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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편 진리로 자신의 소극적인 정형을 해결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그런 정형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 존재한다. 하지만 이전처럼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은데, 그것은 사람이 그때에는 진리에 대해 인식이 전혀 없었고,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람이 들은 말씀이 비교적 많아 최소한 모두 도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면에 깊이 뿌리박힌 그런 정형은 아직 파내지 못했다. 항상 유로(역주: 흘러나옴)되는 패괴는 사람이 지금 모두 꿰뚫어 볼 수 있고, 유로되면 의식할 수 있다. 어떤 속셈이 나오고 어떤 논법이 나오고 어떤 행실이 나오면, 그것이 어떤 성질인지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것, 상대적으로 좀 숨겨져 있는 것, 사람의 본성을 대표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이 없다. 어떤 때에는 비록 조금 의식할지라도 그것이 틀린 것이라고는 느끼지 못한다. 어떤 때에는 그렇게 하면 맞는지 틀리는지는 의식할 수 있지만 아직 명확하게 분별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진리가 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금은 오래된 신자든 새 신자든 진리에 대해 정말로 깨달은 것이 아니고, 환히 아는 정도에 이르지도 못했으며, 글귀 도리만 알고 있거나 규례만 지킬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런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 내면의 정형이 사람의 진입을 가로막고 있고, 사람은 모두 자신의 내면에 있는 본성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실질적인 요소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본성에서 생겨난 것은 사람이 스스로 발견할 수 없다. 발견할 수 없기에 사람은 단지 규례를 지키고 도리를 말하고 좋은 행위가 있으면 변화가 좀 있고 분량이 좀 있어 당연히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사람에게 이런 생각이 있는 것은 사람이 너무 천박하고 진실한 분량이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람 내면에 있는 어떤 정형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아니고, 소극적인 것도 아니다. 사람 또한 그런 것은 아주 정당하고 매우 적합하다고 여긴다. 사실, 그런 것도 사람 본성의 산물이다. 어느 단계에 이르러 설사 너에게 분량이 조금 있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내면에는 여전히 그런 것이 있는데,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제 그것이 폭발할지 모르는데, 자신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은 조금 의식할 수 있어도 명확하게 분별하지 못하고, 그런 정형이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며, 속으로는 또 ‘내가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라고 느낀다. 마치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은데,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있는 가장 다루기 어려운 점이다. 피부 표면의 상처는 치료하기 쉽지만, 혈액 속의 병은 사람이 스스로 보지도 못하고, 치료하지도 못하기에 반드시 채혈하여 검사해야만 알 수 있다. 사람 안에 깊이 뿌리박힌 것과 본성에서 생겨난 것은 사람이 살면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본성에서 생겨난 것을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마치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고, 마땅히 이런저런 속마음과 이런저런 요구와 욕망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진리는 진리이다. 사람 본성에서 생기는 것은 모두 패괴이고, 모두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느끼지도, 의식하지도 못한다. 특히, 지금 사람은 간단한 도리를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은 분량이 있고 작은 체험이 있기에, 마치 뒤섞임이 조금 있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 같다. 사람은 마땅히 그 기초 위에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것은 아주 큰 잘못이다. 사람이 보기에 맞다고 그것을 진리와 혼동해서는 안 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그릇된 인식의 기초 위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진리에는 불순물이 없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날을 바라고, 하나님이 형상을 바꾸기를 바라는 기초 위에서 자신을 격려하고 진리를 추구한다. 너는 이렇게 추구하는 것이 아주 맞고 방법도 맞다고 생각하지만, 너의 출발점은 전혀 맞지 않다. 출발점이 틀리면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도 영원히 틀린 것이다. 어느 단계에 있든 사람이 자신 안에 있는 이런 정형을 인식하지 못하고 바꾸지 못하면, 아무리 추구해도 헛된 공사를 하게 된다. 출발점이 틀리고 기초를 잘못 다지면 조만간 어느 날 공사가 무너져 절대로 굳게 서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람은 언젠가는 위험하게 된다. 너희는 이 말을 깨달았느냐? 왜 많은 종교 인사들이 참 도를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기초를 잘못 다졌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하나님께 도태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집에서도 일부 인솔자들이 자신 내면의 정형이 너무 나쁘고 불순물이 너무 많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아무리 책망과 훈계를 받아도 안 되더니 나중에는 옛 병이 재발하여 완전히 드러나 도태되었다. 사람 안에 있는 어떤 정형은 마치 암과 같아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조만간 발작하여 사람을 망하게 할 것이다.

각 단계마다 사람의 정형이 어떠한지는 직접 사람의 진입 정도에 관계되고, 사람이 얼마를 얻게 될지에 관계된다. 사람의 정형이 비교적 정상이면 어느 정도 진리를 깨닫고 진입하게 되며, 하나님 말씀에서 실제적인 것을 깨달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고 다른 사람을 돌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정형이 바르지 않기에 비록 따르면서 추구하고, 똑같이 보고, 듣고, 교통할지라도 나중에 얻는 것은 남들이 정상적인 정형에서 얻는 것보다 훨씬 적다. 만약 늘 사람의 불순물이 있고, 패괴 본성의 유로만 있으며, 사람의 관념과 상상이 섞여 있으면, 내면에는 틀림없이 흐린 물이 가득 고여 있을 텐데, 어찌 진리에 진입하는 데에 영향을 받지 않겠느냐? 생각이 맑은 사람만이 진리를 터득할 수 있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자신을 비워야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뒤죽박죽이면 진리를 깨닫기 쉽지 않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자신의 정형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문제의 실질을 꿰뚫어 보아야 자신의 본성을 알 수 있다. 사람 안의 정형이 바로잡히고 완전히 정상이 되어야만 진실한 분량이 있게 되며, 또다시 여러 가지 일이 임해도 쓰러지거나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가 어느 단계에서 어떻게 추구해야 하고, 어떤 정형에서 추구해야 하는지 하는 이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흐리멍덩하면 언젠가는 위험해지게 된다. 정형이 정상이면 바르게 가고, 바르게 실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도 빨리 진입하게 된다. 이렇게 추구해야 생명이 자랄 수 있다.

사람 안에 또 한 가지 정형이 있다. 즉, 사람은 지금 모두 몇 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고, 훈계와 책망을 어느 정도 겪었으며, 복받으려는 속셈을 어느 정도 내려놓았고, 사람의 마음도 어느 정도 홀가분해졌다. 또한 복받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탄복하고, 아예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고, 머리도 좀 수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해도 다 괜찮다는데, 이런 정형도 맞지 않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셔도 다 괜찮아. 어차피 나는 복받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데 뭐.’ 이런 정형이 있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면 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너에게 묻겠다. “너는 정말 하나님의 지배에 맡겼느냐? 너는 정말 이 방면의 진리를 갖추었느냐?” 진실한 분량이 없이 어찌 진실한 순복이 있을 수 있겠느냐? 그러고도 그것이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는 것인 줄로 여긴다! 지금 어떤 사람들의 태도는 ‘복을 받든지 화를 입든지 상관없어. 하나님께서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라지 뭐!’라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소극적으로 방임하는 정형이고, 스스로 진리를 중요시하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하나님의 지배에 맡기는 건데 뭐. 나중에 하나님께서 운명을 결정하시니까. 우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니까 어떻게 추구하든 다 괜찮아.’ 이것은 소극적으로 본분을 게을리하는 것이고, 주관적인 노력이 없는 것이다. 말해 봐라. 사람 안에 이런 정형이 있는데, 그래 발전할 수 있겠느냐? 그래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게 할 수 있겠느냐?

사상이 바뀌는 것도 사람의 추구와 진입에 있어 아주 관건이다. 너의 정형이 바뀌면 어떤 걸림돌도 다 없어지기에 추구하기가 수월해진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진입할 수 있는지, 혹은 추구하는 힘이 얼마나 큰지는 전적으로 사람의 정형이 어떠한지에 근거한다. 만약 사람의 정형이 정상적이면 추구하는 것이 힘이 있고, 사람이 늘 힘이 없고 미지근하게 따르면 틀림없이 내면의 정형이 비정상이고 내면에 꼭 문제가 있을 것이며, 틀림없이 어떤 통제를 받거나 하나님을 믿음에 이상(異象)이 없어 어떻게 추구할지 모르거나 성령 역사를 잃어 진리의 빛 비춤이 없거나 혹은 소극적인 정서가 존재하여 참된 믿음을 잃었을 것이다. 이런 것은 다 가능하다. 나는 소수의 사람들이 늘 어떤 곤혹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는 늘 자신 안에 있는 영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 늘 일을 잘못할까? 왜 늘 실수가 생길까? 내 안에 악령이 있지 않을까? 만일 악령 역사가 있다면 모든 것이 끝이 아닌가?’ 특히 초자연적인 악령 역사가 있었던 사람은 더욱 이 일에서 시달리기 쉬운데, 마음속에 늘 의혹이 있는 것은 아주 위험한 것으로, 사탄이 틈타 거짓을 사실로 만들기 아주 쉽다. 이런 정형은 가장 다루기 어렵다. 너희 일부 사람들은 ‘사람의 영이 틀리면 끝이다. 영의 일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고 이렇게 잘 생각하는데, 이 일이 너희에게 장애물이 되었다. 이 정형은 또한 사람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여 믿을 수 없게 한다. 이런 정형은 가장 위험한 정형이니 반드시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릇된 심리를 가지고 있는데, 속으로 늘 ‘하나님께서 예정하고 선택하신 이상 하나님이 모든 것을 결정하시는데, 우리가 추구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정형에 빠져 나오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이 교통해 줘도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저도 그건 다 알죠. 거기서 나오지 못할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어느 날엔가 스스로 정말 깨달으면 또 후회한다. ‘그때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었지? 참 우매해!’ 사실, 사람마다 비정상적인 정형이 좀 있는데, 각 사람의 본성은 환경이나 배경이 다름으로 생겨나는 것도 모두 같지 않다. 비록 사람의 본성은 모두 같지만 환경이 다르고 배경이 다름으로 인하여 혹은 사람이 담당한 사역이 다르고 선 위치가 다름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정형도 다르다. 하지만 사람 본성 안에 있는 공통적인 것은 모두 같다. 환경이 임하면 너는 이런 정형이 나오고, 그는 저런 정형이 나온다. 어떤 사람은 이 일에서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저 일에서 넘어지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서 소극적이 되고 어떤 사람은 저 일에서 연약해지는데, 나중에 하나님께 기도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것 같으면 내면에 또 정형이 생긴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하나님께 버려진 것이면 끝이 아닌가? 그럼 아예 믿지 말아야지. 믿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도 하시지 않으면 내가 도태되는 것이 아닌가?’ 또 이런 정형이 나타나는데, 옛 병이 사라지기도 전에 또 새로운 병이 온 것이다. 사람이 죽게 되었을 때는 이미 구할 수 없는 것이다. 잘못을 깨닫고 고칠 줄 아는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 이것이 바로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면 언제까지나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길을 잃었다가 깨달을 수 있고, 자신의 정형이 비정상임을 발견하고, 자신이 위험한 경지에 있음을 느껴 전력을 다해 일어나 정상적인 정형을 회복할 수 있는 이런 분량이 있는 사람은 너무나 적다. 지금 왜 사람에게 분량이 없다고 할까? 바로 어떤 정형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지 네 스스로 꿰뚫어 보지 못하고, 스스로 알지 못하고, 심지어 생각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늘 일이 임하면 연약해지고 소극적이 되며 넘어지기 쉽다. 어떤 것을 분량이 있다고 하느냐? 네가 자신을 장악하지 못하고, 항상 정상적인 정형에서 살지 못하며, 자신의 비정상적인 정형을 꿰뚫어 보지 못하면, 너에게 분량이 없는 것이다. 분량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아 진리가 너의 생명이 되고, 너의 기둥이 되고, 너의 생존 토대가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네가 진리대로 살 수 있기에 어떤 일이 임하든 연약해져 넘어지지 않고 각종 위험한 정형에 빠지지 않게 되면, 이것이 분량이 있는 것이다. 지금 사람이 이 정도에 도달할 수 있느냐? 도달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은 항상 소극적이고 연약한데, 모두 어떤 정형에 빠지면 쉽게 나오지 못한다. 설사 나중에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고, 또한 자신의 어떤 정형이 틀리는지도 모르기에 다시 그런 일이 닥치면 또 넘어지고 실패하게 되는데, 다시 옛 병이 재발하게 된다. 일이 임할 때마다 연약해지고, 일이 임할 때마다 걸리는데, 누가 교통해 주면 그것도 잘 생각해 봐야 조금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정형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자신의 본성 방면에서 유로되는 것을 파악할 수 없어 나중에 아무리 체험해도 변화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임하면 또 넘어지고 저런 일이 임하면 또 연약해지며, 좌절을 좀 당하면 본분을 팽개치려고 하고, 소극적인 경우가 많고 정상적인 경우가 적어 늘 성령 역사를 잃게 된다. 이것이 각 사람의 실제 정형이다. 사람이 자신의 정형을 파악할 수 있는지, 자신이 틀림없이 정상적인 정형에서 살 수 있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사람이 진리에 진입한 정도에 의해 결정되는데, 여기에서 사람의 실제 분량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저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부분에서 볼 때 분량이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한다. 스스로 분량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것은 지금의 환경이 그다지 열악하지 않거나, 어떤 위협이 되지 않거나,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로 고통스럽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도 완전히 순복할 수 있을까? 욥처럼 고통스러워 살 수 없게 되면, 하나님의 배치에 순복할 수 있을까? 이것은 분량 문제이다. 그러므로 환경이 좋을 때는 네가 ‘나는 하나님의 배치와 안배에 순복할 수 있고, 끝까지 따를 심지와 의지력이 있어.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하고 욥처럼 하나님을 위해 증거할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너에게 마치 이런 심지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환경이 임할 때, 더 심한 시련이 올 때, 더 큰 고난이 닥칠 때 네가 굳게 설 수 있겠느냐? 네 스스로 알 수 있느냐? 네가 예측할 수 있느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사람에게 진리가 없고, 아직도 참으로 자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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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④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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