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목차

제20편 도리를 아는 것은 영원히 진리를 깨닫는 것을 대신할 수 없다

전에 하나님은 사람에 대한 요구가 100%라면 사람에게 결과적으로 도달하는 효과는 0.1%라고 말씀하였는데, 그 0.1%는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본성을 인식한 것이다. 사람이 자신을 알게 될 때면 하나님의 사역도 끝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진작부터 제 자신을 알고 있어요.”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존재냐고 하면 그런 사람은 “저야 사람이죠.”라고 한다. 그러면 아직도 자신을 알지 못한 것이다. 반드시 자신을 사탄의 위치까지 몰아넣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는 “사탄이 생각을 준다”와 같은 많은 논조를 마땅히 배제해야 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그날 어떤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데, 사탄이 생각을 줬었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맞는 말이냐? 틀렸다! 왜 틀리느냐? 지금 악령이 들린 사람과 악령 역사가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거역하는 것이든 대적하는 것이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어떤 일이든 다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런 생각이 왜 계속 있는 게 아니고, 살짝 스쳐지나가는 걸까요? 그런 거면 사탄이 주는 게 아니겠어요?”라고 말한다. 어떻게 사탄이 주는 것이겠느냐? 사람이 곧 사탄이다. 사람 자체가 사탄이기 때문에 생각을 줄 필요가 없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고,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사람 안에는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사람은 “저는 그런 거 받아들이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네가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그런 것들은 항상 네 안에 존재하고 있다. “아, 나는 사탄이 생각을 주는 것을 피해야겠어. 성령이 역사하면 사탄은 생각을 주지 않아. 그러면 괜찮을 거야.”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견해는 성립되지 않는다. 사람은 주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진보하는 자세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자신을 알고 본성 알기를 추구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 주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진보하려는 그런 마음이 없다면, 내면의 속셈과 사상은 영원히 바뀌지 않는다. 네가 주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진보하지 않으면 소극적이 되어 기다리기만 하고, 소극적이 되어 일을 게을리 하게 되는데, 그것은 영원히 *저촉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인식하는 것이 없고, 그 방면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적극적으로 향상하지 않는다면, 너는 일을 해도 역시 대적하고 거역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그동안 사역을 하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많이 뛰어다니기도 하고, 고난도 좀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너는 그동안 다 부질없이 뛰어다니기만 하면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너는 거역한 것밖에 없는데, 살아 있는 적그리스도가 아니겠느냐?’라는 결론을 받게 된다. 너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꼭 그렇지는 않고 인식한 것도 좀 있다고 여기게 된다. 하지만 네가 겨우 인식한 것은 다 어떤 것이냐? 다 도리이다! 하나님 앞에 가져와서 보면 듣기 좋은 말과 형식적이고 얼버무리는 말로 너 자신을 포장한 것이고, 속의 것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는데, 그 속에는 뒤섞임과 기만이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지금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고 기만하는 수법이 더 높아졌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도리적인 기초나 이론적인 지식이 조금 있고, 겉면의 간단한 일들을 조금 알고, 도리에 대한 정의(定義)를 약간 파악하고는 더욱 자본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런 정형에 처해 있을수록 더 위험한 것이다. 사람은 진리를 깨달을수록 자신의 실제 정형에 대해 더 투철하게 파악할 수 있고, 또한 더 겸손하게 순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책망하거나 질책할 필요가 없다. 일정한 기간 사역을 하면서 도리를 어느 정도 알게 되면, 사람의 어떤 정형을 어떤 도리로 해결(원문: 答對)해야 할지, 어떤 일들을 도리로 훈계하고, 책망하고, 억누르고, 가로막고, 억지로 죄를 덮어씌워야 할지 알게 된다. 사람은 이런 사역을 잘할수록 더욱 교만해진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느냐? 사람이 바른길을 가거나 진리를 추구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치우친 길을 가고 있음을 증명한다. 네가 뛰어다니면서 사역하고 교회(원문: 底下)에서 교회 생활을 수호하고 있다지만 사실, 네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고, 진리에 어긋나는 것인데, 네 자신은 아직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새 신자가 하는 어떤 일들은 딱 보면 대적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말들은 모르면서도 함부로 말하고, 어떤 일들은 모르면서도 함부로 논단하며, 어떤 일들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함부로 말하는데, 그것은 현저하게 대적하는 것이다. 사람이 도리를 어느 정도 알게 되면, 감춰져 있는 대적과 기만, 감춰져 있는 진리에 어긋나는 것, 저촉하는 것, 배반하는 것들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 사람은 그런 것이 당연하고,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미안할 것이 없다고 여기면서 자만자족하게 되는데, 결국은 여전히 바울의 길을 가게 되고, 베드로의 길에는 근접하지도 못한다. 그렇지 않느냐?

너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얼마 동안 사역하면서 질책하는 사람도 없고, 예배도 드리지 않게 되면 교회(원문: 底下)에서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에휴, 인간이란 존재는 어찌할 수 없구나! 정말 내 자신의 본성을 제어하지 못하겠네. 내가 어떤 놈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때가 되면 일을 저지르게 돼……”라고 말한다. 보라! 사람은 말을 해도 얼마나 뻔뻔스러운가! “때가 되면 일을 저지르게 돼.”라고 하는데, 왜 일을 저지르겠느냐? 사람이 그 방면의 진리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다 의의가 있다는 것을 알아요. 일이 임했을 때 도리적으로는 다 알고 있지만 그 일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하겠어요.”라고 말한다. 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냐? 네게는 그것에 관한 진리가 전혀 없고, 너는 접촉해 본 적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전혀 없고, 또한 그것이 진리임을 알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기 때문에, 저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리만 안다고 해서 진리를 깨달았다고는 하지 못하며, 도리는 진리를 대신하지 못한다. 도리를 많이 알수록 오히려 더 심하게 대적하게 되는데, 마치 고무줄과 같아 아무리 잡아당겨도 끊어지지 않고 아무리 잡아당겨도 더 늘어나지도 않는다. 지금 교회(원문: 底下)에서 어떤 사람은 도리를 말하는 것이 너희보다도 더 능숙하다. 오래 믿은 사람이든, 새 신자이든 이것은 교회(원문: 底下)에서 존재하는 보편적인 정형이다. 새 신자라고 해도 너희가 말하는 그런 도리는 알고 있고, 대략적으로 말할 줄 안다. “소질이 낮아요.”, “인성이 안 좋아요.”, “성정이 나빠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 소극적이 되면 안 돼요.”, “하나님의 날이 가까웠는데, 아직도 소극적이라니요.”, “하나님께서 오셨는데도 소극적이 되다니요.”, “하나님께서 구원 사역을 하시기가 얼마나 힘드신데,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다니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한데도 추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인간이란 정말 진리를 사랑하지 않아요.” …… 입에 달고 있는 이런 간단한 말들은 입버릇처럼 되어 버렸는데, 이런 정형은 위험하지 않으냐? 내가 보기에 너희 각 사람은 다 아주 위험하다. 일단 다음 단계 사역이 시작되어 상대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너희는 다 넘어질 것이다. 너희가 어느 곳에서 어느 구역이나 매우 넓은 지역의 형제자매들을 이끌게 된다면, 산을 차지하여 왕 노릇 하는 산적이 될 것이다. 너희는 자기가 맡은 구역마다 자신의 방식이 있다. 겉으로 보면 같이 모여서 교통도 하고, 서로 문제점들을 참고하기도 하지만, 사실 자신의 구역에서 일을 할 때는 자기의 뜻에 따라 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가다보면 치우친 길로 가게 되는데, 이것은 필연적인 흐름이다. 왜냐하면 네가 추구하는 목표와 방향이 틀렸기 때문이다. 사람이 진리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고 따라간다면, 설령 내가 너에게 날마다 교통해 줘도 네가 날마다 도리만 기억하고, 날마다 도리를 마음에 새기면서 도리에서 뿌리내리고, 실제적인 면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진입도 하지 않는다면, 역시 헛수고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은 얼마나 되고, 남은 사람은 몇이나 되느냐? 예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은 몇이나 되느냐? 마지막에 하나하나 다 넘어지지 않았느냐? 깨달은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 흐리멍덩하다!

하나님의 초기 교통에 근거해 정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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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촉(抵觸): 대립하고 저항하는 심리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