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찾는 분들을 환영합니다!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색상

테마

폰트

크기

줄 간격

페이지 너비

검색결과 0개

관련된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

제53편 사람의 본성에는 공통성도 있고 차이점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길과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꿰뚫어 보았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고통을 좀 받으면 끝나는 것이냐? 어떤 사람들은 심판과 형벌, 훈계와 책망을 겪거나 진면목이 드러나면, 그것으로 끝이고 결말이 정해졌다고 여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일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다 여기에 걸려 앞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른다. 평소에 훈계와 책망을 받지 않고 어떤 좌절도 당하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을 믿으면 당연히 진리를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일단 충격을 좀 받고 어려움에 부딪히면 사람의 배반 본성이 유로(역주: 흘러나옴)되어 사람들이 보기에도 아주 혐오스럽고, 나중에는 스스로도 몹시 혐오스럽다고 느낀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스스로 자신의 결말을 정한다. ‘끝이야, 나 같은 사람은 끝이야. 이런 일까지 저지르게 되었으니 끝난 거 아니겠어? 하나님은 틀림없이 나를 구원하지 않으실 거야.’, 이런 정형이 있는 사람은 소수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이렇다고 할 수 있다. 왜 사람은 이렇게 규정지을까? 그것은 아직도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너를 한 번 훈계하면 한동안 진리를 추구하지 않을 수 있고, 작은 일을 하나 잘못한 것 때문에 본분을 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작은 상황 하나 때문에 정체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이 완벽하게 추구해야만 힘이 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신이 너무 패괴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추구할 마음이 없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다 낙심하면서 소극적인 말을 한 적이 있다. “아! 난 끝났어. 틀림없이 끝이야. 구원받을 수가 없어. 설사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신다고 해도 나 스스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나 같은 사람은 변화될 수 없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였다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을 설명한다. 사실, 인류가 정상적으로 진입하는 중에 간혹 일부 패괴 성정이 유로된다든가, 일을 할 때 뒤섞임이 있고 무책임하고 충성심이 없고 대충대충 하여 속인다든가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모두 필연적인 법칙이다. 그런 유로가 없다면 어찌 패괴된 인류라고 하겠느냐? 인류에게 패괴가 없다면, 하나님이 하는 구원 사역도 의의가 없을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사람에게 진리가 없기 때문에 아직도 자신에 대한 참된 인식이 없고, 자신의 정형도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드러내어 분명히 지적해 주어야 한다. 오직 드러내야만 너희가 문득 크게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마비되고 멍청해져 이렇게 역사하지 않으면 변화될 수가 없다. 각 단계에 너희에게 생긴 어려움을 내가 말하여 바로잡아 주고 방향키를 바로잡아 주어 너희들이 스스로 바른길을 갈 수 있게 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늘 극단으로 나아가고 막다른 길로 나아가기 때문에 가다 보면 길이 없어지는데, 그러면 스스로 자신을 규정한다. 처음에 체험할 때는 사람이 모두 자신을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모두 자신을 알고서 “에휴, 나 같은 사람은 마귀 사탄이야! 사람은 다 마귀 사탄이야. 이번에도 끝이야. 나는 구원받을 수 없어. 기회가 없고 만회할 여지도 없어.”라고 말하는데, 사람은 정말로 너무나 취약하고, 너무나 다루기 힘들다. 가다 보면 극단으로 나아간다. 만약 어느 날,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면, “아, 이제 보니 내가 이렇게 깊이 패괴되었었구나. 이제야 알겠어.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지금에야 밝은 인생을 보게 되었고, 인생의 바른길에 들어서게 되었어.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마치 꿈속에서 막 깨어난 듯 문득 깨닫게 된다. 그것은 크나큰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래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임종 전까지도 자신을 알지 못하고 아주 교만한데, 사실로 드러나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여전히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는 좋은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겠어?’ 마치 억울함을 당한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해도 결국 자신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여 항상 자신은 좋은 사람인데 잠시 흐리멍덩해서 일을 잘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도태되었어도 지금까지 불복하는데, 그런 자는 너무나 교만방자하고 무지하며, 아예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가 아니므로 영원히 사람으로 변화될 수가 없다. 여기에서 너희는 비록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본성이지만, 본성에는 그래도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을 더 깊이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에는 공통적인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이것은 공통점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각자의 치명적인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저것을 좋아하며, 어떤 사람은 이것을 숭상하고 어떤 사람은 저것을 숭상한다. 이것은 본성의 차이점이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받아도 굳게 설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고난을 받으면 넘어지기 쉽다. 그것은 본성에서 지향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똑같은 일이 닥쳐도 왜 어떤 사람은 굳게 설 수 있으나 어떤 사람은 쉽게 넘어지느냐? 그것은 본성 안에 있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패괴 성정이 좀 심하게 나타나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좀 경하게 나타나지만, 그 실질은 같은 것이다. 이런 것이 공통적인 것이다. 사람마다 본성이 어떤 것이면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과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이 꼭 그런 부류의 사람인 것은 아니다. 왜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그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그런 것이 뚜렷하지 않고, 그다지 강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호색하는 것은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냐? 사람마다 갖고 있는 것이 아니냐? 게다가 사람은 이 방면에서 이겨 내기 쉽지 않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매우 강렬하다. 그런 사람은 그런 일이 닥치면 이겨 내지 못하여 마음에 끌리는 이성을 따라 도망가거나 이성을 데리고 도망간다. 그러면 그 사람의 본성은 사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일이 닥치면 연약해지거나 사악한 정욕이 나오지만, 낯을 들지 못하는 짓은 할 수 없어 자신을 억제하며 피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본성이 사악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육체가 있으면 사악한 정욕이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정욕을 방종하여 제멋대로 하고 무슨 짓이든 다 저질러도, 어떤 사람은 오히려 그렇지 않다. 이런 사람은 진리를 추구하여 진리대로 실행할 수 있고, 육체를 배반할 수 있다. 비록 모두에게 육체의 정욕이 있기는 하지만, 그 표현은 다르다. 이것이 사람과 사람의 차이점이다. 어떤 사람은 돈을 탐내기에 돈이나 좋은 물건을 보면 가지려고 하는데, 소유욕이 매우 강하다. 그 사람의 본성은 탐욕스러운 것이고, 돈과 재물을 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물건만 보면 탐심이 생겨 교회의 돈도 함부로 훔치고 함부로 쓰는데, 심지어는 2만, 3만 위안도 함부로 손을 댄다. 돈이 많을수록 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데, 아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바로 탐욕스러운 본성이다. 어떤 사람은 10위안이나 20위안을 써도 양심이 편치 않아 즉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데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사람에게는 다 연약함이 있다. 그러니 그 사람을 돈을 탐내는 사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패괴 성정의 유로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남을 논단하기 좋아한다. 그는 “그 자식이 3위안, 5위안을 쓰고도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지 않는 걸 봐요. 다음에는 또 20위안, 30위안을 쓸 거예요. 정말 탐욕스러워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옳지 않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정이 있으므로 정상적인 연약함도 있는 것이다. 어떤 연약함은 사람의 패괴 성정이기도 하다. 패괴 성정이 있는 것과 ‘본성이 바로 그런 것이다.’라는 것에는 차이점이 있으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되고, 함부로 남을 논단해서도 안 된다. 사람을 논단하는 것은 가장 심하게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분별력이 없어 일을 꿰뚫어 볼 수 없다면,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함부로 말하거나 끼워 맞춰서는 안 된다.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말을 하거나 일을 처리함에 원칙이 없고, 다른 사람이나 자신에게도 유익이 없다.

너희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어떤 목표에 도달해야 하는지 마음속에 생각이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요구대로 믿고 추구하는 사람이 없다. 너희 안에는 아주 많은 문제가 존재하지만, 아마 너희는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르고 자신 안의 각종 사상과 본성의 것들을 아직 깊이 파내지 못하고 미처 다 해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너희가 이 말을 깨닫게 되면,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의 본성 안에는 또 허황한 것이 많이 있다. 좋은 옷을 입거나 핸드폰을 들고 있으면 말투마저 변한다. 또 어떤 여성은 하이힐을 신으면 걸음걸이가 달라진다. 사람 안에 어떤 것이 있고, 사람의 본성이 어떻길래 그런 사악하고 추한 것이 유로될까? 이것이 바로 사람이 인식해야 할 본성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지금 이런 본성 안에 있는 것을 의지로 억제하여 겉으로 유로되지 않게 한다. 하지만 사람의 체험에 따라, 각 방면의 진리에 대한 인식과 본성에 대한 인식이 깊어짐에 따라 하나님의 요구대로 점차적으로 진입하게 되면, 이런 것은 천천히 변화되기 시작한다. 처음 진입할 때, 사람은 육체를 배반해야 한다. 나중에 진정 인식이 있고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때는 특별히 힘들여 육체를 배반할 필요가 없다. 그때는 사람이 자각적으로 진리에 근거하고 일을 함에 있어 원칙과 범위가 있게 되는데, 그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때는 어려움이 있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에 늘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어보게 된다. 그 외에, 소극적인 정형에 늘 방해받아 사람은 갈 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소극적인 정형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교통할 수 있으면 교통하고, 교통할 수 없는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네가 정상적으로 실행하여 진입하기만 하면 된다. 또한 진리를 많이 교통하면, 천천히 어느 날엔가 진리에 대해 환해지고 많을 일은 꿰뚫어 볼 수 있게 되면서 소극적인 정형이 자연히 없어진다. 너희가 지금 돌아보면 예전의 그런 정형이 다 없어지지 않았느냐? 최소한 예전보다 훨씬 적어졌으니 진리를 잘 추구하기만 하면 어떤 문제든 다 해결할 수 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향상되고 자란 것이다. 어느 날까지 체험하여 한 사람의 인생관, 삶의 의의, 삶의 토대가 모두 바뀌게 된다면, 즉 한 사람이 환골탈태(換骨脫胎)하여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것은 큰 변화이고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이다. 네가 세상의 명리, 지위, 돈, 누림, 부귀영화는 있으나 없으나 괜찮다고 여기면서 그런 것을 아주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사람다운 모습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최종에 온전케 된 사람들은 바로 이런 한 무리 사람들이다. 진리를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정의로운 일을 위해 사는 것이 바로 사람의 모습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사람이라고 합니까?” 지금의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아니면 무엇일까? 동물이라고 해도 되고, 짐승이라고 해도 되고, 사탄이라고 해도 되고, 마귀라고 해도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의 가죽만 썼을 뿐이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상 인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을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사람에게 언어가 있고 사상과 사유가 있으며 과학으로 뭔가 제조할 수 있기에 고급 동물에 열거할 수밖에 없다. 이방인들은 자신의 조상이 원숭이라고 말하는데, 동물이지 사람이 아닌 것이다. 사람을 마귀 사탄이라고 해도 적합하다. 왜냐하면 사람의 본성이 그것에 속하고, 사람이 유로하는 것도 다 그것이고, 발표하는 것도 다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사람을 마귀 사탄이라고 하면 더욱 적절한 것이다. 사람은 지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형상을 갖추지 못한 인류이다. 예컨대, 어떤 오래된 신자들은 그렇게 오래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좀 헤아릴 수 있게 되었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고 어느 정도 하나님이 급해하는 것을 급해하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뜻이 좀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다운 모습이 좀 있고 형상을 반쯤 갖춘 것이다. 새 신자는 형벌과 심판을 겪지 못했고, 많은 훈계와 책망도 겪지 못했으며, 진리도 들은 것이 적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만 하고 진실한 체험이 없는데, 그럼 더욱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사람 체험의 깊고 얕음으로 그 사람이 얼마나 변화되었는지가 결정되는데, 네가 체험한 것이 적을수록 진리를 깨달은 것이 더 적고, 너의 안에 사람의 것이 더 적으며, 체험이 조금도 없다. 그럼 너는 원래 모양 그대로인, 살아 있는 사탄이고 순전히 마귀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 말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 어디 좋은 사람이 있느냐? 사람다운 모습이 없는데 어떻게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겠느냐? 좋은 사람이라고는 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사람의 외형만 있을 뿐 사람의 실질이 없기에 사람을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면서 사람다운 모습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이런 말씀의 폭로, 형벌, 심판을 겪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최종에 변화될 수 있는데, 이것이 길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이 변화될 수 없기에 반드시 이렇게 조금씩 해야 한다. 사람은 반드시 심판과 형벌을 겪어야 하고, 또한 끊임없이 훈계와 책망을 받아야 한다. 사람의 본성에서 어떤 것이 유로되면 반드시 폭로해야 한다. 폭로한 다음, 사람이 듣고 깨달은 후에야 바른길을 갈 수 있고, 한동안 체험하여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아야만 굳게 설 확신이 있게 된다. 너희의 지금과 같은 상태로는 모두 자격 미달이다. 너희는 지금 손발을 놀려 가며 아주 신나게 뛰어다니지만, 사실 이때가 바로 가장 위험한 때이다. 사람마다 모두 위험한 벼랑 끝에 있다. 나는 여러 번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위험하다구? 위험할 게 뭐가 있어? 지금 정형이 이렇게 좋은데 뭐가 위험하겠어? 나는 넘어지거나 길을 잃을 정도는 되지 않을 거야.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셨으니까.’라고 생각할 것이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어떤 사람이 은총을 받지 않았더냐? 모두가 은총을 받았지만 다 위험한 것이다. 너는 위험하지만 그래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이다. 지금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너무나 멀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

①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②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③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이전 말씀:제52편 사람 안의 불신 요소와 하나님을 배반하는 본성

다음 말씀:제54편 하나님께 늘 요구하는 사람은 가장 이지가 없다

추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