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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편 그리스도의 정상 인성에 순복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절대적인 순복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으면 핵심을 잡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기본적으로 마음에 ‘나는 어떻게 믿고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떻게 순복하고 어떤 진리를 갖추며, 어떤 말씀과 어떤 인식을 갖추어야 한다’라는 신념을 가져야 한다. 그다음 그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 분명히 알았겠지? 너희에게 그런 신념이 있으면 어떤 것은 내려놓을 수 있는데, 일부 관념과 속셈들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만약 그런 신념이 없으면, 사람은 늘 선택적으로 순복하게 되는데, 때로는 사소한 결점까지 들추어내고, 때로는 저항하고 때로는 원망하며, 때로는 불평을 하면서 각양각색의 패역과 형형색색의 패역이 수시로 생겨난다! 그것은 한두 번이나 우연히 생기는 생각이 아니고 또한 아주 조금 생기는 생각도 아니다. 그럼 그것은 어떤 것이냐? 사람은 일을 저지르거나 말을 하게 되는데, 패역한 말이나 패역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사람의 패역 성정이 아주 심각하다는 것이다. 전에 사람의 순복은 단지 상대적인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람의 패역은 여전히 아주 큰 것이다. 비록 그를 하나님이라고 인정은 하지만 절대적인 순복은 없고, 자신의 모든 것을 그의 말씀대로 따르지 못하고, 그의 지배에 맡기지도 못하여 아직도 자신의 선택과 속셈이 있고, 자신의 동기와 의도가 있으며, 아직도 자신의 생각이 있고 자신의 수단이 있다. 자신의 수단이 있고 자신의 방법이 있기에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뜻대로 한다. 그러면 사람의 패역은 너무나 큰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그런 성정과 본성은 겉으로만 조금 독선적이거나 자고(自高)하거나 교만하거나 혹은 말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거나 거짓말을 한다거나 하는 그런 간단한 패괴 성정만이 아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냐? 사람의 실질은 이미 사탄의 실질이 되어 버렸다. 그렇지 않으냐? 당시에 천사장은 어떻게 하나님을 배반했느냐? 지금의 사람은 또 어떠하냐? 지나치기도 하면서 또한 지나치지 않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은 무엇일까? 지금의 사람들은 배반뿐만이 아닌데, 겉으로 보여지는 천사장의 그런 배반뿐만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으로, 속셈으로 직접 하나님을 적대시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희는 “우리는 하나님을 적대시하지 않았는데요.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따라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겉면의 행실일 뿐인데 말한 대로 따르는 것 같이 보인다. 사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교통을 할 때에는 관념이 없고, 내가 정식으로 교통하고 말할 때에는 관념이 없이 착실하고 순순히 듣다가도, 내가 정상 인성에서 말하고 정상 인성에서 일할 때, 혹은 정상 인성의 활동을 하거나 정상 인성 생활을 할 때는 관념이 커져 머리 속에 담아 두지 못할 정도로 부풀어 오른다! 이것은 사람이 상대적으로만 하나님께 순복할 뿐, 절대적으로는 순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너희는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은 반드시 정상 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순복하지 못하느냐? 왜 절대적으로는 순복하지 못하느냐? 성육신 하나님은 그리스도이고 인자이며, 신성과 정상 인성이 있다. 겉면에 보이는 것은 정상 인성이지만, 신성이 정상 인성 안에서 살고 또 정상 인성 안에서 역사한다. 하지만 사람은 어떠하냐? 지금 하나님은 그리스도, 즉 육신이 되어 신성도 있고 인성도 있다. 왜냐하면 성육신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신성의 일부 역사 중의 일부분 말씀에만 순복할 수 있다. 하지만 정상 인성에서 하는 사역이나 말씀은 어떻게 대하느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데, 때로는 속에 어떤 생각과 견해가 생긴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의 내면 세계는 아주 복잡한데, 그런 패역한 것들로 아주 복잡하다. 그것은 더 상세히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신성에는 순복할 수 있지만 그런 패역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정상 인성의 일부 역사에는 순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아직 참된 순복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간단한 예를 들면, 할아버지든 아버지든 웃어른을 대함에 있어, 너는 그들이 집안의 웃어른이기에 그들을 존중하여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따를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이 거리에 나가면 너의 웃어른이 아니냐? 거리에서 너를 만나 “나는 네 할아버지가 아니냐? 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라고 하면, 너는 “모르겠는데요! 당신은 어디 사람이에요? 당신을 본 적이 없는데요.”라고 한다. 혹은 그들이 거리에서 너에게 말하면 듣지 않지만 집에서는 말을 잘 듣는다. 그것은 무엇을 설명하느냐? 너는 아직도 그들을 웃어른으로 여겨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한 예이다. 그럼 사람이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은 어떠하냐? 사람이 옳다고 여기거나 사람의 이치에 맞는 것은 듣지만, 사람의 이치에 맞지 않고 사람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듣기 싫어하고, 자신이 하기 원치 않는 것은 듣기 싫어하며, 듣기 싫어하는 것에는 순복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의 성정이 나쁜 것인데, 아주 악랄하고 나쁘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하다! 다시 말해, 사람은 순복할 때 선택적으로 순복한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보세요, 그 사람이 얼마나 말을 잘 듣던가요!”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네가 그 사람의 이익을 건드리지 않았고, 실제로 그 사람을 훈계하지 않은 것으로, 얼굴을 맞대고 훈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훈계하기만 하면 너와 사이가 틀어지고 언짢아 하며, 하루 종일 얼굴이 굳어져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네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무엇을 시켜도 하기 싫어한다. 그 사람에게 하기 싫어하는 일을 시키면 물건을 내동댕이친다. 물건을 ‘홱’ 내동댕이치는데, 그 사람에게 그런 성정이 있어 너와 팽팽히 맞서는 것이다. 사람의 성정이 얼마나 나쁜지 보았겠지! 그가 하나님인 것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대하느냐? 그것은 그들이 당시의 바리새인, 당시의 바울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었느냐? 그는 왜 예수의 제자를 핍박하고, 제자와 성도들을 그렇게 많이 잡아들였느냐? 결국 예수는 바울이 핍박하는 것을 보고 할 수 없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를 쳤다. 빛이 비취니 그는 엎드러졌다. 바울이 엎드러져 예수께 “누구시오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그에게 알려 주었다. 그 후부터 바울은 일어나 예수를 위해 전도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느냐? 사람은 말이다, 사람의 그런 본성은 이미 극도로 패괴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늘 “우리에게는 다 패괴 성정이 있어 하나님을 만족게 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겉면의 가장 얕은 인식이다. “사람은 정말 독선적이야. 사람은 정말 자고해. 늘 자신이 괜찮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겨!” 그것은 패괴 성정의 일부인 작은 방면이다. 너는 왜 자신의 그 본성, 내면의 생각, 속셈으로 하나님과 맞서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느냐? 하나님이 너에게 이렇게 하라고 하면 너는 기어코 저렇게 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려고 하면 너는 그렇게 하면 옳지 않다면서 기어코 하나님에게 이렇게 하라고 한다. 보아라, 사람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과 겨루려는 힘이 얼마나 크냐! 이러한 성정은 모든 사람에게 다 있는데,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혹시 어떤 사람들은 “저는 자신과 대조할 수 없어요.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할지도 모른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겠는데, 그것은 너희가 그리스도와 접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접촉하면서 익숙해지면 일주일 후에 너희는 틀림없이 태도가 달라져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내가 과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너를 과소평가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지금 패괴 성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성이 이미 패괴되었고, 정상 인성도 이미 파괴되었으며, 기존의 좋은 사람, 완벽한 정상 인성의 원모습이 이미 파괴되어 볼품없이 된 것이다. 성육신 하나님께는 정상 인성이 있지만, 사람에게는 정상 인성이 없어 사람의 마음에 맞을 리가 없기에, 어떤 일에서는 한사코 우기고 맞서게 된다. 왜냐햐면 사람에게는 순복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니까 어떤 일에서든 다 그분께 순복해야 해”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고, 또한 네가 그에게 양보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양보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은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고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므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여호와께 기도한 것처럼 말이다. 그 종은 어떻게 기도했느냐?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라고 하였는데, 등급을 분명하게 나눈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람은 어떠하냐? 하나님을 사람처럼 대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아, 정상 인성이 있고 정상 인성의 필요도 있으며, 정상 인성의 희로애락도 있고 정상 인성의 생활과 정상 인성의 활동도 있어. 그분께 신성의 역사가 있긴 하지만 정상 인성도 분명 있는 거잖아!” 사람의 마음속에 ‘정상 인성’이 자리 잡히게 되면, 신성의 성품을 전부 소홀히 한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는 아직 그리스도와 접촉한 적이 없는데, 너희들 가운데 누가 감히 “저는 하나님과 1년을 접촉해도 패역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느냐?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어 보아라. 아무도 자신이 없다. 사람은 지금 패괴 성정만 조금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아주 깊이 패괴되었다. 어떤 패괴된 것들은 너 자신도 파헤치지 못한다. 사람은 지금 깊이 빠져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이미 심한 정도로 마비되고 멍청해졌다. 그저 조금 우매한 정도가 아니라 이미 패역 본성이 형성된 것이다. 사람은 이제야 비로소 조금씩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접촉한 적이 있다. 하루나 이틀 접촉했을 때는 낯설어 함부로 하지 못하고, 속에 그래도 ‘이분은 하나님이셔!’라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일주일이나 보름 동안 접촉한 뒤에는 조금씩 갈수록 익숙해진다. 갈수록 익숙해지면 하나님과 쉽게 어울리게 되고, 갈수록 하나님과 어울리게 되면 하나님과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동일시하게 되는데, 중간에 경계선이 없게 되고 등급이 없게 되다가 나중에는 아예 등급을 없애 버리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과 더불어 생활하시고, 함께 즐거워하신다.” 나도 간혹 ‘이 사람은 왜 이 모양이지?’라고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늘 잠자코 있기 때문이다. 내가 늘 그를 훈계하고 혼내 주면, 그는 틀림없이 얌전하고 순순히 따를 것이다. 때로는 사람과 동등한 위치에서 한담을 나누거나 말하면 사람은 ‘흥, 거봐, 하나님이 나에게 얼마나 잘 대해 주시는데!’라고 생각한다. 너를 잘 대해 준다고 해서 너에게 패괴 성정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 너의 실질이 좋다거나 본성이 좋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조금만 잘 대해 주고 웃는 얼굴로 대해 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며 자신의 실질을 모른다. 자신의 실질을 잊은 것이다. 그 사람의 본성은 너무나 패괴되었고 극도로 패괴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제가 아주 괜찮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럼 너는 그리스도와 한동안 접촉해 볼 수 있는데, 네 안에 있는 것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아라. 한동안 접촉하면서 내가 일깨워 주거나 타이르지 않고, 너를 훈계하지도 않으며, 너와 교통하는 사람도 없이 스스로 체험하게 하면, 네가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체험할 수 있는지 보자. 너는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다. 틀림없이 실패한다. 사람은 연약만 조금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보고 생긴 관념을 내려놓지 못한다. 사람의 그런 패역 성정이 사람을 어쩔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너를 어쩔 수 없게 만든다! 사람의 그런 패역 성정, 본성, 교만, 배반하는 마음이 사람을 어쩔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나와 한동안 접촉하고 난 후에 어느 정도의 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의 반응은 있었지만 그것이 아직 굳어지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은 너무나 평범(원문: 正常)하기 때문이에요. 제가 예수님을 접촉하고 믿었다면 이러지는 않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네가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이다. 너희는 아마 당시에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을 부러워할지 모르겠지만, 너희도 그 시대에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유다보다 훨씬 나을 거야. 절대 유다가 될 수는 없어! 나는 유다보다 훨씬 나아,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돈을 함부로 쓰지 않을 거야, 잘 믿을 거야! 유다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돈도 함부로 쓰고 말이야! 예수님이 하신 사역만 봐도 그분은 그리스도인데, 유다는 왜 대적했지?’ 왜 대적했겠느냐? 유다의 본성이 그 자신을 어쩔 수 없게 하였다. 그의 본성은 너무 나쁘다! 베드로도 당시에 많은 고난을 받지 않았더냐? 그 역시 많은 고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 베드로의 인성은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았기 때문에 최종에 온전케 된 것이다. 그때, 그에게도 관념과 견해가 조금 있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조금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큰소리치지 말아야 한다. 겪지 않은 일에서 자신이 꼭 성공할 수 있고, 만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 마라. 그 말은 실제적이지 않고 비현실적이다. 너는 반드시 그 일을 겪은 다음에 자신이 인식한 것과 깨달은 것을 말해야 한다. 너는 “하나님, 저의 집에 오세요. 저는 다른 사람들처럼 당신을 화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처럼 인간성 없이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지 마라. 너도 그들처럼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정상 인성의 것들이 이미 파괴되어 원래 모습이 없어졌기 때문인데, 정상 인성의 양심, 정상 인성의 상식, 즉 교활하고 궤사하게 말하지 않고 말을 잘 듣고 순복하는 그런 것들이 사람 안에서 이미 없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 교활하고 궤사하게 말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고, 눈치놀음하고, 듣기 좋은 말을 하고, 말을 잘하여 비위를 맞춘다.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주 좋다고 여기며 정상 인성의 긍정적인 것들은 다 잊고 소홀히 하는데, 사람의 그런 삶의 원칙은 이미 변질된 것이다. 왜 사람에게 인성이 없다고 말하느냐? 이제는 ‘패괴 성정’이란 말을 자주 언급하지 않는다. 네가 “저에게 패괴 성정이 있어요”라고 하는데, 그것은 가벼운 것이다. 아주 가벼운 것이다. “저에게 패괴 성정이 있어요”라고 하는데, 너에게 조금 있는 것이냐 아니면 아주 많이 있는 것이냐? 사람은 “저에게 패괴 성정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패괴 성정이 있다는 것은 조금 독선적이고, 교만하고, 조금 궤사하게 말하거나 건성으로 사역하는 것 말고 다른 것은 더 없단 말이겠지? 그것뿐만이 아니다. 네가 말하는 그런 것들은 아주 가벼운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피조물의 기준에 부합되려면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실행 길을 찾아내고, 적합한 실행법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제는 너희들도 사람 중에 아주 좋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냐?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아직도 “그 사람은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대단히 착한 사람이거든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사람이 아주 좋은 사람이고 매우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마라, 좋은 사람은 아예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인성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인성이 없다고 말하느냐? 인성이 있는 사람이면 정말 그런 진리들을 실행할 수 있느냐? 그 역시 실행하지 못한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말해, 그 사람은 비교적 마음씨가 착하고, 온유하고, 사역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아, 그 사람은 틀림없이 절대적으로 좋아요. 흠이 전혀 없어요.”, “그 사람은 틀림없이 절대적으로 순복해요. 패역이 조금도 없어요.”, “그 사람은 틀림없이 절대적으로 말을 잘 들어요. 일을 건성으로 하지 않아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만약 너희가 이렇게 이해하면 또 그릇되고 치우친 것이다. 너희가 교통할 때 “아, 우리는 끝났어. 좋은 놈은 하나도 없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러면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듣고 “어? 끝났다고? 끝났어, 좋은 놈이 하나도 없는데 계속 남아서 무슨 사역을 하겠다는 거야? 차라리 다 떠나자. 끝났다면 될 대로 되라지 뭐. 끝장나도록 내버려 두자!”라고 하는데, 또 그릇되고 치우친 것이다. 그렇지? 너희의 머리는 온통 구멍이 생긴 것과 같아 어느 방면이든 다 막아야 한다. 가볍게 말하면, 너희는 인식하지 못한다. 얕게 파헤치면 인식하지 못하고, 깊게 파헤치면 사람은 견디지 못해 고개를 떨구고 기운이 없게 된다.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축 처지면서 “끝났어!”라며 무너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무너져서는 안 된다. 지금은 사람을 드러내어 사람의 그런 본성과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고, 왜 거역하는지 그리고 그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드러내야 사람에게 유익하다. 만약 드러내지 않으면, 끝까지 믿어도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 너는 또 “천사장은 교만해, 천사장은 교만해”라고 말하는데, 너는 어떠냐? 늘 천사장이 교만하다고 말하고, 이 사람이 교만하고 저 사람이 패역하다고 말하는데, 너 자신은 어떠냐? 어떤 사람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거역하는 거예요!”라고 늘 말하고, 걸핏하면 “패역 성정이 나왔다.”라고 말하지만, 그 근본 원인은 여전히 모르고, 그것의 실질적인 정형은 분명히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한다. 너희는 이런 말을 깨달을 수 있느냐?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많은 것을 교통했는데, 주로 한 방면은 사람이 어떻게 믿어야 완전하게 순복할 수 있고, 피조물의 기준에 완전히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패역을 드러내고 사람의 본성을 드러내어 사람에게 자신에 대한 인식이 있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스스로 자신을 인식하라고 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나는 괜찮아, 다른 사람보다 나아”라고 말할 텐데, 모두가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나는 그저 그래”라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과 한동안 지내고 나면 “흥, 내가 보기에 나는 그저 그런 사람인데, 너 역시 그래! 너는 나만도 못해! 나는 한 가지가 그저 그렇지만 너는 열 가지나 그래!”라고 말하는데, 자신이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이다. 너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여기지 마라. 너는 결코 다른 사람보다 낫지 않다. 사람의 패역한 실질은 다 똑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을 분명히 알았겠지? 너희는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으면서도 하나님께 순복하는 이런 작은 일조차도 하지 못하는데, 이렇게 믿는 것이 정말 황당하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내가 이런 것을 말하면 너희는 속으로 그렇게 느껴지지 않느냐?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여기고 있지 않느냐? ‘아,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이 오늘 이렇게 교통해 주시니까 알겠어.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았던 거야. 그 말씀은 옳은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였는데, 이제 듣고 보니 아주 맞는 말씀이야. 참, 이 몇 년간 어떻게 이렇게 황당하게 믿어 왔단 말인가? 그것은 장난친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정말로 참답게 믿지 않았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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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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