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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편 사람의 표현에 따라 결말을 정한다는 말씀에 내포된 뜻

1. 하나님이 본성의 유로만 본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제는 사람의 표현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 하지만 그 표현은 도대체 어떤 표현을 말할까? 너는 알고 있느냐? 너희가 생각하는 표현은 무엇을 할 때 유로(역주: 흘러나옴)되는 패괴 성정이겠지만, 사실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 표현은 네가 진리를 실행할 수 있는지, 본분에서 충성할 수 있는지를 가리키고 또한 네가 하나님을 믿는 관점,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 고난받으려는 심지, 심판과 훈계를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네가 변화되는 정도와 너에게 엄중한 과오가 얼마나 있는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종합하면 그것이 바로 너의 표현인 것이다. 이런 표현은 네가 최대치로 얼마나 많은 패괴 성정을 유로했는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으면서 너에게 얼마나 많은 성과가 있는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일 사람 본성의 유로에 따라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공의이겠느냐? 네가 인솔자라면 너의 본성이 좀 많이 유로될 것이다. ‘많이 유로하는 사람일수록 틀림없이 살아남을 수 없는 대상이다.’라는 것으로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면 위에서 사역하는 사람일수록 더 빨리 끝장날 것이고, 위에 있는 사람일수록 최대치로 유로할 것인데, 그러면 누가 또 감히 본분을 할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사람은 본분을 하지 않아도 다 구원받지 않겠느냐?

이 표현은 네가 하나님께 충성이 있는지, 사랑이 있는지, 진리를 실행했는지, 어느 정도로 변화되었는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표현에 근거해 사람의 죄를 정하는 것이지 얼마나 많은 패괴 성정을 유로했는지에 근거해 하는 것이 아니다. 네가 혹시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뜻을 그릇되게 이해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다 똑같다. 단지 인성이 좋고 나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네가 아무것도 유로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실 너의 본성 역시 유로한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다. 사람의 깊은 곳까지 가장 잘 아는 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너는 감출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는 분이다. 네가 위에서 사역하면서 적지 않은 패괴를 유로한 것을 하나님은 보았다. 그럼 네가 사역하지 않고 유로하지도 않았다면 하나님이 너에게 그런 패괴가 있는 것을 모르실까? 그것은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는 것이 아니냐? 사실, 네가 어디에 있든 하나님은 너의 본성을 손금 보듯 환히 알고 있다. 하나님이 사역을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상, 사역을 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도 손금 보듯 환히 알고 있지 않겠느냐? 어떤 사람은 위에서 인솔자가 되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많은 패괴를 유로할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께 보여지기 때문에 위에서 인솔자가 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사역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많이 유로했겠느냐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얼마나 황당한 것이냐! 하나님이 보지 못했으면 정죄하지 못하겠느냐? 그렇게 말하면 사역하지 않는 사람은 다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이냐? 사람의 이해대로라면, 하나님은 사역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변화가 있든지 그런 것을 보지 않고, 오로지 그 사람의 패괴 유로에 따라 정죄할 것이기에 설령 변화가 없다 할지라도 별로 유로하지 않은 사람은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네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공의이냐? 하나님이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을 공의롭다고 할 사람이 또 있겠느냐? 이것은 네가 그릇되게 이해하여 하나님을 오해한 것이 아니냐? 그럼 하나님에 대한 너의 믿음은 거짓이 아니냐? 그러면 네가 하나님께 공의가 전혀 없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냐? 그런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니냐? 너에게서 유로되는 부정적인 것이 별로 심각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네게 긍정적인 것이 없다면 너는 구원받지 못한다.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은 주로 사람의 긍정적인 표현에 근거해 하는 것이지만 부정적인 것이 너무 심해도 안 된다. 만일 격살하거나 징벌할 정도로 심하다면 끝이다. 너희의 상상대로 보면, 아래에서 따르는 사람들은 결국 다 얻게 되고 인솔하는 사람들은 다 끝장나는 것이다. 본분이 주어졌으니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유로한다. 패괴 유로만 하게 되니 그야말로 단두대에 오른 느낌이다. 만일 사람의 본성을 근거로 사람의 결말을 정한다면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말 그렇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어디에 있겠느냐? 공의를 보지 못한다. 너희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였다.

2. 그 표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한 효과이다

비유를 하나 들어 보자, 과수원이 있다. 주인은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열매 수확하기를 기다린다. 열매를 맺는 나무는 좋은 나무이니 남겨 두고,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좋은 나무가 아니므로 남겨 두지 않는다. 여기에 상황이 하나 있는데, 나무에 열매가 정말 맺히긴 했지만 조금 병들었다. 그래서 좋지 않은 가지는 반드시 잘라 버려야 한다. 이 나무는 남겨둘 수 있을까? 남겨둘 수 있다. 전지를 좀 하고, 좀 다듬고 치료하면 된다. 또 다른 상황은, 어떤 나무는 아무 문제도 없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다. 그런 나무는 남겨둘 수 없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바로 하나님의 역사로 효과가 있게 된 그 일면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하는 기간에 사람에게서 본성이 유로되는 것은 피하기 어렵다. 사람은 사탄에게 패괴되어 과오가 좀 있게 되는 것은 피하기 어렵지만,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여 생기는 효과도 어느 정도 있게 된다. 만약 하나님이 효과라는 이 면을 보지 않고 사람의 본성이 유로되는 그 면만 본다면,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사람을 구원하는 효과는 주로 사람이 본분을 하고 진리를 실행하는 방면에서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거둔 이 방면의 성과가 얼마나 되는지를 보고, 또 과오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도 보아 이 두 방면을 종합하여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데, 사람을 남겨두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들은 심하게 패괴되어 전에는 전혀 하나님의 집을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지도 않으면서 전적으로 육체를 위해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본분하는 것을 보면 힘이 있고 하나님께 일편단심이다. 이 방면에서 보면 변화가 보이지 않느냐? 이것도 변화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변화이다. 또 어떤 사람들을 보면 예전에는 관념이 좀 생기면 퍼뜨리기 좋아했는데, 지금은 관념이 좀 생기면 진리를 찾고 구하며 순복하고, 퍼뜨리지도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 이러면 변화가 있지 않으냐? 있다! 이전에 어떤 사람은 누가 책망하고 훈계하면 그 자리에서 반항했었는데, 지금은 아무리 책망하고 훈계해도 자신을 인식한다. 또 받아들인 후에 정말로 어느 정도 변화가 있다. 이것은 효과가 아니냐? 효과이다! 하지만 너에게 아무리 변화가 있다고 해도 너의 본성이 단번에 다 변화될 리는 없으니 과오를 조금도 유로하지 않을 리도 없다. 그러나 사람의 진입이 규칙적이 된다면, 설사 패역이 어느 정도 있을지라도 그 당시에 의식할 수 있다. 그렇게 의식하고 재빨리 돌이키게 되면, 정형이 갈수록 좋아질 수밖에 없으므로 패역이 한두 번은 있을 수 있지만 재삼재사는 없게 된다. 이것이 변화이다. 그 사람이 어느 방면에서 변화되었다고 하여 과오가 조금도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 변화는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후에 실행해 낼 수 있는 진리가 상대적으로 많아지고, 하나님이 요구한 것을 부분적으로 실행해 낼 수 있게 되고, 과오가 갈수록 적어지고, 패역의 정도가 점점 약해지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효과가 생겼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사람에게서 효과가 있게 된 이 방면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것이나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공의롭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것이다. 너는 그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주저 말고 담대하게 네가 행해야 할 진리를 실행하기만 하여라. 아무 염려도 하지 말라. 하나님은 너를 부당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모두 생각해 보아라.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징벌받을 수 있겠느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공의 성품을 늘 의심하면서 진리를 실행해도 징벌을 받을까 봐 두려워하고, 자신이 충성해도 하나님이 보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책망과 훈계를 받은 후에 소극적이 되어 본분을 해도 힘이 나지 않고 충성심도 없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어찌 된 일일까? 한 방면은 사람이 자신이 일 처리하는 방식의 실질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여 책망과 훈계에 불복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 방면은 사람이 지금까지도 책망과 훈계의 의의를 깨닫지 못하여 모두 책망과 훈계를 사람의 결말을 정하는 표현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 하나님에 대해 충성심이 조금이라도 있기만 하면 책망과 훈계가 따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훈계가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한다. 그런 오해로 많은 사람들은 주저하며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사람이 너무 궤사하여 고통은 전혀 받지 않고 수월하게 복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공의를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공의로운 일을 한 적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공의로운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 사람이 지금까지 하나님이 한 일이 공의로운 일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한 일이 사람의 뜻에 부합되지 않고, 하나님이 한 일이 인지상정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을 공의롭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사람은 지금까지도 자신이 행한 것이 합당하지 않고,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사람이 행한 것이 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의 과오를 전혀 책망, 훈계하지 않고, 사람의 잘못을 꾸짖지도 않으며, 부드럽고 온화하게 건드리지 않고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며, 사람의 상처를 들추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먹고 함께 누리게 해 주기까지 한다면, 사람은 다 하나님을 공의롭지 않다고 원망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식적으로 하나님을 아주 공의롭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항상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사람의 변화된 모습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대로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안심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사람을 조금이라도 꾸짖으면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변화된 모습을 보려고 한다는 것을 믿지 않고, 하나님이 공의롭다는 것을 믿지 않으며, 변화되려는 마음이 사라진다. 만약 이런 정형이 지속된다면, 너희는 모두 자신의 관념에 미혹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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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표현(表現): 말로 나타내는 것 외에 행위, 태도, 품행 등도 포함됨.

②패괴(敗壞): 타락, 부패, 망가짐을 포함해 더 깊은 뜻이 있음.

③본분(本分): 피조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 기능, 직책을 말함.

④정형(情形): 관점, 상태, 생각, 입장,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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