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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편 사람의 본성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

본성 안에 있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느냐? 너희는 사람의 패괴와 패역, 결점, 결함, 관념, 속셈은 알지만 본성에 있는 것은 발견하지 못하는데, 그러니까 겉면의 것만 인식하고 근원은 발견하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겉면의 것을 본성으로 생각하여 ‘난 본성을 인식했어! 내가 교만하다는 걸 알았어, 이러면 본성을 안 게 아닌가?’라고 한다. 도리상으로 시인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교만은 본성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금도 틀림없다. 어떤 것을 가리켜 자신의 본성을 인식했다고 할까?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몇 가지 방면에서 인식해야 하느냐? 그리고 그 몇 가지 방면에서 유로된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까? 취향으로 본성을 보아야 한다.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춤을 매우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유명한 가수나 배우를 매우 좋아하며, 어떤 사람은 특히 어떤 인물을 숭상한다. 이런 것에서 보면, 그들의 본성은 어떤 것이냐? 간단히 예를 더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은 유명 가수를 특별히 숭상하는데, 어느 정도로 숭상하느냐? 그 가수의 일거일동과 말하고 웃는 것까지, 말 한마디, 몸 동작 하나에까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매우 신경을 쓴다. 심지어 그 가수가 어떤 것을 입고 쓰는지도 사진으로 남기고 또 모방하기까지 한다. 이 정도로 숭상하면 그 사람에게 어떤 본성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느냐? 마음에는 온통 그런 것뿐이고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고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사탄이 유로(역주: 흘러나옴)한 것인데,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의 마음을 점유하였다. 마음을 다 그런 것에게 준 것은 무슨 문제일까? 그러므로 어떤 것을 너무 좋아하게 되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생명이 될 수 있고, 그 사람의 마음을 점유할 수 있다. 그러면 그는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완전히 증명된다. 그런 자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 자이고, 마귀를 사랑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런 자의 본성은 마귀를 사랑하고 마귀를 숭배하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런 자의 본성을 이렇게 판단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으냐? 완전히 정확하다! 사람의 본성을 이렇게 해부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특히 바울을 숭상한다. 나서서 설교하고 사역하고 모임하고 강연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따르는 걸 좋아하며, 사람들이 자기를 숭상하고 에워싸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자기의 자리가 있는 것을 좋아하며, 사람들에게 자기 형상을 중시하게 만드는 걸 좋아한다. 우리는 보여지는 이런 것에서 그 사람의 본성에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하였느냐? 그런 사람의 본성을 해부해 보자. 그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이런 것들을 보면 그 본성은 어떤 것이냐? 말로 어떻게 요약할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것을 꿰뚫어 보지 못하여 그저 보여지는 것만 본다. 그런 것은 본성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 그 사람의 본성은 어떤 것이냐? 간파하지 못하겠지? 만약 그에게서 정말 이런 것들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교만자대(自大)하고, 하나님께 전혀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한다. 또한 그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높은 지위에 서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관할하고 점유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자리가 있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사탄의 형상이다. 그의 본성에서 매우 두드러진 것은 교만자대하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경배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본성이 아니냐? 나타나는 이런 표현에서 그의 본성을 완전히 간파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부당한 이익을 챙기기 매우 좋아하고 모든 면에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한다. 무슨 일을 하든 이익이 있어야지, 이익이 없고 공짜가 없으면 하지 않는다. 범사에 자신의 속셈과 목적이 있는데, 누가 혜택을 주면 그 사람을 좋다고 말하고, 누가 아첨하면 그 사람을 등용한다. 설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을 바른 사람이라고 말하며, 게다가 극력 감싸 주면서 변호한다. 이런 사람의 본성은 무엇이냐? 이런 모습에서 그 사람의 본성을 완전히 꿰뚫어 볼 수 있지 않으냐? 그 사람의 모든 행위는 부당한 이익만 챙기고, 늘 어디서든 모두 거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그의 본성은 바로 이익만 꾀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는 어디서나 자신을 위하고, 이익이 없으면 서둘러 하지 않는데(원문: 無利不起早), 이 사람은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고 끝없이 탐욕스러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의 본성은 돈을 탐내고 사랑하며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본성을 대표하겠지? 어떤 사람들은 여자에게 반해 무슨 일을 하든 여자 생각만 하고, 어디를 가든 여자와 놀아난다. 미녀가 바로 그의 애완물이며, 그의 마음속에 여자의 위치가 높은 것이다. 그는 미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고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데, 마음속에 가득한 것은 여자뿐이다. 그렇다면 그의 본성은 무엇이냐? 그의 본성은 미녀를 좋아하고 여자를 숭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호색한이며 본성이 사악하고 탐욕스럽다. 이것이 그의 본성이 아니냐? 그의 이 방면의 표현은 탐욕이 본성이 된 것이다. 그는 어쩌다가 과오를 범한 것이 아니고 일반인보다 조금 나쁜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완전히 이런 것들에 점유되어 있으며, 그 사람의 본성과 실질은 이런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런 일들이 그의 본성의 유로가 된 것이다.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것은 시시각각 유로되고 있는데, 어떤 일을 하든 사람의 본성은 유로하게 된다. 사람은 범사에 자신의 속셈과 목적을 갖고 있다. 대접하든, 복음을 전하든 아니면 어떤 사역을 하든 부지중에 본성에 있는 것을 유로하게 된다. 본성은 사람의 생명이기에 사람은 살면서 모두 본성의 지배를 받는다. 본성의 유로는 결코 우연한 일시적인 표현이 아니라 완전히 그 사람의 실질을 대표한다. 사람의 뼛속에서, 핏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다 본성의 것을 대표하고, 그 사람의 생명을 대표한다. 어떤 사람은 미녀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돈을 좋아하며, 어떤 사람은 지위를 매우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와 자신의 형상을 매우 중요시하며, 어떤 사람은 어떤 우상을 매우 좋아하거나 숭상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매우 교만자대하면서 속으로는 누구에게도 불복하고 전력을 다해 지위를 추구하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관할하기 좋아하는데, 이런 등등의 각종 본성이 있다. 사람과 사람의 본성에는 바로 이런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 공통성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우리 또 이기적인 사람을 보자. 이기적인 것은 사람 본성의 것이며, 사람마다 모두 이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이기적인데, 매우 심각하다. 이것은 그의 본성을 대표한다. 사람에게는 다 이기적인 면이 있지만 거기에는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지내게 되면 그 사람을 보살펴 주고 배려해 주고 그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데, 매사에서 타인을 생각해 줄 줄 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르다. 그는 사람을 대접할 때 매우 이기적인데, 자기 식구들과는 맛있는 것을 먹다가도 형제자매들이 오면 작은 그릇에 맛없는 것을 내어 준다. 그리고 맛있는 것은 자녀나 남편, 자기 집안 사람 쪽에 놓는다. 형제자매들이 오면 바닥에서 자게 하면서도 친척이 찾아오면 아주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불편함이 없게 해 준다. 이런 사람은 전혀 남을 배려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을 자기 집에 묵게 해 주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아프거나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보지 못한 것처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전혀 남을 배려하거나 관심을 기울이는 법은 모르고 오로지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을 배려하는 것밖에 모른다. 이런 이기적인 본성으로 그는 다른 사람을 배려해 줄 줄 모른다는 것이 결정되는데, 다른 사람을 배려해 주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고 귀찮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른다’라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모르는데, 자기 가족은 어떻게 그렇게 잘 대해 줄까? 그렇게 빈틈없이 생각해 줄까?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언제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는 것이 적합한지는 어떻게 다 아는 것일까?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 사실 그 사람은 다 알고 있다. 그저 이기적일 뿐이다. 이것은 본성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여자는 전에 일시적인 과오가 있었는데, 그것으로 그녀를 음녀라고 할 수는 없다. 그와 반대로, 어디를 가나 일관적으로 마구 놀아나고 그야말로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도덕 윤리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사악한 사람이고 음녀의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무엇을 하든, 어떤 사역을 하든 다 자기의 본성을 유로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전도하는 기회를 틈타 음탕한 짓을 한다. 그러면 전도하지 않을 때는 그 짓을 하지 않을까? 여전히 남몰래 그 짓을 할 것이다. ‘복음을 전하러 다니지 않을 땐 그렇지 않겠죠?’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네가 알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본성이 그렇다. 억제하지 못한다. 속에 가득한 것은 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그 짓을 하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 설사 잠시 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환경이 허락되지 않았거나 적합한 사람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본성에 있는 것은 이렇다. 어떤 것으로도 제한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특히 옷을 좋아하고 멋내기를 좋아하는데, 겉치레가 특히 심하다. 그런 사람의 본성은 바로 허황한 것이다. 하루에 옷을 몇 번이나 갈아입는다. 또 누가 좋은 옷을 입거나 매우 이쁘게 꾸민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을 얻지 못하면 잠도 못 잔다. 돈을 빌리거나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는 그것을 꼭 얻으려고 할 것이다. 심지어 그것을 얻지 못하면 하나님을 믿을 마음도 없고, 예배 모임에도 가기 싫고, 하나님 말씀을 봐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 매일 머리 속에 그런 것이 가득 차 있는데, 마음은 이미 그런 것에 점유되었다. 매일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다. 이런 사람은 특히 허황한데 일반 사람보다 심하다. 이것이 바로 본성의 것이고 뼛속의 것이다. 본성의 것은 잠시 연약하여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관된 삶이라 어떻게 해도 모두 그런 비린내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하든 그 본성의 것을 가지고 있다. 설사 뚜렷하게 유로되지 않을 때가 있더라도 그 속에는 뒤섞임이 있다. 예를 들면, 궤사한 사람이 한순간은 말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라도 사실 그 말 속에는 또 말이 있는데, 여전히 궤사한 것이 뒤섞여 있다. 궤사한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궤사하게 노는데, 자기 가족과도 궤사하게 놀고 심지어 어린아이와도 궤사하게 논다. 네가 그런 사람을 아무리 진실하게 대해 줘도 그 사람은 너와 궤사하게 논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 본성의 진면모이다. 그런 사람은 궤사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항상 그렇다. 예를 들면, 성실한 사람도 궤사하게 말을 할 때가 있지만 평소에는 그래도 비교적 성실한 편이다. 일처리할 때도 비교적 실제적이고, 사람을 사귀어도 이익을 꾀하지 않으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도 일부러 시험하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그래도 비교적 진실하고 사람들과 마음을 털어놓고 교통할 수 있기에 다들 그 사람을 성실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궤사한 말을 좀 할 때가 있는데, 그런 것이 바로 패괴 성정의 유로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본성을 대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드시 사람의 본성에 대해 알아야 하는데, 어떤 것이 본성의 것이고, 어떤 것이 패괴 성정인지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이제 너희는 자신의 본성을 해부해 보아라.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말을 듣기 거북하게 하거나 교양 없이 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예절이 없거나 본분을 하면서 어떤 때에 뒤섞임이 있었다고 말하지, 자신의 본성이 어떤지, 인성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자신의 본성을 알 수 없다. 항상 감추면서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고, 스스로 깊이 파 보아야 한다. 파내지 않으면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하지 못하면 변화받지 못한다. 자신을 알려면 매우 엄격해야 하지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되고, 건성으로 얼렁뚱땅 넘어가서도 안 된다.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은 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면 곧 그런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무개가 어떤 사람이라고 하면 그것으로 그 사람의 본성을 가장 잘 증명한다. 그 사람이 어떤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사람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바로 사람의 생명이다. 사람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 사람과 많이 접촉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찰해야 한다. 그 사람에게 가장 두드러지는 것, 그 사람의 실질과 특징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면 그 사람의 본성 실질이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질이 어떤 부류이면 바로 그런 본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한 사람에 대해 도대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할 때, 이렇게 판단하면 비교적 정확하다. 한 사람의 실질이 어떤 것이면 본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본성이 있으면 곧 그런 사람이다. 예를 들면, 그 사람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 바로 특히 돈을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 본성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곱 글자로 요약하면 된다. 또 그 사람에게서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 바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인데, 늘 여자들과 놀아난다면 그 사람은 사악을 좋아하고, 사악이 그 사람의 본성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먹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술 몇 잔에 고기를 좀 주고 맛있는 음식을 좀 주면 어떤 일도 다 쉽게 처리된다. 그런 사람의 본성은 바로 탐식인데, 돼지와 같다. 사람마다 치명적인 부분이 있다. 사람의 삶은 시시각각 그런 것의 지배를 받고 있고, 그 속에는 그런 것이 뒤섞여 있으며, 다 그런 것을 위해 사는데, 그것이 곧 사람의 본성을 대표한다. 사람의 본성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치명적인 부분이 바로 사람의 본성이다. 어떤 사람은 인성도 괜찮고 겉으로도 큰 결함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가장 큰 특징은 나약한 것이다. 인생의 목표가 없고, 추구하는 것이 없으며, 흐리멍덩하다. 그런 사람은 너의 말에 조금만 상처를 받아도 넘어지는데, 언제 어떤 일로 소극적이 되고 심지어 믿지 않으려는 생각까지 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의 특성은 나약한 것인데, 무른 것이 본성이어서 부축해 일으켜 줄 수도 없다. 어떤 사람은 본성이 매우 정에 얽매이는 것이다. 그 사람이 매일 말하거나 일하거나 처세하는 것을 보면 전부 정에 얽매여 살고 있다. 그는 이 사람에게도 정이 있고 저 사람에게도 정이 있으며, 날마다 정으로 얽힌 일에 응대하며 범사에 정에 매여 살고 있다. 그 사람의 정이 얼마나 심한지 보라! 믿지 않는 남편이 죽어도 사흘씩 울다가 남편을 파묻으려고 하면 “안 돼요. 제 남편이란 말이에요.”라고 하는데, 죽은 사람에게도 정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은 정에 너무 얽매였다. 정이 그 사람의 치명적인 부분이고 최대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완전히 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고 망칠 수 있다. 정에 너무 심하게 얽매인 사람은 진리가 없고 일처리 원칙이 없으며 육체만 생각하면서 사는 어리석은 바보라는 것을 설명한다. 이 사람의 본성은 정을 매우 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정 변화를 추구하려면 본성을 인식해야 한다. “강산은 쉽게 바뀌어도 본성은 바뀌기가 어렵다”라고 본성이 너무 나쁘면 영원히 변화되지 못하고 하나님도 구원하지 않는다. 너는 본성이 변화될 수 있다고 여기지 말라. 성정 변화란 무엇을 말할까? 너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를 경력(역주: 체험)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심판과 형벌을 받고 각종 고난과 연단을 겪어 사람 안에 있는 사탄 독소가 정결케 되면, 이것을 성정 변화라고 한다. 만일 사람의 본성이 아주 나빠 악인이라면 하나님은 구원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령이 역사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과 같다. 만일 사람이 폐렴에 걸렸다면 치료가 가능하지만, 폐암에 걸렸다면 그 사람은 구제 불능이다. 하나님 집에서 말하는 성정 변화란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여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음으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신의 본성을 인식하고, 사람이 너무 깊이 패괴되었음을 인식하며, 사람의 그릇됨과 궤사함, 사람의 빈궁함과 가련함을 인식하게 되는 것인데, 결국에는 사람의 본성 실질을 인식하여 자신을 완전히 부인하고 배반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며, 범사에서 진리를 실행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고, 성정이 변화된 사람이다.

온 인류가 모두 사탄에게 패괴되어 사람의 본성을 놓고 말하면 사람은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에 순복할 수 있고 또한 진리도 받아들이고 진리를 얻어 성정이 변화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별로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냥 덩달아 믿기는 한다. 그에게 뭘 하라고 시키면 그대로 하기는 한다. 인성도 괜찮고, 어느 정도 화비하고 버리며 고생도 좀 할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사람도 굳게 설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성정은 변화되지 못한다. 그것은 그 사람이 진리를 별로 추구하지 않고 그저 도리를 깨닫는 것에만 만족하기 때문이다. 도리를 들어도 괜찮아하고 그대로 지키기도 하며, 도리를 알고서는 본분도 하고, 합당한 쪽으로 행하기도 하긴 하는데, 진리 방면에서는 참답게 대하지 않는다. 마음 상태가 흐지부지하여 시종일관 진리의 실질을 깨닫지 못한다. 이런 사람도 구원받을 수는 있다. 살아남을 수는 있지만 성정 변화는 있을 수 없다. 성정이 변화되려면 반드시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너에게 어떤 패괴 성정이 있든, 또는 너의 본성에 큰 붉은 용의 어떤 독소가 있든, 하나님이 말씀으로 드러내면 인정하고 순복하며, 두말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을 어떻게 하든, 그 말씀이 얼마나 마음을 찌르든, 어떤 단어를 사용하든, 진리이면 받아들이고 사실의 진상에 부합되면 인정하는 것이다. 무릇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깨달은 것이 얼마나 되든 순복해야 하는데, 성령이 깨우쳐 준 빛 비춤을 형제자매가 교통한다고 해도 받아들이고 순복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어느 정도 추구하면 진리를 얻고 성정이 변화될 수 있다.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설사 인성이 괜찮아 좋은 일도 하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할 수도 있고 뭘 버릴 수도 있지만 진리 면에서 항상 흐지부지하고 참답게 대하지 않기에 성정은 변화될 수 없다. 베드로를 다른 사도나 형제자매들과 비교하면 인성 방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지만 베드로에게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특별히 진리를 추구한 것이다. 예수가 어떻게 말해도 베드로는 마음을 다해 생각해 보았다. 예수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자 베드로는 사실대로 “저는 하늘의 아버지만 사랑했지 땅에 계신 주님은 사랑하지 않았나이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베드로는 ‘아, 이건 아닌 거 같아. 땅에 계신 하나님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고, 하늘에서든 땅에서든 하나님은 이 한 분뿐이 아니신가? 내가 하늘의 하나님만 사랑하면 실제적이지 않아! 땅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실제적이야!’라고 인식했다. 이것 보아라!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묵상하고 묵상하다가 예수가 했던 말씀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 그 말씀의 참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말씀이 육신 된 땅의 하나님을 사랑해야 실제적이라는 뜻이다. 막연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실제적이지 않고 현실적이지 않다. 실제적이고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리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에서 진리를 얻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보다시피, 베드로는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오로지 진리 추구하는 것을 중요시하였기에 결국 실제 하나님을 사랑하고 땅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매우 참답게 진리를 추구했다. 예수가 지적해 준 말씀마다 베드로는 마음으로 되새겼는데, 반 년씩, 일 년씩 혹은 몇 년씩 묵상하다 보면 성령이 깨우쳐 주어 하나님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진리에 진입하게 되었는데, 베드로는 진리에 진입하는 정도에 따라 생명 성정이 변화되고 새롭게 바뀌었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 영원히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글귀 도리는 네가 아무리 많이 말할지라도 여전히 글귀 도리이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는 진리, 길, 생명이다.”라고 말할 줄밖에 모르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면 아무리 많이 말해도 여전히 소용없다. 왜 그리스도는 진리, 길, 생명이라고 말할까? 너는 경력하여 인식하게 된 것을 말할 수 있느냐? 너는 진리ㆍ길ㆍ생명의 실제에 진입했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가 경력하고 인식해야 하는 것이지 글귀만 말할 줄 알아서는 쓸데없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진입한다면 자신을 알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자신을 알 수 없다. 진리가 있어야 분별력이 있고, 진리가 없으면 분별력이 없다. 진리가 있어야 통찰력이 있고, 진리가 없으면 통찰력이 없다. 진리가 있어야 자신을 알 수 있고, 진리가 없으면 자신을 알 수 없다. 진리가 있어야 성정이 변화될 수 있고, 진리가 없으면 성정이 변화될 수 없다. 진리가 있어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섬김을 할 수 있고, 진리가 없으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섬김을 하지 못한다. 진리가 있어야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고, 진리가 없으면 경배한다고 해도 그것은 종교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려면 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얻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얻는 것은 어떤 것이냐고 물을 것이다. 도리는 항상 말해도 진리를 얻지 못한다. 네가 글자 표면의 뜻만 교통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너는 하나님 말씀의 함의를 더듬어 내야 하고, 말씀의 근원과 얻고자 하는 효과가 무엇인지를 더듬어 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진리가 있고 내포된 뜻이 있으며, 말씀 속에는 빛이 있고 많은 것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네가 글자 표면의 뜻을 말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하나님이 “너희는 궤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성실한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은 “그거야 궤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성실한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닐까요?”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누가 “또 뭐가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여전히 “성실한 사람이 되고 궤사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거잖아요.”라고 말할 것이다. 계속해서 “또 뭐가 있어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이 두 가지죠.”라는 말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성실한 사람이 됩니까? 성실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로 어떤 면에서 나타납니까?”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성실한 사람은 솔직하게 말하고, 가식이 없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궤사한 사람은 어때요?” “궤사한 사람은 빙빙 돌려서 말해요. 빙빙 돌려서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거짓이 섞이지 않은 말을 하면 성실한 사람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네가 아무리 물어보아도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밖에 없다. 사람의 사유는 너무나 단순하다. 하나님은 성실한 사람에 대해 어떻게 말씀했는지 보자. 첫째, 성실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한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 말씀했을까? 이 말씀을 묵상해 보거라. 사람은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성실한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 하나님은 말씀에서 성실한 사람은 주로 이 두 가지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너는 하나님이 성실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씀의 내적 함의가 무엇인지, 도대체 무엇을 가리켜 말씀한 것인지, 성실한 사람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무엇인지 깨달아야 하는데, 이것에 대한 정의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성실한 사람에게는 어떤 표현들이 나타나는지, 하나님이 말씀한 궤사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성실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성실한 사람에게는 어떤 표현이 있는지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표현들을 가지고 다시 성실한 사람을 본다면, 너는 성실한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궤사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궤사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면 너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는데, 사람이 생각하는 성실한 사람과 궤사한 사람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궤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성실한 사람이 되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네가 참으로 하나님 말씀의 함의를 깨닫게 되면, 어떤 사람을 성실하다고 하는지, 어떤 사람을 궤사하다고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러면 너는 실행할 때 어떻게 실행하는 것이 확실히 성실한 사람의 표현인지 알게 되고, 성실한 사람이 되는 실행 길을 갖추게 되는데, 그러면 틀림없이 하나님 편에서 통과될 수 있다. 너는 이런 자신이 있느냐? 만일 네가 참으로 이 말씀을 깨닫고 실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다. 만일 네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면, 성실한 사람이 될 수 없고, 절대로 하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한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참으로 깨닫는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너는 ‘난 글자 표면적으로 다 해석할 줄 알아! 다른 사람들도 듣고는 다 좋다고 하며 엄지를 세우잖아! 그러면 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것은 아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빛 비춤도 좀 얻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 말씀의 진정한 함의도 더듬어 내어 하나님 말씀의 의의가 무엇인지, 최종적으로 어떤 효과가 있게 되는지에 대한 인식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을 다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나님 말씀에 대해 어느 정도 깨달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가 여간 간단치 않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글자 표면에서 그럴듯하게 해석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글자 표면에서 아무리 해석해도 그것은 사람의 상상과 사유이기에 쓸데없다! 하나님의 말씀 해석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깨달아야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깨닫는 것이 관건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할 때마다 절대로 두리뭉실하게 하고 끝내지 않는다. 그 속에는 다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도 틀림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명시된 것이 있는데, 아마 다른 방식으로 말씀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진리를 발표하는 방식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심오하여 사람의 사유 방식으로는 측량하기 어렵다. 각 방면의 진리에서 사람이 노력을 들이면 모두 완전한 뜻을 찾아낼 수 있다. 나머지 자세한 부분은 경력(역주: 체험)하는 가운데서 성령의 깨우침으로 구체적인 정형을 깨닫게 되면 완전히 보완되는 것이다. 한 방면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찾는 것이며, 다른 한 방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력하여 성령의 깨우침으로 하나님 말씀의 함의를 깨닫는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효과는 주로 이 두 방면에서 얻게 된다. 만약 네가 글자 표면이나 너의 사유와 상상으로 해석한다면, 설사 그럴듯하게 해석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참으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자칫하면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할 것이다. 그러면 더욱 큰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러므로 진리를 얻는 것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식할 때에 성령의 깨우침으로 얻는 것이라고 한다. 글자 표면으로 좀 깨닫거나 해석한다고 해서 진리를 얻은 것은 아니다. 만약 글자 표면으로 해석할 거면 성령의 깨우침이 왜 필요하겠느냐? 그저 어느 정도의 지식만 갖추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된다면 지식이 없는 사람은 곤란해지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머리로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주로 성령의 깨우침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인식이 있게 된다. 이것이 진리를 얻는 과정이다.

사람의 본성을 인식하는 데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사람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에서 그 사람의 본성을 보는 것이다. 마귀에게 속하는 사람은 모두 자신을 위해 살고 있다. 그 사람의 인생에서 그의 좌우명은 주로 사탄의 말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라는 것과 같은 것인데, 모두 세상의 마왕, 위인, 철학자들의 말이 사람의 생명이 된 것이다. 특히, 중국 사람들이 ‘성인’으로 떠받드는 공자의 말은 대부분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 그리고 불교나 도교의 명언, 저명한 인물이 늘 말하는 그런 명언은 모두 사탄 철학과 사탄 본성의 종합이자 사탄 본성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이고 해석이다. 인류의 심령에 주입된 그런 독소는 다 사탄에게서 온 것이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전혀 없다. 그런 허튼소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서로 적대되는 것인데, 이것으로 모든 긍정적인 것의 실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사람을 해치는 모든 부정적인 것은 다 사탄에게서 오는 것임을 완전히 분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인생관과 가치관으로부터 그 사람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와 그 사람이 누구에게 속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탄은 국가 정부와 유명 인사나 위인의 교육과 영향으로 사람을 패괴시키는데, 그들의 허튼소리가 사람의 생명이 되고 본성이 되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라는 말은 사탄의 명언인데, 이미 모든 사람에게 침투되어 사람의 생명이 되었다. 그리고 처세 철학에서 온 말도 마찬가지이다. 사탄은 각 나라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라는 것으로 사람을 교육하여 인류를 치명적인 재난의 망망대해에 빠지게 한다. 그리하여 결국 사람은 사탄을 섬긴 탓에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어 하나님께 훼멸된다. 사회에서 수십 년 동안 분투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당신은 세상에서 그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는데 주로 어떤 명언으로 살았어요?”라고 물으면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자면, ‘관직에 있으면서 뇌물 준 사람을 해하지 말고, 아부 없이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거예요.”라고 할 것이다. 이 말이 그 사람의 본성을 대표하지 않느냐? 한자리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이 그의 본성이 되었고, 그의 생명이 되었다. 사람의 삶, 일처리, 사람의 처세에는 또 많은 사탄의 독소가 들어 있어 거의 다 진리가 전혀 없는데, 예를 들면 사람의 처세 철학, 사람의 성공 좌우명, 일처리 수단 등이 있다. 사람마다 큰 붉은 용의 독소로 가득한데, 그것은 다 사탄에게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뼛속에, 핏속에 흐르는 것은 전부 사탄의 것이다. 세상에서 성취한 사람이라면 다 자신만의 성공의 길과 비결이 있다. 그 비결이 더욱 그 사람의 본성을 대표하지 않느냐? 그런 자들의 본성은 너무 교활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에서 그렇게 큰 자리에 앉고 그렇게 큰일을 하게 된 것은 너무나 교활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본성은 너무나 음험하고 악독하여 무슨 짓이든 다 저지를 수 있다. 사람은 사탄에게 너무 깊이 패괴되어 사람마다 핏속에는 사탄의 독소가 흐르고 있다. 보다시피, 사람의 본성은 다 패괴되어 사악하고 반동적이며, 다 사탄의 철학으로 가득 차 있고 푹 젖어 있어 완전히 하나님을 배반하는 본성이 된 것이다. 이렇게 사람의 본성을 해부한다면 모두가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고 또 진리가 있어야 광명 속에서 사는 것이고, 사람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바뀌어야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이다. 또한 사람은 인생의 목표가 있고 진리로 처신하며,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면서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평안하고 밝아지는 감을 느껴야 하고, 마음에 흑암이 전혀 없고 완전히 해방받아 자유롭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인생을 얻게 되고, 진리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네게 있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인데, 온 우주 만물의 주재자인 지극히 높은 하나님이 너를 진정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면, 즉 네가 진정한 인생을 살고 하나님의 칭찬을 받는다면, 이것은 가장 의의 있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러면 바로 진리가 있는 사람인 것이다. 오늘날, 사탄이 관할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수천 년의 역사(歷史)를 보면 인류 중에 인생을 얻은 자가 누가 있느냐? 아무도 얻지 못했다. 왜 얻지 못했을까? 그들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생의 근본과 생존의 바탕은 완전히 사탄에게서 온 것이고 사탄에게서 받아 온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대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부류이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인생이란 것이 없다. 비록 그들이 자신의 명성이 아름답게 길이길이 대대로 전해지고, 역사에 남아 변치 않기를 바랄지라도 그것은 다 허튼소리이다. 사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 저주받아 영원히 환생할 수 없다. 명인, 명언 따위는 하나님 편에서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은 후에 다 18층 지옥에서 징벌받는다. 오직 하나님만이 진리이고,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주관하고 모든 것을 주재하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으면 진리를 얻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면 너는 심령 깊은 곳이 밝아지고 편해지며 더없이 즐거울 것이고, 참으로 인생을 얻었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세상의 과학자들이 얼마나 큰 과학 연구 성과를 이루었든 임종 시에는 빈손이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과 뉴턴도 그렇게 많은 지식이 있었지만 공허함을 느낀 것은 바로 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다 하나님을 믿은 크리스천이었고 다 천주교의 핍박을 받았지만 진리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좋다는 것만 알고 있었고, 과학 연구를 하면서 하나님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것만 발견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100% 인정하고 천지 만물은 하나님이 만든 것임을 100% 인정하는 데에만 그쳤고, 과학 지식만 추구하고 하나님을 알려고 추구하지 않았기에 진리를 얻지 못했고 진정한 인생을 얻지 못했다. 오늘날 너희가 가고 있는 길은 그들의 길이 아니다. 너희가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께 순복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는지, 어떻게 의의 있는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을 갖추는 것이기에 그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록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긴 했지만 진리는 얻지 못하였다. 지금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너희에게 각 방면의 진리를 모두 말씀하고 진리 생명의 도를 베풀어 주었는데, 그래도 너희가 진리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우매한 것이다. 지금 너희가 아직 멀었다고 느끼고, 진리가 너무 적고 안이 충실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진입이 너무 얕고, 아직 그렇게 깊은 경력이 없기 때문이다. 네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입하게 되면 힘이 생기는데, 온몸에 무궁한 힘이 생긴다. 그때가 되면 너는 안이 점점 밝아지고, 길은 걸을수록 환해지는 느낌이 들 것이다.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 정상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였고, 여전히 아주 공허하고 힘이 없음을 느껴 어떤 때는 심지어 사람이 사는 게 다 고통스럽기만 하고 전부 헛되다는 느낌이 들고 더 나아가 죽을 생각까지 한다! 사람 마음에 이상(異象)이 없으면 이렇다. 사람이 진리를 얻지 못해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했으므로 안에는 별로 누림이 없는 것이다. 특히, 너희는 모두 핍박으로 인해 있는 집에도 가지 못하고, 고난을 겪으니 죽고 싶은 생각도 들고 살고 싶어 하지 않는데, 그것은 육체의 연약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안에 누림이 있어야지! 은혜시대에도 성령이 사람에게 평안과 희락을 베풀어 주셨는데, 지금은 평안과 희락이 너무나 적어 은혜시대와 같은 누림이 없어! 지금 하나님을 믿는 건 너무나 괴로워.’라고 한다. 너는 그저 육체적 누림이 무엇보다 좋다는 것만 알 뿐, 하나님이 오늘날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구나. 하나님은 사람의 성정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람의 육체를 고난받게 하는 것이다. 육체는 고난받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으므로 네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진리도 얻지 못했는데 너는 눈을 감을 수 있겠느냐? 지금은 주요하게 아직 진리를 얻지 못해 생명이 없는 것이다. 지금은 한창 구원받기를 추구하는 과정이므로 이 기간에는 계속하여 고난을 좀 받아야 한다. 지금은 하늘 아래에 사는 사람이 다 시련을 받고 있고 하나님마저도 고난받고 있는데, 너희라고 고난받지 않겠느냐? 대재난의 연단이 없으면 참된 믿음이 있을 수 없고, 진리 생명도 얻지 못할 것이다. 시련과 연단이 없으면 안 된다. 베드로를 보아라, 마지막(53세 이후)에 7년의 시련을 받았다. 그는 그 7년 동안 수백 번의 시련을 겪었는데, 3년을 2번 거치고 1년을 더해서야 생명을 얻게 되었고 성정이 변화되었다. 그러므로 참으로 진리를 얻고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생기게 될 때가 되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으면 여한으로 남을 것이고 평생 후회할 것인데, 땅을 치며 후회할 것이다. 사람에게 진리가 있으면 ‘아직은 죽을 수 없어. 그래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제대로 살아야 해. 한 번쯤은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지.’라는 이런 심지를 세우게 되며, 다시는 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죽음이 너를 위협할 때 너는 “하나님,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당신을 알지도 못했습니다! 당신의 사랑에 보답하지도 못했습니다. 전 당신을 제대로 알고 난 후에 죽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 너희는 이 정도가 되었느냐? 아직 안 되겠지? 어떤 사람에게는 가정의 고통이 임하고, 어떤 사람은 혼인의 고통을 겪고, 어떤 사람은 정착할 곳도 없고 지낼 곳도 없다. 어디를 가든 다 남의 집에서 지내야 하므로 자기 집처럼 자유를 누리려고 해도 허락되지 않는다. 남의 집이기에 마음이 고통스럽다. 지금 너희에게 임한 고통이 바로 하나님이 받는 고통이 아니냐? 너희는 하나님과 함께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사람을 동반하여 고통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냐? 오늘날, 너희는 다 그리스도의 환난과 그리스도의 나라와 인내에 동참해야 최후에 영광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은 의의가 있다. 그렇지 않으냐? 네게 심지가 없으면 안 된다. 너는 오늘날, 고통받는 의의가 무엇인지, 오늘날 왜 이런 고통을 받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네가 여기에서 진리를 좀 찾고 하나님의 뜻을 좀 깨닫게 되면 고통받을 심지를 세우게 된다. 네가 하나님의 뜻은 깨닫지 못하고 그저 고통받는 것만 생각한다면, 생각할수록 더욱 괴로울 것이다. 그러면 문제가 되는데, 죽음의 시달림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진리를 깨달았다면 ‘난 아직 살 날이 많아! 내가 왜 죽어? 난 아직 진리를 얻지도 못했잖아! 하나님을 위해 제대로 화비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증거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을 한 후에는 어떻게 죽든 상관없어. 그렇게 죽는다면 삶에 만족할 거야! 지금은 다른 사람이 죽겠다고 해도 난 죽지 않을 거야! 굳세게 살아갈 거야.’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런 것들을 다 꿰뚫어 보아야 하고, 이런 일들에서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진리가 있으면 에너지가 생기고, 온몸에 무궁한 힘이 넘치며, 심지가 생기지만, 진리가 없으면 쭉쩡이다. 진리가 있으면 굳세고 담대해지며 아무리 고생을 해도 힘든 줄 모른다. 너희가 받는 그 고난이 다 무엇이겠느냐? 하나님은 성육신하고도 계속 고난받고 있지 않느냐! 너희는 사탄에게 패괴되어 하나님을 배반하는 본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다 부지중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많은 일들을 하였으니 당연히 심판과 형벌을 받아야 한다. 사람이 병에 걸려 치료를 받을 때에도 아픔을 무서워하면 안 되는데, 너희는 패괴 성정이 변화받고 생명을 얻으려고 하면서도 고통을 받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너희의 고통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이고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고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너희가 받는 고통은 기껏해야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좀 수고하며 사역하거나 어떤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서 연단을 좀 받고, 어떤 때에 아무리 해도 자신의 패괴가 변화되지 않는 것을 보게 되면 괴로워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패괴 본성 때문에 고초를 좀 겪게 되고, 어떤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깨닫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마음이 찔려 괴롭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연단의 고통을 좀 받게 되거나 사역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주 실수하여 스스로를 책망하며, 사역을 잘하지 못하는 못난 자신을 미워하는 것들이다. 그저 다 이런 일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어떤 때 다른 사람은 진보가 보이는데 자신은 매우 더디고, 또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도 너무 느리고 받는 빛 비춤도 아주 적은 것을 보게 되는데, 이런 일 때문에도 고통을 좀 받는다. 이런 고통을 제외하고 또 어떤 고통이 있느냐? 너희에게 어떤 중노동을 하라는 것도 없고, 너희를 때리고 욕하는 상사나 사장도 없으며, 누가 너희를 노예로 삼아 부려 먹지도 않는다. 이런 고통은 다 없지 않으냐? 사실 그런 고통은 다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가 깊이 생각해 보아라. 그렇지 않으냐? 어떤 때에는 확실히 환경적으로 위협을 좀 받아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안절부절 못하며 두려움 속에 살게 되어 고통을 좀 받는다. 너희는 자신이 가정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는 의의가 무엇인지,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만약 그것이 진리를 추구하고 생명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며, 그와 동시에 본분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완전히 정의로운 것이고 긍정적인 것이며 천경지의이다. 그러면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것이고, 가정이 어떻든지 다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이 의의를 네가 분명히 알게 된다면 후회가 없을 것이고 소극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화비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의도 없으니 빨리 돌아가야 한다. 이런 것을 꿰뚫어 보면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너희는 모두 시련의 고통을 좀 경력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은 진리를 좀 갖추었지만 어떤 사람은 진리가 없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깨닫고 또 어떤 사람은 저렇게 깨닫는다. 네가 어떻게 깨달았든, 너에게 진리가 있고 네 깨달음이 옳은 것이면 네가 받은 고난이 의의 있고 가치 있으며, 너는 심지가 있고 끝까지 갈 수 있다. 만약 너의 깨달음에 진리는 없고 사람의 관념과 상상만 있다면 네가 받는 고난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것은 네가 진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범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모든 일에서 진리를 찾고 구해야 한다. 밥 먹고 옷 입는 일과 개인 생활에서 너는 어떻게 진리를 찾고 구할 것이냐? 거기에는 진리가 없겠느냐? 어떤 사람은 “어쨌든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좋죠. 못 먹고 못 입으면 어디까지나 손해인 거죠.”라고 한다. 네가 그것을 이런 식으로 본다면 진리가 있는 것일까? 진리가 없다! 사람이 사는 데에 정말로 잘 먹고 잘 입는 것이 중요할까?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른 말로,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진리가 있다면, 그 사람의 모든 행위는 다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만족게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무리 못 먹고 못 입어도 그의 삶은 가치 있고 하나님 편에서 칭찬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가장 의의 있는 일이 아니겠느냐? 입는 것은 주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를 구할 때에는 그래도 잘 입는 게 좋죠.”라고 하지만 그것은 모를 일이다. 네가 대상자를 만났는데, 잘생기고 멋지다. 그런데 네가 좋은 옷을 입고 나가다 보니 네가 마음에 들어 그가 너를 취했다고 하자. 하지만 그 사람이 마귀라면 너는 망하게 된다. 마귀를 만났는데, 네가 마침 해진 옷을 입고 밀짚 모자를 쓰고 갔더니 너를 마음에 안 들어 해 차버렸다면 너는 재난을 면하게 되지 않겠느냐? 좋은 옷을 입는다고 꼭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길을 가게 되면 좋은 옷을 입어도 저주를 받아야 한다. 안 좋은 옷을 입어도 진리만 있다면 여전히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배우자를 구할 때, 하나님이 뜻이 같고 목표가 같은 사람을 예비해 주어 둘 다 마음이 착하고 서로 사랑한다면 얼마나 축복을 받는 일이겠느냐? 그러므로 잘 먹고 잘 입어야 진리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먹고 입는 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는 찾고 구해 볼 진리가 없을까? 여기에도 역시 찾고 구할 진리가 있다. 본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는 더욱 찾고 구해 볼 진리가 있다. 하나님의 부탁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이것은 심각한 일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겨 준 부탁을 네가 완성하지 못하면, 너는 하나님 앞에서 살 자격도 없고 마땅히 징벌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겨 준 부탁은 천경지의이므로 완수해야 한다. 그것은 사람의 최고 직책이고, 생명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부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가장 심하게 배반하는 것이다. 그러면 유다보다 더 비참할 것이고 저주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탁을 맡겨 준 것은 하나님이 높여 준 것이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심지어 생명을 버려서라도 하나님의 부탁은 완수해야 한다. 보아라, 여기에는 더더욱 찾고 구해야 할 진리가 있다.

성정 변화는 진리를 찾고 구하는 것과 매우 크게 관련된다.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을 어떤 식으로 보고 대해야 하는지 하는 여기에 대한 진리를 네가 깨닫는다면 너의 인생관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겠느냐? 여기에는 더욱더 찾고 구해야 할 진리가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어떤 진리가 있는지, 사람은 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의는 무엇인지 등,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리에 대해 분명하게 깨달아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좀 있으면 그것은 진정한 인생을 가진 것이고, 그런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이다. 범사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는 사람은 생명이 매우 빨리 자라고 성정도 변화될 수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바로 범사에서 진리를 찾고 구하는 사람이다. 만약 사람이 모든 일에서 관념에 따라 도리에 따라 규례를 지킨다면, 아무런 발전이 없을 것이고 영원히 진리가 없을 것이며, 그런 사람은 조만간 도태될 물건짝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가장 혐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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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③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④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⑤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⑥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천벌을 받는다: 중국 상용어로 자신을 위해 살라는 뜻. 이기적인 것을 정당화하는 데에 쓰는 말.

⑦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⑧천경지의(天經地義): 하늘이 정하고 땅이 받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나 법칙을 뜻한다. 천경지위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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