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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편 말씀이 육신 된 두 번째 방면의 의의

말씀으로 된 육신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단지 사역하기 위한 것이냐? 단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냐? 평소에 그가 평범하고 정상적인 것은 어떤 의의가 있느냐? 어떤 사람들은 말씀으로 된 육신이라면 반드시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이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겨우 이 정도의 의의뿐이겠느냐? 그리스도라면 반드시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이어야 한다는 것은 또 하나님을 규정해 놓은 것이 아니냐? 반드시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반드시’에는 어떤 의의가 있느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을 발표하기 위한 것이고, 사람이 접촉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냐? 이전에 사람은 다 그렇게 여겼다. 지금은 어떠냐? 그리스도의 실질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완전하고 완전한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이것이 그의 실질이다. 하지만 그가 하는 모든 것에는 다 의의가 있는데, 특정한 육신, 육신의 특정한 생김새, 특정한 가정, 특정한 생활 환경, 하나님이 하는 이런 일에는 다 의의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저는 왜 하나님께서 입으신 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에 어떤 큰 의의가 있는지 알아보지 못하나요? 육신은 그저 외형이 아닐까요? 일단 하나님께서 사역을 끝마치시면 이 외형은 필요 없지 않을까요?” 사람은 자신의 상상과 생각으로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의 외형은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여기는데, 하나님의 사역과 경영 계획에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단지 이 단계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긴다. 사람에 대해 말하면, 단지 사람과 접촉하기에 편리하고, 사람이 그의 말씀을 듣기에 편리하며,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단지 이런 것뿐인데, 이것이 사람이 이전에 깨달은 성육신의 의의이다. 사실 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은 역사하는 기간에, 말씀이 육신 된 기간에 자신이 해야 할 사역을 담당하는 것 외에 또 다른 한 가지 사역을 담당하였는데, 사람은 이 육신이 또 그 방면의 사역을 담당하고 있음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떤 방면의 사역일까? 바로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는 것 외에 와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예전에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전에 사람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셔서 늘 질병의 고통을 받고 계시는데, 왜 그런 고통을 받으실까?’라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하나님의 비미은장이죠.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런 고통을 받으시는 거예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흐리멍덩하게 해석한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만일 성육신 하나님이 그런 고통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 자신이 할 수 없을까? 할 수 있겠지?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은혜시대에 우리가 병이 날 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치료해 주셨는데, 성육신 하나님은 왜 늘 질병의 시달림을 받으시는 건가요? 왜 늘 병으로 앓으시나요? 몸이 왜 늘 불편하신가요?” 이 일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수수께끼였겠지? 비록 사람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이 고생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은혜시대에 우리가 병에 걸리면 기도로 나았어. 약을 아예 먹지도 않았지. 집에 약도 없었고 병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 기도하면 암도 나았잖아. 그런데 왜 성육신 하나님은 사람이 받은 은혜보다 못하실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수수께끼가 아니냐? 이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맺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이 일에 대해 그다지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고통을 받는다고 그렇게 해석할 뿐이다. 지금까지도 사람은 이 일을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 와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성육신 하나님의 직책이다.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데에는 어떤 목적이 있겠느냐? 이것은 또 문제이다. 하나님이 와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이 방면을 영은 절대 할 수 없다. 오직 성육신 하나님이 평범하고 정상적인 완전한 육신이 되고, 완전히 사람이 되어야만 인간 세상의 고통을 완전히 체험할 수 있다. 만약 영이 사역을 한다면 틀림없이 전혀 체험할 수 없다. 볼 수만 있고 이해할 수만 있을 뿐 체험할 수는 없다. 보고 이해하는 것과 체험하는 것이 같은 일일까? 별개의 일이다! 이전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한 적이 있다. “나는 인간 세상의 공허함을 알고 있고, 인류 생존의 어려움을 알고 있다. 인간 세상에서 다니며 인간 세상의 온갖 처참한 상태를 보고, 인간 세상의 삶의 어려움과 비참함과 공허함을 보았다.” 하지만 체험했는지는 또 별개의 일이다. 예를 들면, 네가 누구네 집이 가난해 살기 힘들다는 것을 보았다고 하자. 네가 어느 정도 보고 알고 있다고 해서 체험하였다고 할 수 있느냐? 너에게 그런 어려움과 고통, 그런 심정, 그런 느낌이 있느냐? 없다.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은 이렇게 서로 별개의 일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사역과 이 일은 반드시 말씀이 육신 되어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영은 이 방면을 절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육신의 다른 한 방면의 의의이다. 그는 와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고, 사람이 받는 고통을 체험한다. 어떤 고통들이냐? 인류가 생활해 나가는 어려움이라든가, 가정의 불행이라든가, 사람의 기만이라든가, 저버림이라든가, 핍박이라든가, 또 질병의 시달림이라든가, 자신이 겪고 있는 질병의 시달림이라든가, 이런 것이 바로 인간 세상의 고통이다. 질병의 시달림이라든가, 주위의 인ㆍ사ㆍ물(人ㆍ事ㆍ物)에서 받은 타격이라든가, 가정의 불행이라든가, 사람 사이의 저버림, 사람의 모독과 훼방과 대적, 사람의 패역, 사람의 모욕, 사람의 오해 등등, 이런 것은 성육신 하나님에게 있어서 다 타격이다. 사람이 이런 것을 겪는 것도 사람에게는 역시 타격이다. 어떤 위인이나 달인이든, 도량이 얼마나 넓은 사람이든 이런 고통과 이런 일은 사람에게 있어서 다 타격이 된다. 하나님이 겪은 인간 세상의 핍박이라든가, 머리 둘 곳이 없다든가, 편히 거할 곳이 없다든가, 지심인(知心人)이 없다든가 등등, 이런 것은 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외에 가정의 불행한 처지도 체험해 보았는데, 이런 것들이 반드시 극치에 이르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 체험해 보았다. 이전에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 되어 역사하시는데 이런 질병들을 다 없애 버리실 수는 없을까? 하나님이 순조롭게 역사하셔서 사람들이 그분을 거역하거나 대적하지 못하게 하시면 되잖아. 하나님이 이런 일들을 하실 수 없을까? 하나님이 사람을 징벌하시면 사람이 감히 대적하지 못할 거야. 혹은 병이 나지 않게 하시든지. 그건 사람이 병이 나면 기도하기만 해도 낫기 때문이지. 그런데 하나님은 왜 지금 병을 앓고 계실까?’ 바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다. 말씀으로 된 그의 육신에게도 이런 환난과 질병의 시달림, 인간 세상의 저버림을 면하게 해 주지 않았는데, 바로 순리에 따라 이 고난스러운 환경에서 성장하고 사역하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할 수 있다. 만약 이런 것이 다 없다면 그는 이런 고통을 체험할 수 없거나 또는 이런 질병이 임하지 않거나 정상적인 사람이 걸리는 병에 걸릴 수 없다… 그러면 고통이 줄어들 것이 아니냐? 다른 사람은 심하게 머리를 쓰면 머리가 아프지만, 그는 심하게 머리를 써도 아프지 않고 피곤하지도 않게 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예수, 그 단계에서는 40일 동안 먹고 마시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지만, 이 단계에서는 한 끼만 안 먹어도 배고픈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이 있네요. 겨우 이만한 일도 하실 수 없다니. 말씀하시는 걸 보면 하나님이 맞는데 이런 일은 왜 하실 수 없나요?”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말씀이 육신 된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한 것인데, 그렇게 하는 것에는 다 의의가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하나님께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당신께서 스스로 고통받으시는 것이 사람의 고통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고통받고 있잖습니까?” 하나님이 하는 일은 어떤 것도 다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 세상의 고통을 다 받은 후 인간 세상이 어찌 된 일인지 알면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육신 하나님이 해야 할 모든 사역을 철저히 끝마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많이 누려서 고생을 좀 하시고 싶어 그러시는 것일지도 몰라. 행복하셔서 어떤 것이 쓴맛인지 몰라 그 쓴맛을 보려고 하시는 거야…’라고 여기는데, 이것은 다 사람의 상상이다. 지금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오직 말씀이 육신 된 기간에만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성육신 하나님의 사역이 철저히 다 끝나고 다음 단계의 사역이 시작되면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이런 일은 없게 된다. 그러면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사람들이 알고 있느냐? 이전에 사람에게 이후에는 눈물도, 슬픔도, 고통도 없고 인간 세상의 질병도 없다고 예언한 적이 있다. 지금 하나님이 말씀이 육신 되어 이런 고통을 체험하고 있는데, 다 체험한 후에는 인류에게 아름다운 처소를 가져다주게 되고, 이전의 고통은 다 없어질 것이다. 왜 없어지겠느냐? 그것은 성육신 하나님 자신이 이미 그런 고통을 체험하여 인류에게 그런 고통을 다 면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인류에게 더 좋고, 더 아름답고, 더 완벽한 훗날의 처소를 예비해 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말씀이 육신 된 가장 중요한 한 방면이자 말씀이 육신 된 한 방면의 사역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하나님이 성육신하여 이런 고통을 체험하였기에 이후에 인류에게 이런 고통을 면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말씀이 육신 되지 않고, 이런 고통을 체험하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면하게 해 줄 수 있지 않으냐? 면하게 해 줄 수 있느냐? 면하게 해 줄 수도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힐 때는 예수가 죄인의 형상이 되었다. 그는 의인이면서 죄 있는 육신의 형상으로 속죄제가 되어 온 인류를 사탄의 손아귀에서 속량해 왔다. 이것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목적과 의의인데, 인류를 구속한 것이다. 보혈로 인류를 구속하여 인류는 그로부터 더 이상 죄가 없게 되었다. 지금 하나님이 이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인류를 대신해 이 고통들을 다 체험하는 것이다. 이런 고통을 다 받으면 인류는 이후에 더 이상 이런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다. 너는 이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하는 각 단계 사역은 다 사탄과 싸우고 있는 것이고, 어느 단계 사역이든 다 사탄과 싸우는 것에 관련된다. 앞 단계 사역에서 만약 한 마디 말로만 인류의 죄를 면해 주고 사람을 구속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 사실이 없고 증거를 내놓지 않고도 하나님은 한 마디 말씀을 하여 인류에게 죄가 없게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탄이 불복할 것이다. 사탄은 “인류는 당신이 만들었으면서 당신은 아직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고,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 말씀만 하여 인류의 죄가 없어지게 하는 것은 안 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은 구원받을 사람을 다 아름다운 처소로 이끌어 들어가고 다음 시대로 인도하는데, 그러면 인류는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고 더 이상 질병의 시달림이 없게 된다. 그럼 사람은 무엇을 근거로 질병의 시달림에서 벗어나고, 무엇을 근거로 인간 세상의 고통을 받지 않게 되겠느냐? 사람이 되었으면 마땅히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번의 성육신 하나님이 또 가장 의의 있는 일을 하나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인류를 대신해 모든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 체험이 바로 인류를 대신해 받는 이런 고통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대신해 그런 고통을 받으시는데, 우리는 왜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나요?”라고 말한다. 너희가 지금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지 않느냐? 너희는 아직 완전히 온전케 되지는 못했고, 아직 이후의 시대에 완전히 진입하지는 못했으며, 아직도 패괴 성정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하나님의 사역은 아직 최고봉에 이르지 않아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고통받고 원망해서는 안 된다. 성육신 하나님도 고통받고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랴? 이 일에 중대한 의의가 있지 않으냐? 성육신 하나님이 와서는 몇 가지 사역만 하고 떠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식이 너무 얕아 말씀이 육신 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사역을 하기 위한 것이고, 이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발표하고 하나님을 대신해 역사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또 이 육신은 단지 육체일 뿐이라고 여기는데, 이것은 더욱 큰 착오이고 그야말로 성육신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이 사역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왔다는 것이고, 말씀이 육신 되어 이런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으로 와서 이런 고통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의 육신의 외형이 와서 체험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은 안에서 고통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 맞겠느냐? 하나님이 고통을 받지 않겠느냐? 마찬가지로 고통을 받는다. 왜 어떤 때에 ‘너무나 괴롭구나. 이런 고통을 받지 않을 수 없을까?’라는 이런 바람이 하나님에게 있었겠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에게 이런 바람이 있었던 것은 바로 육신이 고통받는 동시에 내면도 고통받았기 때문이다. 만일 육신의 외형만 고통받고 신성은 조금도 괴롭지 않고 시달림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틀렸다. 네가 이렇게 인식한다면 하나님 실질의 일면을 보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왜 하나님이 지금 육신에 실제화되었다고 하겠느냐? 그는 언제든지 갔다가 언제든지 올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이 되어 이런 고통을 받는데, 이것은 아주 진실하고 아주 실제적이다. 그래서 사람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받는 고통을 스스로 느낄 수 있고 친히 체험하는 것이다. 어떤 방면에서 고통과 시달림을 받을 때 육신만 느낌이 있고 영이 느낌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의 육신과 영은 똑같이 느끼고 똑같이 고통받는다. 이 말이 잘 이해되느냐? 이해하기 쉽지는 않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보여지는 것은 어쨌든 육신이고, 육신이 고통받는 동시에 영도 고통받고 있음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사람이 고통받을 때 그의 영혼도 고통받는 것임을 믿느냐? 왜 심령의 깊은 곳이 어떠어떠하다고 말하겠느냐? 그것은 사람과 영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영과 육신은 다 하나이고, 다 똑같이 고통받고 똑같이 기쁨을 누린다. 정말 괴로울 때, 그저 마음속으로만 괴로워하고 육체가 괴로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마음속이 매우 괴로울 때 겉면의 육체가 전혀 괴롭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하나도 없다. 마음에 느낌이 있는 일, 마음이 고통받는 일, 느낄 수 있는 일에서 육체도 마찬가지로 느낄 수 있다. 정상적이고 평범한 이 육신의 그리스도가 와서 하는 사역, 즉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사람의 모든 고통을 담당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고통을 받으면 다음 단계 사역에서는 더 이상 똑같은 사역을 할 필요 없이 인류를 아름다운 처소로 이끌어 들어갈 수 있다. 그가 사람을 대신해 이런 고통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을 아름다운 처소로 이끌어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계획이다. 터무니없는 사람들은 또 말한다. “하나님께서 체험하셨다는데 저는 왜 많은 고통을 받으시는 걸 못 봤죠? 전면적으로 받지 못하셨네요. 어떤 고통이든지 다 받으셔야죠. 최소한 십자가의 고통은 받으셔야죠.” 그것은 이전에 다 받았으니 지금은 받을 필요 없다. 게다가 사람은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성육신 하나님이 수년간 받은 고통이 아직 적단 말이냐! 못된 놈이나 그렇게 생각하기 일쑤다. 인간 세상의 그런 고통은 거의 다 성육신 하나님에게 임하게 되는 고통의 범위에 속한다. 아주 큰 고통에 관해 말하자면, 천 명 중 한 명이 받을 수 있는 그런 고통은 받을 필요가 없는데, 이런 고통으로 다 대신했다. 하나님이 질병이나 고난의 시달림 등등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은 결코 정상 사람과 다른 데가 없고, 사람과 구분되지 않았고 떨어지지(원문: 隔離) 않았으며, 사람과 똑같이 고통받는 것임을 증명한다.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그도 따라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냐? 사람이 병에 걸릴 수 있다면 그도 병에 걸릴 수 있다. 그는 이런 고통을 다 체험하였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육신과 사람의 육체를 분리하지 않고 사람과 똑같이 고통을 받는 것이다. 이번에 성육신 하나님이 받는 고통은 결코 앞 단계처럼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체험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 없다. 죽음은 이미 체험했으니 그저 고통을 체험하여 사람의 고통을 담당할 뿐이다.

예전에 여호와가 영의 방식으로 역사해도 사람은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성육신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어 영의 역사보다 더 편리하고, 영의 역사보다 좀 더 가깝게 느껴지는데, 이것이 한 방면이다. 다른 한 방면은 성육신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방면인데, 이 방면은 영의 역사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말씀이 육신 되어야만 도달할 수 있고, 영은 도달할 수 없다. 영이 와서 역사할 때, 말씀을 다 하고 떠난다면 사람과 접촉한다고 해도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지 못한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말씀으로 된 육신이 고통을 받으시면 영도 따라서 고통을 받지 않나요? 그러면 영도 체험하실 수 없나요?” 이것은 또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냐? 그의 이 고통은 영이 육신을 입어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니 그가 반드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없다. 성육신 하나님은 어떤 때에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으나 영은 본 후에 그저 혐오하거나 기뻐할 뿐이다. 이런 간단한 느낌만 있다. 하지만 육신의 느낌은 많은데, 좀 더 미세하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이것은 영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물질세계의 일들에서 어떤 일은 영이 대신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 된 가장 전면적인 의의이다.

그리스도는 인간 세상의 이런 천륜지락(天倫之樂)과는 상관도 없고 몫도 없다고 이전에 말한 적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맛있는 것도 드시고 어디에 가시든지 모두 잘 대접하며, 어떤 사람들은 또 그리스도께 좋은 물건도 사서 드리고 어디에 가시든지 사람들이 다 높이 보잖아요… 그분께서 별로 고통받지도 않으시는데, 왜 상관도 없고 몫도 없다고 할 수 있나요? 누리시는 것이 비록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중급 정도는 되겠죠. 그러면 상관도 없는 건 아닌데요!”라고 말하였다. 상관도 없다는 것은 결코 이런 것을 누리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으로도 고통이 조금도 감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관도 없고 몫도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네가 병을 앓는다고 하자. 그때 너에게 좋은 옷을 한 벌 주면 그 옷으로 인해 질병의 고통이 경감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다. 질병은 조금도 경감되지 않는데, 이것이 바로 상관도 없고 몫도 없다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이 네가 아무리 잘 먹어도 고통받아야 할 것은 여전히 고통받게 된다. 질병이라든가 주위 환경의 억압이라든가 하는 이런 고통은 결코 육체적인 누림으로 인해 경감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런 것을 누림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관도 없고 몫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천륜지락과 상관도 없고 몫도 없고, 또한 어쨌든 고통을 받으시는 이상 우리가 하나님을 소홀히 대접해도 괜찮다’라고 여기는 이런 못된 놈이 있을까? 이런 터득법은 너무나 터무니없다. 사람은 마음을 다해야 하고 자신의 본분도 잘해야 한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이전에 행복만 누려서 오늘날 고통을 체험하러 온 것이라고 이렇게 터득한다. 그렇게 단순하냐? 너는 하나님이 왜 인간 세상에 와서 고통을 체험하려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하는 하나하나의 일에는 상당히 깊은 의의가 있는데,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과 같다. 왜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는지, 그것은 전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 이번에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것도 상당히 의의 있는데, 그것은 인류의 훗날의 아름다운 처소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다 가장 현실적이다. 왜 사람이 지금은 죄가 없고 운이 좋게 하나님 앞에 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느냐? 바로 예수가 사람의 죄를 담당하고 보혈로 사람을 속량하는 사역을 했기 때문이다. 왜 인류에게 이후에 고통이 조금도 없을까? 왜 슬픔도, 눈물도, 탄식도 없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번에 성육신하여 그런 고통을 다 담당하였고, 사람을 대신해 그 고통을 다 받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머니가 병에 걸린 자식을 위해 자신의 수명이 단축될지언정 자식의 질병을 대신하게 해 달라고 하늘에 기도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도 이와 같은데, 그의 고통으로 훗날의 인류의 아름다운 처소를 바꿔 오는 것이다. 훗날에 인류에게는 슬픔도, 눈물도, 탄식도, 고통도 없게 된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 이 대가로, 이 지불로 인류의 훗날의 아름다운 처소를 바꿔 오는데, ‘바꾼다’는 것은 하나님께 권력과 능력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실제적이고 힘 있는 증거를 찾아내어 사람에게 심복구복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은 이미 이런 고통을 체험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인류를 아름다운 처소로 이끌어 들어가고, 인류에게 아름다운 처소와 아름다운 약속을 줄 자격과 능력이 있고 더욱이 권한도 있다는 것이다. 사탄도 철저히 탄복하게 되고, 전 우주 위아래의 피조물도 다 심복구복하게 되며, 나중에는 모두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이 한 모든 것은 다 매우 실제적이고, 텅 빈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체험한 것이다. 자신이 고통을 체험하는 대가로 인류의 처소를 바꾸어 오는데, 이것이 실제적인 사역이 아니냐? 부모가 자녀를 위해 진실한 대가를 치르는 것은 부모의 진심임을 뜻한다. 이것은 대가이다. 성육신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도 당연히 인류에게 가장 진실하고 가장 신실한 것이다. 하나님의 실질은 신실한 것이어서 말한 대로 하고, 하는 대로 이룬다. 그는 신실한 분이다. 그가 사람에게 한 모든 것은 다 진실한 것이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실제적으로 대가를 치르고, 사람의 고통을 감당하고 사람을 대신해 고통을 받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실제적으로 체험한다. 사람들 가운데 와서 생활하면서 이런 고통을 감수하고 이런 고통을 직접 눈으로 본 후, 전 우주 위아래의 모든 만물로 하나님이 한 것이 다 맞고, 다 공의롭고, 다 현실적이라고 말하게 하는데, 이것이 유력한 증거이다. 그 밖에, 훗날 아름다운 처소가 있게 하는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이 하신 것이 사람에 대해 확실히 사랑임을 찬미할 것이다. 그가 인간 세상에 온 것은 아무렇게나 한번 와서 좀 역사하고 말씀한 후 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 세상에 와서 사람이 되고 정상 사람으로 낮추어 인간 세상의 고통을 체험하는데, 이런 고통을 다 체험한 후에야 떠나게 된다. 하나님이 하는 사역은 이렇게 현실적이고 실제적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모두 이것으로 하나님을 찬미하여 사람들에게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을 보게 하고, 하나님의 선한 면을 보게 해야 한다. 말씀이 육신 된 이 방면의 의의에서 하나님의 아름답고 선한 실질을 볼 수 있다. 그는 어떤 일을 하든 다 진실하게 하고, 말을 해도 다 진실하고 신실하게 한다. 그가 하려는 일은 실제적으로 다 하고, 대가를 치러야 하면 실제적으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하나님이고, 신실한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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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비미은장(卑微隱藏): 낮추고 드러내지 않다.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④심복구복(心服口服): 마음으로도 감복하고 말로도 탄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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