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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편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 베드로의 길을 가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진리가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 진리가 없는지, 어떤 사람들이 하는 말에 진리가 있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진리인지 말하라고 하면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의 관점은 맞습니다. 저 사람이 하는 말은 실제적인 인식이고 체험에서 온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그 말을 듣고 알게 된다. 지금 너희 같은 새 신자에게 실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너희는 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누구의 말이 실제인지, 누구의 말이 도리인지 조차도 분별하지 못한다. 이것은 너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체험이 없는 것이다. 오래 믿은 사람들을 보아라, 그들은 비록 특정한 고등 수법을 쓰는 자들이 미혹하면 잘 간파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그들이 하는 말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아차릴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의 말이 도리인지, 어떤 사람들의 말이 실제인지는 알 수 있다. 너희는 아직 그 수준에도 접근하지 못했다. 이것은 너희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니, 이것으로 소극적이 되지 말라. 이것은 정상적으로 체험하는 과정이고, 누구나 다 이 과정이 있어야 한다. 사람은 다 몇 년씩은 양육받고, 목양받고, 듣고, 느끼고, 체험하고, 겪는 과정을 거쳐야만 점차 생명 체험에 대해 분명히 알게 되고, 입문하게 되고, 눈이 트이게 된다. 사람이 도리만 말할 줄 알고 도리만 들을 줄 알며, 실제적인 것은 느끼지 못하고 분별하지도 못한다면 눈이 트이지 않은 것이다. 아직도 트이지 않은 것이다! 눈이 트이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이냐? 입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게 현실이다. 진리에 입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 너희를 보면, 아마 교회에서 형제자매들을 양육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이끌어 줄 수도 있으며, 또한 헌금을 하거나 헌신할 수도 있고, 하나님 집에서 사무적인 일들을 처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너희에게 꼭 실제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에 대해 꼭 분별이 있다고 할 수도, 글귀 도리에 대해 꼭 분별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너희는 이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날 진짜 도리를 굉장히 잘 말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너희는 아마 그 사람을 높이 받들고, 진짜 실제가 있으면서도 조용하게 잠자코 있는 사람은 짓밟을지도 모른다. 너희가 일단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되면 자신의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의 분량에 대해 말하자면, 실제에 대한 인식, 자신에 대한 인식, 그리고 진리에 대한 체험, 하나님에 대한 인식, 이런 것은 순전히 다 체험하여 얻게 되는 것이고, 하루하루 쌓아 온 것이다. 이런 것은 어디에서 배우거나 많이 들은 후 ‘난 이제 있어! 듣기도 했고, 기억도 했어. 난 지식도 많아, 난 대학생이야, 난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야. 난 무엇을 연구하는 사람이야, 들으면 바로 알 수 있어.’라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다른 철학이나 정치 혹은 문학 분야를 들었다면 아마 너희가 배운 지식을 활용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무용지물이다! 여기에서는 너희가 배운 지식이 그저 진리의 그런 문장이나 표현법에서는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 좀 나을 수 있겠지만, 진리의 체험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높지 못하다. 이것에서는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너희도 인정하겠지? 너희는 생명 체험을 서로 나누지 않다 보니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너희는 지식이 좀 있고 지금 인솔자라는 우위가 있다 보니 사역을 하면서 늘 위에 있는 오래 믿은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구체적인 사역들을 하고 있어 조금 빠를 수는 있다. 예전부터 오래 믿어 온 사람들보다는 조금 빠를 수 있다. 실제에 대한 인식, 어떤 진리나 자신에 대한 인식이 좀 빠를 수는 있다. 또 아마 굽은 길을 가지 않아도 될 수 있고, 또 얼마의 좌절을 맛볼 수도 있다. 사람마다 환경이 다르고 조건도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좌절을 겪어야만 큰 변화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너무 큰 좌절을 겪지 않아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발견하고 자신의 패괴를 발견한다. 주변의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은 비교적 빠른 것이다.

그럼 너희는 이제 무엇을 중시해야 하느냐? 만약 뛰어다니는 바깥 사역만 중시한다면 지체하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가장 관건적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 자라는 것이다. 너희가 단지 도리와 사역 능력을 갖추거나, 무엇을 할 때 수단이 뛰어나고 지혜가 있는 이런 것은 다 부차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것이 없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주된 것은 진리에 대해 확실히 알고, 진리에 대해 체험이 있고 인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순복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게 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믿을수록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소원해지고,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지고, 진리와 충돌하는 부분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너의 믿음에 진보가 없고 성령의 역사가 없으며 혼자 치우친 길로 가고 극단으로 나아갔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한동안 믿어 실제에 대한 인식이 있고, 자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식이 있고, 실제적인 것도 스스로 더듬을 수 있는 것 같으면, 너는 영이 통하는 사람이고, 눈이 트이고 정상 궤도에 들어섰음을 증명한다. 지금 오래 믿은 사람들을 보면, 따른 지 2~3년이 되었어도 아직 이런 정도에 근접조차 못했다. 여전히 설치면서 복받을 준비를 하고, 사역이 끝나면 복을 누릴 준비를 하고 있다. 생명 체험에 대한 일에는 근접하지도 못했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전혀 조화롭지 못하다. 같이 지낸 시간이 짧으면 그나마 마지못해 순복하기도 하고 관념이 생겨도 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데, 같이 지낸 시간이 길어져서 일단 맞받아 대꾸하는 정도가 되면 멸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사람마다 위험한 낭떠러지에 있는데, 그것은 정말 큰일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바르게 간다면 제대로 믿은 것이어서 복을 받게 되지만, 바르게 가지 못하고 잘못된 길, 굽은 길을 간다면, 좋은 방향으로 가지 않고 좋은 방향으로 노력하지도 않는다면, 멸망되고 징벌받게 된다.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사람에게는 두 갈래 길밖에 없다. 하나는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맞서는 것이다. 이런 두 갈래 길이다. ‘난 하나님과 맞서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 순복하지도 않았어.’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았고, 진정한 인식이 없다면 거역만 있고 대적만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대적하지 않고 대놓고 총칼을 겨누면서 맞서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거역하게 되어 있다. 혹시 네게 무엇을 시키지 않았을 때에는 네가 하나님을 매우 사랑하는 것 같고 하나님과 정말 가깝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무엇을 하라고 시키면 네게 있는 패역, 교만, 독선, 사탄의 것들이 유로(역주: 흘러나옴)되는 것이다. 일단 이런 것들이 유로되었다면 네가 거역한 사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네가 만약 하나님을 믿는 것을 ‘난 하나님을 믿으니까 복이 있어! 난 앞으로 복받을 대상이야. 난 하나님 집의 일원이야. 난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앉혀 주신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높여주신 사람이야.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 주신 거니 난 복이 있는 거야.’라는 이런 식으로만 본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런 빈 구호를 외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지금은 네가 구원받을 수 있는지, 생명의 정상 궤도에 들어섰는지, 하나님이 너의 믿음을 인정하는지, 너를 하나님 집의 일원으로 인정하는지, 하나님 편에 너라는 사람이 있는지 하는 이런 것들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을 믿는 진정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흐지부지하게 믿으면서 ‘아, 하나님의 은총이야.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하게 대해 주셨어! 어디서나 다 형통하니까 난 정말 복이 있어. 이것 봐, 하나님 집에서도 하나님은 날 인솔자로 높여주셨어! 들어오자마자 인기도 많잖아, 정말 운도 좋아.’, 이런 것을 늘어놓아 봤자 소용없다. 이런 것은 다 빈말이다. 소용없다! 기회를 줄 때 잡지 못하면 쓸모없다. 기회가 아무리 많아도 안 된다. 실속 있고 실제적인 것들을 잡아야 한다. 어떤 오래 믿은 사람들은 ‘아, 난 복도 많아! 난 정말 복받았어, 난 온 세상에서, 전 우주에서 가장 복된 사람이야!’라고 하지만, 천사가 된다고 해도 소용없다! 실속 있는 것을 잡아야지, 말만 해서는 소용없다. 특히, 하나님을 믿은 시간이 짧고 접한 것이 적은 너희는 이전의 그 몇 단계 사역을 체험하지 못하고 후에 들어온 자들이다. 그럼 너희는 이후에 구원받을 수 있다고 확실하게 못 박을 수 있느냐? 장담할 수 있느냐? 장담 못하겠지? 확실하게 못 박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너희는 위험하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순복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는 더욱 모르고,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이런 실제적인 것을 잡지 못하고 마음에 깨닫지도 못한다면, 치우친 길로 가기 쉽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쉽다. 이전에 “성령께서 밝히 나타내게 합시다!”라고 하면서 실패했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너희도 지금은 다 분명히 보았겠지만, 그런 사람들도 처음에는 나쁜 일을 저질러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속셈은 없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여주셨기에 잘해야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른길은 가지 않고 그저 하나님께서 높여주셨으니 위에서 어떻게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하고, 형제자매들을 잘 목양하고 잘해야겠다는 생각만 하면서 실제적인 것들은 잡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엉망으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자신을 쓰지 않으니 화를 내며 “하나님은 공의로우셔. 그러니 성령께서 밝히 나타내시게 하자! 난 하나님을 믿지 사람을 믿는 게 아니야!”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사전에 미리 계획해 놓은 것이 아니다. 그럼 자신도 어쩔 수 없이 한 것일까?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 걸까?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매한 말, 무지한 말들을 해도 용서해 주었다. 그것은 그들의 무지함을 감안해 용서해 주고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해 줄 수 없을까? 말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라고 해도 난 복종 안 할 거야.’라는 이런 자들은 적그리스도의 부류인데, 하나님을 대적하며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무지몽매하다. 그러나 무지몽매한 것도 한두 번이지, 거기에 행정을 범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른다면 곤란하다. 베드로가 간 길을 보아라. 처음에는 성령의 깨우침을 받아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라고 했다. 성령의 깨우침으로 베드로는 어느 정도의 깨달음이 있었고, 마음이 매우 환해졌었다. 비록 그 당시에는 거기에 대해 더욱 깊은 인식이 없었지만 베드로는 하나님 알기를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정상 궤도에 들어섰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가장 위험한 일이자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패역이 있고 패괴가 있기 때문에 치우친 길로 갈 수 있는데, 그러면 끝이다. 사람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베드로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그런 길로 간 것이다. 그럼 바울은 어떠했느냐? 바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고, 계속 잡으려고 쫓아 다녔다. 바울은 격살된 뒤에도 하나님이 만물의 주재자이심을 인식하지 못했고, 사람이 어떻게 순복해야 마땅한지도 별로 인식하지 못했다. 바울에게는 정상 이지가 없었고, 시종일관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즉, ‘내가 당신께 바친 게 얼마이면 당신도 내게 그만큼 주고, 내가 얼마를 지불하면 당신은 내게 그만한 상과 보수를 주셔야 합니다.’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시종일관 이런 생각의 지배를 받으며 사역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는 시종일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바울의 어투를 보아라. ‘난 싸워야 할 싸움을 다 싸웠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싸우라고 하신 싸움은 다 싸웠습니다. 달려갈 길도 마쳤습니다. 당신이 달려가라고 하신 길도 저는 마쳤고, 지켜야 할 믿음도 지켰습니다. 당신께서 이 믿음의 길을 지키라고 하셨잖습니까? 저는 지켰으니 영광의 면류관이 저를 위해 예비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이런 투로 말하지 않았느냐? 물론, 바울이 서신에서는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좀 완곡하게 살짝 감추어 말했지만 바울의 출발점은 바로 이런 뜻이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그냥 징벌받지 않았느냐? 너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길, 하나님을 믿는 이 길에서 마땅히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떤 식으로 섬기는 것이 바울이 섬긴 방식인지, 어떤 믿음이 바울 같은 유형의 믿음 방식인지, 어떻게 해야 베드로처럼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피조물에게 있어야 할 길을 바르게 선택해야 하고,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흐리멍덩하지 말고 착실하고 진지해야 하며, 이상(異象)이 명확해야 한다. 네가 흐리멍덩하게 간다면 위험하다. 꼭 언젠가는 행정을 범하게 되거나 원망을 쏟아 내게 될 것이다.

인솔자든 따르는 자든, 이제 너희는 사람이 어떤 본성과 어떤 정형 때문에 아주 쉽게 멸망되는지 분명하게 알았느냐? 사람의 공통된 본성을 알고 있느냐? 사람 본성의 공통성은 바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것은 단지 믿지 않는 것만 말하는 것일까? 어떤 것을 하나님을 배반한다고 할까? 어떤 것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에 속할까? 사람의 그런 실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고 근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치명적인 부분이나 성질이나 나쁜 버릇이나 나쁜 습관 혹은 교양이 없는 이런 것은 다 겉면의 것이고 표면적인 것이다. 이런 것만 붙잡고 있으면서 실질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결국 여전히 굽은 길을 가게 될 것이고,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는 항상 사소하고 하찮은 것만 잡는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데, 이것은 엄중한 문제이다. 네가 아마 근래에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특별히 헌신하고 충성심이 있으며, 근래에 이지가 아주 정상적이고 양심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너는 언제 어디서나 한 가지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배반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이 지금 이지가 매우 정상적이고, 성령 역사도 있고, 실제 체험도 있고, 책임감도 있으며, 본분을 하는 것도 충성심이 있고 매우 신나게 믿을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이 서운해하는 일을 했거나 그 사람이 보기에 적합하지 않은 일을 했다면, 그 사람 안에는 관념이 생겨 곧바로 소극적이 되고, 사역하는 것도 힘이 없어지고, 대충 하여 속이기도 하고 기도도 하기 싫어한다. “기도할 게 뭐가 있나요!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시지 말아야 했었어요. 제가 뭐라고 기도해요?”라고 말한다. 기운이 없어 기도할 힘조차 없어졌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이것은 배반하는 행위가 아니냐?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떠날 수 있고, 하나님을 부인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정죄할 수 있다. 이런 것이 다 배반이 아니냐? 이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너는 지금 자신에게 관념이 없고, 대부분의 경우에 순복할 수 있고, 책망과 훈계를 받아도 떠나지 않는다고 여기지만, 여전히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너는 사람의 본성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물론 어떤 때에 어떤 사람은 조금 양심적인데, 그런 사람은 본성이 상대적으로 좋다. 어떤 사람은 인성이 악한데 그것은 본성이 나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인성이 좋다고 하든 나쁘다고 하든, 소질이 좋다고 하든 나쁘다고 하든 공통성은 모두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럼 사람이 패괴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느냐? 현재 너희는 아직도 ‘사탄에게 패괴되어 사람의 본성이 하나님을 배반하게 된 것이니 나도 방법이 없어, 천천히 변화되어야지!’라고 여기느냐? 너희는 아직도 이렇게 생각하느냐? 그럼 너희가 말해 보거라, 사람이 패괴되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느냐? 사람은 패괴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사람을 만들 때에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사람은 아주 취약하고 내면에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이나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은 없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라는 이런 것이 사람에게는 없다. 사람의 내면에는 원래부터 진리가 없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기에 사람은 생각할 수 있으나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는 몰랐다. 이러한 것은 없었다. 네가 패괴되지 않았어도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고 말하겠느냐? 너는 사탄이 와서 유혹하면 사탄을 따라가고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너는 하나님이 만든 건데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사탄을 따라간다면, 이것이 배신자가 아니냐? 배신자라고 하는 것은 바로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이 실질을 꿰뚫어 보았겠지? 그러므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오로지 완전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하나님의 빛 속에서 살며, 사탄이 다 멸망되어 더 이상 유혹하는 것이 없어야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게 된다. 유혹하는 것이 계속 있으면,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을 가치 없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너는 아직도 ‘나는 이제 좀 알게 되었어. 어떤 것에서는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하나님과 합할 수 있게 되었어. 내가 유리컵은 못 되더라도 흙 항아리 정도야 되겠지! 금붙이는 아니더라도 동붙이는 되겠지!’라고 여긴다면, 너 자신을 너무 높게 본 것이다. 사람이 어떤 물건짝인지 아느냐?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기에 한 푼의 가치도 없다.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개똥이고 짐승이고 천한 놈이다.” 그러나 사람은 ‘나는 천하지 않아! 어디가 천하단 말이야! 난 왜 그런 거 모르지? 왜 그런 느낌이 없지? 패괴되지 않았다면 난 하나님을 배반할 수 없어.’라고 생각한다. 이 일은 실례가 있고 사실의 근거가 있다. 지금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근거 없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이든지 너희에게 보여 심복구복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너희가 자신의 패괴를 인식할 수 있고, 배반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람이 배반하는 일이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살면서 사탄의 통제가 없으면 자유롭게 된다. 사람은 ‘내가 배반하지 않을까’라고 근심할 필요도 없다. 걱정할 필요도 없다. 불필요한 것이다! 후에는 너희에게 더 이상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들이 없다고 선포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사람의 실질만으로도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환경이 있어야 배반하고, 환경이 없고 핍박하는 사람이 없으면 배반하지 않는다고 할 수 없다. 핍박하는 사람이 없어도 배반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패괴 실질 문제이고 본성 문제이다. 네가 지금 숨만 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배반하는 본성이 내면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맞느냐? 왜 이렇게 말할까? 사람 안에 배반하는 것이 있고,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고, 사람의 영과 혼에 모두 하나님의 성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다르다. 천사에게는 하나님의 성품이 없고 하나님의 실질도 없지만 그들은 완전히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사는 하나님께 지음받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며, 하나님께 보냄받아 각처에 가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를 놓고 말하면, 하나님은 인류를 땅에서 생활하게 하였으나 인류에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관은 만들어 주지 않았기에 사람은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사람은 이렇게 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고 쟁탈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가치가 없다! 사람에게 이런 본성이 있다고 말하며 폭로한 것은, 사람에게 이 일에 대해 진실한 인식이 있고 자신에 대해서도 진실한 인식이 있으라고 한 것이다. 사람은 바로 이 방면에서부터 변화되기 시작하고 여기에서 실행의 길을 찾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일에서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고, 무엇을 보완해야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을지를 인식해야 한다. 네가 많은 부분에서 모두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많은 부분에서 모두 피할 수 있다면, 이후에 네가 또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지 하는 것은 너와 상관이 없다. 너의 생명 노정이 막바지에 이르고 사역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갔을 때, 네가 그 후에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을지는 너의 책임이 아니다. 방금 왜 이렇게 말했겠느냐?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되기 전에는 사탄이 와서 유혹하면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었지만, 사탄이 훼멸되면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 아니냐? 아직은 그때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의 내면에는 아직도 사탄의 패괴 성정이 있고,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일단 사람의 생명 체험이 어느 정도 깊어져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많이 없어지고, 긍정적인 것이 많이 생기고, 자신을 자제할 수 있고, 자신을 주관할 수 있고, 대부분의 경우에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게 되면, 사람은 사탄이 멸망될 때 철저히 변화받게 된다. 지금 사람의 배반을 해결하고, 사람의 패역을 해결하는 것이 이 단계의 사역이다. 훗날 사람들이 배반하지 않는 것은 사탄을 제거하였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배반은 사람과 상관이 없게 된다. 알겠느냐? 사람에게 모두 자신의 배반 본성을 알게 하려면, 어떤 것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본성에 속하는 것인지, 어떤 것이 배반을 유로한 것인지, 사람이 어떻게 진입해야 하고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하는 여기에서부터 착수해야 한다. 사람의 이런 실질이 아직도 안에 있기에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배반할 수 있고, 여전히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는 자주권이 없어 사탄이 먼저 사람을 점유한 것이다. 네가 패괴되지 않아도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데, 하물며 오늘날에는 온몸에 사탄의 패괴 성정이 가득 차 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느냐? 너는 더더욱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지금은 너에게 그런 패괴 성정을 벗어 버리게 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점점 적어지게 하여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온전케 될 기회가 더 많아지게 하고, 하나님께 열납되게 하는 것이다. 네가 각종 일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많이 체험하게 되면, 너는 이 단계에서 온전케 될 것인데, 만약 여전히 사탄의 것이나 악령이 와서 미혹하고 방해한다면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렇게 되면 네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가 적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후천적으로 사람 안에 만들어 넣는 것이다. 처음으로 사람을 만들 때는 사람에게 이런 기관이 없었기에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할 줄 몰랐고, 하나님께 순복할 줄 몰랐으며, 어떤 것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사탄이 와서 유혹하니 따라가 하나님을 배반한 배신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관도 없고, 더욱이 하나님이 인류의 창조주라는 것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후천적, 즉 지금 사람을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진리(하나님의 실질을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를 사람 안에 만들어 넣어 사람에게 모두 이런 방면을 알게 하고, 이런 방면에서 얼마의 자주권이 있게 하는 것이다. 즉, 네가 체험이 깊을수록 하나님을 아는 것이 더욱 많아지고, 배반하는 것은 더욱 적어진다. 하나님과 합하는 것이 많을수록 사탄을 더 잘 이길 수 있고, 더욱 자주권이 있게 되며, 참된 인생을 살아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패괴 실질이 안에 있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찌 사람을 온전케 하였다고 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온전케 한다는 것은 체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고, 자신의 본성에 대해서도 인식이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순복해야 하는지를 알고, 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사역에 대해 분별할 줄 알며, 성령 역사와 악령 역사의 차이점을 인식하고, 또한 사탄 마귀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류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적하는지, 무엇이 피조물이고 누가 창조주인지에 대해 모두 인식이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너희는 모두 알았겠지? 이런 것은 모두 하나님이 역사하여 후천적으로 사람에게 더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만들어진 사람은 패괴를 거치지 않은 이전의 사람보다 더욱 무게가 있고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 어떤 것들을 더해 넣었고, 사람 안에 얼마를 만들어 넣었기에) 마지막에 만들어진 인류는 당시의 아담과 하와보다 자주권이 더 있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진리와 하나님께 순복하는 진리를 더 잘 알며, 어떻게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지를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는 이런 것을 알지 못했기에 뱀이 와서 유혹하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몰랐고, 점점 더 패괴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이 일은 매우 심오하여 패괴된 인류는 아무도 꿰뚫어 볼 수 없다. 사람의 육체적 본능으로 인하여 사람은 아직도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다. 하지만 최종에 하나님은 사람을 온전케 하여 다음 시대로 이끌어 들어갈 것이다. 이 일은 사람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

왜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라고 요구하겠느냐?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고 이 방면의 진리를 모르면 악령에게 이용당하고 악령에게 미혹되기 쉽지만, 진리를 알고 난 후에는 악령에게 쉽게 미혹되거나 이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인식한 후, 그것이 행정을 범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한다면, 너 같은 사람은 만회할 수 없다. 너는 지금 어떤 정형이냐? 너희에게 지금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있기만 하면, 이전의 일을 하나님이 기억하든 하지 않든 마땅히 어떤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하겠느냐? ‘나는 성정 변화를 추구하고 하나님 알기를 추구해야지, 더 이상 사탄의 속임수에 빠져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돼.’라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지금 사람이 가치 있는지, 구원받을 수 있는지, 희망이 있는지의 관건은 어디에 있느냐? 바로 사람이 설교를 들은 후에 진리를 터득할 수 있는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지, 변화될 수 있는지에 있다. 이것이 가장 주요한 부분이다. 네가 후회하기만 하고 일을 할 때에는 또 그렇게 하고 그렇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 일에 대해 조금도 인식이 없고 도리어 본래보다 더욱 심해진다면, 너 같은 사람은 희망이 없게 되고, 폐기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수록, 자신에 대해 많이 알수록 자신을 주관하는 능력이 더욱 있게 된다. 네가 자신의 본성에 대해 더 잘 알수록 더욱 자신을 주관할 수 있고, 경험을 총결한 후에는 더 이상 그런 일에서 실패하지 않게 된다. 사실, 사람마다 흠이 조금씩 있는데, 단지 추궁하지 않았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다 있는데, 어떤 사람은 심각하지 않고 어떤 사람은 심각하며,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말하고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고 몰래 할 뿐이다. 누구에게나 다 있는데, 어떤 사람이 한 일은 다른 사람이 알고, 어떤 사람이 한 일은 다른 사람이 모를 뿐이다. 누구에게나 다 흠이 있고, 다 패괴 성정을 어느 정도 유로한다. 교만하다든가, 독선적이라든가, 과오와 잘못이 어느 정도 있다든가, 사역에서 약간의 과실이 있거나 작은 패역이 있다든가, 이런 일은 모두 상황에 비추어 용서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것은 패괴된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깨달은 후에는 마땅히 피해야 한다. 사람은 늘 이전의 일로 괴로워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두려운 것은 사람이 깨달은 후에도 변화되지 않고, 그렇게 하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적합하지 않다고 알려 주어도 계속 한다면 이런 사람은 구제 불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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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③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④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⑤심복구복(心服口服): 마음으로도 감복하고 말로도 탄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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