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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좌담 기록

목차

제19편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의의

성육신 하나님은 사람을 대신해 고통을 받음으로 사람의 훗날의 아름다운 귀숙을 바꿔 온다. 예수가 한 그 단계 사역은 죄 있는 육신의 형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속죄제가 됨으로 전 인류를 속량한 것인데, 인류가 후에 아름다운 귀숙에 들어가도록 기초를 다졌을 뿐이다. 예수는 사람의 죄를 대신해 죄 있는 육신의 형상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고, 또한 모든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전 인류를 다 속량했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자신의 보혈로 인류를 속량했는데, 그의 보혈이 속죄제가 되었다. 즉, 사람의 죄가 없어져 맨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올 수 있는 증거가 되고, 사탄과 싸울 수 있는 조건이 있게 된 것이다. 이 단계에서 하나님은 사역을 끝마치고 옛 시대를 끝마칠 것이며, 살아남는 인류를 아름다운 귀숙으로 이끌어 들어갈 것이다. 하나님은 또 한 번 말씀이 육신 되어 사람을 정복하는 동시에 사람을 대신해 고통을 받음으로 맨 마지막에 사람의 고통을 면해 주는데, 이 증거로, 이 사실로 사람의 모든 고통을 면해 준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증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증거와 이 간증으로 사탄을 패배시키고 마귀를 부끄럽게 하여 인류의 아름다운 귀숙을 바꿔 온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육신의 사역은 이 육신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하시는 것이고, 영이 안에서 지배하여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맞느냐? 틀린다. 성육신 하나님이 정상 인성에서 정복 사역을 한다고 전에 말한 적이 있다. 너희가 보게 된 것은 정상 인성이지만 사실 하나님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인데, 이 육신이 하고 있는 것이자 하나님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고 이렇게 교통하면, 사람은 흔히 이 육신을 그저 도구나 껍데기로 여긴다. 하나님이 안에서 말씀하고 지배하면 이 육신은 사역하고, 지배하지 않으면 사역하지 않으며, 하나님이 육신을 지배해 무엇을 말하게 하면 그걸 말하고, 지배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런 것이냐? 아니다. 이번에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된 것은 한 방면으로는 정복 사역을 하고 시대를 끝마치는 것이며, 다른 한 방면으로는 육신으로 와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이자 하나님 자신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육신과 하나님 자신은 바로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가장 유력한 해석이다. 육신은 결코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도구나 껍데기가 아니고, 사람이 여기는 무엇의 지배를 받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 육신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화신(化身)이다. 사람이 전에 인식한 것이 매우 얕아 그렇게만 교통한다면 사람은 육신과 영을 갈라놓기 쉽다. 지금 사람은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와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지만 성육신이 받는 고난이나 질병은 결코 그가 받아야 할 것이 아님을 또한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인 이상 이런 고통은 불가피한 거야. 사람이 잔병에 걸리는 것처럼 그분도 그럴 수 있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분은 정상적이고 평범한 육신이니까! 그분은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니 사람이 고통받으면 그분도 받으실 것이고, 사람이 더워하면 그분도 더워하시고 날씨가 추워 사람이 추위에 떨면 그분도 마찬가지일 거야. 사람이 감기에 걸리면 그분도 걸리실 거야……’라고 여긴다. 네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육신이 평범하고 정상적이라는 것만 본 것이다. 이 정상 육신은 사람과 똑같고 별로 차이가 없지만 사실 그가 받는 고통은 다 의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정상적으로 병에 걸리거나 다른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패괴된 사람은 마땅히 이런 것들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정상 법칙이다. 그러면 성육신 하나님은 왜 이런 고통을 받겠느냐? 예수가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느냐? 예수는 의인이다. 그 당시의 율법에 따르면, 그 당시에 예수가 한 것에 따르면, 예수는 십자가에 박혀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는 왜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바로 전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였다. 이번의 성육신 하나님이 받은 이 모든 고통과 당한 이 모든 핍박은 다 우연히 발생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일부러 안배한 것이냐? 그것은 일부러 안배한 것도, 우연히 발생한 것도 아니라 정상 법칙에 따라 발전한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하겠느냐? 바로 하나님 자신이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 자유로이 이렇게 사역하고 또한 사역하는 기간에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일부러 한 가지 고통을 안배한다면 그 며칠만 고통받고 평소에는 괴롭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사역하는 것, 즉 그가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일부러 안배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무의식적으로 고통을 받는 것도 아니라, 와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람들 가운데 두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사람과 똑같은 고통을 받는데, 하나님은 그 어떤 일도 예외 없이 자신을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대한다. 너희가 핍박을 받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역시 핍박을 받고 있지 않느냐? 너희가 추적을 당하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역시 추적을 당하고 있지 않느냐? 사람이 질병의 시달림을 받고 있는데, 그는 경감되었느냐? 그도 예외가 아니다. 이 일을 깨닫기 쉬우냐?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큰 붉은 용 국가에 와서 사역하면 마땅히 이 고통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데, 그러면 또 잘못된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는 고통받아야 한다거나 말아야 한다는 논법이 없다. 하나님은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해 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이런 고통을 체험하는 동시에 사람을 대신해 이런 고통을 받아 후에 인류를 아름다운 귀숙으로 이끌어 들어가면 사탄이 철저히 탄복하게 된다. 하나님 자신이 보기에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은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그가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이 싫어 그저 사람의 고통에 대해 알아보려고만 한다면, 즉 몇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거나 사도나 성령께 쓰임받는 몇몇 사람으로 대신하게 한 후 너희가 모두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하나님께 보고하게 해도 된다. 또는 특별한 몇몇 사람으로 증거하게 할 수 있는데, 그들에게 인간 세상의 가장 고통스러운 일을 다 받게 하여 그들이 받을 수 있게 된다면, 이 증거를 하여 사탄도 철저히 탄복하게 하고 인류가 이후에 고통을 받지 않게 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 자신의 사역은 그 자신만이 한다. 사람의 증거가 아무리 높아도 사탄이 보기에는 드높지 않은 것이다. 사탄은 “당신이 말씀이 육신 되신 이상, 왜 체험해 보시지 않습니까? ……”라고 말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간증은 별로 힘이 없다. 하나님 자신의 사역은 반드시 그 자신이 해야 하는데, 그래야 매우 실제적이다. 하나님이 하는 이 단계 사역에서 또한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에는 다 의의가 있고 성육신이 받는 고통에도 다 의의가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된다. 성육신으로 와서 사역하고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있어도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필요한 것이다. 인류에게, 인류의 훗날의 귀숙에 너무나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을 얻기 위해, 사람에게 아름다운 귀숙을 주기 위해 하는 것이고 지불하는 것이다.

성육신이라는 이 방면의 진리는 마땅히 몇 가지 방면으로 말해야 한다.

1.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의 필요성.

2.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이 실제적으로 역사하는 그 일면.

3.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와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그 의의, 즉 그 필요성.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려고 할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까? 여기에는 또 한 방면의 의의가 있다. 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이 사역하면 사람을 정복할 수 있고 온전케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실질이나 생존 법칙대로라면 사람은 여전히 공허, 고통, 슬픔, 탄식 속에서 살고 있기에 질병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예컨대, 너희가 여전히 이렇게 정상적으로 생활하면서 온전케 되었다고 하자. 즉,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미 어느 지경에 이르렀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경력(역주: 체험)도 있고, 패괴 성정도 해결되어 내가 너는 이미 온전케 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니 이후에도 이렇게 생활하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러면 너는 이제 패괴 성정이 해결되었다고 느끼고, 이렇게 하나님 사랑하기를 경력하는 것은 매우 의의가 있다고 느끼며,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래도 좋다고 느끼고 하나님을 얻었다고 여길 것이다. 가령 사람의 문제를 이 정도까지만 해결하고는 하나님이 떠나 가고 성육신의 사역이 끝난다면, 사람의 질병과 인간 세상의 공허 그리고 사람 육체의 슬픔과 번뇌는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 그러면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이 마침표를 찍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사람이 온전케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자신의 슬픔과 질병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겠느냐? 진리가 있어도 해결하지 못한다. 아무도 “저는 진리가 있기에 몸에 병이 나도 괴롭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고통은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다. 너희는 그저 “저는 지금 사는 것이 매우 의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에게 병이 있어 여전히 매우 고통스러워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냐? 이 느낌이 실제적이지 않으냐?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이 그저 사람을 정복하고 온전케 하는 사역만 하고, 육신이 받는 고통은 해결하지 않고 그저 사람을 온전케 하기만 한다면, 사람이 땅에서 살면서 직면하게 되는 고통과 질병, 인간 세상의 비환이합, 사람 자신의 번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설령 네가 땅에서 천년, 만년 생존하여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해도 너의 그런 번뇌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사람의 생로병사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또 그릇되게 “하나님께서 해결하지 못하십니까?”라고 말한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이다. 하나님이 와서 이런 일들을 체험하는데, 체험한 후에는 철저히 해결한다. 근본적으로 해결하면 후에 인류에게는 생로병사와 같은 이런 일들이 없게 된다. 예수는 죽음을 체험했고, 하나님이 오늘날 말씀이 육신 되어서는 생(生)과 병(病)의 고통을 체험하고 있다(이후에 사람은 늙지 않기에 늙는 것은 체험할 필요가 없다). 이런 고통들을 다 체험하면 맨 마지막에 사람의 이런 고통들을 면해 준다. 사람을 대신해 모든 고통을 받은 후 하나님은 힘 있는 증거를 갖게 되어 마지막에 인류의 훗날의 아름다운 귀숙을 바꿔 오게 되는데, 바로 사람의 생로병사를 면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의의 있지 않느냐?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은 생(生)이나 병(病)이든 또는 고(苦)나 통(痛)이든 다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몇 가지 방면 중에서 어느 방면의 고통을 체험하든 그것은 다 인류를 대신해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은 하나의 상징이 되고 하나의 예표가 된다. 하나님이 그런 고통을 다 받고 그 자신이 다 감당하였으니 인류는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다. 그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은 온전케 된 후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고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할 수 있다. 그런 다음, 또 사람 자체의 번뇌와 고통을 다 해결하는데, 이것이 바로 성육신 하나님이 사람을 대신해 고통받는 의의이다. 그러면 사람은 땅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질병의 시달림이나 얽매임이 없고, 더 이상 인간의 생로병사나 윤회 같은 이런 일이 없다. 하나님이 이 단계에 말씀이 육신 되어 이런 고통을 받고 이런 고통을 체험함으로 이미 사람을 대신해 이런 고통을 다 감당하였다. 감당한 후에는 살아남은 사람에게 더 이상 이런 고통이 없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의 예표이다. 어떤 못된 놈들은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럼 당신이 혼자 대신하셨단 말입니까?” 성육신 하나님이 대신하면 충분하다. 그럼 또 몇 사람이 대신해야 한단 말이냐? 하나님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대표할 수 있다. 또한 모든 것을 상징할 수 있는데, 모든 아름답고 선한 것을 상징하고 모든 긍정적인 것을 상징할 수 있다. 게다가 그가 오늘날 매우 실제적으로 체험하였기에 보다 힘 있는 간증과 증거(證據)로 사람의 훗날의 모든 고통을 면해 줄 자격이 더욱 있게 된 것이다. 성육신의 두 단계 사역은 이렇게 하면 완벽해지고 하나로 연결된다. 왜 하나로 연결된다고 말하겠느냐? 바로 첫 번째 성육신에서 지금의 성육신에 이르기까지 두 단계에서 한 사역은 인류의 평생 고통과 사람의 고통을 다 해결했기 때문이다. 왜 반드시 말씀이 육신 되어 친히 이렇게 해야 하겠느냐? 사람 일생의 생로병사라는 이런 고통은 다 어디에서 온 것이냐? 왜 사람에게 이런 고통이 있게 되었느냐? 시초에 사람을 만들었을 때 사람에게 이런 고통이 있었느냐? 없었겠지? 그럼 이런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이냐? 사탄에게 유혹되어 사람의 육체가 타락된 후에 있게 된 것이다. 육체의 고통과 번뇌와 공허 그리고 인간 세상의 이런 처참한 일은 다 사탄이 패괴시킨 후 사람을 괴롭히면서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점점 타락되어 질병도, 고통도 점점 심해졌고, 갈수록 인간 세상의 공허함과 비참함, 인간 세상에서의 생존이 불가함을 느끼게 되었다. 사람은 인간 세상에 점점 희망이 없어진다고 여기는데, 이런 것은 다 사탄이 패괴시킨 후에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이런 고통은 사탄이 더한 것이고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되어 타락된 후에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탄의 손아귀에서 사람의 훗날의 아름다운 귀숙을 바꿔 오려면 반드시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이런 고통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사람에게 죄가 없더라도 현재 여전히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는데, 사탄이 아직도 사람을 통제하고 있어 그것이 여전히 사람이 그런 시달림과 고통을 받도록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육신 하나님이 친히 이런 고통을 체험함으로 사탄의 손아귀에서 사람을 바꿔 와 이후에는 더 이상 이런 고통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 의의가 매우 깊지 않으냐? 그 당시에 예수가 말씀이 육신 되어 율법을 폐하고 율법을 온전케 함으로 은혜시대를 가져와 인류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었다. 그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사람의 모든 죄를 사해 주었는데, 그는 자신의 보혈로 사람을 속량하여 사탄에게서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비록 사람은 사탄의 패괴를 거쳐 모두 죄가 있게 되었지만, 나의 보혈이 교환물이 되어 그 대가로 사람을 바꿔 왔다. 다시 말해, 보혈로,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증거로 사람을 속량해 왔는데, 사람을 속량해 와 사람의 죄를 사해 준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죄가 없겠느냐? 여전히 있다. 인류는 이미 사탄의 패괴를 거쳤기에 여전히 죄가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 번째로 또 말씀이 육신 된 것이다. 사람의 죄가 사함받은 것은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은 것이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사해 준 후, 이어서 두 번째로 말씀이 육신 되었다. 사람은 이미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다. 하나님이 두 번째로 성육신 된 것은 사람을 정복하기 위한 것인데, 사람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어도 여전히 어리둥절해한다. 여전히 하나님에 대해 어찌 된 일인지를 모르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느냐고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바로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과 대적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사역하니 나중에 사람은 모두 땅에 엎드러졌고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을 보았어도 하나님을 아느냐? 여전히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을 더 하여 사람에게 더 많은 진리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더 많이 알게 해야 하는데, 그러면 마지막에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인식이 있게 된다. 사람은 인식이 있게 되면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죽고, 기꺼이 하나님을 위해 산다. 그러나 사람에게 있는 그런 연약한 부분은 여전히 사탄이 통제하고 장악하고 있어 사람은 여전히 고통받게 된다. 악령도 사람에게 역사하여 방해하는데, 사람은 제 정신이 아니게 되고, 정신이 착란되며, 또 마음이 안정되지 못해 곳곳에서 방해받게 된다. 사람 안에는 아직도 생각과 혼의 것들이 얼마 있어 여전히 사탄의 통제와 지배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너에게 질병과 번뇌가 있고 목매어 죽으려고 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너는 또 어떤 때에는 인간 세상의 처량함을 느끼고 살맛이 없다고 느낀다. 다시 말해, 사람의 이런 고통은 여전히 사탄에게 장악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의 치명적인 부분이다. 이미 사탄에게 패괴되고 짓밟힌 것들은 사탄이 재차 이용할 수 있는데, 이것이 사탄에게 잡힌 약점이다. 이어서 그는 말씀이 육신 되어 두 번째 단계의 사역을 시작했고, 정복 사역을 하는 동시에 이미 사람을 대신해 고통을 받았다. 성육신 하나님이 고통받은 이 대가와 지불로 사람에게 있는 치명적인 부분을 다 끝내고 다 해결하는 것이다.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함으로 사람을 모두 바꿔 오게 되면, 사탄은 사람에게서 더 이상 약점을 잡지 못하고, 사람은 철저히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 이래야만 완전히 하나님께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고 참으로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어도 완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은 아니다. 왜 그렇겠느냐? 악령이 여전히 너의 약점을 노릴 수 있고, 여전히 너를 우롱하거나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너무나 우매하기 때문에 때로 성령의 감동과 악령의 방해를 분간하지 못하는데, 이것은 치명적인 것이 아니냐? 악령은 틈을 타 네 안에서 말하거나, 네 귓전에서 말할 수도 있으며,너의 마음과 생각을 교란시킴으로 성령의 감동을 눌러 없애 네가 느끼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런 후 악령은 너를 방해하여 마음이나 머리가 혼란스럽게 하며 혼비백산하게 한다. 악령은 이런 사역을 한다. 지금 하나님이 이렇게 하면 훗날 인류에게 아름다운 귀숙이 있게 될 때,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사탄에게 속하지 않고, 더 이상 사탄에게 잡힐 약점들이 없게 되며, 사람의 마음과 영ㆍ혼ㆍ체는 다 하나님께 속하게 된다. 지금 너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때에는 너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사탄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진리가 있게 되면 완전히 하나님께 순복할 수 있고, 완전히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악령 역사가 전혀 없을 수는 없고, 더욱이 질병이 전혀 없을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의 육체와 혼이 다 사탄에게 짓밟혔던 곳이기 때문이다. 혼은 더러운 곳에 속하고, 사탄이 거주했던 곳이자 또한 사탄이 이용했던 곳이기에 사탄이 여전히 가져갈 수 있고 여전히 지배할 수 있으며, 네 생각을 흐리게 하고 진리를 확실히 분간하지 못하게 한다. 성육신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고 사람을 대신해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필요한 것이다. 이 일을 알았겠지!

너희는 반드시 두 차례의 성육신으로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 완전하게 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첫 번째의 성육신만 있다면 사람을 완전히 구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으로는 사람의 죄 사함받는 문제만 해결되었을 뿐, 사람의 패괴 성정 문제는 해결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성육신으로 사람이 정복되기만 하여 사람의 패괴 성정이 해결되었다고 해도 아직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께 속하는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두 번째로 성육신한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해야만 사람이 사탄에게 패괴된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고통받고 시달림받는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것인데, 이번에는 철저히 해결한다. 두 차례 성육신의 사역 절차는 바로 이러한데,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너는 성육신 하나님이 받는 고통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그가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괴로워하며 때로는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이 연약해 그 모습이 애절한데, 너는 이런 것을 경시해서는 안 되고, 더욱이 이런 것에 대해 관념이 생겨서도 안 된다. 만약 이런 것에 대해 관념이 생긴다면 너무나 우매하고 너무나 패역하다. 더욱이 너는 이것이 정상적인 육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이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그러면 더욱 틀린 것이다. 만약 네가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사람은 성육신 하나님이 첫 번째나 두 번째에 받은 이런 고통은 다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 자신에게 매우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매우 필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극도로 패괴되었기에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사람을 완전히 구할 수 있다. 그가 사역하는 방식은 다 사람에게 직접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며, 그가 하는 일은 다 공개적이어서 그 어떤 사람도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보면 관념이 생길까 봐 몰래 참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새 신자든 오래된 신자든, 나이 든 자든 젊은이든, 진리를 깨달을 수 있든 없든, 그 어떤 사람도 회피하지 않는다. 이것은 증거이기 때문에 어떠한 사람이든 모두 그가 말씀이 육신 된 기간에 너무나 많은 고통을 받았고, 매우 확실하게 사람의 고통을 담당하였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몰래 며칠만 고통받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래도 아주 평안하거나 즐긴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가 사역하고 고난받음에 있어 그 어떤 사람도 회피하지 않는데, 네가 연약해질까 봐 걱정하지 않고 너에게 관념이 생길까 봐 걱정하지도 않으며 네가 믿지 않을까 봐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가 어떠한 사람도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설명하느냐? 성육신 하나님은 매우 바쁘기에 한가할 때가 없다. 네가 보기에 그가 지금 말씀을 하지 않고 음성을 발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역은 계속하고 있다! 한가하게 보내지 않는다! 입으로는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는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다! 사람은 느꼈느냐? 사람은 보고서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임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이 지금 무슨 사역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느냐? 너는 모른다. 너의 육안은 겉면만 볼 수 있을 뿐이지 내적 실질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성육신 하나님이 사역을 몇 년 했든지, 사람이 보기에 정식으로 한 사역이 몇 년이든지, 사실 하나님은 잠시도 한가히 보내지 않았다. 지금 비록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말씀하지 않을 때도 고통을 받고 있다. 말씀을 하지 않고, 음성을 발하지 않고, 대규모적인 사역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사역은 결코 멈춘 적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이 맞는지, 도대체 그리스도가 맞는지를 가늠할 때, 하나님이 말씀을 하는지를 보고 가늠한다. 만약 2~3년 동안 말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아니라고 여겨 즉시 떠나는데,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태도는 관망적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조금도 없다. 지금 어떤 사람은 아마 아직 관망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오랫동안 말씀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속으로 ‘영이 떠나신 걸까? 하나님의 영이 하늘로 가셨을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냐? 사람은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아마 이것일지도 모르고 저것일지도 모르며, 혹시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다고 하지 말라. 너의 그 ‘혹시’는 다 틀린 것이고, 다 그릇된 말이며, 다 마귀 사탄의 관점이다! 하나님의 사역은 한시도 멈춘 적이 없다. 하나님은 쉬지도 않고 늘 변함없이 사역하고 있으며, 언제나 인류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실질에 대한 인식은 각 방면에서 인식해야 한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실질을 인식해야 하겠느냐? 관건은 이 육신이 하는 사역을 인식해야 한다. 만약 네가 영이 그렇게 한 것일 뿐 육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육신은 그저 지배를 받은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왜 고통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전 인류를 정복하고,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하는 사역이라고 말하겠느냐?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영과 육신이 동시에 역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람이 상상하는 것처럼 육신이 말하지 않아 영이 기어이 그에게 말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이 아니라 매우 자유로운 것이다. 영과 육신이 하는 것은 똑같은 일이다. 육신이 보기에 괜찮은 일이면 영이 보기에도 그 일이 괜찮은 것이다. 어떻게 말하든 동시에 하는 것이다. 만약 육신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하면 또 틀린 것이다. 육신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여기에는 배경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기에 사람이 본 것은 다 육신이 하는 것이고, 말씀이 육신 된 기간에 육신이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어떻게 말하든 동시에 하는 것이다. 영이 보고 육신에게 말하라고 시키는데 육신이 참으면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는 육신이 말하려고 하는데 영이 할 말을 주지 않는다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그럴 리는 없다. 사람이 만약 그렇게 여긴다면 또 틀리고 그릇된 것이다. 영이 안에서 재촉하는데 육신이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단 말이냐? 그럴 수는 없다. 영과 육신은 하나이고, 영이 육신 안에 실제화된 것이다. 영이 말하려고 하는데, 어찌 육신이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혹은 육신이 말하려고 할 때, 영이 할 말을 주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런 논법은 없다. 하나님이 성육신 된 것은 바로 영이 육신에 실제화된 것이다. 그의 육신이 역사하면 언제 어디서나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이 사람에게 역사하다가 버리면 사람에게는 느낌이 있지만 성육신 하나님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다. 사람의 인식이 치우치고 그릇되어 하나님이 사역을 이 단계에까지 했기에 그에게는 할 말이 없고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가 없다고 여기는데, 이렇게 된 일이냐? 언제든지 말할 수 있는데, 영과 육신이 서로 어긋나는 일은 전혀 없다. 어떤 사역을 하거나 어느 방면의 진리를 말하든지…… 어느 방면에서 보든지, 다 영이 육신에 실제화된 것이고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이니 절대 육신과 영을 따로 논해서는 안 된다.

성육신이 하는 사역을 어떻게 알기 쉽게 교통할 수 있겠느냐? 너는 먼저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이 어떻게 고통받는지에 대해 말하지 말고 먼저 두 차례로 말씀이 육신 된 윤곽을 말해야 한다. 첫 번째는 십자가에 못 박혀 전 인류를 구속하고 사람의 죄를 담당하였으며, 두 번째는 두 가지 사역을 했는데, 하나는 사람의 패괴 성정을 해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훗날의 귀숙을 해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윤곽이 뚜렷해지는데, 그런 후에 각 방면을 말하면 된다. 만일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한다면 더 교통하면 된다. 교통하다 보면 환히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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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귀숙(歸宿): 사람이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 또는 결말, 처소, 본향을 뜻함.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비환이합(悲歡離合): 일반적으로 모이고, 이별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상황을 겪게 됨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