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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편 하나님께 늘 요구하는 사람은 가장 이지가 없다

자신을 인식하려면 반드시 자신의 실제 정형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정형을 알려면 가장 주요하게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장악해야 한다. 시기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어떤 주요한 것에 지배를 받는데, 마음과 생각을 잡아내면 배후의 것도 잡아낼 수 있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데, 그 마음과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출발점은 무엇이냐? 그 마음과 생각은 어떻게 생긴 것이냐? 어떤 것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냐? 그 마음과 생각은 어떤 성질에 속하느냐? 사람의 성정이 변화된 후에는 변화된 그 부분에서 생기는 마음과 생각, 속으로 바라는 것이나 추구하는 관점은 다르다. 네가 아직 변화되지 않은 그런 것, 철저히 인식하지 못한 그런 것, 진리를 체험하지 못하여 대체하지 못한 그런 것, 그런 마음과 생각은 지저분하고 더럽고 추하다. 지금 사역을 몇 년 동안 체험한 사람은 이런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느낌과 의식이 있지만, 체험한 시간이 짧은 사람은 이런 일에 대해 아직 인식하지 못하여 지금도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른다. 도대체 자신의 치명점이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쉽게 넘어질 수 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너희는 지금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다른 사람은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지만 자신은 오히려 느끼지 못한다. 평소에 생각이나 속셈이 좀 있어도 스스로 확실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그런 일의 실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한다. 너는 어떤 방면에서 깊이 인식할수록 그 방면에서 변화가 있게 된다. 그래야 하는 일이 비로소 진리에 부합될 수 있고,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워지게 된다. 이렇게 추구해야 효과를 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생명 성정의 변화는 중요시하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지, 자신이 하나님의 마음속에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지에 중점을 두고 관심을 가지며, 늘 자신이 하나님 안중에 어떤 사람인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자신의 위치가 있을지를 추측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것이 있다. 하나님을 만나면 늘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기뻐하는 것인지 아니면 화내는 것인지를 관찰한다. 또 어떤 사람은 늘 사람들에게 알아본다. “저의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언급하시던가요? 하나님은 도대체 저에 대해 어떠십니까? 저에게 관심을 가지십니까?” 또 더욱 심한 사람은 마치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 하나님께서 방금 저를 보셨는데, 좋은 눈길이 아니었습니다. 저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모두 이런 것을 특별히 중요시한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믿는 분은 성육신 하나님이시잖아요. 그분께서 우리를 상대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끝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는데, 그 뜻인즉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속에 위치가 없는데 믿어서 뭐합니까? 믿지 맙시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지가 없는 것이 아니냐? 너는 사람이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아느냐? 사람은 늘 하나님의 마음속에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의 위치가 있는지,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어떠한지는 생각해 보지 않는다. 사람이 얼마나 교만자대하느냐! 이것은 사람이 가장 이지 없는 점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지가 없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의 일은 알아보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알아보지 않고 자신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을 가지지만 자신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거나, 다른 사람은 보살피지만 자신은 보살피지 않으면, 불만을 품고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습니다. 공평과 합리마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원망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이지에 문제가 있고 정신에 장애가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계속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하고 하나님의 지배에 순복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를 대하시든 저는 원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책망하셔도 되고, 훈계하셔도 되며, 심판하셔도 됩니다.”라고 말하지만, 사실이 임하면 그대로 하지 못한다. 사람에게 이런 이지가 있느냐? 사람은 자신을 매우 높게 보고,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훈계와 책망은 말할 것도 없고, 눈길 하나가 이상해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며 ‘끝났어! 믿지 말자!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상대하시지 않으니 우리는 희망이 없어.’라고 하는데, 이렇지 않으면 어느 말씀이 어조가 약간 심하여 마음에 찔릴 경우 또 낙담하고 실망한다. ‘하나님께서 이번에 내게 말씀하신 어조는 좋지 않았어! 말씀 속에 말씀이 있고, 말씀 속에 가시가 있고, 말씀 속에 다른 뜻이 있어. 하나님을 믿어도 재미를 못 느끼겠어. 하나님께서 상대하시지 않으면 믿을 수 없어.’ 예전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정말 확신이 있고, 하나님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네. 하나님의 눈길이 조금만 심상치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찰하는구나. 그들은 하나님께 특별히 충성하고 하나님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이것은 정말 땅의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으로 본 거야. 하나님의 눈길 하나까지 매우 중요하게 보네.’라고 여겼다. 이런 일이냐? 어떤 사람들은 정말 흐리멍덩하여 아무 일도 꿰뚫어 보지 못하는데, 사람의 분량이 너무 작으니 정말 온갖 추태를 다 부린다. 사람은 이지가 너무 부족하기에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너무 많을 뿐만 아니라 너무 지나친데, 이것은 이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사람은 늘 하나님에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요구하며,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하지 못하고 경배하지도 못한다. 그러고는 도리어 자신의 취향에 맞춰 무리한 요구들을 제기한다. 하나님은 마땅히 도량이 넓어야 하고, 어떤 일을 보아도 화내지 않고, 너를 볼 때마다 얼굴에 미소를 지어야 하고, 너를 만날 때마다 공급하고 교통해야 하며, 어느 때든지 말씀해야 하고, 또 계속 인내하며 성내지 않고 환한 표정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요구는 너무 많고, 쓸데없는 일이 너무 많다. 너희는 그런 일에서 성찰해야 한다. 사람의 이지가 너무 부족하지 않으냐? 하나님의 지배와 안배에 완전히 순복하지는 못하고 하나님에게서 온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얼마의 부가적인 요구를 제기한다. 사람에게 이런 요구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안배에 순복할 수 있겠느냐? 이런 요구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 사람은 하나님이 마땅히 어떻게 자기를 사랑해 주어야 하고, 마땅히 어떻게 자기를 관용해 주어야 하고 어떻게 자기를 지켜 주어야 하며, 어떻게 자기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어야 한다고 요구하지만,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생각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헤아리고 만족게 하며, 어떻게 마음에 하나님의 위치가 있게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는 자신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 이런 것이 있느냐? 이런 것은 모두 사람이 도달해야 할 것인데, 왜 사람은 향상하려고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일시적인 열심을 내기도 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좌절을 좀 당하면 낙담하고 실망하며 원망하게 된다. 사람의 어려움은 너무나 많다. 진리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 만족게 하기를 추구하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 사람은 이지가 전혀 없고, 잘못된 위치에 섰으며, 그 밖에 자신을 아주 귀중하게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또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눈동자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구속하실 때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시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으니 우리가 얼마나 가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싼 값으로 사 온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죠. 그럼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크십니까! 그렇게 많은 아들딸과 자민들이 다 그분의 마음속에서 일원이 되었잖아요. 그러니 우리도 평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아주 높고 아주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예전에 어떤 인솔자들이 그랬었다. 발탁된 후에 지위가 있게 되니 ‘하나님께서 나를 중요시하여 인솔자 본분을 하게 하셨으니 나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며 사역할 거야. 하나님께서 나를 마음에 들어 하셨으니까.’라고 여기면서 스스로 매우 의기양양하였다. 결국 한동안 나쁜 짓을 하여 본질이 드러나 집으로 돌아가게 되자 또 풀이 죽었다. ‘에휴, 하나님께서 해임시키셨으니 나는 끝이야.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지.’ 거기에다 그의 추태까지 드러내어 다루니 더욱 소극적이 되고 믿을 수 없어 한다. 나중에는 ‘세상에서 누가 가까운가? 부모 외에는 아무도 가깝지 않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도 사람 뜻에 맞지 않고 조금도 안면을 봐주지 않으니 말이야. 하나님께서 사람의 연약함을 헤아려 주신다고 했는데, 왜 과오가 좀 있다고 해임시킬까?’라고 궁리해 보다가 결국 의기소침해져 믿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요구가 높지 않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요구가 아주 높다. 자신에게는 인내하고 포용해 주어야 하고, 또 보살피고 공급해 주어야 하며, 웃는 얼굴로 대해 주어야 하고, 참고 양보해 주어야 하며, 다방면으로 돌보면서 조금도 엄격해서는 안 되고, 조금도 자극하거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이지는 너무나 부족하다! 사람이 마땅히 어떤 지위에 서야 하는지,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에 도달해야 하는지, 마땅히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마땅히 어떤 위치에 서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지, 마땅히 자신을 어떤 위치에 놓아야 합당한지, 사람은 이런 일들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 지위가 좀 있는 사람도 자신을 아주 높이 보거니와 지위가 없는 사람도 자신을 아주 높이 본다. 사람은 언제나 자신을 알지 못한다. 너희에게 어떻게 말하든, 어떻게 엄하든, 어떻게 외면하든, 너희가 믿고 따르면서 원망 없이 예전대로 본분을 할 수 있을 때면, 성숙되고 숙련되어 참으로 분량이 있게 되고, 정상 사람의 이지가 있게 되며, 하나님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게 된다. 또한 더 이상 사치한 욕망이 없게 되고, 더 이상 자신의 취향대로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께 요구하지 않게 된다. 이래야만 사람다운 모양이 조금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너희의 요구가 너무 많고 너무 지나치며, 사람의 뜻이 너무 많은 것은 선 위치가 틀리고 너무 높다는 것을 증명한다. 자신을 너무 존귀하게 보고 하나님에 비해 얼마 낮지 않은 것처럼 보는데, 그러면 너 같은 사람은 다루기 어렵게 된다. 이것은 사탄의 본성이다. 너의 안에 이런 정형이 존재하면, 너는 틀림없이 소극적이 될 때가 많고 정상적이 될 때가 적으며, 진보가 늦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어려움이 적고, 그렇게 복잡한 일이 많지 않아 빨리 진입한다. 다른 사람은 단순하여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지 않는다. 너는 복잡한 일이 많고, 생각이 많고, 정에 많이 얽매이고, 중요시하는 일이 많으며,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너무 많은데, 그러면 받는 고난이 더 많고, 가로막힘이 더 크다. 이런 사람은 진입하기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누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변함없이 추구하고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른 사람은 마음이 넓기에 받는 고난이 적고, 정상적으로 진입하기에 장애가 적다. 너는 오늘은 이 일로, 내일은 저 일로 쓸데없는 일들이 많다. 누가 너를 대하는 눈길이 좋지 않았다든가, 너를 얕잡아 보았다든가, 너를 상대하지 않았다든가, 혹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너를 자극시키고 심하게 꾸짖고, 너에게 상처를 주고 너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찔렀다든가, 밥을 먹을 때 너에게 권하지 않았다든가, 어떤 좋은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너에게는 주지 않았다든가 하는 온통 이런 일들이다. 너는 쓸데없는 일이 너무 많고, 속이 너무 복잡하고, 이지가 너무 부족하고, 인격이 너무 낮으며, 너무 번거롭고, 너무나 다루기 힘들다. 너에게 결점이 이렇게 많은데, 진리를 얼마나 깨닫고 얼마 동안 연단받아야 변화될 수 있겠느냐! 일이 너무 많으면 부담이 크고 마음이 또 매우 복잡하고 생각이 또 매우 많은데, 이런 사람은 적지 않은 고난을 받아야 하고 적지 않은 눈물을 흘려야 한다. 이런 사람은 어울리기 쉽지 않고 사귀기 쉽지 않다. 너희는 늘 다음과 같은 일을 교통한다. 어떤 사람은 “저는 어떤 일에서 넘어졌는데, 후에 고난을 받고는 인식이 생겼습니다.”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체험이 있다. 이 정도의 인식을 얻는 데에 몇 년이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고, 시달림을 얼마나 받았는지도 모른다. 죽을 고생을 해서 고작 이 정도의 인식, 이 정도의 변화가 있게 되었다니 정말 가련하구나! 사람의 이런 믿음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이 뒤섞여 있느냐! 하나님을 믿는 것을 너무 힘들어한다! 지금까지도 누구나 안에는 뒤섞임이 적지 않다. 하나님에 대한 요구가 얼마 있으면 그것이 바로 사람 안에 있는 뒤섞임이다. 그 뒤섞임이 있으면 사람의 이지에 문제가 있음을 증명하는데, 그것 또한 본성이 드러난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도 어떤 것이 정당한 것이고 어떤 것이 부정당한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이것을 분명히 분별해야 한다. 사람이 마땅히 어떤 위치에 서야 하고 어떤 이지를 갖춰야 하는지 하는 이것을 반드시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마음속에 늘 이런 것을 담고 있는데,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좋게 대하거나 좋지 않게 대하거나 혹은 누구에게 불쾌한 표정을 짓거나, 그를 기뻐하지 않거나 그에 대해 어떤 말을 했다는 것을 들으면 내려놓지 못한다. 그에게 아무리 설명해 줘도 소용없다. 시간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돌려세우지 못하고, 자신을 규정한다. 한마디 말을 붙잡고는 그를 어떤 태도로 대했다고 규정하는데, 아무리 그에게 정상적으로 추구하고 이후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한다고 말해 주어도 그는 자기에게 한 말이 아니고 자기를 속인다고 생각한다. 보다시피,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해 조금도 인식하지 못했고, 사람에게 변화되는 과정이 있으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하나님을 대하는 너의 태도가 바뀌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태도가 바뀔 수 있겠느냐? 네가 변화되면 너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도 바뀌지만, 네가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의 희로애락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분명하게 더듬지 못하고 잘 모른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지혜로우십니다. 매우 지혜롭습니다. 지혜로우셔서 사람은 도저히 알지 못합니다.”라며 사람은 낱낱이 파악할 수 없다고 느끼는데, 이것은 사람의 어려운 점이다. 사람은 사람에게 간곡히 거듭 타이르는 말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엄한 말이나 책망과 훈계 그리고 심판의 말은 마음에 담아 둔다. 사람은 왜 긍정적으로 인도하는 말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심판의 말과 책망과 훈계의 말을 들으면 괴로워하고 소극적이 되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느냐? 나중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스스로 궁리해 보고서야 돌아서게 되고, 거기에 위로해 주는 말씀도 있어야 각성하게 된다. 만약 사람을 위로하는 말씀이 없으면 사람은 일어나지 못한다! 처음 체험할 때, 사람에게는 많은 잘못된 인식과 오해가 있는데, 사람은 늘 자신의 것이 맞다고 여기므로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말해 주어도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3년, 5년을 체험한 후에야 차츰차츰 알게 되고 명확해지며 또 자신이 너무나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는데, 마치 그제야 어른이 된 것 같다. 사람은 체험이 많아지면 하나님을 알게 되어 오해가 적어지고, 더 이상 원망 없이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다. 예전의 분량에 비해 지금의 분량은 어른의 모습이 좀 있다고 느껴진다. 이전에는 어린애처럼 툭하면 짜증 내고 소극적이 되며, 툭하면 하나님을 멀리하고, 툭하면 안에 원망이 생기고, 툭하면 의심을 하였지만, 지금은 진보가 있고 전보다 많이 안정되었다. 이것은 모두 진리를 깨달아 있게 된 효과이고, 진리가 사람에게서 역할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진리를 깨달으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든 그래도 해결할 수 있다.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면 어떤 어려움이든 다 해결할 수 있는데, 그것은 주로 사람의 체험과 시간에 달렸다. 여기에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 너희들을 써서 사역하는 것은 결코 너희의 분량이 크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너희는 단지 일반인보다 소질이 좀 더 좋고, 그들보다 좀 더 추구하고, 그들보다 배양 가치가 좀 더 있을 뿐이지, 너희가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고 하나님의 지배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너희가 앞날과 소망을 다 내려놓았음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아직 이런 이지가 없다. 너희는 일부 소극적인 것을 지니고 일부 정형을 가지고 사역하는데, 마치 공을 세워 속죄하려는 것 같다. 이것은 기꺼이 원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시든 나는 두 눈을 감고 하기만 하면 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기만 하면 되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하기만 하면 돼.’라는 것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여기에 도달할 수 있느냐? 사람에게는 이런 이지가 없다! 모두 내막을 알아보려고만 한다. ‘도대체 하나님은 나에 대해 어떤 태도이실까? 도대체 정말 쓰시는 건지 아니면 나를 써서 효력하게 하시는 건지?’ 모두 내막을 알아보려는 생각이 있다. 너는 이런 생각이 조금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 모두에게 있다. 하지만 감히 말하지 못한다.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또 다른 어떤 것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말해도 소용없어. 나 같은 놈은 이런 본성을 갖고 있으니 변화될 수 없어. 그래도 어떤 일은 해낼 수 있고 어떤 일은 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파악할 수 있으면 돼. 다만 그런 나쁜 일만 하지 않으면 되니 너무 높게 요구하지 말아야지.’라며 자신을 가장 낮은 위치에 한정시켜 결국 시종일관 아무런 진보도 없고, 사역을 하는 것도 대충대충 해서 속이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중에 이 교통을 몇 번 한 후에야 너희는 그 뜻을 깨닫고 알게 되었다. 사람을 쓰는지 안 쓰는지, 너에 대해 어떤 태도인지 하는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관건은 사람이 주관적으로 노력하여 변화될 수 있는지, 어떤 길을 선택하는지에 달렸다. 이것이 가장 관건이다. 너에 대한 태도가 아무리 좋아도 변화가 없으면 안 되고, 너에 대한 태도가 아무리 좋아도 일이 임할 때 넘어지면 소용없다. 관건은 그래도 사람이 가는 길에 달려 있지 않겠느냐? 전에 너를 저주하는 말이나 증오하고 혐오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 네가 변화되면 너에 대한 태도도 따라서 바뀐다. 사람이 늘 두려움을 느끼고 늘 편치 못한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음을 설명한다. 이제 이 일을 알았다면, 후에 어떤 일이 임할 때 또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이제 사람 안의 본성과 각 방면의 이지에 대해 어느 정도의 인식이 있지 않으냐? 어느 정도의 윤곽이 있지 않으냐? 과거에 어떤 사람은 나쁜 일을 저질러 출교되었다. 교회에서도 그를 내버리니 그는 몇 년 동안 방랑하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왔다. 완전히 도망쳐 버리지 않은 것은 좋은 일이다. 완전히 도망쳐 버리지 않으면 구원받을 기회가 있고 구원받을 희망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도망치고 믿지 않는다면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철저히 끝나는 것이다. 돌이킬 수 있으면 희망이 있는데, 이것은 대견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만들든, 어떻게 사람을 대하든, 어떻게 사람을 미워하고 혐오하든, 사람이 언젠가 돌이킬 수 있으면, 나는 특별히 위로를 느낀다. 즉, 사람의 마음에 그나마 아직 하나님의 자리가 있고, 아직 이지와 인성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으며, 아직 하나님을 믿으려는 마음이 조금 있고, *인조귀종하려는 마음이 조금 있는 것이다. 누가 달아났든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오고 마음에 아직도 이 집이 있다면, 나도 약간 미련을 두고 또 약간의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끝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애석하게 생각한다. 만일 돌아와서 다시 시작하여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는 마음에 특별히 누림을 얻는다. 그 사람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 사람이 나를 잊지 못하여 다시 돌아온 것과 같다. 그 사람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고 이런 심정이 있는 것이다. 그때에 얼굴을 보게 되면 아주 감동을 받을 것이다. 네가 그 당시에 떠나갔을 때는 틀림없이 아주 소극적이고 정형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네가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은 너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직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후에 계속 나아갈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그것은 사람이 너무나 빨리 변하기 때문이다. 은혜시대에 예수는 사람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양 백 마리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어버린 그 한 마리를 찾아다닌다는 그 말은 기계적인 방법이 아니고 규례도 아니라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뜻,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절박한 마음을 설명하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의 방법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 방면의 성품과 한 방면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반년이나 1년 동안 떠났든, 혹은 얼마나 연약했든, 얼마나 오해를 했든, 후에 각성하고 인식하여 돌아서고 잘못을 깨달을 수 있다면, 나는 특별히 위로를 받는데, 그 정도로 누리는 느낌이 있다. 지금 이런 번화한 세상에서, 사악한 시대에서 굳게 서고,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고, 잘못을 깨닫고 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크게 위로받는 일이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일이다. 네가 키운 자식이 효도하든, 불효하든 부모인 너를 인정하지 않고 달아났다면, 너는 어떤 느낌이겠느냐? 너는 마음에서 늘 그 자식을 내려놓지 못하고 언제쯤 돌아올까 늘 생각할 것이다. ‘한 번 봤으면, 그래도 내게 이런 아들이 있었는데, 내가 귀여워하며 키웠지.’ 늘 이렇게 생각하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사람은 다 이런 심정이다. 지금의 사람은 분량이 작지만, 안에 믿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거나 그분이 하나님임을 시인하지 않는다면 몰라도 언젠가는 깨달을 것이다. 지금 사람의 분량을 놓고 보면, 큰 문제에서는 훈계하고 평소에도 좀 단속하고 지켜야지 완전히 손을 뗄 수는 없는데, 언젠가 너희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있으면 된 것이다. 너희는 다른 사람이 너희를 늘 단속하거나 재촉해야 하는 그런 분량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자신이 사역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여전히 지키고 단속해야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부족함이 너무나 많고 분량이 너무나 작다는 것을 증명한다. 진리가 없고 분량이 너무나 작으면 하나님을 위로해 드릴 수 없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가 없다. 너희에게 어느 정도 심지가 있어야만 내가 안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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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②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③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④효력(效力):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힘이나 기능만 다하는 것을 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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