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목차

제33편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어떻게 알 것인가

사람은 부류가 있는데, 그것은 영에 따라 나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영이고, 예정되고 선택된 것인데, 사람의 영에는 예정되고 선택된 요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영이 없고 뒤섞여 들어온 마귀인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예정하고 선택한 자가 아니기에 들어와도 구원받을 수 없고, 나중에 다시 귀신에게 끌려가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또는 받아들인 후에 어떤 길을 가는지, 변화될 수 있는지 하는 것은 사람 내면의 본성에 달렸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치우친 길로 가게 되는데, 그가 그런 부류에 속하고 변화되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으로 결정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바른길을 가지 않았기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것인데, 그가 돌아서면 성령이 다시 역사할 수 있겠지만 계속 돌아서지 않으면 완전히 끝나게 된다. 여러 가지 상황이 다 있다. 도대체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해하느냐? 사람은 이 공의로움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의인이 하나님께 축복받고 악인이 하나님께 저주받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다. 맞지? 맞느냐 맞지 않으냐? 내가 다시 너희에게 묻겠다. 의인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이 의인을 축복해 주지 않으며, 악인이 도리어 재산이 가득하고 자녀가 많고 모든 것이 형통하고 순조롭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맞느냐? 맞다!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까? 하나님은 상선벌악하고 각 사람이 행한 것에 따라 보응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맞다, 그렇지? 하지만 지금 이런 일도 있다. 즉,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오히려 격살당하거나 하나님께 저주받고, 또는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전혀 축복해 주지 않고 외면하고, 아무리 경배해도 상대하지 않으며, 악인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축복해 주지도 않고 징벌하지도 않지만 오히려 재산이 가득하고 자녀가 많으며, 또한 모든 것이 형통하고 순조로운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네요, 우리는 그분을 경배해도 축복을 받지 못하는데, 그분을 경배하지 않고 대적하는 악인은 오히려 모든 것이 우리보다 좋고 높으니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네요!”라고 말한다. 너희는 이 일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방금 내가 예를 두 개 들었는데, 어느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설명하느냐? 어떤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공의입니다!”라고 말한다. 왜 그렇게 말하겠느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사람의 인식에는 다 오차가 있다. 사람의 인식은 다 사람 사유의 관점, 매매 거래의 관점, 또는 선과 악의 관점, 옳고 그름의 관점, 논리의 관점에서 생긴 것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아간다면 하나님과 합할 수 없는데,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망할 것이다. 어떤 바보 같은 거지가 하나님만 경배하는데 하나님이 그를 상대하지도 않고 축복해 주지도 않는다면, 너희는 아마 ‘내세에서는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지 않으실지라도 영세에서는 꼭 축복해 주시고 그에게 만 배로 베풀어 주실 거야. 그러면 하나님은 여전히 공의롭지 않은가? 어떤 부자가 백 배의 축복을 누리다가 영세에 가서는 멸망된다면, 이것도 하나님의 공의가 아닌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도대체 어떻게 인식해야 하겠느냐?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하는 것으로 말할 때, 만일 하나님이 은혜시대까지 역사하고 마지막 이 단계 사역을 하지 않고 사람을 다 멸한다면, 하나님께 사랑이 있느냐? 만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유황불 못에 던져지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하나님이 있는지도 모르는 자를 하나님이 생존하게 했다면,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느냐?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을까? 사람이 말하는 것은 다 도리상의 인식이다. 현실을 접하면 사람은 모두 어리둥절해진다. 왜 하나님께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공의롭다고 말하겠느냐? 이 일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사람의 관념대로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이라면, 악인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고, 악을 행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공의롭기 때문에 다 좋은 결과를 얻고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얻어야 할 것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인 듯하다. 사람은 얻어야 할 그 몫을 받아야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라고 말한다. 만약 그 몫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너는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말할 것이냐? 만일 이 시대의 사람이 책에 기록된 내용을 보고, 하나님이 지난 시대에 인류를 만드셨는데 몇천 년이 지나 인류가 형편없이 *패괴되었기 때문에 구원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사람을 훼멸하셨다고 말하면, 너는 그 일을 어떻게 보겠느냐? 하나님께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지난 시대에 하나님이 사람을 훼멸했으면,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이 없다고 여긴다. 하나님을 알아감에 있어, 인류가 일을 보는 관점으로 하나님이 어떠어떠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인류가 일을 보는 관점에는 진리가 없다. 너는 마땅히 하나님의 실질이 무엇이고 성품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행한 것과 처리한 일의 외적인 현상으로만 하나님께 어떤 실질이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인류 자체가 이미 사탄에게 패괴되어 자신이 어떤 성질의 존재인지, 패괴된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를 전혀 모른다. 욥을 보아라. 욥이 의인이어서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공의이다. 욥이 시련을 겪을 때에 사탄이 여호와 하나님과 내기를 걸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당신을 경배하리이까? 당신이 욥에게 너무 많이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 아니니이까? 만약 당신이 욥의 모든 것을 빼앗으면 그가 계속 당신을 경배하겠나이까?”, 여호와 하나님은 사탄에게 “네가 마음대로 하되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탄이 바로 욥에게로 갔고, 욥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빼앗기고 아들딸도 다 잃게 되었다. 욥이 시련을 겪게 된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 성품이 있지 않으냐? 있다! 어디에 있느냐? 분명하게 말할 수 없겠지? 네가 의인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너를 시련하여 하나님을 위해 증거하게 할 권리가 있다. 하나님의 성품은 공의롭기에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한다. 의인이 견딜 수 있다고 해서 시련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고, 의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보호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너를 시련할 권리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 성품의 유로(역주: 흘러나옴)이다. 나중에 욥은 시련을 다 겪은 후에 여호와를 위해 증거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에게 그전보다 더 많이, 갑절로, 더 좋게 축복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바람 속에서 욥에게 나타나 말씀하였는데, 욥은 마치 얼굴을 맞대고 여호와를 본 듯하였다. 그것이 욥에게 준 축복이 아니냐?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럼 그와 반대라면 어떠하겠느냐? 욥이 시련을 겪은 후에 여호와가 욥이 이미 하나님을 위해 사탄 앞에서 증거하여 사탄을 수치스럽게 한 것을 보고도 외면하고 상대하지 않고, 욥이 그 후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면 여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을까? 욥이 시련을 다 겪은 후에 축복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여호와가 욥에게 나타났든 나타나지 않았든, 거기에는 모두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운 뜻이 있다. 욥에게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공의이고, 욥에게 나타나지 않아도 역시 하나님의 공의이다. 너 같은 피조물이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에게 요구하느냐? 사람은 하나님에게 요구할 자격이 없다.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은 가장 이지적이지 못한 일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해야 하면 그것을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을 권리도 있고, 스스로 그런 일을 처리할 권리도 있다. 하나님 자신의 성품은 공의롭다. 공의란 결코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처럼 공평하고 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네가 일을 얼마 하면 그만큼의 대가를 주고, 네가 일을 얼마 하면 그만큼의 돈을 주는 것이 공의가 아니다. 너는 일을 나누어 할 때 노동에 따라 분배하고, 지불한 것만큼 얻는 것이 바로 공의라고 여긴다. 가령 욥이 하나님을 위해 간증을 다 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멸해도 하나님은 공의롭다. 왜 공의롭다고 하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해도 공의롭다는 것인데, 왜 그렇게 말하겠느냐? 공의란 이런 것이다. 사람이 보기에 관념에 부합되면 그것을 공의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아주 쉽다. 만일 관념에 부합되지 않고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라면 공의라고 말하기 아주 힘들어 한다. 만일 그때 욥을 멸하였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공의롭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어떤 사람이 말한다고 해도 억지로 “여호와 하나님은 괜찮은 분이세요……”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 사람이 패괴되었든 패괴되지 않았든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멸망된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멸할 때 사람에게 그 이치를 분명하게 말해 줘야 하느냐? 무엇을 근거로 사람을 멸한다고 설명해 주어야 하느냐? 필요 없겠지? 사람을 멸하고 멸하지 않는 것을 사람이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에 근거할 필요가 있느냐? 그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보기에 패괴된 사람을 어떻게 처리하든, 하나님이 어떻게 하든, 그것은 다 적합하고 거기에는 다 하나님의 안배가 있다. 네가 간증을 다 한 다음 쓸모가 없고 하나님의 눈에 거슬려 너를 멸한다면, 그것은 공의가 아니냐? 공의이다. 비록 네가 지금 사실적으로는 알기 어렵겠지만 도리상으로는 알고 있어야 한다. 말해 보아라,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냐? 사탄을 남겨 두면? 감히 말하지 못하겠지? 어찌하여 공의로운 것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실질이 공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는 일을 사람이 쉽게 알지는 못하겠지만, 하나님이 하는 것은 다 공의롭다. 여기에는 틀린 것이 없다. 다만 사람이 알지 못할 뿐이다. 하나님이 베드로를 사탄에게 넘겨 줄 때 베드로는 어떻게 말했느냐? “당신이 하시는 일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지만 그 속에는 모두 당신의 아름다운 뜻이 있고, 공의가 있나이다. 제가 어찌 당신의 지혜로운 행사로 말미암아 찬미하지 않으리이까?” 지금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탄을 멸하지 않은 것은 인류에게 사탄이 어떻게 사람을 패괴시켰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는지를 보게 하려는 것이고, 마지막에 가서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된 정도로 인해 사탄이 사람을 패괴시킨, 하늘에 사무치는 죄악을 보게 될 때에 하나님이 그것을 멸하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 하고, 그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있음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매사는 다 공의롭다. 비록 사람이 발견할 수 없을지라도 함부로 논단해서는 안 되고, 부당한 것처럼 보이거나 관념이 있는 일로 하나님이 공의롭지 못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가장 이지가 없는 행실이다. 방금 부정적인 예를 들어 너희에게 좀 분별하도록 하였는데, 너희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책을 태워 버려 직접 징벌을 받았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정죄하여 역시 징벌을 받았는데, 이런 사례는 아주 많다. 새 신자가 이런 일을 들으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 관념이 생기는데, 하나님은 네가 무지몽매한 것을 보고 너를 상대하지 않는다. 너는 하나님이 모른다고 여기느냐? 오래된 신자가 그러면 안 된다. 수년간 함께 지내고 수년간 따랐다고 해도 안 된다. 새 신자가 교만하고 자고자대한다면 상대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스스로 자신을 알게 할 것이다. 만일 네가 여러 해 동안 따랐는데도 여전히 그런 관념을 고수하면서 내려놓지 않고, 조소하고 풍자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이며, 관념을 도처에 퍼뜨린다면 보응을 받게 할 것이다. 어떤 일에서는 사람이 무지몽매하기에 용서한다. 하지만 네가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하고, 아무리 말해 주어도 듣지 않는다면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너는 하나님께 사람을 관용하는 면이 있다는 것만 아는데, 하나님께는 사람의 범함을 용납하지 않는 면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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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