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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편 모든 일은 다 진리의 안목으로 대해야 한다

사람은 세상의 먹고 입는 것들에 대해 아직도 간파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채워 줄 수 있겠느냐? 사람의 심령 깊은 곳을 보면, 그런 것들은 사람의 마음에 필요한 것을 보충해 줄 수 없다. 대통령의 지위는 세상에서 가장 높다. 하지만 그도 때로는 공허함을 느끼고 사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데, 하물며 그까짓 옷 두 벌이겠느냐? 너희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싶어 다투는데, 그건 가치 없는 일이 아니냐? 얼마나 얼굴이 깎이는 일이냐? 어떤 사람들은 나와 함께 있다가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면 바로 이치를 따지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왜 그 사람에게 그것을 사 주셨지? 왜 나는 돌보아 주시지 않는 거지? 나도 이것저것 부족한데…” 너희에게 뭐가 부족하냐?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너희는 다투기만 하고, 탐욕스럽기만 할 뿐이다. 너희는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배불리 잔뜩 먹고 몸에 걸친 것도 괜찮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다. 그런데도 내가 하나하나 돌보고 신경 써 주어야 한단 말이냐? 그런 것은 내가 할 의무가 아니다! 다투지 말고 너희 스스로 원칙을 장악하여라. 너희가 서로 다투면 나는 너희가 역겹다. 이런 것들은 다 외면적인 것이어서 결코 내면의 것을 대신할 수 없기에 사람은 어떤 때, 겉으로 아무리 잘 입어도 심령은 여전히 공허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할 때는 다 알고 있지만 정작 일이 닥치면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데, 사람은 이런 일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관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매일 맛집에 가고, 끼니마다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상다리가 부러지게 진수성찬이 차려져도 만족해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그런 놈들인데, 굶어 죽은 귀신이 환생한 것이라 전생에서 굶은 것을 금생에서 보충하는 것이다. 돈과 권세가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좀 해부해 보아라, 그들의 인생은 어떤 인생이냐? 종일 맛집이나 호텔에 가는 것만 생각한다. 그들은 할 일도 없기에 먹고 난 뒤에는 또 고급 옷이나 구두를 사러 가고, 또 서로 선물하는데 온종일 그런 짓만 한다. 그들의 인생은 무엇이냐? 그들에게는 인생이 없다. 그들의 가치관은 무엇이냐? 날마다 술을 잔뜩 마시고 고기를 처먹고, 날마다 호텔과 맛집에 다니고 브랜드 옷을 입으면 만족해하는 것이다. 그들 인생의 가치는 바로 그런 것들인데, 얼마나 가치가 없느냐! 그런 사람은 다 어떤 놈들이냐? 그들은 다 짐승이 환생한 것이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무엇을 해도 다 적당한 정도가 있어야 하고, 음식을 먹어도 적당하게 먹어야 한다. 정상 사람은 늘 같은 음식을 먹으면 질려서 입맛을 좀 바꾸고 싶어 하고 입맛에 대한 적절한 요구가 있는데, 이것은 인성의 정상적인 면이다. 누리는 것도 늘 끝없이 누리면 그것은 바로 짐승인 것이다!

사람은 사람들 속에서 살면서 종일 먹고 입는 것을 다투며 ‘나에게 주지 않으면 시끄럽게 하겠어.’라고 하고, 불공평하다고 여겨 ‘내가 먹지 못했으니 좀 따져 보아야지.’라고 말한다. 해야 할 일은 조금도 하지 않는데, 이것이 짐승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 특히 돈과 권세가 있는 일부 사람들이 자살을 했는데, 그들은 먹고 입는 것을 다 누렸으면서 왜 자살을 하였을까? 여기에서 그런 것들은 결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너는 자신이 구제 불능이 될 정도로 타락된 후에야 돌아서려고 하지 마라. 그때면 너무 늦다! 총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손해 보는 것을 보고 자신이 겪게 되기 전에 경험을 총결해 낸다. 우매한 사람은 꼭 자신이 직접 겪고 실패를 해야 비로소 경험을 조금 총결해 내는데, 그러면 너무 늦은 것이다. 정계의 관직에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보아라. 그들도 종일 “인간은 이제 끝이야, 너무나 악해져 버렸어.”라고 욕한다. 그 사람들도 사는 것이 재미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놈이 그놈이다. 그들은 정계를 떠나지 않고 기어코 다투고야 마는데, 다투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얻고도 욕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얻은 것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 즉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사실, 진리는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다 필요하다. 너희가 선민이든 아니든 진리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며, 진리의 공급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짐승이기에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척하는데, 사람 내면의 성질이 짐승의 성질로 변해 버렸고, 변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아무리 진리를 말해 주고 하나님 믿는 것에 대해 말해 주어도 귀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듣기에 아무리 좋다고 해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보내는데, 마음에 담아 두지 않고 온종일 관료 사회의 그런 것들로 바삐 보낸다. 나이트클럽과 술집에 드나드는 것과 먹고 마시는 이런 것들로 가득 찼고, 또 무신론의 관점으로 가득 찼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좋다는 것도 알고 믿고 싶어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기만 하다가 결국 이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 이 길은 그들이 가야 할 길이 아니고, 그들은 이미 하나님 집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운명적으로 정해진 것이다.

사실, 세상 사람들도 고통을 느낀다. 그들 역시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겨 자신을 구해 줄 구세주를 찾고 싶어 한다. 지금의 이런 인류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구제 불능이다. 너희도 최근 몇 년간 책망과 훈계, 심판과 형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고, 또한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조금도 없고, 심지어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보다 더 사악할 것이다. 사람은 사회에서 나쁘게 변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네가 일부러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따라 변하게 되는데, 갈수록 잔인하고 갈수록 악독해진다. 너는 악독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네가 그를 누를 수 없다면 그가 너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인류는 갈수록 사악해진다. 특히 최근의 몇 년 동안 이 사회가 아주 사악해졌지만, 다행히 너희들은 그동안 세상과 떨어져 있어 이방인들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최근 10여 년 동안 사람이 변하는 속도가 아주 빨라 심하게 사악해졌다. 어떤 때, 네가 어디에서 세상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그들의 말에 인정미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5, 6년 전이나 10여 년 전만 해도 친척들 사이에 서로 오가며 지냈다. 농촌에 있는 사람이라도 관직에 있는 친척이 있으면 그 사람의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었고, 그 사람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해도 일을 처리해 주었으며, 형제 사이, 자매 사이에도 어려움이 있으면 말하기가 쉬웠다. 그런데 지금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해도 예를 갖추어야 한다. 선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처리해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욕을 한다. 오늘날의 사람은 이 정도까지 사악해졌다. 지금 이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악해지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면 죽게 되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지 않으려면 사람은 사악해져야 한다. 사람이 사악해질수록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지고 더 빨리 죽게 된다. 이 세상은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또 “이 몇 년간 장사를 했다면 벌써 돈방석에 앉았을 거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랬다면 진작에 끝장났을 것이다. 그렇게 벌다가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다가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이 몇 년간 공직에 있었다면 벌써 고위직에 올랐을 거야.”라고 말한다. 그 말은 맞다. 어쩌면 네가 정말 고위직에 올랐을지도 모르지만, 너는 큰 잘못도 범하고 큰 악도 행했을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배경이 있으면 일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너도 할 수 있고, 그들이 사악해진 만큼 너도 사악해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또 최근 몇 년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하는데, 너는 아직 너 자신이 얼마나 큰 복을 누렸고, 얼마나 큰 보호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흐리멍덩하고 어리석기에 그런 말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어도 얼마 벌지 못했을 것이고, 돈방석에 앉았다고 해도 좋은 일이 아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어도 아주 흐리멍덩한데,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도대체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정말 모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옷 한 벌을 가지고 얼굴을 붉히며 다툴 수 있단 말이냐? 그런 사람은 왜 하나님을 믿는지 정말 알지 못하는데,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사람이 도대체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지, 이렇게 살아가는 가치와 의의가 어디에 있는지 정말 모르는 것이다. 만약 네가 사람이 왜 사는지 분명하게 안다면, 네가 받는 그런 고통은 가치가 있고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냐? 너는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냐? 이후에도 계속 이렇게 살아간다면 후회하지 않겠느냐? 네가 예전에 심지(心志)를 세울 때 그것은 일시적인 충동이었느냐, 아니면 진실하게 깨닫고 납득한 것이었느냐? 너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사느냐? 인생의 방향은 무엇이냐? 네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냐? 자신이 훗날 중도에서 그만두지 않고 계속 따를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있느냐? 어떤 환경이 임하든, 어떤 배경이 임하든,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임하든, 계속 이 길을 갈 수 있고, 얼마나 큰 핍박과 환난 그리고 시련이 닥쳐도 계속 이 길을 갈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은 감히 이렇게 장담하지 못하는데 이 정도의 믿음조차 없다. 너에게 이런 분량이 있는지, 이런 믿음과 심지가 있는지는 먼저 말하지 않겠다. 어떤 사람은 대담하게 말하지 못하여 “저는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어요, 장담하지 못하겠어요.”라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설명하느냐? 그런 사람들에게는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믿었어도 그들에게 “왜 하나님을 믿나요?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 사람이 무엇을 얻어야 할까요? 지금 사람은 어떤 길을 가야 할까요? 사람이 어떤 길을 선택해야 바른길을 가는 것이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일까요?”라고 물어보면, 어떤 사람은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몰라 대답하지 못한다. 한참 생각하다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만족게 해 드리기 위한 것이니 의의 있는 일이에요…”라고 듣기 좋은 말을 한다. 사실, 그가 이런 것을 알겠느냐? 잘 알지 못해 흐리멍덩하다. 지금 너희는 아마 어느 정도 체험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질병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고 생사의 고비에서 하나님에게 구원해 달라고 간구한다. 만약 사람이 다 그렇게 체험한다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모든 사람이 다 생사의 고비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체험해야 할 필요는 없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이 체험했거나 체득한 것을 보고, 그런 사람들의 교통이나 체험한 것을 들으면 너희도 체득할 수 있으므로 자신이 직접 체험할 필요가 없다. 반드시 죽을 고비를 직접 겪어야 자신의 생명을 아낄 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그럴 필요는 없다. 사람은 곧 죽게 되었을 때, 자신에게 그다지 큰 변화가 없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적다고 여기고, 행한 것과 헌신한 것도 적다고 여긴다. 또한 별로 큰 변화가 없었으니 죽는 걸 원치 않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자신이 얻은 것이 너무나 적고, 변화도 너무나 작으며, 너무 많이 빚졌기에 정말 죽게 된다면 어디로 갈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욥에게 시련이 임해 온몸에 종기가 났을 때, 그때의 사람들은 틀림없이 욥을 많이 욕했을 것이다. 누가 괴상한 병에 걸리면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 말한다. 욥의 때에도 틀림없이 누군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성경에 어떤 사람이 “자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 득죄했는가? 잘 회개하시게, 여호와는 공의로우시다네.”라고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면, 그때 어떤 사람들은 틀림없이 뒤에서 욥이 아마 어떤 일을 저질러 여호와께 득죄했고, 떳떳하지 못한 일을 했을 거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아무런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시련이 임하니 그도 고통스러웠다! 욥은 고통 속에서 살기를 구하지 않고 죽기를 구했는데, 그것은 극도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직 그 정도로 고통스럽지 않으니 살고 싶어 하는구나. 사람이 정말로 고통스러우면 견딜 수 없어 당장 죽고 싶어지는데, 바로 그런 심정인 것이다. 욥은 빨리 죽어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욥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찬미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을 초월한 것이다. 보통 사람은 그 정도가 되면 찬미하지 못하고, “하나님, 숨만 쉬게 해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제가 살 수만 있다면 무엇을 하라고 해도 다 괜찮습니다…”라며 거래하기 시작한다.

질병이 임하면 어떻게 체험해야 하겠느냐? 하나님 앞에 와서 도대체 어떤 일을 잘못했는지, 혹은 어떤 성정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못했는지에 대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더듬어야 한다. 사람이 고통받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이 해결될 수 없으므로, 반드시 고통스러운 연단을 통해 사람으로 방탕하지 않고 늘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해야 한다. 사람은 마음이 괴로우면 늘 기도하기에 아무 잡생각도 없게 된다.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것을 입고, 재미있는 것을 보고, 즐겁게 노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사람이 가장 괴로울 때 무엇을 먹고 싶어 하겠느냐?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 무엇을 입고 싶어 하겠느냐? 그런 생각 없이 그저 꼼짝 않고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최근에 어떤 일을 잘못했는지 기도하면서 잘 반성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큰 질병이나 이상한 병에 걸리면 아주 상처받고 고통스러운데,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이전에 ‘일곱 영의 말씀’에서 사람이 병에 걸리든, 몸이 건강하든 거기에는 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말씀하였다. 사람은 평소에 성령이 역사할 때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몸이 좋을 때는 찾고 구하지만, 괴로울 때는 하나님께 찾고 구할 줄 모른다. 어떻게 찾고 구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사람은 질병에 사로잡혀 모든 것이 엉망이라고 여기며 병을 치료할 생각만 한다. ‘어떻게 치료할까? 어떤 약을 먹을까? 수액 주사를 맞을까, 한약을 먹을까? 어떻게 하면 빨리 나을까?’ 몸이 건강할 때는 이것저것 다 할 수 있었지만, 이때는 걷거나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부럽고, 몸에 병이 없는 사람이 부러워 얼른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소극적으로 대항하는 정서이다. 사람은 간혹 ‘이것은 내가 어리석어 초래한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일까?’라고 생각한다. 날씨가 추워 감기 기운이 조금 있거나, 열이 나고 독감에 걸리는 것과 같은 개별적인 것은 정상이다. 하지만 너희가 큰 병에 걸려 갑자기 쓰러지거나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될 때면, 그런 느낌과 그런 병은 다 우연히 임한 것이 아니다. 성령은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느냐? 그저 깨우침과 빛 비춤만 주겠느냐? 한 가지 방식으로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어떻게 시련하느냐? 사람을 괴롭게 하여 시련하는 것이 아니냐? 시련은 곧 고통이다. 시련이 있으면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시련이 없다면 사람이 무엇으로 고통을 받겠느냐? 사람이 고통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화될 수 있겠느냐? 시련이 있으면 고통이 뒤따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때로는 너희에게 어느 정도의 고통을 준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거만하게 날뛴다. 어떤 일에서는 진리를 교통해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무엇을 지적해 주면 그것은 자신도 알고 있지만 변화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많지 않으냐? 또 자신의 머리를 때리거나 벽에 박으며 자신의 육체를 해치지만 그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본성은 안에 존재하는데,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므로 사람의 살아 있는 생각과 같아 언제 어디서나 나온다. 해결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바로 질병으로 연단하는 것이다. 연단받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 기도하게 된다. 일이 임하지 않으면 너희는 아주 방탕하고 거만하지만, 일단 병에 걸리면 얌전해진다. 그런데 너희가 또 거만해질 수 있겠느냐? 말을 해도 기운이 없는데 또 다른 사람을 훈계하며 교만해질 수 있겠느냐? 그때는 아무런 요구도 없게 된다. 그저 누워서 괴롭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때에는 먹고 입고 누리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너희 대다수 사람은 아직 체험하지 못했다. 너희들이 체험하게 되면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늘 이것저것 다투는데 고난을 너무 적게 받아 좀스러운 것이다. 다 고난으로 연단을 받아야 하겠구나!

때로는 어떤 상황으로, 사람을 통한 어떤 훈계로 너를 괴롭게 하여 공과를 배우게 한다. 하나님은 오늘날, 이런 사역을 한다. 이것은 한 방면이다. 다른 한 방면은 너의 육체가 고통을 좀 받게 한다. 마치 바울이 늘 자신의 몸에 가시를 주셨다고 말한 것과 같다. 가시는 무엇이겠느냐? 바로 병이 아니겠느냐! 치료되지 않는 병인데, 그 병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바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성정과 본성 때문이었다. 바울에게 그 가시가 없고 그 병이 없었다면, 그는 언제 어디서나 독립왕국을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병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담력도, 기운도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에 질병도 사람의 보호막이 된다. 병이 없으면 힘이 넘쳐 마구 날뛰면서 어떤 나쁜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거만하고 방탕해지면 이지를 잃게 되고, 이지를 잃게 되면 자신도 어쩔 수 없이 나쁜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러고 나서는 후회한다. 그러므로 어떤 병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으면 네가 다 해결해 줄 수 있고, 자신의 사상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유독 병이 낫지 않는다면 네 자신은 아무런 방법도 없는 것이다. 병은 정말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병이 들어 이 방법, 저 방법을 써 보아도 안 된다면, 그것은 네가 받아야 할 고통이므로 벗어나려고 하지 마라. 너는 기도하고 찾고 구하고 순복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자신이 패괴되어 본성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일을 저지를 수 있고, 당신을 상심케 하고 괴롭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제게 병을 주셨는데 너무나 좋습니다. 저는 순복하겠습니다. 그러나 저를 일깨워 주셔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저의 어떤 방면을 변화시키고 온전케 하시려는지 깨닫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제가 가야 할 길의 방향을 가리켜 주셔서 인생길을 알고 당신의 뜻을 알아 이 방면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너는 찾고 구하고 기도해야지 흐리멍덩하게 ‘병에 걸리면 걸리라지 뭐, 한의사에게 가서 약을 짓고 안 되면 양의사를 찾아가고, 양의사도 안 되면 수술해서 제거하면 될 테니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네가 이쪽의 것을 제거하면 저쪽에 또 생기고, 이쪽 종양을 제거하면 저쪽에 또 큰 혹이 생긴다. 그 큰 혹을 제거한 후에는 팔과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너는 많은 일들이 임할 때 이것은 이렇고 저런 거라고 경솔하게 결론짓지 마라. 또한 “이것은 이렇고 저런 거야.”, “별일 없을 거야, 절대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이 아니야.”라며 자신을 위해 변명해서도 안 된다. 정말로 마음속에 하나님이 있다면, 너는 어떤 일도 놓치지 말고 기도로 찾고 구해 차츰차츰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더듬어 내야 한다. 하나님은 네가 잘 순복하면 차츰차츰 너의 고통을 경감시켜 준다. 역대 이래, 경건한 크리스천, 신도, 사도, 선지자일수록 돌에 맞아 죽고, 말에 끌려 죽고, 목매달려 죽고, 끓는 기름 솥에 던져져 죽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이렇게 별의별 죽임을 다 당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따르며 조금이라도 편안한 날이 있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것을 바라지 말고, 지나친 욕망을 갖지 말라. 내가 왜 사람이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겠느냐? 사람에게 요구가 있는 것은 사치스러운 욕망에 속하기에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치스러운 욕망을 품고 “하나님, 잘 입게 해 주세요. 저는 잘 입어야 할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 저에게 고통이 조금도 없게 해 주세요. 제가 사역을 하고 있으니 제 몸을 건강하게 해 주세요.”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럼 몸이 좋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느냐? 네 몸이 좋지 않으면 자신의 본분을 하지 않겠느냐?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것이 아니냐? 그것은 천직이자 회피할 수 없는 책임으로, 다른 사람은 하지 않아도 너는 해야 한다. 너는 이런 심지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따르면서 속으로 ‘고난을 받으면서까지 하나님을 따를 게 뭐 있어? 하나님을 따르는 건 복을 누리기 위한 거잖아. 복을 누리지 못한다면 따르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잘못된 관점이 아니냐? 너희는 이렇게 오랫동안 체험하면서 진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서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축복을 받는다든가, 매일 기쁨이 넘치고 즐겁다든가, 생김새가 정말 예쁘다든가, 좋은 옷을 입는다든가, 무슨 일이나 다 순조롭다든가, 세상에서 형통한다든가 하는 이런 뚜렷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게 된다. 모두가 우여곡절을 겪는데, 직장에서 배척당하고 늘 질병을 앓으며, 또 어떤 사람은 장사를 해도 돈벌이가 되지 않고, 가족이 믿지 않고 또 그들에게 버림당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아라. 안일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은 모두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서 참된 진입이 없지만, 참으로 추구하고 진입하게 되면 반드시 핍박과 환난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핍박과 환난이 뒤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하나님이 그 사람을 버리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손이 한결같이 붙잡고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손을 놓기만 하면 사람은 사탄의 올무 속에 떨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끝장이 아니겠느냐? 사탄의 함정 속에 떨어지게 되면 너를 상관치 않는다. 그러면 네가 도박을 하고, 계집질하고, 여자와 놀고, 클럽에 가고, 술을 마시고 주사를 부리고, 관직을 추구하고, 명리와 지위를 추구해도… 너를 상관치 않는데, 그러면 너는 끝장이다. 네가 세상의 것을 얻었다고 해도 사실 이미 가장 큰 것을 잃었는데, 자신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왜 늘 나를 간섭하실까? 다른 사람은 병이 없는데 나는 왜 늘 병이 있지? 나는 왜 늘 괴롭지? 우리 집은 왜 늘 이렇게 가난하지? 나는 왜 돈을 벌지 못하지?’라고 생각한다. 네가 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 아마 끝장일 것이다. 만약 오늘 돈방석에 앉게 된다면 내일은 타락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어떤 사람들은 “난 왜 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을까? 난 왜 좋은 옷을 입지 못할까? 다른 사람은 왜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을까? 난 건강 상태가 왜 늘 이 모양일까? 다른 사람은 왜 늘 건강할까?”라고 한다. 너는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누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얼마나 많이 누리든지 상관하지 마라. 아마 그의 분량이 작고 최근 몇 년간 그의 연약함을 체휼하여 은혜를 어느 정도 주어 은혜를 받는 기간에 하나님의 행사를 조금씩 알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너에게는 특별히 엄격하게 요구한 것이다. 겉으로는 너에게 얼마나 큰 누림이 있는지 볼 수 없고 계속 너를 고통받게 하는데, 너는 이런 일에서 특별히 더 감사하고 찬미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인식이 있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화를 내면서 “하나님은 왜 늘 나를 간섭하시나요?”라고 말한다. 너를 간섭하는 것이 틀렸느냐? 너를 간섭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또 “그러면 왜 저에게 늘 훈계하시나요?”라고 말한다. 너를 훈계하지 않고 간섭하지 않는다면 네가 끝장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런 사역도 하지 않고 어떤 중임도 맡지 않았기에 상대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방탕하고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데 누가 그를 상대해 주겠느냐?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훈계하는 것은 너를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일에서 많이 기도하고 찾고 구해야 하고, 자주 하나님 앞에 와서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한다. 방탕하거나 제멋대로 하지 말고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 완고하게 고집부리면 끝장이다. 네가 은혜를 얻고도 은혜로 여기지 않고 압박감을 더해 준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런 것들을 누림으로 여기지 않고, 아름다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방면의 일을 원수로 삼고, 반감을 가지고, 싫어하며 온종일 화를 내고 심하게 불평하면서 기도마저 하기 싫어진다면 위험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질병에 막 걸렸을 때는 기도하지만, 기도를 해도 병이 낫지 않게 되면 나중에는 질병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이럴까?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이 병을 낫게 해 주시지 않잖아, 종일 병에 시달리고 있어…”라고 원망하게 되는데, 원망하고 나면 죽게 되는 것이다. 네 육체를 거두어 음부에 떨어지게 하면 너는 철저히 끝난 것으로 금생에 구원받을 기회가 없는 것이다. 네가 죽어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너의 온 영혼은 끝장인 것이다. 구원 사역이 마지막 이 단계까지 진행되었는데 네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면 또 어디에 기회가 있겠느냐? 기회가 없다! 금생의 구원 사역 기간에 이미 멸망된 것이고 이미 결말이 정해진 것인데, 징벌받아 죽은 것이다. 결말은 이미 정해졌다. 그는 생로병사의 과정에서 정상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징벌받아 죽은 사람들은 다 구원받을 기회가 없다. 아마 어디에서 징벌을 받고 있을 것이다! 바울은 지금까지 음부에서 징벌을 받고 있지 않느냐? 어떻게 환생할 수 있겠느냐? 2천년 동안 아직도 거기에서 징벌을 받고 있다! 네가 뻔히 알면서 범한다면 더 위험하게 되고, 더 처리하기 쉽지 않으며, 더 중한 징벌을 받게 된다!

어떤 사람은 “저는 요즘 성령 역사가 없는 것 같아요. 늘 병이 있어 괴로워요, 주변의 상황도 좋지 않아요.”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맞다. 성령의 역사는 때로는 이런 방식으로 하고, 때로는 저런 방식으로 하며, 때로는 너를 깨우쳐 주는데 교통을 통해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게 하고, 때로는 환경을 통해 깨닫게 한다. 환경으로 시련을 주고 연마하고 단련시켜 자라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역사한다. 이전에는 너희들이 이런 일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겪었어도 인식이 없었다. 그러나 너희는 일부 인위적인 것, 즉 자신의 몸을 돌볼 줄 모르고, 건강을 지킬 줄도 모르고, 몸을 보양할 줄도 모르기에 좀 신경을 써야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얘기하자면, 인위적인 것이든 성령이 준 것이든 다 너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므로 너는 감사해야지 원망해서는 안 된다. 사람이 원망을 한 번 하면 오점을 하나 남기게 되는데, 그것은 씻을 수 없는 죄이다! 네가 원망을 한 번 하면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돌이킬 수 있느냐? 네가 조금 소극적이 된다고 해도 아마 한 달은 되어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원망하면서 어떤 소극적인 정서의 말을 내뱉게 되면, 어쩌면 1년이 되어도 되돌리기 어려울 것인데,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너희가 원망을 하면 큰일이 아니냐? 내뱉으면 더 큰일이다, 그렇지 않으냐? 그러면 사람이 얼마만한 시간을 들여 기도해야 성령의 역사를 조금 얻을 수 있겠느냐? 사실, 너희는 체험하는 중에 다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특히 핍박과 환난이 임할 때는 긴장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구하고 다른 말은 할 줄도 모른다. 더 이상 기도할 것이 없는데 사람의 분량이 얼마나 작은지를 보아라. 때로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너에게 어려운 문제를 제기하여 너를 곤란하게 하면, 그때에야 너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앞에 와서 성찰하기 시작한다. “제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는지 하나님께서 저를 깨우쳐 주세요. 깨닫지 못하면 끈기 있게 매일 기도하겠습니다. 깨달을 때까지 기도하겠습니다. 만일 기도해도 깨닫지 못하면, 1년 내내 늘 이 일에서 찾고 구하고 늘 마음에 새겨 두었다가 나중에 진리를 깨달은 사람을 만나면 교통하겠습니다.” 이래야만 자신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라고 한다.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기만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틀림없이 평소에 기도를 적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냐? 사람이 기도를 적게 하면 찾고 구하는 것도 적게 된다. 찾고 구하는 것이 적으면 순복하지 못하게 된다. 너에게 찾고 구하는 태도가 없는데 어떻게 순복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행사와 하나님이 너에게 하는 사역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알지 못한다면 순복이란 논할 나위가 없다. 네가 어찌 된 영문인지도 모르는데 뭘 순복한단 말이냐? 누구에게 순복한단 말이냐? 순복 또한 막연한 것이 아니다. 순복을 말하자면, 거기에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대상이 있어야 한다. 네가 하나님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뭘 순복한단 말이냐? 모두가 다 빈말이다. 어떤 일에 부딪히면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찾고 구해야 할까? 어떤 어투로, 어떤 말로 찾고 구해야 할까? 기도할 때 함부로 모방해서도 안 된다. 네가 만약 예수의 말씀을 모방해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한다면 적합하지 않다. 너에게는 그저 온전케 하는 것일 뿐, 하나님의 뜻까지는 말할 것이 못 된다. 너를 온전케 하기 위해 때때로 책망하고, 고난을 주고, 연마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지 마라. 그것은 옳지 않다. 성령이 역사할 리가 없다.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위치를 잘못 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저의 뜻대로 말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한다. 그것은 네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는 것이라 큰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었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각도에 서서 하늘의 영께 이렇게 기도한 것인데, 동등하고 위치도 같은 한 분이지만 각도가 다를 뿐이다. 그리스도가 그렇게 했다고 해서 사람도 만일 그렇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이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령이 조금도 일깨워 주지 않는 것이다! 네가 그런 말로 기도하면 거리가 너무 먼 것인데, 성령이 어떻게 너를 깨우쳐 주겠느냐? 또 “저의 뜻대로 말고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저를 깨우쳐 주세요.”라고 하는데,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으냐! 사람이 이만한 일도 분별하지 못한다면 진리를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기도를 함부로 모방해서는 안 된다. 너는 어떤 일이 닥치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체험이 있어야 아랫사람들을 그렇게 기도하도록 이끌 수 있다.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 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어떤 일이든 혼자 맹목적으로 처리하지 말고, 스스로 하거나 상상하지 말라. 이렇게 저렇게 하다 보면 가로막고 방해하게 되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게 되는데, 그러면 문제가 된다. 네가 한 구역의 사람들을 이끌면서 아무리 이끌어도 그들이 기도도 할 줄 모른다면, 너는 그릇된 길로 간 것이다. 혹은 그 구역 사람들이 네가 이끄는 대로 기도해도 그저 피상적인 말만 할 줄 알지 그 이상은 없고, 기도를 마친 후에도 아무런 효과가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더듬지 못하고, 성령이 어떻게 역사하는지도 모르며, 깨우침과 빛 비춤도 전혀 없다면, 그 기도는 효과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너의 기도는 의식이나 형식으로 한 것인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런 일은 체험을 통해 총결해야 한다. 그러려면 사람의 세밀한 생각이 필요한데, 세심하지 못한 사람은 도달하기가 아주 어렵다. 성령은 어떤 사람에게 깨우침을 주느냐? 생각이 민첩하고 마음이 섬세한 사람에게 깨우침을 준다. 이런 사람은 느낌을 주거나 깨우침을 주기만 하면 그것이 성령이 역사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려고 하거나 때로 책망하면 바로 느끼고 거두어 들이는데, 성령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 세심하지 못한 사람은 느낌을 준다고 해도 깨닫지 못한다. 나중에 성령이 그 자가 좋은 놈도 아니고, 성령 역사를 세심히 살피지도 않는 것을 보게 되면, 성령은 떠나고 더 이상 그를 깨우쳐 주지 않는다. 연이어 세 번, 네 번을 깨우쳐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성령은 더 이상 역사하지 않는다. 왜 어떤 사람들은 체험하다 보면 안이 어두워지느냐? 왜 의기소침해지거나 힘도 없어지게 되면서 성령의 깨우침이 조금도 없게 되느냐? 그런 생기가 없고 죽은 도리로 어떻게 기운이 날 수 있겠느냐? 그렇지 않으냐? 마음과 생각이 세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과 생각이 세심하지 못하고 그저 꿈만 의지한다. 일전에는 어떤 꿈을 꾸었고 어제는 어떤 꿈을 꾸었다면서 늘 그런 일로 판단하는데, 그런 판단이 정확할 수 있겠느냐? 자신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진리로 말미암아, 인식과 체험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지, 겉면의 현상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실제적이지 않으냐? 아주 실제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진리를 깨닫는 능력이 있을 뿐, 성령 역사에 관한 일에서는 세심하게 살피지 않는다. 앞으로 너희는 아주 미세한 느낌, 아주 미세한 빛 비춤을 중시해야 한다. 그리고 임하는 모든 일에서도 진리의 각도에 서서 관찰하고 대해야 한다. 그러면 너희는 차츰차츰 바른길로 가게 되고 정상 궤도에 들어서게 된다. 어떤 일이나 다 육체의 안목으로 보고 도리적으로 분석하며,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규례적으로, 세상 사람들의 머리와 생각으로 분석하고 다루며 대한다면, 너희는 정상 궤도에 들어설 수가 없다. 그러면 너희는 언제까지나 문외한이고 진리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이제부터 점차 이 방면을 중시해야 한다. ‘난 늦게 믿었으니 급해할 거 없어. 다른 사람은 기초가 있어 깨닫겠지만, 난 깨닫지 못했어. 때가 되면 깨닫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늦게 믿었으므로 당연히 급해해야 하고, 이 방면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진리의 관점으로 대하면, 많은 일이 너에게 임했을 때 많은 문제를 발견할 수 있고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네가 머리로 연구하고 분석하거나 육체의 안목으로 보고 대한다면, 예를 들어 병이 날 때, ‘그저 병에 걸린 거야, 괜찮을 거야.’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사실, 이 안에 아주 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 일에서 네가 마음과 생각이 세심하다면, 아마 성령이 때로 너에게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가게 하여 너의 어느 방면의 결점이나 성정 방면의 일을 알려 줄 것이고, 너에게 고통을 주어 연단받고 고난받게 하고, 너에게 마음을 돌이켜 자세히 성찰하고 묵상하게 하여 내면이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알게 할지도 모른다. 너에게 고통을 주면 너는 깊은 곳까지 성찰해 보게 된다. 깊은 곳까지 성찰하게 되면 너는 그 일을 깨닫게 된다. 너에게 고통을 주지 않는다면 너는 그것이 별거 아니고, 그저 그렇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방면의 성정은 성찰해 내지 못한다. 네가 성찰해 내지 못한다면 그 방면의 진리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 방면에서 좀 체험해 보았느냐? 하지만 사람의 협력은 너무나 더디다. 성령은 모든 일에서 아주 시기적절하게 역사하는데, 사람의 필요에 따라, 사람의 현재 분량에 따라, 현재의 정형에 따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때에 알맞고, 아주 시기적절하며,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다고 이전에 말했었다. 그러면 이 말의 뜻은 무엇이냐? 실제 체험 중에서 보게 된다는 것인데, 사람에게 일이 임할 때마다 성령은 시기적절하게 사람을 감동시키고 깨우쳐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협력은 형편없다. 사람은 때때로 듣자마자 그렇다고 느끼기는 하지만 더 깊이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그저 느끼기만 하는 것이다. 이성적인 면에서 더 깊이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데, 감성적인 느낌이 있으면 이성적인 면은 중시하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 너에게 또 한 번 감동을 주면 너는 또 한 번 밀쳐 낸다. 때로는 게을러 침대에 누웠다가 펜을 들기 싫어 기록해 두지 않으면 얼핏 생각났다가 잊어버리게 된다. 부지런한 사람은 펜을 들어 기록하는데, 기록한 후에 나중에 다시 보면 느낌이 아주 좋다. 그러면 이전의 기초에서 또 어느 정도의 빛 비춤이 있게 된다. 세심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의 안에서 살며시 스쳐 지나가게 된다. 계속 놓치게 된다면 성령은 역사하지 않는다. 생각이 민첩하고 세심해야 하며, 또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되고, 게다가 제때에 협력해야 한다. 이 방면에 인식이 있으면 빨리 기도해야 하고 언제 어디서나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을 이끌고 기도해야 하고 자신도 빨리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한다. 어떻게 기도하겠느냐? 네가 얻은 깨달음을 중심으로 기도하면 된다. 때로는 자신이 상상한 것 같지만 상상한 것도 문제 될 것이 없으니 너는 그것에 따라 기도하면 된다. 기도하면 말이 술술 잘 나오고, 기도하는 동안 또 많은 깨달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맞는 것이니 마땅히 기록해야 한다. 간혹 정형이 좋으면 기억할 수 있지만, 정형이 좋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은 도리를 말하면 한 편 한 편 몇 페이지나 쓸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인식은 전혀 써 내지 못하는데, 그것을 보배로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지 않으냐? 이는 사람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부차적인지, 무엇이 관건인지, 무엇이 자신이 얻어야 하는 것이고 무엇이 얻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를 모른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다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항상 노트를 지니고 다니면서 성령의 깨우침이 있으면 바로 기록하거라. 성령은 언제 어디서나 역사한다. 네가 아주 피곤하다고 느낄 때에도 너를 깨우쳐 주는데, 그것에 따라 기도하면 또 힘이 솟는다. 사실 너희가 성령의 깨우침을 많이 잃어버리고 있는데, 너희들은 다 집안을 말아먹는 자식들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역사하지 않았느냐? 많이 역사했는데도 너는 잡지 못했다. 그러니 너는 “하나님은 제게 은총을 베풀지 않으셨어요.”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너에게 은총을 적지 않게 베풀어 주었다. 사실, 성령이 역사하는 데도 규칙이 있다. 그래서 총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총결하면 많은 것들이 나오게 된다. 기도하는 것을 놓고 볼 때, 기도하는 중에 때로는 아주 많은 깨우침을 얻을 수 있지만 너는 알지 못한다. 자신의 입으로 말한 것이라고 해도 유의하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이번에 기도를 아주 잘했고 편안하게 했다는 것만 알고는 누워 잠을 잔다. 이튿날 일어나서 잠을 잘 잤다고 생각하면서 간밤에 잠자기 전에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은총을 베풀어 잠을 잘 자게 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 것이냐? 그것은 제멋대로 규례에 맞추는 것이다! 사실, 네가 기도할 때 많은 말들이 아주 중요한 것이었는데 모두 유실되었다. 성령이 역사하여 사람에게 주는 가장 큰 도움은 바로 사람에게 많은 진리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느 정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그런 방향에 따라 할 수 있고, 바른길에서 치우치지 않으며,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성령이 역사하는 목적은 무엇이냐? 사람을 깨우쳐 주는 목적은 무엇이냐? 때로는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때로는 사람을 일깨워 주고 도와주고 돌봐 준다. 네가 삐뚤어진 길로 가려고 할 때, 성령은 마치 지팡이처럼 너를 돌보고 도와주는데, 길의 방향을 안내하는 사람처럼 바른길을 가도록 붙잡아 준다. 사람의 체험이나 인식이 어떠하든, 혹은 각자의 배경이 달라도, 성령의 깨우침은 진리와 전혀 어긋나지 않고 충돌되지 않는다. 만약 모든 사람이 그렇게 체험하여 진정으로 찾고 구하고 기도하며, 참되게 순복한다면 성령은 끊임없이 그렇게 역사한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세심하고 민첩하다면 그런 것들은 유실되지 않는다. 그러면 분량이 아주 빨리 자라는데, 이것이 바로 기회를 잡은 것이다. 성령 역사의 특징은 바로 아주 빠르다는 것인데, 살짝 스쳐 지나간다. 악령 역사와 다르다. 악령 역사는 사람을 다그쳐 반드시 그렇게 하게 한다. 성령 역사는 때로 일이 발생할 때 사람에게 어떤 느낌을 주어 아주 당황스럽게 하는데 이것은 특수한 상황이다. 평소에 사람이 정상적으로 체험할 때는 사람에게 미세한 느낌이나 아주 작은 세밀한 생각과 마음을 주어 그 뜻을 깨닫게 한 다음, 두뇌를 통해 다시 해석되게 해 사람의 언어가 되게 한다. 사실 늘 이렇게 체험하고 이런 진리를 기초로 하며, 게다가 성령의 역사가 있고 사람이 그것을 늘 붙잡을 수 있다면 절대로 참 도에서 치우치지 않게 될 것이다. 설령 시종일관 너와 교통하는 사람도, 너를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또한 사역안배가 없다고 해도 네가 이 방향을 따라간다면 절대로 치우친 길을 가지 않게 된다. 베드로는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한 후에 예수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그저 몇 번만 보았을 뿐이다. 네가 상상하는 것처럼 늘 예수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생각만 하면 바로 볼 수 있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을 때 기도하면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렇게 쉽겠느냐? 하나님은 사람에게 쉽게 나타나지 않고 대부분의 경우에 성령 역사를 통해 베드로에게 깨닫게 해 주었다. 베드로가 할 수 있었던 것을 너희는 왜 하지 못하느냐? 이것은 결국 무엇을 증명하느냐? 너희에게는 깨닫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임하든 다 진리의 안목으로 대해야 한다. 만일 일이 임할 때 ‘이 일은 내가 처리하고 저 일은 내 생각대로 처리하면 돼, 그 일은 내 머리로 처리하면 돼, 또 다른 일이 임하면 내 지식과 방법으로 처리하면 돼.’라고 생각한다면,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베드로에게는 그런 생각이 없었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더듬을 수 있었다. 나중에 예수가 승천했는데 베드로가 또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더듬을 수 있었겠느냐? 바로 성령의 깨우침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성령이 깨우쳐 주어도 베드로가 알지 못하고,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한 후에 베드로에게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었겠느냐? 성육신의 사역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날마다 친히 끊임없이 이끌어 주어야 사람을 온전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영이 역사하여 협력하는 것도 있다! 영이 역사하여 협력하는 것이 대부분이고, 육신은 주도적인 사역을 한다. 주도적인 사역이 끝나면, 나머지 지엽적인 문제들은 성령이 사람에게 깨우쳐 주어 깨닫게 하는 것이다. 만약 포착하지 못해 그저 일부분만 얻을 수 있을 뿐이라면 더 많은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얻을 수 없다. 얻지 못하면 너에게 어떤 변화나 어떤 진보도 없다. 성령 역사와 성령의 깨우침은 파악하기가 가장 어렵지만, 사실 그것에는 또 규칙이 있다. 사람은 영의 일에 관련되면 어렵다고 생각하고, 성령의 깨우침과 인도에 관련되지 않고 그런 세부적인 일이 없으면 아주 쉽다고 생각한다. 그저 진리를 말하거나 교통하기만 하면 아주 쉽다고 생각한다. 성령 역사와 성령의 깨우침에 대해 말하면 사람은 힘들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사람은 나태하고 마음이 너무나 세심하지 못하며 더 깊이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데, 그 일에 신경 쓰면 이것저것 다른 일은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는 하루 종일 다른 일로 바삐 보내는데, 그러면 이 방면은 중시할 수 없다. 온종일 도리 속에, 방탕한 가운데, 먹고 입는 가운데 살고, 온종일 애정 속에, 자녀에 대한 정에 치우쳐 살면 성령이 깨우치고 인도할 틈이 없어 역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너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찾고 구하여 어떻게 하면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여 성령 역사가 유실되지 않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저에게 역사하셔서 저를 온전케 하고 변화시켜 주시기 원합니다. 모든 일에 다 당신의 뜻이 있음을 알게 해 주시고, 모든 일에서 당신의 뜻에 순복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시기 원합니다. 저를 구원하시는 데에는 당신의 크나큰 사랑이 있고 당신의 뜻이 있습니다. 사람은 비록 거역하고, 대적하고, 본성이 배반하는 것이지만, 저는 이제 사람을 구원하시는 당신의 뜻을 깨달았으므로 당신과 협력하기를 원합니다. 저에게 더 많은 환경과 시련과 고통을 주셔서 그런 고통 속에서 당신의 손길과 당신의 행사를 보게 해 주시기 원합니다. 당신의 뜻을 깨닫고 당신의 뜻에 순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고, 방탕한 사람이 되지 않고 참답고 진솔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 원합니다.” 너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항상 이렇게 기도하여 성령이 너에게 늘 역사할 수 있도록 구해야 한다. 성령은 네가 바른길을 가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어떤 환경이 있게 하여 먼저 너를 검증하는데, 너에게 무거운 시련을 주어 이겨 낼 수 있는지를 본다. 어떤 사람은 아마 견딜 수 없어 “하나님, 저는 싫어요, 제게 가벼운 것을 주세요.”라고 말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결론이 난 것이고, 너는 그 일에서 실패한 것이다. 네가 정말로 그런 환경이 심하다고 생각되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당신이 저에게 주신 환경이 힘겨워 제 자신은 분량이 작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분량에 따라 공급해 주세요. 저에게 심한 고통을 겪게 하든, 경한 고통을 겪게 하든 다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당신을 배반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완전히 순복하여 당신을 만족게 해 드리길 원합니다. 심한 고통이든 경한 고통이든, 당신의 뜻이라면 저는 순복하기 원하고 원망이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당신의 뜻을 어기고 싶지 않고, 당신이 이후에 더 중한 고통을 주신다고 해도 제가 감당할 수 있기만 하면 저에게 더해 주시길 원합니다.” 너는 마음 놓고 대담하게 기도해야지 회피하거나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은 네가 특별히 바른길을 가고 해야 할 일을 하며 마음으로 각별히 하나님을 원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보면, 아마 너에게 중한 시련을 준 다음 아주 큰 힘을 주어 네가 이겨 낼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러면 너는 승리한 것이다. 네가 아주 중대한 일에서 이겨 냈다면 그것은 많은 작은 일에서 깨달은 그런 사소한 글귀보다 훨씬 깊은 것이다. 이것은 간증 방면의 일에 속한다.

어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나 교회 생활에서 실제적인 일들을 접하게 된다. 남녀 방면을 예로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은 이런 시련을 겪어 내지 못한다. 이런 일이 임하기만 하면 반드시 넘어진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안색이 매우 어두워지는데 그러면 안 된다. 전혀 간증을 서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돈에 관련된 일이 임하면 연약해지는데 조금씩 훔친다. 돈에 관련된 일이 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저는 왜 저렇게 많은 돈이 없습니까? 하나님, 당신은 왜 공의롭지 못합니까? 왜 저는 가난에 시달려야 합니까? 왜 다른 사람은 다 부유합니까? 저는 하나님을 믿는데 왜 가난에 시달립니까?”라고 원망한다. 이런 일이 임하기만 하면 원망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지위와 관련된 일에서 연약해지는데, 이런 일이 임하면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이겨 내지 못한다. 예컨대, 어느 직장에서 어떤 직위를 주어 월급을 많이 주겠다고 하거나 다른 혜택을 준다고 하자. 그는 이런 일이 임하면 견디지 못한다. 속으로 ‘갈까, 말까?’라고 생각하다가 기도하고는 ‘안 돼, 그래도 가야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뜻을 이미 정해 놓고 또 찾고 구하는데, 그렇다면 찾고 구할 필요가 없다. 직위를 누리러 가면서 또 하나님은 믿고 싶어 “하나님, 저에게 시련을 더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그런 상황에서 너에게 무슨 시련을 주겠느냐! 그런 작은 일에서도 넘어지는데 시련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자격이 없다. 더욱이 일부 소인배들은 옷 몇 벌 때문에 다투는데, 그때 성령은 곁에서 관찰하며 네가 어떤 관점으로 말하고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본다. 너를 검증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속으로 ‘저는 받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저에게 은총을 베푼다고 해도 저는 받지 않겠습니다. 저는 충분해요, 하나님이 너무나 많은 은총을 베풀어 주셨어요. 저는 먹고 입는 이런 일을 중시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 얻기를 추구하는 것만 중시하겠습니다. 제가 얻지 말아야 할 것은 갖지 않고 사치를 누리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제게 베풀어 주신 은총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저는 얻을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당신에게서 얻은 진리는 당신이 저에게 값없이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미 당신이 값없이 베풀어 주신 진리를 얻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얻을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한다. 성령은 그 사람의 마음이 바른 것을 보면 더 많은 깨우침을 주어 더 많이 깨닫고, 더 힘이 나고, 진리를 더 밝히 알도록 한다. 소인배들은 그 옷을 보고는 ‘그래,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않으니 내가 먼저 두 벌을 가지자. 만약 다른 사람에게는 주고 내게는 주지 않는다면 한바탕 욕설을 퍼부을 거야. 또 트집 잡아 본때를 보여 줘야지, 그래서 다음에 다른 물품이 오면 나에게 주는지 두고 보겠어.’라고 한다. 성령은 네가 이런 놈이라는 것을 보게 되면 너를 드러내 가난에 허덕이게 할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반드시 징벌받을 것이다! 다른 사람은 축복을 받아 30위안(한화 약 5천 원)을 주고 좋은 신발을 한 켤레 살 수 있거나 아주 좋은 물건을 하나 살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은 300위안(한화 약 5만 원)을 주고도 좋은 물건을 사지 못한다. 산다고 해도 쓸모없어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성령이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면 생각지도 못한 때에 얻게 된다. 은총을 베풀지 않는다면 생각지 못한 때에 징벌받게 되는 일도 닥치는 것이다. 이런 일이 많지 않으냐?

일이 임할 때마다 먼저 무엇을 해야 하겠느냐? 먼저 기도해야 하는데 기도가 우선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네가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뜻한다. 네가 하나님께 찾고 구할 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놓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네 마음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으로 네 마음에서 보좌에 오르도록 하면, 너는 경건한 신도인 것이다. 나이가 많은 신도들은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무릎 꿇고 기도한다. 무릎을 꿇은 시간이 길면 일어서지 못하는데도 날마다 제시간에 맞추어 기도한다. 그것이 어떤 의식인지 아니면 그것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겠지만, 나이든 어떤 형제자매들은 아주 경건하다. 젊은 너희들보다 훨씬 낫고 훨씬 부지런하다. 일이 임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서둘러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마음을 쓰지 않고 입으로만 중얼중얼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아마 네가 이렇게 3~5차례 혹은 8~10차례 기도해도 아무런 수확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너는 낙담하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한다. 일이 임할 때 먼저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네가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었다는 것을 뜻한다. 일이 임하면 먼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알게 하고, 하나님이 결정하게 하고 너를 돕게 하며, 하나님이 너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방향을 가리켜 주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너는 하나님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고,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다. 네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면, 일이 임할 때 먼저 화를 내고 신경질을 부리며, 싫어하고 소극적이 된다. 이것이 바로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표현이다. 실제 생활 속에서 어떤 일이 임하든 다 기도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관건이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의 너의 태도를 의미하는데, 네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면 기도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저는 기도해도 하나님이 깨우쳐 주시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그것을 네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나님이 어떤 일에서 깨우쳐 주어 너에게 깨닫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에게 깨닫게 할 것이다. 너 스스로 깨달으라고 하면 너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너에게는 그런 깨닫는 능력이 없고 그런 사고력이 없다. 그것은 사람의 사유로 생각해 내지 못하는 것이다. 네가 깨닫는 것이 사유로 생각하는 일이겠느냐? 영이 역사하는 뜻과 하나님의 뜻은 성령이 너에게 깨우쳐 주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물어봐도 다 모른다. 오직 하나님 자신이 너에게 그것이 어떤 뜻이라는 것을 알려 줄 수 있는데, 그렇게 알려 주어야만 네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일이 임할 때 가장 먼저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찾고 구하는 태도로 구하고 모색하면서 자신의 생각, 관점, 태도를 분명하게 밝혀야 하는데, 이것은 기도에 마땅히 있어야 할 내용이다. 네가 그저 형식적으로만 한다면 효과가 있을 수 없는데, 그러면 성령이 너에게 깨우쳐 주지 않았다고 탓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이리저리 믿다가 그저 입에 발린 소리만 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입으로만 믿으면서 성령 역사도 부인하고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도 부인하고 기도도 부인하면서 그저 책만 보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리저리 믿다 보면 마음에 하나님도 없어지게 되고,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게 된다. 특히 너희들은 늘 사무 일로 바삐 보내는데, 아주 바빴지만 아무런 수확도 없다고 느낀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바른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른길을 가는 것은 버거운 일이냐? 아무리 쫓아가도 따라잡을 수 없고 더욱이 내리막길은 아주 빨리 간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많이 기도하며 찾고 구해야 한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고, 성령의 뜻을 찾고 구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데,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이런 것이 없다면 끝장이고 헛되이 믿는 것이 된다. 예수를 믿을 때에는 그나마 하나님의 영과 기도가 통하는지 통하지 않는지를 알았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내버렸다. 사람이 늘 심판받고 형벌받아 마비되고 흐리멍덩한데, 이것은 극단적이 된 것이 아니냐? 일이 임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며 찾고 구해야 한다. 이것이 실행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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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이지(理智): 옳고 그름이나 이해관계를 분별하고 자기 행위를 자제하는 능력.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④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⑤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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