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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편 자신의 정형을 알아야 정상 궤도에 들어설 수 있다

사람의 내면에는 늘 소극적인 정형들이 존재한다. 그중 어떤 정형들은 사람을 좌지우지하거나 통제할 수 있고, 어떤 정형은 심지어 사람으로 참 도를 떠나 잘못된 길에 들어서게 한다.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중요시하고, 어떤 길을 택하는지는 모두 사람 내면의 정형과 관련이 있다. 사람이 연약하고 굳센 것은 사람 안의 정형과 더욱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예컨대,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날을 특별히 중요시하고 있다. 사람마다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날이 빨리 와서 이런 고난과 질병, 핍박, 혹은 더 많은 방면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날이 오면 이런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더 이상 고난받지 않고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사람이 이런 정형에서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고 진리를 추구한다면, 그것은 제한된 것이다. 좌절이나 여의치 않은 일이 닥치면 사람 안에 있는 그런 연약, 소극, 패역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형이 비정상이거나 바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추구 목표도 정확할 수 없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뒤섞임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르지 않은 정형 속에서 진입하기를 추구하면서도 아주 잘 추구하고 있다고 여기고, 하나님의 요구대로 하고 진리대로 실행하여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너는 그렇게 여기겠지만 너에게 여의치 않은 일이나 어떤 상황으로 초래된 고통이 임하여 너의 그 연약한 곳을 건드리고, 너의 영혼 깊은 곳에서 바라고 있는 것을 건드려 너의 소망이 깨어지고, 너의 꿈이 물거품이 되면, 너는 자연히 연약해진다. 그러므로 네가 언제 굳세어지고 언제 연약해지는지도 너의 그때 당시의 그 정형에 근거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나는 지금 아주 굳세고, 지금 어느 정도 분량이 있어.’ 혹은 ‘나는 이전보다 믿음이 더 있고, 이미 정상 궤도에 들어선 것 같아. 다른 사람이 이끌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이 채찍질할 필요도 없어.’라고 생각한다. 그럼 왜 상황이 임하면 또 연약해지느냐? 또 믿지 않게 되느냐? 심지어 세상으로 돌아가기까지 하느냐? 게다가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해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각 사람에게 비정상적인 정형이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설사 네가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추구해도 완전히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그런 것을 내려놓을 수는 없다. 사람 내면에 섞여 있는 것 중에 어떤 것은 내려놓기 쉽지 않기에 반드시 폭로하여 인식하게 해야 사람이 점차적으로 변화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형을 지적해도 자신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으니 똑같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한다! 그 정형을 지적하여 사람에게 그 정형이 옳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는데, 그럼 이후에 그 정형이 또 나올 때는 그런 정형이 비정상이기에, 그런 마음을 품고 진입하기를 추구하고 본분을 하면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지 못하고, 더욱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믿기 시작했을 때 잘못된 기초 위에서 추구하기에 결과적으로 늘 소극적이고 연약해져 굳게 서지 못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관념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미 약속을 주셨어, 그러므로 나는 붙잡히지 않을 거야.’ 또는 ‘내가 이렇게 가정을 버렸으니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이후의 생활을 보살펴 주실 거야. 하나님은 당연히 그렇게 하실 거야.’라고 생각하는데, 결국 어느 날 자신의 소망과 맞지 않는 것이 임한다. 몸에 병이 났을 때, 대접받는 집에 있는 것이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그렇게 편안하지 않아 먹고 싶은 것도 먹지 못하고, 눕고 싶어도 눕지 못하며, 다른 사람이 보살피고 배려해 주는 것이 조금만 좋지 않아도 안 되는데, 이런 일에서 연약해진다. 이 한 가지 일로도 낙담하고 연약해져 오랫동안 원망하고, 심지어 진리마저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의의까지 부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내면의 정형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것이 틀린 것임을 모른다면, 아무리 진리를 추구하고 열심이 있어도 언제 넘어질지 모른다. 진리를 얻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소수이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많은 시간이 걸려야 조금 깨달을 수 있고, 많은 시간이 걸려야 체험한 인식이 조금 있을 수 있고, 순수하고 올바른 인식을 조금 터득할 수 있고, 빛 비춤을 조금 얻을 수 있다. 만약 너의 내면에 섞여 있는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조금밖에 없는 너의 그 빛 비춤마저 언제든지 묻어 둘 수 있다. 지금 사람에게 있는 결정적인 어려움은 바로 사람마다 내면에 발견하지 못한 상상, 관념, 소망, 헛된 꿈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사람 안에 늘 섞여 있고 사람에게 붙어 다니는데, 그것은 확실히 아주 위험한 것이어서 사람이 언제 나쁜 버릇이 되살아나 헛소리를 하고 원망을 하게 될지 모른다. 사람 안에는 섞여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비록 모두에게 ‘진리를 추구해야지. 하나님을 잘 믿어야지…’라는 좋은 소망은 있지만 그래도 목적은 이룰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그 정도의 작은 일에서는 그가 쉽게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는 내려놓지 못하는 걸까? 평소에 비교적 체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 굳세고 정신도 비교적 또렷한데 왜 작은 일이 임하면 그는 넘어지게 되는 걸까? 게다가 그렇게 빨리 넘어질까? 이런 일은 각 사람이 체험하는 중에 늘 있게 되는 일이다. 정말 사람은 화복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어찌 스스로 예측할 수 있겠느냐? 사람마다 내면에 자신이 추구하여 얻고 싶어 하는 뭔가가 있고 자신의 취향이 있지만, 사람은 흔히 그것을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거나 그것이 아주 정당하고 틀린 곳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그 일로 인해 넘어져 소극적이 되고 연약해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어도 스스로 무슨 일인지 모른다. 마치 그것이 아주 이치에 맞는데 하나님이 좋은 사람을 억울하게 한 것 같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모르면 자신의 어려움도 모르고, 어디서 죽게 되는지도 모른다. 바로 이렇게 가련한 것이다. 보니, 사람에게 섞여 있는 것이 어떤 때는 그 사람을 망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무슨 진리나 다 알고 있어. 실행하지 못할 뿐이지.” 이 말은 근원적인 문제, 즉 사람 본성의 문제를 털어놓은 것이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진리를 싫어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진리를 실행하지 않을 것이다.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거기에는 틀림없이 자신의 사치한 욕망이 있고, 무엇을 하든 거기에 자신의 속셈이 있다. 예컨대, 핍박받아 집이 있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이렇게 바라고 있다. ‘에휴, 아직 집으로 돌아갈 수 없구나. 하지만 언젠가 하나님께서 더 좋은 집을 주실 거야. 하나님께서 나를 고생시키지는 않으실 거야.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어디에 있든 밥 정도는 먹을 수 있게 해 주실 거야. 나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는 하지 않으실 거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신다면 하나님이 틀린 거야.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하신 거지 내 잘못은 아니야.’ 사람 내면에 이런 것이 있지 않으냐? 혹은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나를 집권당의 손아귀에 넘겨 줘서는 안 돼. 내가 이렇게 모든 걸 버리며 이렇게까지 진리를 추구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당연히 나를 어떻게 어떻게 대하셔야 맞는 거야.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날을 바라고 있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날이 빨리 와야 하고, 하나님은 당연히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셔야 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 안에는 또 ‘우리가 이렇게 했으니 하나님은 당연히 어떻게 어떻게 하셔야 해. 우리가 어디까지 도달하면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에게 어떤 상을 주셔야 하고 어떤 축복을 주셔야 해.’라는 하나님에 대한 사치한 요구가 있다. 또 다른 사람이 집을 나와서 남편과 가족을 떠나 아주 홀가분하게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니 마음에 정서가 생긴다. ‘다른 사람들은 집을 떠난 지가 그렇게 오래되었는데 어떻게 이겨 냈을까? 어떤 비결이 있을까? 나는 왜 항상 이겨 내지 못할까? 나는 왜 늘 집 생각이 날까? 나는 왜 가정, 남편, 아들딸에 대해 계속 내려놓지 못할까?’ 나중에 또 ‘하나님은 왜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나에게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지 않을까? 나는 왜 늘 집 생각을 할까? 성령께서 왜 내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을까? 하나님은 왜 나와 함께하시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속에 이런 것을 품고 있는데, 이것은 어떤 정형이냐? 사람은 너무나 이지가 없다. 자신이 진리를 실행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한다. 사람에게는 주관적인 노력과 스스로 도달해야 할 것이 모두 없으며, 사람이 스스로 선택해야 할 것, 가야 할 길을 모두 버리고는 늘 하나님께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요구하고, 하나님께 계속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하며, 은혜를 주셔서 자신을 인도해 달라고 하고, 누림이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는 ‘내가 집을 나와 이렇게 많은 것을 버리고, 이렇게 본분을 하고, 고생을 많이 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마땅히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집 생각이 나지 않게 하고, 모든 걸 버릴 심지가 있게 하고, 힘을 더해 주셔야 해. 근데 나는 왜 이렇게 연약할까? 다른 사람은 왜 그렇게 굳셀까? 하나님은 마땅히 나를 굳세게 하셔야 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하는 이런 말을 보면 이지가 조금도 없고, 진리는 더더욱 없다. 사람의 원망은 어떻게 생기느냐? ‘다른 사람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도 어떻게 대접받을 집이 있을까? 나는 왜 대접받을 집이 없을까? 왜 내게는 안 될까? 다른 사람은 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우리 집은 왜 상황이 안 될까?’ 이것은 사람 안에서 나온 것인데, 완전히 사람의 본성을 대표한다. 사람 속에 이런 것이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든 언제든지 참 도를 떠나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된다. 사람 속에 이런 것이 있으면 분량이 얼마나 크든지, 진리를 얼마나 깨달았든지, 이런 것을 벗어 버리지 않으면 영원히 굳게 설 확신이 없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모독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참 도를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지금 너희는 분명히 보았느냐?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서 늘 유로되는 것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하고 장악해야 하며, 이 문제를 참답게 대해야 한다. 비교적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어떤 때 조금 느낄 수 있고, 문제를 발견하면 성찰하고 깊이 파낼 수 있지만, 또 어떤 때는 느끼지 못하는데, 이것은 어쩔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폭로하거나 사실로 나타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세심하지 못한 사람은 설사 어떤 때에 느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타협할 것이다. ‘에휴, 사람은 다 이래.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기억하지 않으실 거야. 이런 일은 다 정상이지 뭐.’ 이렇게 사람은 스스로 택해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다 하지 않고 도달하지도 않는데, 모두 흐리멍덩하고 매우 나태하여 남에게 기대기만 하고, 속으로는 또 허망한 생각을 한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에 우리를 철저히 변화시키면 우리에게 있는 이런 나태함이 없어지고 우리는 올바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니 하나님께서 별로 염려하실 필요가 없을 거야.’ 그러므로 너는 지금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네가 이 길을 가는 것은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데, 어떻게 선택할지는 각 사람에게 있어 아주 관건이다! 네가 느낄 수 있다면 너는 자신을 억제하는 능력이 강하냐? 자신을 배반하는 힘이 크냐? 이것은 진리를 실행하는 전제이고 가장 중요한 일환이다. 일이 임하고 일을 할 때마다 어떻게 실행해야 진리에 부합되는지를 스스로 의식할 수 있는 상황에서 너는 어떻게 택할 것이냐? 무엇을 실행해야 하겠느냐? 반드시 명확하게 알아야 행할 길이 있게 된다. 자신의 정형의 옳고 그름을 의식할 수 있지만 투철하지 않아 흐리멍덩하게 지나가면 너는 영원히 진보할 수 없고 돌파할 수 없다. 생명 진입의 일을 참답게 대하지 않으면 자신을 지체시킬 수밖에 없고, 네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밖에 없다. 전에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큰 붉은 용이 빨리 무너지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날이 빨리 임하기를 바라는데, 이것은 정당한 요구가 아닌가? 하나님의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루빨리 영광 얻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였다. 사람은 또 위장하여 듣기 좋게 말하는데, 사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할 뿐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바라겠느냐? 사람은 바랄 것이 없다. 모두 자신이 하루빨리 이런 힘겨운 환경에서 벗어나고, 하루빨리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어떤 사람들은 이전에 뭇 아들에게 준 그 약속을 보고 더욱 간절히 사모하는데, 그런 말씀을 볼 때마다 마치 매실을 생각하며 갈증을 푸는 듯하다.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그 욕망과 사욕을 아직 완전히 내려놓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네가 아무리 진리를 추구해도 30%, 50%의 힘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새 신자들은 날짜를 기다리다가 그날이 오지 않으니 엉엉 울며 마구 소리 지르고, 괴로워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야말로 크게 외치려고 한다. “아! 못 견디겠어요. 하나님의 날은 언제 오나요? 우리는 못 견디겠어요. 하나님의 날이 빨리 오면 좋겠어요!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몇 년밖에 안 됐는데도 참지 못한다. 그럼 하나님을 계속 따른 오래된 신자들은 어떻게 지금까지 따라올 수 있었겠느냐? 그래 그런 말씀이 있었기에 지탱해 온 것이 아니냐? 사람 내면에 이렇게 섞여 있는 것이 많은데 연단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겠느냐? 고난받지 않으면 어떻게 변화될 수 있겠느냐? 사람은 일정한 정도까지 연단을 받아야 기꺼이 하나님의 지배대로 할 수 있고 더 이상 원망이 없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사람은 완전히 변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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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②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③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④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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