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목차

제26편 국도시대의 행정에 관해 말하다

우선 무엇을 행정이라고 하는지 말해 보자. 행정에 대한 정의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행정이라는 말을 들으면, ‘행정? 이건 어떤 의미일까? 행정은 법률인가? 규정인가? 제도인가? 아니면 가법(家法) 같은 건가? 도대체 어떤 것일까?’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행정에 대해 모른다. 행정은 계명일까? 어떤 사람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 행정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늘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행정이 있어요. 말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은 행정으로 징벌하시고, 행정으로 규제하실 거예요.’라는 말을 하면서 ‘행정’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있지만, 사실 행정의 실질적인 함의는 모르고 있다. 그럼 행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행정은 바로 사람의 본성과 사람의 패괴 성정에 초점을 맞춰 만든 사람의 행위를 규제하는 말이다. 행정은 법률이 아니고 율법도 아니며, 더욱이 세상의 어떤 헌법과도 같지 않다. 행정은 하나님이 사람의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사람에게 정해 준 범위인 것이다. 행정의 각 조목 내용은 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순복하고, 어떻게 피조물이 되고, 어떻게 사람이 되고, 어떻게 하나님을 증거하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지와 관련된다. 행정의 내용은 이렇게 많은 것과 관련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은 역사하실 수 있어서 사람을 징벌할 수도 있고, 각 사람에게 보응을 내릴 수도 있고, 또 진리로 각 사람을 가르치기도 하시는데, 왜 꼭 행정을 사용해야 하는 걸까?’라고 한다. 진리는 사람의 생명 진입에 관한 것이고, 사람의 패괴 성정으로 나타나는 세부적인 정형 방면에 관한 것이다. 행정은 명문으로 규정된 것이다. 어떤 정형이든,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하나님 집에서 반드시 지켜야 한다. 만약 사람이 행정에서 규정한 대로, 행정에서 말한 대로 하지 못하면, 제명될 것이다. 사람이 행정에서 규정한 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보기에 혐오받아 버림받을 대상이다. 사실 행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최소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경배하고, 제사를 드리고, 안식일을 지키고, 또한 여호와가 율법시대에 하신 사역과 규정을 따른 것과 같은 것이다. 율법시대에 여호와는 역사하면서 아주 많은 말씀을 하셨다. 물론 많은 율법도 세우셨다. 그런 율법에는 당연히 사람이 해야 할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때에 사람이 당연히 지켜야 했던 것에는 어떻게 여호와를 경외해야 하는지, 어떻게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를 바치고 헌금해야 하는지 등등의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것을 율법이라고 했다. 은혜시대에 와서는 계명이라고 칭했다.

우리도 예전에는 그런 것을 말했었고, 새 시대의 계명이 있기도 했었다. 그런 계명도 행정의 일부에 속한다. 단지 지금에 와서는 행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예전의 그 시대에서는 계명이라고 불렀지만, 그 시대의 계명을 가져다가 지금의 행정으로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시대와 시대에서 사람이 해야 할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계명이 있고, 시대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은 시대가 서로 다르고 사역의 필요가 서로 다름에 따라 그때 그때에 바뀌는 것이다. 마치 율법시대에 있었던 어떤 율법들은 지금에 가져오면 맞지 않는 것과 같다, 물론 어떤 것들은 잘 맞는다. 그리고 예수가 그때 알려 주었던 그 여러 가지 계명은 지금도 많은 것이 다 맞다. 개별적으로 몇 가지가 맞지 않을 뿐이다. 그럼 어떤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말라, 범죄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혹은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이런 것들이 안 맞을 수 있겠어요?”라고 하는데, 내가 말하는 것은 개별적인 몇 가지들이다. “부모를 공경하라”와 같은 것은 상황을 봐야 한다. 잘못 이해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예전 것은 다 폐하고 개별적인 몇 가지만 사용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이렇게 전달하지 말라. 이렇게 전달한다면 잘못 전달한 것이고, 방해한 것이다. 그러면 마귀에 속하는 것이다! “예전에 ‘담배를 피우지 말라’, ‘술을 마시지 말라’, ‘범죄하지 말라’고 한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폐했다고 말씀하셨어요.” 다 폐하셨으니까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나쁜 짓도 해야겠네 그럼! 최소한 성도의 품위로 갖춰야 할 그 몇 가지는 다 갖춰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과 계명 혹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행정은 다 시대에 근거하고, 그 시대의 정형, 그 당시의 배경, 그 당시의 역사와 사람에게 필요한 것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 많은 말을 추가하게 되는 것은 사람에게 그만큼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서도 말을 더 하고 규정을 더 추가하여 사람을 규제하는 것은 사람에게 기준을 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어떤 것은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다. 예수의 그때를 보아라, 예수는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많은 율법을 폐하였다. 물론 폐한 율법들은 이미 그때 그 시대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하는 역사에 맞지 않고, 그 당시의 환경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폐했던 것이다. 그럼 지금에 와서는 그런 것들을 더욱 폐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신약의 계명도 지금, 곧 새로운 시대에 오면 어떤 것은 폐하고 어떤 것은 계속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역사하는 환경이 다르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더 높아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릇되어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신다고 하셨으면서 왜 또 많은 율법을 폐하시고, 많은 율법을 도태시키신 거죠? 예수님이 하신 것은 왜 율법에 어긋나는 거예요?”라고 한다. 사실 예수는 율법을 폐하기도 하였고 완전케 하기도 하였다. 완전케 했다는 것은 뭘 말할까? 어떤 것은 이어졌다는 말이다. 즉, 이전의 율법보다 더 높아졌고, 이어지는 그 기초에서 한 단계 더 높인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어울리지 않는 것은 폐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역을 함에 있어 규례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에 와서는 어떨까? 그런 율법이나 계명들은 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폐한 것은 일부분이다. 너희가 그릇되다면 잘못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폐했다고 하셨어요!”, 그럼 예전의 계명을 다 폐해 버렸느냐? 그것은 다 쓸모없는 것이냐? 그러면 사람이 그릇된 것이다. 지금은 지금 사람들의 정형에 따른 행정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자꾸 행정을 반포합니까?”라고 한다. 사람이 이렇게 패괴되었는데 행정을 반포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안 되겠지? ‘왜 자꾸 행정을 반포하시는 거지? 한 번 반포하시면 됐지, 사람이 알면 되는 거잖아! 그대로 행하면 되는 거 아닌가? 왜 계속 반포하는 거지?’라고 하는데, 그것은 사람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꾸 변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바로 그런 계명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진공 속에서 살고 성결하게 되어 의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정이 있기 때문에 늘 패괴 성정으로 살고, 늘 패괴 가운데 있다. 그러므로 항상 거기에 알맞은 행정을 가지고 사람의 행위를 규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정말 행정을 범하는 사람이 생기면 출교시키거나 규제하거나 장기간 쓰지 않거나 도태시키는 것이다. 결과는 여러 가지이다. 그 시대에 행정이 있었으면, 당연히 지금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 국도시대(역주: 왕국시대)의 행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내가 몇 가지 말할 테니 적어 놓거라.

첫째, 사람은 망자존대해서는 안 되고, 자신을 높여서는 안 되며, 마땅히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고, 하나님을 크게 높여야 한다.

이것에 대해 설명을 좀 해야겠다. “망자존대해서는 안 되고, 자신을 높여서는 안 되며, 마땅히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고, 하나님을 크게 높여야 한다.” 이 네 마디는 사실 한 가지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말하는 어투상에서 사람의 각도에 서야 하고, 사람의 위치에 서서 말해야 하며, 자화자찬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이 그 지역의 교회를 잘 이끌고 있고, 그 지역은 자신에게 속한다고, 자신은 하나님이 써 주고 특별히 잘 대해 주는 사람이라고 자화자찬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식사도 하시고, 이야기도 주고 받고, 같이 일도 하셨어.”라고 자랑하지 말라. 그런 말은 해도 소용없다. 그럼 사람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말할 때 해야 하는 말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네가 만약 하나님을 어떻게 경배해야 할지 말할 줄 모른다면, 이런 생명의 공급을 할 줄 모른다면,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을 해부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어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고, 모든 사람에게 너 자신이 한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은 변명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즉, 네 속에 있는 속셈이나 생각을 다 폭로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낮추고, 즉 자신의 속셈을 내려놓고, 자신의 속셈을 해부하고, 자신의 더러운 것을 드러내고, 자신을 폭로할 수 있다면, 네가 제 위치에 제대로 섰다는 것을 증명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남을 훈계할 줄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 설교할 줄만 알았지, 사람들과 교통하고 정상적으로 교제할 줄은 모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저 남을 훈계할 줄밖에 모르고, 높은 위치에 서서 다른 사람에게 설교하고 높은 것으로 가르칠 줄밖에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강연하는 것밖에 모르고, 보고서 작성하는 것밖에 모른다. 말할 때는 항상 다른 사람의 정형을 상대로 할 줄밖에 모르고 자기 자신은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먼저 자기에게 칼 대는 법은 전혀 모르는데, 자신의 패괴 성정을 분석하지 않고 항상 다른 사람의 패괴 성정을 해부하여 사람들에게 인식시킨다. 그런 사람들은 왜 그렇게 할까? 왜 그런 식으로 설교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패괴 성정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고, 다른 사람보다 안목이 있고, 다른 사람보다 패괴된 정도가 얕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분석하고 훈계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패괴 성정을 폭로하지도, 분석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추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속셈을 거론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합당치 않게 한 것만 훈계하는 것은 자신을 대단하다고 하고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왜 어떤 사람은 무턱대고 트집 잡아 소란을 피우는 것일까? 왜 어느 지역의 교회를 이끌고 사람들 몇몇을 이끌라고 맡겨 주면 함부로 그 사람들을 훈계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망령되게 행하며, 자기 생각대로만 하는 것일까? 왜 그런 말을 할 때 그 뒤에 따르는 결과를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자기의 신분을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는 것일까?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너에게 인솔하라고 맡겨 주긴 했지만 네가 자신의 신분, 자신의 지위를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이끌라고 맡겨 준 것은 그저 너를 괜찮게 봤기 때문인 것이지, 결코 네가 다른 사람보다 높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너도 그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다. 심지어는 네가 그 사람들보다 더 나쁘다. 왜 이유 없이 트집을 잡아 다른 사람을 훈계하고, 멋대로 꾸짖고 멋대로 통제하는 것일까? 왜 자신이 잘못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말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일까? 그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그것은 너 같은 부류의 사람이 위치를 제대로 서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너는 사람의 위치에 서서 사역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높은 자리에 앉아서 사역을 했다는 것이다. 네가 분명 잘못했으면서도 왜 다른 사람이 너의 말을 듣게 하는 것일까? 너에게 권병(역주: 권세)이 있어서? 네가 가장 지고한 자라서? 네가 진리여서? 너의 말이 맞으면 들어도 된다. 그건 괜찮다. 그건 경우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틀렸음에도 왜 너의 말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거기에서 할 사역이 있는데도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가지 말라고 말리면 그는 바로 훈계한다. “왜 못 가게 해요?”, “여기에서 할 일이 있는데 왜 가려고 하세요?”, “그래도 안 들을래요.”라며 사역을 지체할지언정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마음먹은 대로 한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대단하다고 하는 자가 아니냐? 자신을 높이는 자가 아니냐? 그런 자들은 사람들을 진리 실행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말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에게 그따위 허튼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냐? 마귀 성정을 가지고 왜 다른 사람으로 너에게 순복하게 하는 것이냐? 이런 사람은 자신을 크다고 하는 자가 아니냐? 자신을 높이는 자가 아니냐? 이런 자들이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하나님을 경배하게 할 수 있겠느냐? 그런 자는 사람들로 자신에게 순복하게 하는 것이다. 사역을 얼마나 많이 지체시키든, 얼마나 큰 일을 지체시키든 자기 말에 따라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자의 본성은 귀신의 본성이 아니냐? 나는 그런 자들을 사람의 탈을 쓴 귀신이라고 한다.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 속에 있는 것은 전부 귀신인 것이다. 즉, 귀신의 본성이다. 귀신의 말을 하고, 귀신의 짓거리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행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 한 것이다. 이것은 알 만하겠지? 이것이 첫째이다. 너희가 일을 하거나 말을 하거나 처신할 때, 즉 너희 삶 속에서 모든 일을 할 때 너희는 마땅히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여겨서는 안 되고 자신을 높여서는 안 되며 마땅히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잘 생각해 보아라. 마이동풍처럼 하지 말고 많이 묵상해 보아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사역에 유익이 되는 일을 하고,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 집의 이익에 손해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증거와 하나님의 사역을 수호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 집의 이익에 관련되고, 하나님 집의 사역에 관련되고, 하나님의 이름에 관련되는 일이면, 너는 반드시 옹호해야 하고, 반드시 나서서 말해야 한다. 사람마다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다. 이것은 네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알았겠지?

셋째, 하나님 집의 돈과 물질, 모든 재산은 다 사람이 마땅히 바쳐야 하는 제물이다. 그 제물은 제사장과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향유할 수 없다. 사람이 바친 제물은 하나님께 드린 것이고, 하나님은 그 제물을 제사장에게만 향유하게 해 주었기에 다른 사람은 조금이라도 누릴 자격이나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드린 제물(돈과 물질을 포함하여 향유할 수 있는 것)은 다 하나님께 바친 것이지 사람에게 바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런 것을 누려서는 안 된다. 만일 사람이 그런 것을 누린다면 제물을 훔쳐 먹는 것이다. 무릇 그런 자는 다 유다이다. 왜냐하면 유다는 주를 팔았을 뿐만 아니라 돈주머니에서 돈을 훔쳐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해 내가 설명을 해야겠다. 내가 이 말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들은 후안무치하여 뻔뻔스럽게 먹을 것이다! 이 말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지 않으냐? 너희는 잘 모르고 있지 않으냐? 아주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냐? 제사장은 절대로 자그마하게 사람을 이끈다거나 교회를 이끈다거나, 어느 지역의 인솔자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너희 같은 경우는 잠시 써 주고 있는 것일 뿐이다. 너희는 불합격이 되면 바로 버릴 수 있는 존재이지 정해진 것이 아니다. 너를 써 준다고 네가 이미 정해져 영원히 도태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가지지 말라. 그런 망상은 하지 말라. 그것은 사치한 욕망에 속한다. 제사장은 권리가 있고 자격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자격은 누가 준 것이냐? 그 권리는 누가 준 것이냐? 당연히 하나님이 준 것이다. 하나님을 직접 섬길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구약 시대의 제사장들은 성전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는데, 제물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도 먹을 수 없었다. 그럼 지금은 어떤 사람이 제사장일까? 예전에는 제사장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럼 너희는 그런 사람일까? 너희는 제사장이 아니다! 내가 제사장이라는 말을 꺼냈다고, ‘음, 어때? 나잖아!’라고 생각하지 말라. 너는 아니다. 너는 그 정도까지 되지 못했다! 제사장이라고 하면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만 제물을 향유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아무도 그런 자격이 없다. 만약 네가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네가 한 말이다. 나는 네가 향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너에게 주는 것이 아니니 너는 향유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에 대해 말해 보자. 너희같이 교회를 인솔하는 사람에게 교통비는 교회에서 부담할 수 있다. 하지만 너희의 옷이나 착용하는 것이나 생필품 같은 것에는 절대로 교회의 돈을 쓰면 안 된다. 한 푼도 써서는 안 된다. 그럼 특수 상황에 대해 물어보겠지만 특수 상황에서도 절대 안 된다. 하나님 집의 돈은 다 사역에만 쓸 수 있다. 개인이 입는 것이나 생활에는 지원되지 않는다. 네가 집을 떠나 하나님을 믿고 또 너를 쓰고 있지만 그것은 네가 자발적으로 원한 것이다. 만약 네가 “저는 써 줘도 자원해서 하는 게 아닌데.”라고 한다면, 너는 돌아가거라. 너를 쓰지 않겠다. 강요할 사람도 없고, 억지로 시키지도 않는다. 네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써도 된다. 사람은 많다.

넷째, 사람에게는 패괴 성정이 있고 더욱이 감정이 있으므로, 남녀 단 둘이 협력하여 섬기는 것은 일률적으로 금한다. 발견하면 누구든지 일률적으로 출교시켜야 한다.

어떤 형제는 꼭 자매와 교통하려고 한다. 그것도 단 둘만 마음을 열고 교통하겠다고 하면서 그 자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런 자는 얼마나 나쁘냐! 어떤 자매를 보면, 자매들과는 교통하지 않는다. 자매에게는 전혀 마음을 열지 않으면서 형제만 찾아 교통하고 형제들에게 가서 교통한다. 이건 또 어떤 사람일까? 자매 중에는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럴까? 아무도 교통해 주지 않아서 그럴까? 다 너를 하찮게 보고, 마음이 맞지 않아서 그럴까? 맞는 사람은 형제밖에 없다는 말이냐? 내가 볼 때는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치근덕거린다. 그런 것은 다 의지로 절제해야지 아무렇게나 자신을 방종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패괴 성정이 있기 때문에 항상 단속을 받아야 한다. 단속이 없다면 사람은 심하게 방탕해진다. 항상 너를 단속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항상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되면, 사람의 행위는 많이 좋아질 수 있다.

다섯째, 하나님을 논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함부로 논단하지 말라.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사람이 해야 하는 말을 하며, 범위에서 벗어나지 말고, 선을 넘지 말라. 자신의 입과 혀를 경계하고 자신의 발걸음을 조심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도록 하라.

여섯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자신의 직책을 이행하고, 자신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이상,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바쳐야 할 몫을 바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자격이 없고, 하나님의 집에 남아 있을 자격이 없다.

여섯째는 사람의 본분과 관련된다. 교회 사역에 네가 필요하다면 너는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한다. 네가 이전에 생명이 어떻든, 자신이 어떻게 추구했든, 너의 소질이 어느 정도가 되든, 인성이 어떻든, 교회에서 네가 해야 한다고 하면 너는 해야 한다. 목이 떨어진다고 해도 해야 한다. 하지 않겠다면 꺼지면 된다. 하나님 집에서는 공밥 먹는 사람을 먹여 살리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믿거나 말거나 쫓아내면 된다! 이건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사람은 행위상에서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이 있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행동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소질도 있고, 인성도 좋고, 사역도 잘하고, 얼렁뚱땅하지도 않는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너무 높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최소한 행실상에서라도, 행위상에서라도 통과되어야 한다. 만약 이런 것도 하지 못하겠다면 하나님 집에 머물지 말고 빨리 나가라. 지금 많은 곳에는 일꾼이 가든, 누가 가든 접대할 집이 없다. 그런 곳은 일단 제쳐 놓아라. 접대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는 자는 앞으로 책을 주지 않으면 된다. 그런 사역을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책을 주지 말라. 여러 번 어떻게 말을 해도 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빨리 그만두게 하고 공밥을 먹지 못하게 하라. 여기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게 하지 말라. 보기만 해도 역겹다.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지 말라! 네가 믿고 싶으면 믿어라. 믿기 싫다면 부탁하지도 않는다. 누가 부탁한 적이 있느냐? 스스로 원한 것이다! 그만한 일도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느냐? 의인은 못 되어도 세상의 좋은 사람이라도 되면 좋지 않겠느냐? 좋은 일도 하고, 좋은 사람이 되면 좋겠지만, 좋은 사람조차도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폐품에 불과하다. 하나님 집에는 폐품이 필요 없다. 여기는 폐품을 수거하는 곳이 아니다. 그런 폐품은 쓸모가 없다. 쓸모없는 인간은 차 버릴 것이다. 다 차 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너희는 아무렇게 막 해서도 안 된다. 만약 너희가 그렇게 마구 하는 것을 발견하면, 나는 일단 너희부터 출교시키고, 너희부터 차 버릴 것이다.

일곱째, 사역이나 교회의 사무적인 일에서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 외에 모든 것은 다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의 말을 따르고 조금이라도 어겨서는 안 된다. 절대적으로 청종하고, 옳고 그름을 분석하지 말라. 옳든 그르든 너와 무관하니 절대적으로 순복하기만 하라.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 어떻게 하든, 너는 다 들어야 한다. 그가 어떻게 배정해 주면 너는 그대로 하고, 무엇을 하라고 하면 그것을 하면 된다. “하나님은 알고 계세요? 저는 하나님께 물어봐야겠어요.”라고 말하지 말라. 물어볼 필요가 없다. 성령께 쓰임받는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알겠지? 이것은 너희가 속으로 잘 알고 있으니 더 말하지 않겠다.

여덟째, 하나님을 믿으면 마땅히 하나님께 순복하고 하나님을 경배해야지, 사람을 높이거나 우러러보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첫 순위에 두고, 자신이 우러러보는 사람을 두 번째 순위에 두고, 자신을 세 번째 순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 마음속에 어떤 사람의 자리도 두지 말라. 특히, 자신이 숭상하는 자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지 말고 평등하게 보지 말라. 그것은 하나님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잘 취하고, 아부를 아주 잘한다. 내가 누구를 잘 대해 주고, 누구를 칭찬해 주고, 누구를 자주 부르고, 누구와 늘 얘기를 나누면, 그 사람에게 가서 알랑거린다. 그러고 난 후 머릿속에는 어떤 관념과 어떤 규칙이 생긴다. ‘응, 지금 하나님 다음에는 어느 어느 형제야, 그 형제 다음에는 어느 어느 자매이고, 그 자매 다음은 또 어느 어느 형제야, 그 형제 다음엔 또 어느 어느 자매야, 음!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은 무조건 보장해 주실 거야, 이 사람들을 이미 정해 놓으셨어!’ 내가 너에게 알려 주겠다. 그 사람들은 영원히 정해진 것이 아니다. 너희 이 사람들은 영원히 정해진 것이 아니다. 지금 누가 높아졌다고 해서 영원히 그 사람을 쓸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라, 언제 그 사람을 차 버릴지도 모른다. 숭상하지 말라! 머릿속으로 계급을 나누지 말라. ‘하나님이 가장 크시고, 두 번째는 누구, 세 번째는 누구, 네 번째는 누구’, 이런 것을 나눠서 무슨 쓸모가 있느냐? 그러면 조정에서 황제가 가장 크고, 재상이 두 번째고, 누구누구가 세 번째이고, 누구누구가 네 번째인 것과 같지 않으냐? 첫째, 둘째라는 이런 차이는 없다! 너희 머릿속에는 계급의 차이가 있지 않으냐? 사실, 너희는 다 평등하다. ‘흥, 난 저 사람보다 먼저 올라 왔어’, ‘흥, 난 저 사람보다 먼저 올라온 데다가 지금까지 내려간 적도 없어’, 이런 것들을 비교하지 말라! 혹시 네가 다른 사람에 비해 소질이 좀 뛰어날 수는 있겠지만, 너도 책망을 적게 받은 것은 아니다. 너도 좋은 놈이 아니다. 네가 눈물을 적게 흘리었더냐? 책망을 적게 받았었더냐? 훈계를 적게 받았었더냐? 왜 너를 훈계했겠느냐? 너는 좋은 놈이 아니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계급을 나누지 말라. 일단 계급을 나누면, 네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네가 숭상하고 있는 것, 네가 순복하고 있는 것에 사람의 것이 많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홉째, 교회의 사역을 위해 생각하고 자신의 육체의 앞날은 내려놓아야 한다.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바로바로 결단을 내리고, 온 몸과 마음을 하나님의 사역에 쏟아야 한다. 마땅히 하나님의 사역을 주된 것으로 하고 자신의 삶은 부차적인 것으로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갖춰야 할 품위이다.

열째, 믿지 않는 가족(자녀, 남편, 아내 혹은 형제나 부모 등등)을 억지로 끌어당기지 말라. 하나님의 집에는 사람이 부족하지 않으니 쓸데없는 사람으로 숫자를 채울 필요가 없다. 믿고 싶어 하는 자가 아니라면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지 말라. 이 조항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말하는 것이니 너희는 마땅히 서로 제약하고, 서로 감독하고, 서로 일깨워 주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거스려서는 안 된다. 설사 믿지 않는 가족이 마지못해 교회에 들어왔다고 해도 책을 내 주지도, 새 이름을 지어 주지도 말라. 그런 자는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니 어떤 상황이든 이 부류는 교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만일 마귀가 교회에 침입해 누를 끼친다면, 그 자를 데려온 너를 출교시키거나 제한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일에서는 모든 이에게 시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하지만 함부로 하지 말고, 개인적으로 앙갚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국도시대에 하나님의 선민이 반드시 준수해야 할 10가지 행정이다. 이것은 다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오늘 다른 문제를 하나 더 교통해 보자. 사람이 새 시대로 진입하였으면 마땅히 새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새 시대에서 어떻게 경력(역주: 체험)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즉, 사람이 어떻게 새 시대에 들어서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주로 어떤 방면을 가지고 얘기해야 할까? 주로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예전에 하나님을 믿었던 관점을 어떻게 지금 하나님을 믿는 관점으로 돌려야 하는지에 대해 말할 것이다. 예전에 네가 하나님을 믿었던 관점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것은 일체 따지지 않고, 마땅히 현실에 직면해 지금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지금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겠다. 네가 여전히 과거에 믿었던 방식대로 추구하고 여전히 과거의 관점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는 아직 새 시대에 들어서지 못한 것이다. 일단 대표적인 말로 이 문제를 설명한다면 어떤 말이 있을까? 은혜시대에 이런 말이 있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온 집이 복을 받는다.”, 이 말은 너희가 다 알고 있겠지? 다 들어본 적이 있지 않으냐? 너희 모두 이 말을 알고 있다. 그럼, 이 말의 실질적인 함의는 무엇일까? 그때는 왜 이런 말로 추구하게 했을까? 그것은 은혜시대의 사역이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은혜, 평안, 희락, 물질적인 축복, 물질적인 대우를 누리게 해 주었는데, 게다가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해 온 가족도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대표할까? 은혜시대에 예수가 한 사역은 사람을 끝없이 용서해 주고, 끝없이 관용해 주는 것이므로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온 집이 어른부터 아이까지 다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온 가족도 따라서 덕을 본다.”, 지금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전 사람들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온 집이 복을 받는 것’이었다. 땅에서 온 가족이 복을 받고, 죽은 뒤에는 온 가족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었다. 이전에 이런 논법이 있지 않았었느냐? 그건 한 시대를 대표한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사역한 것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온 집이 복을 받는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어른부터 아이까지 온 가족이 다 따라서 덕을 보게 되고, 다 평안과 희락이 있었다. 하나님은 은혜시대 사역으로 사람의 죄를 사해 줄 수 있었고, 사람을 관용하고 용서하기 시작했다. 그 용서는 무한한 것이었고 관용 또한 무한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가 와서 한 사역은 사람의 속죄제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무한한 관용을 베풀어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는 너의 생명이 어떠하든, 너의 진입이 어떠하든, 너의 소질이 어떠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사람의 각 방면 정상 인성이 갖추어야 하는 이런 것들도 별로 중요하지는 않았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되었는데,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그럼 지금에 와서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도 온 집이 다 복을 받는 것일까? 아니다. 왜 아닐까? 지금은 왜 그런 사역을 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들은 “이제는 은혜시대가 아니기 때문이죠. 은혜시대도 아닌데 하나님이 은혜를 사람에게 쉽게 주실 수 있겠어요? 누가 믿으면 복을 받고, 믿지 않으면 복을 못 받는 거죠.”라고 말한다. 그말도 반은 맞다. 그러나 실질을 말하자면, 지금 시대에는 그런 사역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충성심, 진실한 마음, 경배, 순복, 두려움이다. 이런 것을 갖추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진리를 얻을 수 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런 것을 얻지 못한다. 그들의 실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실질은 전부 무신론이다! 그래서 지금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온 집이 복을 받는다’는 이런 사역을 하지 않는 것이다. 누가 믿으면 그 사람은 진리를 얻을 수 있고, 누가 믿으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그런 것을 얻지 못한다. 예전의 그 시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토색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 지금은 사람이 완전히 바쳐야 하는 것이다. 왜 이런 사역을 할까? 왜냐하면 그 시대의 사람은 그때까지 죄인이었고, 사함도 받지 못하고 구속도 거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에게 충분한 은혜를 베풀어 주어 향유하게 했던 것이다. 그런 은혜로 인해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란 두 글자가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해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사람은 이미 구속되어 돌아왔고 이미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정 변화이고, 진리 추구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온 집이 복을 받는다’는 그런 사역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들을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은 온 가족이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 “아이고, 우리 집은 늘 평안하지 않아요. 우리 집은 늘 싸우기만 해요. 우리 집은 늘 일이 생겨요. 우리 집에는 질병이 끊이질 않아요. 온 가족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거란 말이에요.”라고 말하면 너의 관점이 틀렸다.

새 시대에 들어선다는 것은 오늘날 국도시대(역주: 왕국시대)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너의 관점, 너의 믿음, 너의 마음가짐, 너의 삶의 방식, 너의 경력 방식, 이런 여러 방면에서 모두 변화가 있어야 한다. 만약 단지 한 방면, ‘난 실제 하나님을 믿어.’라고 한다면, 이름만 바뀌었지 실질은 여전히 변함없는 것이다. 너의 추구에서부터, 너의 인식에서부터, 너의 관점에서부터, 여러 가지 방면에 모두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기초에서 다시 추구하여야 그 믿음이 순수하고 진실한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은 왜 늘 소극적이 될까? 왜 지금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재미없다고 생각하고, 예전만큼 열정도 생기지 않고, 예전보다 재미없다고 생각할까? 그것은 그 사람의 관점이 아직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예전에 예수를 믿던 그 관점이기 때문이다. 은혜를 좀 받거나 많이 화비하거나 많이 뛰어다니거나 하는 이런 것을 중시하고, 은사를 중시하고, 겉면으로 행하고 말하기를 중시하고, 열심히 하는 것만 중시하므로 늘 소극적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사람의 실질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아직 바뀌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성령 역사가 바뀌면 사람도 따라서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너의 진입, 너의 삶의 방식, 너의 경력 방식, 하나님을 믿는 태도, 하나님을 믿는 마음가짐과 관점이 아직 바뀌지 않았다면, 네가 성령의 역사를 따라 바뀌지도 변화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람에게 새로운 진입이 있고, 새로운 변화가 있고, 새로운 인식이 있으려면, 반드시 사람의 일거일동, 하나하나의 마음과 생각, 하나하나의 속셈, 일을 하는 관점, 일을 보는 관점, 이런 세부적인 부분에서부터 진입하고 변화되어야 한다. 만약 세부적인 부분에서 변화되지 않고, 입으로만 말하고 일부 행위상에서 변화가 조금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없다. 너는 너의 심리적인 의식, 관점, 삶의 방식에서부터 모든 지엽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 바뀌고 변화되어야 한다. 네게 있던 옛것들을 남김없이 다 벗어 버려 깨끗하고 깔끔하게 되어야 네가 바뀌었다고 증명할 수 있다. 너희는 자신에게서 아직 어떤 부분이 바뀌지 않았는지, 어떤 것이 여전히 묵은 행실, 묵은 견해인지 성찰해 보고, 아직도 어떤 것들을 파내지 못했는지, 아직 어떤 것들이 깊이 뿌리박혀 있는 옛것인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네가 파내지 않으면 없는 것 같겠지만, 사실 파내 보면 아직도 매우 많이 있다. 그렇지 않으냐? 지금도 왜 많은 사람들이 늘 따라오지 못할까? 아직도 많은 것이 속에서 가로막고 있어 새로운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지금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생길까? 그런 사람은 내가 이런 식으로 일을 해도 관념이 생기고, 이런 식으로 말을 해도 관념이 생기고, 저런 식으로 일을 해도 관념이 생긴다. 이런 일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런 일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 방면의 근본 원인은 사람의 본성이 교만한 것에 있고, 패역한 것에 있다. 그것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다른 방면은 객관적인 원인이다. 즉, 사람이 이 방면에서 아직 바뀌지 않은 것이다. 너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들, 예전에 예수를 믿던 방식이나 여호와를 믿었던 방식들이 아직도 네 안에 존재하고,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네가 하나님의 새 사역을 접하면서 이 도는 받아들였지만, 어떤 표현과 어떤 방식과 새로운 것들, 예전의 것을 도태시켜 대체한 그런 것은 네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왜 그런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네가 머릿속에 아직도 예전의 묵은 것들을 고집스레 담아 두며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네가 이런 것을 대적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네 속에 예전의 것들이 없다면, 너는 지금의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만약 예전의 그런 것들을 내려놓지 못한다면, 특히 그것이 이미 틀이 잡힌 것이라면, 아주 쉽게 오늘날의 사역을 대적하게 된다.

너희들은 자신의 내면에 아직도 예전의 어떤 낡은 방법, 낡은 인식법, 낡은 견해, 낡은 관점이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 모두 파내 보고 성찰해 보아라. 내가 간단한 예를 하나 들겠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다. 그저 책만 보고 “이 말씀 좋네요. 이 말씀은 심판의 말씀이네요.”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접촉한 다음에는 ‘아, 말씀이 왜 이렇게 엄하지! 왜 말씀은 계속 사람을 훈계하는 거지? 말투는 왜 이렇게 강한 거야? 거기다 딱딱하기까지 하니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땐 이렇지 않았어! 서로 말도 다 부드럽게 하고 서로 화목했지, 이분처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난 이런 하나님은 받아들일 수 없어! 난 이분 같은 하나님은 용납할 수 없어! 그분이 만약 예수처럼 부드럽고 진지하게 말씀하고, 아주 상냥하고 자상한 어머니처럼 사람을 대하신다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이런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어. 아예 받아들이지도 못하거니와 도저히 접촉할 수도 없어.’라고 한다. 너는 이것이 참 도이고, 도성육신(역주: 성육신)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시인하면서 왜 일단 접촉했을 때는 그의 어떤 어조, 일부 방법, 일부 표현에 대해 관념을 가지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일까?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네 속에 틀이 잡힌 것이 있고, 하나님에 대한 너의 견해가 네 속에서 형상이 되었고 모형이 되었음을 증명한다. 너는 그 모형을 가지고 오늘날의 하나님에게 맞추려 하기 때문에 당연히 맞출 수 없는 것이다. 시대마다 하는 사역이 다르기에 하나님이 발표하는 성품도 다르고 유로(역주: 흘러나옴)하는 것도 다르다. 너는 규례에 맞추어서는 안 된다. 규례에 맞추기만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고 틀림없이 정죄받을 것이다. 너의 관념, 관점, 인식법, 견해와 마음가짐이 오늘날의 하나님과 맞지 않는다면 다 적대되는 것이고 성립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해 보자. 사람에게는 패괴 성정이 있고 거역과 대적이 있다. 그리고 사유가 있는데, 사람의 사유는 무엇의 지배를 받고 있느냐? 그것은 사람의 속셈, 사람의 개인주의적인 내면의 그런 것들, 사람이 일을 보는 관점과 각도, 이런 것들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므로 너의 그 사유는 성령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진리의 기초에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왜 너의 그런 관점은 관념이고, 네 자신의 것이고, 사람의 것이라고 할까? 왜 육체에 속한 것이라고 말할까? 왜냐하면 너의 그 사유는 진리의 지배를 받지 않은 것이고, 진리의 기초에서 생각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것은 성경의 기초에서 생각해 낸 것인데, 그것은 더더욱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이전의 것을 가지고 오늘의 것에 끼워 맞추면 반드시 틀릴 것이고, 틀림없이 맞출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은혜시대와 같은데, 사람들이 여호와를 예수에게 맞추니 맞출 수 있었느냐? 맞출 수 없었다. 그럼 이전의 예수를 오늘날의 하나님께 맞춘다면? 맞출 수 있겠느냐? 맞출 수 없다. 지금 왜 하나님이 새로운 사역을 하게 되니 사람들 가운데서 항상 무리를 짓고 패거리를 지으며, 심지어 수많은 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일까? 왜 그런 적대 세력이 형성되는 것일까?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냐? 그것은 사람이 비록 받아들인다고 말하지만,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사람 속에 과거의 하나님의 형상, 과거의 하나님의 논법, 과거에 하나님을 믿던 관점이 모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자리 잡은 후에는 사람이 그것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고, 또한 그것을 내려놓기 아쉬워하고 버리기 아쉬워하면서 또 몹시 귀하게 생각한다. 그다음 또 아주 독선적이고 교만하기 그지없으며, 스스로를 대단하고 매우 높은 존재로 생각하면서 그런 것으로 오늘의 하나님과 대조하고, 오늘의 역사와 대조하고, 오늘의 진리와 대조하고 있다. 그러면 맞출 수 있겠느냐? 어떤 일이든 너는 끼워 맞추지 마라. 만약 네가 매우 단순하고 매우 트인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했는지 보았으면 받아들일 것이다. 너에게는 ‘나는 지금 새로운 도(道)를 받아들였어. 새로운 도를 받아들이긴 해도 어떤 것은 이해하지 못하겠어. 하지만 천천히 경력하고 천천히 인식해 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추구해 나갈 거야! 낙수가 바위를 뚫듯이 말이야, 그럼 조금씩 조금씩 밝히 알게 되고, 완전히 깨닫게 될 거야.’라는 이런 의식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무궁무진한 비밀이 있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사람은 측량할 수 없다. 1, 2년을 경력해서 조금 인식하고, 3, 4년을 경력해서 조금 인식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진보하고,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가고, 조금씩 조금씩 벗겨지는 것이다. 옛것이 벗겨져야 새것에 대한 인식이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 너의 내면에는 여전히 옛것이 깊이 뿌리박혀 있는데 조금도 파내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멋대로 관념을 가지는 것이냐? 멋대로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것이냐? 멋대로 너의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냐? 이런 것은 사람에게 이지(理智)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왜 사람의 교만은 밑도 끝도 없다고 할까?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사람 내면에 있는 것들은 하찮고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인데, 사람은 망설임 없이 제멋대로 방출한다. 그럼 사람은 정말 매우 이지가 없지 않으냐?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비록 받아들인다고 하면서 인정도 하고 머리도 끄덕이고, 책도 가져다 봤지만, 사실 내면에 있는 옛것을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어떤 곳의 인솔자들은 사역하면서 들어서 기분 좋은 말이면 그대로 따르고 시행하지만, 듣기 거북하거나 하지 못하거나 하기 싫은 것은 시행하지 않느냐?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사람은 내면에 있는 그런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내면에 있는 그런 옛것이 자리를 잡을수록 더욱 심하게 대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냐? 지금 어떤 인솔자들, 큰 리더들을 보면, 왜 지위가 높을수록, 이끄는 사람이 많을수록 받아들이기 더욱 어려워할까? 왜 그렇게 될까? 예전의 것들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진리로, 생명으로, 높은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반대로 자신의 것을 진리로 여기고 참된 길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어디 가서 진리를 찾고 구할 수 있겠느냐? 자신의 것이 진리가 되어 버렸는데 네가 무슨 진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네가 찾고 구할 수 있겠느냐? 간절히 사모할 수 있겠느냐?

또 어떤 사람은 “흥, 난 참 도를 받아들였으니 상관하지 마세요! 나 혼자서 책을 봐도 1년이면 발전할 수 있어요.”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네가 절대로 자라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너를 드러내지 않고, 네 속에 있는 것들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너는 변화될 수 없다! 네가 스스로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인식할 수 없다. 인식하기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난 책을 볼 테니 상관하지 마세요. 혼자서 믿을게요. 나 혼자 아무렇게 믿어도 당신보단 잘 믿지 않겠어요? 당신은 상관하지 마세요. 그냥 알려 주는 대로 내가 하면 되는 거잖아요?”라고 하는데, 그렇게 쉽지 않다. 사람이 무협 소설을 보면 이해도 잘하고 기억도 정말 빨리 한다. 다 본 다음, 책을 덮어 놓고도 사람들에게 줄줄 말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것과 다르다. 생명에 관한 것은 어떤 것과도 다르다. 다 특별히 심도 깊은 일이다. 너희도 세상의 책들이나 소설들을 본 적이 있다. 지금 그것들을 하나님의 말씀 책과 비교해 보거라. 너는 하나님의 말씀을 몇 년이나 보았지만, 어떤 것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분명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냐? 한 가지만으로도 네가 한평생 경력하기에 충분하다. 한평생 너는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 경력하고, 그 방면에만 노력을 기울이고, 늘 그 방면에 대해서만 고려해 보고, 세심하게 파고들고 세심하게 경력하면, 그 방면에서 늘 인식하는 것이 있게 된다. 그것은 1, 2년을 경력한 다음, “이 말씀은 다 경력했어! 도달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달하지 못한다. 사람의 내면은 복잡하지 않으냐? 사람의 관념은 진리 진입을 가로막고, 하나님 아는 것을 가로막는다. 사람의 속셈은 성정 변화를 가로막고 진리 실행을 가로막는다. 사람이 일 처리하거나 말할 때의 관점과 입장도 사람이 진리 인식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네가 말하거나 일 처리할 때 진리 편에 설 수 있고, 새 시대에서 추구하고 도달하라고 하는 편에 설 수 있다면, 쉽게 변화받을 수 있다. 그러면 네가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쪽 편에 서지 않았다면? 그럼 나는 네가 아직 멀었다고 한다! 너는 이렇게 많은 말씀을 들었고, 이렇게 많은 역사를 경력한 것 같아도, 너는 멀고 먼 것이다! 진리에 관련되는 것은 생명의 일이다. 왜 진리라고 할까? 영원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다 합당하고, 누구에게도 다 적합하다. 다 진리이기 때문에 아무도 반박할 수 없다. 어떤 말이나 어떠한 방법으로도 반박할 수 없는, 가장 높고 가장 깊은 것이다.

물어 보겠다. 만약 네가 ‘난 실제 하나님을 믿으면서 홀로 집에서 기도도 하고, 추구도 하고, 찬양도 할 거야. 찬양하라면 찬양하고,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하고, 사역이 어느 단계까지 진행되면 따라가면 되지 뭐.’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있는 관점들을 파헤쳐 보지도 않고, 속셈도 파헤쳐 보지 않고, 자신에게 아직도 어떤 패괴 성정이 있고 어떤 사치한 욕망이 있는지 성찰해 보지도 않는다면, 이런 것을 파헤쳐 보지도 않고 파내 보지도 않으면, 변화받을 수 있을까? 변화받을 수 없겠지? 내가 장담하는데, 지금도 너희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온 집이 복을 받는다’는 이런 관점으로 믿고 있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그런 거 아니에요. 억울해요.”라고 할 것이다. 너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나는 맞다고 하는데, 내가 설명을 하겠다. 왜 ‘맞다’고 할까? 어떤 사람들은 혼자 하나님을 믿은 후에 집에 별일이 생기지 않으면 원망도 하지 않고 ‘아, 하나님이 좋아. 하나님은 좋으신데 사람이 나쁜 거지. 하나님은 좋으신데 사람이 나쁜 거야.’라고 떠들어 댄다. 그러다가 남편(아내)이나 자식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병에 걸려 입원하거나 다리가 부러지거나 자식이 대학 입시에서 떨어지거나 또는 어떤 일에 얽매여 속이 불편해지고, 손해 보고, 속앓이를 하게 되거나 하는 일이 생기기만 하면, 상을 두드리면서 “흥, 제가 하나님을 믿어서 얻은 게 뭡니까? 당신은 날 축복해 주지도 않았어요! 절 축복해 주셨어야죠, 그것도 제 전부를 다 축복해 줘야죠. 그럼 제 전부는 뭐겠어요? 제 아들, 제 남편(제 아내), 제 가족, 제 부모까지 다 속하잖아요. 만약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제가 잘 추구하지 않겠어요?”라고 하나님을 욕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유는 많다! 그것도 자신의 이유는 아주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그 이유를 당당하게 꺼내 놓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별일 없을 때에는 원망이 없다. 그러다가 일이 생기면, 집이 소송에 휘말려 손해를 보고 빚을 지게 되었다든지,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나 집에 무슨 일이 생겼거나, 또 혹은 본인에게 무슨 병이 생겼다면, 사람의 그 원망하는 마음은 언제든지 쏟아져 나온다. 그것만은 정말 빠르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너에게 “당신 남편이 어디에 입원했대요.”라고 알려 주거나, 혹은 “당신 아내가 어디에서 무슨 일이 생겼대요.”라고 알려 준다고 하자. 듣는 순간, 너는 가슴이 덜컥하며 “아이구, 하나님,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 말에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을까? ‘흥, 하나님, 왜 좀 지켜 주지 않으셨어요? 제가 얼마나 마음 고생하게 생겼습니까, 제 생각도 좀 해 주시고 헤아려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것이 아니냐? 일이 생기지 않았을 때는 “아, 하나님은 정말 좋아요! 하나님은 높고 위대하십니다!”라고 외치다가도, 일이 생기면, 너는 곧바로 안색이 어두워진다. “하나님, 좋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마귀는 죽어야 속이 시원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느냐? 너는 이런 말을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이런 말을 했다가 만일 정말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 그러면 안 돼! 진짜 그렇게 된다면 내가 누굴 믿고 살아? 우리 가족은 하나라도 죽으면 안 돼. 일가족이라면 단란해야 좋은 거지, 하나라도 빠지면 단란할 수 없는 거잖아?’ 너는 마음이 괴로워서 못한다. 시골 같은 경우에는 집에 무슨 일이 좀 생기거나 사람에게 무슨 일이 좀 생기는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만, 소에게 무슨 일이 좀 생겨도 하나님을 원망한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이 집에 언제 어떤 일이 생겨도, 무슨 화를 입거나 무슨 일이 생겨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을 속에 두지 않고, 자신의 추구와 진입을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순복과 찬미를 지체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마음이 매우 순수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네가 만약 늘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온 집이 복을 받는다’는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네가 늘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는다면, 나는 네가 언제까지라도 제대로 믿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네 집에 있는 불신파들이 잠잠할 때가 없기 때문이다. 뭘 하기만 하면 화를 불러와서 너까지도 덩달아 조용할 새 없이 방해한다. 그래서 네가 제대로 믿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지금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매일 동분서주하는데, 언젠가는 사단이 날 것이다. 지금은 사단이 나지 않더라도 앞으로 재난이 떨어질 때는 피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피하지 못한다. 제대로 믿지 않으면 너도 피하지 못하고, 너의 결말 또한 그 사람들과 같을 것이다. 네가 제대로 믿었다면 “그가 피하지 못해도 싸지 뭐! 난 준비가 돼 있어. 어느 날, 진짜 그렇게 된다고 해도 난 마음을 독하게 먹고 쳐다보지도 않고 땅 파서 묻을 거야.”라고 할 수 있다. 너에게 정말 그런 마음이 있다면 너의 마음은 매우 순수하고, 네 마음은 정말 하나님께로 향했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부터 너는 이런 준비가 되어 있으면 된다. 네가 그런 말을 하고, 그런 일을 해야 할 것까지는 없다. 지금 네 마음은 아직도 정말 많은 것에 점유되어 있다. 너의 그런 관점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남편도 복을 받아야 하고(아내도 복을 받아야 하고), 아들도 복을 받아야 하고, 황소도 복을 받아야 하고, 병아리도 복을 받아야 하고, 주택도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진이 발생해도 우리 집은 지나치게 해 주세요. 우리 집이 무너지면 저는 어디서 살아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요?” 이렇게 이유까지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이 순수하게 하나님께로 향한다면,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향하고, 오로지 하나님만 위한다면, 사람의 그 마음은 매우 순수하고 단순해진 것이다. 그때면 네가 받는 고난은 매우 적을 것이다. 지금 너는 왜 고난을 받는 것일까? 왜 매우 많은 고난을 받는 것일까? 너는 매일 아들을 위해, 딸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바삐 보내고 말을 하면서 이런 일로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만약 너희가 단순히 교회의 일만 위한다면, 죽을 정도로 바쁘거나 힘들어서 죽거나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가 장담한다. 그렇지 않으냐? 지금 너희는 하나님도 믿어야 하기 때문에 80%는 집안일을 하면서 기껏해야 20% 정도 교회 일을 하고 있다. 이 무거운 짐을 100% 지라고 하면, 너희는 감당하지 못한다. 많은 집안일과 자신의 일 때문에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사실, 네가 하나님을 위해 바친 것이 겨우 얼마나 되느냐? 언급할 가치도 없을 만큼 매우 적다. 너는 여전히 자기 집의 일을 위해, 자신의 육체의 일을 위해 바삐 보낼 때가 더 많은데, 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겠느냐? 앞으로는 더 이상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또 원망하게 되면 자기 뺨을 때려야 한다. 사람은 이렇지 않으냐? 사실, 여전히 자신의 육체를 위해 바쁠 때가 더 많다.

누가 하나님을 믿으면 그 사람이 진리를 얻을 수 있고,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것은 네가 결혼하는 일보다도 더 중요하다. 지금 너에게 얼마나 해야 하고, 얼마나 말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너의 그 관점상에서부터 해야 하는데, 너의 속셈, 관점, 인식 그리고 네가 속으로 원하는 것들, 이런 것들을 합친 다음 너는 그것을 축소시켜야 한다. 세상에서 업체들이 인원 감축, 부서 감축을 하지 않았느냐? 지금 우리는 속셈을 축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다 조금씩 조금씩 내려놓아야 한다. 지금부터 이 방면에 진입하고 이 방면을 훈련해야 한다. 처음에는 눈물을 두 방울 흘리다가 나중에는 한 방울 흘리고, 그 후에는 아예 눈시울도 빨개지지 않고, 그 후에는 어떤 일을 말해도 안색이 좋지 않을 정도만 되고, 어떤 때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저 웃어 넘길 정도가 되면 되는 것이다. 너희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이런 일을 쉽게 내려놓을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이 쉽게 내려놓지 못하느냐? 너희들이 말해 보거라. 나는 자녀가 있는 사람들은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지? 엄마가 되면 자녀를 가장 아낀다. “내 살붙이인데 어떻게 아끼지 않겠어요?”라고 하지만, 자녀는 너의 재산이 아니니 마땅히 내려놓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거 아닌가요? 어떻게 제 재산이 아니란 말입니까?” 너에게 준 것은 맞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얻지 못했으면 그들은 마귀이고 몸 이외의 것이다. 너는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너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들에게 가로막혀 자신을 망치려고 하느냐? 그들 때문에 자신을 망칠 생각이냐? 너는 그것이 달가우냐? 너는 원하느냐? 어떤 사람은 아직도 남편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아유, 우리 남편은 하나님을 믿을 거예요. 우리 남편은 실질이나 소질을 보면 정말 좋아요! 우리 남편이 하나님을 믿으면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첫손에 꼽힐 거예요.”라고 한다. 너는 칭찬하지 마라. 그는 가장 큰 마귀인데도 너는 자랑하고 있느냐? 그들에게 희망을 갖지 마라. 네가 희망을 갖지 않으면 네가 받는 고난도 줄어든다. 그렇지?

내가 이렇게 많은 말을 했는데, 너희는 어떤 문제를 얘기했는지 알고 있느냐? 어떻게 새 시대에 들어설 수 있을지, 어떤 방면에서부터 바뀌어야 하고, 어떤 방면에서부터 진입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진입하면 된다. 사람들이 예전에 조금 진입하기는 했지만 많은 방면에서는 아직도 멀었다. 너는 왜 항상 관념을 가지고 있느냐? 네가 책을 볼 때는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막상 실제에 부딪히면 왜 항상 적대시하고 늘 배반하는 것이냐? 왜 내면에는 항상 견해가 있느냐? 왜 언제나 순복하지 못하느냐? 그것은 말하자면, 사람 안에 육체적인 것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너희가 지금 들을 때에는 ‘없는 것 같아, 정말 없는데.’라고 한다. 정말 없느냐? “정말 없어요. 전혀 없는데요.”라고 하지만 사실이 임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것들이 자연히 나오게 된다. 너희는 앞으로 관념을 적어 둘 노트를 준비해라. 일단 사실이 임했을 때 너에게 어떤 관념들이 생겼는지, 네가 어떻게 생각했었는지를 모두 적어 놓았다가 자신의 것을 파헤쳐 보거라. 그렇게 하면 유익하다. 너는 그런 사실을 담대하게 마주해야 하고, 용기 있게 자신을 폭로해야 한다. 네가 용기 있게 자신을 폭로하는 것은 너에게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고, 관념을 내려놓을 마음이 있고, 순복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너는 자신을 배반해야지 계속 하나님을 배반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잘못된 것이다. 너는 반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너희에게 관념을 적어 둘 노트를 준비하라고 했더니, 끝도 없이 적는다. 큰 것, 작은 것, 많은 것, 적은 것, 자질구레한 것까지 다 적는데, 그럴 필요는 없다. 내면에 있는 중요한 것들, 근원적인 것들을 기록하여라. 기록한 다음에는 사실과 대조해 보거라. 그다음 일을 할 때, 관념이 또 나올 때, 너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고, 조치를 취해야 하며, 실행의 길이 있어야 하는데, 알맞은 실행의 길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입할 수 있다! 네가 늘 자신을 인식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관념이 나올 때는 소홀히 하여 놓쳐 버리는데, 관념이 없어지면 인정하지 않게 된다. 사람이 평소에 좋을 때, 관념이 없을 때, 책망받지 않을 때, 역경이 없을 때에는 관념도 없고, 견해도 없고, 전에 있었던 관념들도 생각나지 않고, 자신을 매우 좋게 생각하고, 정말 관념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관념이 나올 때는 하나님과 적대된다. 그러다가 한동안 지나면 또 감각이 없어져 자신을 아주 좋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어 항상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는 늘 잊어버린다. 이런 일들은 항상 참답게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가 진입하고 싶어 한다면 너는 진지해져 기회를 잡아야지 조금도 놓쳐서는 안 된다. 적어 놓은 다음에는 털어놓고 교통해야 하고, 교통한 다음에는 또 진입해야 한다. 너는 파헤친 다음, 자신이 실행하는 가운데서 도대체 이 방면의 관념을 벗어 버렸는지, 내려놓았는지, 바꾸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조금씩 조금씩 변화될 수 있다.

이렇게 진입하는 것은 어려울까? 힘이 들까? 이것도 힘이 들기는 하다! 어떤 사람은 “가족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예요! 서로 마음이 통하고 핏줄로 이어졌는데 누가 누구를 내려놓을 수 있겠어요?”라고 하면서 다 내려놓지 못하다가 천천히, 조금씩 내려놓게 된다. 어떤 것들은 의지력으로 절제를 해야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다. 그저 대충 표면적인 것들에 대한 인식이 있어 교만하다, 독선적이다, 자고하다, 패역하다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도리이다. 너는 사실에 비추어 어떤 일에서 어떤 견해가 있었는지, 그런 일들에서 자기 내면에 있었던 속셈을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인식이 있다고 하고, 자신에게 맞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저 말로만 “사람은 아주 교만하다. 사람은 아주 패역하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한다.”라고 하지 말라.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런 것은 인식이라고 하지 않는다. 너는 너의 속셈, 너의 실질적인 근원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런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 행위적인 것에서만 인식한다면 역시 안 된다. 반드시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 하고, 중요한 것을 잡아야 한다. 한동안 유로된 것이 어느 정도 있으면, 너는 그것을 총결한 다음에 교통해야 한다. 너희가 지금처럼 듣고 나면 자신에 대해 인식하게 되어 속으로 ‘아, 난 정말 별로구나’라고 생각하다가도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그런 생각이 없어진다. 그러면 ‘이만하면 되잖아? 괜찮네!’라고 하게 된다. 집어 주지 않으면 또 안 된다. 그렇다고 항상 다른 사람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지 않겠느냐? 너는 스스로 이런 방면에서 진입이 있어야 한다. 한동안 총결해 보고, 한동안 자신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 어떤 것에서, 어떤 일에서 합당하게 하지 못했고 진리에 부합되게 하지 못하였는지, 어떤 말을 할 때 맞지 않았고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았는지, 어떤 성정을 유로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네가 늘 이렇게 진입하면서 자신에게 엄격하게 요구하면, 점차 이런 방면에서 인식하는 것도 많아진다. 한데 총결하여 자신이 정말 별 볼 일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보게 되면, 어느 날에 정말로 이런 인식을 가지게 된다면, 교만하라고 해도 교만해질 수 없다.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은 지적해 주면 그런 일에 대해서는 깨닫고 알게 되지만 자신의 성정에 대해서는 역시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왜 모르겠어요? 저는 제가 어떤 일에서 교만했었는지 다 알아요.”라고 한다. 어떤 일에서 교만했었는지는 알면서 왜 자신의 성정이 교만하다는 것은 모를까? 왜 한동안 계속 향상하려고 하면서도 계속 이것저것 하려고 할까? 바로 사람의 교만한 것들이 아직도 내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네가 일을 할 때의 속셈, 관점, 견해부터 변화되어야 한다. 너희는 사람의 많은 말 속에 가시가 있고, 그 말투에 교만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느냐? (인정합니다.) 말 속에는 속셈도 있는데, 네가 하는 말은 너의 관점을 대표하고 너의 속셈을 대표하기 때문에 네가 하는 말에서 그런 것을 찾아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 교만하지 않을 때에는 말을 해도 얼굴 표정이 한결같다. 그러나 교만할 때에는 눈살을 찌푸리고 입도 비쭉거리는데, 입을 열면 코도 비틀어지고 머리카락도 일어설 정도이다. 그렇게 달라진다. 그 추태는 바로 사탄의 추악상이 드러난 것이다. 봐라, 사람의 내면에는 속셈이 있다. 그 궤사한 사람을 보면 항상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거나 귓속말을 하고, 말할 때에는 계속 곁눈질로 살핀다. 그러면 속셈이 있는 것이다. 그 속에는 무엇인가 들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크게 말하지 않고 낮은 소리로 수상하게 말하는데, 그 말 속에 무엇인가 담고 있으면서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더욱 약아빠졌다.

과거에 사람은 늘 “내가 복을 받은 건 하나님께서 날 흡족해하신다는 거야. 내 집이 평안하고, 가족이 경제적 손해도 보지 않고, 빚도 없고, 뭘하든 다 순조로우니 이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날 기뻐하시는 거야.”라고 하면서 늘 만족하였다. 만약 네가 그런 것에만 만족한다면, 내가 보기에 너는 네가 죽을 때까지도 추구할 것 같지 않다. 너는 외적인 생활이 순조롭고 좋은 것에 만족하지 말라. 그런 것에 만족하지 말고, 그런 것들을 보지 말거라. 그런 겉면의 것들은 다 하찮은 일이다. 오늘날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사람 안의 것들,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들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사람의 근본 원인에서부터, 사람의 실질에서부터, 사람의 본성에서부터 파헤쳐 구원하는 것이다. 왜 늘 사람의 관점을 말하고, 늘 사람의 속셈을 말하겠느냐? 이것은 네게 깊이 뿌리박혀 있는 근원적인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행위를 보지 않고 겉면을 보지 않으며, 너에게 어떤 가정, 어떤 남편, 어떤 용모, 어떤 키, 어떤 직업이 있는지도 보지 않고, 네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도 보지 않는다. 이런 것들은 보지 않는다. 관건은 너의 실질이 어떤가를 보는 것이다. 실질로부터, 뿌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우리 집은 정말 순조롭다. 오리를 많이 키웠는데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해 주셨다. 우리 집은 소를 많이 키우고 있었는데 얼마에 팔았다.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해 주셨다. 우리는 집을 몇 채 지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집도 정말 잘 지은 데다가 빚도 없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다.’라는 이런 것에만 만족하지 말라. 너는 이런 겉면의 것들을 보지 말고, 마음으로 이런 것을 중시하지도 말고, 이런 것을 추구하지도 말라. 너는 이런 것에 점유되지도 말고, 이런 것에 만족하지도 말라. 네가 이런 것들에 만족하면 하나님을 믿는 관점이 아직도 좋지 않고, 너무 낮고 너무 멀었다는 것이다. 너는 성정을 중시해야 한다. 너의 성정, 너의 인성, 너의 마음가짐, 너의 관점, 이런 방면에서부터 착수해야 한다. 그러면 네가 새 신자나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과 접촉했을 때, 그 사람들은 겉면에서도 네가 확실히 바뀌었다는 것을 보게 되고, 네가 추구하는 것이 정말 달라졌다는 것을 보게 된다. 누군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돈을 많이 벌고, 지위도 가지고, 아이도 대학에 가고, 딸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남편은 좋은 자리를 하나 얻기 바라는 겁니다. 당신은 왜 이런 걸 추구하지 않죠? 당신은 마치 이런 것을 분토같이 보고 전혀 가치 없는 걸로 생각하는 것 같네요. 당신들은 어떻게 믿으시는 건가요?”라고 하면, 너는 우리가 어떻게 경력하였는지, 사람에게 어떤 패괴 성정들이 있는지를 교통해 줄 수 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너와 접촉할 때 너를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외적인 설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고, 남을 달래거나 남을 권고하는 외적인 설교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네가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고 진리를 공급해 줄 수 있으며, 생명에 대해 말하고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네가 참으로 새 시대의 사람이고 참으로 새사람이 되었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함께 앉으면 늘 무엇에 대해 말하느냐? “제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에는 어디 가서 사역하면 성령이 크게 역사하셨어요. 전도를 하기만 하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제가 말하는 걸 들으려고 했어요. 제가 누구에게 가서 기도해 주기만 하면, 낫지 않던 병도 다 나았어요. 제가 말하면 다 됐었다니까요!” 아직도 이런 것들을 논하고 앉았으니 얼마나 뒤떨어졌으냐! 뒤떨어지지 않았느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냐? 아직도 매우 많지? 어떤 사람은 네 앞에서는 말하지 않지만 뒤에서는 몰래 말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매우 뒤떨어진 사람이다. 마치 지금 다른 사람들은 다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데, 그는 아직도 작은 나귀가 끄는 수레를 타고 다니면서 ‘보자, 내가 그때 탔던 나귀 수레는 1등급짜리였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1급 관리가 나귀 수레를 타고 다녔겠느냐? 너무 뒤떨어졌다. 누가 그 말을 믿겠느냐? 얼마나 유치하냐, 그렇지? 다른 사람들을 바보로 여기지 말라.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때 복도 많이 받았고 사람도 많이 얻었다고 하면서 “지금 저는 밥 한 그릇만 먹으면 3일도 버틸 수 있어요. 그것은 제가 하나님께 배고프지 않게 해 주셔서 쌀을 아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먹고 마시게 해 달라고 기도했기 때문이에요.”라고 한다. 네가 이런 말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얼마나 뒤떨어졌느냐! 다른 사람들이 비웃지 않겠느냐? 모두가 비웃을 것이다. 만약 너희가 앞으로 함께 앉아 생명에 대해 나누고, 성정 변화에 대해 나누고, 자신에 대한 인식을 나누고, 실질적인 것을 나눈다면 너희는 제법 잘한 것이다. 사소한 것들은 말하지 말라. 너희들은 지금 생명을 공급해 주지 못한다. 너에게 다른 사람을 좀 돌보라고 맡기면, 너는 그저 부축하며 다니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되면 너는 필요치 않게 된다. 너는 그저 다른 사람의 지팡이만 될 수 있을 뿐, 사람 내면의 공급이 되지는 못한다. 너의 말은 다른 사람의 양식이 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은 네가 한 말을 먹을 수 없고, 먹었다고 해도 쓸모없다. 너무 뒤떨어진 것이 아니냐? 너희들이 사람을 돌보고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그저 달래는 것이다. “말 잘 들어야죠. 하나님께 거역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대적하지 마세요. 보세요. 우리 사람은 얼마나 나빠요. 앞으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해요.” 말이 끝나면 상대방은 “맞아요.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죠.”라고 대답하지만, 네가 간 다음에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되고 여전히 일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저 지팡이일 뿐, 양식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너희 자신도 진입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람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고, 어떤 패괴 성정이 있는지에 대한 근본 원인을 잡지 못하고, 중요한 것을 잡지 못하는 것은 너에게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곳에서 하는 것은 생명의 공급이라고 할 수 없다. 너희는 단지 사람을 권면하면서 말을 잘 들으라고 타이를 뿐이다. 너희는 그저 아이를 달래는 식으로 할 뿐, 실제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그것은 너희 자신도 진리 실제에 진입하지 못했고, 아직 참 도를 얻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그렇지 않으냐? 나는 말을 많이 할 때마다 이런 실질적인 것과 중요한 것을 먼저 너희에게 말해 준다. 너희에게 말해 준 후에 너희가 참으로 인식하게 되면,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게도 교통할 수 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할 수 있지만 그저 설교만 한다. 왜 설교를 한다고 할까? 설교한다는 것은 신학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강단에 서서 책 내용에 따라 읽는 것이다. 그것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한다. 생명을 공급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매우 부족하다고 하는 것이다. 너의 관점이 아직 바뀌지 않았고, 너의 인식과 속셈이 아직 바뀌지 않은 것이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변화를 요구하지만, 너에게 길이 없기에 너는 공급해 줄 수 없다. 너에게 길이 없기에 그저 권고하거나 훈계할 뿐이고, 그저 사람에게 눈을 부릅뜰 뿐, 성과는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결국 그들은 여전히 힘이 생기지 않고 여전히 인식도 없는 것이다. 네가 한 사역도 여전히 효과가 없다. 너희가 맡은 지역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아보거라. 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떤 인식이 있는지는 인솔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만약 너와 함께 사역하는 몇몇 자매들 중 네가 핵심이고, 그 몇몇 자매들도 다른 사람을 훈계할 줄만 알고 자신을 전혀 인식할 줄 모른다면, 너 역시 끝이고 좋은 물건이 아니며, 너 역시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면 너희는 이전에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너희는 그저 ‘흥, 이제는 내게 권리를 주셨어. 이제는 지위가 있게 됐고, 한자리하게 됐어. 이제는 내 말로 훈계할 수 있는 대상이 생겼어.’라고 하는 것밖에 모른다. 네가 지위만 중시하고 명망만 중시하며, 사람을 어떻게 훈계할 것인지, 설교를 어떻게 할지, 어떻게 말하면 유머스럽고 사람들을 웃길 수 있을지, 어떻게 말하면 사람들이 말을 잘 듣게 되어 자신의 그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을지만 중시한다면, 또한 네가 그 지역에서 권세가 있게 되고, 명망이 높아지고, 지위를 든든하게 차지하고, 설교 소리도 높아지고, 말도 많아지고, 교통할 줄도 알고, 구변도 좋고 하는 이런 것만 중시한다면, 그것은 네가 치우친 길로 가고 있음을 증명한다.

낡은 시대에서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는 것은 행위와 논법에만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더 높은 진입이 요구되고, 더 큰 대가를 지불할 것이 요구되며, 더 많은 희생이 요구된다. 사실, 사람에게 희생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좀 받으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일들에서 고난을 많이 받으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람이 변화될 수 있고, 속에서부터 겉에까지 변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 시대에서 한 사역에 대해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은 성경 보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지금은 성경을 보지 않는다고 하니 ‘성경의 어떤 말씀들은 그래도 괜찮고 참 좋은데. 그래도 기회가 있으면 성경 말씀들을 좀 봐야겠어! 하나님께서 성경에는 사람의 견해도 있다고 하셨는데 난 왜 그렇게 생각되지 않지? 내 생각엔 아닌 거 같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은 열심만 있고 성정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과거에는 누가 열심으로 하고 누구에게 열의가 있으면 생명이 크고, 누구의 생명이 크면 앞쪽 자리에 있고 더 잘 믿는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런 것을 말하지 않으니 어떤 사람들은 늘 하나님이 그렇게 한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든 것처럼 생각한다. 내가 전에 어떤 사람들을 책망한 적이 있었다. 그 후에 일부 사람들은 불복하면서 그 사람들을 두둔하고 나섰다. “흥, 그 사람들도 대가를 치르고 그렇게 많은 고난을 받았잖아요. 그리고 정말 수고하면서 당신께 시중들고, 당신을 위해 그렇게 많은 고난도 받았잖아요. 또 그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은 걸 생각하면 공로는 없을지라도 수고한 업적은 있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대할 수 있어요?”라며 거기에서 돌아서지 못한다. 이런 일도 그렇게 인식하기 어려울까? 사람은 사람의 외적인 행위를 보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실질을 본다. 여기에는 격차가 큰 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이 겉으로 얼마나 세심하게 하고, 겉으로 얼마나 경건하고, 겉으로 말을 얼마나 잘 하고, 겉으로 얼마나 뛰어다니고 얼마나 대가를 치를 수 있는지만 본다. 너는 그것을 보면서 왜 그 사람에게 관념이 얼마나 있는지, 그 사람이 얼마나 독선적이고 얼마나 교만방자한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냐? 왜 그런 것은 보지 않는 것이냐? 그러므로 너희가 일을 보는 관점은 아직도 너무 낡아 빠졌고, 너무나도 뒤떨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렇게 사역했어도 하나님은 저에게 잘했다고 하신 적이 없어요. 우리가 그렇게 사역하며 그 지역에서 2~3개월씩 있으면서도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는데, 여기 와서 칭찬은커녕 오히려 책망을 받았어요. 제가 조그마한 일 하나 잘하지 못했다고 저를 책망했어요, 잘하지 못했다면서 호되게 책망하셨다니까요.”라고 말한다. 오늘날 하나님은 사람의 대가를 보지 않는다. 네게 무슨 대가가 있느냐? 네게 무슨 자격이 있느냐? 대가든 자격이든, 네가 고난을 얼마나 받았든 그런 것은 따지지 않고, 너의 실질을 본다.

지난 시대에 사람을 쓰는 원칙은 어떤 것이었느냐? 누가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고, 누가 나이가 가장 많고 결혼하지 않았으면, 그 사람들 가운데서 최고였다! 또 누가 40이 되어도 결혼하지 않고, 50이 되어도 결혼하지 않았으면, 그 가운데서 거물이었다! 그런 사람일수록 명망이 더 높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보지 말고 실질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에 있어서 관건은 그 사람의 실질이 어떠한지,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질을 보는데, 네가 아무리 헌신하고 아무리 화비하고 아무리 대가를 치러도 결국 말세의 참 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이 정말 도성육신하여 왔는데도 네가 알아보지 못한다면, 너의 그 실질은 도대체 무엇이겠느냐? 대적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너의 관점, 너의 마음가짐이 하나님과 합할 수 있는지에 달렸다. 그런 것을 자격으로 따진다면, 너희는 모두 내려가야 하고 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전에 지방교회, 가정교회의 그 영감들, 이가 빠진 자일수록, 귀가 먹은 자일수록, 머리가 흰 자일수록, 대머리가 된 자일수록 더욱 자격이 있었다. 그런 건 소용없다. 그런 사람들은 쓸 수 없다. 실질이 안 좋아 사역을 하지 못한다. 그들을 쓰면 사역을 지체하지 않겠느냐? 거기에는 그런 사람들이 아주 많다. 너희 같은 사람들은 아예 숫자에 들지도 못한다. 처음에 사람을 쓸 때 얼마나 힘들었느냐! 윗사람을 다 젊고, 소질이 뛰어난 사람들로 뽑으려니 많은 사람들이 통과되지 못하였다. 그럼 너희는 어떻게 생각했느냐? 너희는 80세 된 사람이 결혼하지 않았으면 정결한 처녀로 여겼고, 날마다 형제자매들에게 밥 지어 주고 눈코 뜰 새 없이 보내면 평생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 결과, 그 사람은 항상 자기의 자격을 말하면서 늘 교만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완전히 마귀에 속한다! 헌신이라니? 화비라니? 우린 그런 것을 따지지 않는다. 그것을 따져서 무슨 소용 있느냐! 누구에게 진심이 가장 많은지, 누가 하나님께 가장 기꺼이 순복하는지, 누구에게 진리가 가장 많은지, 우리는 이런 사람을 지지한다. 사람의 겉면을 봐서 소용 있느냐? 겉면의 것들이 좀 바뀌었어도 속에 있는 많은 것들이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면, 어느 시기가 되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은 인식해야 하는 것이고, 모두 파헤쳐야 하는 것이다. 사람 속에는 아직도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본성은 당연히 교만하고 패역한데, 이것이 가장 크고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다. 이런 것 말고도 속에는 또 패괴 성정들이 있다. 그러므로 네가 자신을 인식하고 성정이 변화되려면 반드시 길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어느 방면부터 진입하고, 먼저 어느 방면부터 인식하고 착수할지, 길이 있으면 많이 쉬울 것이다. 너에게는 반드시 길이 있어야 한다. 길이 없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초기 교통에 근거해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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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③망자존대(妄自尊大): 망령되게 함부로 잘난 체하다.

④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⑤도(道):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목표가 있는 길,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진리를 가리킴.

⑥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