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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편 교만한 본성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근원이다

오늘 우리 몇 가지 제목을 가지고 이야기해 보자. 본성, 실질, 성정을 가지고 이야기하자. 어떤 사람은 “누구의 본성을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누구의 실질을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누구의 성정을 말씀하시려는 겁니까?”라고 물을 수도 있다. 이런 질문을 한다면 곤란하다. 당연히 사람의 것을 가지고 말할 것이다. 패괴된 인류의 본성, 실질, 성정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럼 본성이란 무엇일까? 본성은 사람의 고유한 성질이다. 즉, 사람에게 어떤 것들이 갖추어져 있는지, 사람이 어떤 것을 증오하고 어떤 것을 혐오하고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것들이다. 사실, 본성은 곧 실질이다. 각 사람의 본성으로 그 사람의 실질이 결정된다. 성정은 사람의 실질, 사람의 본성에서 유로(역주: 흘러나옴)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이 일을 하는 중에, 말을 하는 중에, 혹은 처세하는 중에 유로되는 성정이 바로 그 사람의 본성인 것이다. 유로되는 성정이 그 사람의 본성을 대표하고 그 사람의 실질을 대표한다. 이것이 본성에 대한 개념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혐오하고 어떤 것을 증오하고 어떤 것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인 것이다. 한 사람의 본성, 말하자면 한 사람의 실질이 좋고 나쁘고는 그 사람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혐오하는지, 그 사람의 취미가 어떤 것인지를 보면 된다. 이런 것을 보는 것이 관건이다. 예를 들어, 악행을 저지르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실질은 상당히 나쁜 것이다. 만약 선한 것을 행하고 의로운 것을 행하기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본성, 즉 그 사람의 실질도 좋은 것이다. 본성의 개념에 대해 내가 이렇게 말해 주니 이해할 수 있지 않으냐? 본성은 바로 실질이다. 예전에 사람에게 어떤 영이 있으면 어떤 실질이 있고,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어떤 영이고 어떤 부류의 영이면, 그런 유형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그것도 맞고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오로지 영에 따라 본성이 결정된다고 말한다면 좀 막연하고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다. 지금은 무엇으로 말해야 할까? 성정으로 사람의 본성을 증명하고 사람의 실질을 증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정은 유로되는 것이기에 사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말하면 비교적 현실적이다. 그렇지 않으냐? 만약 어떤 영이나 어떤 혼이 어디에서 온 것이면, 그러니까 사탄에게서 온 것이거나 마귀에게서 온 것이거나 어떤 부류의 귀신, 어떤 부류의 영에게서 온 것이면 그 사람의 본성도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막연하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그 영을 본 적이 없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영인지 사람이 볼 수 있느냐? 만질 수 있느냐? 어떤 혼인지 사람이 만질 수 있느냐? 그런 것은 다 더듬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물질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가 그 성정으로, 유로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성정으로 본성을 설명하고 사람의 실질을 설명하면 비교적 실제적이고 객관적이다. 그렇지 않으냐? 예전에 위트니스 리(李常受)가 영은 어디 속에 싸여 있고, 영은 또 어디에 있으며, 혼이란 가장 깊은 것이고, 영은 또 가장 표면적인 것이며, 또 살아내는 것은 어떤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은 문제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지? 위트니스 리가 어떤 식으로 설명해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혼에 대해 말해도 이해가 안 되고 막연하다. 영에 대해 말하면 더더욱 막연하고 신비해 보인다. 사람이 일단 영에 대해 말하고, 혼에 대해 말하면 어느 정도 막연한 색채를 띠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신비하고 꽤 공허하고 매우 공허하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사람이 상상할 수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영이나 혼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우리는 그것으로 본성에 대한 문제를 설명하지 않겠다. 그런 것은 다 볼 수도 없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실제적인 것이며, 사람의 생명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말들로 표현하고, 이런 말로 문제를 설명하면 된다.

본성의 개념에 대해서는 좀 전에 이야기했다. 하지만 지금의 사람들의 본성은 또 어떤 것일까? 너희는 알 수 있느냐?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된 후에 인류의 본성, 다시 말해 사람의 실질은 다 변했다. 그럼, 사람의 실질은 도대체 무엇일까? 지금은 모든 사람의 실질, 모든 사람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실질을 말하는 것이다. 인류의 본성, 사탄에게 패괴된 인류의 본성은 도대체 무엇인지, 오늘 우리는 주로 이 문제를 이야기할 것이다. 인류가 사탄에게 패괴된 후에 사람의 본성은 무엇으로 변했느냐? 너희는 말해 볼 수 있느냐? 너희는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 사람의 본성은 더 이상 사람의 위치에 서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위치를 넘어섰다.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더욱 높은 존재가 되려고 한다. 더욱 높은 것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을 초월하고 하늘을 초월하고 모든 것을 초월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이냐? 교만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사람의 본성이 교만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난 교만하지 않아! 나는 제일 얌전해. 난 교만한 말을 전혀 하지 않고 교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아.”라고 한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허튼소리를 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성급해할 필요가 없다. 잠시 후에 내가 천천히 얘기하고 나면 네가 인정하게 될 것이다. 교만, 이 교만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다 알고 있다. 누구누구는 교만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좋지 않다. ‘교만’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단어이고 좋은 용어가 아니기에, 아무도 자신에게 맞추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다 교만하고 다 그런 실질이 있다. 네가 “난 전혀 교만하지 않아요. 교만했던 적이 없어요. 지금까지 천사장이 되려고 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초월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초월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난 항상 얌전하고 분수를 지키는 사람이었어요.”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그것은 모를 일이다. 그 말은 틀린 것이다. 사람에게 교만의 뿌리가 있고 교만의 실질이 있으면,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는 일, 하나님에 대해 관념을 가질 수 있는 일,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고, 자신을 높이는 일, 자신을 증거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교만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어느 지역을 네가 혼자 이끌게 맡겨 둔 다음, 나도 너를 훈계하지 않고 상면에서도 너를 책망하지 않고 네가 혼자 이끌어 가게 둔다고 하자. 그러면 너는 이끌어 가면서 사람들을 자기 아래에 두고 다 자신에게 복종하게 한다. 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본성으로 결정되는 것이고, 순전히 자연스럽게 유로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히 유로되는 것으로 일부러 배울 필요가 없고, 일부러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다. ‘사람들을 자기 아래에 두는’ 일은 일부러 배울 필요도 없고 일부러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런 국면이 형성되어 사람들을 다 너에게 복종하게 하고, 다 네 말을 듣게 하고, 다 너를 숭상하고 높이게 하고, 다 너를 증거하고 칭찬하게 하고, 다 너에게 순복하고 모든 것을 다 너의 말에 따라 하게 하는 것이다. 너의 그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그런 국면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국면은 어떻게 형성된 것이냐? 교만으로 결정된 것이고, 사람의 교만으로 결정된 것이다. 교만한 표현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한 다음에는 독립 왕국을 세울 수 있고, 자신만의 방식을 쓸 수 있으며, 사람들을 자기 손안으로, 자기 품으로 끌어갈 수 있다.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지른다면 사람의 교만이라는 이 실질은 이미 천사장의 실질인 것이다. 사람이 곧 천사장이라는 것이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한쪽에 둘 것이다. 사람에게 이런 성정이 있으면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게 된다.

왜 수많은 교파의 리더들에게 수없이 전도하는데 어떻게 말해도 안 될까? 그들의 그 교만은 이미 본성이 되어 마음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이 이끄는 무리에 정말 하나님이 함께하셔요. 그 사람은 정말 하나님을 원하는 사람이에요.”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을 끌어 자신을 믿게 만드는데, 그런 자의 마음에 하나님이 있을까? 하나님이 없지 않겠느냐? 사람들을 끌어 자신을 따르게 하고, 자신을 높이게 하며, 자신이 사람들을 통제(원문: 壟斷)하여 다른 곳에 가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게 하고, 진리를 찾고 구하지 못하게 하고, 자기가 하는 말에 진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은 자신을 이미 어떤 존재로 본 것이냐? 하나님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게 있는 교만 때문에, 바로 그 교만 때문에 배반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너희들에게는 이런 일이 없느냐? 있다. 그럼 너희들도 사람을 통제할 수 있지 않으냐?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으냐? 그럴 수 있다. 단지 지금은 너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네가 사람들을 통제하기 전에 이미 그쪽으로 빠질 구멍을 막아 놓아 네가 감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서도 자신을 높인다. “봐요! 이 지역에 다른 사람이 와서 이끈다면 하지도 못할 거예요! 하나님이 오셔도 나를 거쳐야 하고, 또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도 내가 해야 해요! 내가 이 지역 사람들의 상황을 설명해 드려야 하나님도 여기 사람들에게 설교하실 수 있어요!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은 아예 안 돼요, 여기 사람들을 양육하지 못해요!”라고 한다. 이 말을 하는 속셈은 무엇일까? 이 말에서 유로된 그 성질은 어떤 것이냐, 바로 교만이다!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에 속한다. 이런 일은 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이고, 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교만으로 사람은 자신을 높여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고, 또 자신을 높여 사람들을 통제하고 사람들을 망치고 자신도 망치게 되는 것이다. 저지른 것이 심하면 결국 도태될 것이고, 만회할 여지가 있을 정도로 경하면 심판을 겪고 더욱 심한 형벌을 겪게 될 것이다.

예전에 사람들은 늘 “하나님은 왜 마지막에 와서 심판, 형벌하시는 걸까? 왜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만들려고 하시는 걸까? 말씀은 왜 그렇게 엄한 걸까?”라는 말을 했었다.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아주 융통성 있게 하시고 규례를 지키지 않는다.”라는 이런 말이 있는데, 아마 너희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의 이 단계 사역은 사람에게 있는 ‘교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이 ‘교만’이라는 것은 아주 많은 것들을 대표하고, 아주 많은 패괴 성정을 대표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상대로 하는 것이다. 사람의 교만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지막에 사람이 거역하지도 않고 대적하지도 않으며, 독립 왕국을 세우는 일도 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일도 하지 않고 그런 비열한 일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것이든 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사람은 교만한 실질을 벗어 버리게 된 것이고 교만한 성정을 벗어 버리게 된 것이다. 교만은 아주 많은 형태로 표현되는데, 그중 하나는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 은혜를 요구하는 것이다. 무슨 자격으로 요구하는 것이냐? 너는 사탄에게 패괴된 사람이고 피조물이다. 사람이 살아 있고 숨을 쉴 수 있는 것만 해도 이미 크나큰 은혜를 받은 것이다. 네가 살아 있으면서 하나님이 땅에 만들어 준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많이 받은 것이다. 사람은 왜 더 요구하는 걸까?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교만한 것이다. 계속 달라고 하고, 항상 달라고 하면서 만족할 줄을 모른다. 늘 자신이 하나님보다 높지 못하고 하나님보다 가진 것이 적다고 생각하면서 항상 달라고 한다. 이것은 사람의 교만한 성정을 대표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부터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아마 ‘난 지옥에 가지 않고 천당에 갈 거야’, ‘온 가족도 복을 받고 나도 복을 받을 거야.’, ‘나는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것을 누릴 거야, 난 좋은 가정과 좋은 남편(아내), 좋은 자녀를 둘 거야, 나중에는 왕 노릇도 할 거야.’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전부 다 ‘나는 뭘 할 거야’라는 것이다. 사람의 이 성정, 속으로 생각하는 이런 것들과 이런 사치한 욕망은 사람의 교만을 대표한다. 내가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사람의 지위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사람의 지위는 흙먼지에서 온 것으로, 피조물이다. 흙으로 빚어 생기를 불어 넣으니 산 사람이 된 것이다. 그만한 지위일 뿐이다. 그런데 네가 하나님을 만나면 이것을 달라고 하고, 저것을 달라고 한다. 사람의 그 비천한 지위로 말하자면, 요구해서도 안 되고 입을 열어서도 안 된다.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까? 꾸준히 열심히 본분을 하면서 기꺼이 순복해야 한다. 만약 기꺼이 낮아지겠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된다. 너는 기꺼이 낮아지겠다고 하지 마라. 사람은 날 때부터 그런 지위인 것이다. 그렇게 기꺼이 낮아지겠다고 할 필요가 없다. 마치 ‘나는 기꺼이 낮아지고, 기꺼이 순복한다’는 식으로 할 필요가 없다. 사람은 날 때부터 당연히 순복해야 하고, 당연히 낮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위는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그런 지위에 있으므로 하나님께 토색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께 사치한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어느 대갓집에 똥 푸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똥 푸는 사람은 매우 더럽지? 매우 더럽다. 대갓집에서 가장 비천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주인에게 “당신 아들이 쓰고 있는 모자를 제가 가지겠습니다. 저는 대감께서 드시는 밥을 먹고, 대감께서 입으신 옷을 걸치고, 대감의 침상에서 잠을 자고, 대감께서 쓰시는 그릇과 수저를 금이든 은이든 다 가지겠습니다! 저는 똥을 푸는 공로가 있으니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 제가 이 집에 사는 한 당연히 가져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주인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느냐? 주인은 “너는 네가 어떤 놈인지, 어떤 역할을 하는 놈인지 알아야 한다. 너는 똥을 푸는 사람이야. 내 아들이 원하는 것은 당연히 주어야지. 내 아들은 그만한 지위가 있으니까. 차이가 있다. 그러니 너는 요구해서는 안 된다. 너에게는 달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까. 네가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신분을 가졌으면, 너는 당연히 그 위치와 신분에 따라 네 일을 하고, 네 의무를 다해야 한다.”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하지 않는다. 처음에 믿을 때부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온다. 그러고는 곧바로 손을 내밀고 입을 열어 계속 달라고 한다. “제가 복음을 전하면 당신은 저와 함께하시며 역사하셔야 합니다. 제가 나쁜 일을 하면 당신은 용서해 주셔야 하고, 관용을 베풀어 주셔야 합니다! 제가 사역을 많이 하면 당신은 저에게 상을 주셔야 합니다!” 마냥 달라고만 한다. 결론적으로, 사람은 늘 하나님께 요구하는데, 늘 그렇게 탐욕스럽다. 어떤 사람들은 사역을 좀 하면서 그 지역을 정말 잘 이끌었고, 아주 잘 이끌었다. 그런 후 높은 직책을 맡게 되면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높다고 생각한다. ‘봐, 당신들은 안 되지. 하나님께서 왜 날 중용하시겠어? 왜 항상 내 이름을 언급하시겠어? 왜 항상 나와 말씀하시겠어? 왜 항상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으시겠어? 하나님께서 날 괜찮게 봐주시기 때문인 거야! 왜 그렇게 봐주시겠어? 난 유능하니까! 내가 다른 사람보다 유능하고 다른 사람보다 높으니까 그런 거야!’ 이런 성정은 좋지 않다. 그다음에는 또 어떻게 생각할까? ‘흥, 하나님께서 내게 좀 잘해 주시니까 당신들이 질투하는 거야. 질투할 게 뭐 있는데? 왜 질투하는 거지? 내가 한 사역, 내가 치른 그 많은 대가는 왜 못 보는 거야? 하나님께서 내게 좋은 것을 주셔도 당신들은 당신들이 질투해서는 안 돼, 이것은 당연한 거니까! 난 사역을 오래 했으니 자본이 있는 거야! 고난도 많이 받았으니 난 자본이 되는 거야, 난 그만한 공로가 있어!’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흥, 하나님께서 날 사역자 모임에 참가시켜 주셔서 하나님의 교통을 듣게 해 주시는 건, 내게 그만한 자본이 있기 때문이야, 당신은 그런 자본이 있어? 첫째, 난 소질이 뛰어나고, 또 당신보다 더 잘 추구하고 당신보다 사역도 잘해. 또 하나는 내가 당신보다 화비도 많이 해, 난 한 지역도 이끌 수 있는데, 당신은 할 수 있어?’라고 한다. 이런 것은 다 교만이다. 사람이 사역을 하다 보면 효과가 보이는 사람이 있고, 효과가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다. 효과가 보이는 사람은 그만한 소질을 타고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다 예정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효과가 보이지 않고, 사역할 때 능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은 어떠하냐? 사역을 잘하는 사람이든 좀 부족한 사람이든 이런 생각이 있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난 하나님과 동등할 만한 자본이 돼, 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릴 자본이 있어! 난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자본이 있어! 난 다른 사람들을 이끌 자본이 있고, 다른 사람을 훈계할 자본도 있어.’라고 여기지 마라. 너는 ‘자본이 있다’고 하지 말라.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네게 이런 생각이 있다면 너는 아직도 위치에 제대로 서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네가 그 정도의 이지(理智)도 없다면 교만한 성정을 어떻게 벗어 버리겠느냐? 그것마저도 벗어 버리지 못한다.

심지어 지금도 어떤 사람은 “저는 자신을 모르겠어요! 제게는 패괴 성정이 없어요, 제게는 교만이 없어요!”라고 한다. 자신에게 교만이 없다고 말하는 자체가 더욱 교만한 말을 하는 것이고, 누구보다도 교만하고 누구보다도 패역한 것이다! 교만이 없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교만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교만한 사람이고, 교만함이 더 심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다 자신을 인식할 수 있고 다 자신의 정형을 맞춰 볼 수 있는데, 왜 너는 하지 못하느냐? 너만 예외란 말이냐? 네가 성인(聖人)이냐? 네가 진공 속에서 사는 사람이냐? 너는 사람에게 패역과 패괴 성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데, 너의 말대로라면 너같이 좋은 사람은 아주 많다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주 많다면, 왜 세상에는 아직도 패괴가 있고, 세상이 흑암과 더러움으로 가득하고, 결국에는 전쟁으로 가득한 것이냐? 왜 그런 것이냐? 왜 서로 빼앗는 것이냐? 크게 보면 온 세상은, 작게 보면 모든 가정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예외 없이, 믿는 가정이든 믿지 않는 가정이든 다 똑같다. 사람과 사람은 늘 다툰다. 그런 다툼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여전히 교만에서 온 것이고, 교만방자에서 온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만을 벗어나지 못하고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실질이다. 사람의 실질에서 교만이 유로되고, 패역이 유로되는데, 실질에서 이런 것들이 유로된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만 왜 진리를 실행하지 못할까? 하나님을 믿지만 왜 하나님과 합하지 못할까? 그것 역시 사람의 교만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틀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에게 진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진리가 있지만 사람에게는 진리가 없으므로 마음이 합하지 못하여 늘 대립하고 맞서는 것이다. 지금은 어느 지경까지 이르렀느냐?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고, 하나님과 대립하는 면에 서게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이 요구한 대로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풀어 주면 안 되는 것을 요구하고, 사람에게 요구한 것은 하지 않는다. 지금 보면, 하나님은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저버림당하고 있다. 하나님은 심판하는 분이어서 사람의 패괴 성정을 심판하고 형벌하고 있지만, 사람은 여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의 교만은 어느 지경까지 이르렀느냐? 이전에는 늘 왕이 되어 주권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했었다. 그것은 물론 대표적인 교만이다. 지금은 실질적인 것들이 아주 많이 있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왔는데, 사람은 대접을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생활비를 요구하고 상을 요구하며 축복을 요구한다. 또 하나님을 대접하고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접했다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고 또한 하나님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여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보게 한다. 또한, 극소수의 사람은 속으로는 분명히 하나님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을 대접하고는 교회에 대접비를 요구한다. 이렇게 교만한 사람이면서도 자신에게는 패괴 성정이 없다고 말하고, 자신은 누구보다도 잘 믿고 있고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말하며, 자신은 누구보다도 더 잘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제가 믿은 지가 얼만데요? 20년이나 됐어요. 제가 믿었을 때는 교회도 없어 정말 사방으로 뛰어다녔지요.”라는 식으로 자화자찬한다. 그렇게 자화자찬하는데, 왜 하는 것이냐? 너는 자신을 칭찬할 자격이 없다. 지금은 마땅히 자기 뺨을 때려야 하고, 자신을 저주하고 자신을 혐오하고 증오해야 한다. 사람은 왜 자신을 칭찬하는 것일까? 교만한 성정이 너무 심하여 이미 절정에 달했고 극치에 달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 단락 말을 하거나 한 구절 말을 할 때, 어느 한 구절, 어느 한 단락에도 거기에 있는 어투, 속셈, 말꼬리에는 다 교만한 것이 묻어 있고 다 교만한 실질이 들어 있다. 내가 간단한 예를 하나 들겠다. 새 신자가 한 명 왔다. 그 사람은 아주 무던하고, 성실하고, 믿음 생활도 착실하고 진심으로 추구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새 신자를 업신여기며 높은 자리에 서서 “믿은 지 얼마나 됐어요? 어디서 왔죠? 아직 남아 있는 관념 같은 건 없나요?”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한 적이 없는데, 그들은 어투가 강하다. “아직 어떤 면에서 잘 모르겠어요? 기본적인 진리는 갖추었나요? 제대로 갖추었다면 복음을 전해야죠!”라고 말하는데, 네가 무슨 자본이 있어서 그 사람을 그렇게 훈계하는 것이냐? 다 같은 사람이지 않으냐, 너는 기껏해야 조금 더 일찍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런데 패괴 성정의 그 교만한 실질, 그 오만한 것들을 아직 벗어 버리지 못했으면서 무슨 자본으로 다른 사람을 훈계하는 것이냐? 물론 그 사람과 교통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관점과 마음가짐이 바르지 않고 태도가 옳지 않다. 성질이 너무 악랄하다! 나는 어떤 사람과 통화하다가 그 사람에게 기분도 좋게 해 주고 복음도 잘 전하라고 격려해 주는 차원에서 어떤 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내가 어디에는 전도해서 사람들이 좀 들어왔다고 말하니 그 사람은 “그럼 좋죠! 괜찮네요! 아주 좋네요, 계속 전하라고 하세요.”라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은 말끝마다 자신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이며, 게다가 참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정말 잘 순복하고 진심으로 화비하고 싶고, 진정으로 대가를 치르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런 성정을 드러내고 이런 말을 유로한다. 그럼 이 부류 사람들의 실질은 도대체 무엇이냐? 이런 사람의 결말은 어떻겠느냐? 어떻게 되겠느냐? 이런 사람은 무엇을 얻어야 걸맞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들을 하지 않고 항상 모른 척하면서 이 일을 계속 외면한다면, 이 부류의 사람들이 어느 지경까지 가게 될지 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보면, 그들은 교통하는 말투부터 글렀는데, 교만하다. 항상 높은 자리에 앉아서 가르치려고 하고, 자기도 끼어들어 한마디 하고 싶어 하며, 평가를 하려고 들고, 자기를 좀 내세우려고 하고, 무게를 잡으려고 한다. 누가 그런 사람과 접촉하고 싶어 하겠느냐? 솔직히 말하는데, 너희 대다수를 보면 나는 정말 구역질이 난다. 접촉하자마자 세 마디도 채 끝나기 전에 굽실거리고, 접촉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감히 하나님을 가르친다. 나는 이런 사람과 한동안 접촉하고 나면 상대하기 싫다. 그런 사람은 본래보다 더 엄중해지고 더 심해진다. 너희들도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너희들이 자식을 고생스럽게 키웠는데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너희는 어떤 심정이겠느냐? 너희들도 이런 일쯤은 당연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고 알 것이다. 사람이 자식을 키우는 것은 노후 대책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었을 때 자녀들이 천대하고, 말을 해도 거드름을 피우며 훈계하거나 화나게 하고, 심기를 건드려 괴롭히면서 전혀 효도하지 않는다면, 부모의 심정은 어떻겠느냐? 화도 나고 슬퍼하지 않겠느냐? 너희들은 지금 나이가 많지 않지만, 너희들도 나이가 들어 이런 상황에 처하면 틀림없이 슬퍼할 것이고, 또 미워하고 후회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곳을 다니며 많은 사람을 접했다. 접했던 사람들 중에,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고, 동등한 자격으로 교통하고 대화를 주고받으며 일상생활을 나누었던 사람들 중에는 “아, 하나님께서 나를 잘 대해 주시는데, 난 정말 인성이 있어야지, 양심이 있어야지,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어.”라고 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이런 일은 너희가 다 알고 있다. 내가 없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니 너희는 잘 알아봐도 좋다.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무릎을 꿇고 다 굽신거리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네가 양심적인 일, 인성 있는 일을 좀 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양심적인 일, 인성이 있는 아주 작은 일도 하지 못하고, 말 하나도 자신의 위치에 서서 하지 못하고, 자신의 본분도 지키지 못하는데, 행하는 것은 말할 것도 못 된다. 더욱 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얼마나 교만한지, 천사장보다 10배, 20배나 더 심한데, 점점 더 심해진다.

어떤 사람들은 소질이 조금 뛰어나 사역을 할 수 있어서 교회를 이끌게 했다. 하지만 이끌기 시작하고부터는 제대로 하지 않고 교만해지기 시작한다. 그 사람의 소질을 보면 확실히 괜찮다. 그럼 써 보자 하고 쓰긴 하는데 깊게 말하지는 못한다. 깊게 말하면 “흥, 난 집에 갈 거야. 누구에게 맡겨서 할 수 있는지 보겠어! 그때 가서 성령께서 드러내실 거야!”라고 하면서 나자빠진다. 얼마나 교만하면 이런 말을 하겠느냐! 어느 정도로 패역했으면 자신이 하는 그런 말, 그런 일들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전혀 의식하지 못하겠느냐! 어느 날에 이르러, 너희 자신이 어떤 교만한 말을 했었고, 어떤 교만한 짓을 했는지, 그렇게 한 동기와 추악한 몰골을 카메라로 녹화해 한 장면씩 너희에게 보여 주면서 내가 해부하면 너희는 자신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이 지경으로 무감각해졌다는 말이냐? 이렇게 지적하지 않고 이렇게 말하지 않으면 인식할 수 없단 말이냐? 인성 있는 일을 할 수 없단 말이냐? 꼭 때려야만 하겠느냐? 꼭 몽둥이로 때려야 하는 것이냐? 그렇게도 값어치가 없단 말이냐? 그 정도로 교만하단 말이냐? 사람이 이제는 이미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이 정도로 교만하여 징계는 아예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실제 하나님을 믿은 후부터 저는 이 길이 맞다고 느꼈어요.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성령의 역사도 있어요! 그분이 하신 말씀은 진리가 있고, 사람의 성정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 왜 징계가 없을까요? 제가 누차 죄를 짓고, 누차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했는데, 왜 항상 징계가 없는 거죠?”라고 한다. 너희가 말해 보아라, 만약 천사장이 배반할 당시에 조그마한 징계만으로, 두통이 좀 있고, 복통이 좀 있고, 걷지 못하게 하는 정도로 징계했다면, 다 나은 다음에는 또 배반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 교만한 성정을 제거할 수 있겠느냐? 제거하지 못하겠지? 그래서 지금의 사람은 매우 교만해졌고 그 교만은 천사장보다 10배, 20배 더 엄중해진 것이다. 징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너희는 징계로 성정을 변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너에게 정말로 추구하는 마음이 있으면, 너는 교만하지 말고 너의 양심과 그 인성으로, 조금이나마 있는 그 인성과 인간미로 변화되고 추구하고 진입해야 한다. 너에게 인간미가 전혀 없다면 너는 짐승에 속한다. 짐승에 속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되니 변화되든 말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말한 대로 지금의 사람들은 징계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노력하고 추구하면 된다. 그렇게 많은 진리를 말해 줬고, 너희 또한 못 본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많은 역사도 너희는 다 직접 경력(역주: 체험)했으니 어찌 된 일인지는 다 알고 있다. 그러므로 노력하고 추구하길 원하는 사람은 양심으로, 조금이나마 있는 인간미로 노력하고 추구하면 된다. 만약 “나는 전혀 추구하고 싶지 않아, 나는 기꺼이 타락하겠고 계속 타락하고 싶어”라고 하는 사람이라면, 징벌을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지금은 어떤 사람도 징계하지 않는다. 보다시피 내가 여기서 너와 말을 하고 있지만, 나는 그저 말을 하여 너를 드러낼 뿐이다. 네가 정말 내 말을 마음속에 새겼다면 노력하고 추구하고, 마음속에 새기지 않았다면 징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진리를 공급하는 것 외에도 폭로와 심판과 형벌이 있다. 그다음은 징벌과 보응이다. 보응인 것이다! 물론 보응과 징벌은 시간적 문제이다. 혹시 어느 날 네가 어느 행정을 범하게 되면 너는 목숨을 잃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너희 모두에게 징벌이 닥칠 때에 가서야 깨닫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권하고 싶다. 그때가 되면 너는 끝났고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추구할 기회가 없다. 그러므로 징벌이 임했을 때에 가서 추구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아직 때가 이를 때 빨리 깨어나 인성 있는 일을 좀 하고 양심적인 일을 좀 해야 한다. 항상 얼빠져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는 말라! 사실, 너희에게 해 준 말은 이미 아주아주 많고, 너희에게 준 것도 아주 많다. 이것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이미 보았고, 알고도 있으며, 참으로 확신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난 좋은 사람이고 정말 인성이 있는 사람이야.”라고 하는데, 정말 인성이 있다면 왜 교만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느냐? 왜 인성이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느냐? 왜 인간미가 전혀 없느냐? 사람의 교만이 어느 지경이 되면 하나님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다 가지려고 들고, 하나님께 경배하고 순복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비열한 일도 다 저지를 수 있다.

나는 많은 곳을 다녔는데, 나를 대접한 사람은 식사 한 끼에 10위안씩, 하루 식비 30위안을 요구했다. 그 외에 숙박비 70위안을 추가로 요구했다. 그리고 이불이나 먹을 것 또는 일부 용품 등은 다 교회 돈으로 사라고 하였다. 나는 ‘이 사람들은 어떻게 양심이 눈곱만큼도 없을까? 내가 이들에게서 밥 한 끼 먹을 자격도 없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도 값어치가 없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가든 다 선불로 생활비를 요구하였다. 집에 친척이 와도 음식을 네댓 가지는 차려 공짜로 먹여 준다. 공짜로 먹여 준 다음에도 앞으로 계속 잘 지내야 하니 좋게 좋게 이야기한다. 이전에는 그런 식으로 말하고 교통도 하면서 기꺼이 진심으로 대접하겠다고 말해 놓고, 정작 내가 가니 그렇게 대하는 것이냐? 그런 꼴이냐? 밥 한 끼 먹을 자격도 없을 정도로 대하니, 그게 어떻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인성이 있다고 하겠느냐? 나는 너에게 헛소리를 하지 말고 입만 놀리지 말라고 한다. 너는 인성이 없으므로 하지 못한다. 너의 그 실질, 너의 그 본성, 너의 그 교만 때문에 너는 낮아지지 못하고 누구보다도 높아진다. 내가 보니 사람의 믿음은 너무도 작다. 믿음은 너무나 작다. 교만이 심해져 어느 지경에 이르고 패역도 어느 지경에 이르면 하나님을 용납하지 못하게 된다! “당신이 아무리 진리가 있어도 사람인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내게 무슨 도움이 될 수 있겠어요? 날 어찌할 수 있겠어요? 나를 어디로 데려갈 수 있겠어요?”라고 하면서 업신여긴다. 하나님인지 아닌지는 상관이 없다. 그런 사람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는다. 내가 장담하지만, 너희들 직장의 공장장이 너희 집에 왔다가 가려고 하면 가지 못하게 잡아당기며 한 이틀 더 지내다 가라고 하면서 정성껏 대접할 것이다. 그러므로 늘 교만하게 큰소리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원해,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원해! 난 누구보다도 진리를 실행하고, 나는 누구보다도 화비하고 대가를 치르고, 나는 누구보다도 충성해.”라는 말로 자화자찬하지 마라. 너는 그럴 자본도 없거니와 그런 대가를 치르지도 않았고 그렇게 실행하지도 않았다. 하루 이틀은 괜찮겠지만, 시간이 길어지면 버티지 못하고, 견지하지 못한다. 너는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다고 여기지 마라. 아무에게도 자랑할 만한 밑천이 없다.

어떤 곳에서 나를 오라고 했을 때, 내가 사람들이 나를 대접하지 않았다고 했더니 그들은 마치 앞장서서 하겠다는(원문: 挑戰) 것 같았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데, 저희가 대접해야죠. 전 하나님을 원해요, 하나님을 저희 쪽으로 모셔야죠, 저야 이런 고난을 받고, 이 방면의 기능을 해야죠.”라고 한다. 하지만 내가 정작 간다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의 지위가 없으며, 전부가 허황된 것, 지위, 돈, 물질, 세상뿐이기 때문이다.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 언변이 좋은 사람, 너에게 일 처리해 줄 수 있는 사람, 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너의 가정을 받쳐 줄 수 있는 사람, 너를 부자가 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 너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존중하고, 그런 사람에게나 아첨하고 알랑거리고 비위를 맞춘다. 그래서 나는 너에게 일 처리도 해 줄 수 없으니 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는 “난 앞으로 하나님과 접촉한다면 절대 하나님을 조금도 기만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을 거야.”라며 맹세를 한다고 해도 일정한 시간 동안 검증을 해 봐야 한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과 접하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들과 접하면서 그들이 하는 짓을 보면 너무나 화가 난다! 내가 이런 일로 얼마나 화가 많이 났는지 너희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특히,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으면서 늘 권력을 잡아 사람을 통제하려고 하는 자들을 보면 나는 더욱 화가 나고 혐오하게 된다. 진리를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다 아주 고약하고 인성이 없다. 나는 그런 자들과 일절 접촉하지 않는다. 그런 자들은 아마 내가 자신들을 외면하는 것을 보면 원망할 것이다. 그런 자들은 너무나 이지가 없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다 진리를 추구할 줄 모르고 분량도 너무 작다. 사람에게 갖추어진 그 정도의 인성만으로는 절대 안 된다. 접촉할 수가 없다. 네가 그런 사람과 이틀만 접촉해도 그 사람은 너를 업신여기며 교만하게 굴 것이다. 그런 것에는 누구보다도 반응이 빠르다. 교만, 정말 교만하기 그지없다.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는다. 그 사람을 보면, 그는 세상에서 관직에 있는 사람, 지위가 있는 사람에게는 그 지위와 관직을 보고 아부하며 항상 잘 대해 주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존중하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런 인성이 없고, 또한 교만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몇 마디로 요약해서 말하기도 어렵다. 사람은 너무 마비되었고, 자기 주제도 모를 정도로 교만하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어떤 사람은 “저 사람은 저 모양인데 왜 징계하지 않으세요? 훈계를 좀 하세요.”라고 한다. 그런 사람은 징계해도 쓸모없고 훈계해도 쓸모없다. 그런 사람은 너무 악하다. 그런 사람은 그런 것들이 조금 있거나 간혹 유로되는 것이 아니라 성정이 너무 나쁜 것이다. 나쁘다 못해 나를 욕할 수도 있고, 나와 말다툼할 수도 있는데, 그것도 눈을 부릅뜨고 무릎을 치면서 길길이 날뛸 수 있다. 너는 그런 사람을 건드릴 수 있겠느냐? 그런 사람은 그렇게 많은 과정을 거칠 필요 없이 바로 징벌을 받게 하면 된다.

나는 이전에 많은 곳을 다녔는데, 지금은 왜 많은 사람들을 접하고 싶어 하지 않겠느냐? 그것은 사람들이 나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람들 가운데서 생활하고 계시잖아요?”라고 한다. 정말로 영체라면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도 다 괜찮을 것이다. 예수의 영체와 같으면 마음대로 사역해도 사람은 감히 대적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육신이고, 그것도 매우 정상적인 육신이기 때문에 사람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성정의 사람에게 그저 한 달가량 두통을 앓게 하는 정도의 징계를 준다고 소용이 있을까? 소용이 없다. 그런 사람은 한 달 동안 머리가 아파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도 속으로 삿대질하면서 욕할 것이다! 그럼, 그런 사람이 변화될 수 있겠느냐? 그저 징계만 한다고 변화될까? 변화되지 않고 변화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말하는데,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되고 오직 행하기만 해야 한다. 너를 써 주면 너는 그저 전력을 다해 하기만 하면 된다. 너를 써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네가 쓰기에 합당치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니 너는 빨리 물러나면 된다. 너는 순순히 얌전해야 하고, 무엇을 얻으려고도 하지 말며, 네가 무엇을 해야 하면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되고, 너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면 그것을 하면 된다. ‘내가 이 일을 다하고 나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날 칭찬하실까?’라고 바라지도 말라. 또 ‘난 2년을 했으니 2년 정도 되는 자본이 있지만, 저 사람은 5년을 했으니 5년 정도의 자본이 있어, 난 저 사람과 비교가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난 10년을 했으니 저 사람보다 5년만큼 자본이 더 있는 거야.”라고 말하지 말라. 그런 것을 비교하지 말라. 그런 것은 비교해도 소용없다. 네가 사람인 이상 너에게 숨결을 주지 않고 생명을 주지 않고 활력을 주지 않으면,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서는 안 되고, 자격을 비교해서도 안 된다. 아무리 자격이 있다고 해도 관록(원문: 老壽星)이 있다고 할 수 없으니 소용없다! 어느 지역을 너에게 이끌라고 맡기면 네가 그 책임을 져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그 구역을 이끌라고 맡기면 다른 사람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사역 방면에 대해서는 너도 당연히 교통해야 한다. 하지만 자격을 비교하지는 마라. ‘이 지역에서는 내가 자격이 더 있으니 당연히 날 먼저 존중해야 해! 내가 첫째이고 너는 둘째야, 나는 황제이고 너는 왕이야.’라는 식으로 이런 것을 따지지 마라. 어떤 사람은 “흥, 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직장도 버리고 가정도 버리고 남편도 버리고 나왔어. 남편이 날 패고, 때렸어도 난 나왔단 말이야. 흥, 근데 내가 지금 얻은 게 뭐가 있지? 아무것도 얻은 게 없어, 거기에다 하나님은 훈계까지 하시잖아!’라고 한다. 사람은 위치를 제대로 서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 너에게 인솔하라고 하면 너는 인솔자가 되는 것이고, 인솔하지 말라고 하면 너는 무명소졸로 그냥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너에게 사역을 맡기면 너는 할 수 있고, 사역을 맡기지 않으면 너는 하지 못하는 것이다. 너는 큰소리를 치지 말라. 그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고, 좋은 징조도 아니다. 큰소리를 친다는 것은 극단으로 가고 죽음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증명한다. 너는 “난 어디 어디에서 사람들을 많이 얻었어요. 그 사람들은 다 내가 맺은 열매예요. 그러니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돼요! 다른 사람은 안 돼요, 정말 안 돼요! 이건 실제 상황을 가지고 하는 말이에요. 내가 가지 않으면 정말 안 된다니까요. 내가 가야 성령이 크게 역사하세요! 보다시피 나는 아는 사람도 많고, 식견도 넓잖아요. 다른 사람은 언변이 안 되지만 난 말이 되잖아요. 난 누구에게도 안 밀려요. 무슨 말을 해도 제가 다 꺾을 수 있어요. 인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요. 거기에다 나는 성경도 알잖아요.”, 이런 식으로 큰소리치지 말고, 자화자찬하지 말라. 너는 마땅히 “정말 성령께서 역사하신 거야! 사람은 정말 겨우 이 정도밖에 할 수 없어! 복음을 다 전해서 사람을 다 얻은 다음, 하나님께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면 그때 돌아가야지.”라고 해야 한다. 너는 “내가 뭘 잘못했다고 집에 돌려보내는 거예요? 말해 봐요! 이유 없이 날 집에 돌려보내는 건 안 돼요.”라고 해서는 안 된다. 너는 이런 요구가 있어서도 안 되고, 이것을 따져서도 안 된다. 네가 이런 것을 따진다면 성정이 매우 교만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잘못이 없다고 해서 집으로 돌려보낼 수 없을까? 제대로 했으면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야 할까? 제대로 했어도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너는 돌아가야 하고, 제대로 했어도 훈계하면 너는 훈계를 받고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의무이고 책임이다. 너는 이치를 따지지도 말라.

욥은 무엇을 구했었느냐? 욥은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욥에게 준 것이다. 이전에 어떤 사람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것은 욥이 여호와께 잘했으니 당연히 여호와께서도 욥에게 주신 것이죠. 그건 일대일로 바꾼 거예요. 욥이 여호와께 드리고 여호와께서도 욥에게 주신 거죠. 장사할 때, 돈을 주면 물건을 받는 것처럼, 그것은 사 온 거예요. 그건 다 욥의 믿음과 바꿔 온 것이고 의를 행하여 바꿔 온 것이에요.”라고 했다. 그것은 바꿔 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기꺼이 베풀어 준 것이다. 나중에 여호와가 욥의 것을 다시 거두어 갔다. 욥은 아무런 원망이 없었고, “나는 의를 행하여 자격이 있는데 당신이 이렇게 저를 대하시는 것은 부당합니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부당하다는 것은 없다! 사람에게 일단 그런 선택이 있게 되고, 시비를 따지는 여지가 생기고, 당연한지 부당한지를 따지는 그런 말을 하거나 그런 마음이 있으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교만이고 패역이다. 너에게는 선택이 있으면 안 된다. 너희는 이런 일에 대해 좀 의식할 수 있느냐? 조금이라도 “전 정말 교만해요.”라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것을 의식하고 있느냐?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느냐? “나는 교만하지 않아요. 난 교만한 말을 전혀 하지 않아요.”, 이렇게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느냐?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 너에게는 그런 것이 있다. 단지 성격이 나긋하여 그럴 담력이 없어 유로하지 못했을 뿐이다. 네가 겉으로 유로하지 않았어도 속에는 있다. 속에 두고 있고, 담고 있고, 품고 있는 것이다. 유로되지 않았다고 네가 교만하지 않다고 증명되지는 않는다. 너는 누구보다도 더 교만하다. 너희는 사람이 포장할 줄 안다는 것을 인정하느냐? 그것은 인정한다. 그렇지? 사람은 포장할 줄 안다. 어떤 사람은 포장할 줄 알아 유로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다 ‘흥, 하나님이 저렇게 하시는 건 애들이 하는 거 같아, 저 말씀은 정말 어린애들 말 같아.’라고 생각한다. 어린애처럼 말을 했다면 또 어떻게 하겠느냐? 틀리고 맞고를 떠나 속으로 생각한 것은 또 무엇이냐? 교만이 아니냐?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다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공통점이다. 사람 본성의 공통점은 교만이다. 사람에게 일단 교만이 있으면 거역할 수 있고, 대적할 수 있고, 논단할 수 있고, 배반할 수 있고, 자신을 높일 수 있고, 독립 왕국을 세울 수 있다. 네가 못 믿겠으면, 너희들 중에 한 명을 미국으로 파견했다고 하자. 미국에 지금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데 2만 명이 넘게 받아들여서 열기가 뜨겁다고 하자. 그런데 내가 1년 동안 상관하지 않는다면, 1년이 아니라 딱 한 달만 너를 상관하지 않아 너 혼자 마음대로 하게 하고, 네가 어떻게 해도 다 맞고 다 된다는 권리를 준다면, 너는 열흘도 못 돼 사람들에게 너를 알게 할 것이다. 한 달이 되면 사람들은 “아, 저 자매님은 참 잘해(저 형제님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 저 사람의 말은 정말 하나님께서 발표하신 거야!”라고 하면서 다 너에게 무릎도 꿇게 될 것이고, 다 네게 엎드리려고 할 것이다. 말끝마다 ‘하나님’이란 단어는 전혀 없이 전부 “이 자매가 잘해”, “저 자매가 잘해”, “저 형제가 잘해”라고 하는 것뿐일 것이다. 그렇게 계속 네가 잘한다고 하고, 네가 하는 설교가 수준 높고, 네가 하는 말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이고, 네가 정말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다고 하게 된다. 그러면 그 사역을 어떻게 한 것이냐? 그 사람들에게 그런 반응이 있게 된 것은 네가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은 전혀 증거하지 않고 자신을 증거하고 자신을 드러냈다는 것을 증명한다. 왜 그런 걸까? 왜 그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저는 진리만 교통했어요. 저는 정말 자신을 증거하지 않았어요!”라고 한다. 네가 취한 태도, 네가 잡은 자세, 네가 쓴 방식은 다 하나님의 위치에 서서 사람에게 교통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긴 효과는 사람들이 너를 숭상하고, 너를 높이 받들고, 너를 부러워하고, 너를 칭찬하게 된 것이다. 결국, 사람들에게 너를 알게 하여 너를 증거하고 너를 높이 받들어 하늘까지 치켜세우게 한다면 너는 끝장인 것이고 실패한 것이다! 말해 보아라, 너희는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않으냐? 너는 보고 “2만 명이야! 허, 나는 본래 볼품없는 사람이고, 아직 자신에 대해 잘 몰랐는데, 오늘 보니까 2만 명을 이끌 수 있는 정도였구나! 이거 정말 기쁜데!”라고 하면서 마음이 흐뭇해진다. 그렇게 흐뭇해지는 건 큰 문제가 아니지만 말을 하면서 교만해지게 되는데, 하나님의 위치에 선 것이다. 말을 하면서 이래라저래라 지적하고, 무게를 잡으면서 비교한다. 그러면서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잠은 어떻게 자야 하는지, 세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걸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지경이 된다. 나아가 일반 형제자매들은 만나지도 않는다. 차츰차츰 너는 타락하기 시작하여 천사장처럼 쫓겨 내려간다. 그럴 수 있을까, 없을까? 가능하다! 다 가능성이 있지 않으냐? 그럼 너희는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 어느 날 정말 너희들 중에서 한 사람을 불러 사역을 하라고 파견했는데, 너희가 다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면 그 사역을 어떻게 확장하겠느냐? 이후에 어떻게 하겠느냐? 다들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면 정말 큰일이다. 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누가 너희를 섣불리 파견하겠느냐? 나가기만 하면, 새장에서 나가기만 하면 자유의 몸이 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날개가 자랐으니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어떻게 말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제 생각대로 하고 있는데 나를 거들떠보겠느냐? 너는 서서히 “난 지금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할 거야!”라고 말하게 되고, 그 사람들은 “아, 하나님이 오셨어. 봐, 하나님이 오셨어.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하려고 오셨어.”라고 하게 된다. 그럼 너는 “지금부터 사람을 심판할 것이다! 책 어느 어느 페이지를 펼쳐라.”라고 말한다. 거기 말씀을 다 읽고 나면 그 사람들은 “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 아, 하나님이 말씀하셔서 사람을 심판하셨어!”라고 말한다. 이 지경에 이르면 너는 끝장인 것이고 폐기된 것이다! 너는 그것이 대수냐고 하겠지만 너는 그 몇 마디로 자신을 망친 것이다. 교만해지더니 부지중에 자신을 망치게 된 것이다.

사람이 만약 그렇게 하는 지경까지 된다면 의식하지 못한다. 그런 것을 직감할 수 있는 기관이 이미 손상되고 기능을 잃었기 때문에 의식할 수 없다. 너는 그렇게 할 때에 가서 ‘자신을 잘 경계해야겠어. 제대로 기도해야지.’라고 하지 마라. 기도할 필요가 없다. 너는 일을 하기 전에 그런 일에 대해 알아야 한다. 너는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행해야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역도 잘하면서 자신을 증거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난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과 교통하고 어떤 방식으로 이 사람들을 인솔해야 할까’라고 생각하면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지금은 너희들을 양성하고 있다. 너희는 다 와서 예배드리며 교통을 듣고 있지만, 어느 날 정말로 너희들 중 한 사람을 파견했을 때 정말 그런 일들을 하게 되어 수많은 사람이 너희 손에 망쳐진다면 그것은 큰일이다. 그런데 내가 너희와 이런 말을 하지 않으면 되겠느냐? 말을 하기 전에 너희는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말을 한 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큰일이 아니겠느냐? 사역을 어떻게 하겠느냐? 어떻게 행해야 가장 적합할지 잘 생각해 보거라. 말을 하고 일을 하는 것과 일거일동, 일언일행, 모든 마음가짐이 다 통과되어야 한다. 하나도 빠져서는 안 된다. 이건 틈을 주면 안 되는 것이다. 비록 교만은 사람의 본성이고 그것을 고치기는 힘들지만, 이 방면에 대해 대책이 있어야 하고 실행법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위치에 서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교만하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합당하게 할 수 있고,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될까?’ 너는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누가 “당신은 사람들을 모두 당신 아래로 끌어갈 수 있나요?”라고 할 때 “그렇게 할 수 있어요!”라고 하면서 팔을 걷고 나서는 열의까지 생기면 큰일이 아니겠느냐? 너는 고민하지 말고 ‘정말로 내게 사람들을 맡긴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어떤 위치에 서야 할까?’라는 이런 방면으로부터 시작하거라.

지금 어떤 사람은 많은 지역을 맡고 있는데, 한 지역에 천 명 정도 된다. 누가 “당신 지역은 사람 수가 얼마 정도 되나요?”라고 물을 때, ‘천오백 명, 흥! 다른 지역보다도 많아. 어떤 지역은 3백 명밖에 안 돼, 얼마나 초라해! 당신도 그 사람들을 인솔하지 못할 거야! 당신 꼬락서니만 봐도 안 되게 생겼잖아. 봐, 난 천오백을 거느린다고!’라고 한다면, 이런 것은 어떤 성정이냐? 교만한 성정이 아니냐? 지금 기억을 자세히 더듬어 보거라. 네가 보았던 일, 네가 접했던 일, 네가 경력한 일, 네가 했던 말들을 잘 성찰해 보거라. 모든 일, 모든 말 속에, 마음가짐 하나하나에 다 교만한 성분이 들어 있다. 사람에게는 교만함이 뼛속까지 꽉 차 있어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로 교만하다! 정말 다른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이지가 없을 정도로 교만하고, 너무 유치할 정도로 교만하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할 때에도 어투에 힘을 주면서 “그거 좋네요! 참 괜찮아요!”라고 한다. 얼마나 유치하냐! 나는 나무라지 않고 나중에 너 스스로 살펴보게 한다. 너는 정말 유치하다고 느끼지 않겠느냐? 그 일을 보면 얼마나 생각이 없느냐! 얼마나 유치하냐! 얼마나 이지가 없느냐! 네가 그만한 상식마저도 갖추지 못했는데 무슨 인성까지 논할 여지가 있겠느냐! 어떤 사람들은 지금까지 오래 믿어 왔는데, 내가 접촉했던 사람들이다. 또한, 나를 만났으므로 다른 사람이 그에게 “저기, 하나님께서 오셨나요?”라고 물으니 “그 여자, 방금 갔어요!”라고 했다. 그 어투가 딱딱하고 매우 짜증이 난 듯해 보였다. 싫으면 믿지 않으면 된다. 빨리 집으로 갈 것이지 왜 계속 가지도 않고 따르고 있는 것인지. 그런 사람들은 후안무치하다! “그 복음 찬양 테이프 누가 가져갔나요?”라고 하니 “그 여자가 가져간 거예요! 그 여자가 가져갔어요!”라고 했다. 누가 가져간 거라고? 위아래 구분도 없는 것이다! 내가 존귀와 비천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마땅히 자신의 위치에 맞게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누구냐? “그 여자가 가져간 거예요! 그녀는 방금 갔어요!”, 나는 너희에게 항상 “하나님, 하나님” 하면서 입에 달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을 언급하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런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지금 말하는 것은 그런 사람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마음은 특별히 음험하고 악랄하며, 굉장히 교만하다. 너희들은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느냐? 말해 보아라, 너희가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면 혐오스럽지 않겠느냐? 밉살스럽지 않겠느냐? 아주 증오하지 않겠느냐? 만약 네가 아들을 하나 낳았다고 치자. 아들이 네가 늙었다고 싫어서 너를 길가에 버렸다. 그러고는 지나가다 만나면 “흥! 저 죽을 할망구, 아직도 안 죽었네!”라고 한다면, 너는 심정이 어떠하겠느냐? ‘엄마’라고조차 부르지도 않는다면 심정이 어떻겠느냐? 너는 가슴이 쓰리지 않겠느냐? ‘휴, 평생 고생하며 저렇게 키워 주었더니 노년에 효성은커녕 ‘엄마’라고 불러 주지도 않는구나!’라고 하면서 가슴이 쓰리지 않겠느냐? 너는 그 사람에게 인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성 도덕도 갖추어지지 않았는데 무슨 효성을 따지고, 충성을 따지겠느냐? 그럴 가치가 없다. 그런 사람은 너무나도 많다. 내가 본 것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아직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믿어서 무엇하느냐,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믿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구멍가게나 차려 살림이나 하여라.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믿고 있는데, 더 믿어서 무엇하겠느냐? 하나님이 대체 그 사람에게 무슨 죄라도 지은 것일까? 아니면 무슨 원수라도 진 것일까? 다른 사람들과 지낸다고 해도 그러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도 그런 사람을 만나면 매우 반감을 가지지 않겠느냐? 무엄한 것이 교양이라고는 전혀 없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반감이 생긴다. 극도로 반감을 가진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만 마음에 하나님이 없고, 일을 할 때에도 하나님이 없고, 양심에도 하나님이 없고, 마음에 하나님을 두어도 경외하지 않으며, 순복하는 마음이 없고 순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 너희는 스스로 해부해 보아라. 앞으로 “난 교만하지 않아. 난 좋은 사람이야. 난 좋은 일만 해.”라는 이런 말은 하지 말라. 이젠 이런 말을 하기 두려울 것이다. 이런 말은 얼마나 유치하냐! 다른 사람들은 다 교만한데 너만 교만하지 않다고? 또한 “저는 자신을 모르겠어요. 저는 제가 아주 잘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하지도 마라. 이제는 이런 말을 감히 하지 못하겠지! 다시 이런 말을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폭로했는데도 아직도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도 자신에게 교만이 없다고 하는구나. 얼마나 뻔뻔스러운 사람인가! 얼마나 마비되었는지 아무리 폭로해도 안 되는구나.”라고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아느냐? 말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왜 이렇게 사람을 폭로할까? 너희가 말해 보아라, 사람을 이렇게 폭로하지 않으면 사람이 자신에 대해 인식할 수 있겠느냐? 여전히 스스로 “괜찮네. 아주 좋아. 괜찮은 사람이야. 내가 하는 일들을 봐. 결점을 찾아낼 수 있어? 찾아낼 수 없잖아. 봐!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설교면 설교! 학력이면 학력! 소질이면 소질! 복음 전도도 한 수 하지! 다 돼!”라고 하면서 이런 식으로 “다 돼”라고 하게 되면 끝장인 것이다. 설령 다 잘한다고 할지라도 그런 교만한 정형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런 자본을 내세워서는 안 되고, 자화자찬해서도 안 된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바로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의 이런 본성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은 긴 시간에 걸쳐 파내야 한다. 조금씩 경력하고 조금씩 인식해야 한다. 인식하지 못하면 벗어 버릴 수 없다. 내가 폭로하는 것은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겠다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구원하지 않거나 구원 사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며, 앞으로 더 이상 말하지 않거나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저 사람은 자신을 높이는 짓을 할 수 있어도 난 그러지 않아. 난 그런 비열한 짓을 하지 않아.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데!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너의 그 성정은 어떠하냐? 비록 그런 짓을 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을 증거하는 말들을 하였고, 자신을 높이는 말들을 하였다. 단지 그런 사람처럼 그렇게 뚜렷하게 하지 않고, 그런 일을 노골적으로 거리낌 없이 하지 않았을 뿐이다. 네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너에게 그런 기회가 없었거나, 그럴 기회가 무르익지 않았거나, 너의 그런 것이 아직 드러나기 전에 그것을 격퇴시켰고 폭로시켰기 때문이다. 네가 아직 하기 전에, 그것이 아직 형성되기 전에 격퇴시킨 것이다. 사실 네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고, 네가 그런 사람보다 아주 좋다는 것도 아니다. 너에게 인솔자 직책을 맡겨 주면 너도 그런 짓을 할 수 있다. 다만 그런 방면의 것들이 너에게서 형성되기 전에, 네가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다 드러냈기 때문에 너의 그런 생각들이 숨을 곳이 없어 자연히 사그라진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는 ‘봐, 저 사람에게 인솔자 직책을 맡겨 주니 맨날 자신을 높이고, 맨날 사람들을 자기에게 순복하게 만들고, 계속 하나님의 사역에서 얼렁뚱땅했는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내려보내셨지? 나쁘니까 하나님께서 떨어뜨려 버리신 거야. 지금은 날 발탁해 주셨어! 난 그런 짓을 하지 않아. 난 절대,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지 말라. 너는 절대적이라고 하지 마라. 사람의 패괴 성정은 모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되어야만 패역이 드러나고, 적합한 환경에다가 기회가 무르익어야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이 춤을 추다가 느닷없이 교만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일은 없다. 반드시 그런 환경이 있고 그런 기회가 있어야만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성정과 그런 본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본성과 실질이 매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면 왜 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너에게 그런 환경이 없었고, 너를 치켜세우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너를 치켜세우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너는 잘난 척하며 높아지는데, 너는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되고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지 않으냐? 너희가 평소에는 ‘난 교만해지지 않을 거야! 교만하지 않고 거역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지 않도록 계속 자신을 경계하고, 항상 자신을 성찰해야겠어.’라고 하면서 자신을 경계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 모 자매님은요, 누구누구보다 사역을 잘해요. 그 누구누구를 보면 다 어때요? 실제도 전혀 없고, 자기 말만 듣게 하면서 도리와 겉면의 것만 교통하다 보니 사역을 잘하지도 못했잖아요, 지금 봐요, 모 자매님은 사역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데요.”라는 칭찬의 말을 들으면, 너는 그 자리에서 붕 뜨기 시작하고 몽롱해진다. ‘봤지? 내가 그 사람보다 낫잖아. 봐, 얼마나 좋아!’라고 하면서 너는 붕 뜨기 시작하고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너의 그 본성 또한 좋은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좋지도 않다는 것이다. 네가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서 너에게 없다고 증명하지는 못한다.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마치 가연성 물질이 있는데 불을 붙이지 않으면 타지 않지만, 일단 불을 가까이하면,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하다가 접촉하여 점화되기만 하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바로 이런 것이다. 너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칭찬해도 난 교만하지 않을 거야. 아무리 칭찬해도 난 자신을 높이지 않을 거야. 아무리 칭찬해도 난 이 사역을 잘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거고, 하나님보다 더 잘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거야. 난 교만하지도 않을 거고, 패역하지도 않을 거고, 교만한 것을 전혀 드러내지 않을 거야.’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불가능하다. 그건 불가능하다. 너는 그렇게 한다는 보증도 할 수 없고, 그런 말을 하지도 못할 것이다. 네가 할 수 있는 말은 어떤 것이냐? ‘어이구, 사람에게는 패역이 있어. 사람에게는 다 교만한 성정이 있어. 천사장의 성정이 사람 안에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어서 언제 또 드러나게 될지도 몰라!’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칭찬하지 않는데도 혼자 방에서 생각해 본다. 그러다가 “봐, 난 누구보다도 낫잖아.”라며 스스로 자신을 과시하다가 다른 사람의 칭찬까지 받으면 더욱 제대로 서지 못하고, 높아지다 못해 어디에 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은 “난 자신을 모르겠어! 내가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난 아직 하나님을 대적한 것 같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정도까지는 아직 안 됐다고 생각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네가 그 정도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네 속에 없다는 것은 아니다. 너는 이것을 말해야 한다. 이 말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네가 아직 그 정도에 이르지 않았고 아직 드러내지 않았다고 해서 네 속에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떤 사람은 실행할 줄도 알고, 항상 마음으로 경계하고, 그런 것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만들어 자신을 경계하고 성찰하면서 모든 것을 합당하게 하고 진리에 맞게 할 뿐이다. 그런 사람은 항상 경계하는 마음이 있고, 자신의 발걸음을 조심하여 그 한계를 넘지 않는 것이다. 기껏해야 이 정도이다. 어떤 사람은 솔직하게 “제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은 아마 그런 환경이 없었거나 다른 사람이 아직 저를 치켜세우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제가 사역을 별로 잘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저는 소질도 안 되구요. 정말 어느 날 제가 사역을 참으로 잘하게 된다면, 그때는 모르죠. 아마도 우쭐거릴 것이고, 교만한 것이 나오면서 다른 사람에게 수그리지도 않을 거예요.”라고 한다. 이런 것이 사실이 아니냐?

어떤 사람은 훈계와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말이 진리에 부합된다는 것을 속으로 분명히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너무나 교만하고 독선적이다! 왜 교만하다고 말할까?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불복하는 것이다. 불복하는 것은 교만 때문이 아니냐?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불복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여전히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교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들은 자세히 파헤치고, 자세히 따져 보고, 자세히 분석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파헤쳐야 한다. 사람들이 너를 인정해 주면서도 너에게 의견도 제기할 수 있고, 또 너와 마음을 열고 교통할 수도 있다면, 그것은 네가 사역을 잘했다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항상 너를 두려워하면서 마지못해 너에게 수그린다면, 그것은 너에게 진리가 없다는 것이고, 네가 하는 말들은 다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며, 네가 다른 사람을 속박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금 어떤 곳에서는 인솔자들을 해임시켰다. 왜 해임시켰을까? 그들은 자신을 증거하면서 자신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하고, 그들의 상황을 상면에 보고하면 그것은 거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사람은 나쁘지 않으냐? 이미 아주 심각해진 것이 아니냐? 그대로 계속 나가면 어떤 짓을 하겠느냐?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사람은 사람들이 모두 대놓고 자기를 증거하는데도 잠자코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흐뭇해하며 지위를 누린 것이다. 계속 그것을 누린다. 그런 사람은 차츰차츰 그렇게 나가다가 더 가게 되면 실패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그 지경이 되었다면 이미 끝장난 것이다. 더 이상 쓸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앞으로 더 이상 써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자들은 다 아주 위험하다! 그런 조짐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혹은 네가 사역을 하면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면 아주 위험한 것이다. 조금만 가지고 있어도 이미 매우 위험한 것이다. 네가 일을 저지르기 전에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아주 위험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면 안 되고, 너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양육할 수 없고, 네가 떠나고 다른 사람이 갔을 때 교회 형제자매들이 듣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 지역에서 너를 제외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이끌 수 없고, 누가 가든 손을 댈 수 없고, 바늘이 들어갈 틈도 없고, 내가 가도 안 될 정도라면, 네가 틀림없이 치우치게 이끈 것이다. 왜 내가 가도 안 될까? 진리로 생명을 공급해 주러 가는데 왜 다른 사람이 가면 안 되는 걸까? 그것은 네가 그 사람들을 이미 다 통제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다 너의 말을 듣는 사람들이지 하나님께 순복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진리를 행하는 사람들도 아니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렇다고 하는지 너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믿으면서 항상 하나님을 증거하고 항상 마음으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지 어찌 너를 생각하겠느냐? 어찌 너를 두려워할 수 있겠느냐? 어찌 다른 사람에게는 불복하면서도 너에게는 순순히 복종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어떤 까닭일까? 다른 사람에게 진리가 있는데도 왜 복종하지 못하는 것일까? 설마 네가 진리만큼 높기 때문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만약 네가 그 사람들을 다 통제하였다면 너도 끝장인 것이다. 출교시킬 대상이다. 망친 것이다. 너희들은 전부 다 조심하거라. 이것은 다 아주 위험한 일이다. 사람마다 아주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아마 “제가 그런 일을 한다고요? 겨우 고만한 일 가지고, 저는 절대 그런 일은 하지 않아요. 저는 절대 자신을 증거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시간이 짧기 때문이다. 시간이 길어지면 너도 간덩이가 커지고 점차 담력이 커진다. 할수록 담이 커지는 데다가 그 사람들까지 너를 칭찬해 주고 너에게 순종하면, 너는 자연히 자신의 위치가 높아진 것 같고, 자신이 대단한 것 같고, 자신이 아주 젊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다음 이전에는 자신을 볼품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이렇게 많은 사람을 이끌 수 있게 되었으니 자신을 그나마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이전에 상상했던 것보다는 높구나! 봐, 이만하면 괜찮잖아!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이끌 수 있고, 사람마다 내 말을 듣잖아! 내 말 안 듣는 사람은 다 제압할 수 있어! 봐, 이건 내가 그래도 이만한 사역 능력이 되고, 이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잖아.’라고 생각하게 된다. 시간이 길어지면 숨기지 못한다. 어느 날, 너는 너의 그런 것들, 너의 꼬리를 드러내게 된다. 그럼 잘못된 것이다. 그 지경이 되면 잘못된 것이다. 너는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한다. 드러나기를 기다리지 마라. 드러날 때가 되면, 내가 말을 해도 너는 듣지 않을 것이다. 너를 해임시키면 너는 “성령이 밝히 나타내시게 하자.”라는 이런 말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너희에게 이런 일들을 경계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독립 왕국을 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모두 지위를 좋아하고, 모두 부귀영화를 좋아하며, 모두 허영심이 많고, 모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

사람은 모두 위세를 과시하기 좋아한다. ‘내가 하는 말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이지, 한 번 겁을 줬더니 바로 고분고분 수그러들잖아.’, 이런 식으로 위세를 과시한다. 너희는 그런 위세 과시를 하지 말라. 그런 것은 해도 쓸데없다. 무엇을 증명할 수 있는 게 없다. 오로지 네가 매우 교만하고 성정이 좋지 않다는 것만 증명될 뿐, 너에게 능력이 있다고 증명될 수는 없다. 너희들 중에 ‘난 지금 정말 위험하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난 정말 그런 짓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느냐? 있느냐, 없느냐? (있습니다.) 있다고? 너희도 너희가 맡은 지역을 독차지하겠다는 생각이 있지 않으냐? 그 사람들을 너의 손안에 넣고 있으면서 ‘흥, 내가 맡은 지역의 사람들은 다 내 손안에 있어, 나의 이 ‘오지산(五指山)’에서 손오공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도 벗어날 수 없어. 누구도 그러지 못해, 엄두도 못 내지. 내가 있는 한 엄두도 못 내. 다른 사람이 온다면 뭐 벗어나려고 하겠지만, 내가 있는 한 다 내 말을 들어야 해. 감히 나를 거역할 사람은 없어.’라고 한다면, 이런 짓을 하게 되면 바로 귀신인 것이다. 네가 사람들을 다 통제했다면 너는 마귀이고, 너는 사탄이다. 만약 정말로 이런 사람이 있다면 아주 위험하다. 조심해야 한다. 많이 기도하고, 잘 기도해야 한다. 너희는 마땅히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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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②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③화비(花費): 몸과 마음, 시간, 노력, 물질 등을 바치다.

④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⑤성실(誠實): 거짓이나 꾸밈이 없음.

⑥오지산(五指山): 다섯 손가락을 산에 비유한 것으로,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부처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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