 방면에서 그를 만족시키면 저 방면의 요구가 있어 모든 방면에서 그를 만족시켜야 한다. 그를 만족시키지 않으면 원망하고 자포자기하고는 후에 미안하다고 느끼는데, 뉘우치고 또 통곡도 하고 죽고 싶어도 한다.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것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 그러므로 너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자신의 본성을 해부해야 한다. 본성 안에 어떤 것이 있고, 너 같은 사람은 무엇을 좋아하고, 너의 요구는 도대체 무엇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해부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소질이 있고 은사가 있다고 여기면서 늘 인솔자가 되려고 하고 남보다 뛰어나려고 하며 “하나님, 저를 써 주세요.”라고 하나님께 요구한다. 만일 그를 쓰지 않겠다면 그는 “하나님, 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까? 저를 크게 써 주시면 틀림없이 당신을 위해 헌신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속셈이 올바른 것이냐?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려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가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은 지위이고, 중요시하는 것도 지위이다. 네가 참으로 순복할 수 있다면, 너는 하나님이 너를 쓰든 쓰지 않든 한마음 한 뜻으로 따를 수 있고, 지위가 있든 없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이지가 있다고 할 수 있고, 순복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려는 것은 좋은 것이고, 하나님도 너를 쓰려고 한다. 하지만 사람이 진리를 갖추어야 쓰기 좋다. 어쨌든 예비하는 단계가 있어야 한다.

사람 본성 안에 있는 것은 겉면의 일부 행위와 수단 혹은 마음과 생각을 다루면 끝나는 것과는 다르다. 본성 안에 있는 것은 조금씩 파내야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발견했다고 해도 변화되기 쉽지 않기에 반드시 심도 있게 인식해야 한다. 왜 늘 사람의 본성을 해부하겠느냐? 너희는 내가 본성을 해부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했느냐? 패괴 성정의 유로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모두 본성에서 오는 것이고, 본성의 지배를 받는다. 사람의 하나하나의 패괴 성정, 하나하나의 마음과 생각, 하나하나의 속셈 모두는 본성에 관련된다. 그러므로 직접 너의 근원을 파헤친다면 사람의 패괴 성정이 해결되기 쉽지 않겠느냐? 그럼 해결되기 쉽다. 본성이 비록 변할 수 없을지라도 사람이 유로한 이런 패괴 성정을 사람이 인식할 수 있고 진리에 결부시켜 완전히 인식할 수 있으면, 사람의 성정이 점차 변화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갈수록 적어질 것이다. 본성의 근원을 해부하는 것은 사람으로 성정이 변화되게 하기 위한 것인데, 너희는 이 취지를 파악하지 못했다. 본성을 해부하면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고 이지가 회복된다고 여기는데, 너희는 함부로 잘 끼워 맞추는구나! 왜 사람이 너무나 교만방자하거나 독선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늘 본성을 해부하는 걸까? 만약 사람의 독선적인 것이나 교만방자한 것만 말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본성을 해부하면 결부되는 면이 많은데 모든 패괴 성정을 포함한다. 독선, 자고, 교만방자의 이런 좁은 범위가 아니라 본성 안에는 포함된 것이 더욱 많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요구할 때에 많은 패괴 성정이 유로되기에 포함되는 면이 많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을 인식하게 되면 패괴 성정이 해결되기 쉽고 길이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 스스로는 도저히 근원을 파낼 수 없어 다만 그것이 독선적이고 교만방자하고 오만하고 충성심이 전혀 없다고 하는 이런 겉면의 것밖에 말할 줄 모르는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느냐? 본성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 최초, 아담과 하와의 그때, 그들의 본성은 무엇이었을까? 안에는 고의로 대적하는 것이 없었고, 더욱이 공개적으로 배반하는 것도 없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도 몰랐고, 더욱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도 몰랐기에 뭐가 오면 받아들였다. 사탄이 지금 사람을 이 정도로 패괴시켜 사람은 주동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는데 본성이 사탄 본성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왜 사람의 본성이 사탄 본성이라고 말할까? 사람은 고의로 어떤 일을 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을 대적한다. 그것은 사람 안의 실질이 변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사람은 시초에 만든 인류와는 다르다. 전의 인류는 안에 대적과 배반이 없고 생기가 있는 인류였으며, 어떤 것에도 지배받지 않고 안에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대적하지 않는다고 정해진 것이 없었다.

본성이란 무엇이냐? 본성은 사람의 실질이다. 성정은 사람의 본성에서 나온 것이다. 성정 변화는 원래의 패괴된 것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게다가 그것이 진리로 대체되었음을 가리킨다. 본성의 근원적인 것은 변하지 않고 유로되는 패괴된 것이 변하는데, 본성에서 유로되는 성정 방면의 것이 변화된다.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켜 사람은 이미 사탄이 되었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을 100% 배반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사람에게 성정 변화를 요구하겠느냐? 마지막에 온전케 되는 사람은 안에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 많이 더해진다. 이전에 사람은 패괴 성정이 있어 일을 하기만 하면 틀리고 일을 하면 대적했지만, 지금은 사람에게 진리가 있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일을 많이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사람의 본성에서 유로되는 것이 변화될 수 있는데, 변화된 그 부분은 진리에 따라 실행한 바로 그 부분이다. 네가 지금 진리를 실행할 수 있다고 해서 너의 본성이 변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예컨대, 사람이 이전에는 하나님께 늘 요구했지만 지금은 많은 방면에서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너는 아직도 요구가 있고 아직도 배반할 수 있다. 아마 너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 저는 다 순복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일, 두 가지 일, 세 가지 일이라도 저는 다 순복할 수 있고 아무런 원망도 요구도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어떤 일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네가 비록 고의로 대적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는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어길 수 있다. 그럼 변화된 그 방면은 어떤 것을 가리키느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 순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너의 뜻에 따라 하게 되는데, 너는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이것이 배반이고, 이것이 본성 안의 것이다. 물론 성정 변화도 끝이 없다. 얻은 진리가 많을수록, 즉 하나님을 깊이 알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더 적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더 적다. 성정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주로 진리를 추구함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 실질을 인식하는 것도 진리를 깨달아 도달하는 것이다. 사람이 정말로 진리를 얻게 될 때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

①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②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 중국 상용어로 자신을 위해 살라는 뜻. 이기적인 것을 정당화하는 데에 쓰는 말.

③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④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⑤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이전 말씀:제56편 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가?

다음 말씀:제58편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

추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